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35애 엄마의 사촌이라니까 내게도 사촌이 되나... 우리말을 잘 못하는 꺼벙한 녀석 하나가 동부에서 놀러왔다. 지금 미시간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집에서 부모가 어려서부터 영어만 쓰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간 이녀석이 한국 친구들이 하나 둘씩 생기니까 같이 어울리고 싶어서 혼자 책도 보고, 친구들에게 배우고 해서 우리말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녀석의 우리말 수준이란 게 고작 기홍이 수준이었다. "형, 이거 맛있다. 이거 또 먹고 싶다." 저녁으로 모처럼 카밥(꼬치에 고기, 해물, 야채 등을 끼워서 구워 먹는 요리)을 해서 줬더니 기껏 이 녀석이 한다는 소리가 반말이다. "형도 먹어. 누나, I love this shrimp, this is fantastic!." '먹어?' 이 녀석 봐라... 우리 집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우리말을 좀 가르쳐야 쓰겠다 싶었다. "Thomas, you should be little more polite when you talk to the elders. There are some ways to show your respect." "How? my parents have never taught me that." 외아들이라고 어지간히 버릇 없이 키우셨구먼... 쯔쯔... 요 녀석 골탕 좀 먹어 봐라. ------------------------------- 이튿날 장인, 장모님이 오셨다. "그래, 지낼 만 하니? 공분 잘 하고?" "응해, 고모. 형하고 누나가 잘해줘서 좋다해." "??? 뭐?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어저께 형이 카밥 만들어줘서 먹었어해. 맛이 좋았다해." "김서방, 얘가 왜 이러는 건가?" 나하고 기홍엄마, 소파 위에 널부러진 채 배꼽을 쥐고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어, 누나해? 왜 그래해?" 장인어른도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하신다. "이 자슥이 뙤놈병이 걸렸나, 왜 말끝마다 해, 해 거린다냐..."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 챈 이 녀석, 나한테는 감히 뭐라고 못 그러고 기홍엄마에게 신경질을 낸다. "Hey you guys, you're bad. Stop making fun on me!" 녀석이 하도 정색을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썰렁해져서, 내가 나서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또 한바탕 웃었다. ------------------------------ 전날, 저녁식사가 끝나고 맥주를 함께 마시며 나와 녀석이 나눴던 대화. "Thomas, Korean is such an easy language. When you talk to elders, just put "해" at the end of the sentence. That's it. Then they will just see your respect, OK?" "해?" "그래, 무조건 '해'자만 붙이면 돼. 쉽지?" "알았어." "이 자식이... '해'자를 붙이라니까!" "알았어해" "그렇지! 잘 할 수 있지?" "응." "또!" "응해." "Good." ------------------------------ 여기서 태어난 녀석에게 존대말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사람으로 자라고, 또 앞으로도 미국인으로 살아갈 녀석에게 우리말 한 마디를 정확하게 구사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민 2, 3세들은 대개 11, 12학년(고등학교 2, 3학년)에서 대학을 들어가는 나이인 17세에서 20세 사이에 극심한 아이덴티티 충격을 경험한다. 특히 LA나 뉴욕같은 대도시가 아닌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곳에서 성장한 아이들일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하다. 대개 고등학교를 들어가는 나이까지는 자신이 동양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백인 아이들도 동양인 아이들에 대해 그다지 거리감을 두지 않는다. 집에 백인, 흑인 아이들을 곧잘 데리고 와서 놀고, 자고 가기도(slumber party) 한다. 그러던 것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점점 자신들이 미국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동양인이지만 미국사람처럼 영어를 구사하고, 미국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백인들은 바나나(banana)라고 부른다. 겉은 노랗고 속은 흰 바나나. 지독한 경멸의 뜻이 담겨 있다. 물론 바나나가 main stream에서 성공하려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 자신이 백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동양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나가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자신이 미국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방황하는 아이들도 많다. 자신과 피부색이 같은 한국 아이들로부터 우리말을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따돌림당하고 이쪽에도 저쪽에도 끼이지 못하고 헤매는 아이들도 꽤 보아 왔다. 소수이긴 하지만 두, 세배의 노력으로 백인사회에 기어코 끼어 든 뒤, 좀처럼 한국사람들 사이로 나오길 꺼리는 진짜 바나나들도 있다. ---------------------- 녀석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부럽다는(?) 녀석에게 이번엔 진짜 존대말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영어만 쓰게 한 아빠, 엄마가 좀 원망스럽지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우리말을 배우겠다는 녀석이 참 대견스러워 보였다. 이 넓은 미국 땅에서 제 나름대로의 위치와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겠지... 그리고 바나나든 감자든 녀석도 아이를 낳아 또 그 아이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가르치겠지... 사는 것이 중요하다면, 어떻게 사는 지도 그만큼 중요하다면... 무엇으로 사는지 또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