세상사는 이야기-15달력을 보니 오늘이 대한(大寒)이었다. 대한이 소한(小寒)네 집에 놀러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도 있지만, 절기상으로는 일년 중 제일 춥다는 날이 오늘이다. 캘리포니아에 살다 보니 이젠 겨울철 추위가 어떤 것인지를 아예 잊고 산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추워 봐야 영상 5도 아래로 떨어지는 법이 거의 없으니 요즘 한국의 날씨가 영하 10도네, 15도네 하는 소리를 들으면 대체 얼마나 추운 날씨인지 영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 하지만 내 기억 속, 어릴 적 한국의 겨울은 무척 추웠었다. 옷이나 두텁게 입었을까, 항상 곱은 손을 호호 불며 얼어서 터지고 갈라진 손등에 바른 그리셀린을 혓바닥으로 핥아 먹으며 학교에 다니던 기억(이거 기억하시는 분 있을까? 그리셀린은 맛이 달콤하다), 발가락에 얼음이 박히도록 밖에서 눈에 푹푹 빠지며 놀았던 기억, 언 몸을 짚불에 녹이다가 신발을 홀랑 태워먹던 기억, 녹았다가 얼은 눈덩이를 눈 언저리에 맞아 결국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정신없이 눈싸움을 하던 기억들... 이제는 정말 추억 저 뒤편에서 마치 오래된 16mm 흑백 필름처럼 뽀시시한 영상들로만 남아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어렸을 적, 마을에는 공동화장실이 있었다(변소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물론 집집마다 변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공동변소는 밖에서 뛰놀던 아이들과 온 동네 사람들의 급한 일을 집까지 달려가지 않고 해결할 수 있게 해 주던 고마운 장소였다. 또 지나가던 행인들도 여기서 볼일을 해결하곤 했다. 번데기 장수 아저씨가 리어카를 세워 놓고 변소에 들어가면 몰래 다가가 솥을 열고 번데기를 한웅큼 집어 먹는다. 그러면 번데기장수 아저씨는 채 바지춤을 올리지도 못한채 "이놈들!" 하면서 뛰어 나온다. 그 모습이 재미 있어서 우리는 번데기장수 아저씨가 변소에만 들어가면 같은 장난을 치곤 했다. 물론 붙잡혀서 얻어 터지는 일도 허다했다. 모든 것이 온통 얼어 붙은 겨울철이면 이 변소도 예외없이 꽁꽁 얼어 붙었다. 여름철에야 일주일이면 꽉 차 버리는 변소를 퍼서 구덩이에 붓고 며칠을 썩혔다가 무밭이며, 배추밭에 거름으로 줄 수가 있었지만, 겨울철에 꽝꽝 얼어 버린 변소를 퍼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변소 사용을 중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겨울에 이 변소에서 일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곤욕이었다. 그럴 것이 사람들이 누어 놓은 똥이 점점 쌓여서 얼고, 그 위에 또 쌓여서 얼어 붙고 하여 나중에는 궁둥이를 찌를 정도로 높게 올라온다. 우리는 그것을 "똥탑"이라고 불렀다. 똥탑이 너무 높게 올라와서 궁둥이에 닿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조금 비켜서 (앞으로 가던지 아니면 뒤로 물러나서) 볼일을 본다. 그래서 심할 때는 삐죽한 똥탑이 한 개도 아니고 서너 개나 불쑥불쑥 솟아 있기도 했다. 도저히 정상적인 자세로 볼일을 볼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이장님은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서 곶감이나 수수엿 같은 것을 주고 똥탑을 무너뜨리는 일을 시켰다. 똥탑을 무너뜨리는 일은 만만치 않은 고역이었으나 아이들은 달콤한 수수엿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큰 망치와 정, 작대기 등을 들고 공동변소로 갔다. 똥탑의 위력은 대단했다. 꽝꽝 얼어 붙어서 그 단단하기가 마치 콘크리트와도 같았다. 먼저 제일 높게 올라온 적당한 부분에 한 놈이 정을 대고 있으면 힘센 녀석이 망치를 휘둘러 정을 가격한다. 그러면 똥탑의 윗부분은 마치 채석장의 돌이 깨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우당탕~"하고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이 때 망치를 잡는 것은 힘이 센 녀석이, 정을 잡는 일은 키도 작고 싸움도 못하는 녀석의 차지가 된다. 왜냐하면 망치를 잘못 휘둘러 정 대신 손을 맞하는 일도 있었지만 똥탑이 깨질 때 그 파편이 정을 붙들고 있는 녀석의 얼굴로 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맨 윗부분을 깨뜨리고 나면 더 어려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깨지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아랫부분을 무너뜨리려면 일단 다리를 벌리고 서서 망치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은 뒤 변소 속으로 집어 넣고 망치의 회전 반경을 최대한 이용하여 아랫부분을 내리쳐야 한다. 한 두번의 타격으로는 어림도 없다. 적어도 온 얼굴과 바짓 가랑이에 누우렇게 얼음똥 파편들이 튄 다음에야 겨우겨우 무너진 육중한 똥무더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일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교대로 돌아가면서 망치질을 했다. 똥탑을 무너뜨리고 온 날은 집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우리 마을에 집안에 목욕탕을 가지고 있는 집은 몇 집 안되었다. 얼굴과 손에 튄 파편들은 씻으면 되지만 고약한 냄새가 나는 옷은 벗어서 빨아야 했기 때문에 집에 가면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옷을 몽땅 벗고, 어머니가 뎁혀 주신 한 대야 정도의 물로 영하의 날씨에 그 추운 바깥에서 오돌오돌 떨며 목욕을 한 뒤라야만 겨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물론 한 대야의 끓인 물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식구들은 냄새가 난다며 아랫목은 물론 며칠동안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 1~2분도 못되어 녹아 없어지는 수수엿 한 토막과 곶감 한개의 댓가는 그렇게 모질었다. ...............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