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 6참으로 오랫만에 받아 보는 C 선배의 전화였다. 벌써 큰애가 중학교에 들어간단다. 작은 애는 아들인데 이제 겨우 열한살밖에 안되는 놈이 엄마의 재능을 이어 받았는지 어릴 때부터 각종 피아노 콩쿨을 죄다 휩쓸고 지금은 재즈에 심취해 있다고 연신 썰을 풀어대는 C선배의 목소리가 여전히 묻어 있는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내 기억은 또다시 아스라한 파스텔 톤 뒤로 접혀져 있는 십여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탄다. ........
복학생 C 선배는 가난했다.
책값이 없어서 복사집 아르바이트를 자청하며 살짝살짝 전공서적을 복사하다가 주인한테 들켜서 눈총을 받기 일쑤였고, 거의 매일 모이는 과 막걸리 판에 학년을 불구하고 빈대를 붙어 김치쪼가리와 막걸리로? 저녁을 대신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형, 잠수교는 통행량이 많지 않을 때면 자동으로 잠수한대..." 하면 그대로 믿어 버리는 사람이었다. 누가 그렇다면 도대체 의심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 그는 그에 걸맞는 깊고 선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형이 없는 나는 그런 C선배를 형처럼 따랐고, 그도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음악교육과에 다니는 나와 같은 학년의 고학생이었는데 그녀는 더 가난했다. 게다가 그녀에겐 부모가 없었다.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어려운 학교생활을 하며 강의가 끝나면 그녀가 달려가는 곳은 어떤 출판사였다. 그곳에서 밤늦게까지 사진식자를 치는 일이 그녀의 학비며, 생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30분 떨어진 자취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버스비를 아낀다고 매일 그 길을 걸어 다닐 정도로 가난하지만 검소했다. 둘은 정말 사랑했다. 같은 병을 가진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안다고 했던가, 일찌감치 다른 사람들에게 CC로 인정받은 그들은 각자의 주어진 삶에 순응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또 서로를 보듬어 주며 사랑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 "형, 아예 결혼하는게 어때?" 집에서 올라오는 돈만으로는 하숙비며 등록금이며, 책값 따위를 감당하기가 힘든 그였다. 군대도 다녀왔겠다, 아예 결혼하고 나서 학교를 다니면, 방값도 줄고,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뭐, 결혼? 이기 미친넘 아이가? 내가 무신 돈이 있다고 결혼을 하노?" "그냥 혼인신고하고 합치면 되잖아." "...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갸 면사포는 한 번 씌워 줘야 불알 달린 놈 체면이 스지 않겄나... 게다가 우리 집에서도 갸 별루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아이가..." "그래두 결혼하는게 형하고 형수한테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니 말두 맞긴 하다... 후우~" 그랬다. 그의 집도 가난했지만 그래도 소시적 글깨나 읽었다는 그의 아버지는 부모도 없는 가난한 여자를 며느리로 들일 수는 없다고? 그에게 이미 수차례 못을 박아 놓은 터였다. ..........
며칠 뒤 (내내 그 생각만 했다) C 선배를 다시 만난 나는 말했다. "형, 아버지 설득하는 건 형이 알아서 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진다." "니 무신 꿍꿍이고? 퍼뜩 말하지 않으면 고마 직이삔다!" "응 그게 그러니까... 숙덕숙덕... 수근수근... 어때?" "야... 아이디어는 좋지만, 그기 될까...? 내는 자신 읍구마..." "글쎄, 나만 믿으라니까!" "우리 자야한테 한 번 물어보고..." "Yes 한 거다? 나중에 빼기 없기야...?" ........... 그로부터 한 달 뒤, C선배의 부모님, 학과장님, 학장님, 그리고 많은 학우들의 축복 속에서 C 선배와 자야(C 선배의 여자친구, C선배가 늘 그렇게 불렀다)는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정작 모든 일을 꾸몄던 나는 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해서 잔디 밭에 널부러져 홍야 홍야 하고 있었다. --------- 나는 C선배와 헤어진 직후에 학과장실로 직행했다. 그리고는 단도 직입적으로 말했다. "교수님, 이번 축제 때 전통 혼례 재연(再演)을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돈이 조금 필요합니다." "......" "그리고 예식 때 신랑 신부는 진짜 커플입니다." "뭐시라?" 대충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교수님과, 서클 연합회와의 담판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었고 모든 일은 극비리에 착착 진행되었다. 예복, 상차림, 하객들, 사진 등... 각자 역할을 맡은 친구들은 마치 자기 형이, 자기 누나가 시집가는 듯, 혼신의 힘을 다해 결혼식 준비를 해 주었고 학과장님과 학장님은 신혼여행 경비 일체를 사비로 후원해 주셨다. 축제의 마지막 날, 우리의 전통 혼례 재연식에 모인 수천의 인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사진을 찍고, 박수를 치고 웃으며, 신기해 하다가 나중에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방송을 듣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학우 여러분, 그리고 우리 학교를 방문해 주신 손님 여러분, 지금까지 보셨던 장면은 전자과 C군과 음악교육과 J양의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이 커플에게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애당초 시나리오에 없었던 나의 취해 꼬부라진 목소리였다. .......... 그런 C 선배... 내가 미국 오던 날 제일 많이 울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