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 277 / 309 등록일 : 2000년 01월 06일 21:11 등록자 : 영상소년 조 회 : 217 건 제 목 : [소설] ──── 놈 ──── 1 - 40 1)****** 난 세상 속에 남아 있다. 내가 속한 세상은 모순으로만 가득하다. 지금까지 꿈꿔 온 꿈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날 세상 밖으로 몰아내는 것 같았다. 죽음을 시도해야 한다는 이유를 붙여주는 이름 단하나. 내가 그만을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인식시켜준 이름. 은지원. 이제는 형을 원망해도 괜찮을 텐데. 형을 원망하더라도, 나에겐 괜찮을 텐데.. 난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는데. 형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거.. 그래도 되는 건데.. 난, 형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 속에 남아 형을 기다리고 있다. 형에 대한 내 신념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 버렸다. 나, 강성훈은 은지원만을 사랑해야 하고. 그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신념. 하지만... 형을 원망해도 된다. 형이 날 망쳐 놓았으니깐. 난 그럴 자격이 있다. 적어도 형에게 나, 강성훈은 그래도 된다. "너, 집에 가서 보자! 쉬펄새끼!" 지용이의 신경질적인 음성이 들려온다. 이번에도 안된 건가? 난 뜨기 싫은 눈 커플에 힘을 가해본다. 쾅 막혔다고 했던가? 그래. 막혔지.. 난 막혀 버렸다. 젠장. 이번에도 난, 세상 속에 남아 있다. 언제쯤 난 편히 쉴 수 있는 걸까? "죽으려면 나한테 맞아 죽어! 이 병신새꺄!" 지용이의 앙칼진 음성이 들려온다. 하지만 난 그에게 내 음성을 들려주지 않는다. 집에 가면 죽었구나. 지용이 녀석 날 죽이려 들텐데.. "야, 이 새꺄 그런 짓 또 할거야? 또?!" 이번에 맞은 곳은 정말 아프다. 탁자 모서리에 부딪힌 오른쪽 팔이 접혀지질 않는다. 지용인 내 멱살을 잡고 몹시 흔들어대고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날 구타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지만 난 모른 척 한다. 이것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최소한의 해결책이니깐. 내 몸에 멍을 만들던 그가 멈칫한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는 담배를 한대 물고는 필터가 타들어 갈 때까지 담배연기를 깊게 흡입할 것이다. 사랑표현방식이 험악해도 지용인 나, 강성훈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느낄 수 있다. 그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 새꺄! 뭘 쳐다봐?!" 내게 차갑게 쏟아 부어도 그의 눈은 따뜻하게만 보인다. 지용이 곁으로 온 지는 아홉 달의 시간이 흘렸다. 지원형과의 이별로 내 뇌신경세포들은 모조리 죽어버렸다. 아니 내가 죽여버렸다.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도록 눈도, 입도, 귀도, 마음도.. 난 내 자신을 꽉 닫아버렸다. 그래서 난 사랑이란 감정을 남에게 주질 못한다. "눈 안 깔아? 이 새끼가 어딜 쳐다봐!!" 잠시 멈추었던 그의 주먹이 내 볼에 닿는다. 턱 선을 빗겨간 지용이의 주먹은 몹시 매섭다. 녀석, 이번엔 정말 화가 단단히 난 나 보다. 바닥에 널 부러진 날 잡고 두들겨 패진 않는다. 귀찮다는 듯 지용이의 발이 날 꾹 밟고 있다. 아까전에 맞은 곳에 통증이 가해진다. 지용아, 아프다. 그만해라. 녀석이 밟은 곳은 항상 같은 곳이다. 내 심장이 있는 곳. 숨쉬기 힘들 정도로 그는 내 심장에 자신의 무게를 싣고 있다. "강성훈! 언제까지 그 놈 생각할래?" 항상 같은 말만 반복한다. 한바탕 때리고 난 후 내 심장에 압박을 가하는 그는 힘없이 내게 물어온다. 언제쯤 지원형에게서 벗어 날거냐는... "헉." 숨쉬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지용인 내 심장에서 발을 떼지 않는다. 날 사랑하는 만큼 그는 내 심장 속의 그를 미워하고 있다. 뇌 속에서 죽어버린 그는 내 심장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으니깐. "개자식!!" 어쩌면 난 철저히 계산적인지도 모른다. 혼자선 버티기 힘들어서 찾아온 지용이를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으니깐. 난, 그에게 기대 버렸다. 내 곁에 머무르게 하려고 그의 신경세포들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날 떠나 살수 없게 하려고 그의 온 몸에 내 자취를 뿌려 놓았었다.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이 쉬펄새끼야!!" 다를 때와는 다르게 지용이의 구타는 멈추려 들지 않는다. 지금쯤이면 '아프지? 그러니깐 그러지마.' 하고는 내 품에 안겨 울것인데. '성훈아, 다신 그러지마. 그러지마..' 이러면서. 그의 싸늘하게 느껴지는 손이 내 몸에 와 닿는다. 내 몸에 푸른 멍을 만들며 떨어졌다가, 다시 되돌아와 또 다른 곳에 멍을 만든다. 지용아, 그만.. 정말 아프다. 참기 힘들어. 이번엔 정말.. "나쁜 새끼. 죽고 나면 다 끝인지 알어? 흑. 흐.. 흐..." 내 심장 위에 고개를 묻고 흐느끼는 지용이를 안아주질 못하겠다. 살살 때리지. 팔꿈치가 접히지 않잖아. 모서리에 부딪쳤을 때 뼈가 부러졌나봐. 너에게 손을 뻗을 수가 없다. 오늘은 널 안아 줄 수가 없어. 2)****** 나, 눈을 떴다. (past) 『 좋아하는 것은 등을 보일 때 가슴이 아프지만. 사랑하는 것은 등을 보일 때 눈물부터 떨어지는 거래. 좋아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정답게 얘기 나누지만. 사랑하는 것은 아무 말도 못 하는거래. 』 "지용아, 저 녀석 팔 부러뜨려!" "지용아, 한방엔 끝내버렷!!" "지용아! 지용아!" 많은 아이들이 둘러싸여 두 소년의 몸싸움을 응원하고 있다. 자신의 키보다 머리하나가 더 보이는 말끔한 소년에게 주먹을 날리려던 당찬 아이. 고사리 같은 손은 생각외로 맵고 쌨다. 작아 보이는 소년은 오기로써 지용이에게 대들고 있다. 퍽-- 두 소년의 자세가 바꿔 하얀 소년이 지용이의 배 위로 올라앉았다. "헉헉, 니가 졌지? 졌다고 말해!" 하얀 소년의 얼굴은 몹시 얻어맞아 멍투성. 피투성.. 지금 자신이 조그만 녀석에게 밀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이를 악문 하얀 소년의 눈이 유리알처럼 예쁘다는 생각을 한다. '예쁘다. 너..' 전학와서 말이 없던 녀석이 눈에 거슬렸다. 타고난 부유함 때문에 모자람 없이 자라왔던 지용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웃지 않던 유난히 눈에 띄는 아이와 주먹질을 하고 있다. 햇빛이 비출 때면 머리색이 금빛으로 보여서 더욱 더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 비춰지는 하얀 소년. 말수가 없고 항상 혼자 다니는 녀석에게 조금씩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며 자신을 쳐다보는 하얀 얼굴에 손을 대고 싶다. '이상하네. 거참..' 어린 마음에 파고든 하얀 소년의 맑은 눈동자. "헉, 어서 말해! 네가 졌지?" 이를 악물며 버티는 하얀 소년에게 지용인 실없는 미소를 흘린다. "훗." "뭐야? 말햇!! 네가 졌지?!" 숨을 고루 쉬지 못하는 지친 녀석의 얼굴이 자신의 가슴으로 떨구어질 것 같았다. "하하." 지용인 하얀 소년을 향해 실없이 웃어버리고 만다. "하하하핫." 어리벙벙하게 지용이를 쳐다보는 하얀 소년. 당황하는 눈빛을 띄던 그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환한 미소를 짓고 만다. + + + + + "네가 여기까지 왠일이냐?" "오늘 뭐해?" 성훈인 지용이의 학교까지 찾아와 그를 잡아끌었다. 입가에 미소를 간직한 게 기분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뭐하긴. 넌 오늘로써 시험 끝났겠지만, 난 내일까지 죽을 맛이라구." 성훈인 입을 삐죽이는 지용이의 손을 꼭 쥐었다. "뭐야?" 닿는 손길이 싫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미소와 들뜬 듯한 얼굴표정이 예전의 힘이 없던 성훈이의 모습보다 더 불안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괜 시리 불안해지는 지용이. "따라와. 내가 오늘 저녁 사줄게." "쳇, 니가 무슨 돈이 있다구? 먹고 또 나한테 내라고 하는 거 아냐?" "나 돈 많아. 이거 봐." 지용이 앞에 들이민 여러 장 되는 만원짜리 지폐는 액수가 꽤 되어 보인다. "너, 그거 어디서 났어?" 토끼 눈으로 성훈이를 노려보는 지용이. 지용인 성훈이의 작은 어깨를 두 손으로 꼭 쥐고는 흔들기 시작한다. "야, 고죵~" "너, 그거 어디서 났냐니깐!!" "짜식. 내가 도둑질이라도 했을까봐?" 성훈인 지용이의 손을 털고는 그에게 투명한 미소를 실어 보낸다. "너, 그거." "치. 오늘 무드 좀 잡아 보려고 했더니만 녀석 의심도 많네." "........" "떠나기 전에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서 용돈 좀 가불했다. 임마." "떠나?" 어둡게 변해가는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맑게 웃기만 하는 성훈인 지용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또 던지기 시작한다. 하얀 얼굴은 지용이를 지나쳐 조금씩 걷기 시작한다. "나, 하와이 간다." 성훈이의 말에 경직되는 자신의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뭐어?" 가라앉는다. 가라앉는 심장이 지용이에게 고통을 주기 시작한다. "하와이엔 윤지도 있구, 아빠두.." "........" 마른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차이나 풍으로 지어진 군청 교복을 입은 두 소년은 빌딩 앞에 마련된 벤취에 앉아 자그마한 음성으로 주절거린다. "지용아, 하와이의 하늘은 정말 이쁘다고 하더라. 바닷물도 깨끗하고 예쁘데." 잔득 기대에 차있는 성훈이의 행복한 표정을 망가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 멍하니 성훈이의 얘기만 듣던 지용이의 미관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거기 가면 사진 찍어서 보내줄게.. 풋, 기대된다." "그렇게 좋아?" 차갑게 내 뱉는 지용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어?" "너, 하와이 가는 게 그렇게도 좋냐구?" 저녁을 사준다며 비싼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도 하와이에 대한 얘기만 했었다. 지용인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오늘따라 성훈이 녀석이 떠드는 게 듣기 싫었다. 벤취에서 일어나 가방을 메는 지용인 화가 난 듯 하다. "왜 그래? 지용아, 화났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지용이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항상 성훈이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강한 척 하지만 속마음은 깨어지기 쉬운 유리알 같은 아이 성훈일. "나 집에 갈래." "지용아." 지용이의 마이를 붙드는 손의 힘이 느껴진다. '내가 너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던 거지? 그렇지?' "성훈아, 가지마." 아무도 지나치지 않는 빌딩 앞에서 지용인 성훈일 꼭 안아 버렸다. "고고고..죵? 너, 왜 그래?" 어떨 결에 지용이에게 안긴 성훈인 몹시 당황해 버렸다. '이 병신새꺄 모르겠어? 정말 몰라?' "야, 숨막혀~" 성훈이의 음성에도 불구하고 꼭 안은 팔은 풀어지질 않는다. "나, 강성훈을 내 곁에서 멀리 보내기 싫어." 알아들을 수 없는 성훈인 장난스런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짜식. 나도 지용이 너 좋아해. 이제 그만 떨어지자. 야, 징그럽잖아." 그제서야 지용인 성훈이를 둘렸던 팔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자신의 시선에 묶어두고 나즈막히 속삭인다. "난, 강성훈 사랑해.. 임마. 내 맘 알어?" 3)****** 쥐어지지 않는 것. 이 딴 식으로 밖에 할 수 없다. 내가 녀석을 얼마만큼 사랑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만 녀석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생목숨 끓을까 고민하는 녀석일 뿐이다. 이런 성훈이 녀석이 날 미쳐가게 한다. "먹어? 뭐해?" 손에 깁스를 했기 때문인지 수저를 왼손으로 집고는 제사라도 치르는 듯 국물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제께 녀석에게 구타한 건 내가 봐도 심했던 것 같다. 아직도 붓기가 안 빠진 한쪽 눈엔 쌍꺼플이 생기질 않았다. "점심 때 들어 올 테니깐 딴 생각하지마, 알았어?" 그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니면 내 눈을 빤히 쳐다보기만 할뿐, 예전에 지었던 환한 미소 같은 건 찾아 볼 수가 없다. "뭐해. 먹지 않구? 이 등신아!!" 내 성질을 못 이겨 박살난 식탁유리 8장. 녀석의 안면 인 냥 부셔버렸던 유리는 작은 조각이 되어 내 이마에 튀어 오른쪽에 표창처럼 남기게 했다. 녀석이 상처를 입는 것만큼 나, 고지용 역시 상처를 받는다. 녀석이 받는 것 보다 더 두 배의 고통을 내가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는다. 오늘은 참을 것이다. 너의 얼굴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깐. "지용아, 누가 찾아왔는데." 논문 준비 때문에 난 바쁜 편이다. 성훈이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호주에서 그림이나 그리고 있었겠지. "누군데?" 찾아 올 사람은 없었다. 집에 있는 그 자식의 존재 때문에 부모님과도 연락을 끓었고, 고등학교, 대학 친구들과도 소식을 끓고 산지 꽤 된다. 일년 전이였던가? 『 "여자가 생긴거냐?" 녀석의 등장에 몹시도 혼란스럽던 그해 겨울. 술에 잔뜩 취해 부모님 앞에 선 난 유학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은근히 유학 가는 걸 반대하셨던 부모님. 난 녀석 곁에 있기 위해 적성에 맞지 않는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다. "저 한국에서 살께요. 한가지 청이 있는데, 돈이 필요합니다. 액수가.. 좀 많아요." 부모님은 내가 진로를 바꾸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바라시는 길로 난 걸어가려 했으니깐.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모자람 따위는 없었다. 내가 원한다면 큰돈도 만져 볼 수 있었고,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은 항상 내 손에 쥐어 지곤 했었다. 그러나.. 내게 쥐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강성훈. 그 자식의 마음이다. 그 자식의 사랑. "저 성훈이랑 함께 살겁니다." 아무 뜻 없이 그저 친구와 생활하겠거니 하면서 허락하셨던 부모님. 하지만 예고 없이 아파트로 찾아오신 어머닌 성훈이의 존재를 알아버리고 마셨고, 쓰러진 어머닌 깨어나시질 않는다. 오히려 내겐 좋은 일이다. 난 아직도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그 자식과 생활해 나가고 있으니깐. 내게 정작 소중한 건 강성훈. 그 자식뿐이니깐. 』 "절 찾아오셨다구." 뒤돌아 서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새벽녘마다 녀석이 내 옆에 잠들어 있는지 확인하게 만드는 인간. 바로 그 자식 심장 속에서 살고 있는 나쁜 놈! 왜 찾아 왔어? 네가 무슨 염치로 여길 찾아 온 거야? 날 왜 찾아왔어? 이 나쁜 새끼야!! 4)****** 놈이다. 녀석은. (past) "매튜! 매튜!!" 클럽 안에서 주먹질을 자주 하진 않는다. 하지만 날 동양인이라고 놀려대는 녀석들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주먹이 먼저 나가게 된다. DJ로 일은 하며 한국에서 오는 쓰레기 같은 돈 따윈 받질 않는다. 그게 나, 은지원의 유학 동기였고 내가 바라던 삶이다. 내 집안의 권력에서 벗어 나는 것이 내 유학 동기였을 뿐이다.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학교에 가는 날이면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외국인 아이들의 음성이 내 고막에 어지럽게 한다. 한국인이 없던 학교. 외로웠다. 친구도 없었고, 학교에 가면 무조건 엎드려 잠을 청했다. 난 유학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더욱 외로웠다. 내 유학생활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외로움. 그런 나에게 그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같은 한국인이라 해서 소개를 받았고,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점차 많아졌다. 누구든지 웃는 얼굴로 대하는 녀석을 좋아했다. 웃고 있는 얼굴을 볼 때면 더 이상 밝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성훈인 그런 녀석이었다. "한국이름이 뭐야?" 난 녀석을 내 여자친구보다 더 좋아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 자신조차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은 묘한 매력이 있었고, 난 녀석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일종에 체면에 걸려 빨려 들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방심하는 동안 난 그에게 빨려들고 있었다. "성훈이야. 강성훈. 형은? 형은 한국이름이 모야?" "같이 살래?" 모래사장 위에 차를 세워놓고는 녀석에게 물었다. 누군가가 내 옆에 있는 걸 무척 싫어했다. 동거를 하자던 여자친구도 거부했었던 나였는데. "어?" 성훈인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날 쳐다봤다. "내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무슨 의미로 녀석에게 들어와 살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차마 내 자신이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고..." "들어와서 살아." 명령조로 녀석에게 말하면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날 따랐다. 하지만 이번엔 좀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다. 적어도 녀석에게는.. 자존심 강하고 자기 주장 뚜렷한 그런 녀석이 내 앞에서만 순종적인 게 난 좋았다. 내 옆에서 웃고 떠드는 것도 좋았다. 재잘거리는 미성이 듣기 좋았고, 쉴새없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도 좋았다. "그게. 형.." 내 앞에서만 말을 더듬는 아이. 다른 사람 앞에선 똑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 넌 왜 내 앞에선 순종적이지? "왜 그렇게 말이 많아!!" 내 차디찬 말 한마디로 성훈인 내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난 녀석을 망쳐 놓았다. 이 여자 저 여자 갈아치우며 성훈이가 기다리는 집엔 들어가지 않았다. 처음 녀석이 집에 들어왔을 땐 녀석 때문에 일찍 들어가곤 했는데 어느 날 난 녀석이 샤워하는걸 보고 녀석에게 이상한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녀석에게 많이 빠져들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물방울 굴러 떨어지는 촉촉한 몸이 그에게 이끌게 했고, 수건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려 드는 녀석에게 시선을 뗄 수 없게 했다. "에고. 나, 넘 말랐지?" 녀석의 볼이 더운물 때문에 상기되었는지 아니면 내가 욕실로 들어서서 부끄러워 상기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몸을 감추려는 그에게 난 엄청난 말을 하고 말았다. "가리지마. 그대로 있어." 녀석의 동그란 눈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나체에 빠져들었다. 하얀 목선을 따라 내려가는 내 눈이 한곳에 멈춰버렸고, 난 더 이상 그 곳에 서있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내가 구역질 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날 부르는 녀석의 미성이 들렸지만 난 그 자리를 도피하고 있었다. '강성훈은 여자가 아니다. 분명히 녀석은 놈이다! 놈!!' 나만의 혼란스러움은 녀석과 나 사이를 어색하게 하고 있었다. 5)****** 날 죽이고 가!! 지원이의 담배연기가 바람에 실려 지용이의 얼굴에 닿았다. 지원이와 함께 있는 이 공간은 지용이의 인상을 구기게 한다.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묻지 않아도 다 알 수가 있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다. 그저 지용이의 속마음에선 쉴새없이 지원에게 욕설만 퍼붓고 있을 뿐이다. "성훈이 잘 있냐?" "......." 빙판같이 차가운 침묵을 부수고 지원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길게 뿜어 댄 담배향이 맞기 싫은지 오른 손으로 코를 막는다. 지용인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 "그 녀석 생일이.." "상관하지마!!" 지원이 찾아오면 그의 멱살을 잡고 업신 두들겨 버리던가 아니면 그에게 욕설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어느덧 그가 찾아오는 횟수가 늘어버린 지금에선 녀석에게 퍼붓는 자신의 욕설조차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훗, 이제 강성훈이 고지용의 소유가 됐다고 착각하는 건가?" 지원의 비웃는 듯한 음성이 지용이의 귀를 간지럽힌다. "그 자식 잘 지내고 있으니깐, 그냥 내버려둬!!" 불안했다. 지원이 아파트로 찾아와 성훈이를 데려 갈까봐, 항상 불안하고 안절부절 했다. "며칠 전에 병원에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잘 지내는 건가?" 성훈이의 모든 걸 알고 지내는 그가 저주스럽다. 이제와서 그를 데려가려는 그가 자신의 힘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개자식. 찾아오지마.' "성훈이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 네가 중간에서 성훈이와 날 막아대는데, 이제 재밌지도 않아." 닿을 수 없었던 성훈이의 존재가 지원이에게만 향해 있다. 그와 지내는 시간마다 느껴져 오는 지원이의 흔적이 지용이를 고통스럽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왔다. 가을에 찾아온 후로 그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성훈이 책임질 수 있다. 그 녀석 내게 보내라." '난 12년이다. 2년 동안 네놈과 지낸 세월보다 훨씬 더 길단 말이다. 넌 성훈이를 노리개 취급했지만, 난 진심으로 성훈이를 사랑한다.' 지원이의 강렬한 눈동자가 지용이를 노려보고 있다. "훗, 네가 성훈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 지용이 눈동자에 담고 있는 사람은 성훈이의 심장속에 사는 인간이다. 늘 성훈이 혼자만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성훈이를 쥐고 있는 지원이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용이에게도 기회가 주어졌었다. 아니, 지용인 기회를 스스로 만들었다. 그가 완전하게. 성훈이를 버릴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었었다. 기회를 만드는 건 간단했다. 지원이의 자존심을 건들이면 되는 것 이였으니깐. 지원인 자신을 위해 저지른 일인데. 그것도 모르는 채 성훈이를 버렸다. "훗, 해줄 수 있는 것? 더 이상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겠지." "......." "다음주에 결혼을 하거든." 은지원이 결혼을 한다. 남의 이목을 피해서 성훈이를 독차지하고 싶어 그는 결혼이라는 사업을 추진하려 한다. "헛, 성훈이가 네놈에게 갈 것 같아?" "나한테 돌아온다. 성훈인. 그 녀석 내가 없으면 못살거든." "성훈이가 너 없이 못사는 게 아니라 네가 그 녀석 없으면 못사는 거겠지!!" 입술을 꼭 깨물며 지원이에게 차갑게 말했다. 찬바람은 불어 지원이 세 개째 무는 담배에 불을 붙여지는걸 방해하고 있다. "그럴까?" 지원이의 조소에 실린 음성이 섬짓하다. "성훈인 안 돌아가!! 너 같은 녀석에겐 더 이상!!" "네 녀석 부모님. 지금 널 아신다면 꽤 좋아하시겠더구나." 지원이의 냉소어린 웃음에 지용인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어머닌 아무 말 없이 쓰러지셨다. 어느 누구도 모른다. 지용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그저 아버지가 원하는데로 경영학 박사만 따면 되는 것이다. "지금 협박.. 하는 거냐? 너?" "생각하고 싶은 데로 생각해." 지원이 흘리고 가는 말에 지용인 얼이 빠진다. 악마같은 놈!! '날 낳아준 어머니보다 더 사랑한다. 세상사람들이 날 비난해도 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만. 나, 더 이상 네 녀석에게 성훈이 안 보낸다. 더 이상은 뺏기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은.. 난, 녀석이 없으면 살수가 없어.' 술은 마셔도 마셔도 지원이가 흘린 말은 지워지지 않고 지용이를 괴롭히고 있다. 점심때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아마도 점심을 굶은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밤하늘이 흐릿하다. 긴 한숨을 흘리며 담배를 꺼내본다. 없다. 돛대마저도.. 가로등에 몸을 실어 본다. 젠장. 집안에서 성훈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모든 게 엉망이 될 것이다. 아니 모든 게 끝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보내는 건 생각하기도 싫다. '또 시작할 수 없어. 네가 그 자식에게 돌아가, 혼자 남겨진 채 망가지는 일 그만 하고 싶다. 생각하기도 싫어.' 살을 에는 시린 바람이 지용이의 가슴속으로 들어온다. 술을 마셨는데도 온몸이 얼어 버릴 것만 같다. 긴 한숨에 그의 입김이 하늘위로 올라간다. "강성훈!! 이번에도 지원이에게 가려면 날 죽이고 갓!! 나,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6)****** 아직은 그래. 두 가닥 뚜렷한 줄로 그어있는 내 손목을 들여다본다. 죽음으로 끝내려는 나. 지원형이 다시 찾아와 날 데려가 주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두렵다. 형에게 또 다시 버림받고 갈곳이 없어 질까봐서 난 두렵다. 하지만 난 형이 날 데려가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점심때 들어온다던 지용인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녀석이 들어올 시간이 꽤 되었는데도 들어오질 않는다. 혹시 지원형이 지용이를 찾아 온걸까? 찰칵--- 문열리는 소리에 현관을 빼꼼이 쳐다보았다. "집에 있으면서 뭐했어? 불이나 켜놓지." 지용이가 술을 마셨다. 몸에 맞지 않아 잘 마시지 않는데.. 오늘 지원형이 널 찾아 온 거지? 거실 조명을 켜놓고 소파위에 덥석 주저앉는 지용이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 할말 있어?" 지용이가 날 쳐다본다. 지원형 만났구나? 그렇지? 지용이의 눈을 보면 다 알 수 있다. 지용인 밖에서 울고 들어온 것 같았다. 녀석이 눈이 붉게 충혈 돼 있으니깐. "그렇게 서있지 말고 물이나 가져와." 앞으로 흘려 내린 앞머리를 넘기며 내 눈을 피하려 드는걸 보니 확실하다. "이번엔 뭐래?" 내 말의 의미를 지용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머리를 쓸어 올리던 손가락의 미동이 잠시 멈칫하는걸 보니 지용인 오늘 지원형을 만났다. "뭐라고 궁시렁거려! 물이나 가져왓!!" 냉장고로 향하는 성훈이를 쳐다보며 긴 한숨을 쉰다. '녀석. 눈치한번 빠르네.' 습관처럼 담배를 찾는 손. 하지만 담배는 없다. 전에 사놓은 것이 침실 옆에 있을텐데, 방으로 몸을 옮기기가 귀찮았다. 냉장고를 열고, 왼손으로 물병을 꺼내는 성훈이의 움직임이 애처롭다. '널 내 것으로 만든다. 그 새끼 생각하지 못하도록 난 그렇게 할 것이다.' "여기 물.." 잘 사용하질 않던 왼손이라 그런지 따랐던 물보다는 휠씬 양이 적다. 컵을 받아들고는 입술만 축여본다. "강성훈." "......." "나, 너 사랑해." 나즈막히 속삭인다. 날 사랑한다면 정말 잘할 수 있는데. 행복에 숨이 막혀 버릴 정도로 잘해줄 수 있는데.. "......." "대답해봐. 성훈아, 왜 아무 말도 안해?" "........" "이 병신 새꺄 내가 널 사랑한다구! 너 귀먹었어?" 독기어린 음성에 비해 한없이 슬퍼 보이는 눈. "........" "이 등신." 성훈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아무 대답도 없이 지용이의 마른 입술이 축여주는 촉촉한 입맞춤. "뭐래? 지원이." "......." 더 이상 묻지 않으려고 하지만, 성훈인 지원이에 대해서 묻는다. "아-----" 성훈이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리고는 그의 어깨에 힘을 가해 본다. "뭐? 지원이? 지원이라고 나불거렸어?" 슬픈 눈이다. 입술에 얼얼함 보다 지용이가 시작할 구타에 몸이 움트러 든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지원이가 자신을 데리고 갈 것인지를. "......." "떠들어봐!! 이 개자식!! 더 떠들어봐!!" "......." 몹시 흔들어 대다가 바닥으로 밀쳐버린다. "더 떠들어 보라구!! 뭐? 또 은지원이야!! 널 가지고 논 새끼가 그렇게 그리워?" "......." "나쁜 놈!! 더 떠들어 보란 말야!!" 지용인 모범생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쭉 모범생이였고, 부잣집 도련님으로 아무런 부족함 없이 자라왔다. 바닥에 엎드려 일어서지 않는 성훈이를 일으킨다. 지용이 손에 이끌러 일으켜지는 성훈이. 성훈이가 솜털처럼 가벼워서 인지 그를 일으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용이의 간절함 따위에 관심이 없는 그의 눈동자에 샘이 비춰진다. "지용아, 나 지원형 보고싶어. 나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 형을 미워하는 만큼.. 형을 사랑해. 나, 아직은 그래." "훗, 그래. 아직은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후엔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네." "지용.. 아악--" 성훈이의 머리채를 끌고 침실로 가는 지용이의 마음은 무겁다.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강성훈. 내 손에 죽어서 마지막에 네 눈에 담는 사람이 나, 고지용이 되게 해. 차라리 내 손에 죽어!" 성훈이가 걸친 옷들은 쉽게 벗겨져 침대 밑으로 떨어지고, 방안의 냉기에 더욱 밀착되는 지용이의 몸이 성훈이의 몸을 장악하려 든다. 벗겨진 허벅지 사이로 느껴지는 지용이의 싸늘한 다리. "지.." 순수한 사랑이나 생각했었다. 성훈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이 그를 망치는 게 아닌가 해서 성훈이의 앵두같은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도 아껴왔던 지용이. 멀리서 지켜만 보며 보살펴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성훈이가 입을 맞춰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 했다. 그래서 지원이 찾아오는 날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 그만!!" 밀치려는 성훈이의 손목을 꼭 부여잡고는 입술로써 입술을 틀어막았다. '이대로 숨막히게 만들어 버릴까? 너 이대로 잠들고 싶지 않니? 너 자꾸 죽으려고만 했잖아. 죽으려면 내 손에서 죽어!!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내 손에서 죽어.' 7)****** 내가 네 곁에 함께 있어도. 지원이가 흘리고 간 말에 지용이의 속은 편치 않다. 자신 옆에 누워 있는 성훈이를 건들어 본다. "자니?" "......." 건들어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성훈이의 행동. 조금 전에 자신이 깨물었던 곳은 붉게 물들어져 있다. "휴---" 긴 한숨을 쉬며 이마에 긴 팔을 얹어놓는 지용이 머리가 어지럽다. '강제로 널 다루고 싶지 않은데. 널 덥치는 행위 따윈 다신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그 자식한테 돌아가지마. 그 자식. 널 또 버릴거야." 자신이 소유하지 못하는 고통. 성훈이의 무언은 지용이의 가슴 한복판에 긴 침을 내리 꽂는 것과 같다. 불안함이 감도는 침묵. 성훈이의 하얀 피부에 물들어 놓은 자국들이 미안해진다. 지용인 등을 보이며 누워 있는 성훈이에게 다시 눈을 돌린다. '그 자식 생각하는구나. 안자는 거 알아.' "풋." 한숨어린 웃음을 지어버리고 담배를 찾던 지용이의 손이 잠시 멈칫한다. 들썩거리는 어깨는 말하지 않아도 성훈이가 흘릴 말을 알 수 있게 한다. '지금.. 입열면 너, 죽여 버릴거야!' 고개를 힘없이 젖고는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찾아 불을 지피려 할 때, 그의 미성이 지용이의 신경세포를 건들어 버린다. "지용아." '말하지마. 말하면 널, 정말 죽여 버릴거야.' "지용아, 나.." 울먹이는 음성에 지용인 피우려던 담배를 꼭 쥐어 버린다. 힘없이 부러지는 담배. 성훈이의 목인냥 꼭 쥐고 비틀어 버린다. "물 마실건데, 너도 마실래?" 성훈이의 말을 잘라 화제를 돌리려고 한다. 듣지 않아도 그가 할말을 너무도 잘 아는 지용이. "......." "코코아로 타줄까? 아니다, 갈증 날테니깐, 시원한 음료수?" "나.." "그래, 음료수 갖다줄게." 침대에서 일어서는 지용이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 티하나를 집어들고는 또 다른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성훈아, 제발.' "나, 가고 싶어." "......." 주방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지용이의 몸은 마비되어 버린다. '가? 간다구?' 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용인 꼭 쥐어지는 자신의 주먹을 쳐다본다. "나, 지원형 곁으로 가고 싶어. 나.." 울먹임도 익숙하다. 평소에도 성훈이가 저렇게 입을 열었다면 덜 속상했을 텐데. 성훈인 항상 지용이에게 무언의 대화를 했다. 좋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싫으면 고개를 젖고. "......." "지용아, 나 지원형 곁에 있고 싶어."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성훈이의 음성을 없애버리고 싶다. '걷지 못하게 하면 내 곁을 못 떠날까? 아니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눈을 멀게 할까? 그것도 아니면.'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아무 것도 못 들었다는 듯 주방 쪽으로 향한다. 냉장고문을 열고 차가운 생수를 꺼내 뚜껑을 따고 목을 축여보았다. 갈증. 몸속으로 들어간 생수. 온몸의 갈증을 풀어주지만, 곧이어 몸밖으로 배출되어 버린다. 따갑게 느껴지는 눈시울에 눈을 비벼 버린다. '언제까지 난 너의 그림자로만 살아야 할까? 난 늘 너의 곁에서 맴돌고 있는데도 넌.'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바깥세상을 내려다본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떨어지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져 온다. '미친새끼. 손목에 흉터를 남기려면 차라리 떨어져서 죽어.' 씁쓸한 웃음을 흘리고, 조금전에 감은 머리에 손을 얹는다. 구슬이 되어 어깨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몹시 차다. 새벽내내 침대에 누워서 꼼짝 않는 성훈이가 신경 쓰인다. 지용인 리모콘을 찾아 TV의 전원을 켜고, 쇼파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지용이의 턱을 괴고 있던 팔뚝위로 떨어졌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면서도 성훈이를 생각한다. 조금의 움직임 없이 그대로 누워 있다. '나, 안 보낸다. 이번엔 쉽게 안 보내. 널 어떻게 내 곁에 있도록 만들었는데.'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는 신경질적으로 리모콘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떨어지는 물방울. 열어놓은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냉기. '성훈아, 춥지 않아? 날 불러. 춥다고 말하면 내가 널 안아줄게. 따뜻하게 널, 안아줄게.'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나 보다. 배란다 창을 열어놓고 잠이 들어선지 감기 기운이 도는 것 같다. 깜박 잠이 든 지용이가 벌떡 일어나 확인하는 곳이 있다. 침대. 그가 없다. 성훈이. "강성훈?" 덜컥 내려앉는 가슴을 추스리며 아파트 이곳저곳에 눈을 굴린다. 주방에도 베란다에도 옷가지를 쌓아둔 창고 같은 방에도 그는 없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오는 욕실. 마른침을 꼴딱 삼키고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려본다. '쉬펄, 제발 있어.' 믿지 않았던 신에게 빌어본다. 그가 있어 주기를. 그가 자신을 떠나지 않았기를.. 간절하고 간절하게 빌어본다. '떠난거 아니지? 그렇지 성훈아.' 달각하는 소리와 함께 욕실문은 열려졌다. 하지만.. 지용이가 찾는 그는 없다. 8)****** 나 지원이다. 싸늘한 공기가 한잠도 자지 않는 성훈이의 눈거플을 내리려고만 든다. 불안하게 내딛고 올라온 아파트 옥상. 해가 뜨려는지 올라왔던 시각보다 더 싸늘하게 느껴진다. 하얀 입김을 불어놓고, 지긋이 눈을 감는다. 부러진 오른팔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안아본다. 그래도 춥다. '형에게 가고 싶어. 형이 날 버린다 해도, 난 형이 좋아.' 지원이는 성훈이에게 따뜻한 사람이 아니였다. 