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 -- 산을 좋아하던 친구의 회상.M과 나는 산을 참 좋아했다.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하긴 어렵다.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르는 일이 즐거웠고, 어지럽도록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마시는 한 모금의 물이 달았고, 능선을 걸으면서 마냥 상념에 빠질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정상을 바라보면서 목표가 계속 가까와진다는 것을 느끼는 일이 좋았고, 언젠가 그 목표는 내 발 아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기대하는 일이 즐거웠고, 정상에 올라선 후의 노곤하면서도 짜릿한 희열을 가슴 깊숙히 들이키는 일이 좋았고 내려 와서 친구들과 가지는 뒷풀이가 기다려졌다. 열 다섯 살 때 우연히 시작한 산 오르기는 내가 미국에 오기 바로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스물 두 살 때였던가... 폭우 속에 지리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새벽 고속버스를 타고 진주까지 가서 M을 포함한 부산 친구들 일행과
합류한 후, 진주에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함양까지, 함양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추성리 칠선(七仙)계곡 입구까지 가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칠선계곡을
타고 올라 천왕봉을 오르지 않고 장터목으로 빠져서 1박, 새벽에 천왕봉까지
단숨에 올라 일출을 보고 중산리 쪽으로 하산, 바로 부산까지 가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서울에 돌아오는 빠듯한 코스였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지명이 틀릴
수도 있다.)
 사진:
제석봉에서 바라본 운해(雲海)
진주에 도착하니 날씨가 꾸물꾸물했다. 이번에도 천왕 일출을 보기는 틀린 것 같았다. 제주도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한반도 남쪽에서 제일 높다는 천왕봉은 여간해서는 그 장관이라는 운해일출(雲海日出)의 모습을 내 앞에 드러내지 않았다. 갈 때마다 날씨가 궂었기 때문이다. 지리산 등정만 열 번이 넘는다는 C선배도 열 번의 등반동안 딱 한 번 일출을 구경했다고 한다. 그 운해라는 것은 단지 구름의 윗 부분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치 커다란 범선 뱃고물에서 넘실넘실 파도 치며 끝 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타이타닉의 그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그 운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구름이라는 사실을 잊고 풍덩 하고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배를 띄워 노를 젓고 싶어진다거나, 근두운(근두운)을 타는 손오공 처럼 구름 위에 사뿐히 발을 딛었으면 싶어질 만큼 신비하고 아름다운 절경이라고 했다. 장엄한 그 구름의 바다 를 버얼겋게 물들이며 불끈 솟아 오르는 아침해는 가히 장관이고, 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라고 했다. 함양 행 시외버스를 타니 벌써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화투 스무 장을 가지고 열심히 손목 맞기 섯다를 하던 우리들은 비가 와도 등반을 감행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지리산이 아니면 일년에 한 번 만나기가 어려운 친구들이었으니, 비가 온다고 거기서 헤어질 우리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손목과 이마들이 퉁퉁 부어 오르고, 새우깡을 안주 삼아 먹은 소주의 취기가 슬슬 가실때쯤 해서 우리는 추성리에 도착했다. 이제 하루밤 야영을 하고 아침부터 먼 길을 걸어야 한다. 칠선 계곡은 그 험하기가 지리산에서 제일이다. 노약자는 다른 길을 이용하라는 팻말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추성리에서 천왕봉까지의 거리는 약 15 KM, 산길 15킬로미터는 평지로 하면 거의 6~70킬로미터쯤 해당한다고 보아도 과장이 아니다. 더더구나 칠선계곡은 천왕봉을 거의 수직에 가깝게 오르는 코스가 되어서 그 가파르기와 험난하기가 여느 코스와 달랐다. 칠선계곡은 일곱 신선이 산다는 7개의 폭포와 수많은 소들이 모여 절경의 계곡미를 자랑한다. 글자 그대로 별천지이다. 