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34
서울에 사는 아이엄마의 사촌 동생 둘이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둘째를 출산하고 나서 꼼짝 없이 누워 있는 아이 엄마 덕에 팔자에 없는 둘의 가이드를 맏게 되었다. 다들 오면 의례적으로 도는 코스 - 디즈니랜드 - 유니버설 스튜디오 - 씨 월드 - 낫츠베리팜 - 들을 안내해 주는 역할이었다. 물론 같이 다니는 것은 아니고 입구에 내려 놓고 저녁 때쯤 데리러 가는 일이다.
"형부, 이게 뭐예요... 내가 얼마나 기대를 했는데..."
뙤약볕 속에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돌아 보고 난 젊은 아가씨들 둘의 표정이 왠지 시무룩하다.
"난 뭐 유니버설 스튜디오라고 해서 굉장히 기대를 했는데, 용인 에버랜드가 훠얼 낫다구요."
에버랜든지 네버랜든지 내가 알 게 뭐람. 어쨌든 심심하기 짝이 없는 LA 관광을 마치고 둘은 다음 행선지인 뉴욕으로 떠났다. 공항에 바래다 주면서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 요즘 한국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했다.
"형부,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요?"
언니인 올해 스물 다섯살짜리의 말이다.
"미국이라고 별거 아니네, 미국보다 한국이 훨씬 발전한 것 같아요, 형부."
이건 올해 대학교에 입학한 00학번 열아홉살 아가씨, 동생의 말이다.
당돌한 둘의 마지막 코멘트에 그냥 허허... 웃고 둘과 작별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래, 난 미국에 무슨 재미로 살지?'하고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긴 그런 말을 들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
이제는 가끔 내 나라라기 보다 남의 나라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내 나라, 내 스물 세살까지의 기억이 묻혀 있는 곳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변해 있다는 곳, 숨가쁘게 돌아가는 나라, 한국.
가정용 고속 인터넷 망(網)의 보급 숫자가 벌써 300만 가구에 육박했다는, 5천만이 안되는 인구에 이동통신 가입자 수가 1500만을 넘어 2000만으로 치닫고 있다는 나라 한국. 미국에서 세금까지 합해 4, 5만불이면 살 수 있는 BMW 528 세단 한 대의 가격이 1억원을 호가함에도 불구하고 없어서 못 판다는 나라, IMF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도 여전히 제 2의 환란(換亂) 위기를 맞고 있는 나라, 고아 수출 1,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나라, 2000만대가 넘는 자동차가 거리를 가득 메운 채 매연을 뿜어내고, 의사와 약사들은 이권쟁탈에 여념이 없고, 언론은 눈멀어 있으며, 여전히 정치판은 대만(臺灣)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개판 5분전의 아사리판에, 하룻 밤에 몇백만원어치의 폭탄주를 마셔 없애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나라...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차이가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나라...
이억만리 타국에서 지켜 보는 고국의 모습은 이렇듯 어둡고 암담하기만 한데, 적반하장격으로, 한국에서 놀러 온 사람들의 질문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요?"라니...
하긴, 퇴근 후면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잔디도 깎고, 뒤뜰 패티오에 페인트칠도 하고, 물뿌려 가며 세차도 하고, 테니스도 치고, 개를 끌고 산책도 하고, 그래도 저녁 시간이 남아 바닷가로 밤바람을 쐬러 나가는 이곳 사람들의 생활과 퇴근 교통지옥을 뚫고 집에 가느니 차라리 밖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퇴근 후엔 가족이 기다리는 집보다 의례히 김유신 장군 태운 말처럼 술집으로 발걸음이 향하는, 저녁 - 술집 - 노래방 코스가 당연한 하루 일과처럼 자리잡고 있는, 낮시간보다 해가 저문 후에 더 활발하게 움직이는 한국(서울)에 사는 사람들과의 라이프 스타일을 일대 일 그대로 비교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그러나 무슨 재미로 사느냐 하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분명히 대답할 것이 있다. 구태여 대답할 필요를 못느끼는 이유는 스무살짜리 아가씨들에게, 이미 가족보다는 즐기고 노는 향락문화의 중독성에 깊숙히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언급한다는 자체가 무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전(發展)이라 함은 무언가?