하지만 함께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감사해 하며 살았다. 차갑던 지원이가 가끔 남기는 따뜻한 외마디에 눈물이나 보이던 여린 감성. '이미 내 몸은 상처투성이야. 형이 또 상처를 준다해도 이젠 아프지 않을 것 같아. 그런데..' 자신의 몸에 닿는 찬 공기에 얼어버린 것 같다.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애를 써서 일으켜 옥상을 나가려 하지만 모든 것이 흔들거리고, 성훈인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떠난 놈은 떠올리지 않는다. 잘난것도 없으면서 날 떠난다? 사회에서 쏟아질 비난의 눈이 두려워 도망이나 쳐대다니. 그런 놈은 잡지 않는다. 오는 놈 안 막고 가는 놈 안 잡는다. 이것이 나의 연예철학.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나의 연예철학이다. 일출을 보기 위해 난 오늘도 옥상위로 올라서고 있다. 일출을 보며 다시 써야하는 내 연예철학을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하늘을 뚫고 얼굴을 내미는 태양을 볼 때면 내 어지러운 머리는 단순하게 변해 버린다. 열정적인 태양. 난 아직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없다. 어제는 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인간같지도 않은 냉혈인간. 내 형같지도 않은 그가 아버지께 고개를 숙였다고 했다. 철들었다며 결혼을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그 냉혈인간이 늙은 노부부를 즐겁게 해준다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도 고개를 숙이는 구나. 거지같은 세상. 형이라고 부르기엔 인간같지 않은 녀석 때문에 머리가 다 복잡해진다. 어라, 저건 또 뭐야? 술주정뱅이? 얼굴은 하얗고, 이곳저곳 성한 곳 없이 두들겨 맞은 흔적이 있다. 어제 깡패를 만나 실컷 두들겨 맞은걸까? 옥상에서 안고 내려왔을 때, 녀석의 체중은 50kg정도. 애띤 얼굴을 보아하니 나이는 대충 10대후반 아니면 20대초반? 창백한 피부를 보니 잘 먹고 산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저놈을 안았을 때 녀석의 개미만한 소리로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는데, 무엇을 불렀는지 잘 모르겠다. 햇빛이 길어질 무렵 콜라에 입을 대던 난 묘하게 쳐다보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했는지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두 눈동자가 안정적이질 못하다. "안가고 여기에 계속 있을거야?" 담배를 끓으려고 노력중이다. 그래서 다른 기호식품을 찾은 게 쵸콜릿. 달콤한 향내가 내 입안에서 녹을 때면 단잠에서 깨어 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 그리고 보니 저 녀석이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 혼자서만 떠들었던 것 같다. 갈 데가 없어 보이는 눈동자. 날 보고 있는 눈동자는 없다. 묘한 매력이 있는 녀석이다. 그러나 난 곱상하게 생긴 녀석은 절대 사절이다. 물론 여린 감성을 지니고 있는 녀석도 사절이다. 난 강한 게 좋다. 내가 제일 미워하는 녀석도 강하다. 결혼을 한다는 그 미친새끼. 떠올려지는 미친 새끼의 강한 눈매가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려한다. "멀뚱거리지 말고, 네 집으로 돌아가." 또 하나의 쵸콜릿을 들어본다. 입안에 넣어? 말어? 내 손에서 궁글러지는 쵸콜릿이 내 손의 체온 때문에 녹아 버렸다. RRRRRRRRRR----- 이 시간에 누굴까? 혹시 어제 떠나버린 놈? 미련따위는 없다. 사랑같은 건 없으니깐. RRRRRRRRRR----- 전화벨이 울러대지만 난 받지 않는다. 난 지금 수화기를 붙들고 떠들고 싶지 않으니깐. RRRRRRRRRR----- 누군지 정말 질기기도 하다. [장수원이 입니다, 외출중이니 메시지 남겨주세요.] PP----- [집에 있는 거 안다. 받아라. 나다.] 은지원의 목소리. 결혼준비로 꽤 바쁘실텐데 이 누추한 곳에 전화를 다 주시고.. 훗. [받앗! 나 지원이다.] 웃음이 나오는걸 참으려고 입을 가렸는데, 뭐야? "형! 지원형!! 나 성훈이야. 성훈이. 형 나 성훈이야!! 지원형." 이 집의 주인은 나인데. 이상하게도 옥상에서 데려온 녀석이 수화기를 들었다. 닭똥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는 녀석이 날 의식하지도 않고 지원이 새끼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불러댄다. 뭐야 저 녀석??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꽉 깨물었다. 현관문을 닫고는 현관에 몸을 기대 스르륵 주저앉는다. '미친놈. 넌 상처받는 게 그렇게도 좋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성훈이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성훈인 아무대도 없었다. 두 눈이 아려오지만 지용인 울지 않는다. '다시 돌아오면 너 걷지도 못하게 할꺼야. 네 영혼을 갖지 못한다면 해도 네 육신만이라도 가져야겠다. 난 그럴 자격이 있다. 강성훈.. 네가 나에게 진 빚이 많으니깐.' 9)****** 재회. "뭐야!!" 지원인 수원이 현관을 열자마자, 앉아서 꼼짝하지 않는 하얀 얼굴을 쳐다본다. 세상 끝날때까지 자신의 소유로만 느껴지는 얼굴. 간절한 표정의 얼굴이 지원이를 쳐다본다. "지.. 지원이형." 자신을 쳐다보는 두 눈은 물기에 젖어있고, 하얗게 뜬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지원인 성훈이의 부름에 아무런 말도 않는다. 한참을 멍하니 서서는 성훈이를 바라만 본다. 잠시 흔들리는 듯 하더니 다시 제자리를 잡는 지원이의 눈동자. "수원아, 나가." "뭣? 지금 너 뭐라고 했냐?" 형이라는 호칭은 붙이지 않는다. 술 마시고 실수한 것일 지라도 딴 놈과 즐기는 건 차마 볼 수가 없다. "나가 있어!" "쳇, 여기가 호텔인지 착각하나본데 나가려면 네가 꺼져!!" 성훈이를 바라보는 지원이의 눈이 싫다. 지원이의 강한 눈이 좋았다. 독기를 품었어도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좋았다. 그런데, 한 낫 깡마른 연약한 녀석 때문에 지원이의 눈이 잠시 흔들거렸다. 지원이 자신을 노려보지만 수원인 꼼짝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가.있.어." 거부할 수 없는 눈동자. 지원인 무시할 수 없는 명령조의 어투로 수원이에게 말한다. 나가있어.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여긴 내집인거.." 퍽--- 날라든 주먹은 수원이의 배에 강타하고 그 충격으로 밀쳐져 현관에 몸을 박았다. 몸 안의 신장기관들이 으스러졌는지 고통이 심하다. 달칵--- "돌아다니다 와!!" 문밖으로 내쫓긴다. 지원인 자신의 지갑과 차키를 던져 주고 문을 닫아 버렸다. 입가에 머금는 피. '저 놈이였구나. 저놈이 지원이 널 변하게 한 거지? 저놈 때문에!!' "야!! 이 띱새끼야!!" 현관을 발로 차보기도 하고, 부서져라 두들기기도 하지만, 지원이 잠귄 문은 내일 아침이 되어도 안 열릴 것이다. "개자식, 엿이나 쳐 먹어라!!" 현관에서 떨어져 엘레베이터 문으로 몸을 기댄다. '쉬펄 놈, 항상 지 멋대로야.' 띵--- 수원이의 몸이 열린 엘리베이터로 쓰러지듯 넘어갔는데, 누군가가 그를 지탱해 주고 있다. "홋, 은수원 너 날 기다린거냐?" "......." 빙그레 웃는 재진이의 얼굴이 보인다. "나 기다린 거 아니였어? 에라? 이 자식 보게나. 왜 그렇게 음흉하게 쳐다봐?" '오늘만 내 연예철학 박살낸다.' 수원인 재진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는 closed 단추를 길게 놀러버렸다. 바라만 본다. 물기어린 눈동자는 간절하게 지원이를 바라보고, 그 동안의 자신의 감정들을 떠올리면서 지원이 역시 성훈이를 뚫어져라 바라만 본다. '이런 걸 그리웠다라고 하는건가? 그리움? 훗.' 떠올려지는 생각을 접고는 성훈이에게 향한다. 자신을 쳐다보는 성훈인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마른 모습이다. 아직 아물지 않은 눈시울의 푸른 멍이 지원이의 눈속으로 들어온다. "지용이 새끼가 때렸냐?" "........." 아무말없이 지원이의 눈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성훈인. 지원인 손을 뻗어 멍든 곳에 손가락을 살며시 갖다 대고는 원을 그리듯 매만진다. "그 새끼 성질도 보통은 아니구나." 간절함의 손놀림. 성훈이의 눈에 맴돌던 지원이의 손에 하얗고 덜덜 떨고 있는 손이 다았다. "나, 사랑한거지?" 동그란 눈망울은 물기가 어려 있고, 색을 잃은 입술에선 나즈막이 속삭여 진다. '사랑?' "......." 성훈이의 음성에 치료해주는 것 같던 손가락은 성훈이의 피부에서 떨어지고 성훈이의 눈을 바라보던 눈동자도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길게 한숨을 쉬고 있다. '불안해. 나 또 헛소리 짓걸인거지?' "아니야. 형이 나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어. 형이 아무 말 안 해도 나.." 울먹이려는 입술에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도록 막아 버린다. '널 지독하게 사랑한지도 모른다. 널 사랑한다는 건.' 입술 속을 오가며 자연스레 하얀 가슴속에 손을 집어넣고 집어넣었던 손은 능숙하게 성훈이에게 걸쳐진 장애물들을 하나둘 벗겨 나가고 있다. 입술 속에서 맴돌던 것은 목선을 타고 내려오고, 가슴으로 내려오려다 속도가 멈춰버린다. 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성훈이를 한번 쳐다본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는 녀석. 떠나라면 떠날 것이고, 죽으라면 죽을 것 같은.. 자신의 말에 순종적인 녀석. "강성훈, 넌 내꺼지?" 멈춰진 지원이의 움직임이 다시 성훈이를 불안하게 한다. 뜬금없이 물어오는 저 소리도.. 감은 눈을 두렵게 뜨려는 성훈이의 눈가에 이미 맺혔던 눈물이 또로록 떨어졌다. "형." "내 꺼지?" "......." 대답은 없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성훈이. "대답해." "난, 형만 사랑해." 성훈이의 작은 미성을 확인하고는 작게 미소짓는다. 익숙하지 않는 미소. 소유의 유희. 지원인 그의 가슴에 남겨진 지용이의 키스마크에 입을 댄다. "아--!" 지용이의 흔적을 도려내는 듯 물어뜯는 지원이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고지용. 넌 내가 소유한 것은 가질 수 없어. 왜냐면 성훈인 내게서 벗어나기 힘들거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우면서도 성훈인 반항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저 이를 악물며 비명소리를 작게 내는 것 외엔. 어쩌면 성훈이에겐 가장 큰 행복의 고통일수도 있으니깐. "은수원 이번엔 계산 어떻게 하냐?" 호텔로 들어서자마자, 긴 키스로 숨을 헐떡거렸다. 이러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수원이가 먼저 덥치려하다니. "장수원이라고 불러." 차갑게 내뱉는 수원이의 음성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재진인 수원이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담배 한개피를 들어올렸다. 찰칵--- 몇번의 라이터 당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담배향이 느껴진다. 재진이가 뿜어대는 담배향이 수원이를 유혹하고 있다. 수원인 뿌연 담배연기사이로 자신을 노려보던 지원이의 모습이 떠올려지자, 신경질적으로 돌아누웠다. "담배꺼!!" "쳇, 녀석. 오늘 너 쇼크받은 거 있냐?" "담배나 꺼!!" 수원이의 매서운 음성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두 세번 담배필터를 두들겨 총알이 빠져나가게 한다. "껐다. 이 새꺄!!" "......." 재진인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고는 다시 수원이의 입술에 대였다. "오늘의 마지막 써비스. 야, 계산이나 해." 대였던 손가락으로 수원이의 팔을 두들기고는 바닥에 널려있는 티하나를 집어들었다. "넌, 돈 같은 거 안 받고도 이런 거 할 수 있어?" 힘없는 음성으로 떠들고 있는 수원이에게 시선을 돌린다. 하던 행동을 멈추고 피식 웃는 재진이. "훗, 녀석 너 이제 미쳤구나?" "돈 안 받아도 할 수 있어? 넌?" "없어. 난 돈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 뿐이야." 돈은 많았다. 재진이의 지갑속에서 썩고 있는 지폐는 샐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저 자신을 통제하기 위한 방패수단으로 돈을 받는 것 뿐이다. "난, 돈 같은 거 안 받아도 할 수 있다." 수원이가 흘리는 말에 재진이의 눈이 약간은 진지하게 변하더니 다시 장난끼 가득한 미소가 번져 버린다. "돈이나 내놔. 이 새꺄. 나 갈 때 있어." "........" 재진인 바지지퍼를 올리며 담배하나를 다시 물었다. "장수. 돈이나 내 놔." "미친새끼!!" "내 부업일 뿐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똑바로 들어, 장수원. 난 게이가 아니야. 돈 없이 한다는 건 게이나 하는 짓이라구. 너, 위험수치다.. 그나저나 지갑 어딨어?" 빠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 한번 관계를 맺으면 다신 그를 찾지 않는다. 하지만 재진인 몇 해간 수원이 곁에서 맴돌고 있다. 탁자에 놓여진 차 키와 두득한 지갑이 재진이의 눈속으로 들어온다. 재진인 지갑에서 만원짜리 지폐 한 장 꺼내고는 던지듯 수원이에게서 흘린다. "사랑이란 거 존재하지 않는다. 장수. 적어도 내 연예철학에선 말야. 푸하핫."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도 몇해. 자신을 철저히 숨기기 위한 일종의 무기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 간다." 문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수원인 침대시트를 끌어안고 푸념석인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나, 게이다.. 이 쉬펄놈아." 10)****** 행복한 고통. 지원이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성훈이의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행위는 끝이 보이질 않는다. 탐하지 못한 하얀 신체에 지용이가 남긴 흔적보다 더 붉고 선명한 자욱을 새겨 놓는다. 성훈이의 입속으로 쉴새없이 들어가는 타액들. '형, 형이 뭐라해도 난 형 사랑해. 성훈인.' 끓이지 않는 입맞춤. 입맞춤. 그 동안의 공백기에 굶주렸다는 듯 지원인 쉴새없이 성훈이의 몸에 고통을 준다. 고통의 강도가 세어지면 성훈인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지원이의 행위가 멈출까봐 염려돼 이를 악물며 버티고 있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촉촉함은 지원이의 타액과 그가 물어뜯어 세어나오는 피. 지금 이 순간 지원이가 주는 고통을 성훈인 감사해 하고 있다.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줘.' 지원이가 주는 고통에 의식을 잃었지만 두 눈을 뜨고 나면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 위에 있다는 게 행복했다. RRRRRRRRR------ 핸드폰 올리는 소리에 지원인 잠시 성훈이의 입술에서 입을 떼고는 자신이 벗어놓은 정장자켓을 쳐다보았다. RRRRRRRRR------- 길게 울려 퍼지는 소리. 자켓에 눈이 가있던 지원이의 고개는 성훈이의 가슴에 놓여졌다. "강성훈, 넌 내꺼다."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을 흘리고는 성훈이 가슴의 살점을 자신의 입속으로 길게 빨아들었다. RRRRRRRRR------- 울려대는 벨소리에 지원이의 몸이 성훈이에게서 떨어진다. 지원이의 온기는 그가 핸드폰을 받기위해 나가고 난후 차갑게 식어버린다. 성훈이에게 차갑게 느껴지는 공기. 불안한 시선으로 핸드폰에 음성을 담는 지원이를 바라본다. 자신에게서 멀어질 것 같은 느낌. 항상 안고 살았던 불안함. "형." 핸드폰을 받는 지원이가 아무말 하지 말라는 눈으로 성훈이를 내려다본다. "어. 알았어. 알았다니깐!!" 지원이 이마에 잡힌 깊게 패인 골이 성훈이의 가슴을 내려놓는다. '가는거지? 성훈이 이렇게 내버려두고.. 나 지금 추운데.' 슬픈 눈망울로 지원이를 바라보는 성훈이. 이미 볼을 타고 흘려 내리는 눈물이 지원이의 미관을 더 찌프리게 한다. "누구 죽었어? 왜 울어?" 짧은 한마디를 던지고는 욕실로 들어가는 지원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날, 사랑해? 형? 성훈이 사랑해? 성훈이 사랑하는거지? 그렇지?" 떨어지는 눈물을 지원이가 볼까봐 흐르는 즉시 닦아버린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 눈물. "난.. 형 사랑해." 잘 맞지 않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성훈이가 온 후로 버릇이 들 정도로 늘어버린 술. 그저께 입에 댔던 양주를 다시 입에 대본다. 담배를 안주삼아 벌컥벌컥 넘기는 양주가 지용이의 식도를 다 타버리게 하는 것 같다. "쉬펄. 그래 다 타라. 다 타서 이대로 죽어버리지, 뭐. 쳇." 일어서는 그의 몸은 비틀거린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반복해야 하는건가? 생각하자니 복잡해지는 자신의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해열제가 어딨었지? 아스피린. 진통제.. 쉬펄 개새끼!!" 벽으로 던져버리는 반쯤 남은 술이 한쪽 벽에 진열된 장식물들을 부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벽에 걸려 있던 중학교시절의 사진 속 두 사람은 행복해 보인다. 하얗게 웃는 성훈이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 동그란 눈이 눈웃음을 치고 있고, 지용이에게 약간 떨구어진 고개가 자신의 어깨에 닿을 것 같다. "병신새끼!! 그렇게 버림받고도 몰라? 그 자식이 어떤 새낀지? 이 머저리같은 놈아!!" 사진속의 성훈인 하얗게 웃고 있다. 세상에 근심같은 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세상에 갓 태어나 모든 게 신기한 듯한 얼굴로 웃고 있다. 사진속을 들여다보는 지용이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성훈이가 웃고 있는 사진위로 소리없이 떨어졌다. "병신새끼, 이쁘기도 하네. 하.. 핫하하." 허탈한 웃음뒤로 이어지는 흐느낌. 성훈인 지용이의 가슴속에 진한 멍을 남긴다. 성훈이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진하고 잔인한 고통의 흔적을. "형!!" 현관으로 나가는 지원이의 자켓에 손을 대었다. 붙잡은 손으로 가는 싸늘한 시선에 성훈이 스스럼없이 손을 놓고 지원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가지마." 미미하게 어깨가 들썩거리더니 또 눈물을 보인다. "여전하구나. 질질 짜는 건." 알수 없는 미소를 짓는 지원인 성훈이의 어깨를 끌어들었다. "성훈아, 너 내 곁에 있고 싶지?" "응." 울먹이는 성훈이의 미성은 갈라지고 있다. "그럼, 울지마. 너 우는 거 정말 보기 싫다." "......." 성훈이에게서 몸을 떼고 현관으로 가서는 생소하게 보이는 구두에 발을 집어넣는다. '항상 운동화만 신었는데.. 힙합바지를 입고 춤을 추던 형은 어디로 갔을까? 강제라도 좋았던 형의 손길이 낯설어.' "연락할게." 붙잡고 매달려서라도 그를 따라나서고 싶었다. "형."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너 얼굴이나 닦아. 사내녀석이 질질 짜기는." "형." 현관으로 빠져나가는 지원일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그가 나가는걸 지켜보기만 한다. "강성훈." 닫히지 않은 문사이로 그의 음성이 들려온다. ".......?" "데리려 올게." 쾅-- 닫혀진 문사이로 들렸던 지원이의 음성이 성훈이의 귓가를 맴돈다. '데리려 온다구? 형, 성훈이 데리려 올꺼야? 정말 그럴거야?' 그제서야 닫혀진 문을 열어본다. "형!!" 그는 없다. 지원인 벌써 성훈이가 있는 아파트를 나서고 없다. '나 어디에 있어야 해? 형.. 나 어디에 있으면 형이 날 찾아올꺼야? 형, 나 여기 있어야.' "넌, 안가냐?" 생각에 빠져 있는 성훈이에게 매몰차게 말하는 수원이의 음성에 성훈인 주눅 든 눈동자로 그를 바라본다. "여긴 호텔이 아니야!! 알아들어?" 수원인 자신의 엉덩이에 뭍은 이물질을 떨고 계단에서 일어서 현관을 붙들고 있는 성훈이를 현관밖으로 밀쳐버렸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가 무너지도록 문을 닫아 버린다. '형, 연락처.' 성훈인 닫혀진 수원이의 문을 두들긴다. "이봐요. 지원이형 연락처 좀 가르쳐 주세요. 저기.." 성훈이의 두들김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몇 번을 더 두들겼다. "형, 연락처 좀 가르쳐.." 신경질적으로 문따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원이의 얼굴이 비춰졌다. "나도 그 새끼 연락처 모르니깐 딴 데 가서 알아봐!!" 얼굴 생김과는 다르게 신경질 적으로 내뱉는다. 그리고 수원인 섬짓한 미소를 띠고는 다시 문을 닫아버린다. '어디가서 알아내요? 형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지원이가 남긴 가슴의 흔적이 아프다. 쓰라려 오는 고통. 따가워. 가슴에 얹어진 손의 열기 때문인지 더 쓰라리고 따갑다. "그래. 지용인 알고 있을꺼야. 지용인 알겠지." 조심스레 계단을 딛는 성훈인 비틀거리고 있다. 난관을 잡고는 있지만, 곧 꼬꾸라질 듯하다. '내 운명이다. 죽는 날까지 이렇게 살아간다해도 난.. 상관없어. 가끔이라도 형의 손길이 닿는다면 되는거야. 가끔이라도.' 비틀거리는 몸짓에 대조되게 맑고 투명하게 웃는 성훈인 오랜만에 웃어본다. '날 데리려 오겠대. 지용아, 이제는 날 풀어줘. 나, 정말 형 곁에 있고 싶어.' 11)****** 난 지원형거야. 바닥에 널려진 것들. 화풀이로 부서진 물건들을 쳐다만 본다. '난 그 동안 너의 그림자도 되지 못했던 걸까? 그럼 난 뭐였지? 너의 육체를 갖고 돈을 지불하는 사람? 성훈아, 내 존재는 그걸로 끝이였니?' 딩동--- 지용이의 집에 길게 울려퍼지는 초인종 소리가 그의 몸을 일으킨다. '강성훈? 성훈이니?' 옆에 나동그라져 있는 양주병과 부서진 물건들을 대충 밀어놓고는 바삐 몸을 일으키고는 현관을 쳐다본다. '잘해줄게 성훈아, 정말 잘해줄게.' 문을 열려고 현관으로 다가서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하얀 얼굴. 지용인 멍청할 정도로 빙그레 웃는다. '잘해줄게. 정말 잘해줄게.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게. 돈을 달라면 우리집이 망하더라도 다 줄게. 그러니깐.. 지원이 놈한텐 가지마.' "........." 들어오지는 못하고 지용이를 바라보는 성훈이의 눈이 행복에 젖어 있다. 미소띤 얼굴. 하얀 얼굴은 수줍게 첫날밤을 치른 것처럼 붉게 물들어져 있다. 웃고 있는데... 자기 앞에 인색했던 얼굴로 활짝 웃고 있는데, 지용인 불안함을 느낀다. '이럴 수 없어. 안돼.' "지..지용아." '잘해줄게. 성훈아, 네가 해달라는 거 다해줄게.' "지..지용아." 말을 버벅거리는 성훈이를 보기만 한다. 지용이의 얼굴에 들이어 졌던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불안하게 쳐다보던 얼굴은 굳어지기 시작한다. '잘해줄게. 성훈아, 내가 너 행복하게 해줄게.' "지원이형. 지원형 연락처 알지? 그렇지?" 성훈이에게 결국 듣고 마는 지원이의 이름. '잘해줄게. 정말 잘해 줄 자신있어. 너 행복하게 해줄 자신있어. 정말.' "지원형.. 지원형 연락처 알면.." "......." 굳어진 시선으로 성훈이를 바라본다. 애절하게 부르는 성훈이의 목더미를 바라보고는 긴 한숨을 쉰다. "지원형.." "어제 어디갔었어?" '말하지마. 네가 어디 갔던 끝까지 너 혼자서만 생각해. 말까지 하면.. 나 정말 돌아 버리거야.. 그러니깐 혼자서 돌아다녔다고 말해.' 차분하게 물어보지만 지용인 손에 잡히는 것 무엇이든 성훈이에게 던질 기세다. 지용이가 느낄 아픔을 알지만 성훈인 입을 연다. "어제.. 형하고.." "........." '병신새끼. 내게 얻어 맞는것도 이젠 면역 된거냐?' "형을 만났어. 형이." "........" "형이 날 데리려 온다고." "후-----" 긴 한숨을 길게 쉬고는 잡히는 것을 들여다본다.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강성훈.' "그 새끼 만나서 좋았냐?" "......." "그 자식이 안아주니깐 좋디? 오랜만에 재회라 장난이 아니였겠네?" 쓴웃음이 흘러나온다. '도대체 그 자식이 너에게 해준게 뭐가 있니?' "......." "그 자식이 널 데려가? 널 데려 가겠대?" "......." 잡히는 것을 들여다본다. 자신과 함께 찍은 성훈이의 얼굴. 맑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이 웃음.. 한 때는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성훈아, 지원이 품이 좋았니?" 이를 악물며 물었던 음성이 힘이 없다. 쓸쓸하게 묻는 지용이의 음성엔 짙은 슬픔이 서려 있다. "........." "대답해봐. 좋았어?" "........." "대답해봐." "화, 안낼거지?" "........." "좋았어. 형이 날 데려간다고." 쾅-- 성훈이의 이마를 맞고 떨어지는 액자가 현관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렁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성훈인 떨어진 액자에 손을 대본다. 자신의 피가 묻은 액자속에 자신의 얼굴과 지용이의 얼굴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 지용인 자신이 받은 고통만큼 자신에게 베풀 것이다. "개자식, 뭐? 지원이가 데려간다고?" 성훈이의 멱살을 잡는 지용이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지..지용아." "좋았다구? 그래 얼마나 좋았는지 한번 보자!" 지용이의 손에 의해 찢어지는 자신의 옷. 성훈인 두 눈을 감아 버린다. 곧이어 시작 될 지용이의 구타와 욕설이 성훈이의 눈을 감아 버리게끔 만든다. 찢겨진 옷사이로 보이는 가슴한가운데 남겨진 흔적. 지용이의 두 눈이 휘청거리더니 광기어린 눈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도려내야겠어! 너무 지저분해!! 상처가 심해!!" 힘없이 내뱉고는 성훈이를 안고 안방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성훈이의 생각과는 다르게 조용한 반응의 지용이가 불안하다. '차라리 네 속이 풀릴 때까지 때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차라리...' "성훈아, 오염된 곳 깨끗하게 해줄게." 식칼을 들고 들어온 지용이의 얼굴이 슬프게 보인다. 조금씩 자신에게 다가서는 지용이의 움직임에 성훈인 공포스러운 눈으로 그를 본다. '지용아, 무서워. 그러지마.' "깨끗하게 해줄게. 너도 아프지? 얼마나 아팠을까?" 지용인 성훈이에게 다가와 그의 목을 움켜쥐고는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칼날을 두었다. "아프지 않게 해줄게." "지.. 지용아!!" "안 아프게 해줄게." "하지마!! 안돼---!!" 성훈이의 가슴으로 그어지는 칼날의 날카로움이 그의 가슴을 붉게 물들어 지려고 한다. 아무런 비명도 들어지지 않고 고요하기만 하다. 지용이의 두 눈에 어리는 눈물과 아련하게 보이는 성훈이의 큰 눈망울이 그의 이성을 되찾아 준다.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 건지 붉게 물든 하얀 가슴에서 깊숙이 들어가려던 칼날에서 손을 놓는다. 일자로 그은 하얀 가슴에서 약간의 피가 세어 나온다. "성훈아! 성훈아!!" "........."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성훈인. "후나!!" 덜덜 떨어대는 성훈이의 몸이 추위를 타는 것 같다. 추위를 타는 것이 아닌 공포에 사무쳐 있다. 극심하게 떨어대는 입술에서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미안해. 성훈아, 미안해. 미안해.." 하얀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그가 흘린 피보다 더 많은 양의 눈물을 흘려놓는다. '지용아, 울지마.' "미안해. 내가 미쳤나봐. 성훈아, 미안해." '그만.. 제발.' "미안해. 성훈아, 내가 정말 잘못했어." '지용아, 그만. 제발 그만. 너의 눈물 때문에 내 가슴의 상처가 더 쓰라려.' 식칼은 침대위에서 궁글려지고 있다. 하얀 피부에 뿌려져 있는 붉은 온혈에 입을 대는 지용이. 칼로 생겨난 상처가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혀로 닿아내고 있다. 핥아내는 곳마다 지원이가 남긴 흔적으로 가득하다. 조심스레 움직이는 지용이의 혀. '내가 널 죽일 뻔했어. 내가 널..' 가슴위쪽으로 올라가는 그의 혀가 성훈이의 눈물을 닦아내고. 감지 않은 두 눈의 이슬들을 모조리 지용이의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지용인 두 눈을 감고는 성훈이의 입술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옆으로 돌려지는 고개. 찾는 곳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지용인 또다시 성훈이의 입술을 찾아본다. "싫어! 이러지맛!!" 날카롭게 들리는 성훈이의 음성. 지용인 번뜩이는 눈으로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성훈이를 바라본다. 악문 입술은 지용이의 앞니에 의해 자근자근 씹여지고, 자신을 외면하는 성훈이의 고개를 자신의 시선에 놓으려고 한다. 하지만 두 눈을 꼭 감는 얼굴. "난.. 지원형꺼야. 네가 때리면 맞겠지만 내 몸은 더 이상 안돼." "........." "난, 지원형꺼야. 난 형꺼야." "........." "형이.. 나보러." "닥쳐!!"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지용이의 손이 상처난 곳으로 가고 있다. 온몸의 신경세포를 자극하는 지용이의 지압이 성훈이의 입을 벌어지게끔 만든다. "악-----" "또 다시 짓걸여봐? 뭐? 형꺼? 풋, 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그래. 난 형꺼야. 그러니깐 내 몸에 손대지마!!" "........" "네가 때리면 맞겠지만.. 내 몸은 안돼!" 앙칼진 음성에 지용이의 눈빛은 독기를 품는다. "맞겠다? 그래, 어디까지 견뎌보나 두고보자!!" 12)****** 최후의 방법. [성훈이 바꿔.] "쳇, 여긴 장수원 집이지 은지원이 애용하는 게이바가 아니야." 쌀쌀맞게 내뱉고는 소파위로 몸을 숙여본다. '미친새끼 왜 강성훈이라는 놈을 내 집에서 찾아?' [너 가만 안 둔다.] "누가 무서워 할 줄 알아?" [헛소리 짓 걸이지 말고 바꿔!!] 그를 내쫓은 지 5시간도 훨씬 넘어섰다. "그는 갔어. 은지원.." [뭐?] "충고하는데, 여긴 네 자식이 즐기고 싶을 때 들리는 게이바가 아니야. 착각하지마!!" 뚝--- 자신있게 내려놓은 수화기. 다시 울러퍼지기 전에 전화코드를 뽑아버린다. "쉬펄, 되는 일 더럽게 없네." 딩동--- 짧게 들리는 벨소리에 인터폰을 들여다본다.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는 재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미친놈 이번엔 빨간 머리냐?" 문을 열어주고 뒤 돌아설 때 재진이 수원이의 얼굴을 잡아 당겼다. "게이라고 했지. 너?" 장난끼 있는 재진이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수원이 입속에 들어서는 재진이의 껌. "이 새끼가 미쳤나!!" 수원이가 재진이를 향해 이것저것 집어던지자, 재진인 수원이의 팔목을 붙들었다. "야, 간접키스도 몰라?" "너 죽고 싶어, 지랄병 걸렸냐?" 입꼬리를 올려 빙그레 웃는 재진이. "그래. 지랄병 걸렸다. 치료약도 없는 지랄병!" "미친 놈." "훗, 요즘 들어 왜 니 얼굴이 자꾸 떠올려질까?" 맞아서 퉁퉁부은 성훈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성한 곳 없이 두들겨 맞아,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다. 담배 한 개피를 물고 길게 빨아들인다. 그리곤 수화기를 들어올리는 지용이. 몇번의 신호음이 울리자, 걸걸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온다. "양박사님.. 저 지용이인데요. 친구가 많이 다쳤거든요. 부탁하는데, 방문 좀..해주시면.. 네. 네." 몇번의 지용이의 음성이 들리더니, 다시 또 뿜어져 성훈이의 시야를 맵게 하는 담배연기. "살기 싫어도 살기만 해. 병신 되도 내가 책임질테니깐!!" 안방에서 나가려 한다. '제길. 왜 눈물이 나는걸까? 이번엔 울지 않는다. 나 이제부터 강해질거야. 은지원 그 새끼한데.. 더 이상..' "지...원형." 성훈이의 힘겨운 음성에 뒤돌아보는 지용이. 굳어지는 얼굴이 아닌 슬픔으로 가득한 표정이다. "지원...이형.. 지...원형...에게 보...내....줘.." 힘겹게 말하는 성훈은 거의 죽어가는 사람의 몰골이었다. 지용인 성훈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뜨린다. "성훈아, 사랑해." "보...내..줘.." "강성훈. 정말 사랑해." "나...가고 싶..." "널 사랑해." 지용이의 흐느끼는 음성에 성훈인 두 눈을 감아 버린다. "지...원형." "얼마 줄까? 얼마면 되니? 얼마를 주면 네가 내 곁에 있을래? 돈 때문에 내게 묶여있어도 상관없어. 내 곁에 있기만해. 네가 달라는 돈 다 줄게." "........." "응? 성훈아, 네가 원하는 돈 다 줄게. 너 건들이지도 않을게. 그냥 지켜만 볼게. 돈? 얼마줄까? 얼마면 돼? 나 돈 많아. 성훈아, 그러니깐.. 제발." 흐느껴 버린다. 울지 않겠다고 해놓고도 울어버린다. 흥정에 묶여 끌려 다녔던 시간들. '차라리 그때가 좋았어. 돈 때문에 날 찾아오더라도.. 난 그때가 좋았어. 그때가..' 아침햇살에 눈을 찡그린다. 아파트는 아니다. 지용이가 소유하고 있는 별장같다. 움직여지지 않는 몸. 손가락은 움직일까? 손가락에 힘을 주고 꼼지락 거려본다. 온몸에 놓여진 진통제와 내 팔뚝에 꽂혀진 링겔바늘. 지용인 나간 걸까? 고개를 돌려 방문을 본다. 열어 놓은 걸로 봐선 지용인 아직 집에 있나보다. 지원형이 날 데리려 온다고 했는데..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까? "성훈아, 깼니?" 지용이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면서 내게 다가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들고. "자, 조금만 일어나봐. 내가 죽을 좀 끓여봤는데." 나에게 잘해준다. 날 잡아보겠다고 따뜻하게 대해준다. 내가 떠나면 죽을 것 같이 행동하는 녀석. 하지만 난 지용이 곁을 떠날 것이다. 내가 떠날 거란 걸 알면서도.. 내가 해준 것도 없는데, 녀석은 항상 내게 호의적이다. "후~ 자, 성훈아 조금만 입 열어봐. 응?" 죽을 떠서 뜨거운지 아닌지를 확인하고는 내 입가로 들이민다. 난 지용이 녀석을 차갑게 노려보기만 한다. 눈이 부었는지 눈도 제대로 떠지질 않는다. "조금만 벌려봐. 힘들어도.. 그래 옮지. 이거 다 먹어야돼. 알았지?" 또 다시 소량의 죽을 떠서는 자신의 입으로 불고 미온인지를 확인하고 내게 들이민다. "그래 우리 후니 잘한다." 이게 지용이의 방식이다. 날 묶어 놓기위한 최후의 방법. 내가 떠나는 게 보기 싫어 날 두들겨 놓고는 내가 걸어다닐 때까지 이렇게 내게 붙어 있는다. 어쩌면 녀석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더 먹자. 응? 입 좀 벌려봐." 갈라진 입술. 입술 근저리도 모두 부어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이 따른다. 난 먹기 싫은 죽을 억지스레 받아먹고 있다. "너 다 나으면 우리 호주가자? 너 중학교때 호주가고 싶다고 했잖아. 계획이 많아. 빨리 나아? 알았지?" 지용이가 활짝 웃고 있다. 너에게 이런 것이 행복이니? 너의 말에 대꾸도 않는데, 너에게 행복을 주는거니? "후나... 저녁엔 스프 끓여줄게. 죽은 싫지? 무슨 스프로 끓여줄까? 그래 성훈이 넌 크림스프 좋아하니깐 그걸로 끓여야겠다." 지용아... 그런 거 필요없어.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원하는 거 너 잘 알잖아. "안 하다가 할려니깐 힘들다. 성훈이 넌 요리도 잘하는데, 도무지 난.." 내가 원하는 건 지원형이 있는 곳으로 가는거야. 지용아.. 난 형하고 함께 있고 싶어. 너에게 빌린 돈의 댓가는 거진 지불한게 아니니? 이젠 오해로 가득했던 시간들을 복귀하고 싶어. 서러움이 밀려와 내 눈이 눈물을 떨어뜨린다. 지용인 내 눈물을 보고 있을까? 시야가 좁아지니깐 녀석의 얼굴이 잘 보이질 않는다. "울고 있구나. 울지마. 성훈아.. 이제 두려워 할 것 없어. 내가 항상 성훈이 옆에 있을거니깐. 우린 행복할거야. 정말 행복할거야." 녀석의 품이다. 지용이의 품. 넌 날 안으면 심장이 뛰는구나. 난 지원형 품에 있으면 심장이 뛰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태까지도. 성훈이가 왜 울고 있는지 난 안다. 지원이 그 새끼를 떠올리고 있겠지. 하지만 이젠 신경쓰지 않는다. 성훈인 떠나지 못한다. 당분간은.. 내 보호아래서 내가 주는 것만 먹고 내 품에서 잠이 들어야 한다. "성훈아, 누울래?" 이렇게 해서라도 난 널 내 곁에 묶어둔다. 네가 내 곁에서 내 손길에 의해 움직이는 게 좋다. 내가 밥도 먹여주고, 얼굴도 씻어주고, 손도 씻어주고. 내겐 이것도 행복이다. 널.. 잠시나마 내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 13)******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파. 고지용을 찾아갔지만 녀석은 며칠째 나오질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 자식의 아파트에 찾아가 봤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빈집 이였다. 녀석의 우체통에 청첩장을 집어놓고는 내 차에 몸을 실었다. 이 녀석 성훈이를 데리고 어디로 튄 걸까? 내 옆에서 재잘거리는 내 약혼녀하고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성훈이를 떠올린다. 하늘보다 더 푸른 바다. 내 옆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하얀 녀석. 모래사장에 몸을 누우면 어김없이 녀석은 노래를 마치고 내 입술에 자신을 입술을 대곤했다. 그 녀석에게 빨려 들어가는 나날들이 난 두려웠다.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건 미친 짓이라고만 알았던 그때.. 지금 역시 난 그 녀석의 묘한 매력이 두려운지도 모른다. 결코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늪. "내일 웨딩드레스 보러 갈 건데.. 지원씨도 같이 갈 거죠? 하얀 턱시도가 어울릴거야. 지원씬 멋있으니깐." 성훈이가 여자였다면 새하얀 웨딩 드레스가 잘 어울릴 것이다. 하얀 얼굴이 미소 지으면 더 예쁘겠지. "그때 성훈이 너 얼마나 웃겼는지 모를걸." 성훈이의 몸을 젖은 물수건으로 닦아내는 지용인 계속해서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 그와 지낸 추억들을 하나둘씩 꺼내고 있다. 팔을 닦아주고, 다리도 닦아주고 가슴도 그리고 얼굴도. 붓기가 가라앉은 얼굴은 푸른 멍들로 가득하다. "여기 온 지 몇일이나 지났는지 알아?" "........" 