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 224년 전, 우리 아이가 태어나기 얼마 전의 일이다. 보고 싶던 H에게서 전화가 왔다. 워크샵 일로 아틀란타에 온단다. 아틀란타는 또 다른 죽마지우인 Y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철없는 H는 LA에서 아틀란타가 무슨 옆동네라도 되는 줄 아는지 나더러 빨리 오라는 것이다. "임마, 아틀란타가 무슨 인천 쯤 되는 줄 아나본데, 거긴 비행기로만 다섯시간이 걸려. 시차(時差)도 세 시간이나 난다구..." "너 그럼, 형님이 미국까지 가시는데 안 오겠다는 거야? 죽고 싶냐?" "갑자기 비행기표를 어떻게 구해?" "그럼 차 몰고 오면 되잖아 임마!" 차를 몰고 오라니, 2,200마일이 넘는 거리를... 비행기로 다섯 시간이 걸린다고 이야기했건만 이 녀석은 그게 얼마나 먼 거리인지 도통 감이 안 잡혔던 모양이다. 전화를 끊고 비행기표를 알아 보니 엄청나게 비쌌다. 거의 LA-서울 왕복 비행기표만큼 비쌌다. 그도 그럴 것이 예약 없이 사는 표는 언제나 비싸다. 게다가 비행기도 일주일에 네번 운항하는 전에 들어보지도 못한 항공사의 것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그 비싼 비행기표를 사고, 간신히 며칠 휴가를 얻어서 아틀란타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근 몇년 만에 만날 친구를 생각하니 잠도 오지 않을 정도로 기대되고 어린애처럼 마냥 흥분이 되었다. .......... 이틀 동안 술만 마셨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도 한 없이 많았건만, 우리는 아틀란타에 있는 술을 모조리 마셔 없애기로 작정한 것처럼 무섭게 마셔댔다. 어느 정도로 마셨느냐 하면 Y는 술이 너무 취해서 H가 아침 비행기로 떠나는 것도 못 보았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10년만에 만난 H와 Y는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도 없이, 그만 술집에서 서로 술만 마시다가 작별을 해 버린 것이다. 나중에 겨우 통화를 하긴 했지만 Y는 H의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것을 두고 두고 후회했다. H가 아침 비행기로 떠난 그날 오후, 나는 Y의 차에 몸을 싣고 오후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틀란타의 교통체증은 듣던대로 심각했다. Smyrna란 곳에서 공항까지 두시간이 넘게 걸렸던 것이다. 거리상으로는 30분이면 충분하다고 여유를 부리던 Y는 점점 다급해지는지, 속이 거북한지 마냥 물만 마셔댔다. 가까스로 공항에 다다르니 비행기 출발 시각까지 남은 시간은 20분, 그러나 아직도 술이덜 깬 Y는 차를 터미날 반대 방향에다 주차했다. 공항 트래픽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아틀란타 공항이 그렇게 큰 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터미날 간을 달리는 지하철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시집 가는 날 등창 난다더니 하필이면 그날따라 지하철이 고장이라는 것이다. 술이 미처 덜 깨어 휘적휘적하는 한녀석과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밤새워 마셔서 머리가 깨지게 아팠던 또 한 녀석은 그 넓은 아틀란타 공항을 마치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질풍같이 달리고 있었다.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거의 숨넘어가기 일보직전에 게이트에 도착하니 이미 5분이 지나버린 시간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나는 항공사 직원에게 매달렸다. "헉헉... 늦었습니다... 타게 해 주세요..." "안됩니다. 다음 비행기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후아, 후아... 다음 비행기는 언젠데요?" "모레 저녁 6시 30분입니다." "뭐요? 안돼, 열어 주세요. 나 꼭 돌아가야 합니다." "안됩니다. 이미 트랩이 제거된 상태라 다시 연결할 수 없습니다." "보내 주세요... 헝헝" "글쎄 안됩니다. 미국 대통령이 와도 안된다구요." "우리 마누라가 지금 애를 낳는다니까요!" 그 때 와이프는 임신 8개월째였다. 그도 그랬지만 다음날 회사에 꼭 출근해야만 했다. "예?" 그때까지 한사코 "NO"만을 반복하던 직원의 얼굴이 갑자기 달라졌다. 태도가 돌변한 항공사 직원은 급히 전화를 집어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이미 저만큼 움직여 버린 뒤였다. "Emergency(긴급상황)입니다. 오피스 나와 주세요." 