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25거울을 보니 흰머리가 이제는 손을 댈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옆에 나는 흰 머리카락은 나이머리라는데 이제는 정말 옆에까지 희어져가고 있다. 뒷거울은 안 본지 오래 되었다. 뒷머리는 이제 잿빛을 띠기 시작하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내는 내 흰 머리카락을 참 부지런히도 뽑아 주었었다. 뽑으면 더 많이 나온다고 건드리지 말라고 해도 싫다는 나를 붙들어 눕히고는 가만 가만 이야기를 들려 주며 흰 머리털을 뽑아 준다.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이야기를 들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런 손길과, 따끔거리는 작은 통증을 즐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젠 뽑는다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이 생긴 흰 머리카락들이 염색을 고려하게끔 만든다. 한 번은 염색 대신 탈색(bleach)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아내에게 말했다. "주연아, 나 머리 하일라잇 넣을까?" "뭐어?" 결국 미장원에 가서 애꿎은 기홍이 머리에만 노오랗게 하일라잇을 넣고 왔다. 아내는 내가 하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는다는 투여서 "그래? 한 번 해 볼까?" 하고 갔다가 도저히 용기가 생기지를 않아서 어만 기홍이만 노란 머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당신 흰 머리 많은 게 다 불효자라서 그런 거야." --------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아니, 돌아가실 때까지 말씀을 못드릴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나는 차암 못됐었다. "얘, 이리 와서 엄마 흰머리좀 뽑아 주련?" "싫어, 나가서 놀거야..." "그러지 말고 좀 뽑아 다고. 내 한 개에 오원씩 주마." 스무개만 뽑아도 백원짜리 동전 하나를 가질 수 있는 어머니의 흰머리를 뽑는 일은 처음엔 신이 나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흰 머리를 뽑을 때면 어머니는 옆으로 비스듬히 누우셔서 눈을 감으시고 내게 머리를 내어 맡기시고 시원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는 뽑은 흰 머리털을 어머니의 눈에 들이 밀며 "한 개, 두 개, ... 스물 세 개..." 하고 숫자를 확인시켜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검은 머리숱을 뒤져 흰 머리카락을 찾아 내는 그 일은 얼마 안 가서 진력이 났다. 내 기억에도 악동(惡童)으로 소문났던 난 곧 한가지 꾀를 내었다. 일단 흰 머리 한 개를 뽑아서 손에다 쥐고, 머리를 뒤지는 척 하다가 그냥 검은 머리를 뽑는 것이다. 그 다음 검은 머리는 얼른 쓰레기통에 버리고 미리 뽑아 놓은 흰 머리를 어머니 눈 앞에 들이밀며 "자, 열 세개다?" 그러는 것이다. 그리고 또 검은 머리를 뽑고, 어머니께는 흰 머리를 보여 드리고... 나는 그렇게 돈 욕심에 어머니의 검은 머리를 무수히도 뽑아 내었다. --------- 얼마 전, 가족사진을 찍으러 어머니, 아버지와 동생 부부 그리고 우리 식구 모두가 사진관에 갔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는데 어머니는 내 머리를 보시며, 벌써부터 흰 머리가 그렇게 많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신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 보는 어머니의 힘 없는 머리칼은 하얗게 세신 것은 고사하고 이젠 아예 가운데가 휑하니 비어 있다. 곱던 모습은 다 어디 가고, 작달막한 키가 되어 버린 어머니가 그날 따라 더 작아 보였다. 그래도 사진 예쁘게 나와야 한다고 어설픈 화장을 하신 모습이 더욱 쓸쓸하게 보인다. 결국 나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사진관 주차장에서 구름낀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한참을 덩그러니 서 있어야만 했다. 아직은 좀 섣부른 감이 있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나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시간들이 가까와졌다는 것이 그 두번째일 것 같다. 과거에 대한 집착과, 연민, 후회...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보상을 할 시간들이 점점 줄어가는데 대한 안타까움 같은 것인가 보다. 난 결국, '어머니께 젊게 보이기 위해서' 염색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