지용이의 말에 대답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일주일이나 지났어. 일주일." 빙그레 웃으며 성훈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지용이의 눈이 성훈이의 눈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성훈아, 사랑해." 그리고 다가오는 행복에 젖은 입술. 성훈이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데고는 떼었다. "옷 갈아입자. 옷 가져올게." 쓸쓸한 미소를 짓고 나가는 지용이를 바라보고 두 눈을 돌린다. '형이 날 기다릴꺼야. 지용이 네가 날 묶는다 해도.. 내 마음이 형에게 가 있는걸. 넌 날 온전히 네 곁에 묶을 수가 없어.' 욕실 안으로 들어와 성훈이의 몸을 닦은 수건에 얼굴을 대본다. "사랑해. 성훈아." 나즈막히 속삭이고는 수건을 세탁기 속으로 밀어 넣고 세면기에 물을 틀었다. '서울로 가면 모든 게 끝이다. 이곳에서 난 너의 마음을 내게로 돌릴 거야. 두고봐. 난 꼭 그렇게 만들 거니깐.' 틀어놓은 세면기의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강성훈 사랑한단 말이야!!" 두 눈이 뜨거워지면서 떨어지는 액체를 찬물 속으로 희석시킨다.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파.' 14)****** 넌 결혼 같은 거 못해. "뭐야? 이번엔 파란머리야?" 수원이 집으로 들어오는 재진이를 보며 핀잔이 섞인 투로 말한다. "왜 안 어울려?" "안 어울다는 소리는 안 했어. 요즘 변덕이 지랄 맞아서 그런 거지." "말 좀 곱게 해라. 배운 녀석이 나보다 더해?" 재진이의 찡그러진 인상이 웃긴지 수원인 방그레 웃어버린다. "그나저나 집에서 꼼짝 않고 뭐 하는거냐? 나가서 놀자? 어?" 수원이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는 이래저래 비벼댄다. 재진인. "미친 새꺄 너도 게이야? 왜 이렇게 비벼대?" 짜증스런 음성을 흘리며 재진이를 노려보는 수원이가 귀여운지 그의 오른쪽 뺨에 입술을 두었다. "이게 정말 게이가 됐나? 왜 이렇게 비벼돼?" "풋. 장난도 못 쳐?" 노트북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수원이 무릎에 머리를 묻고는 수원이를 올려다본다. 재진인 손을 뻗어 키보드를 두들기는 손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간지럽힌다. "왜 이래? 나 논문치는 거 안보여?" "내일 해도 되잖아." "우쒸, 도대체 뭘 바래서 온 거야?" "노.는.거." "지랄 하지말고 나가서 니 친구들이랑 놀아. 나 바쁜 거 안 보여?" "안.보.여." 툭--- 재진이가 걸어오는 말싸움엔 이길 자신이 없는지 수원인 그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 바닥에 머리를 부딛힌 재진인 아파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이리저리 굴러댄다. "이 개새끼 내가 가만 두나봐!" 일어선 수원이를 끌어내려 바닥에 눕히고는 재진이가 위로 올라탔다. "내가 돈줄게. 오늘 하루 나랑 같이 보내자." 항상 장난스럽던 재진이가 진지한 눈으로 수원이에게 얼굴을 갖다 대었다. 수원인 분위기가 묘해지는걸 느끼고는 재진이의 몸을 밀치려 한다. 하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 재진인 좀처럼 내려갈 생각을 하질 않는다. "너 점심때 뭐 잘못 쳐 먹고 왔지?" 수원이의 쌀쌀한 말투에 재진인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버린다. "돈 준다니깐. 내가 너한테." "지랄하지 말고 이 집에서 당장 나갓! 내가 남창인지 알아?" "그럼 너.. 내 애인해라." "성훈아? 성훈아?" 어둠 속에서 피를 토하는 성훈이의 얼굴이 슬퍼보였다. 내가 있잖아. 성훈아 내가 있잖아. 내가 있는데 왜 그래? 왜? 내가 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지마. 멀어지지마. "후... 후나!!" 꿈이였나 보다. 꿈. 두 눈을 떠보니 긴 소파 위에 난 누워 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날 쳐다보는 성훈이의 눈을 본다. 날 원망하는 눈은 사그라들어 동정의 빛을 뛴다. 차라리 날 원망하는 투로 쳐다봐. 그런 눈 싫다. "마실 거라도 갔다줄까?" 말은 하지 않지만 녀석은 많이 호전되었다. 절뚝거리기는 하지만 조금씩 걷기도 한다. 혼자서 수저를 들고 먹기도 하고. 다행인 건 녀석의 입에서 지원이놈의 이름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뭐 갖다줄까? 쥬스? 아니면 제티?" 날 쳐다만 볼뿐.. 내가 결정해서 갖다 줄 것이다. 성훈인 내게 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 난 지원이놈 얘기를 하더라도 녀석의 미성이 듣고 싶은 지도 모른다. "성훈아.. 지원이 놈 궁금하지 않아?" 녀석에게 조심스럽게 묻었지만 역시 대답이 없다. 그래. 말하지마. 그놈 말하려면 말하지마. "혼례준비는 다해 가는 거냐?" 아버지의 눈에 차지는 않지만 순종적으로 따라주는 지원이가 대견스럽게 보인다. "네." 다정스럽게 말하는 법을 모르는 지원인 항상 단답형이다. 오래 전. 그때 아버지가 지원이를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심장이 저렇게 식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만 올라가 봐라." 어머니의 음성은 따뜻하지만 지원인 뒤돌아보지 않는다. 커다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두 눈이 찾는 것이 있다. 책장속에 감춰둔 성훈이의 사진.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어쩌면... 네가 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지도 모르니깐."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하고 있지만.. 지원인 성훈이를 되찾을 생각이다. 잊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한 최대한의 방법일지도 모르니깐. 『 들어서는 곳마다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예쁜 옷을 입고 남자를 기다리는 매력적인 여자들. 하지만 지원이 옆에는 성훈이가 있었다. "왜.. 여기 오자고 한거야?" "........." 성훈이가 쫑알거리든 말든 끌고 들어가는 지원이의 손이 강했다. "형...?" "잡말 말고 따라왓!" 명령조의 음성에 성훈인 양 볼에 공기를 불어넣고 지원이가 끌고 들어가는 곳으로 들어갔다. 많은 유색인종들이 성훈이에게 인사를 보내고 성훈인 인사하느라 바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눈웃음을 흘리며 여자들에게 미소를 보내는 성훈이. "눈 뽑아버리기 전에 나만 보고 따라와!" 지원이의 살벌한 어투에 입을 삐죽거리기는 하지만 성훈인 지원이 말을 잘 듣고 따라갔다. "어, 매튜 오랜만이네." "내가 부탁한 방 있지?" "어, 준비했지. 근데 어떤 여자길래 그래? 대단한 킹카라두 모셨나보지?" 말을 거는 유색인종을 차갑게 노려보더니 성훈이의 손을 더 꼭 쥐고 계단에 올랐다. "우와,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네? 이햐, 형 저것 좀 봐. 다 하얀색이야." 까르르 웃는 성훈이를 멈춰 세우고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강성훈, yes and no 로만 대답해!!" "응? 혀..형 왜 그래?" 강렬한 눈동자는 깜박거리지도 않는다. 동그란 눈으로 겁부터 먹기 시작하는 성훈이가 눈을 돌리려 하자 지원이의 차가운 음성이 또 들려오기 시작한다. "눈 굴리지 말고 나 쳐다봐!!" 음악소리는 멀게만 들린다. 지원이가 따라나서라 해서 따라오긴 했지만 성훈인 지금 몹시 긴장하고 있다. "형.. 무서워. 우리 집에 가자." 성훈이의 기어 들어가는 음성은 무시해 버린다. "너.. 여자랑 자본적 있어?" 지원이의 말에 마른침을 꿀떡 삼키는 성훈인 당황했는지 계단에서 미끄러지려고 했다. 그런 성훈이를 잡아주는 지원이. "내.. 내 나이가 몇인데.. 혀... 형.. 미... 미...미쳤어..?" 빨그레 변한 볼. "Yes and no 로만 대답해!!" "그런 일없어. 형, 집으로 가자." 지원이의 손을 잡아끌며 애교를 부리는 성훈이의 손목을 부러질 듯 강하게 움켜 쥐였다. "그럼 오늘 경험해 볼래?" 지원이의 말에 온몸을 움추리는 성훈이의 눈이 쏟아져 버릴것만 같다. ".........." "왜 말 못해?" 고개를 숙이려 드는 성훈이의 표정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고개를 들어올린다. ".........." "말해봐. 자 볼래?" ".........." 쏟아질 듯한 눈이 반짝거리더니 입술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 "그래. 한번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움켜쥐었던 손을 잡아끌고는 계단을 올라서려 할 때 성훈인 지원이의 손을 뿌리치려 한다. "싫어!!" ".........." 지원이의 손을 놓고는 뒤돌아 섰다. 들썩이는 어깨. 지원인 또 성훈이를 울리고 있다. "형 왜 그래? 요즘 도대체 나한테 불만이 뭐야?" "왜.못.자?" 지원이의 관심사는 오직하나. "도대체가.." "왜? 경험해 본적이 없다며? 내가 경험하게 해 주겠다는데 싫어?" "........"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고이고 고일대로 고여 맺힌 곳은 구슬이 되어 떨어져 버린다. "왜 말 못해?" "그런 거 싫어. 난!!" "싫어?" "난 형이 이러는 것도 싫고, 형이 왜 나에게 이러는지 모르겠어. 난 형하고 싸우기 싫은데." "그리고?" 흥분하다 못해 덜덜 떨어대는 성훈이의 음성을 즐기는 것 같다. "난 결혼 할 때까지 내 순결 지키고 살거란 말야!!" 지원인 당돌하게 말하는 성훈이의 입술만 보였다. 하얀 피부. 하얀 계단 위에서 보니 성훈이의 찰랑찰랑한 머리카락이 더 고운 빛깔을 띤다. "넌, 결혼 같은 거 못해." 지원이가 절대적인 진리처럼 말해버린다. "뭐?" "넌, 결.혼.못.해." "혀.. 형 미쳤구나." 뒤돌아서는 계단을 내려간다. 두 눈으로 왜 눈물이 자꾸만 떨어지는지 알 수 없는 채 자꾸만 눈물을 떨어뜨린다. 화가 난다. 아니 지원이의 행동에 자존심이 상한다. 내려가던 계단에서 멈춰 서고는 뒤 돌아선다. 지원인 그 자리에 서서 성훈이가 뒤돌아 볼 거라는 걸 예감했다는 듯이 비웃고 있었다. "내가 왜 결혼을 못하는데? 왜? 형이 뭔데?"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흘려 내리는 눈물사이로 지원이의 비웃는 얼굴이 보인다.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준 적이 없었다. 아프면 아픈데로 왜 아프냐며 오히려 호통이나 쳤었다. "형이 뭔데? 나한데 이래라 저래라야? 형이 뭔데? 그런 소리나 하는거야? 형이 뭔데??!!" 울먹이는 음성이 계단 끝까지 쩌렁쩌렁하게 울었다. "넌, 오늘밤 내 품에서 잘테니깐!!" 절대적인 발언. 동그란 두 눈은 지원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무슨... 의미야??" "몰라서 물어?" 입가에 어린 미소가 성훈이의 삶을 예언하는 것 같다. 천천히 자신에게 내려오는 지원이의 시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내려와 자신의 손목을 쥐고 올라섰을 때도 성훈인 아무런 대꾸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계단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리고... 성훈이는 새로운 생활로 접어들었다. 』 15)****** 아무 것도 아니야. (past) 성훈이가 지원이를 밤새워 기다리는 날이 많아졌다. 들어오는 날보다는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은 지원이. 그를 기다리며 흥얼거리던 노래들 때문에 성훈이의 음성은 항상 잠겨 있었고, 눈은 뜨지 못할 정도로 충혈되는 날이 많았다. 어둠이 내려 너무도 까만 밤. 성훈인 지원이를 기다리며 몇 번째 반복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뒤죽박죽 되 버린 유학생활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되돌릴 방법조차도 생각하질 않는다. "형!!" 술에 비틀거리는 자신을 부축하고 집안으로 들어서려던 성훈이를 지원인 벽으로 밀쳐버리고 입술이 얼얼해질 정도로 진한 키스를 퍼부어 댔다. 길게 이어지는 키스에 정신이 빠질 때쯤이면 지원인 나즈막히 속삭이곤 했다. "강성훈, 나 없인 못살지?" "형, 내가 김치 구해 왔다. 형이 김치 먹고 싶다고해서." "걸리적거리지 말고 나가!" 들어서자마자 뿌아종 향수내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술과 입술이 닿아 있었다. 자신과 함께 누워서 잠이 들어야 하는 곳에 긴 머리카락의 여자가 누워있다. 동그란 눈망울은 멍하니 지원이를 쳐다보고 있지만 지원인 성훈이를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신경질인 음성으로 말했다. "너 변태냐? 왜 그렇게 서있어??" 지원이의 행동에 화를 내기는커녕 이를 악물며 문을 닫고 나가 버린다. 멍하던 눈동자가 흐려져 눈물이 나오기 전에 집밖으로 나가 현관 앞에서 쭈그려 앉아 있었다. 지원이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지원이가 인상을 쓰기 때문에. 현관이 열려 여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입에 버릇처럼 베어버린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눈물이 떨어져도. 볼 위를 타고 흘러내려도 느껴지질 않았다. "어디 갔다 온거야?" 성훈이의 앙칼진 음성과 엉망이 되버린 집. 폭풍이 한번 휩쓴 것처럼 모든 것이 엉망이다. 엉망. 부서진 물건들이 사방에 깔려 있고, 분풀이라도 한 듯 몹시 부서진 턴테이블에 눈이 간다. "저거 누가 부신거야?" 잔인할 만큼 섬짓한 눈동자가 성훈이를 노려보고 있다. "어제 어디 있었어?" 지지 않겠다는 듯 묻는 성훈이의 두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훗, 순한 짐승도 화가 나면 무섭다는 걸 보여주는 건가?' 성훈이의 노려보는 눈을 보자니 괜시리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원인 아무 말 없이 부서진 턴테이블을 집어들었다. "또 다시 내 물건에 손대면 너 가만 안둔다." "........." 성훈이가 알아들었을 거라 단정짓고는 주방쪽으로 가려던 지원이. '넌 항상 내게 복종만 해. 내 말이 세상의 법인냥 생각하는 너.' "손대면... 죽이기라도 할꺼야?" 울먹이는 음성에 뒤를 돌아본다. 두 눈에 가득 찬 눈물이 성훈이의 볼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뭐야? 뭐가 필요해?" "........."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더니 저 녀석를 빗댄 말같군. 쳇.' "한번 들어보자. 뭐가 필요한지." 식탁의자의 이 물질을 대충 털고는 앉아 지갑을 꺼내 들었다. "........."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들어왔을 때 말을 해. 살림살이 다 뽀게지 말고." 지갑에 손이 들어간 지원이의 손가락이 돈을 세고 있자 성훈인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고함을 질렸다. "난 뭐야? 내가 형한테 뭐지? 내가 형에게 무슨 존재냐구??!!" 눈물 범벅이 된 성훈이의 고함소리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지원인 오히려 유쾌한 듯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녀석. 저런 면도 있었구나. 징징짜는 줄만 알았더니만.' "네 존재? 무슨 존재?" "형, 제발 날 미치게 하지마!!" 성훈이의 떨려대는 입술이 더욱 흥미 진지해진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까불어 대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고는 라이터 불을 당기려 했다. 탁--- 지원이에게 날려든 베개가 라이터를 날려 부서진 물건들 사이로 섞이게 한다. "난 뭐야? 난 너에게 무슨 존재냔말야!!" 저렇게 화가 난 표정은 처음 본다. 이를 악물고 자신을 쳐다보는 얼굴은 젖어 있다. 울고 있는 모습에 지원인 인상을 쓰기 시작한다. "정도껏해!! 강성훈!!!" 화가 났다는 표정을 짓고는 라이터를 찾으려 하는 지원이에게 또 다시 들려왔다. "난 너에게 뭐냐구? 난 은지원 너에게 아무존재도 아니야? 난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냐구!!??" 탁--- 지원이가 던진 머그컵이 성훈이의 뺨을 맞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르쳐 줘?" 머그컵의 충격으로 바닥에 쓰러진 성훈인 엎드려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 "넌, 내 인생에 아무 것도 아니야. 네가 내 인생에 비집고 들어올 자리도 없고, 내가 널 건들었다고 해서 내가 널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마. 넌 그저 내게 섹스상대일 뿐이라구!" 흥분 어린 음성에 엎드러진 채 멍하던 얼굴은 서서히 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집안에 꽉 차는 성훈이의 울음소리가 싫은지 지원인 손에 집히는 것을 성훈이에게 날리기 시작한다. "시끄럿! 닥쳐!!!" 성훈이의 몸에 던져지는 물건들이 그의 몸에 상처를 내는데도 성훈인 꼼짝 않고 그 자리에서 울기만 한다. "정말 돌아버리겠어!! 시끄럿!! 닥쳐!!" 성훈이의 울음소리는 더욱 더 구슬퍼져 간다. 짚이는 물건이 없자 지원인 성훈이를 가로질러 집안을 나가려 했다. 나가는 지원이의 발목을 붙드는 성훈이의 떨리는 손. 손등에 유리컵의 잔재가 박혔는지 피가 줄줄 흘러 내리고 있다. "형. 난, 형 사랑해. 형도 나 사랑한 거 아니였어? 날 사랑해서." 자신을 붙든 손을 떨쳐 버릴려고 다리를 몇 번 흔들어본다. 하지만 꼭 붙잡은 손은 떨어질 의사가 없나보다. "........." "난 사랑해. 형을 사랑해." 지원이의 귓가에 메아리치듯 들리는 성훈이의 울먹이는 음성이 지원이의 굳은 안면을 멍하게 만들어 버린다. '뭐지? 이건?' "사랑해. 난.. 은지원은 성훈이에게 그런 존재야. 형은." 메아리. 지원이의 머리속을 몹시 혼란시키는 음성. 사랑해. 지원인 자신의 발목을 붙든 성훈이를 내려다보았다. 손등에서 떨어지는 피가 자신의 바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날, 사랑한다구?' 성훈이를 떼버리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의 음성으로 잊어버리게 되었고, 지원인 자신을 놓지 않은 손에 자신의 갈색빛 손을 갖다 대었다. 울고 있는 눈망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지원이 가슴마저 저 눈물에 젖게 버리게 만드는 것 같다. '날 사랑한다?' "형." 자신의 품속으로 기어들어서는 성훈일 밀쳐 버릴 수가 없다. 지원인 피가 흐르는 상처에 입술을 갖다 대본다. '날 사랑한다구? 날?' 비릿한 피맛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냥 있을게. 다신 이러지 않을게. 다시는." '사랑이란 게 뭔데? 네가 사랑이 뭔지 알아? 뭔지나 알고 내게 말한거냐?' 품속에 묻은 하얀 얼굴의 머리카락을 한움쿰 잡아당겨 눈물로 얼룩진 흰 얼굴에 입술을 놓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지원인 냉정하게 흘렸지만 자신의 심장이 성훈이 때문에 터져 버릴정도로 뛰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질 않았다. 16)****** 소유물. (past) 눈부신 햇살이 성훈이의 눈을 뜨게 만든다. 지원이에게 깔린 한쪽 팔이 저려서 몸을 뒤집고 싶지만 지원이의 팔이 자신을 감싸고 있어서 성훈인 가만히 죽은 것처럼 누워 있다. 잠든 지원이의 얼굴은 평소에 자신을 노려보는 지원이의 얼굴이 아니다. 생소 할만큼 어린아이같은 표정의 지원이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약간 벌려진 입술. 긴 속눈썹. 갈색빛 피부. 성훈인 깔리지 않은 손을 조심스레 지원이의 뺨에 올려놓았다. '난 형을 사랑해. 나에겐 형이 처음이야.' 약간 벌려진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 자신을 떠나버릴 것만 같은 지원이. "날, 사랑해주면 안될까? 응?" 얼굴을 살며시 끌어 지원이의 얼굴에 닿게 만들었다. 그리고 작게 미소짓고는 지원이의 아랫입술에 자신의 윗입술을 놓았다. "치워. 강성훈." 건조하게 들리는 음성에 재빨리 입술을 떼고 돌아누웠다. 엄청나게 두근대는 심장의 박동수는 샐 수가 없다. '어떡하지? 형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어휴, 바보같애! 강성훈!!' 두 눈을 꼭 감고는 이불을 좀 더 잡아 당겼다. 이불 속으로 감춰지지 못한 하얀 피부 곳곳이 붉은 멍들로 가득하다. '바보 강성훈.' 두 눈을 좀 더 감아보는데, 밤새 자신을 만지던 손길이 또 한번 성훈이를 찾아온다. 허벅지를 지나 자신의 가슴에서 멈춰진 손. '형이 날 안았다.' 세게 감으려 했던 눈을 조금씩 떠본다. 가늘게 눈을 뜨고는 지원이 손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기다리고 있다. "내게 등돌리지마." 건조한 음성에 서서히 뒤돌아 눕는 성훈이의 눈이 지원이와 평행선을 이룬다. "내가 키스하고 싶을 때만 키스해. 네가 먼저 할 생각 꿈도 꾸지마." '하지만 난 항상 입맞추고 싶은걸.' 흔들리는 눈동자는 햇빛을 받아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다. 자신과 마주 댄 지원이의 얼굴이 하얀 얼굴과 가까워진다. 그리고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오는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에게 조금이나마 배운 대로 성훈이의 혀는 움직인다. 방문객이 흥미 진지해, 떠나질 못하도록 성훈인 노력하고 노력해 본다. 하지만 성훈이의 노력과는 다르게 얼마 머물지 않는 방문객. "어디 가서 키스하는 법이나 배워 왓!!" 일어서서 욕실로 향하는 지원이의 등을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만 본다. "배워서 오라구? 어디서? 어딜 가서 배워?" "........." "학교에선 이런 거 가르쳐주질 않는데.." "........." 성훈이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이였다. "형이 날 가르치면 안돼? 나.. 노력할게. 형이 가르쳐주면 안돼?" 욕실로 향하던 지원이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다시 발을 움직인다. '형이 가르쳐 줘. 나 잘할게. 나 잘할 수 있어..' "여기 매튜집?" 어색하게 한국말을 하는 여자가 서있었다. 성훈인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자신보다 나이가 세 네살은 많아 보이는 여자에게 문을 열어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를 보자 건조해진 입술에 침으로 축여본다. "훗, 아직 엄마 젖도 안뗀 애잖아?" 껌을 상스럽게 씹고 있는 여자의 머리색은 붉은 색. "형, 찾아오셨어요?" 머뭇거리다 여자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매튜가 보내서 온 거 뿐이야. 꼬마야 네가 성훈이란 애니?" ".......?" 영문도 모른 채 백인 여자의 손이 이끄는 곳으로 손을 놓았다. "이게 뭔지 아니?" 여자가 갖다 댄 곳은 풍성하고 말랑말랑한 가슴 위였다. 성훈인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키스할지 모른다고 했지?" "네에?" 당황한 눈동자가 바닥으로 깔리고 있다. "따라와봐!!" "도대체 한국꼬마들은 다 너 같니?" 성훈이의 곁에서 자꾸만 맴도는 여자는 성훈이의 가슴에 손도 넣어보고 목더미에 입을 맞춰보기도 하지만 성훈인 그녀의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려고만 한다. 여자가 들어 온 지도 2시간이 한참 지났다. "형, 만나러 오셨죠?" "내가 맘에 안 들어? 나 안 예뻐?" "그. 그.. 그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며 여자의 시선을 피한다. "그럼 됐어." 군침돈다는 듯 웃는 여자가 성훈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침대 앞으로 끌고 와서는 성훈이를 그 자리에 길게 눕혔다. "저기, 전." 자신의 웃옷을 자연스럽게 벗는 그녀의 젖가슴이 보이자 성훈인 두 눈을 돌려버린다. "옷.. 옷... 옷입어요. 왜 이러는.. 읍." 성훈이의 입술로 들어와 이리저리 휘저어 대는 술에 쩌른 혀를 밀어보려고 노력해 본다. 하지만 나갈 줄 모르고 더 깊숙이 파고들기만 한다. 목젖까지 닿는 혀의 촉감. 성훈인 여자를 밀쳐보려고 하지만 자신의 손이 여자의 젖가슴에 와 있는걸 알고는 당황해 했다. '내가...' "훗, 너도 어쩔 수가 없구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지원이의 음성에 온몸의 신경세포가 마비되는 성훈이. 밀쳐내려던 혀 역시도 마비 되어버리고 만다. "쳇.. 정말 재미없어. 매튜 도대체 뭐야? 저런 젖비린내 나는 녀석에게 날 소개시켜준다고 한거야?" 흥분한 여자의 음성이 들린다. '날 시험해 본 거구나.' 눈을 꼭 감아본다. "뭐야? 더 이상 진도도 안나간 거야?" "직접 물어봐~ 경험이 없는 건지 아무튼 정말 웃긴다. 재 남자 맞아?" 어색하게 잔득 말린 혀로 한국말을 하고 있다. 벗었던 웃옷을 주워 입고는 지원이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는 외국인 여자. "수고했어." 성훈인 가늘게 뜬눈으로 지원이가 여자에게 무언가를 지불하고 있는걸 보고 있다. 그는 다시 두 눈을 꼭 감아 버린다. '날 또 시험했어. 형은..' 비참하다. 그 여자와 영어로 몇 마디 나누고 인사를 권하는 지원이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곧이어 들려오는 현관 닫는 소리. 성훈인 그 자리에 꼼짝 안고 누워서 지원이를 기다리고 있다. "많이 배웠냐?" "........" "가르쳐 달라고 해서 사람을 보낸건데 배울 자세가 안됐어. 넌." "........" 꼼짝 않는 성훈이를 내려다보는 지원이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여자 몸을 만져본 기분이 어때? 황홀하지 않던?" "........" 입술을 지긋이 깨물어 본다. '날 시험했어.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왜?' "대주는 밥도 못 먹고, 병신새끼." 담배연기가 성훈이의 얼굴에 가득히 뿌려진다. "콜록.. 콜록." 담배 연기에 숨이 막혀 두 눈을 떠본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원이가 보이자, 성훈인 고개를 돌려버린다. "날 쳐다봐." "........." 차갑게 들리는 음성이 아닌 따뜻한 음성. '내가 잘못들은 걸까?' "날 쳐다봐. 성훈아." '따뜻해. 형이 내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 돌렸던 얼굴을 서서히 들어 지원이에게 고정시켰다. "........?" 사슴처럼 맑은 눈동자에 걸쳐진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투명한 눈망울이 지원이를 끌어당기고 있다. "날 사랑한다고 했지?" "........"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지원인 예감했던 대답을 들었다는 듯 만족의 웃음으로 성훈이의 눈 위에 입술을 내렸다. 그리고는. "지금 이 시간 후로 나 외에 딴 놈이랑 이 짓 하면 너랑 끝이야. 알아들어? 강성훈!!" 예상을 뒤집는 소리에 성훈인 토끼 눈보다 크게 눈을 떠서 지원이를 바라본다. "대답해!!" "........." 또 다시 끄덕이는 고개. "고개짓 하지 말고 대답해!!" 지원이의 음성은 섬짓할 정도로 차갑다. 다그치는 지원이의 음성에 고개를 또 끄덕이는가 싶더니 입술을 벌려 힘겹게 말한다. "어, 어..알.. 알았어." 성훈이의 입 속으로 말려 들어온 담배향이 연신 풍기는 혀가 입천장에 닿는다. "넌 오늘부터 영원히 내 소유물이야. 강성훈!! 내가 널 버리기 전까지 네가 떠나고 싶어도 넌 날 떠나질 못할거야. 내가 널 그렇게 만들 테니깐." 영원히 나만 쳐다보게 만들 테니깐. 17)****** 날 좋아하는 거지? (past) 형과 함께 뒹군 침대시트엔 형과 나의 자욱이 남겨져 있다. 형이 집을 나가고 나면 난 침대시트부터 갈아내고, 깨끗이 빨아놓은 또 다른 침대시트를 깔아놓는다. 형이 돌아오면 또 다시 형과 나의 자욱이 남겠지만.. 난... 항상 형과 나의 자욱을 없애버린다. 함께 보낸 밤의 흔적 따윈 없었던 것처럼. 형이 나간 빈집엔 항상 나 혼자 남겨져 있다. 내가 깨기 전에 내 옆에 누워 있으면 안 되는 걸까? 오래 전 내 손에서 떨어진 책을 들여다본다. 열심히 공부하기로 엄마와 약속을 했는데. 페이지를 넘기면서 떠오르는 엄마의 얼굴. 아빠.. 윤지... 페이지 끝으로 떨어지는 눈물방울 하나가 펜으로 끄적거린 내 필체위로 볼록하게 배를 내밀고 있다. '형 말처럼... 난 영원히 형만 쳐다볼지도 몰라. 영원히 형의 소유물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지금 행복해.' 책을 덮으려고 하는데, 책속에서 떨어지는 한참을 잊고 있었던 친구가 날 보며 웃고 있다. 지용이. 네가 지금 내 꼴을 본다면 내 멱살을 잡고 날 욕하겠지. 입가에 베기는 어설픈 미소가 내 눈을 흔들리게 한다. 내 눈동자에서 소리없이 떨어지는 눈물이 지용이의 얼굴 위로 떨어진다. 하지만.. 너만은 날 이해해줘. 왜냐면.. 넌 유일한 내 친구니깐. 생각해보니 지용이에게 답장을 보낸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편지지와 펜을 찾기 위해 책상을 뒤적거리다 맨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뒤집혀진 액자를 들여다보았다. 나잖아? 이걸 언제 찍은거지? 내가 이런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던가? 시선이 다른 곳에 머물고 있는 난 활짝 웃고 있다. 형이 이런 사진을 가지고 있었나? 난 형에게 사진 같은 건 준 적이 없는데.. 혹시.. 형도? 내 입가에 슬픈 미소따윈 사라져 버린다. 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북받쳐 오르는 환희. 형도 날 생각하는구나? 형도 성훈일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형? 난 지금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뛰어오른 것 같다. 형도 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형도. "뭘 그렇게 쳐다봐?" 차갑고 삐딱하게 말하고 있지만 난 오늘 형을 알게 됐다. 형도 날 좋아하는 거지? 그렇지? 형을 향해 방그레 웃고 또 웃고. "이제 완전히 미쳤구나. 너?" 쌀쌀맞아도 좋아. 속마음은 안 그렇잖아. "형. 성훈이 어디가 제일 예뻐?" "........." 형은 한심하다는 듯 날 쳐다보더니 침대에 길게 몸을 누웠다. "형 씻어. 내가 밥해 놨다." 형을 향해 또 한번 웃는다. 웃음이 나와. 너무 좋아서 웃음이 멈추질 알아. "생각 없으니깐 너나 많이 먹어." 형이 눈을 감는다. "형~엉~~" "목마르다. 마실거나 가져와." 지금 느끼는 감정을 형에게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키스해 줄까? 어? 형, 내가 찐하게 키스해 줄까?" "미친놈." 형이 옆으로 돌아눕는다. 난 침대에 누운 형 옆에 앉아 형에게 다시 쫑알거린다. "키스해 줄게. 나 좀 바봐. 응?" 난 입술을 깨물면서 웃어본다. 형의 얼굴을 돌리고 싶지만 형이 화를 낼 것 같아서 내 손은 망설이고 있다. "........" "형~엉." 형의 손을 슬쩍 건들어 본다. "마실거나 가져왓!! 허튼 짓 하지말고!!" 불호령이 떨어지든 말든 상관없다. 형도 날 좋아하잖아. 형은 일어서더니 윗도리를 벗고는 면티를 찾고 있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 난 형을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형, 사랑해~" 형의 등에 입술을 대보지만 형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아무 대꾸도 않고,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나보다. 깨물어두 화내지마. 화내지마. 형. 살며시 형의 등을 깨물어 버린다. 그런데, 형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도끼눈으로 날 노려보지도 않고, 떨어지라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난 너무 좋아서 형을 더 꼭 끌어안았다. "지원형은 성훈이꺼야. 내가 찜했어. 형은 내꺼야!" 얼굴을 비볐다. 형의 체온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형은 따뜻한 사람이지? 그렇지? 침대에 누워서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형, 내일 시간 있어?" "........." "형?" "........." 눈을 뜨고 있는데... 자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뭘 생각 하는거지? "형." "........." 불려도 대답이 없다. 조금 심술이 나긴하지만 난 귀에 이어폰을 꽂고 PLAY를 눌렀다. 형이 좋아하는 갱스터음악이 나오자, 난 흥겹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는 이물질들을 제거하고 리듬에 맞춰 멜로디도 흥얼거렸다. 한참을 돌리는데, 갑작스럽게 일어선 형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청소기 소음이 듣기 싫어서 그만 두라는 걸까? 아니면 빨리 자자는 소리? 두 가지 가설 중에 어느 것인지 맞추기 위해 형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형의 눈이 흔들리고 있다. 왜 그래? 형 무슨 일 있었어? "형." 벽쪽으로 밀쳐진 성훈이의 어깨에 고통이 느껴진다. 벽에 부딪힌 것 보다 지원이가 꼭 누르고 있는 어깨에 고통이 더 심하다. "형?" 지원인 성훈이의 동그란 눈동자만 바라보며 고개를 큰 동작으로 가로젓고 있었다. "형---?" 걱정스런 눈동자로 변하는 성훈이가 지원이를 길게 불러본다. "형 무슨 일이야? 어?" "휴-----" 긴 한숨을 쉬며 성훈이의 어깨를 놓는 지원이가 뒤돌아 섰는데 전에 느끼지 못했던 쓸쓸함과 외로움이 한순간에 느껴지고 있었다. "형." 지원인 두 세걸음 걷더니 성훈이의 음성에 멈춰서서는 짙게 깔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한다. "모르는 여잔데." ".........." 멍하니 지원이의 어깨를 보는 성훈이. "내 아이를 가졌대." 푹--- 그 자리에서 성훈인 의식을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18)****** 믿어. (past) 들어오지 않는 밤이 반복되고 성훈인 그 자리에 누운 채 움직이질 않았다. 지원이가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관계를 맺고 아이를 만들었다. 떨어지는 눈물이 바닥에 떨어져 얼룩이 진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정지된 성훈이의 삶. 며칠이 흘렸는데. 이 집에서 지원이를 기다리는데 지원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상관하지 않아. 형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던.. 난 상관하지 않을게. 그러니깐 제발 얼굴이라도 보여. 응?' 건조해진 입술을 깨물고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참아보려고 노력해 본다. '그런데.. 형... 나 너무 아프다. 심장이 터져 버리는 것처럼 아파. 그러니깐, 들어와서 성훈이 안아주면 안돼?' 눈을 들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본다. 밤바람은 싸늘하고 가슴에 멍이든 성훈이의 속이 공허하다. 두 눈을 감으면 생각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 잠이 들면 조금은 나을거야.' 잠을 청해보려는 성훈인 아무것도 비추지 않게 두 눈을 꼭 감았다. 바람은 불어 성훈이의 몸을 차갑게 만들어 버린다. "일어나!!" 차갑게 들리는 지원이의 음성에 감았던 두 눈을 떠본다. '형이.. 돌아 온 걸까?' 며칠동안 한자세로 누워 있어서 인지 움직여지지 않는다. 결리는 어깨와 갑작스레 움직여 놀란 것 같은 근육 신경들이 성훈이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다. "일어나!! 강성훈!!" 침대로 살며시 내려주는 지원이가 성훈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입안에서 감도는 지원이의 담배향이 성훈이의 호흡기를 자극시킨다. "형." 자신의 시선에서 떨어지려는 지원이를 잡고 싶어 그의 팔을 붙든다. 오랜만에 입을 열어서 그런지 쉰 음성이 성훈이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 "형, 가지마." "......." 지원인 아무말도 없이 성훈이의 손을 털어 내고는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가지마. 제발 날 혼자 두지마." 흐느껴 울려고 하지도 않는데, 버릇이 된냥 눈물이 떨어져 버린다. '울고 싶지 않는데. 울고 싶진 않은데...' 베개닢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려고 한다. 그때.. "네 트렁크 어디다 쳐 박아 뒀어?" "난 이 집에서 안나가!! 싫어!!" 지원인 성훈이의 짐들을 트렁크에 싸고는 거실로 던져 버렸다. "나가." "싫어. 형! 나, 나가고 싶지 않아!!" "내 집에서 나갓!!" "싫어! 싫어! 싫단 말야!!" "강성훈, 주접떨지 말고 나가. 조용히 해결하잔 말이다!" 성훈이를 밀어내려는 지원이의 눈이 성훈이를 보지 않는다. 모자 속에 깊이 숨겨놓은 두 눈동자를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왜? 왜 날 내치려고만 해? 어? 형, 내가 뭘 잘못 한거야?" "......." "형, 내가 잘못한 거 있어? 형, 날 봐." "......." "아기 때문이라면 난 괜찮아." "......." "형, 그러지 말고 나 좀 봐!!" 힘없이 흐느끼더니 소리를 질러대는 성훈이. "......." "형, 제발 그러지 말고 나 좀 봐. 응?" "......." "내가 뭘 잘못했어? 잘못한 거 있으면 다 고칠게. 꼭 고칠게." "......." "형 말해봐. 응?" 자신을 붙들고 올려다보는 성훈이의 하얀 입술이 붉은 피로 물들여져 있다. 건조해진 입술은 터지기 쉽다. 붉은 피. "말해봐. 나 고칠게. 형이 여자를 만나도 나 가만히 있을 게. 화 같은 거 안낼 게. 그러니깐." "너란 녀석에게 흥미가 떨어졌어." 차갑게 들리는 음성에 숨이 넘어가는 것 같다. 고른 숨은 내쉬질 못하고 헉헉거리는 성훈이. "난.. 난." "흥미가 떨어졌다는 소리, 뻔한 거 아니냐?" "......." 성훈인 긴 한숨을 쉬고 지원이가 발언하는 말 들를 수용해 보려고 노력해본다. 찢어지는 가슴 안의 고통이 성훈이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미쳐버릴 것 같아.' "그럼, 내게." "......." "시간을 줘. 조금이라도 진정되게." "......." 성훈이에게는 막을 수 없는 폭풍우가 성난 듯 밀어닥치고 있다. 가슴 깊숙이 너무나 차갑게 사무쳐서 그것을 녹일만한 따뜻한 추억이 하나도 없었다. "나도 아이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 슬픔이 차고 차서 더 이상 찰 곳이 없는 음성이다. 