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27아내의 나이가 서른을 넘기자 변한 것이 하나 있다. 도저히 말싸움 상대가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백전 백패를 기록한다. 결혼 초인 20대 중반에는 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때가 많았다. 어려서 미국에 온 아내는 나와 말다툼을 할 때면 우리말이 달려서 영어로 하다가, 우리말로 하다가, 결국 내게 잘 안 먹혀 들어가는 것 같으면 분해서 씨근씨근 하다가 눈물을 보이곤 했다. 미국에 십 수년을 살았어도 난 아직도 영어로 욕을 먹으면 그다지 느껴지지를 않는다. 우리말로 "야, 이 개XX야!" 하고 누가 그러면 아마 이마빡을 앞세우고 너죽고 나죽자고 돌진할텐데 영어로 누가 "You bitch!" 그러면 전자처럼 그렇게 가슴에 절통하게 와 닿지를 않는 것이다. 당연히 욕을 한 상대는 욕한 만큼의 효과를 못 거두고, 나 또한 욕을 내뱉은 사람의 의도만큼 상처받지 않으니 당연히 내가 한참 유리하다. 그런 고로 아내는 영어로 속사포같이 쏘아 부치다가(물론 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눈을 멀뚱멀뚱 뜬 채 긁적긁적 머리를 긁으며 못 알아들은 척 하고 있으면 분을 못이겨서 제풀에 나자빠지곤 했었다. 아내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C 신문사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내의 우리말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그럴 것이 C 신문사에는 기자들부터 광고국 직원들까지 온통 한국 아줌마들뿐이어서 하루 종일 아줌마들하고 수다를 떨고 집에 오면 도대체 나도 모르는 말들을 수 없이 늘어 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언가 심상치가 않다는 것을 느꼈으나 아내가 워낙 그곳 직장을 좋아했기 때문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느날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갔는데 아내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어머니와 깔깔거리며 별 수다를 다 떨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호호호, 어머니 정말 뿅가죠?" 일순간 모두 숟가락을 든 채 아내의 얼굴을 쳐다 보았으나 아내는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몇 그룹의 한국사람들도 고개를 돌려 아내를 쳐다 보았다. 나는 도대체 눈을 어디다 둬야 할 지 몰라 숟가락만 달그락거리고 있는데 아내는 또 한번의 폭탄을 날렸다. "어머니 이 이야기 황가지 않아요? 호호호... 황간다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찌푸러지기 시작했다. 어디 싸구려 술집 여자를 쳐다 보는 듯한 눈들이었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당황하지 않도록 배려하시느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계셨으나 얼굴엔 당황하신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 왜 그러셔요?" 그제서야 주위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아내는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어머니 잠깐만요." 나는 아내의 손목을 잡아 끌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뭐? 무슨 말?" "뭐? 뿅이 가? 황이 가? 대체 그게 무슨 말버르장머리냐, 어른 앞에서!" "왜? 그게 뭐 나쁜 말이야? 회사에선 다들 그렇게 말하는데..." " -_- ... 뭐, 회사? 그럼 거기 아줌마들하구 맨날 뿅가네, 황가네 그러구 떠든다는 말이야?" "자기 왜 그래! 그게 나쁜 말이냐구?" "어휴!!! 너 회사에서 니네 사장한테두 그런 말 쓰니!!!" 아내가 직장 동료 아줌마들로부터 배운 우리말 실력이 부쩍 부쩍 느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아줌마들이 쓰는 그런 비속어들이 안 좋은 말인지, 아니면 좋은 말인지를 하나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한참을 그 말이 왜 나쁜지를 아내에게 설명해 준 뒤 식당으로 다시 들어 오니 식당에 앉은 사람들이 우리 부부를 쳐다 보는 눈길이란... "에구... 그 여편네에 그 남편이다... 쯔쯔..." 그런 눈길들이었다. 난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강력한 권유로 아내는 직장을 그만 두고 대학원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지금은 모 미국국민학교 선생님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물론 그때 약 1년여 동안 C일보에서 배운 우리말 실력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아내는 그 뒤로 나름대로 신문도 열심히 찾아서 읽고, 한국에도 두어 번 다녀 오고, 또 한인타운에 있는 합창단에 가입하여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되는 친구들을 열심히 사귀면서 정확한 우리말 배우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 날의 실수가 그녀에게도 잊혀지지 않았나 보다. 7년 전 그때와 지금의 아내의 말발은 도저히 비교하지 못할 수준이 되었다. 얼마나 논리정연한지 대체 내가 할 말이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아내는 말한다. 지금은 이정도 수준이다. "왜, 옛날에 반 벙어리 앞에다 앉혀 놓고 신나게 쏴부칠 때 자기 기분이 이랬겠구나?" " -_- ; ..... (할 말 없음)...... " 여자들은 무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