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17동생은 업무차 라스베가스를 자주 다닌다. 3,4일 여정으로 출장을 가면 카지노에 한 두번 쯤은 안 들러볼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라스베가스에서 쇼비지니스와 카지노를 빼면 남는 것은 뜨거운 사막 밖에 더 있는가. 여느 때와 같이, 동생은 대충 업무를 정리하고 카지노로 내려와 블랙잭 게임을 했다. 그러나 앉은 지 두시간도 안 되어서 5백불 가량을 잃고는 더 이상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방으로 올라가 자려고 카지노를 가로질러 나오는데 저쪽 구석에서 연신 투덜거리며 슬롯 머신을 하고 있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50대 후반의 아주머니 하나가 있었다. "아이고, 또 안맞았네..." "애고고, 이늠의 기계!" 역시 한국사람 이었다. 이미 상당한 액수를 잃은 것 같았다. 동생은 별 생각 없이 그 아주머니 뒤에서 물끄러미 구경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아주머니는 가진 돈을 다 잃었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축 처진 어깨로 돌아서서 가는 것이었다. 동생은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아까 블랙잭 테이블에서 바꾸고 남은 1달러짜리 코인 몇 개가 손에 쥐어졌다. 동생은 그 아주머니가 일어난 자리에 앉아 동전 세 개를 집어넣고 단추를 눌렀다. 그랬더니 이게 웬 걸, 눈 앞에서 현란하게 돌아가던 그림들이 똑같은 모양으로 맞는가 싶더니 7자 세 개가 나란히 줄을 맞추면서 거짓말같이 5천불짜리 잭팟이 맞아 버린 것이다. '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에선 텅텅텅- 하는 소리를 내며 정신 없이 동전이 떨어졌다. 그 소리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일순간 동생 주위로 구경하려고 모여들었고 그 중엔 조금 전에 쓸쓸히 돌아서서 가던 아주머니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눈 앞에서 벌어진 믿기지 않는 광경을 확인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외치는 것이었다. "아니 이거봐, 총각! 누구 마음대로 여기서 하라고 그랬어? 아이고, 이 돈좀 봐라... 이게 다 내가 넣어 놓은 돈들인데... 이거 다 내돈이야, 내돈! 내가 잠깐 동전 바꾸러 간 사이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래? 저리 비키지 못해, 총각!" 물론 말도 안되는 억지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했다. 동생은 생각했다. '이 아줌마 때문에 여기서 까딱 잘못하다가는 개망신 당하겠구나...' 그 때 순간적으로 동생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Beg your pardon, madam. Are you talking to me? Can't you speak English? (실례합니다만 지금 저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영어 할 줄 모르세요?)" 동생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문하자 당연히 동생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던 아주머니는 의외의 반격에 당황해서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엄... 엄... 디스 이즈... 마인... 엄... 디스 이즈 마이 머니...(땀 뻘뻘...)" "What? What the hell are you talking about? Are you out of mind? (뭐요? 지금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는 거요? 당신 돌았소?)" 동생의 일격에, 불쌍한 아주머니는 더 이상 대꾸를 못하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갔다고... ..........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도 한 편 동생을 나무랐다. "야, 너무했다. 좀 나눠 주지 그랬니? 불쌍한데..." 동생이 말했다. "아냐, 그 아줌마가 가만히만 있었어도 나두 그러려구 그랬어... 그런데 괘씸하잖아... 내가 만일 우리말로 대꾸했으면 그 아줌마가 호락 호락 물러났을 것 같애?" 그랬다. 같은 한국인끼리는 억지도 쓰고 멱살잡이도 하면서 왜 외국인들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자신 없어지고 초라해 지는 것일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던순히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우리 의식 속에 지겹도록 뿌리박혀 있는 사대주의의 찌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