현관을 박차고 나가려던 지원이 멈칫하자, 성훈인 그 자리에 서서 그치지 않는 눈물을 떨구고 있다. "......." "난 형이 해 달라는 대로 다해줄 수 있는데.. 형이 원하는 건 다할 수 있는데." "......." "난, 뭐였을까?" "......." "나, 노력해도 안 되는거야?" 형에게 의미 있는 존재는 노력해도 안 되는 거야?" 성훈이에게 지원인 첫사랑이다. 가슴이 저며올 정도로 잔인하고 아픈 사랑. "나, 노력할게.." 지원인 더 이상 듣기 싫은지 문고리를 잡고 비틀어 버린다. "형, 내가 그렇게 싫어? 부담스러운 거야?" "......." "형!" "내일 내가 들어오면 네가.. 안보였으면 좋겠다." "난 형에게 모든 걸 줬어. 난 은지원을 사랑했단 말야. 형에게 성훈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을 때도.. 형에게 아무런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해도.. 난 형을 사랑했어." 단순히 육체적 쾌락을 즐기려고 성훈이를 자신의 곁에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지원이에게 새로이 던져진 감정의 변화. 성훈이와 있으면 모든 게 밝아 보였다. 따뜻해지는 자신의 집과 항상 웃어주는 성훈이가 있으므로 해서 자신이 정말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주었다. 성훈이의 울먹이는 음성에 지원인 움직이질 않는다. "그 여자가 형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아. 그러니깐. 날 내 치려 고는 하지마. 떠나도 내가 떠나. 내가." "......." "형이.. 밀쳐낸다고 해도, 때가 되면 내가 판단해서 떠날거야. 난." "그 아기." "......." "내 아이 아니야." 이런 변명 따위는 성훈이에게 떠벌리지 않을 것 같았다. "형.. 지금?" "믿던 안 믿던 네 자유야!" 쾅 소리와 함께 닫혀진 현관문을 멍하게 쳐다보고만 있다. "형이.. 내게 변명을 했어. 형이." 흐르던 눈물을 눈이 아릴 정도로 꼭 훔치고는 지원이 싸놓은 자신의 트렁크에 손을 대었다. 서서히 밝아지는 얼굴엔 하얀 바다를 인색하게 할 정도의 새하얀 미소가 번져지고 있다. "난.. 믿어.. 형을 믿어..." 19)****** 2월 22일 (past) "이것들은 다 뭐야?" 2월의 어느 날 자신의 얼굴을 다 가릴 정도로 선물상자를 들고 들어온 성훈이를 지원이인 황당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뭐긴, 선물이지." 낑낑거리며 현관을 통과하는 성훈이 속을 알 수가 없다. "형이 정장을 입는걸 한번도 못 봐서 대충 눈짐작으로 사왔어." "......." 선물 상자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고 리본을 푸는 성훈이의 행동이 엉뚱해 보이지만 신경 쓰기 싫은지 읽던 잡지에 다시 손을 얹어 놓았다. "형, 이리와봐. 이거 잘 어울리겠다." "......." 성훈이를 쳐다보지 않고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는 지원이. "이거 한번 입어봐. 응?" 지원이의 잡지책을 덮어버리고는 당돌하게 자신의 손을 잡아당기는 성훈인 뭐가 좋은지 방글방글 웃고 있다. "뭐하는 짓이야?" "춈, 화만 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주라. 응?" "아이씨!!" 성훈이의 이끌림에 끌려가는 지원인 인상이 잔뜩 짜증스러워 보인다. "어느 게 좋을까? 흰색이 좋을까? 아니면 아이보리색? 아니다. 검은색이 좋겠지?" 혼자 떠들고 혼자 웃는 성훈이가 실성한 것처럼 보인다. "저리 치웟!!" 짜증스런 눈으로 성훈일 노려보는대도 성훈인 방글대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검은 정장이 좋겠다. 그치?" 지원이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 콧노래를 부르는 성훈이의 멱살을 잡고 한마디 해주고는 싶지만 지원인 가만히 있는다. "경고하는데, 그만해라." "얼굴 좀 펴. 왜 맨 날 인상 쓰는고얍?" "쳇!!" 지원인 애교 띤 웃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음. 검은색 정장을 입었으니깐, 검은 구두가 어울리겠지? 그치?" 검은 구두를 들고 지원이 발에 억지스레 신기는 성훈이의 행동이 화를 돋구고 있다. "이제 죽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구나??!!" "쓰~~ 스마일. 좀 웃어!!" 동그란 눈이 귀엽게 째려보고 있다. "야 강성.." "오늘 하루만 성훈이 말좀 들어라. 좀!!" 윙크를 하며 방긋 웃는 녀석에게 더 이상 호통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생일이니깐, 얌전히 좀 굴자. 오늘 이거 사느라 백화점 4군데나 돌아댕겼단 말 얍!!" '생일?' "나 준비하는 동안 이거 얼릉 입고 나와? 꼭 입어. 꼭 입어야해!! 알았지? 꼭 입는거다." 검은 정장을 지원이 손에 얹어주고 주방으로 가서 케익을 꺼내는 성훈이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핫하. 강성훈, 내 생일은 6월달이지, 2월 달이 아니야." 들고 있던 정장을 소파 위에 던지려 할 때 성훈이의 냥냥한 음성이 들려온다. "누가, 형 생일이래? 내가 형 생일도 모르는 바보인지 알아? 난 은지원의 관련한 모든 걸 다 알고 있단 말야." "........" 양 볼을 잔뜩 부풀이는가 싶더니 지원이를 쳐다보며 수줍게 말을 이었다. "성인이 되는 날이란 말야. 성훈이 나이가 스물이 되는 날이라구. 성훈이가 어른이 되는 날이란 말야.." 그후로 2월 22일 이라는 날짜를 지원이의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형, 성훈이 모 바뀐 거 없오?" 눈웃음을 치는 성훈이의 물음이 귀찮다는 듯 듣던 음악의 볼륨을 좀 더 높였다. "치~ 모 바뀐 거 없오? 응? 썬그라스 좀 벗고 나 좀 봐라. 응?" 썬그라스에 가려진 지원이의 두 눈을 보고 싶다. 자신의 변화에 눈여겨보지 않는 지원이에게 서운하다. "운전 방해되니까, 입 닥치고 가만히 좀 있어!!" 지원이의 냉냉한 음성에 입을 삐죽거리다 거울에 자신의 하얀 얼굴을 비추었다. 동그란 눈이 거울에 비춰지자 좀 더 눈을 크게 떠보기도 하고 손으로 눈을 찢어보기도 한다.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지원이가 원망스럽지만 성훈인 아무런 불평도 않고 곁눈질로 지원이의 눈치를 보고 있다. 신호등에 걸려 지원이의 차가 도로 한복판에 세워지자, 성훈인 지원이를 한번 노려보고는 차 문고리에 손을 댔다. 달칵----- 차 문을 열고 도로변에 발을 내려놓는 성훈이. "야, 강성훈 너 뭐 하는 짓이야!!" 지원이의 호통치는 음성을 듣지도 않고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차도 위로 걸어간다. 그리고 지원이의 차 앞으로 걸음을 멈춘다. "강성훈!!!" 지원이의 찢어지는 음성에 뒤돌아 서는 성훈이. 두 눈이 화가 났다는 듯 지원일 째려보고 있다. "당장 이리 안왓!!" 신호는 바뀌고 지원이 차 뒤에선 클락션 누르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한다. "강성훈!!!" "나 머리 염색했단 말야!!!" 클락션 소리에 성훈이의 음성은 안 들렸지만 입 모양으로 성훈이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 눈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다. 지원인 울먹거리는 성훈이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는다. 황금빛을 내는 성훈이의 머리는 하얀 얼굴과 잘 어울린다. 햇살을 받고 있는 성훈이가 지금 웃고 있다면 더 예쁠 것이다. "너, 집에 들어가면 죽을 줄 알어." 작게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지원이의 고집스런 입가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한다. 일그러졌던 얼굴은 성훈이의 엉뚱한 행동에 크게 웃어버린다. '멍청한 녀석. 내가 맹인인지 알아? 너, 머리 염색한 거 오늘 새벽에 알았어. 이 병신새꺄!!' 20)****** 빠져들고 있다. (past) "야! 은지원!!" 새벽녘에 들어온 지원이에게 삿대질을 하는 성훈이에게서 술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지원인 한심한 표정으로 성훈일 슬쩍 쳐다보고는 방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야! 이 새끼앙~ 너 마리얍!!" 혀까지 구부러진 걸로 보아 꽤 많은 양의 술을 입에 댄 것 같았다. 지원인 땀에 젖은 셔츠를 벗고는 냉장고로 향했다. 콜라를 꺼내 한 모금 마시고 거실에서 자신에게 소리를 쳐대는 성훈이를 쳐다본다. "얌마!! 니가 올마나 잘났오?" 딸꾹질을 하는 녀석의 모습이 세 살 박이 어린애처럼 귀엽다. 비틀거리면서도 중심은 잘도 잡는다. 지원인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작게 웃더니 욕실로 가서 물을 받는다. "너 잘난 거 하나도 없오~ 너 밥 잘해? 너 빨래 잘해?" "........." "치~~~ 지 손으로 라면하나 못 끓이면서." 말 릴 때로 말린 혀가 발음을 하고 나면 딸꾹질이 따라 붙었다. "쳇, 이제 골고루 다하네." 실없이 웃고는 오디오 리모콘을 들고 PLAY를 눌렀다. 조용한 발라드 음악이 나오자. 지원인 오디오 쪽으로 가서 CD들을 뒤적거린다. "너 같은 놈 사랑하는 나도 등신이지. 은지원이 잘난 게 어딨다고." 당당하게 울러 퍼지던 음성이 조금씩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CD를 고르던 지원인 소파 위로 몸을 앉힌 성훈이에게 시선을 돌린다. "내가 왜. 은지원을 사랑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안 사랑하고 싶은데.. 내가 왜 이러는지. 흐흐. 흑.." 울먹이는 녀석의 눈에서 길게 반짝이는 액체가 보였다. 지원인 냉장고에 가서 생수 한 병을 들고와 뚜껑을 따서 성훈이의 머리위로 부어 버린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 후 또 한 모금의 생수를 입안에 가득 메우게 했다. 지원인 생수병을 탁자에 올려놓고 성훈이의 벨트에 손을 대고 풀기 시작한다. '도대체 얼마나 쳐 먹었길래.' 벨트를 풀어놓고 윗도리를 벗겼다. 그리곤 그의 입안으로 자신의 입안에 고여있는 생수를 넣어준다.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것처럼 몇 번을 반복하는가 싶더니 지원이의 입술이 하얀 목선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뚝뚝---- 내 머리위로 물이 떨어진다. 물 떨어지는 소리. 미미하게 들리는 거친 숨소리. 누군가가 내 몸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내 몸에 쌓여있는 피로를 풀어주는 것처럼 내 몸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고 있다. 물 속에 붕 떠 있는 것 같아. 엄마 뱃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다. 도대체, 뭘까? 날 부드럽게 매만져 주는 사람이 누굴까? 따뜻하다. 내 몸에 닿는 손길이 너무 따뜻하다. 읍! 날 매만지는 입술이 내 입을 막고 물 안으로 들어간다. 눈뜨기가 힘이 든다. 누구지? 설마 지원이형? 두 눈을 뜨고 싶지만 떠지질 않는다. 내 입안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이 사람은 누굴까? 내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 사람은 누굴까? 아직 술이 깨지 않아서 환상 속에 있는 걸까? 꿈꾸고 있는 것이라면 너무 생생해. 지금 난 숨을 쉴 수가 없으니깐. 숨을 참아보려고 하지만 고통스럽기만 하다. 난 조심스레 눈을 떠본다. 내 입술을 막았던 감촉이 수중으로 떠서는 다시 내게 다가온다. 지원형. 지원형이다. 형이 다시 내게 와서 내 입술에 입을 맞추며 산소를 공급해 준다. 너무 부드럽고 따뜻해. 정말, 지원형이 맞아? 아직 내가 술에 덜 깨서 환상 속에 있는 걸까? 아니면 술에 취해 환상 속에 있는 걸까? 환상이든 꿈이던 상관없어. 지금 난 행복하니깐. 난 눈을 감고 신이 존재하는 곳에 기도를 해본다. 지금 이 감촉이 현실이기를 바라며.. '감기 걸리겠군.' 녀석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이불을 얼굴까지 덮어 주었다. 이마에 맺힌 물방울들은 아까 전 욕조에서 묻은 물이 아니다. 추위를 느끼는지 파르르 떨고 있는 녀석의 입술에 손을 대어 본다. '아침에 눈뜨면 너 죽을 줄 알어.' 새벽녘에 녀석이 주정하던 소리를 되새겨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심야 코메디보다 더 재밌던 녀석의 음성. "지.. 원형." 녀석이 부르는 소리에 피식 웃고는 담배하나를 물었다. '내가 이상해지는 걸까? 왜 너의 행동에 화가 나질 않지?' 난 해가 뜨기 전까지 녀석의 몸을 탐할 것이다. 녀석이 녹초가 되던 말던. 내가 즐기고 싶은대로. 손대도 손대도 질리지 않는 녀석. 나에게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 요즘 들어 녀석의 행동 하나 하나에 관심이 가게 되니깐. 여자와 있을 때도 떠올려지는 녀석의 웃는 모습에 난 집을 찾고 만다. 어떻게 된 녀석인지 날 자꾸만 저 녀석 곁으로 인도하고 있다. 빠져들기는 싫지만.. 난 빠져들고 있다. "지원형 내가 잘못했오." 속이 지랄같을 것이면서 지원이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고 있다. '뭘 잘못했다는 거지?' 지원인 성훈이가 차려놓은 토스트에 입을 대고 있다. "나 다시는 술 안 마실게. 혹시 나한테 정 떨어진 거 아니지?"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성훈이의 눈망울이 맑아 보인다. "떨어질 정이라도 있냐?" 삐딱하게 흘려놓고는 먹던 토스트를 내려놓았다. '어제 너무 무리 한 건가? 입맛이 없네.' 지원인 일어나 오늘 입고 나갈 옷을 골라 본다. "화 안난거지? 그렇지?" "........" 성훈인 지원이를 따라 안방에 와선 지원이를 뒤에서 꼭 안았다. "화 안난거지? 형?" "떨어져!! 더웟!!!" 21)****** 중립을 위한 제안. (past) “ 정말 불공평해. 형은 망치도 아니면서. 거센 채찍도 아니면서 형의 한마디 말에 난 마음에 못박히고 퍼렇게 멍들어 아무일도 할 수가 없어. ” 클럽 안은 여자들로 가득했다. "매튜. 저번의 그 아가씨. 널 기다려.. 자, 들어가봐." 백인 녀석이 주는 열쇠를 쥐고 하얀 계단을 오르는 지원이. 열쇠에 명시되어 있는 방 호수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 보았다. 지원인 들어서자마자, 방안의 인테리어를 둘러본다. 그런 대로 잘 꾸며놓은 방. "왔어?" 여자의 음성이 들리자, 지원인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웃었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려 얇은 음성의 소유자가 지원이 앞으로 나타났다. 지원인 그녀가 목욕탕에서 나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쳐다보았다. 여자는 나체였다. '동양계 여자로군." 그녀는 침대로 지원이를 이끌며 지원일 껴안고 속삭였다. "오늘밤 날 찾아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처음 널 본 순간부터 맘에 들었거든." 머리속엔 온통 투명하게 웃고 있는 성훈이 생각뿐이다. '내가 이상해지긴 했어. 왜 그 녀석 얼굴이 떠올려 지는건지.' "뭘 생각해? 매튜?"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려는 그녀의 손톱이 지원이의 턱 선을 할끼고 있다. "손 치워!!" "난 너의 싸늘함이 좋아." 지원일 가슴안으로 품으며 유혹하려는 여자의 숨소리가 혼자 흥분하고 있다. 지원인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겨우 참았다. 삼류영화를 너무 많이 보는 여자 같았다. "그래? 나도 너의 천박함이 좋아. 훗." 그녀가 지원이의 목에 손을 감으며 예상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매튜 넌 정말 특별해. 너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어투가 사람을 끌리게 하거든." " 난 모르겠는데." 비웃듯 웃고는 여자의 가슴에 입술을 대어 본다. [나도 아이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 불연 듯 떠올려지는 성훈이의 음성에 지원이의 입술은 굳어져 버린다. "매튜, 조금만 더!" 지원인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는 여자의 몸을 밀쳐냈다. "왜 그래?" 여자의 음성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 지원인 풀어진 자신의 셔츠를 바로 하지도 않고 뛰쳐나온다. '젠장알 왜 망할 녀석이 생각이 나는 거지? 쉣! 내 머리가 잘못 됐나봐!!' 모래 위에 몸을 길게 누웠다. 떠오르는 성훈이의 얼굴 때문에 지원이의 머리 속이 복잡하다. '경고하는데, 넌 내 인생에 파고들 자리가 없어!!' 그래도 떠올려지는 성훈이의 얼굴. '내가 여자를 거절했다? 훗..후후. 이젠 내가 돌아 버리는 건가?'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해도 잘 되진 않는다.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비춰지는 성훈이의 얼굴 때문에 지원인 머리를 쥐 뜯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를 뜯는다고 변하는 게 있을까?" 지원이 뒤를 돌아보았을 땐 성훈이 만한 체구에 오렌지빛깔의 머리를 지닌 미소년이 하나 서 있었다. "난 바비라고 해." 성훈이만큼 하얗지는 않지만 다른 동양계에 비하면 하얀 편이였다. "......." 지원인 말없이 그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왔을 뿐이다. "난, 7살 때 이곳으로 입양됐어." "......." "이곳은 보기엔 인자해 보이는 아버지가 한 분 계셨지. 내게 모든 걸 베풀어주시는 분이야. 이 커다란 집까지도 그가 쥐어 줬으니깐." "......." "은지원. 난 너의 모든 걸 알아. 당황스럽겠지만 1년 전부터 줄곧 널 지켜봐왔어." 바비의 말을 듣고 있는데도 성훈이의 얼굴이 떠나질 않는다. "물론 너랑 네 집에 사는 그 하얀 녀석과 무슨 관계인지도 알고." 바비의 말에 눈이 동그래지는 지원이 당황한 나머지 매만지던 술잔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훗, 긴장하지마. 나도 그쪽 부류니깐." "뭘 원하는 거지?" 싸늘한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자 바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입가에 맺혀진 술 내음의 향기가 좋았다. "예상했던 대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싶어." '제안?' "......." "1주일에 한번씩 나와 밤을 보내주면 돼." 붉게 물들여 놓은 입술이 자신있게 웃고 있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란 걸 예감했다는 듯이. "훗." "널, 만족시켜 줄 수 있어. 내 직업과도 같으니깐." "돌았군." "난 지극히 정상이야. 난 이 세계에서만 자랐거든." 바비는 성훈이와는 모든 게 달랐다. 자신 앞에서 떨어대는 것도 없었고, 말을 버벅 거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신감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 것만 같다. 그 자신감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함께 있는 사람이 그를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지원인 바비의 제안을 계산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내게 뭘 바라는거지?' 계산하는 과정에서 웃고 있는 성훈이가 보이자 머리가 얼얼해 지도록 흔들어 버린다. '넌 내 인생에 들어올 틈이 없어!!'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로 성훈이에게 흘려가고 있었다. 자꾸만 떠올려지는 성훈이의 얼굴. 더 이상 망설임은 필요 없다는 듯 차갑게 미소를 보인다. 지금 바비의 제안은 성훈이에게 흘려 가는 자신의 마음을 중립적으로 놓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지원인. "그래 좋아.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하지만 내 사생활에 개입할 생각 따위는 하지마." "훗, 사생활이라?" '은지원의 사생활이라? 오히려 군침이 도는데. 벌써부터 은지원의 사생활이 궁금해져. 인간이 사악하다는 말이 나로 인해 증명되는군.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욕구가 생기니깐.' 22)****** 어떤 놈이냐? (past) 바비와 밤을 지내고 늦으막히 들어온 집. 불꺼진 집안으로 들어서자, 수영장만 환하다. 수영장를 가장자리를 맴돌아 무수히 켜놓은 초들을 보고 난 인상을 쓰고 있다. '또 쓸데없는 짓을 했군.' 성훈인 보이지 않고 영롱한 초만 내 눈에서 빛나고 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지원형과 후니의 400일을 축하합니다~ 사랑해!! 지원이형!!!" 녀석의 노랫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없었다. "난 형 옆에 있지, 뒤에 있지 않아." 어디서 나타났는지 성훈인 내 옆에 와선 활짝 웃고 있었다. 초하나를 들고 서 있는 녀석의 얼굴이 더욱 빛을 바라는 것 같다. "형,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고 있었지?" "......." "형과 내가 지낸 지 400일이 되는 날이야욥. 지원형 몰랐지?" 방그레 웃는 녀석에게 저번처럼 신경질을 낼 수가 없다. "이번엔 방안에 초 킨 거 아니니깐 화내지마." "......." "나 이거 켜느라고 고생했단 말야." "......." 수줍게 입술을 깨물며 말하는 녀석의 행동이 우습기만 하다. "어, 저거 꺼졌네.." 녀석이 몇 발자국 걸어가서는 꺼진 초에 들고 있던 초를 갔다 댄다. "에이~ 저것도 꺼졌어." 녀석은 꺼진 초를 밝히는 아이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이러니 방에서 밝혀야 하는건데.. 휴, 저것도 꺼졌다." 녀석이 일어서자 난 그를 뒤에서 꼭 안아 버렸다. 날 만나 400일이라며 기념하는 녀석에게 엉뚱하게도 감사해 하고 있다. 내가 세상에 살아있는걸 확인시켜주는 녀석. 내가 누군가에게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해 주는 녀석 같았다. 넌 어떤 놈이냐? 혹시 너, 내 수호천사냐? 검은 눈동자에 매력적인 갈색피부. "형, 날 사랑하지? 성훈이 좋지? 그렇지?" "......." 성훈인 지원일 올려다보고 물었다. "어, 이거.. 뭐야?" 지원이 몸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붉은 멍울을 보며 속으로 깊은숨을 몰아 쉬었다. "......." 지원일 쳐다보는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며 말을 이었다. "또, 여자랑.. 잔 거야??" "......." 슬픈 눈빛을 띠고 있는 성훈이에게 지원인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원이의 가슴언저리에 남겨진 흔적에 손을 대는 성훈이의 고사리 같은 손. 지원인 성훈이의 손을 털어 버리고는 일어나 누웠다. "상관없어. 성훈인 질투 같은 건하지 않을거야. 다만.." '다만?' "아니야." '나 외에 다른 남자의 흔적을 묻히는 건 싫어. 그래야 조금이라도 내가 형에게 특별한 존재가치가 있는 거잖아. 적어도 성훈인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아니 믿고 싶어. 그러니깐, 형 그러면 안돼. 만약.. 형이 그러면.. 난, 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을지도 몰라.' 일어나 앉은 지원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성훈인 또 한번 물어본다. "이제.. 나, 형에게 조금은 인정 받는거지? 그렇지?" "풋." 비웃음 어린 음성이지만 성훈인 지원이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성훈인 형이 제일 좋은데.. 난 형 사랑해." "......." "형이 여자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난 수용할 수 있다." 자신은 없어 보이지만 성훈인 말하고 있다. "그만 쫑알대고 욕실에 물이나 받아." 지원이의 강압적인 음성에 성훈인 아쉬운 표정으로 지원일 올려다본다. "아직 새벽인데.." 지원이의 탐욕에 녹초가 된 성훈이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싫은지 그의 가슴을 손을 둘러 꼭 껴안았다. "두 번 말하기 싫다." 낮게 깔린 음성으로 성훈이에게 명령을 내린다. '싫어.' 성훈이의 둘렸던 손은 풀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형, 사랑해." "........" "지원형."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물이나 받앗!!" 신경질적인 음성의 눈동자가 매섭다. "치~" 성훈인 일어나기 싫은 침대에서 빠져 나와 옷을 걸쳐 입었다. 하얀색 박스티는 성훈이의 허벅지까지 내려온다. 티가 닿는 곳이 아프다. 온 몸에 지원이가 물어뜯은 곳이 쓰라렸다. "물 받고 올게." "........" 몇 걸음 걷는가 싶더니 다시 하얀 얼굴이 지원이에게 다가왔다. "목마르지 않아? 내가 마실 거 갖다줄까?" 동그란 눈으로 지원이의 코앞까지 와 있는 성훈이의 입술이 스텐드 빛에 반짝이며 빛나고 있다. 엷은 핑크빛. "허튼 생각하지 말고 가서 물이나 받아!!" 묵직한 어조로 성훈이에게 말은 하지만 지원이의 심장은 분명히 뛰고 있다. 그때 성훈이의 입술이 지원이 입술에 잠시 머무르는가 싶더니 지원이 화를 내기 전에 떼고 귀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진짜 물 받구 올게." 성훈인 자신에게 한 대 맞기 전에 일어서서 문 쪽에 서 있다. 해맑게 미소를 짓는 그는 분명히 사랑스럽게만 보인다. 지원이 그 미소에 취해 얼이 나갈 쯤 또 다시 맑은 미성이 들렸다. "성훈인 지원형 쩡~~말루 사랑해." “ 난 키가 작아서 형이 날 내려다 보기만해. 마치 작은 꼬마를 대하듯 형은 날 어린애 취급만해. 그렇지만 난 어른이란 말야. 그래도 형 앞에서 어쩔 수 없나봐.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얼굴이 빨개지는데.. 어떻게 형에게 얼굴을 붉혀? 커지고 싶어. 형 마음속에서 형이 잠든 사이에 이만큼 자라서.. 아침이면 형이 날 올려다 볼수 있도록..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라고 싶어. 내가 형 입술에 입을 맞출 수 있도록...” 23)****** 커플링 (past) "여자랑 몇 번 자봤어?" 바비의 음성이 들리지만 무뚝뚝한 지원인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서는 지원이의 어깨를 감싸고 그의 어깨에 입술을 대본다. "풋, 그 꼬마녀석에게 갈건가?" "......." 아무 말 없이 바비의 손을 털어 내고는 옷을 집는 지원이. "은지원 바쁘겠어. 여자를 안으라, 꼬마 안으라.. 또, 내게 찾아오느라. 훗." "듣기 거북한데." "그 꼬마녀석이 우리 관계를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미지근한 칵테일에 입을 대는 바비의 음성에 멈칫하는 지원이의 두 눈이 굳어지고 있다. "글쎄." "아마도 기겁을 하겠지." "......." "누군가를 간절하게 원해 본적 있어?" "......." "난.. 있어." "그만 가봐야겠어." "간절하게 말야." "감상에 빠져 있군." 침대에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보는 지원이가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라는 인간.. 궁금하지 않아?" "......." "지원이 넌 내가 어떤 놈인지 궁금하지 않냐구?" "......." "내 한국 이름이라던가.. 내 생일이라던가." "......." 바비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걸 보면 관심이 없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궁금하지 않나보군. 하지만 알아둬. 네 녀석이 날 잊지 못하게 해주고 싶으니깐." "궁금하지 않아.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럼 강성훈은 어때?" "......."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춰지고 바비의 말에 집중을 하는 것 같다. "은지원, 사랑에 빠졌군." "........?" 거울로 비춰지는 지원이의 얼굴에서 하얗게 웃던 하얀소년이 떠올려진다. 지원인 바비의 말에 날카로운 두 눈이 커다랗게 떠진다. "그 꼬마녀석에게 빠져 있어! 넌!" "........." "그만 가봐. 그 꼬마녀석 눈물 머금고 널 기다릴 테니깐." 바비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바지를 입는 지원이 바비를 다시 돌아본다. "난 사랑같은 건 몰라. 네 추측대로 떠들어대진 마." "눈빛을 보면 알지. 넌 날 안으면서도 꼬마를 생각하거든." "풋, 우스운걸. 난 모르겠는데 너 혼자서 느끼니 말야." 문을 빠져나가려는 지원이를 바라보고 힘없는 어조로 말을 잇는다. "언젠가 네가 뼈저리게 느낄걸. 하지만 그녀석이 네 곁을 떠나고 난 뒤에 알게 되겠지. 훗후."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마." 현관을 빠져나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바비는 한숨어린 어조로 흘린다. "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없다? 훗." '내 덫에 걸러들었으면 내 이름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을거야. 내 이름... 한번도 불려지지 않은 내 이름. 낯설게만 느껴지는.. 타인의 것처럼 느껴지는 내 이름. 내 이름은 말이지. 재덕이야. 성은 내 머릿속에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지워져 버렸지만. 내 이름만은.. 뚜렷하게 기억 할 수 있어. 재덕이야. 재덕이. 은지원.. 궁금하지 않아도 내 이름 기억해둬. 네 머리 속에 영원히..' 집에 들어서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는다. '사랑? 쳇." 신경질적으로 담배필터를 자근자근 씹고는 성훈이의 형체를 찾아본다. '잠들었나?' 방문을 열어보고는 성훈이가 없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내쉰다. '뭐야? 이 녀석 어디 간 거지?' 알수 없는 정막함에 숨이 막힐 것 같다. '불안해.' 스윽---- "어? 형, 먼저 들어와 있었네." 웃고 있는 성훈이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젖은 머리카락과 붉게 물든 입술. "너 어디 갔다왔어?" "어?" "........" "어, 저기.." 말꼬리를 흐리는 성훈이. 지원 자신이 보기에 성훈이가 다른 품에 안겨 놀아 난 것처럼 보였다. "저기 어디!" 성훈이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힘을 준다. "형.. 아파." "어디!!" "형~엉. 저기.. 저기." 말을 얼버무리는 성훈이의 몸에서 익숙치 않는 향수내음이 풍긴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 지원이가 성훈이에게서 시선을 옮기더니 주먹을 성훈이에게 뻗어버린다. 퍽- 소리와 함께 소파위로 나뒹그래지는 성훈이. "솔직히 말해!! 어디 갔다 왔어?" 알 수 없는 분노였다. 어디서부터 형성되어 성훈이에게 쏟아지는지 지원이 자신이 알수가 없었다. "형." "어디 갔다 왔냐구!!" "형...엉." 맞은 곳에 손을 대는 성훈이가 고통스럽게 말한다. "말 못해?!" 몹시 흥분하는 지원인 자신의 행동을 파악하지 못한 채 성훈일 노려보고 있다. 또 한번의 주먹이 성훈이의 배 위를 향했다.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성훈이의 음성에 아랑곳하지도 않고 또 다시 손에 힘을 모아 성훈이에게 퍼붓는다. "어디 갔었어!! 어디 갔다 온 거야!!"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성훈이에게 손지검을 하는 지원이가 전화기를 들어올려 성훈이에게 던지려고 했다. "춤. 춤 배우고 왔어. 형, 흑." 성훈이의 가녀린 어깨가 들썩거리더니 훌쩍이며 울고 있다. '뭐? 춤?' 공연히 떠오르는 바비의 비웃음 어린 표정이 지원이의 뇌리를 스쳐간다. '뭐가, 불안했던 거지? 은지원. 뭐가 불안해서 녀석에게 손지검을 한거냐구? 녀석이 밖에 나가 무슨 짓을 하던 무슨 상관이야!!' 머리를 심하게 흔들어 대고는 전화기를 힘없이 내려놓는다. "형에게 보여주려고. 형이 춤을 잘추니깐. 나두.." "닥쳐." "형, 아직도 화 안 풀린 거야?" 침대에 누워 있는 지원이의 시선을 받고 싶지만 도무지 돌려지질 않는다. "형. 나 좀 봐바. 응?" "......." "다신 집밖으로 나가지 않을게. 응?" "......." "그냥 집안에 쳐 박혀서 맨 날 형 기다리면 되잖아." "......." "형~엉. 나 좀 봐바. 응?" "......." 울먹이는가 싶더니 또 훌쩍거리고 있다. "형이 맨 날 늦게 들어와서.. 흑... 맨 날 늦게 들어오니깐. 성훈이가 형 보여줄려고.. 춤 배우려 다닌건데. 형이 춤추는 거 좋아하는 것 같아서.." 머릿속이 혼란스런 지원이. 울먹이는 음성이 듣기가 싫다. "시끄럿!! 잠 잘 수가 없잖아!!!" "우와. 형 저 커플링 이쁘다. 그지?" 동그란 눈망울은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갖고 싶은지 쇼윈도에 딱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반지를 보며 눈을 초롱대는 성훈이의 마음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지원이. 차안으로 들어서는 지원일 쳐다보면서도 다시 반지에 눈이 간다.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차안으로 몸을 실었다. "저 반지 이쁘더라. 커플링인데.." "네가 계집애냐?" "그래도 참 이쁘더라." "입 좀 닥쳐!! 넌 입도 안 아파?" 지원이의 차가운 음성에 입을 꾹 다물고는 시내를 둘러보는 성훈이. 지원인 음악을 켜고 액셀을 밟았다. 맑은 하늘. 화려한 색색으로 된 남방들.. 챙이가 있는 모자에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자들. 하와이 거리는 온갖 인종들과 붐비고 있었다. 지원이의 차는 한동안 가는가 싶더니 주차장에 세우고 시동을 껐다. "왜? 형?" 썬그라스를 내려놓고는 성훈일 쳐다보는 지원이 속을 알 수가 없다. "밥 먹자!" "집에 가서 내가 밥해.." "네가 파출부냐? 맨 날 밥이나 하게?" "........" 쌀쌀맞게 말하고 성훈이를 째려보는 지원이가 성훈이 더러 내리라고 한다. "내려." "형은?" "들릴 때가 있으니깐 먼저 들어가서 주문해 놔." "........" 성훈인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 궁뱅이 쳐 먹였냐? 왜 이렇게 느려?" 짜증스런 어투에 주눅이 든 눈동자가 차안에서 급하게 내리려다 창문 틈으로 약지 손가락을 찍었다. "앗---!" 짧은 비명을 질러대며 약지 손가락을 입으로 향하는 성훈이. 지원이가 한마디 할 것 같아 아프단 말도 못하고 억지스레 웃기만 한다. "형, 저번처럼 안 오면 안돼.." "병신새끼." 붕--하는 소리와 함께 성훈이에게서 멀어지는 지원이의 차를 바라보며 성훈인 다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헛말이라도 많이 다쳤냐며, 많이 아프냐며.. 따뜻하게 물어주면 안돼?' 웃음을 짓고 있지만 눈가에 어리는 물기가 성훈이를 서글프게 해버린다. "이거 얼마죠?" 악세사리 가게로 들어선 지원인 바쁘게 반지의 가격을 묻고 있다. 종업원이 가격을 말하자 지원인 지갑에서 돈을 꺼내 가격을 지불하고는 반지를 손가락에 껴 본다. '녀석 손가락이 얼마만했지?" 약지손가락에 꼭 맞는 자신의 손가락에 또 다른 하나의 반지를 껴본다. '이건 좀 작네.' 24)****** 꼬마가 올 시간이야. (past) 양주를 먹여서 그런지 성훈인 꼼짝하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 먹기 싫다며 사정했지만 지원인 성훈이에게 술을 먹였고, 지금 지원인 호주머니를 뒤져 작은 반지를 꺼내들었다. 성훈이의 약지손가락에 껴보는데, 그의 손가락이 가는 건지 쉽게 들어갔다 쉽게 빠져 나온다. '풋. 줄여주는 것까지 내가 못해.' 지원인 성훈이의 엄지손가락에 반지를 껴 놓고는 옷을 주워 입는다. 옷을 다 입고 머리를 만질 무렵 지원인 자신의 손가락에서 걸리적거리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쳇, 이런 유치한 짓까지 하다니.. 은지원 너 돌았냐?' 거울속에 비추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묻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다. 지원이가 자신에게 묻고 싶은 말. 너도 성훈일 사랑하는 거냐? 지원인 끼어져 있는 반지를 억지스레 빼고는 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딴 거 만든 사람이 누군지 정말 한심해.' 대충 머리를 빗고 일어서는 지원인 성훈이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엄지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 '유치해.' 지원인 성훈이 손가락에 껴있는 반지를 빼내어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았다. '발견하면 네 손가락에 껴 있을테고 보질 못하면 오늘밤 들어와서 변기통에 던져 버린다.' "이 반지 뭐야?" 지원이의 웃옷 주머니에서 맑은 소리를 내며 굴려 떨어진 반지를 집어든 바비. "풋." "커플링이군. 전에 주문 한 적이 있어. 똑같은 디자인으로.." "........" 바비의 말이 귀찮은 듯 잔에 샴페인을 반쯤 따랐다. "꼬마에게 선물 한 건가? 그럼 끼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선물한 적 없어." "그럼 그 꼬마가 이걸 사서 너에게 선물한 거?" "쳇." 바비는 하얀 브라우스 단추을 두 어개쯤 풀고는 양주병에 손을 대였다. "하하핫.. 은지원에게 변화가 생겼어. 만났을 때와는 다른." 쓸쓸한 미소를 짓는 바비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 "어때? 오늘밤은 좀 색다르게 시작해 보고 싶은데.." 바비의 능청스런 미소에 지원인 술잔에 남은 샴페인을 한 모금에 다 마셔 버렸다. 사랑한다는 것 사랑하는 것. 성훈인 전화벨소리에 깨기 싫은 잠에서 깨려한다. 수화기를 집어 들으려던 하얀 손은 동그란 형체의 링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버리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성훈이의 엄지손가락에 잠시동안 머물렀던 링은.. 침대 밑으로 깊이 굴러 들어가고 말았다. "Hello?" "........" "말씀하세요. 여보세요?" [은지원 데려가.] 소름끼치게 들리는 차가운 음성에 성훈인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지원이 내 품에 잠들어 있는데.. 네 힘으로 데려가 봐.] 낯선 남자의 음성에 성훈이 몸이 경직되고 있다. "은지원 일어나." 키킥거리는 바비의 음성을 들으면서 지원인 깨질 듯한 머리를 잡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몇시야?" "꼬마가 올 시간이야. 좋은 모습으로 그를 반겨야지. 후훗." "꼬마?" "강성훈." 바비의 입에서 들리는 성훈이란 이름에 지원인 일어서려고 한다. 하지만 깨질 듯한 머리는 그의 몸을 일어서지 못하게 하고 주저앉게 만들고 있다. "너의 나체는 정말 훌륭해. 