더 작고 팬시한 핸드폰(Cellular Phone)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발전한 나라인가?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과 놀아 주는 대신, 밖으로 아이들을 불러내 TGIF에서 저녁을 먹고 롯데월드에 가서 온갖 현란한 놀이기구를 태워 주는 나라가 더 발전한 나라인가? 더 많은 자동차를 생산해서 더 많은 일산화탄소를 공기중에 내뿜는 나라가 더 발전한 나라인가? 내면의 성장이 없이 외형적인 소비문화만 지독하게 발달한 모습이 발전(發展)이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다. 안전한 소비문화가 정착할 수 있게끔 인프라(infrastructure)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 위에서 자연스런 소비문화가 형성되는 것이 진정한 "발전"한 모습이다. 한국의 소비문화는 심각하다. 자원이 하나도 나지 않는 나라, 식량을 수입해야만 먹고 살 수가 있는 나라에서 지금의 소비수준은 위험수위를 넘어도 한참 넘어섰다. 분명히 우리가 가진 외화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넘치는 수입과 모자라는 수출에서 나오는 적자(赤字)는 불을 보듯 빤한데 돈이 도대체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어디서 밥 굶는 사람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인다는 서울대학교가 세계 대학 랭킹 500위권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허공에 대고 욕지거리를 했던 때가 불과 몇년 전이다. 벌써 그 수치심을 잊고 시험기간만 지나면 도서관의 불이 꺼져버리는 대학에선 노벨상은 커녕 아직도 변변한 연구실적 하나 없이 "틈새시장"만 노리고 있다. 덤핑에 의존하는 자동차 수출로 그나마 현상유지를 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자동차 주요 부품의 80퍼센트 이상을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다.(현대 "그랜져"가 미국에서 얼마에 팔릴 예정인지 아는가?) 이동통신의 보급률이 세계 2,3위를 다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대로 된 통신위성 하나를 쏘아올리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지금 우리가 사는 한국의 모습이란 말이다.
난 우리나라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힘 있는 나라에 살고 싶다.
어쩌다 보니 살게 된 타국생활, 그것도 대학시절 그렇게 미워하고 이를 갈았던 "분단의 원흉, 제국주의자"들의 나라에 살면서도 내 나라에 대해 단 한 번도 자긍심을 버린 적이 없다. 그러나 그런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한국인"을 보는 저들의 시선은 그저 하찮고 가소로울 뿐이다. 그들의 무시하는 시선을 한 번이라도 꺾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일본 사람이라면 꺼뻑 죽으면서 한국 사람이라면 예의 그 고압적인 자세로 내려다 보는 코쟁이들의 얼굴을 대하는 일이 이젠 그러려니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젊은 사람들이 좀 깨어야 한다. 20대는 물론이거니와 격변하는 시대를 살았던 우리 30대들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 요즘의 30대들은 죽어 있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별로 관심도 없이 그저 주식시세에만 눈에 불을 켜고 있다. 통일? 그런거 이미 남의 이야기다. 차라리 전쟁만 없다면 통일 안되고 이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이라니... 나라 밖에선 영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고랑내 나는 구세대들이 굴욕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을 때도 우리 30대들은 세상을 한탄하며 술과 벗하기에 바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가치관도 이젠 많이 무너진 지 오래다. 얼마 전 10대의 약 60%, 2, 30대의 약 40%가 대중교통의 경로석을 노약자들에게 양보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한 직종에서 꾸준히 경력을 쌓는 일보다는 어떻게든지 기회를 잡아서 크게 한 번 일을 저질러(?) 보겠다는 한탕주의에 물들어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는 200년이 넘은 우동집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요즘 한 우물을 파는 젊은 사람들 찾아 보기 힘들다.
우리에겐 뿌리깊은‘열등감’이 있다. 이 열등감은 자신감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다. 왜 자신감이 없는가? 멀리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되놈, 왜놈, 양놈들에게 계속 당하면서 자존심에 깊은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생긴 열등감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각종 부조리, 범죄, 갈등을 일으키는 진짜 주범이다. 자기 자신을 우숩게 알고 비하하는 열등감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런 열등감을 극복하는 일에 가장 먼저 발벗고 나서야 할 사람들은 다름아닌 386세대들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40, 50이 넘은 기성세대들은 이미 노쇠현상, 조로현상을 보이고 있다. 경쟁력에서 현저히 떨어진다. 20대? 어딘가 불안하다. 시쳇말로 볼 것, 안 볼것 다 보고 자란 우리들이다. 기성세대에 비해서 꿇릴 것도 없고, 10, 20대에 비해서 불안할 것도 없다. 30대 우리들만이 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좀 "제대로" 살아 보기 위한 밑돌을 까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30대여, 술에서 깨어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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