와이프가 임신중인건 사실이지만, 내일 애를 낳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는데, 갑자기 그 말 한마디에 180도로 태도가 돌변한 항공사 직원들의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혹시 내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서 아뭇 소리 못하고 돌아가는 상황만 주시하고 있었다. 항공사 직원들은 무전기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서로 연락을 취하더니, 결국 내 눈 앞에서 이미 200여 피트를 굴러가 버린 비행기를 제자리로 되돌리는 믿기지 않는 상황을 연출하고야 말았다. 비행기를 놓친 지 약 30여 분 후에 트랩은 다시 연결되었고, 얼떨떨해진 나는 항공사 직원의 격려를 받으면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역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친구의 배웅을 뒤로 하고 비행기 안에 들어서자, 비행기에 탄 모든 사람이 땀으로 흠뻑 젖은 몰골의 나를 일제히 쳐다 보았다. '저녀석이 대체 누군데 이미 출발해 버린 비행기를 세운단 말인가...' 그런 눈들이었다. 멋적은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 불편을 끼쳐 드려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내 자리는 남아 있나요?" 일순간 와아- 하는 웃음이 터졌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내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시큼한 땀냄새를 풍기며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에 앉은 노 신사가 땀을 닦으라고 티슈를 건네 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셀룰라폰을 빌려 줄테니까 병원에 전화를 해 보라는 것이다. 노신사를 비롯한 승객들은 방송을 통해 상황을 전해 듣고는 지금 세상에 태어날 아기를 맞이하러 급하게 달려 가는 한 아빠를 궁금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이었다. 잠시 후 들려오는 기장의 방송. "Good evening, ladies and gentlemen...(중략)... And there's one last thing I want to remind you... please don't forget to get a cigar* from a new daddy as soon as you arrive at the Los Angeles airport. (승객 여러분, LA 공항에 도착하시면 잊지 말고 새내기 아빠에게 시가를 하나씩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모두 웃었다. 출발이 50여분이나 지체되었는데도 모두 불평 한마디 없이 기뻐해 주었다. 미국 대통령이 와도 안된다던 비행기를 세워 타고 LA로 돌아오던 나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비록 급한 김에 나온 거짓말이었지만, 새 생명을 맞이하러 간다는 평범한 한 남자를 위해, 이름도 모르는 한 아기의 탄생을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고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회항(?)을 감행한 항공사 직원들, 공항 직원들... 한마디 불평도 없이 날 기다려 주고, 또 일일이 격려와 덕담을 아끼지 않았던 많은 승객들, 오랫만에 만나 술로 날밤을 새우긴 했지만 그냥 쳐다만 보고 있어도 마냥 좋았던 내 친구들... 이런 사람들이 있어 내가 사나 보다. 이런 정이 있어 내가 힘을 얻나 보다. 가끔씩 내가 미국에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면 그들의 그런 양보와 의협심이 이 큰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좀 비약이긴 해도 아빠가 첫아이의 탄생을 지켜보는 일을 비행기 정시 운항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보이지 않는 힘, 모순덩어리 투성이지만, 그런 힘을 가진 이 나라를 나는... 어쩌면 좋아하고 있나 보다. ............ 지난 성탄절 휴가 때 Y를 다시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다시 밤을 새웠다. 특히 공항에서의 절박했던 뜀박질과 이미 출발한 비행기를 다시 되돌린 무용담은 밤이 새도록 기울어지는 술잔과 함께 그칠 줄을 몰랐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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