꼬마가 이런 네 모습을 본다면 퍽도 좋아하겠는걸. 지금 네 모습. 내가 본 모습중에 제일 섹시해. 키킥." "너.." 스윽--- 바비의 황홀경이 열리고 바비의 침대에서 애써 일어서려는 지원이의 눈과 해맑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군." 술병에 입을 대는 바비는 지원이의 당황하는 표정에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자리에 주저앉는 성훈이의 모습이 몹시 떨리는 게 지원이의 눈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자리 비켜줄까? 두 사람 할 얘기가 꽤 많을 것 같은데. 하핫." 침대에서 빠져나가는 바비가 성훈이 주저앉은 곳에 멈칫하고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은지원에게 묶이기에 네가 아깝다는 생각 안 들어?" 바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바닥으로 눈물을 떨어뜨리는 하얀 얼굴이 재밌다는 듯 또 한번 웃어버린다. "은지원 곁을 떠나. 네가 저 녀석 곁에 있는 다해도 넌 저 녀석에게 아무런 존재도 되지 못한다구." 주저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성훈이가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서고 있다. 깨지 않은 술 때문에 그런지 몹시도 어지럽다. 아니 이 상황이 더 어지러운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든 해봐." 침묵을 깨고 힘겹게 성훈이가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보이스에 가슴속 깊은 한숨이 서려 있다. "네가 보는 그대로야." 긴 한숨을 실어 내 품어대는 담배향기에 더 어지럽게 느껴진다. "난. 형, 사랑하는데.." 성훈이의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에 대한 거부.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지원이에게 다가 온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 네 얼굴 보기 싫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 "형, 왜 여기에 있는거야? 응?" ".........." 가슴이 시려서 온몸에 추위를 느끼고 있는가 보다. '형, 술 마시고 실수한 것이라고 말해줘. 그 이상은 상상하지 않게..' "사랑해." 늘 가까이서 자신을 쳐다보며 말하는 성훈이의 한마디가 어느새 듣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입 닥치고 돌아갓!! 네가 내 마누라라도 돼?" "........." "네가 뭔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주접 떠는거야?" "........." "돌아가!! 돌아 가라구!!" 높아진 언성이 이 상황에서 탈피하고 싶은지 몹시 노한 척 한다. 자신의 눈을 쳐다보지 않는 지원이가 원망스럽다.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며 실수였다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고 있다. "정말.. 난 아무것도 아니였구나. 형에게 난 아무것도... 되지 못했어. 이젠... 정말 형 곁을 떠나야 하는걸까?" 잠시동안 자신이 지원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도 조금은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가끔 비춰지는 그의 눈동자에 자신이 담겨 있는걸 보면 쌀쌀맞아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형도.. 성훈일 사랑한거라고 생각했어." 울먹이는 음성이 지원이에게 들려오지만 지원인 움직이질 않는다. 성훈이에게 달려가 그를 안아보고 싶지만 지원인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비틀거리며 빠져나가는 성훈이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다. '가지마!! 강성훈!!' 잡고는 싶지만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성훈이의 이름을 외쳐대는 그의 음성도 목청에서 사그라들어 입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젠장!!" 25)****** 남자가 애인이라구? (past) "고지용 너 애인있어?" 도전적으로 물어오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수려한 외모와 큰 키. 그리고 부. 그는 모든 걸 완벽하게 갖췄으니까. "있어. 애인." 지용이가 있다는 애인과 붙어다닌 건 한번도 본적이 없다. "공부 때문에 거짓말하고 다니니?" 당돌하게 물어보는 계집아이는 같이 과외를 받는 재벌집 딸이였다. 얼굴도 반반하고 남학생이라면 한번쯤 사궈 보고 싶어할 정도였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여학생. "나 어때? 이만하면 너랑.. 나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훗." 비웃음 가득한 웃음이 나왔다. 지용인 지갑을 꺼내 계집아이의 코앞에 갔다 데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지용이의 지갑을 쳐다보곤 지용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건 왜 보여 주는 건데?" "내 애인얼굴이야. 내 애인 강성훈." "핫..하하." 까르르 웃어대는 계집아이의 눈이 좀더 도전적으로 비춘다. "........." "고지용. 지금까지 여자 거절할 때 이런 식으로 했어?" 지용인 웃음을 참으며 말하는 계집아이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너 여자 거절할 때 머리가 잘 굴러가는지 처음 알았다. 남자가 애인이라구? 남자가? 핫하...하." "........." 웃고 있는 계집아이의 멱살을 잡아 당겼다. "지..지용아." "그래, 난 남자 좋아해. 그러니깐 내 앞에 다신 나타나지 말아줘." 책상위에 걸려진 성훈이의 사진을 보며 아침이 시작되었다. 방안에 걸려진 커다란 액자속의 성훈이와 자신의 모습이 함박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연락 좀 하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걸까? 걱정돼. 성훈아.. 제발 연락 좀 해봐. 나, 네 친구잖아.' 친구라는 단어에 고개를 살며시 저어본다. 볼을 건드리는 긴 앞머리가 지용이의 피부를 간지럽힌다. '나, 네 애인이잖아. 내 상상속에선..' 힘없이 떨구어지는 얼굴엔 간절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이런 경험 없어?" 지용이의 입술에 여자아이의 입술이 닿았다. 상한 기분은 금새 표가 나고 눈동자에 힘이 들어간 지용이가 계집아이의 눈을 노려보고 있다. 철썩--- 계집아이의 뺨이 돌아갈 정도로 세게 쳤다. "고지용!!!" 자존심이 상한 계집아이의 시선이 겨울 서리처럼 싸늘하다. "........." "야! 고지용!!!" 넘어가지 않는다. 여자들의 유혹 따위에 넘어가진 않는다.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던 성훈이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행동이다. '이런걸 성훈이가 본다면 기분 나빠 할거야. 난 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거든.' 『 "지용아, 잘있어. 자주 연락하구 편지도 쓸게." 하와이로 떠난다는 소리에 개근상만 받던 내가 조퇴를 했다. 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담기 위해.. "지용아, 보고 싶을거야." 하얀 손이 날 끌어 자신의 품으로 깊이 안았다. 좋았다. 성훈이의 미미하게 뛰는 심장소리도 그에게서 나는 특유의 향내도. 눈물을 글썽거리는 녀석의 머리를 매만지며 녀석의 입술에 도장을 찍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에게 그렇게 자신 있게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나오면 그가 완전히 떠나버릴 것 같은 불안함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 녀석의 모든 걸 지켜주고 싶었기에. 』 나 고지용은 성훈이를 기다린다. 녀석이 언제 귀국을 하던 상관하지 않는다. 이유는 내가 그곳으로 달려갈 테니깐. RRRRRRRRRRR----- 집에서 채운 족쇄를 쳐다본다. 집인데, 난 받아볼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덮개를 열고 있다. "성훈이한테서 연락이 왔다구? 성훈이한테서?" 26)****** 혼자라고 생각하지마. (past) 하얀 눈이 내리던 겨울에 성훈이는 서울로 귀국했다. 성훈이가 온다는 이유로 들뜬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하던 지용이. '강성훈' 이라는 플랜카드를 들고는 그가 나올 게이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두 시간 일찍 나온 지용인 성훈이가 도착하면 어디로 데리고 갈까 고민중이였다. 성훈이의 맑은 미소를 기대했던 지용이. 하지만 지용이의 기대는 그 공항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너무 변한 눈동자와 굳은 얼굴. 창백한 얼굴에 지용인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사궜다는 소리에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뻤어?" 지용인 웃으면서 묻고 있지만 잊지 못하는 성훈이의 그림자 때문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성훈이의 말수도 줄어 그는 고개 짓으로 지용이의 질문에 답변할 뿐이였다. "성훈아, 다음주에 스키장 안 갈래? 대입도 끝났고, 머리도 식힐겸 같이 가자." 가지 않겠다는 성훈일 억지로 끌고 갔던 지용이. 지용인 그곳에서 성훈이에게 상상하지 못했던 말을 듣고 말았다. 일반이 아닌 다른 삶으로 들어선. 예전에 맑은 미소로 가득했던 성훈이가 사라져 버린 이유를.. 공기가 맑고 청명하다. 그리고 주변 경관이 너무 아름답다. 홀로 버려진다는 두려움 따윈 잠시동안 잊을 수 있었다. 스키장의 사람들은 하얀 설원을 누비며 행복해 한다. 그리고 그 중에 껴있는 성훈이와 지용이의 얼굴도 환하게 웃고 있다. 하얗게 웃는 성훈이 때문에 기분이 몹시 유쾌해진 지용이. "몸을 약간 앞으로 굽히구, 스키는 앞쪽으로 하고." "스키한테 말해. 내 의지랑은 상관없이 스키 맘대로 움직이니깐." "지금까지 아주 잘하고 있어." "........" "이제 내려 가는거다. 무릎은 굽히고." "어." "중심을 잡고.. 자, 이제 내려가봐." 지용이가 성훈이에게서 손을 떼자 성훈인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한번 더!!" "........" "성훈이 너, 잘하고 있어!!" 하지만 성훈인 다시 또 넘어졌다. "다시 해봐. 성훈이 넌 운동신경이 좋아서 잘 할 수 있을거야." 성훈이의 손을 잡아주는 지용이가 방긋 웃고 있었다. '지용아, 편안해. 지금..' 일어선 성훈인 지용이가 일러 준대로 다시 시도해 본다. 그런데, 갑자기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마치 날개가 달린 기분.. 성훈인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 왔다. 기분이 그만이다. 꼭 나는 것 같았다. 스키가 눈에 스치는 소리가 좋았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도. "너무 기분이 좋아!! 사람들이 왜 스키에 미치는지 알겠어!!" 잠시동안 잊을 수 있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지원이의 얼굴을 잊을 수가 있었다. "언제 높은 슬로프에 갈 수 있을까?" 성훈이 지용이를 보며 맑게 웃고 있다. 티끌이 묻지 않은 하얀 미소가 예쁘다. 그런 성훈이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지용이의 손이 행복하다. '성훈이가 내 곁에 있어.' 하얀 미소만큼 흰 스키복이 천상에 그를 위해 지은 것 같았다. "성훈아, 여기서 만족하자!! 우리 성훈이 좀더 연습하면 내년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겠다!!" 정말이지 신이 났다. 무거운 마음들이 하얀 설원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보.. 한눈을 파니깐 다치지. 뭘 생각했기에 그래?" 지용인 아무 말도 않고 침대에 누운 성훈이에게 이불을 덥어 주고는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지원형. 지원형이였어.." "응?" 성훈이가 처음 꺼냈던 그의 이름을 지용인 영원히 저주하게 되었다. "배고프지 않냐? 뭐 시킬건데. 너 뭐 먹을래?" 들썩이는 어깨를 보고 가슴이 내려앉은 것도 지금 이 순간부터였다. "성훈아, 너 왜 그래? 아픈 거야? 많이 아파서 그런거야?" "형이였어. 형도.. 형도 이곳에 있어." 울먹이는 성훈이를 안고 위로해 준 것도 지금 이 순간부터. "형? 형이 누군데? 어? 성훈아?" 타국에서 생활하다 생긴 향수병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성훈인 그것보다 더 깊은 상처를 안고 서울로 귀국한 것이었다. "날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형은 다른 사람곁에 있었어." 성훈이가 시작하는 얘기는 지용이의 심장에 비수를 꼽고, 앞으로 그가 감당해야 하는 슬픔을 나눠주고 있는 꼴이 되었다.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내가 떠날 때도 그는 날 붙잡지 않았고.." 울먹이는 음성을 듣기 싫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내가 떠나던 날. 형 품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어. 난.. 철저하게 형에게서 버림받은 거야. 난.. 정말 형을 사랑했거든. 나 자신보다 더."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던 것처럼 익숙해져버린 성훈이의 삶. "난.. 난 어디로 가야 하지? 난, 길을 잃었어. 난, 쉴곳이 없어." 그런 성훈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정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그리고 그의 이마에 입술을 놓았다. "내가 있어. 성훈아, 혼자라고 생각하지마. 내가 있어. 성훈이 곁에 지용이가 있어." 27)******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past) 하얀 눈이 날리는 스키장을 돌아보던 두 사람 중 하나가 발걸음을 멈췄다. 멈춰 서서는 저만치서 걸어오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성훈아?" 턱선까지 오는 긴 앞머리는 성훈이의 입술을 숨기고 있다. "성훈아?" 무언가에 홀린 듯 가만히 서있는 성훈이를 흔들어 보았다. "왜 그래? 어?" 머리카락에 가려진 성훈이의 얼굴을 들어다 보기 위해 장갑을 벗고 그의 얼굴을 돌렸다. 따뜻한 액체가 지용이 손에 닿았고, 지용인 저 만치에 서있는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지원이. 성훈이가 불렸던 사람이다. 그도 성훈이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지용인 그런 성훈이가 싫어서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 댔다. "성훈아, 왜 그래? 강성훈!! 정신차려!!" 한곳을 보던 성훈이의 두 눈이 지용이를 보고 있다. "나. 도와줘. 저 자식 잊어버리게. 지용아, 나 좀 도와줘.." 멈추지 않고 떨어지는 눈물. "성훈아.." 그런 성훈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너무 소중해서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는데, 지용인 자신있게 성훈이의 입속으로 자신의 혀를 집어넣었다. '내겐 첫 키스야. 성훈아.' "당분간 형 오피스텔을 사용해. 우리형 군대가고 1년동안 비워 놨던건데, 나 대학들어가면 그곳에서 생활하려고 했거든." 허전한 눈동자는 탁자위에 놓여진 열쇠를 보고 있었다. "........." "나 짐정리해서 내일 중으로 오피스텔 들어갈거야. 먼저 들어가서 있어." 성훈이가 지원이를 잊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경험을 했다는 성훈이. 지용인 성훈이가 꺼냈던 지원와의 생활얘기를 듣고 오히려 다행이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단순한 친구로써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성훈이와의 오피스텔에서 하루하루는 지용이에게 가장 큰 행복이였다. "지용아, 나도 대학가고 싶어." "대학?" "응." 성훈인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고, 자신이 꿈꿔왔던 고등학교 시절의 성훈이를 볼 수 있었다. 성훈이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들어 올 때면 성훈이가 먼저 들어와 오피스텔의 불을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영화도 함께 보고 한사람이 아프면 같이 아파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이던 성훈이. 문득 지원이의 대한 그림자가 비춰지기는 하지만 성훈인 예전의 웃는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성훈아 나 오늘 못들어가." [어디서 자는건데?] "집." [어, 그래. 그럼 내일이나 지용이 보겠네. 일찍 들어와. 알았지?] 성훈이의 미성에 빙그레 웃고는 문단속 잘하라고 하며 전화를 끓었다. '짜식, 지 생일날인지도 모르나봐.' 양손에 가득히 든 쇼핑백과 케익이 지용이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준다. "얼래? 아직도 안 들어왔나?" 문을 따고 들어온 오피스텔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없어. 이 녀석 아직도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거지? 케익을 조심스레 준비하고 성훈이에게 줄 선물도 멋지게 준비했다. 샴페인도 준비했고, 생전처음으로 만들어보던 음식들도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비했다. 그럴듯하게 차려진 다과상을 보며 지용인 성훈이를 감동시킬 생각이였다. '무슨 노래를 들려주지? 에잇, 노래연습이나 해야겠다.' 노래연습을 하고도 시간은 2시간이 흘렸고, 현관에 수시로 들락이면서 성훈이를 기다렸다. '이 녀석 내가 안 들어온다고 해서 삐졌나?' 성훈이를 기다리며 뜬눈으로 지새웠던 새벽녁. 생일날 들어오지 않는 성훈이를 기다리며 지용인 식탁위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 지용이의 어깨에 양모 잠버가 걸쳐질 때 지용인 그제서야 눈을 떴다. "어떻게.. 아 맞다. 성훈아, 여기 앉아봐!!" 자고 일어나 얼굴에 자욱이 생긴지도 모른 채 성훈이의 팔을 끌어 의자에 앉혔다. "짜식. 니 생일 지났잖아. 그래도 늦게나마.." "형이.. 찾아왔었어." "어?" "지용아, 난..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 아무 말 없이 성훈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지용이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떠나버릴 것만 같아.' "형이.. 나랑 같이 살제. 나 지금 형 집에서 오는 길이야. 지용아.. 나." 매몰차게 지원이를 거절하던 성훈이가 흔들리고 말았다. "잊었다며? 잊었다고 했잖아!" '난 불안해. 성훈아, 난 불안해. 네가 내 곁을 떠나 버릴까봐.' 평화롭던 지용이와 성훈이의 오피스텔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성훈이 없어. 돌아가!!" 매일 찾아와 성훈이를 불러내려던 지원이. 안면에서 보이는 강렬함 뒤로 그만의 자신감이 지용이에게 무언으로 못박고 있었다. 이를테면 '성훈인 내 그늘에서 벗어 날수 없다는. 너의 곁엔 머물지 않을거라는.' 입꼬리를 올리고 웃는 지원을 보면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강성훈하고 말하려 왔지, 너랑 말하려 온 거 아니야." 저 자신에 차있는 음성과 비앙냥거리는 말투. 지용인 구역질이 났다. 아니 쏟아내지 않아도 구역질하고 난 후 어지러움을 느끼듯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성훈인 집에 없으니깐 돌아갓!!!" 지용이의 언성이 높아지면 굳은 표정으로 나오는 성훈이를 볼 수 있었다. "지용아, 내가 알아서 할게." 성훈이가 지원이와 몇 마디를 나눈 사이. 지용이의 불길함은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지용아, 그 동안.. 고마웠어." 그는 웃고 있었다.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지용이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성훈인 지용이를 오피스텔에 두고 지원이에게 돌아섰다. 28)****** 사랑에 빠졌어. (past) "어떻게 알고 왔어?" 지원이와 생활하는 집은 하와이에 있는 저택보다는 못해도 도심지 중간에 있는 아파트 단지였다. 따스한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이었고 순간순간 보여주는 지원이의 어색한 웃음도 좋았다. 성훈인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냥.. 알게 됐어." 힘없이 말하는 지용이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됐든, 지용이 네가 찾아와 줘서 고마워. 성훈인 정말 기뻐!!" 환하게 웃는 미소를 보고 있지만 지용이의 가슴이 한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지원이라는 사람.. 너에게 잘해 주니?" 성훈이는 지용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형은 무뚝뚝하거든. 말수도 없고.." "........." "예전에 비하면 잘해주는 편이야." 주방에 가서 유리컵에 쥬스를 따르는 성훈이의 얼굴색이 무척 밝게만 보인다. "어떻게 잘해줘?" 지용이 옆에 앉아 오렌지 빛으로 가득해진 유리컵을 내려놓는 성훈이가 또 한번 밝게 웃었다. "하와이에서 지낼 때보다는 많이 달라. 어젠, 하지 않던 농담까지 했는걸." 자랑하듯 말하는 성훈이의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자신과 함께 생활했던 겨울동안 하얗게 터 있었는데. "행복... 하니?" 지용이 말에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성훈이가 지용이를 보며 작게 웃었다. "참 지용아, 너 대학생활 잘 하고 있어? 대학 들어가면 미팅도 많이 하고 재밌게 놀겠다고 했잖아." 겨울동안 함께 지냈던 시간을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았다. '성훈아, 내 입맞춤은 잊어버린 거니? 내겐 첫 키스였는데.' "........." "재미없어?" "........." 성훈이가 행복하다고 하는데 지용이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다. "응? 지용아, 재미.." 지용이의 창백해진 볼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성훈이 시선을 매수하고 있다. "지용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 또 한 방울이 떨어지자, 성훈인 지용이의 등을 쓸어 주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길래?" "........." 근심스럽게 물어보지만 지용인 입술을 깨물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맛이 없니?" "........." 낮에 지용이가 눈물을 보여서 그런지 성훈인 지용이 눈치를 살핀다. 맛깔스럽게 차려놓은 음식을 건들이지도 않고 쌀알만 한톨한톨 세는 것 같다. "그래두 나 요리 많이 늘은건데." "........." "지용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였더라? 지용아, 이참에 말해라. 다음에 오면 꼭 해줄게." "........." 쓸쓸한 눈동자는 여전히 밥 한톨한톨을 세고 있다. "지용아, 그러지말구.. 말해." 성훈인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집에 무슨 일 있니?" "........." 성훈이가 두 세번 더 물어 봤지만 지용인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휴--- 지용이 네가 힘 빠져 있으니깐 나까지 힘빠지잖오." 입을 삐죽거리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지용이 앞에 놓여진 유리컵위로 물을 따랐다. "사랑에 빠졌어." 성훈이의 행복 앞에서 아무말없던 지용이가 입을 열었다. "응?" "아주 깊숙이..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사랑에 빠졌어." "지용이 너 애인 생겼구나. 너 연애 하는거야? 언제부터? 응? 언제부터?" "........." "어떤 여자야? 예뻐? 응? 많이 예쁘니? 많이 이쁠거야. 그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용일 쳐다보는 성훈이의 두 눈망울 가득히 미소가 자리 잡고 있다. "많이 사랑해." 눈가에 어린 지용이의 눈물을 보자 성훈이의 미소는 조금씩 사라져 버린다. "진행이 잘 안 되는 거야? 어떤 여잔데?" "........." "지용아, 어떤 사람이길래." "........." "지용아, 왜 우는 거야? 응?" "........." "지용아.." "널, 사랑해." 가끔 찾아오는 지용이가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지용이와 단둘이 생활했던 겨울을 되 집어 보면서 성훈이 역시 많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현관을 들어선 지용이가 성훈이를 향해 작게 웃고 있다. 겨울나무처럼 텅 빈것같은 지용이의 행동이 성훈이를 더 괴롭히고 있다. "술 좀 마셨어." "피곤해 보이는데 여긴 왜 들린거니?" "........" "일어나. 내가 집에까지 데려다 줄게." "........" "조금 있으면 지원형 올 시간이야." "그래서?" "너무 늦었잖아." "안아보고 싶어." 지용이의 시선이 성훈이를 잡고 있지만 성훈인 무시해버린다. "일어나,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게." "키스도 하고 싶구." "........." "너랑 자고 싶어." "지용아!!"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싫은지 성훈인 주방으로 발을 옮겼다. 냉동고에서 얼음을 잔뜩 꺼내고 그 위로 물을 부었다. 입안이 얼얼한 정도로 들이키고는 다시 지용이가 있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기대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용일 측은하게 내려다본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 "지용아, 이러지마. 우린 친구잖아!" "........" "지용이 넌 내게 정말 소중한 친구야. 힘들 땐 곁에서 위로해 줄 수 있는 친구!" "........" "지용아, 그러니깐 제발 내가 알던 너로 돌아가. 응?" "돌아가?" 가슴속을 태워버릴 정도로 뜨거운 기운이 지용이의 몸을 장악하는 것 같다. "........" "어떻게 돌아가? 어느 시점으로?" "너 이러지 않았던 때로." "훗... 하하핫." 스키장에서 한없이 설레였던 지용이의 첫키스 따위는 성훈이에게 추억이 되지 않았나 보다. "........" "이러지 않았을 때? 훗, 내가 언제부터 이랬는지 정말 몰라? 정말 모르고 말하는거야? 어?" "지용아.." "내가 언제부터 이랬는지 말해줄까?" "지용아, 그만.." 듣기 싫은지 귀를 막으려는 성훈이의 손을 강하게 쥐어 버렸다. "그 새끼 보단 먼저였어!! 네가 그자식 품에 안겨 있기 전부터!! 그 자식보다는 훨씬 먼저!!" "지용아, 제발." 지용이의 공허한 눈동자가 성훈이의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흥분어린 음성으로 말하고 있다. "내가 널 알고 난 뒤부터.. 난 그랬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자 자신의 손을 잡던 힘이 약해졌다. 성훈인 손을 뻗어 지용이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댄다. "지용아.. 난 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어. 이런 일로 널 잃고 싶지가 않아." "널 갖고 싶어. 강성훈." "........" "널 돈으로 살수 있다면 우리집 전 재산을 다 들여서라도 널 갖고 싶어." "지.. 지용아." 지용이의 충격적인 발언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성훈이 입술에 지용이의 입술이 닿았다. 끼익-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지만 지용이의 키스 때문에 정신을 놓았는지 성훈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강성훈, 뭐 하는 거야?" 현관 앞에서 굳어진 채 두 사람을 차갑게 노려보는 지원이가 보이자 성훈인 재빨리 지용이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29)****** 11년과 2년 (past) "형, 오해는 하지마. 난." "........." TV 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보고는 성훈이가 입을 열 때마다 볼륨을 한칸씩 올렸다. "형, 지용인 그냥 친구야. 오해하지마." "........." "지용이 오피스텔에 있을 때 아무일도 없었어. 지용이하곤 죽마고우 같은.."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형 나 좀 바봐. 응?" "........." 지원인 성훈이의 말을 무시한 채 볼륨 한 칸을 또 높이고 있다. 성훈이는 그런 지원이를 지켜만 보다 그가 들고 있는 리모콘을 뺐어 들었다. "나 좀 보구, 내 얘기 좀 들어봐!!" "........." 약간 언성을 높이는 성훈이의 눈동자가 부탁하고 있다. 자신의 얼굴을 봐 달라고. "내 말을 듣구 판단해야 하는거 아냐? 속 좁게 왜 그래?" "........." 지원이의 건조한 눈빛이 성훈이에게 향해 있다. "지용인 친구야. 그 녀석하고 어릴적부터 친했는데. 지용이가 날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뿐.." '특별?'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았었어. 서로 형제처럼 지냈고.." "형제처럼 지냈다면서 키스를 해?" 붉어진 성훈이의 얼굴. 불안하게 씹이는 입술. "그건, 어쩔 수 없었.." "넌 그 녀석 뿌리치지도 않았어!!" "형?" 지원이의 발언에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형, 혹시.. 질투.. 하는거야?' "너도 즐겼잖아, 안 그래? 강성훈." "형!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거야?" "......." "혹시.. 형하고 같을 거라고 생각해?" "......." "그래? 정말 그런 생각을 하는거야?" "쳇!!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과민반응을 보이는군!!" "과민반응은 형이 보이는 거 아니야?!!" 지지 않을세라 지원이를 노려보는 성훈이가 자신있는 음성으로 지원에게 소리질렀다. "뭐?" 심술스럽게 변하는 지원이의 인중이 성훈이 눈 속으로 들어온다. 이틀째 냉전중. 지원인 하와이에서 생활 할 때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소파에 기대듯 웅크리고 앉아, 지원이가 그젯밤에 흘린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 [넌 그 녀석 뿌리치지도 않았어!!] 속은 상했지만 은근히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바보... 형은 참 바보야.' 입가에 스미는 미소와 봄바람이 좋았다. 앉은자리에서 힘없이 일어서서는 발코니 앞으로 다가간다. '따뜻해. 정말 봄이 왔나봐..' 성훈인 발코니 앞으로 좀 더 다가가 난관에 몸을 기대고 섰다. 하늘이 파랗게 물들어져 있고, 곳곳에 피어있는 개나리가 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개나리가 핀 곳을 지나치는 쌍쌍의 연인들이 보인다. 손을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 성훈인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형, 난 형 뿐이야. 형은 지용이하고는 달라. 형과 지용이를 비교한다는 건 말도 안돼. 지용인 좋아하지만.. 형은 사랑하는걸.' 봄비가 유리차창을 부수어 버릴 정도로 세차게 내리고 있다. 창문을 멍하게 쳐다보는 지용이의 멍한 눈동자는 성훈이의 실루엣을 그리고 있었다. '아파.. 성훈아, 여기가 아파.' 가슴에 손을 얹고는 맥주캔을 들어 입에 대었다. 언제부터 울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몸에 잘 맞지 않던 술은 지용이의 아픈 가슴을 알아주는 건지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는다. 속이 거북하다거나, 구토, 깨질 듯 했던 머리. 몇잔 마시지 못했던 술인데, 어느새 지용이의 주위를 뺑둘러 널러진 맥주캔들이 수를 샐 수가 없다. '넌 친구일 뿐이야' 라는 성훈이의 매몰찬 말이 지용이의 가슴을 아프게만 했다. 그것보다 지원이가 등장하자 자신의 몸을 밀쳐내던 성훈이의 행동이 더 아프게 한다. 지용인 성훈이의 늪속에 발목을 잡혀 허우적대고 있다. 언제부터 헛디딘 것인지 이제껏 성훈이의 행로를 이렇게 위태롭게 붙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픔이 가슴을 할퀴고 있다. 지용이 속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그에게 자문해 본다. '너 잊을 수 있어? 성훈이 지울 수 있어?' 하지만 자신 없는 대답만이 들려온다. '아니.. 그럴수가 없어.' 맥주캔을 들어 입에 가져대고는 위가 경련이 일으키도록 마셔본다. 어지럽다. '너의 17번째 생일날. 넌 날 붙잡고 얘기를 했다. 세상엔 눈물나는 일이 너무나 많다고. 정말이지, 센티멘탈해서도 아니고 약해서도 아니라고. 그리곤 넌 내 품안에 들어와 내 옷이 다 젖도록 울어 버렸다. 나 밖에 없다며.. 너의 곁에 남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하면서.' 난 그때부터 너도 나와 같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넌 지금 딴 놈 품에서 웃고 있어. 그럼 난 뭐였지? 네 말대로 친구? 너 혼자서 내린 결론. 친구?' 버티기 힘들 정도로 몸이 무겁다. 아련히 들려오는 성훈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웃음 안에서 성훈이를 바라보는 강렬한 눈동자를 떠올려본다. "너보다 내가 먼저였어. 나보다 네가 성훈일 많이 알아? 성훈이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아냐구? 그녀석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고 있냔 말이얏!!" 무거워진 몸이 찬 바닥으로 떨어진다. 낙화처럼.. "내가 먼저였어. 11년 동안을 사랑했다구!!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포기할 수 있겠어? 내가 살아온 세월의 반을 너에게 줬는데. 내가 어떻게 포기하니? 어떻게 잊으라구!! 어떻게.. 흐흐흐.." 봄을 알리는 봄비는 지용이의 흐느낌에 빗줄기가 굵어졌다. 세차게 내리는 빗물처럼 지용이의 눈에서도 물이 흐른다. 빗물이 창을 타고 내리는 것처럼 지용이의 두 볼 가득히 젖이고 흐른다. "누구세요?" 현관 앞에 서서 단추구멍만한 틈새로 엿보았다. 굳어진 표정으로 비에 젖어 있는 지원이가 틈새로 비춰진다. "지원형!!" 우울했던 얼굴이 금새 환하게 변하고 문을 따주는 성훈이의 손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30)****** 결혼하고 싶어. (past) 고집스런 눈동자가 날 쳐다보지 않는다. 그제 저녁 지용이의 행동으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형은 9시가 조금 넘어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씻고는 내가 차려준 늦은 저녁을 먹고 TV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형, 마실 거 갖다 줄까?" "........" 몇 번 말을 걸어보았지만 형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다. 난 형에게 차가운 쥬스 한잔을 가져다주고 형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뉴스를 보다가 영화를 보다가 다시 뉴스를 보다가 영화를 보다가.. 난 형에게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 형이 날 쳐다봐 주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1시간이 지나도 형은 날 쳐다보질 않는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건가? 졸음이 쏟아지는지 하품을 하는 형이 기지개를 펴려다 형의 손가락이 내 볼에 닿았다. 잠시 날 쳐다보는가 싶더니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리기 시작한다. "볼 거 없으면 그만 자자." 작게 속삭이듯 말하고는 형의 어깨에 내 고개를 얹어 놓았다. 정신없이 돌려대던 TV 화면이 음악채널에서 멈추자 조용한 발라드 음악이 집안 곳곳에 울러 퍼졌다. 내가 즐겨 듣는 곡이다. 하지만 형은 저 곡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저 곡을 들으면 형은 갱스터, 아니면 메탈리카 음악으로 바꿔버리니깐. 형은 내가 저 곡을 듣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다. 음악은 흐른다. 형은 채널을 돌리지 않고 있다. 지금 형의 눈동자는 어디로 향해 있을까? 성훈이에게 향해 있을까? 난 고개를 살며시 들어 형의 눈동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형이 날 보고 있어! "춤추자." 형의 손이 날 잡아 끌었다. 끌리듯 일어나는 나. 형의 손이 내 두 손을 끌어 그의 목 위로 올려놓고 형의 두 손이 내 허리로 와 닿는다. 형의 시선은 날 잡고 있다. '떨려. 형하고 같이 춤을 추다니...' 형은 자신이 춤추는 것조차도 내게 보여주려 하질 않았다. 형이 클럽에서 춤을 출 때면 먼발치에서 몰래 훔쳐보기만 했었다. 지금까지의 형은 이런 적이 없었다. 생각하자니 웃음이 나온다. 형이 이런 면이 있었네. 그런데 내 허리를 감았던 형의 손이 내 가슴선을 타고 올라와 내 두 볼을 감싼다. 차가운 형의 손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다. "성훈아." "응?" "키스해봐." "어?" "내 입술에 키스해 보라고." 당황스럽다. 싸늘하게 들리던 형의 음성이 아니다. 부드럽게 속삭이듯 말하는 형의 음성이 낯설지만, 좋다. 지금 난 형의 행동에 기분이 좋다. 화 풀린거지? 그렇지? 형의 주문대로 형의 입술에 입술을 대려 한다. 형의 목에 있는 내손에 힘을 주고 형의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로 이끌었다. '어휴--- 어떻게 해야 하지?' 