아침에 일찍 출발할 걱정은 집어 치우고 우리는 밤새도록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산아래서 어설프게 술잔들을 돌리며 별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도 큭큭대고 웃어가면서 서로 등짝을 후려 치는 친구들과의 밤은 아쉽도록 짧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 텐트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에 잠을 깨었다. 먼저 일어난 친구들은 부지런히 짐들을 챙기고 있다. 나도 일어나 배낭을 꾸렸다. 전날 저녁에 고스톱을 쳐서 꼴찌를 한 벌칙으로 쌀이 가득 든 코펠과 자루가 내 짐이 되었다. 아침을 대충 지어 먹고 나니 빗방울이 제법 굵어져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면 등산로는 엉망진창이 된다. 시뻘건 황토흙이 빗물을 타고 길 틈새틈새로 흘러 발 딛을 곳을 찾기조차도 어려웠다. 등산화와, 배낭이 젖으면 그 무게는 정말 술 취한 남자 하나를 업고 있는 듯 지독하게 무릎을 괴롭힌다. 중간 중간 길이 끊겨, 매달려 있는 리본을 길잡이 삼아 등산로를 벗어나야만 했다. 한 번 그렇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몸은 두 배, 세 배로 지치게 마련이다. 점심을 먹기도 전에 B가 발목을 접질렸다. 텐트 플라이를 적당히 나무에 묶고 그 밑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우린 번갈아 가며 B의 발목을 주물렀다. 생각보다는 심하게 삐진 않은 것 같았다. 오후 2시 쯤, 우리 그룹을 앞서 가던 ㅈ대학교 산악부원 한 명이 진흙에 미끄러져서 구르면서 많이 다쳤다. 의식은 잃지 않았지만 도저히 등반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ㅈ대 산악부원들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우리를 뒤로 하고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에게 가지고 있던 오이를 조금 나눠 주었다. 나도 길이 미끄러워 엉거주춤 하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돌쩌귀를 헛밟는
바람에 그 튼튼하던 워커의 뒷굽이 떨어져 버렸다. 물에 푹 젖은 뒷굽 떨어진
워커는 몇 시간 가지 않아 내 종아리를 퉁퉁 붓게 만들었다.
 사진: 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한
연화봉우리는 어느새인가 말을 잊고 있었다. 그저 서로 잡아주고 밀어 주면서 눈으로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힘을 아끼자는 눈치였을까, 물에 젖은 몸뚱이들을 이끌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산행길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다. 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을 눈치챈 M은 내가 물을 마시고 있는 사이, 잠자코 내 가방에서 쌀이 든 코펠을 꺼내서 제 배낭에 넣는다. 내가 말리려 하자 M은 나지막히 한마디 던진다. "독한 시끼, 쬐만한 놈이 이 무건 걸 어케 예까지 지고 왔노?" 장터목까지 날이 저물기 전에 올라가야 제대로 된 야영을 할 수가 있는데, 날이 조금씩 어둡기 시작한다. 산에는 밤이 빨리 찾아온다. 우리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지만 빗길은 그렇게 쉽사리 우리의 뜀박질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장터목을 한참 남겨 놓고 우리는 산행을 중지해야 했다. 어둠이 짙게 깔려 버렸는데다가, 플래시 불빛으로 미끄러운 빗길을 계속 오르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이다. 텐트를 펼 자리를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조금 평평하다 싶은 땅은 물 때문에 텐트를 칠 수 없었고 그나마 물이 고이지 않은 땅은 좁아서 5~6인용 텐트를 올릴 자리가 되지 않았다. H가 제안을 했다. 비탈을 깎자는 것이다. 비탈에는 물이 고이지 않았으니까 조금 자리가 나 있는 비탈을 깎으면 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손삽을 가지고 한시간 정도 비탈을 깎으니 훌륭하게 텐트 하나쯤은 칠 수 있을 자리가 나왔다. 텐트를 다 치고, 어영부영 저녁을 먹고, 비좁은 텐트 안에서 소주를 몇 잔씩 하고 나니 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그렇게 서로 몸을 의지한 채로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억" 하는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텐트가 휘청 기운다. 선 잠이 깨어 후다닥 침낭에서 나와보니 Y가 자고 있던 쪽의 땅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자다가 날벼락을 만난 Y는 침낭에서 빠져 나오려고 버둥버둥 하고 있다. 