형의 얼굴 근저리에서만 내 입술이 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걱정이다. 고민하고 있는 나. 그런데 고심하는 날 읽었는지 형이 내 입술에 와 닿았다. 거칠었던 형의 입맞춤은 부드럽고 달콤하다. 정말 키스라는 게 달콤하구나. 난 지금.. 은지원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일어나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침준비를 마친 성훈이가 지원일 조심스럽게 깨웠다. 커텐을 치고 라디오의 볼륨을 높여 지원이 귀에 갖아 댄다. 지원이가 좋아하는 시끄러운 메탈리카의 음악이 흐르자 지원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까맣디 까만 지원이의 눈동자가 커텐새로 들어오는 햇빛에 다시 꼭 감아 버렸다. "잘 잤어?"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지원이에게 묻는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지원인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앉아 담배를 찾기 시작한다. "여기.." 성훈이가 집어준 담배가 입에 물리자, 곧이어 라이터 불이 붙여졌다. "담배 좀 줄여. 갈색피부가 더 까매지겠다." 앙증맞게 속삭이는 성훈이가 턱을 괴로 지원일 쳐다보고 있다. "연기가 예쁘다." "........." 자신을 쳐다보는 눈동자는 담배연기가 매운지 두 눈을 깜박거리고 있다. "담배 냄새 맡기 좋아?" 지원이의 갈라진 음성이 들리자 성훈인 고개를 끄덕인다. "싫어했잖아." "........." 성훈인 또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싫은거야? 좋은거야?" "좋아. 형이 태우는 담배향은.." 하얀 이를 살며시 내 놓으며 방긋 미소짓는 성훈이가 예뻤다. "계집애로 태어나지 그랬어?" "왜? 내 얼굴 이상해?" ".........." 깜박거리는 눈동자가 거울로 다가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지원인 거울 속에 비췬 성훈이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결혼하고 싶어져. 결혼하고 싶어. 너랑.' 하와이 집을 처분하고 남은 돈은 얼마 남지 않았다. 차안으로 몸을 실은 지원이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 도움을 받기보다는 독립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가진 권력의 그늘 아래서. '차라리 일을 하자.' 한국으로 들어온걸 아신다면 정해 놓은 집안과 짝을 맺어줄게 뻔하다. 권력가 집안에 맞춰 대단한 집안의 여자와 숨통을 조여가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빈 껍데기로 살순 없다. 집에 들어가면 자신을 기다리는 온기가 좋았다. 하얗게 웃어주며 자신을 맞아주는 얼굴이 좋았다. 그가 밥도 해주고 자신이 입는 옷을 빨아주고, 자신의 옆에서 쫑알거리는 것도 좋았다. 자신의 삶을 환하게 밝혀주는 그가 좋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지겹게 들려주는 그가 좋았다. 지원인 지갑 속에 숨겨진 반짝임에 손을 대본다. 그리고 볼록하게 튀어나온 곳에 손을 집어넣어 꺼내본다. 성훈이의 엄지손가락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미쳤구나. 은지원.' 자신의 머리속에 떠올려지는 성훈이가 맑게 웃고 있다. '보고 싶어. 지금 이 순간에도..' 반지를 검지 손가락으로 꺼내 자신의 볼 위로 비벼 본다. '날 사랑한다고 했지? 그럼 사랑이 뭔지 알겠구나. 사랑이란 거.. 네가 가르쳐줄래? 난 그게 뭔지 잘 모르거든.' 31)****** 변하지 않을거야. (past) "다신 전화하지마." [끓지마. 성훈아..] "난, 할말없으니깐, 끓어!!" [난.. 할말 있어.] 흔들리는 음성에 매정하게 수화기를 놓을 수가 없다. "........" [성훈아.. 나.] "지용아, 쓸데없는 말은.. 제발 하지마." 친한 친구의 아픔을 나눌 수가 없다. 자신과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지용이가 겪는 아픔이 성훈이의 가슴 한곳을 쓰리게 한다. [나, 유학 결심했어.] "어?" 유학을 결심했다는 음성이 조금씩 기어 들어가더니 애써 입술을 막고 흐느끼는 소리가 수화기로 미미하게 들려온다.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성훈인 지용이의 흐느끼는 소리만 듣고 있다. [다신 연락 안할게. 다시는 널 찾아가지도 않을게.] "........" 가라앉은 음성이 더욱더 가라앉아, 낮게 헛기침을 해대고 있다. [하지만.. 나, 널 지울수가 없어. 이대로 널 담고 살아갈거야.] "........" [혹시 나중에 갈 데가 없으면.. 그땐.] "지용아." [성훈아, 행복해. 행복할 자신있지? 성훈이 너, 꼭 행복해야해.] 연습해 뒀던 말과는 다르게 흘러나온다. 행복하라는. 두 사람이 헤어지라고 고사를 지내고 싶은 심정인데도. 그의 진심이 아닐 지라도 지용인 빌어준다. '성훈아, 행복해.' 라고. "........." [그럼, 끓을게.]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흐르고 멈추지 않고 들러오는 지용이의 흐느낌에 성훈인 입을 열었다. "지용아, 거기 어디야? 오피스텔이야?" '바보. 왜 그렇게 야웠어?' 지용이의 오피스텔로 들어서자, 그의 얼굴를 보면 그가 그 동안 어떻게 생활했는가를 예감할 수 있다. 구석구석 가라앉은 먼지와 쓰레기들. 그리고 한눈엔 샐 수 없을 정도의 맥주캔들. 성훈인 빈 맥주캔을 하나 둘 집어 옆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굴러다니는 비닐봉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집에 들어가지, 왜 안 들어갔어?" 고개를 들어 베란다를 쳐다보던 성훈이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만다. '지용아, 너 정말..' "마른지 한참 됐겠다." 지용이의 오피스텔을 떠나기 전날 널어 두었던 빨래들이 그대로 널어져 있다. 멍하니 서서 성훈이를 쳐다보는 지용이의 얼굴이 노랗다. 태우다 만 담배꽁초로 미어터질것 같은 재떨이와 박살난 거울을 보며 성훈인 한숨을 길게 쉬었다. "너무.. 지저분.. 하지?" 어색하게 웃으며 침대위에 있는 맥주캔들을 숨기려 드는 지용이의 손이 몹시도 떨리고 있다. "너 왜 이래? 도대체.. 흐흐.." 비닐에 주워담던 맥주캔을 바닥에 내동댕이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어버린다. "성훈아." "너, 왜 이러는 거야? 바보처럼.. 네가 이럴만큼 나 대단하지 않아." 울고 있는 성훈이를 지켜만 보다가 지용인 손을 뻗었다. "너.. 내겐 대단한 존재야." 나즈막히 속삭이는 그의 눈에도 무언가가 맺힌다. 가슴으로 안아버리는 성훈이의 훌쩍임이 그의 입가에 슬픈 미소를 가져다준다. '넌 내게 대단한 존재야. 넌, 내 모든 것일 걸.' 울음을 멈추고 지용이의 품에서 빠져 나오는 성훈인 주방으로 향했다. 상상했던 대로 엉망이다. "휴----" 긴 한숨을 내 뱉고는 다시 지용이가 있는 곳으로 얼굴을 비춘다. "돼지우리가 따로 없네. 지용아, 일어나 우리 점심 먹으러 나가자." 큰소리를 치는 성훈이의 음성이 가라앉아 있다. 작게 웃고 있는 그의 입술이 조금은 떨리고 있다. 그런 성훈이를 지켜보는 지용이. "일어나." 훌쩍대는 성훈이가 다시 맥주캔들을 비닐 안으로 집어넣고 있다. "얼굴. 한번만 만져봐도.. 될까?" 말꼬리를 흐리는 음성에 성훈인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아주 비싸. 내 얼굴 만지는 거 얼만 줄 알아?" 볼멘 음성으로 흘리며 뒤돌아서는 성훈이의 머리가 가지런히 찰랑거린다. "얼만데?" "하하핫.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보겠다." "돈,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지용이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성훈인 다시 하던 일을 한다. "치이~~ 지용이 넌 돈만 있음 모든지 사나보네." ".........." "쓰잘데기 없는 소리 고만하고, 점심이나 먹자. 너 거울 좀 봐." "........." 성훈인 거울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는 입술을 지긋히 깨물어 버린다. "그리고 보니 거울이 다 깨졌네. 성질하고는.." "........." 성훈이 특유의 아이같은 음성에 지용인 소리없이 웃는다. "너 얼굴이 어떤지는 알아? 거지가 찾아와서 친구하자고 하겠다." "........." "얼마나 굶었길래, 얼굴이 노랗게 뜬거야?" ".........." "나가자. 너 밥먹이고 집에 들어가 봐야해." ".........." "형이 들어왔을 때 내가 없음 형이 싫어하거든." ".........." 웃고 있던 지용이의 얼굴에 짙은 어둠으로 깔려버린다. "고지용 일어나." 자신을 쳐다보던 지용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성훈인 괴로운 심정으로 지용이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포개고 앉았다. 다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싶은 성훈이. "가야해?" ".........." 대답은 다 들은거나 다름없다. '그럼 가야지.' 라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 지용인 웅크리며 몸을 작게 굽힌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럽고 안스러워서 성훈인 눈동자를 흔들어 버린다. "지용아, 미안해." ".........." 나즈막히 들리는 성훈이의 음성엔 지용이의 걱정이 가득 실려 있다. 눈빛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친구. 지금 그 친구가 몹시 작은 모습으로 성훈이 앞에 앉아 있다. "귀국했을때 널 찾아오는 게 아니였는데.." "..........." "유학 가기전에.. 네 말뜻이 뭔지 알면서도.. 난." "..........." "난, 너무 어렸었어." "..........." "지용아,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너 이러면 나, 정말 많이 아파." 지용이의 고개는 더욱더 숙여져 버린다. "나도 지용이 널 사랑해. 내 소중한 친구로써.. 정말 널 사랑해. 내 하나뿐인 단짝으로써.. 정말 널 사랑해. 그래서 널 잃고 싶지가 않아." 숙여진 고개를 들어올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울고 있을 것 같은 얼굴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성훈아." "응.." "사랑해." "......" "내 마음 변하지 않을거야." "지용..." 성훈이의 어깨위로 얼굴을 묻은 지용이의 흐느낌이 전해져 온다. '지용아, 내가 널 어떻게 해야하니? 넌 내가 아파 할 때마다 내 곁에 있어 줬는데. 그때마다 내 곁에서 날 위로해 줬는데.. 내가 네 친구라면.. 지금 널, 널 위로해야 하는데.. 정말 그래야 하는데.. 나도 너의 곁에서 위로해 주고 싶은데.. 널 위로해 주고 싶은데... 정말 그러고 싶은데.. 지금 난 널 위로할 자격이 없어. 난.' 32)****** 삐뚤어진 방법 (past) 음식을 넘기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성훈이가 자신을 지켜봐 주는 게 좋아서.. 그의 웃는 표정을 좀 더 담고 싶어서 지용인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자신을 쳐다보며 웃던 얼굴은 날이 저물려 하자 뭐가 좋은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 버렸다. 지용이의 슬픈 눈동자는 무시해 버리고선.. “ 나도 지용이 널 사랑해. 내 소중한 친구로써.. 정말 널 사랑해. 내 하나뿐인 단짝으로써.. 정말 널 사랑해. 널 잃고 싶지가 않아. ” 달칵---- 툭---- 달칵---- 툭------- 달칵---- 툭--------- 블라인드를 올리지 않은 방은 동굴처럼 어둡다. 어둠속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지용인 라이터 불만 켰다껐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다가 라이터 푸른 불꽃이 뿌옇게 보이면 손등으로 눈이 아리도록 닦아버린다. 엄지손가락으로 라이타를 켜자 여린 불꽃이 주위를 잠시나마 환하게 해준다. 어두워 보이는 지용이의 얼굴이 불꽃 덕분에 뚜렷하게 드러났다. 허탈한 표정의 그는 매우 슬퍼보인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들. 그 자국은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절망감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니라 성훈이에 대한 감정이 접히는 않는.. 오로지 그에게로만 향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아픔에서 묻어나온 눈물이었다. "사랑해. 너의 단짝이 아닌 특별한 사람으로..." 한줄기를 더해가는 눈물 한 방울이 지용이의 입술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내 사랑을 너에게 인정받고 싶어." 더 이상 라이터 불을 켜기 싫은지 건너편 벽으로 라이터가 '펑'소리가 나도록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침대 앞 서랍에 숨겨둔 것을 빼내 들었다. "난, 사랑해. 강성훈." 지용이가 꺼내든 것은 날카로운 날이 선 칼이였다. 손잡이 부분의 단추를 누르면 빛을 뿜는 칼날이 튀어나오는. "사랑한다고 대답해봐. 응?" 자신의 음성만 메아리 칠뿐 성훈이의 미성은 들리지 않는다. "이 새끼야! 난 널 11년 동안 사랑했다구!!" 칼날을 침대에 내려놓고 오열하기 시작한다. 소리내어 울고 또 울고.. 눈동자가 시리도록 울어 버린다. 그러다가 그의 눈물 속에서 지원이의 얼굴이 떠올려졌다. 자신을 비웃듯 흘겨보는 얼굴이 영상이 되어 침대위로 가득히 펼쳐져 있다. "너만.. 너만 나타나지 않았으면 됐어!!" 칼날이 침대위로 꼽혀지기 시작한다. "네 놈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됐었어!!" 칼날로 메트리스가 형편없이 찢겨지기 시작한다. 자꾸 찔려대지만 그의 영상은 더욱 더 선명하게 비춰져 지용이의 행동을 비웃고 있다. "개자식!!" 온힘을 다해 내리 꽂았다. 내리 꽂은 동시에 부서지는 지원이의 얼굴. 그의 영상.. 그의 얼굴 대신에 환하게 미소짓는 성훈이가 떠올려 진다. 광기를 내 품던 눈동자가 슬프게 변해 흐느끼기 시작한다. "사랑해. 흐흐.. 정말 널 사랑한단 말야!!" 온힘을 다해 메트리스에 쏟아버린 지용이에게 힘이 남질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지만 잠은 오질 않는다. [나도 지용이 널 사랑해. 정말 사랑해.] "그래. 너도 날 사랑한다고 했지?" 힘없이 미소짓는 지용이의 안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한다. "되찾을 방법이 있을거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을거야." 바닥으로 떨어뜨린 칼날이 지용이를 유혹하는 듯 반짝거리고 있다. "너도 날 사랑한다며? 그럼, 내 곁에 머물러. 내 곁으로 와." 몹시 어지러진 방바닥에서 수화기를 찾아 집어들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눌렸던 것마냥 지원이와 성훈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다. '내 곁으로 와.' [여보세요?] 맑은 미성이 들려오자, 지용인 칼날에 엄지손가락을 데어 본다. 곧게 선 칼날은 지용이의 엄지손가락에 피를 토해내게 만들었다. "나야.. 지용이." [어, 그래. 어젠 잘 들어 간 거야? 저녁은 먹은거야?? 혹시 또 굶고 있는 거 아니지? 휴우-- 오늘은 형이 안 들어온다고 하는데, 지금 오피스텔 가서 청소나 할까?] "와. 성훈아, 지금 와." [응?] 지용인 엄지손가락을 베고 붉은 피가 뭍은 칼선을 자신의 동맥 위로 놓았다. "성훈아, 지금 올래?" [왜? 나 청소 시켜 먹을려고?] "........" [정말 나 시켜 먹을려고 하나보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을 대하는 성훈이가 장난스런 어투로 말하고 있다. 나긋나긋하게 들려오는 성훈이의 음성에 작게 웃는 지용이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 위에서 무언가가 분출하듯 쏟아지고 있다. [고죵, 왜 아무 말도 없어? 야?] "........." [야!! 고지용!!"] "성훈아." [그래, 임마!] "나..." [뭔데 그렇게 뜸을 드려??] "나.. 동맥 끓었다." 정신이 몽롱해 진다. 수화기를 놓쳐버리고는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수화기 속에서 들리는 성훈이의 음성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내 곁에 와 줄거지? 그래 줄꺼지? 그럴꺼지? 후나..' 『 어린 마음에.. 키워왔던 감정이 지금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버렸다. 내가 키워왔던 그 많은 시간들을 사랑이라고 이름하고 싶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친구가 아니 듯 서로의 눈동자에 피멍을 들지 않게 하자. 성훈아, 지금 내 곁에 있다면... 내 등뼈 마디마디가 우두둑 으스러지도록 날 꼭 껴안아 줄래? 나도.. 널 뜨겁게 안아줄게. 네 어깨가 떨리는 일이 없도록 따뜻하게. 아스라히 쓰러지게.. 안아줄게. 』 "지용아, 지용아?" 무감각하다. 흐릿하게 보이는 성훈이의 얼굴이 울고 있다. 왜 울고 있지? 여긴 어디야? 내가 왜 이곳에 누워 있는거야? 편안하게 잠을 이룬것도 같은데 여긴 어딜까? 낯선 음성들. 낯선 공기.. 낯선 이곳이 싫다. 역한 소독약 냄새도 싫고. "지용아!!"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날 내려다보는데,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지용아, 나 누군지 알겠니? 나 누군지 알아보겠지? 그렇지?" 성훈이가 울고 있다. 난 지금 일어서서 울고 있는 녀석을 꼭 안으며 울지 말라며 토닥거려 줘야 하는데.. 왜 이리도 졸음이 쏟아지는 걸까? "안정제 투여했으니 그만 나가 주세요." 성훈이가 울고 있는데.. 난 졸음이 쏟아진다. "지용이 어때요? 지용이.." 의사를 붙들고 다급하게 묻는 성훈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파르르 떨어대는 입술까지 파랗게 보인다. "동맥을 건들이기는 했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 환자 보호자 분은 없습니까?" "지용이 문제없는 거죠? 그렇죠?" 우는건지 말을 하는건지 구분이 지어지질 않는다. "손목의 자해한 상처보다는 환자의 정신적 치료가 더 시급한 듯 하군요. 안정을 절대적으로 우선입니다. 영양 상태도 좋은 편이 아니고.." 의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성훈이의 울먹임이 멈췄다. "정신과... 치료라니요?" "환자의 정신상태가 몹시 불안정합니다. 신경정신과 치료도 받아야 한다는 소리지요." 의사가 들려주는 소리에 성훈이의 얼이 반쯤 나가 버린다. "김선생님, 205호 환자..." 성훈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의사는 바쁘게 병동 끝으로 걸어가고 있다. '견디기 어려웠니? 나 때문은 아니지? 지용아..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지? 나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러면 안돼. 나 같은 놈 때문에 그러면 안돼.' 두 눈에 맺히는 물기가 성훈이의 두 볼에 가득하게 흘러내린다. 그리고 떨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싼다. '다신..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다신.. 두 번 다신 널 찾아가지 않을거야. 널 위해서 나, 그럴꺼야. 내 친구.. 내 소중한 친구 지용아, 널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흘러내린다. 닦고 또 닦아 보지만.. 자꾸만 흘러내린다. 33)****** 아프게 하는 것 (past) "눈이 토끼처럼 빨갛네?" 지원이가 들어서자마자 성훈이를 보며 말했다. "깜박.. 잠이 들어서." 몹시 갈라진 음성이지만 지원인 신경쓰지 않고 자켓을 벗어 소파 위로 던져 버렸다. 오디오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 평상시에 듣던 음악을 틀어놓고는 욕실로 들어가려 하는데 성훈이가 뒤에서 그를 꼭 안았다. "형, 성훈이 사랑하지? 그렇지?" "........." 작게 속삭이는가 싶더니 숨을 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성훈이 위로해 줄래?" "........." "성훈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너무 아파." 무슨 일이 생긴지 알 수 없었지만 지원인 자신을 꼭 안은 성훈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왜... 아픈 거지? 뭐가 널 아프게 하는거야? 나 말고도 널 아프게 하는 것이 있어?' 물어보고 싶지만 지원이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지원이 앞에 선 건장한 두 사내가 지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도련님, 집으로 가시죠. 장군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비켜.." "도련님 조용히 가시죠." "비키라고 했어!!" 언성이 높아지는 지원의 음성이 날카롭게 울러 퍼진다. "매는 일찍 맞으라 하지 않습니까? 조용히 따라 오시죠." "언제 귀국했냐?" 골프공을 구르는 아버지를 쏘아보는 지원이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씨가를 입에 물고는 뿌연 연기를 뿜는 아버지의 시선이 지원이와 마주치자, 골프채를 들고 소파 위에 앉았다. "정신차리려면 아직도 멀었구나." "........." "얼굴 좀 피거라." "아버지와 할말이 없습니다. 그만 돌아가겠어요." "돈도 떨어졌을텐데, 그만 집으로 들어오거라." 은장군이 씨가를 잿털이에 비벼 끄자 지원인 독기 어린 음성으로 쏟아 붓듯 퍼붓는다. "들어와서 아버지 장난감이나 되라구요?" 똑부러지게 말하는 아들의 음성이나 눈빛이 자신과 동일하다. "네가 일하는 곳엔 말해뒸다. 딴따라라? 풋, 갈수록 태산이라고 하더니.. 나와 등돌릴 셈이냐?" "........." "그만 방황하고 들어오지 그러니? 김비서에게 말해뒀다. 나도 늙었으니 이제 쉴 때가 된 듯한데. 내 자리를 조금씩 익혀가는게.." "그딴 더러운 사업. 수원이에게 시키시죠. 말 안듣는 저보단 고분고분한 수원이가 제격일 것." 이마에 느껴지는 충격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 뜨거운 액체가 충격이 느껴지는 곳에서 지원이의 눈을 거쳐 흘러내린다. "그 아파트 정리하고 들어와 살아라."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이를 악물며 말하는 지원이의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고 있다. "못하겠다면?" "아버지 말씀대로 호적 정리하세요. 죽은 자식 취급하시라구요!!" 당당히 일어서려는 지원이의 어깨에 압력이 가해진다. "손치윗!!" "도련님." "나가게 내버려둬. 돈이 떨어지면 지발로 걸어들어 오겠지." 지원이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은 이미 계산이 끝난 것 같았다. "돈이 떨어 진다해도.. 이 집에 발 들여놓지 않을 겁니다." "그래? 어디한번 해 보자구나. 네가 이기나 이 아비가 이기나." 자신있게 말하는 늙은 눈은 지원이 앞 아마를 가린 흐트러진 머리카락 속을 상상한다. 분노에 일그러진 입술의 명료한 선을 떠올리며 지원이의 고통을 음미하듯 미소를 띄고 있다. 보는 사람까지도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깨진 이마를 만져본다. 응고된 피 알갱이들이 지원이의 손가락 사이로 가루처럼 떨어지고 아버지가 뱉은 말들을 상기시키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강성훈, 널 아프게 하는 게 뭐였니? 난, 난.. 이거다. 내가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끄러운 내 아버지. 내 아버지가 내 가슴을 찢어지게 만든다. 고통스럽게 아주 교묘하게 말이다' 34)****** 가르쳐 줄래? (past) "형, 왜 그래?" 비틀거리며 들어온 지원이가 들어서자마자 양주병 마개를 따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형, 왜이래? 응?" 걱정스런 시선으로 지원이 든 양주병을 빼앗으려 하지만 지원인 성훈일 밀쳐버리고 계속 마셔댄다. "지원형!!" 불안하게 느껴지는 지원이의 행동에 성훈이의 가슴이 내려앉는다. 밀쳐지면 다시 지원이에게 달려들어 술병을 빼앗으려 한다. "형, 왜 그래? 응? 왜 이러는 거야?" "놔 이새꺄! 다 필요 없어! 다!!" "형.. 성훈이가 잘못한 거 있어? 어?" 지원일 막다못해 울먹이는 성훈이가 지원일 꼭 안아 버렸다. 폭풍우처럼 일렁이던 속이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꼭 안고 울고 있는 성훈이의 숨결이 느껴지자, 힘없이 술병을 바닥에 떨구고는 성훈이의 어깨 위에 얼굴을 누였다. "강성훈. 나, 미치기 전에 어떻게 좀 해봐." "형~엉?" "나 좀 어떻게 해보란 말야!!" 성훈이의 귀청이 얼얼할 정도로 크게 외쳐대는 지원이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강성훈. 나, 여기가 아프다."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아. 강성훈. 술의 힘으로 잠든 지원이를 내려다보고 서글픈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떨어지는 눈물이 지원이의 얼굴로 한 방울씩 떨어진다. "사랑해. 지원이형. 형.. 마음이 아프면.. 성훈이 마음도 아파. 형이 괴로우면.. 성훈이도 괴로워.. 성훈인 형이 아파하는 게 싫어." 지원이의 얼굴위로 떨어진 자신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고는 억지스런 미소를 지었다. "울지 않을게. 울진 않을게. 그런데.. 왜 성훈인 눈물이 나올까?" ".........." "형이 이렇게 내 옆에 있는데. 그런데.." 억지스럽던 미소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또 울먹거린다. 따뜻하게 달궈진 성훈이의 액체들이 한 방울씩 지원이 얼굴위로 떨어지자, 감겼던 눈이 뜨여져 성훈이를 바라본다. "안 울려고 했는데.. 자꾸.." 얼마나 마셨는지 지원이 몸 속을 지탱하는 근육들이 지원이의 말을 듣질 않는다. 힘 빠진 손을 애써 들어 올려 울고 있는 성훈이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 눈물이 맺히는 곳에 입술을 대고 물기를 빨아들인다. "병신새끼, 너 울보냐?" "형, 흑..흐흐..."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대는 성훈이의 머리위로 손을 얹었다. "질질짜기는.. 일어나서 너 죽이기 전에 당장 뚝 그쳐." “ 내게 사랑이란 걸 가르쳐 줄래?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내게.. 가르쳐줘. 사랑이란 게 뭔지를..” "형, 우리 영화 보려가자." 오랜만에 지원이 차에 몸을 실은 성훈이가 기분이 좋은 건지 지원이를 보며 눈웃음을 치고 있다. "잡생각 말고 내려." "형~엉. 우리 영화보러 가자. 응?" "나 일하러 가야돼. 영화 보려면 혼자가!" 지원이 말에 앞머리가 날리도록 긴 한숨을 쉬었다. "칫. 혼자서 무슨 재미로 영화를 봐?" "시간 없으니깐 내렷!" "맨 날 화만 내면 다야!" ".........." 지원이 이마에 골이 생기려는 걸 예상하고는 투덜대며 차문고리를 열었다. "무슨 일을 하고 돌아 다니는거야? 맨날 늦게 들어오구, 이러다가 형 얼굴 까먹겠다!" 성훈이의 투덜대는 음성도 듣기 좋았다. 어린냥 부리는 순수한 아이같은 성훈이. "닥치고 집이나 들어가." 건조하게 말을 흘린다. 다정스럽게 말하고 싶지만 지원인 다정스레 말하는 법을 모른다. "오늘 들어오기만 해봐! 몸에 피가 나도록 깨물어 버릴꼬얍!!"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혀지는 차문뒤에서 불평어린 어투가 지원일 피식 웃게 만든다. "훗." "뭐가 웃겨?" "이제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네." 차 머리를 돌려 아파트 단지를 빠져 나오는 지원이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웃음이 나와. 네가 하는 행동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클럽 안은 몹시 시끄러운 굉음으로 가득했다. 지원이가 들어서자 자신을 막는 힘에 띠꺼운 시선으로 노려본다. "뭡니까?" 자신을 막는 사내는 지원이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무대위에 대자로 뻗어 발버둥 거리는 클럽 집배인의 일그러진 입술이 대답하고 있었다. "높으신 분의 자제인지.. 모르고 고용했습니다." 지원이가 갈곳이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벌써 4번째.. '아버지.. 전 돌아가지 않아요. 아버지께서 절 막는다 해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결코!!' 이를 악문 지원이의 주먹이 자신을 막고 있는 사내의 뱃가죽을 강타한다. 아버지의 힘에 좁혀드는 자신의 일터가 남지 않았다. '녀석과 생활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차안에 앉아 먼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불씨에 자신을 의지한다. 방법은 있다. 아버지의 영향이 뻗어지지 않는 곳. 아버지가 대립하는 곳으로 가면 이런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지원인 담배불씨를 끄고 은밀하게 감춰진 지하세상을 향해가고 있다. 강자만 살아남는 세계로.. "이건 무슨 상처야?" 감기에 걸렸는지 목소리가 낭낭하게 들린다. ".........." "형, 요즘도 춤추고 다치는거야? 응? 콜록콜록." ".........." "집에 들어오면 말 좀 해라. 콜록.. 콜록." 숨이 끓길 것 같은 기침소리가 지원이의 귀를 따갑게 한다. "그렇게 떠들 기력으로 병원이나 가!" 지원이가 성훈이에게 던져주는 돈 뭉치에 성훈인 놀란 눈을 떴다. "형, 그저께도 갔다 줬잖아." ".........." "무슨 일하길래. 돈이 이렇게 많아? 하와이 살 때도.." "잔소리 하지말고, 불이나 꺼. 잠자게." 지원이의 차가운 음성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서는 성훈이가 자꾸만 지원이를 돌아보았다. "치이~~ 우리 사이엔 대화가 너무 부족해. 맨 날 들어오면 잠이나 자자고 칭얼대니 내 춈. 음흉해. 지원형!!" "불 안 끌래?" "흥!!" 입술을 쭉 내밀다가 스텐드에 불을 켜놓고는 형광등을 꺼버린다. 불을 꺼놓고 지원이가 앉아 있는 침대를 한참동안 쳐다만 보는 성훈이. "이리와. 뭐해?" "오늘은 따로 자자. 형 감기 옮으면 안돼잖오." "........." "난 바닥에서 잘게." 지원이가 앉아 있는 침대 위에서 베개하나를 집어드는 성훈이를 지원이가 잡아끌어 자신의 무릎위로 앉혔다. "감기 걸린 거 유세떨어?" "........." 지원이의 행동에 몹시 당황한 성훈인 어리벙벙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 "군소리하지 말고 내 옆에서 자." "형." "입 닥치고 얌전히 잠이나 자란 말야!" 지원인 성훈이 들고 있는 베개를 빼앗아 침대위로 던져 버린다. "형 감기 옮는단 말야." "건들이지 않을 테니깐 걱정마." 지원인 성훈이를 무릎에서 밀쳐버리고는 침대위로 길게 누웠다. 바닥에 널 부러진 성훈이가 지원이를 보며 조금은 의아해 하다가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다. "내가 형을 덥칠 것 같아서 그러지잉~~" 35)****** 그대가 잠든 사이에 (past) "뭐야? 왠 마스크야?"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성훈이가 쓴 마스크에 눈이 간다. 눈이 반달모양이 되는걸 보니 방그레 웃고 있는 것 같다. "감기 옮으면 안되잖아." 며칠째 나을 생각을 않는 감기 때문에 성훈이의 볼살이 헬슥하게 빠져버렸다. "보기 싫다." "보기 싫어두 참아. 어여 나아야, 형하고 뽀뽀하고 글지." 마스크 때문에 맑디맑은 미성이 둔탁하게 들린다. "보기 싫어, 벗어!" "형에게 감기 옮기고 싶지 않오. 얼마나 독한 바이러스지 가사노동에 지대한 영향을 준단 말이얍. 온몸이 많이 쑤시고 아포." "벗으라면 벗어!!" 강압적이게 말하지만 성훈인 벗지 않겠다는 듯 도리질을 한다. 도리도리도리. "내가 확 벗겨 버린다!!" 지원이가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그제서야 마스크를 반쯤 내렸다. "칫~ 난 형이 아픈 게 싫어서 이러는 건데." "물이나 받아." 침실로 들어가는 지원이가 절뚝이고 있다. 현관을 들어 섰을때는 몰랐던 성훈이가 지원이 옆으로 다가가 걱정스럽게 지원이를 쳐다본다. "형, 왜 그래? 다리 다친거야?" "신경쓸 것 없어. 물이나 받아." "모야? 오늘 싸운거야? 형 얼굴은 또 왜 그래?" "신경 쓸거 없대두.." "신경 안 쓰게 생겼어? 자세히 보니깐 형, 눈은 왜 그래? 멍든 거잖아?" "물이나 받으라니깐!!" "형!!" 지원이가 돌아서려 하자 성훈인 그의 정장마이를 잡아 당겼다. 정장 마이사이로 보여지는 붉은 피가 셔츠 온 곳에 묻어 있었다. 성훈이의 손이 몹시 떨리는가 싶더니 힘이 주어 돌아선 지원이를 자신의 시선과 마주하게 한다. "뭐야? 형..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가서 물이나.." "요즘 모하고 다니는 거야? 어제는 손을 다쳐 가지고 들어오더니 오늘은.." "아무것도 아니라니깐!" 성훈이의 손에 잡혀진 정장마이를 뺏앗고는 방문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성훈인 다짜고짜 지원이의 셔츠단추를 풀어헤쳤다. 갈색피부 위에는 몽둥이로 맞은 듯한 자욱들이 가득하다. "왜.. 왜 이래? 혀...엉?" 버벅거리는 음성의 성훈이가 많이 놀라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덜컥 겁을 먹은 눈동자가 몹시도 흔들거리더니 지원이의 가슴속으로 놓여졌다. "알거 없어. 가서 물이나 받아라." "뭐야? 형? 요즘 모하고 다니는거야? 뭐하고 다니길래." 유난히도 물기 많은 눈동자가 울려고 준비를 하는 듯 반짝거렸다. "또 질질 짤려고 하냐?" 파랗게 불꽃을 튀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볼 줄만 알았던 지원이가 보기 힘든 미소를 흘린다. 질질 짠다고 짜증을 낼 줄 알았는데. "형~엉, 뭐야? 누가 이랬어?" 하얀 볼 위로 떨어뜨리려는 눈물을 지원이의 손가락으로 닦아버린다. "정말 못말리는 울보네. 사내새끼가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 "어딜가려구?" 현관문을 막고 서있는 성훈이가 나갈 수 없다는 듯 지원이를 올려다본다. "비켜." "싫어." "시간 없으니깐 비켜." "싫어!!" "맞고 비킬래? 그냥 비킬래?" 때린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느새 자신의 반쪽이 되 버린 성훈이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 채 지원인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손지검 같은 건 할 수 없다고 단정지어 버렸다. "또 맞고 들어 올 거잖아!!" 거의 겁에 질린 음성으로 고개를 떨구는 성훈이가 비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 비춘다. "너 자꾸 화나게 만들래?" 성훈인 지원에 말에 고개를 들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싫어." "강성훈!!" "싫어! 싫단 말야!!" 이를 악물며 지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더 푹 숙여 버린다. 그런 성훈이의 얼굴을 지원인 손가락 두 개를 사용해 들어올린다. 그의 얼굴에 닿아 있는 손가락 두 개를 통해 성훈이의 체온이 지원이에게로 전해져 왔다. 그 느낌은 몹시 따뜻했다. 지원인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의 긴 속눈썹을 들여다본다. 만지고 싶은 만큼 아름다운 눈썹이다. 지원인 그의 아래턱에 닿아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옮긴다. 그리고 가만히 속눈썹 끝에 손가락 하나를 대 보았다. 잠자리 날개가 떠는 듯 파르르한 움직임이 전해온다. 이슬에 젖어 있는 눈동자가 자신을 걱정하는 듯 보고 있다. "비켜." 지원인 톤 없는 음성으로 잠깐 동안의 침묵을 무자비하게 부셔버린다. 그래도 싫은 듯 지원이의 품속으로 깊숙이 쳐 박히는 성훈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 댄다. "싫어, 형 오늘 못나가. 아니 영원히 못나가." "너 정말, 나 화내는 거 보고 싶어?" "화낼려면 화내. 나갈려면 나 죽이고 나가!" 짜증스럽게 뱉어내고 있지만 지금 성훈이의 행동이 사랑스럽다. 자신을 몹시 걱정하는 성훈이가 자신의 편이라는 게 좋았다. 지원인 이 순간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에 젖어 든다.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 돈을 벌고 일하면서도 누군가를 떠올리며 가끔씩 싱긋 웃어 보이고.. 지원인 지금 이 순간 성훈이와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강렬해진다. "일찍 들어올 테니깐. 비켜라." 강목으로 얻어맞은 곳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한눈판 사이에 내 어깨로 내려쳐진 강목이 절반으로 부러지고 내 어깨엔 통증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세계로 빠지려고 한 건 아니다. 아침에 보았던 성훈이의 동그란 눈망울을 떠올리다가 난 지금 이 꼴이 되었다. 그래도 한 두 달간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녀석을 데리고 하와이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다. 차라리 이곳보다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편이 나은 것 같았다. 전에 생활하던 곳보다는 허름하겠지만 녀석은 분명히 좋아할 것이다. 시동을 걸던 난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뼈가 빗나갔나? 통증보다는 손에 힘이 없는걸. 운전하기엔 좋지 못한 상태같다. 지금 난 무척 지쳐 있으니깐.. 이 상황에서도 난 눈물을 머금고 있는 녀석을 떠올리고 있다. 병신. 사내새끼가 항상 질질 짜기만 하는구나. 싱긋 웃어버리고는 다친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몇번 매만지던 왼손을 내려 시동을 걸고 녀석이 자주 듣던 발라드 TAPE를 집어넣었다. 볼륨을 높이고 차안 가득히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듣지 않던 발라드를 듣고있는 내가 한심해서 난 싱긋 웃어버린다. 노래가사가 왜 이래? 너처럼 노래가사가 청승맞구나. 그러니깐 눈물이나 질질 짜지. ♪ 늘 터질 듯한 마음을 뒤로.. 오직 그대만을 사랑한단 말밖에.. 눈을 감아도 찾을 수 있어. 세상이 끝났어. 깊은 어둠에 묻힌대도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내 뺨에 흐르는 그대 눈물을 그 사랑을. ♪ 끼이이이익----- 내 차위로 누군가가 끼어 들었다. 내 차 위로 붕 떠서는 아스팔트 위로 나동그레지는 이름모를 육체.. ♪ Good Night Kiss로 잘 자라 말하고.. 혼자 돌아오는 밤이면.. 또 내일 다시 사라져 버릴 꿈일 것만 같아 뒤돌아 그댈 봐요. 눈을 감아도 찾을 수 있어. 세상이 끝났어. 깊은 어둠에 묻힌대도..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내 뺨에 흐르는 그대 눈물을 그 사랑을.. 날 가득히 담은 그대 눈빛에 마냥 난 행복하죠. ♪ 지금 난 성훈이 녀석처럼 맑은 미성을 가진 이 가수의 이름을 알고 싶다. 머리를 핸들에 부딪혔더니 통증이 느껴진다. 흐르는 노래는 이미 끝나버렸고.. 처음 듣는 생소한 노래가 흘려 나온다. 제기랄, 오늘 일찍 들어간다고 약속했는데. 36)****** 지원이의 눈물 (past) "유학 꼭 가야 하는거냐?" 늘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던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런 아들이 자해를 하고 신경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있었다. 성훈이가 연락해 줘서 불이 나게 달려가 보았던 병실에 지용인 얼이 나간 채 누군가를 애절하게 찾고 있었다. "지용아, 꼭 유학 가야하는 거니?" 경영학을 전공하기 바라셨던 부모의 기대를 져버리고는 유학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죄송해요. 어머니." "지용아, 좀 더 생각해 보렴. 이유가 뭐니?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기 싫어요. 이곳에.." "지용아..." "그 새끼들이 있거든요. 그 새끼들이 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그들이 없는 곳으로.." "그들? 지용아, 그 사람들이 누군데? 누구길래??" 어머니의 다그치는 음성을 듣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돌려버린다. "지용아, 누굴 말하는 거니?" "나가 주세요." "지용아.." "젠장, 절 내버려두란 말이예요!!" 교과서 같았던 아들은 소리 지르는 법이 없었다. 거칠게 들리는 입에 담기도 싫은 욕설 역시.. 신사처럼 예의 바르고 총명해서 어깨를 겨누는 집안마다 지용이 칭찬을 하기 일수였다. 그런 아들의 변화가 부모의 심정을 절망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다. 지원이를 찾던 성훈이가 그에게 다가서려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사내 때문에 먼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 "피해자가 혼수 상태입니다." "........" "그래도 도련님이 어느 분의 자제인걸 아는지 검찰 쪽에서 동의하에 합의금 제시를 했다고 합니다." "........"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지원이의 이마에 하얀 붕대로 감겨 있었다. 어깨로 둘러진 붕대가 부들대는 걸로 보아 지원인 화를 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도련님, 장군님의 입김이 아니였다면.." "그래서?" "집으로 들어오신다면 합의금을 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됐어!!" "요즘 부동산 시세가 동결된 건 알고 계시겠죠? 장군님께서 특별히 도련님의 아파트에도 손을 써 놓으셨습니다." "........" "도련님, 눈 딱 감고 장군님께 저 드리세요. 도련님도 앞을 보셔야.." "됐어!! 아버지 돈이라면 됐다구!!! 그 피맺힌 돈으로 이곳을 나가고 싶지 않아!!" "언성 낮추세요." 금빛 안경테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사내는 고집스럽게 지원이를 올려다보고 있다. "돌아갓!! 돌아가란 말이야!! 얼마가 나왔던 상관 안해!!" "도련님, 이번엔 장군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는 걸 사모님께서 부탁하셨단 말입니다." "필요없어! 꺼져!! 꺼지라구!!" 차갑게 쏘아대는 눈이 풀리질 않는다.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성훈이 앞을 스쳐지나갔다. 사내가 경찰서 밖으로 빠져나가자 성훈인 지원이를 쳐다본다. 순간이였지만 강렬하던 눈이 흔들거리는가 싶더니 두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자신의 약한 모습 따위는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처럼.. 그런데, 눈꼬리 부분에서 반짝이는 액체가 구렛나루를 타고 흘러 내렸다. 하지만 그 액체를 부정하려는 건지 왼쪽 손으로 재빠르게 닦아 버린다. '형이.. 형이 울었어.' "합의금이 얼마정도 되나요?" 합의금 서명서를 들여다보고 성훈이는 두 눈이 바싹 긴장되고 있다. 앞에 있는 1자를 제외하고도 뒤에 따르는 동그라미가 9개. '이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쩌지?' "액수가 많죠? 아까 전 다녀간 분이 액수를 2천 더 올렸거든요.." "네?" 당황한 얼굴색의 성훈이에게 조소를 머금는 경찰관이 재밌어 죽겠다는 눈치다. "합의금은 일주일 안으로 이 번호로 넣어 주십시오." 성훈이에게 앞으로 놓여지는 계좌번호 때문에 성훈인 눈물이 쏟아져 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 많아. 이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하지?' [널 돈으로 살수 있다면 우리집 전 재산을 다 들여서라도 널 갖고 싶어.] 문득 떠올려지는 지용이의 음성이 뚜렷하게 기억된다. 자신을 갖고 싶다던 지용이.. 하지만 성훈인 고개를 힘차게 저어 버린다. '안돼.. 지용에게 찾아가선 안돼. 절대루.. 절대.. 지용이 앞에 나타나서는 절대 안돼.' "이것 놔!!" "이 새끼 좀 봐." "쒸펄, 내 몸에 손대지마!!" "쳇, 집안 빽 믿고 이러는 새끼들 보면 역겹다니깐!!" 지원이의 머리를 지휘봉으로 두들기는 경찰관이 지휘봉으로 지원일 내리 칠 것만 같았다. "지원이형." '지용아. 지용아, 정말 미안하다.' 힘없이 일어서는 성훈이가 지원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경찰서를 빠져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던.. 내가 형을 꺼내 줄 거야. 날 팔아서라도 꼭 형 꺼내줄게. 조금만.. 조금만 참아. 조금만... 알았지? 형.' 37)****** 나, 갖고 싶댔지? (past) 딩동---- 밤늦은 시각... 초인종 소리에도 지용인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지용이의 정신을 잡고 있는 성훈이의 실체만 떠올린 뿐이다. 딩동---- 또 한번이 울려도 지용인 꼼짝 않고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다녀간 후,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딩동---- 한참 후 다시 울려진 초인종소리에 지용인 고개를 돌려 현관을 쳐다보았다. 딩동---- 딩동----- "휴~" 지용인 억지스레 몸을 움직여 현관 앞에 섰다. 그리고 인터폰에 비쳐진 사람을 쳐다보았다. 손톱을 깨물고 있는 그가 서 있다. 현관밖에 자신의 머리 속에 가득했던 그가 서 있었다. '성훈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눈을 비벼보고는 다시 인터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비춰진 사람은 성훈이다. 초조한 듯 입술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손톱을 깨물고 있다. 지용인 반가운 마음에 현관을 곧장 열어 버렸다. 문을 따고 자신 앞에 서있는 성훈이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다. 지용인.. "그 말, 유효해?"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계속 손톱을 물어뜯는 성훈이가 힘겨운 음성으로 오랜만에 보는 지용이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무슨.. 말?" "나.. 갖고 싶댔지?" 천천히 고개를 드는 성훈이의 눈이 반짝거린다. 초여름으로 접어드는데도 더운걸 느끼지 못했다. 성훈이에게 살짝 데운 우유를 가져다주고는 그 앞에 앉아 성훈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깔린 음성으로 먼저 말을 붙인다. "네가 날 찾아 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귀국했을 때의 쓸쓸한 눈으로 자신을 찾아온 성훈이가 긴 한숨을 쉬며 우유잔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훗,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지용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성훈인 자신이 그리워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나, 갖고 싶댔지?" "..........?" 갈라진 성훈이의 음성에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마른 얼굴이 하얗게 창백해져 두 눈동자가 더욱 까맣게 보였다. "나, 얼마의 가치가 있니? 지용아." '가치?' "나 돈 좀 줄래?" "........." "너 돈 많잖아. 네가 하라는 대로 다할게." "........." "나, 돈 좀 줄래? 나.. 돈이 필요해. 그것도 많이.. 아주 많이." "........." 자신의 손등위로 따뜻한 액체와 미열이 있는 볼이 살포시 닿았다. 손등에 닿았던 촉감이 점차 기어올라와 지용이의 얼굴로.. 지용이의 입술로 향해 있었다. "나, 얼마의 가치가 있어?" 동그란 눈망울은 진주 만한 이슬을 담아 하얀 볼 위로 춤을 추듯 흩어 놓았다. 조명에 반짝이는 눈동자와 미미하게 떨려대는 입술이 지용이를 유혹하고 있다. "무슨 소리야? 강성훈??" "나, 너에게 날 팔러 왔어." ".........." "너에게 날.." "성훈아." "주려면 많이 줄래? 나 돈 많이 필요해. 아주 많이.." 울먹이는 저 입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맛보고 싶다. 만지고 싶었던 얼굴이 지용이 앞에서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른 새벽 무렵 소리 죽여 우는소리에 지용인 잠에서 깨어났다. 등을 돌리고 누워선 벽으로 자신의 몸을 작게 만들고 있다. 들썩이는 어깨에 지용인 오른손을 올려놓는다. "성훈아, 나를 봐. 그렇게 울지 말고.." ".........." "성훈아." "돈이 필요했어. 지용아, 나 돈 좀 많이 줄래? 지원형 꺼내려면 그 돈이 필요해." 점차 움직임이 커지는 어깨. 지원이란 소리에 하얀 어깨에서 손을 내려놓고는 아랫입술에 이 자국이 베기도록 깨물고 있다. "형이 사람을 치었는데.." "네가 날 찾아 온 이유가 그거였어? 그 망할 자식이 돈 구해오라던?" ".........." "네 몸 팔아서 돈 벌어 오래??!!" ".........." 다물려 했던 입술이 쉴새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신새끼!! 너 이럴려고 그 자식한테 갔냐? 내가 미쳐 갈 때 웃으면서 그 자식한테 가더니? 뭐? 돈이 필요해서 내게 몸을 팔려와? 너 이럴려고 내가 어찌되던 말던 그자식 품으로 간거냐구!!" 벽에 닿아있는 하얀 육체를 신경질적으로 돌려 지용이 시선으로 가득하게 했다. "미안해. 지용아.." 슬픈 눈망울에 고인 눈물은 지원이의 걱정으로만 가득해 보인다. "그래, 강성훈. 너 나한데 널 판다고 했지? 몸 팔려 왔다면 지불하는 만큼의 대가를 치뤄!!" 성훈이의 몸에 고통이 일기 시작한다. 그의 배 위로 올라탄 지용이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용이가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신음소리가 오피스텔 곳곳에서 울러퍼진다. 성훈이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는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 같았다. 멈춰달라고 애원하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지용인 더 무지막지하게 성훈이의 몸에 고통을 주고 있다. 우습게도 성훈이가 통증을 느껴 질려대는 비명소리가 지용이를 더 흥분시키고 있다. 한차례 폭풍이 일어나고 성훈인 축 늘어진 채 지용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용아, 미안해. 이럴 수밖에 없어. 난." "돌아누워." "지용.." "돌아누워! 이 씹새끼야!!" 지용이의 부드럽던 음성은 없었다. 지칠 줄 모르고 성욕으로 들끓는 눈동자만 성훈이를 건조하게 바라보고 있다. 떨어지는 눈물을 뒤로하고 돌아눕는 성훈이에게 또 다시 고통이 전해져 온다. 지원이의 향기로 가득했던 하얀 육체위로 낯선 육체가 접혀지고 지원이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지용이의 입술이 닿았다. 38)****** 더러워졌어 (past) 끓기지 않던 입맞춤은 멈추고 지용이가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얼마가 필요해?" 뿌연 담배연기에 목이 메던 성훈인 콜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용인 배려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다면 성훈이가 콜록거리기가 무섭게 담배연기를 없앨려고 손을 헛 젖고는 했는데. "........." "얼마야? 얼마가 필요해?" "........." "입이 붙었어?" 웅크리고 앉은 성훈이가 하얀 어깨를 보이며 씨트를 잡아끌었다.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으려는 성훈이를 일으켜 주고 싶지만 지용인 성훈이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1억." 성훈이가 말하는 액수에 놀라기는커녕 웃고 있다. "너, 그것밖에 안됐냐?" "........." "난 또 대단히 비싸다고 생각했었지. 훗후.." "........." "쳇, 소유하기엔 너무 값이 싸." '지용아, 미안해.' "하지만 지불은 내가해. 그 정도 액수면 너에겐 큰돈이잖아. 안 그래?" 흔들거리는 눈동자가 깜박거리기만 하면 가득 맺힌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너의 대한 내 사랑을 돈으로 사고 싶지 않았는데. 너에게 모욕을 주고 싶은 건 아닌데.. 내가 너와 사랑을 나누는 게 이렇게 지저분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난 그녀석이 그 꼴이 되어 널 내 곁으로 보낸걸 감사하고 있어. 이렇게 해서라도 널 내 품에 안았으니깐.' "은지원이 이 사실을 알고 있어?" 눈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눈망울이 겁을 먹은 것처럼 큰 눈을 더 커다랗게 떴다. 동그랗게 패인 곳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볼을 젓이지 않고 떨어진다. "훗, 모르나보네? 어쩔까 강성훈. 은지원도 네가 이런 거 알아야 하는 거.." "안돼! 안돼!!" 겁에 질린 음성이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 "큭, 왜? 그 자식이 너 이런 거 알면 너 버릴까봐?" "........" 동그란 눈에 생긴 눈물샘은 깜박거리지 않고도 샘이 넘쳐 흘렸다. "걱정하지마. 그 녀석에게 말하지 않을 테니깐. 단, 조건이 있어." "........" "1억이란 돈은 아직 내겐 큰돈이다. 그 돈을 지불하려면 하룻밤 정도론 모잘라. 너를 사는 대신에 소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 성훈이에게 던져지는 지용이의 호출기가 성훈이의 두 눈으로 들어온다. 소유보다 더 잔인한 방법. 성훈이가 받을 정신적 고통을 지용인 이미 계산한 것 같다. "이 번호는 너만 알고 있던 거야. 호출하는 즉시 달려와. 찾아오지 않았을 땐 지원이 새끼가 너와 내 관계를 알고 있을거야." 싸늘한 미소를 흘리는 지용이가 성훈이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씨트 사이로 보이는 하얀 피부 위로 수놓아진 붉은 피멍이 지용이 자신이 그려 놓은 것인지 의심을 살 정도다. '이렇게 해서라도 널 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계좌번호 있지? 없으면 직접주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지용이가 성훈이에게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죽고 싶어." 성훈이의 기어 들어가는 미성을 듣고는 지용인 차갑게 성훈이를 노려보았다. "훗, 이제 시작인데 벌써 죽고싶어?" 씨트를 끌어안고 욕실로 들어선 성훈인 샤워기에 더운물을 틀어놓고 문에 몸을 실려 주저앉았다. 갑자기 북 박쳐 오르는 눈물이 성훈이의 눈물샘을 자극시켰다. "지원형. 지원형.." 시트에 떨어지는 줄기찬 물줄기가 가려지지 않은 성훈이의 어깨를 때리듯이 떨어진다. 머리가 젖어 성훈이의 볼에 붙어버렸고 떨어지던 눈물도 희석되었다. "난 어떡하지. 형. 나 더러워졌어. 형을 어떻게 보지? 이제 형을 어떻게 쳐다보지? 흐흐.." "형." 힘없이 지원이 앞에선 성훈이의 입술 근저리가 모두 터져 있었다. 눈에 거슬리지만 지원인 아무말도 묻지 않은 채 성훈이를 쳐다본다. 하얀 목티를 입고 있는 성훈이가 대낮에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 때문에 무척 더워 보였다. "너 굶고 살았냐? 얼굴이 왜 그래?" 수척해진 얼굴이 잠을 못 잔 것처럼 엉망이다. 투명하던 피부는 보기만 해도 거칠어 보였고, 힘없는 그의 행동에 지원이를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아.. 아르바이트 시작해서.. 그런가봐." "........"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야간 타임이거든. 며칠 전부터 했는데.." 경찰서에서 나오는 성훈이가 지원이의 눈을 애써 피하고 있다. 지원인 자신이 어떻게 나왔는가는 신경 쓰지 않고 성훈이를 잡아끌었다. "형, 왜?" 괜시리 뜨끔해진 성훈이가 당황해진 눈으로 지원일 쳐다본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치자 얼마 머물지 못하고 눈을 돌려버린다. "피곤해. 잠 좀 자야겠어." 가까운 모텔로 들어와 앉은 성훈인 샤워기의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다. 불안한 나머지 제대로 앉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다. 자신의 목 티를 걷어 거울에 비춰보기도 하고 가슴까지 옷을 끌어올려 거울에 비춰보기도 했다. 붉게 물든 피멍이 뚜렷하다. '어떡하지?' 자신이 보아도 심해 보이는 키스자국이 성훈이를 더 서성이게 한다. "뭐해?" 서성이는 성훈이를 쳐다보는 지원이가 성훈이더러 샤워하고 나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니.. 형, 나 일하러 가봐야 하거든." ".........." "형, 잠드는 거 보구. 갈게. 갔다가.." "그일 그만둬." "누가 부탁해서 하는거야. 한 달만 일하면.." "누구 부탁인데?" 자신의 눈을 피하는 성훈이가 말을 버벅이고 있다. "아는.. 아주머니 부탁인데. 사람 구할 때까지만 일해 주기로 했거든." "........." "형, 미안해."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성훈이가 눈에 거슬린다. "이리와봐." "응?" "이리 오라고." "......." 불안한 걸음으로 지원이 앞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형.. 제발.' 지원이 앞에 서서 그의 발등위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쳐다만 본다. "고개 들어." "......." "고개 들라구." "어? 어." 숨을 깊이 내쉬고는 천천히 지원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기에 촉촉히 젖은 머리를 올빽으로 넘긴 지원이가 성훈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나 없는 동안 막노동이라도 한거야?" 지원이의 말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웃어. 머저리 같아도 넌 웃는 게 제일 어울려." 지원이의 말이 끝나자 한참 후에나 미소를 짓는다. "됐지?" 어설픈 미소가 웃기는지 지원인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의 입술의 혀를 받아들인다. 39)****** 내 것이 될 때까지 (past) “ 엄지손가락에 가시가 박혀 바늘로 건드려 빼냈어도 아프진 않았지만 너에게서 느꼈던 사랑은 가슴에 너무나 깊숙이 박혀 그 어떤 것으로도 빼낼 수가 없어. 나도.. 정말 모르겠어. ”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온거야?" 짜증스럽게 말하는 지용이의 물음에 답하지도 않고, 침대 앞으로 곧장 들어가는 성훈이가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했다. 거실에 서서 옷을 벗는 성훈이를 지켜보던 지용이의 얼굴에 차디찬 미소가 번지고 있다. "그만." 풀던 허리버클에서 손을 떼고는 가만히 앉아 지용이가 다가오기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씻고 와." 지용이에게 아무말도 않고 욕실로 향하는 눈동자가 자신과 마주치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진다. '오늘밤도 늦게 들어가야지. 형이 잠들고 난 뒤에 들어가야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이다가 성훈인 또 눈물을 떨어뜨린다. 더운물이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고 성훈이 자신도 저 물속으로 던져 버리고 있다. "지원형, 난 형만 사랑해. 형만.." "가지마." 침대에서 일어서는 성훈이를 붙잡았지만 그 손을 차갑게 풀고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든다. "그 자식이 늦게 들어온다고 지랄하던?" "........" 아무 말도 않는 성훈이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마주치기를 거부하는 눈동자와 고집스럽게 닫혀진 입술. '날 찾아 온건 너였어.' "아무 말이나 해봐. 벙어리 되기로 했니?" "........" 활짝 웃던 미소를 본지도 오래된 것 같다. 형식적으로 자신을 방문하고. 들어서면 옷이나 벗고 통나무처럼 침대에 누워 나 죽었소 하는 성훈이. 옷가지를 집어들어 입는 성훈이의 움직임이 싫다. 지용인 신경질적으로 성훈이가 집어든 옷을 던져버리고 성훈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 집에 가야해." 딱딱한 어조엔 따뜻함이 없이 메말라 있다. "누가 집에 안 보내 준대?" "........." "그런데." 성훈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한숨을 쉬고 난 뒤인지 굳어진 얼굴엔 빛이라곤 없다. 아니 자신을 찾아오는 날 중에 빛이 나는 얼굴따위는 없었다. "나 배고파, 밥해주고 가."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왜 심술이 나는것인지. 지용이의 음성에 그가 잡고 있는 손을 털어버리곤 방문을 나가는 성훈이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오늘도 늦었구나." "........." "어디서 일하길래 매일 늦어?" "형 왜 아직도 안 잔거야?" "그럼, 매일 자고 있을까?" 문을 따고 들어서자마자 성훈일 올려다보는 지원이가 보였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웅크려 앉아 있는 지원이. 성훈인 자신을 기다리며 뜬눈을 지샌 지원이 때문에 가슴이 뭉클거렸다. '전엔 항상 성훈이가 형을 기다렸는데..' "형, 저녁은 먹었어? 성훈이가 차려 놓고 갔는데.." 주방으로 향하려는 성훈이를 지원이가 손짓을 하며 부른다. "성훈아." "응?" "그일 그만 둬라." 지원이의 말에 굳어지는 성훈이의 얼굴이 슬픈 빛을 띤다. '형.. 나두 그만 두고 싶어. 하지만..' "왜? 성훈이 바람 날까봐?" 귀여운 음성으로 말하는 성훈이의 입가가 터져 있었다. "겨울도 아닌데 매일 입술이 터 있어?" "고생하고 들어오는 성훈일 형이 못자게 하니깐 글지." 눈웃음을 치는 성훈이의 얼굴도 까칠해 보인다. 지원인 헛웃음을 짓고는 성훈이를 끌어 품에 안았다. "그러니깐, 그 일 그만둬." 지원이의 품속이 따뜻하다. 열대야 현상으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대도 더운 걸 느끼지 못하겠다. 눈에 젖어드는 것들에게 떨어지지 말라고 성훈인 명령을 내리지만 그의 명령따위는 소용이 없는지 떨어져 버린다. "형, 나 사랑해?" ".........." 아무말도 없는 지원이지만 성훈인 가슴으로 느낀다. '형도 날 사랑하는거지? 그렇지?' "난.. 형 사랑한다. 많이.. 아주 많이." "내일은 호출하지마." "........" 성훈이가 오피스텔을 찾아온 시각은 두 시간이 훨씬 넘었다. 지용이가 성훈이의 몸에서 내려오자 성훈이가 입을 열었다. "내일은.. 제발 하지마." "왜?" "내일은 약속있어." "그 새끼하고?" "........." 아무말도 없는걸 보니 지용이가 예상하는게 맞나보다. "미친놈, 그럴 땐 거짓말이라도 하는거야." "형, 기브스 푸는 날이거든. 그리구.." "그리고?" "부탁할께. 호출.. 하지 말아줘." "그리고??" "형, 생일이야." '속으로 짓 걸일 것이지? 뭐? 생일?' "그 새끼 대단한 놈이긴 하구나, 강성훈이 남의 생일을 다 챙기고.." "지용아.." 언제까지 찾아 들어야 하는지 몰랐다. 자칫 지원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움에 젖어드는 성훈이였다. "얼버 부리지 말고 빨리 말해." "나." "........" "언제까지 찾아와야 해?" 입술을 깨물고 있는 성훈이 눈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거니?" "내 것이 될 때까지." "날 소유하겠다고 하지 않았잖아." "누가 소유한다고 했어? 내 것이 될 때까지라고 했지." 답답해지는 심정을 지용이는 즐기는 것 같았다. 지용이의 차가운 미소를 보고는 뒤돌아 눕는 성훈이가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얼굴에 입을 맞추고 싶다. 지원이. 두렵다. 지원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성훈이를 내 쫓을까 두려웠다. 이제는 지원이도 성훈이에게 쌀쌀맞지 않는데. 그런 지원이를 떠올리자니 성훈이의 가슴이 몹시 쓰라리다. "지용아, 날 아프게 하지마." 성훈이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난 널 아프게 한적 없어. 아프다고 생각하는 건 너 자신일 뿐이야." "날 풀어줘." 힘없는 음성에 지용이의 눈이 차갑게 변하기 시작한다. "걱정마. 네가 원하지 않아도 풀어 줄테니깐." 하지만 지용인 풀어줄 생각따위는 없다. 오로지 하나의 생각뿐이다. '내가 쳐놓은 덫에서 넌 빠져나갈 수 없다. 내가 풀어줘도 넌 그 자식과 함께 지낼 수 없을 테니깐.' 잠에서 깨어나면 성훈이 녀석은 내 옆에 없었다. 거울속에 긴 메모만 남겨놓고 어지러져 있는 주위를 깨끗하게 해놓았다. 메모속에는 국은 전자렌지에 있고, 밥은 밥통에 있고, 김치는 냉장고 안에 있다고 하고.. 으스러진 어깨가 더디게 낳았다. 빨리 나아야 녀석이 일을 못하게 두들겨 패든 할텐데. 내일은 기브스를 푸는 날. 내 말을 듣지 않는 녀석에게 화같은 건 나지 않는다. 다만, 잠자리를 피하는 녀석의 행동이 수상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녀석은 내 앞에서 옷조차도 갈아입지 않는다. 녀석의 입술을 훔칠 때면 곧장 욕실로 들어가 이를 닫고 나온다. 이상하다. 말수도 줄었고, 웃는 얼굴도 어색하게만 비춰진다. 이 녀석 뭘 하고 다니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걸까? 40)****** 깨끗하고 싶어 (past) "오늘은 안나가?" 아침부터 부산하게 이것저것 만드는 성훈이에게 물어도 그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오늘은 쉬는 날이야. 쉬는 날~" "쉬는 날?" "응." 환하게 웃는 성훈이가 주방에서 꼼짝도 않자 지원인 성훈이에게 다가갔다. "근데, 뭘 이렇게 만들어?" "오랜만에 형 몸보신 좀 시켜줄려고." "몸보신?" "형 얼굴이 마른 것 같아서. 내가 챙기지 않으니깐 확실히 형 얼굴이 말라가." "쳇." 지원인 도마에 생선을 얹어 놓는 손을 꼭 쥐어 버렸다. "형, 칼질을 못하겠잖오. 놔줘." "그만해. 난 생선 싫어." "........" "그만 만들어 대고, 우리 같이 샤워나 하자." "샤.. 샤워?" 당황하는 손이 식칼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래, 몸이 찌뿌둥해. 더워서 그런지 땀도 많이 나고.." "형 먼저.. 씨.. 씻어."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숙여 버린다. "왜.. 나랑 샤워하는 거 싫어?" "아.. 아니." "그런데?" "대.. 대낮에 무슨.." "네가 날 거부하냐? 지금?" "아니. 형.. 그게." "잡말 말고 따라와." "싫다니깐!!" 언성을 높이며 지원이를 밀쳐버리는 성훈이의 눈동자가 흔들거리고 있다. 벙찐 지원이가 밀쳐져 성훈이를 노려보고. "........." "싫다구! 싫단 말야!!" 얼굴이 붉어진 성훈이가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너, 왜이래?" "미안해. 형. 하지만 내가 싫다면 제발 강요하지 말아줘." "........" "부탁.. 할께." 애절하게 쳐다보는 눈동자에 고개를 돌려버리는 지원이가 신경질 적으로 걸리적거리는 식탁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그래, 니말대로 강요 같은 건 하지않으마!!" 차가운 음성이 화가 많이 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두,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형이 내 몸을 보면 형은.. 날 떠날거야.' "화.. 많이 났어?" 헤드폰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이 성훈이의 귀에도 짜랑짜랑하게 울렸다. "형." 헤드폰 속의 음악에 몰두하는지 성훈이를 쳐다보질 않는다. 성훈인 입술이 흔들리려고 하자, 이를 악물고 방그레 웃으려고 노력한다. "형,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지? 형은 날짜개념이 없으니깐 아마 모를거야." 자신의 말 따위는 저 음악에 비하면 개미가 중얼거리는 소리 같을 것이다. "형, 생일날이야. 우리 지원형 스물 세 살 되는 날." "........." 음악소리는 최고조에 다르고 성훈이의 눈에선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나, 오늘만은 깨끗할 수 있어. 형 앞에서 깨끗하게 보일 수 있어. 오늘은 정말 깨끗하고 싶어." "........." "사랑해." 지원이 앞에서 일어서는 성훈이가 주방에 가서는 식탁위에 올려놓은 케익에 불을 밝힌다. 스물 세 개의 초에 불이 밝혀지고 하얀 얼굴을 다 젖어 버린 눈물이 촛불에 의해 반짝거린다. "난 형 사랑해. 형은 꼭 알아야해. 내 마음속엔 항상 형밖에 없다는 거.." 그때 진동으로 해놓은 줄만 알았던 지용이의 호출기가 주방 안을 가득히 울렸다. 성훈인 일어서서 어제 입었던 바지 주머니에서 호출기를 꺼내 건전지를 빼 버린다. '지용아, 오늘은 제발 날 내버려둬. 오늘만은 네게 날 팔았다는 생각따위는 하지 않게.' 새벽녘이 되었는데도 지원인 침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성훈인 긴 팔을 입고 있는 자신의 옷을 벗어 놓고는 거실을 향해 나갔다. 불이 켜 있지 않은 거실은 창문새로 달빛만이 가득하다. 소파에 앉아 잠이 든 건지 눈을 감은 지원이가 보인다. '잘땐 순한 양같다니깐.' 지원이의 귀에 꽂혀진 헤드폰을 벗겨 놓고는 지원이 목에 손을 놓았다. '형, 여기서 쪼그리고 자면 온몸이 다 쑤셔.' 빙긋 웃고는 지원이 목을 끌어 당겼다. "에고, 생각보다 무겁네." 지원이를 들어올리려다 소파 위로 다시 놓았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곤 이불이라도 덮어줘야겠다는 생각에 침실로 향하려던 성훈이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당긴다. ".......?" 거칠게 끌어당기는 손에 의해 성훈이의 입술이 지원이의 입술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지원이의 힘에 의해 거실바닥에 눕혀진 성훈이 지원이에게 깔려 있다. "형~엉" "너, 오늘 나한테 죽은지 알아." 지원이의 안면이 보이지 않지만 지원인 분명히 웃고 있다. 달빛에 그을린 그림자만 길게 보일 뿐 지원이의 갈색몸도 성훈이의 붉게 피멍이 든 하얀 나체도 보이지 않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신이다 20000106 [O.N.E] 영상소년. 번 호 : 278 / 309 등록일 : 2000년 01월 06일 21:19 등록자 : 영상소년 조 회 : 223 건 제 목 : [소설] ──── 놈 ──── 42 - 89 41)****** 멜연제 42)****** 날 버렸다 (past) "이래도 아니야? 이래도?!!" 성훈이의 옷을 찢어 그의 나체를 보는 지원이의 눈이 더 이상 성훈이를 쳐다보려 하질 않는다. "내가 그렇게 무섭디? 내가 너 바람난 거 알면 너 죽일까봐 무서웠어?!" "아니야! 형!" "쳇, 이제 공식화 됐으니깐, 니 속이 편하지? 그 녀석에게 홀가분하게 갈 수 있으니깐 좋아 죽겠지??!!" 쌀쌀맞은 음성이 더 이상 차갑게 들릴 수 없다. "그런 거 아니야. 형.. 난 정말 형밖에 없어." "닥쳣!!!" "그런거.. 아니야. 지용이랑은.." "나가." 자신을 외면하는 눈동자는 더 이상 성훈이를 보지 않겠다고 결정짓는 것 같았다. "형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하얀 얼굴엔 눈물로 이리저리 얼룩이 져있다. "눈물로 넘어 갈 생각하지마. 강성훈!" 독기어린 말로만 성훈이에게 퍼붓는 지원인 성훈이의 가녀린 붙잡음에도 끄덕하질 않는다. "형, 내가 잘못했어. 성훈이가 다 잘못했어. 성훈이가.." 붙잡는다. 이렇게 끝낼 수 없어 성훈인 붙잡고 붙잡는다. "........." "형.. 형이 하라는 데로 다 할게. 형이 바라는 거 다 할게. 응? 날 내 쫓지마. 형!!" 좀처럼 성훈이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지원이의 차가운 손이 성훈일 밀어낸다. "형. 제발 내쫓지마. 흐흐.. 형, 제발." 지원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성훈인 지원이와 시선이 마주치기를 바란다. "놔!! 이거 안 놔?" 화가 난 얼굴은 펴지질 않는다. 지금 성훈이가 하는 행동은 지원이의 화를 돋을 뿐이다. "형... 지원이형. 성훈인 형 없이 살수없어. 성훈이 그래. 성훈인.. 그러니깐." ".........." "형, 성훈인 지원형 사랑해." ".........." "성훈인 형 없이 살수 없는.." "난 너 없이 살수 있어." 망설임 없이 매정하게 들리는 소리에 지원이의 발목을 감았던 손이 힘없이 풀어졌다. "난..." 울먹임에 지쳐 딸국질까지 하는 성훈인 지원이의 말에 숨을 헐떡거렸다. "난 너없이 잘 살수 있다. 그러니깐 이젠 그만해!!"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이 지원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지원인 지금 가슴이 아프다. "네가 지용이 놈이랑 즐겼는지 안 즐겼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 "날 사랑해? 날 사랑한다면서 그런 짓을 하고 다녀? 내 품에 있을 때도 그놈 생각했지? 그렇지?" 지원이의 커다란 음성이 성훈이의 귓가로 흘러들기를 거부했다. "사랑했어. 난." "더 이상 거짓말 하지마라. 강성훈! 지저분하고 거북해!!" "난 형을.. 사랑해." 철썩 소리를 내며 지원이의 손이 성훈이의 볼에 붙었다. 성훈이의 뺨에 느껴지는 지원이의 손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그 더러운 입으로 날 사랑했다는 말은 하지마!" 지원이의 싸늘한 눈동자를 보고는 더 이상 붙들 용기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내쫓기면 지원인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을 것만 같았다. "형이 침을 뱉으면 맞을게.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도 감사히 맞을게. 그러니깐 형.." "고지용한테나 가봐. 그놈 품이 그립지 않아?" 매몰차게 들리는 음성은 단 한번도 성훈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질 않았다. 현관이 부서지도록 꽉 닫고 들어가 버리는 지원이의 뒷모습을 보며 성훈인 심장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닫혀진 문을 두들기는 성훈이의 손 살갗이 문에다를 정도였다. "형, 문열어. 응? 형! 내가 잘못했어. 내가.. 응? 형, 문열어봐. 응?" 두들겨도.. 두들겨도 지원이가 닫은 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형, 성훈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손이 아파오지만 성훈인 두들긴다. 손으로 느껴지는 고통은 가슴에서 느끼는 것에 비하면 백분지 일도 안되는 것이다. "형, 문 좀 열어봐. 흐흐.. 형." 애절한 성훈이의 음성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한동안을 두들기다가 성훈인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난.. 형만 사랑해. 정말이야. 정말 형만 사랑해." 삐삐삐삐삐----- 아파트 좁은 통로 공간에.. 지원이가 난관으로 던져버린 지용이의 호출기가 울러 퍼진다. "형이.. 날 버렸다." 지원이가 닫아버린 현관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성훈이의 눈에선 눈물이 마르질 않는다. '형이 열 때까지 여기에 있을게. 여기서 꼼짝하지 않구 있을거야.' 구슬구슬 떨어지는 눈물에 손을 대본다. '날 믿을 수 없어? 어떻게 하면 형이 날 믿어줄까?' 움추려지는 자신의 어깨를 눈물로 젖어버린 손으로 안아본다. 집혀지는 거울의 파편이 성훈이의 옷에 붙어 그의 손가락를 찌르고 있다. "난.. 정말 형만 사랑해." 파편을 쥐고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본다. '날 믿어주기만 해줘. 나 형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걸.' 파편을 손목에 길게 긋고는 차가운 복도바닥으로 몸을 길게 누웠다. "난 형만 사랑해." 성훈이가 내 쫓이는걸 보고 지용인 라이터를 당겨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울먹이는 음성이 아파트 단지를 울리고 지용이가 실은 자동차에도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성훈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거야. 나, 저 자식보다 잘할 자신 있어. 정말 이야.' 가지고 있던 담배를 모조리 태우고는 차안에 담배 내음이 가실무렵 지용인 차안에서 나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을 두들기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울먹이던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지원인 현관을 열어 성훈이를 안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성훈이가 울먹이며 말하던 '사랑해' 소리만 들린다. 밖에는 성훈이가 있을 것이다. 작게 구일대로 구겨 외롭게 혼자서 울먹이고 있을 것이다. 그의 울먹이는 소리에 지원이의 차가운 마음도 녹아 내리고 있지만 지원인 움직이지 않는다. 43)****** 슬픈 언어 (past) '그렇게 웅크리고 앉아 있지마. 