텐트 밖으로 나와 보니 주변이 말이 아니었다. 우리가 텐트를 친 곳의 주위가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텐트가 통째로 물에 휩쓸려 나갈 뻔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둘러서 텐트를 걷고 가까운 나무 아래에 플라이를 묶고 그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산 속의 밤은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다. 우리는 쭈그리고 앉은 채 침낭을 펴서 뒤집어 쓰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모두들 말이 없다. Y가 정적을 깨는 한마디를 걸찍하게 내뱉는다. "에이 XX, 따땃한 방구석 놔두고 여긴 왜 와서 이 X랄이람!" H가 피우고 있는 담배불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느새 날이 밝았다. 다행히 빗방울은 어제보다 가늘어져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장터목에서 발목이 삔 B에게 짐을 지키라고 하고 우리는 새벽같이 일어나 맨
몸으로 천왕 일출을 맞으러 달려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대로라면 일출은 커녕
오늘 안으로 천왕을 구경하고 내려가는 일도 쉽지 않아 보였다. 지친 몸뚱이들을
이끌고 우리는 또 발을 옮겼다.
 사진:
노고단에서 바라본 천왕봉 일출(日出)
천왕봉(天王峰).
드디어 천왕의 앞자락, 정상이 가까와졌음을 알리는 쇠줄 달린 파이프들이 보인다. 갑자기 힘들이 난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빗방울이 다시 굵어진다. 우리가 정상에 다다랐을 때, 천왕은 세찬 폭우로 우리를 반겼다. 예전에 천왕 정상의 돌비에는 "경남(慶南)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發願)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 산 정상에서 전라도 사람들과 경상도 사람들 간에 돌비문이 시비가 되어 칼부림까지 가는 큰 싸움이 있고 나서는 '경남인'이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온통 찢기고, 긁히고, 젖어 솜뭉치가 된 몸으로 드디어 우리는 천왕봉의 머리를 딛고 섰다. 우린 예의 그 돌비 주위에 물끄러미 둘러섰다. 폭우가 쏟아지는 산 정상에는 우리들의 얼굴 이외에는 달리 보이는 것이 없었다. 다만 그 돌비만이 우리가 제일 꼭대기에 다다랐음을 멀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M이 나지막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산맥은 말도없이 오천년을 살았네,
M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따라 불렀다. "얼어붙은 압록강아 한강으로 흘러라
"...역사의 숨소리 그날은 오리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 울고 있었다. 달리 서러울 것도 없었건만 우리는 치밀어 오르는 덩어리를 끄윽끅 눌러 가며 울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가슴이 터지게 벅차 올랐는지 모른다. 그렇게 "터"와 "광야에서"를 목이 터지게 부르며 우리는 귀 밑이 아프도록 꺽꺽거리며 울었다. 주위에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도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스물 두살짜리 시커먼 사내놈들이 산꼭대기에 빙 둘러서서 운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희극이 되고도 남을 일이었었지만, 그때만큼은 누구 한 사람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세차게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은 눈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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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봉
정상에서...서울에 돌아와 들떴던 마음을 추스리고 있던 며칠 후, M에게서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몇 줄 안 적힌 편지에는, "또 가자!"
... 흙뭍은 손으로 군복바지에 쓱쓱 문지른 사과를 저 먼저 한 입 썩 베어
물고 툭 건네 주던 녀석...
그리고... 겨우 서른 살의 나이에 결국 그 썩을 놈의 자유를 찾아 떠나 버린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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