성훈아, 네 곁에 내가 있잖아.' 녀석은 병원에서 데리고 온 후부터 아무 말도, 아무 것도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내 속이 까맣게 타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저렇게 웅크리고 앉아 멍하니 상념 속에 젖어 있다. "성훈아, 이것 좀 먹어봐?" "........" 내 시선을 피하려 드는 성훈이의 눈은 항상 물기가 서려 있다. 너의 눈을 볼 때면 내 가슴은 찢어 지는대도 넌. "성훈아,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이것 좀 입에 대봐. 응?" "........" 아무런 말도.. 혹은 지원이란 이름도 찾질 않는다. 그저 멍한 시선으로 앉아만 있다. "이 새꺄!! 좀 먹으란 말야!!" "........" 녀석의 등짝을 내리쳤다. 하지만 고개를 무릎에 숙일 뿐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다. "강성훈!!!" 녀석의 등짝을 또 내리친다. 하지만 여전하다. "강성훈, 이 병신같은 새꺄!! 그 새끼가 그렇게도 대단해? 너 이러고 있으면 그 새끼가 찾아올지 알아?" 하나의 시위같았다. 성훈이의 저런 행동은 지원이가 찾아와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시위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난 들고 있던 죽을 바닥에 내 팽긴 채로 녀석의 몸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녀석에게 날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니깐. 아니.. 녀석이 날 봐주기 위한 나의 시위이기도 했다. 꼼짝 않는 녀석의 얼굴이 내 주먹에 의해 일그러진 날이 더 많았다. 그를 때린다는 건 내 가슴에 상처를 하나씩 만드는 꼴이 되었지만 조금이나마 살아 있다는 반응을 보이는 성훈이가 보고 싶었다. '아파 아프단 말야' 이런 말을 듣고 싶었지만 성훈인 아무말도 없이 계속 내게 얻어맞기만 했다. "얼굴 좀 들어봐." 녀석 앞에 앉아 구급약을 손대는 내가 한심하다. 병 주고 약주고 라는 말은 내게 붙여야 합당하다. 어쩌면 난 정말 나쁜 놈인지도 모른다. 지원이와 성훈이를 갈라놓은 건 나였으니깐. "성훈아, 얼굴 좀 들어봐." "........" "너 아무 것도 안 먹고 이러고 있으면 지원이 새끼에게 찾아가겠어?" 반응을 보인다. 지원이란 이름 하나에 녀석은 반응을 보이며 내게 얼굴을 내민다. 마치 지원이란 이름이 성훈이의 치료제인냥 반응을 보인다. 보랏빛으로 멍든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는다. 그리고... 녀석은 음식물을 조금씩 섭취하기 시작했다. 이런 녀석을 지켜보는 난 하루하루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성훈아, 오직 너에게만 날 쏟고 있어. 그러니깐 날 보란 말이야. 날 봐줘.. "아저씨, 그건 조심스럽게 들어주세요." 이삿짐을 옮기는 지용이의 몸은 분주하다. 하지만 구석탱이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는 여기저기 멍든 얼굴은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지용인 이삿짐 센터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는 멍한 눈동자에게 시선을 옮긴다. "성훈아, 이제 그만 내려가자. 아파트로 옮기기로 했어." 여전히 말이 없는 성훈이가 지용이의 손에 의해 억지스레 일으켜진다. "거기 가면 좋은 일만 있을거야. 좋은 일만." "........" "그러니깐, 이제 이러고 앉아 있지마." "........" "그곳에 가면 화분 많이 사서 테라스에 정원도 만들어 줄게. 네가 원한다면 애완동물도 기르자. 토끼도 기르고 강아지도 기르고.." "........" "넌 행복해 질거야. 이 세상에서 제일.." "그럼.. 형도 와?" 그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뭐, 형? 강성훈 아직도 그 자식이야?' 지용이의 번뜩이는 시선은 성훈이의 가는 눈동자를 뽑아 버릴냥 쳐다보고 있다. "그래.. 형은 날 버렸지. 그렇지?" 쓸쓸한 몸짓을 짓는 성훈이는 얼이 나간 것처럼 지용이의 부축임을 떨구고 현관으로 향했다. 힘없는 걷는 그가 바람에 날라가 버릴 것만 같다. 그런 성훈이를 등을 보는 지용인 두 눈을 지긋이 감으며 마음속으로 속삭여 본다. '그 자식은 우릴 못 찾을거야. 우리가 자취를 감추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또한 그 자식이 널 찾아오지 않는다면 너 역시 그 자식을 잊지 않을까?' 지용인 쉴새없이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안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질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지용인 예감하고 있다. 그는 이 순간조차도 불안해하고 있으므로.. "강성훈!!" 발코니에 서 있던 그가 난관을 붙들고 떨어질 기세로 서 있었다. 당황하다 못해 안정적이지 못하는 지용인 어서 가서 성훈이를 붙들고 싶었지만 다가가는 순간에 아래로 추락해 버릴 것만 같은 그의 위태로운 몸짓이 지용이의 등에 땀이 흘러내리게 한다. "성훈아!" "........."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원망하는 눈초리에 지용이의 불안함은 더 커지기만 한다. 어떻게든 난관을 놓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성훈아, 이리와. 응?" 불안한 시선이 한 발자욱 다가설 때마다 성훈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훈아, 응? 이리와." "........." 무슨 말을 해서라도 녀석이 발코니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 지용이의 머릿속엔 오로지 이 생각뿐이다. '그래. 은지원!!' "성훈아." 난관을 놓으려는 고사리 같은 하얀 손의 소유자가 아래를 한번 내려다보고 지용이를 다시 쳐다본다. '그렇게 죽고싶니?' "지원이. 성훈아, 지원이가 오늘 널 찾아 온 댔어!" 거짓말이었다. 성훈이를 발코니에서 끌어내려는 일종의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 난관을 떼려했던 손이 난관을 붙든다. 분명히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널.. 데려가겠대." 지용이의 슬픈 눈동자엔 관심이 없다. 난관에서 물러서는 성훈이가 보이자, 지용인 발코니로 나가 그를 꼭 붙들었다. 그리고 가슴 안으로 묻고 슬픈 언어로 짓걸인다. "넌 왜 이런 방법밖에 몰라? 그 자식이 너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니?" "형.. 형 어딨어? 언제 온대?" 지용이의 품에 안겨서 연신 물어대는 말은 오로지 지원이 뿐이다. "형.. 지원형 언제.. 언제 온 댔어?" 자신의 품에서 떼고는 성훈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동그란 눈망울은 지원이를 몹시 불려대고 있다. 몹시 기대에 부풀려 있는 성훈이의 눈망울이 보기 싫다. "형.. 지원형." "그 자식.. 안 와." 절망에 빠져드는 성훈이의 눈빛을 보면서 지용인 이상한 안도감같은 걸 느꼈다. '이상하지 성훈아. 네가 웃고 있어야 내 속이 편해지는건데.. 너의 슬픈 눈빛이 오히려 내겐 안도감을 줘. 난 널 괴롭히고 싶지 않은데.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난 자꾸만 널 이렇게 대하게 돼. 네가 날 이렇게 만들어가. 네가..' 44)****** 영원 (past) 성훈인 또 시위를 시작하고 있다. 입을 꾹 다문 채 아무것도 입에 대질 않는다. "그래, 내 맘대로 햇!! 굶어 죽던지 말던지 맘대로!!" 성훈이에게 던져지는 식기들이 성훈이의 머리위로 떨어져 김치국물이며 콩나물줄기며 이것저것이 엉겨 몹시 지저분하다. 지용이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성훈이의 눈동자가 그를 미치게 하고 있다.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마!" 두 주먹에 힘을 가하지만 그 주먹을 성훈이에게 쏟아 붓기를 자제하고 있다. 두 눈을 감아 버린 채 성훈이에게 멀어지는 지용이의 어깨가 한참 쳐져 있어 보는 이의 눈도 감아버리고 만다. "지용아.." 그가 입을 연다. 죽기만을 바라는 성훈이의 음성이 지용이에게 열렸다. "........." 나가려던 발을 멈추고는 그가 이어갈 말을 기다려보는 지용이. "너도 힘들잖아." "........." "떠나가게 해줘." '이 세상에서.. 아니면 이곳에서?' 멈춰섰던 발을 성훈이에게 돌려놓고는 차갑게 성훈이를 내려다본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자신의 이마로 흘러내리는 음식물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다. 작게 움추려진 육체만이 지용이에게 보일 뿐이다. "풋, 떠나? 어디로?" 비웃는 듯한 음성에 감은 두 눈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 "네가 안 보이는 곳으로.." 힘없이 흘리는 말에는 지용이를 원망하는 빛으로 가득하다. 힘이 들어간 주먹에 통제가 되지 않는다. 성훈이에게 다가가는 지용이의 발도 그가 통제하질 못하고 있다. "뭐? 어떻게 나한테 그런 소릴 짓걸여?" "........." "응? 강성훈 네가 어떻게??!!" "이것 놔!! 네가 뭔데 날 때렷!!" "개새끼 뭐? 내가 안 보이는 곳으로?" 지용이의 주먹이 성훈이의 턱으로.. 성훈이의 눈가로 마주잡이로 쏟아진다. "날 내버려 두란말야!!" "개새끼!!" "네가 뭔데 날 때려!!" "........" 씩씩대는 성훈이의 쏟아질듯한 눈동자가 지용이를 노려보고 있다. 노려보는 눈동자에 높이 치솟은 주먹은 잠시 허공에 붙잡힌 채 그 눈동자를 읽어본다. 맑은 눈동자는 말하고 있다. '널 원망해. 네가 싫어. 널 벗어나고 싶어' 라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날 때려?" "........." "네가 뭔데? 니까짓게 뭔데..." "미쳐가게 하니깐. 넌 날 미쳐가게 하니깐." 지용인 갈라진 음성으로 허공에 떠도는 주먹을 소리없이 내려놓는다. "네 곁에 있기 싫어." ".........."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지? 내가 왜?!" ".........." "너도 미쳐가잖아. 내가 네 곁에 있으면 너도 미치잖아." 가는 손가락이 지용이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애처롭게 속삭인다. '너도 미쳐가잖아' 라고.. "아직." "........" "아직 계약은 끝나지 않았어!! 이 개새끼야!!" "아-------악!!" 성훈이의 머리채를 붙들고 욕실로 향하는 지용이의 손에 뒤죽박죽 섞인 음식물 찌꺼기로 가득하다. "내가 안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구?" "악-------!!" 이끌어대는 머리카락에 압력을 가해 한 움큼이 빠져 나오도록 비틀어 버린다. "미처 갚지 못은 돈을 지불한 다음에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꺼져버렷!!" 욕실바닥에 빠진 머리카락들이 지용이에게 얼만큼 시달렸는지를 보여준다. 온몸이 젖어 초가을 날씨에 한겨울 한기를 느끼는 성훈이. 욕실바닥에 널부러진 옷들을 하나둘 끌어당기는 그의 눈에서 지용이가 쏟아 부은 비눗물이 아닌 짜짜롬한 눈물이 느껴진다. "네가 날 더 미쳐가게 해.." 끌어당기는 티에 김치 국물이 붉게 물들여져 있다. 지용이가 씩씩대고 나가던 욕실 문을 쳐다보며 자신에게 물어본다. "형이.. 보고 싶지? 형이 보고 싶어 미쳐버리겠지?" 욕실 벽을 울리고 다시 성훈이의 귀로 빨려드는 자신의 음성. 아무도 대답해 주질 않는다. 대답을 기다린 듯한 성훈인 쥐어짜는 듯한 심장을 느끼며 또 다시 입을 연다. "응. 너무 보고 싶어.." 옷가지를 끌어당기는걸 포기해 버리고는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고 만다.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아! 너무 보고 싶어 미쳐 버릴 것만 같아!!" 미끄러운 바닥에 두 주먹을 동동거리는 성훈이. "그럼, 지금부터 미치면 되겠네." 동동거렸던 주먹을 거두고는 문밖에서 들리는 음성의 주체를 올려다보았다. 입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는 지용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잡아끌었던 천 조각들을 주섬주섬 집어들었다. "아니 됐어. 지금 널 만질 생각은 없으니깐." "........." "수건으로 몸이나 닦자.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아까와는 다르게 부드럽게 들리는 지용이의 음성이 소름이 돋는다. 다가서는 그에게 멀어지고 싶은지 욕조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성훈이가 지용이더러 다가오지 말라는 고개를 젖고 있다. "여행을 떠나려면 좀 더 깨끗한 모습으로 가야지? 안 그래. 강성훈?" '여행?' "너와 난 휴식이 필요해. 지금 당장!!" 욕조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성훈이를 끌어내서는 거실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린다. 거실바닥에 부딪힌 팔과 다리를 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성훈이를 내려다보며 지용인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어조로 성훈이에게 말했다. "잘 들어, 강성훈. 넌 내 품에서 벗어나지 못해!!" 야경이 아름다운 곳이였다. 커다란 더블베드와 호화스런 가구들 그리고 커다란 욕조가 있는 욕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용인 침대에 앉아 성훈일 내려다보았다. "훗, 사는걸 포기했냐?" 쓸쓸한 눈동자가 베란다에 향해 있다. "좀 웃어봐." 그의 계산대로 성훈인 자신과 함께 한 공간에 있다. 성훈이의 꽁꽁 묶여놓은 밧줄을 풀어내고는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이 자세로 계속 앉아 있으려니깐 아프지 않디?" 시내에 나가 이것저것 잔뜩 사들고 들어온 지용이가 홍조를 띄며 성훈이에게 묻고 있다. 한참을 혼자서 중얼거리지만 성훈인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부유개층을 위해 지은 통나무집. "조금 있으면 겨울이 오겠던 걸. 바람이 매서운 게." 성훈이의 시선은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지용인 침대에서 일어나 성훈이에게로 향한다. 아직 아물지 않은 어깨의 기브스가 지용이의 눈 안에 있다. "내가 씻겨줄까?" 지용인 아무말도 않는 성훈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샤워기의 물이 성훈이의 머리위로 떨어진다. 욕조 안의 물들이 그 동안 성훈이에게 쌓인 피로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하핫, 자식, 허리가 왜 이렇게 얇아?" 지용이의 손이 닿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저 지용이가 씻겨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성훈아." ".........." "웃어봐라. 좀.." 성훈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환하게 웃는다. 지용인. "쳇,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같잖아. 이 쉑아!!" 꼬집였던 곳에 입을 맞추고 성훈이의 얼굴을 욕조 속으로 깊이 집어넣었다. 잠시 후 바둥거리는 성훈이의 행동에 그의 몸을 일으켜 준다. "푸-----" 욕조물을 삼켰는지 혀를 내밀어 뱉어내는 그의 입술에 지용이의 입술로 막아진다. 지용이 특유의 거친 키스에 성훈이의 숨이 끓기는 것 같았다. "헉." 숨을 헐떡거리며 지용이를 보는 두 눈이 투명하다. 머리에서 떨어지는 비눗물 때문에 눈이 따가운지 눈을 깜박거리고 있다. "죽기는 싫지?" 성훈이의 몸에서 흐르는 물기를 채 닦지도 않고 그를 번쩍 안아 침대에 뉘였다. 성훈인 그대로 누워 마치 죽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스텐드 불만을 남겨놓고 모든 곳에 걸려있는 초에 불을 밝히는 지용이의 손이 무척 즐거워 보인다. "여기로 온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가는구나. 이 통나무집이 맘이 드니? 너, 돌아오면 가끔 같이 오려고 부모님께도 안보여 드렸다. 이곳은 너와 나만의 공간이야." "........." "이 곳 풍경이 너무 좋지? 낙엽이 제법 쌓였더라고." "........." "널 꼭 데려오고 싶었어." "........." "봄이 오면 철쭉꽃으로 한창인데." "........." "성훈이 네가 좋다면.. 이곳에 한달 더 있고 싶어. 넌, 어때? 좀 더 있다 갈까?" "........." "그래. 말하지 싫으면... 그냥 듣기만 해. 하지만 딴 생각은 하지마." 방둘레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초들이 침대로 향해 있었다. 지용인 쉴새 없이 떠들어대며 초 하나하나에 불을 밝혔다. 하나하나의 초가 켜질무렵 성훈이의 두 눈동자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고 초에서 촛농을 흘리듯 뚝뚝-- 소리없이 떨어뜨린다. "날.. 사랑해?" '날 사랑해? 지금 나에게 묻는거야?' 이 공간에 있는 지용이에게 묻는 게 아니다. 성훈인 은지원에게 묻는 것 이였다. 지용인 성훈이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방망이질 해대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너의 말에 내 심장이 너무 뛰어서 심정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아.' 아주 잠깐이지만 지용인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 '사랑해. 너무 사랑해..' 하지만.... "날.. 사랑해?" 가슴속깊이 아픔을 맛본 후 흘러나오는 노래 같았다. 성훈이의 눈언저리가 반짝이는걸 보고 지용이의 설레이던 심장은 격하게 노하기 시작한다. 불이 붙는 눈동자는 까맣게 타올라 성훈이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날 사랑해? 성훈일, 사랑한 거 아니였어?" 켜있는 초에서 소리없이 촛농이 떨어진다. "누구한테 묻는 거냐? 너." "........" '그 자식이지? 그 은지원새끼!!' 성훈이가 흘리는 눈물 때문에 쓰라리는 가슴에 멍이 들어 버린다. "난 사랑하는데.. 영원히." "이 새꺄!! 누구한테 묻는거냐구?!" 불이 붙어져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초 하나가 지용이의 손에 의해 벗어나지 못하고 툭--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네가 날.. 네가 날 미쳐가게 해. 네가 날!' 지용이의 두 손 한아름 열이 모여 뜨겁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이 슬며시 감기고 있다. 떨려대는 입술이 지용이의 시야 가득히 들어와 흐려진다. "난 영원히.. 형만을 사랑할 수 있어." '영원이라는 건 없어. 사람이 죽듯이..' 지용이의 두 눈에 검은 천이 걸쳐지는 것 같았다.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지금 성훈이 곁으로 가면 녀석의 목을 비틀어 버릴지도 몰라.'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성훈이 곁으로 가지 않겠다는 의지와는 다르게 지용인 성훈이 배 위로 올라서 있었다. "강성훈!! 난 널 죽이고 싶도록 사랑해!!" 사라져 가는 목 언저리의 붉은 멍울에 입술을 내려놓았다. 강한 고통이 일도록 지용인 음식물을 씹듯 씹어댄다. "아.. 아!!!" '날 사랑하면 안돼? 그 자식이 아닌, 날 쳐다보면 안돼냐구!!' 45)****** 불행해져. (past) "내가 언제까지 버틸지 실험하는 것 같아." "........." "그런다고 내가, 널 포기할 것 같니?" "........." 힘겹게 말하는 지용인 성훈이의 하얀 어깨에 두 볼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사랑해. 성훈아.." "........." 미련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얼굴을 보여주길 바랬다. 하지만 지용인 어느 순간부터 성훈이에게 지쳐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잘해 주려해도.. 그를 못살게 구는 지원이라는 실체가 지용이 뇌리로 들어와 그의 삶을 힘겹게 만들어 버렸다. "난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되는거지?" "........." "난, 언제까지 너에게 이래야 하냐구?" "........." "내가 그렇게 싫어?" "........." 나즈막힌 깔린 지용이의 음성에 성훈이의 감긴 두 눈이 힘겹게 뜨여졌다. "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 "너에게 잘해주고 싶은데.. 널 때린다거나, 언성따윈 높이기 싫은데." "........." "성훈아, 날 보면 안돼?" 울먹이는 음성이 성훈이 가슴속으로 깊이 들어온다. "떠나." '떠나?' "날 떠나면 되잖아." "........." "내 곁에서 떠나면 되는 거잖아." '어떻게 네가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어?' "날 떠나." "........." "날 떠나면 넌 행복해 질거야." "........." "날.." "왜 내겐 기회조차 주지 않아? 왜 나에겐!" "........." "왜??!!" "........." "말을 해!! 왜 내겐 기회조차 주지않아??!!" "넌, 친구니깐. 내 친구일 뿐이니깐." "........." "날 떠나서 살아. 나 같은 건 잊어버리고." '싫어. 싫어.. 성훈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지용이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혀든다. "너에게 빌린 돈은.. 다 갚아 나갈께. 내가.." ".........." "그러니깐.. 날 떠나." "널 떠나면.." ".........." "난 불행해져." “ 왜 우리는 딴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걸까? 내 곁을 맴도는 넌 왜 날 사랑하는 거지? 왜 날 사랑 하는거야? 내가 너에게 뭔데? 난 너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가 없는데.. 난.. 너에게 아무도움도 안 되는 인간인데. ”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대?" "......." 지원이 옆에 앉아 그가 비우는 술잔만 뚫어져라 바라만 본다. "그만 마셔!!" 속이 문드러지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술에 쩌려 있었다. 수원인 그런 지원이의 술잔과 술병을 빼앗아 버린다. "날 찾아 올 때부터 알아 봤어야 하는건데.. 도대체 왜이래?" "........" "아버지와 또 한바탕 한거야?" 고개를 숙인 지원이의 오기 여린 눈빛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저 나약하게 술에 의지하는 지원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랑이란 게 뭐냐?" 힘없이 들리는 지원이의 음성은 세상을 다 산 사람 같았다. 패인. 떠나보낸 존재에 아파하고 있으면서도 지원인 거부하려고만 들었다. '사랑?' "터져 버릴 것 같다. 이렇게 미치게 하는 줄 몰랐어." 지원이에겐 약한 모습 따위는 없었다. "쳇, 너도 이런 모습이 있었냐?" 사랑에 대해 물어오는 지원이에게 수원인 예전의 지원이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크큭. 은지원 정신차려. 지금 네 모습 얼마나 웃긴 줄 알아?" "날 사랑한다면서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어." '도대체 이 녀석 무슨 소릴 하는거지? 그 동안 연애를 한건가? 설마... 이 녀석 성격에 연애같은 걸 했을까?' "천하의 은지원이 사랑같은 걸 했다는 거야?" "사랑?" "하핫. 지금 네 모습이 실연 당한 놈의 몰골로 보여서 그래." 비웃듯 말하는 수원이의 음성에서 예전에 바비가 했던 말과 동일하게 들렸다. [언젠가 네가 뼈저리게 느낄걸. 하지만 그녀석이 네 곁을 떠나고 난 뒤에 알게 되겠지. 훗후.] '떠나고 난 뒤?' "충격 먹었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지원이의 눈이 흔들리고 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으.. 은지원. 왜 그래?" 수원인 멍하니 이를 악무는 지원이를 건들여본다. "은지원? 야!" 자신을 들여다보는 얼굴이 수원이로 비춰지질 않는다. 내쫓지 말라며 울부짖는 성훈이의 얼굴이다. "넌, 날 떠나서 살지 못해!!!" 수원이의 목을 끌어당기는 지원이의 힘이 강했다. "으..은지원!!" 46)****** 연구대상 (past) "얼레? 은수원 네가 웬일이냐? 이곳까지 직접 행차해 주시고?" 낄낄거리며 재진이가 문 앞에 서있는 수원이를 쳐다보았다. "그.. 그 자식이. 그 자식이.." 반쯤 얼이 나간 수원인 자신의 온몸을 껴안고 공포에 떨어대며 버벅거렸다. 울먹거리는 수원이의 온 몸이 젖어 있다. 완벽한 모습만 보이던 수원이였는데, 몹시 헝크러진 머리카락과 거꾸로 뒤집어 입은 얇은 반팔티 사이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밤거리를 헤매고 돌아 다녀 이슬에 젖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재진이 앞에 서있는 수원이는 분명히 온몸을 떨어대며 울고 있었다. "은수원." "그 자식. 그 악마같은 자식이.. 날." 두 눈동자 가득히 맺혀진 눈물들이 젖어있는 뺨으로 흘러내린다. "수원아." 재진인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안긴 수원이 때문에 당황하고 있다. "그 자식이 날.." 수원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단지 논문 주제를 동성연애로 삼아 자신을 취재한 것 외에는 그의 사적인 일 따위는 아는 것이 없었다. "윽... 윽." "야! 은수원!!" 음식물을 토해내는 수원이의 몸을 이끌고 변기 통으로 얼굴을 대주었다. "윽... 윽.. 으" 더 이상 나올 게 없을 때까지 수원이는 계속해서 올려댔다.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말끔하게 비워내고 싶은 듯.. 재진이가 수원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오직하나. 그는 동성연애자들을 협오한다는 것. "작년학기 논문.. 기억해?" "........" 재진인 힘없이 축 쳐져 있는 수원이의 몸을 끌어다가 침대로 누워 주고는 그가 신고 있는 신발을 벗기고 있다. "널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났을 때.." "........" "그때.. 날 보며 네가 뭐라고 한지 기억해?" 냉정한 사고판단력은 수원의 여린 음성에 묻어져 버린 것 같았다. "보시다시피 난 기억력이 좋지 못해." 수원이의 신발을 모두 벗겨 놓고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화장실 가자고 했어." "풋. 그랬었나?" "화장실 가서 네가 한 짓 기억하니?" '어째, 넌 내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그때만 기억하냐?' 『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쬐던 마로니에 공원. 수원인 오랜만에 짬을 내어 여기저기 붙여진 연극 포스터를 구경하고 있었다. 논문주제를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고 있었던 수원인 논문주제를 얻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된지도 모른다. 은근한 기대. 열린 무대에서 백댄서를 꿈꾸는 춤꾼들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커다란 음악에 이끌러 가던 수원인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지나가는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았다. 머리를 보랏빛으로 염색한 재진이는 지나가는 사람을 세우게 할 정도로 매력이 넘쳤고, 수원인 저도 모르게 그가 지닌 매력에 끌려 음악을 쫓던 발로 그를 쫓아갔었다. 노인문제. 아니면 춤추는 아이들.. 그것도 아니면 연극 속에서 논문주제를 찾아볼 참이었다. 주제를 한정시키지 않은 교양과목에 막막해 왔었던 참에 대학로로 나온 건 주제설정을 위한 일 이였는데.. 햇빛에 반짝이는 보랏빛 머리는 수원이에게 신비롭게 비춰졌었다. "왜 날 계속 쫓아오지?" 수원이 상상했던 대로의 음성이였다. 자만심이 가득한 음성. 장난끼 가득하지만 깊이가 있는 까만 눈동자. 아주 순간 이였지만 수원인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저. 저.." 수원인 재진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가 수원이의 손을 붙잡은 것이다. 그리고 수원이의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나즈막한 음성으로 수원이에게 물었다. "화장실 갈래?" "네?" 눈을 동그랗게 뜬 수원이를 붙들고 가까운 극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잘 알고 있는 듯 익숙하게 화장실로 들어가 문고리부터 채우는 것 이였다. "얼마 줄 거야?" 지갑을 빼내 매만지는 손가락은 가지런히 정리정돈 되어있었다. 남자 손이 저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또 한번의 순간. 수원이의 눈에 비춰지는 재진이의 손은 가늘고 길게 잘 뻗어 있는 예술작품 같았다. 두근두근. 수원이 가슴이 또 뛰고있다. "무슨..?" 가슴이 뛰었다. 수원인 지금 자신이 왜 꽉 막힌 사각공간에 재진이와 함께 있는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내가 정해?" "무슨 말씀이신지.." "쪼가리 씹는 건 2만원. 키스하는 건 3~4만원선.." 너무 자연스럽게 내뱉는 말 들이였다. 사랑행위를 돈으로 지불하라는 그. 머리를 쓸어 올리며 변기 위에 앉는 그가 싱긋 웃고 있었다. 보랏빛이 아름다웠다. 수원이에겐 신비스럽게 비춰졌다. 그런데 수원이의 머리속에서 논문주제가 쓰쳐갔고... 재진이에게 끌리는 자신을 주체하질 못했다. "인터뷰를 원해요!" "인터뷰?" "당신 게이 맞죠?" 수원이의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에 속아 버렸다. 재진인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했는데. 순진해 보였던... 자신의 손에 이끌려 온 수원이의 정체는 그가 알고 있는 세계의 사람이 아니였다. "게이? 하하핫!" "게이 아닌가요? 동.성.연.애.자." 수원이의 물음에 고개를 젖는 재진인 손가락 두 개를 펴고는 수원이의 가슴 위를 꾹꾹 찔려댔다. "너, 잘못 집었어. 난 게이가 아니야." "........" 재진이 나름대로의 철학. "하지만 돈을 지불한다면 가능하지." 수원이를 올려다보던 재진이가 변기위에서 일어나 수원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앗!!!!!" 입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움직이려하자 수원이가 무의식적으로 재진이의 정강이에 통증을 주었다. 좁은 공간속에서 이리저리 깽깽발을 하는 재진이를 보며 수원인 싸늘하게 소리쳤다. "난 게이와 대화를 원하지,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동성끼리의 이런 행위는 끔찍하고 협오스러웠다. 수원인 책속에서 일러주는 대로만 살아 왔으니깐.. 깨깽발을 하던 재진이의 움직임은 잠잠해지자, 수원인 잠긴 화장실 문을 열고는 뒤돌아섰다. "인터뷰를 원한다며?" 재진인 호기심이 생겼다. 도도하게 빛나는 갈색뿔테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두 가지 빛을 가지고 있었으니깐. 순수함과 도도함. 거리가 먼 두 가지의 특징이 수원이에게서 뿜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거절한 사람은 없었다. 설사 일반이였다해도 자신의 손에 이끌려 왔던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해주실.. 건가요?" 아까전의 자신을 노려보며 묻는 얼굴이 아니다. 순수함에 빛나는 얼굴엔 엷은 미소를 담고 있었다. "연구대상은 내가 아닐 것 같은데.." 수원인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재진이에게로 끌리고 있었다. 』 47)****** 연예학 (past) "내 몸이 더러워 졌어." "......." "그 자식이 게이일 줄 몰랐는데." 헛웃음 속의 음성이였다. 가지런히 모아둔 향수을 정리하던 재진이의 손이 멈칫한다. "어쩔 수가 없었어. 그자식 힘이 너무 강했으니깐." 수원인 자신의 무릎을 몸 쪽으로 끌어다가 양팔로 안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이상해." '이상?' "난 게이가 아닌데.. 게이는 아닌데." "너만의 연애철학을 가져봐." 수원이의 말만 듣던 재진이가 거울로 비춰지는 수원이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뭘??" "그렇게 괴로워하면 잘 지워지지 않거든. 남는 건 공허, 자책.. 그 딴것밖에 남지 않아." 연구대상. 수원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연구대상이였다.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반도 아닌 희기종. "무슨 소리 하는거야?" "책만 들여다보고 이론으로만 빠삭하니, 네 뇌가 경험을 받아 들였겠어?" "........." "두 가지를 동시에 해보라구." "........." "어때? 이론과 경험을 합쳐보는 게.." 수원이의 혼돈을 정리시켜줄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합쳐? 그러면 얻는 게 있을까?" 재진이의 말에 어느 정도 넘어간 것 같았다. 순수한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재진이가 입을 열기를 바란다. "좋은 상대를 골라볼게. 네가 원한다면." "무슨 소리야?" "육체적 관계를 가져 보라구. 이론으로만 얽매지 말고.." "육체적 관계? 그 방법이 잊기 위한 최선책이라고 생각해?" "내 연예철학은 그러니깐." "풋." "어때?" "........." "싫으면 관두고.." 재진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수원이가 의문에 가득한 눈을 뜨다가 조금씩 엷은 미소를 담는다. "연예철학이라? 가져 볼만하겠는데." "네가 원할 때만 하는 녀석을 골라봐야겠군." "........." "거부감은 들지 않게 말이야." "네가 해줘." ".........." "네가 해. 그거.. 넌 돈만 주면 할 수 있잖아?" 돈을 지불한다며 웃고 있는 얼굴에 순수함은 사라졌다. 두 가지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 수원이. 오렌지빛 스텐드 아래에 빨려들 듯한.. 투명함으로 가득한 수원이의 눈동자. 재진인 자기도 모르게 수원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깊은 눈동자의 보랏빛렌즈. 재진이의 눈빛에 압도당한 수원인 꼼짝달싹 할 수 없어졌다. 재진인 천천히 수원이의 붉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흠칫 놀라는 수원이였지만 이내 잠잠해진다. 그리고 재진이가 다음에 펼칠 행동을 은근히 기다려 본다. "계산은 확실하게 해줄거지?" "물론."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원이의 입술이 반쯤 열려 재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원이의 입술를 매만지던 손가락을 거두는 대신 재진인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움짓 하며 물러나는 수원이의 허리를 재진이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끌어당긴다. 닿을 듯 말 듯한 입술과 입술 사이. 그리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두 사람의 입김. 한참을 그러고 있다 재진이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대본다. 재진이에게서 벗어날까 하다가 수원인 두 눈을 감아버렸다. 입술과 입술이 다았다. 부드러운 미온의 촉감이 좋고 몹시 설레인다. 한참을 머무르는가 싶더니 조용히 입술을 떼어낸 재진이 수원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의 입술이 작게 떨리고 있다. 재진인 수원이의 눈을 찌르는 머리칼을 한번 쓸어 넘긴 후 다시 한번 수원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그들은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지금 뭐하는 거야?" "........" 자신을 쳐다보던 눈이 놀라 들고 있던 것을 뒤로 숨겼다. "뒤로 숨킨 거 뭐야??!!" 뚝뚝--- 화장실 타일 아래로 떨어지는 붉은 알약들이 지용이의 눈 속으로 들어온다. "강성훈. 너?" "........" 지용이가 성훈이에게 다가서려 하자 성훈인 뒤로 감췄던 손을 입가로 가져와 쥐고 있던 알약 한움큼을 입안으로 쓸어 넣었다. "강성훈!!" "........" "뱉어!! 이 자식아!!" 성훈이를 붙드는 그와 한동안 몸싸움이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지용이에게 반항하는 몸짓은 다소 느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차가운 타일 아래로 몸을 실은 성훈이가 입을 꾹 다문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지용인 억지스레 성훈이의 입을 벌리게 하고는 입안에 가득한 알약들을 꺼내었다. "망할새끼!!" "흐흐.. 흑." "이 망할새끼!!!" 입안에 있던 알약들 중 어느것은 색을 잃어 성훈이의 식도로 넘어갔다 나온 것도 있었다. "망할 놈. 망할 새끼." 지용이의 발길질은 성훈이의 등에 쏟아진다. 아프다며 소리를 질려야 하는 그지만 성훈인 흐느껴 울기만 한다. 한참을 내려치던 지용인 성훈이의 옆으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타일 위에서 울고 있는 성훈이를 일으켜 그의 몸이 부서져라 꼭 끌어안았다. "이러지마. 성훈아.. 제발 이런 짓 좀 하지마." 온통 멍이 들었을 성훈이의 등을 쓸어준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제발.. 흐흑.. 흐흐..." 성훈이는 자신의 귓볼에 닿는 따뜻한 액체도 느낀다. 성훈이의 붉은 눈동자위로 지용이의 붉어지는 눈동자가 비춰진다. "성훈아.. 제발." 48)****** 합리화 & 비극 "바람이 찬데." ".........." 따사롭게만 느껴졌던 바람이 지원이 이마 위의 머리를 위로 쓸어 넘겨준다. "왜 다시 돌아 온거지?" ".........." 함께 있는 두 달이라는 시간동안 지원인 돌아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내심 그가 입을 열기를 바라던 바비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그의 쳐진 어깨를 보고 미소를 흘렸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지원이. 까맣게 딴 눈가와 매력적이던 다갈색 피부는 노랗게 터 있었다. 바비의 저택에 들어서선 흔들리는 눈동자로 숨막히는 키스. 하얀 얼굴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이곳저곳을 떠돌기만 했다. 지원인. "내가 알고 있던 은지원은 사라져 버린 것 같아." 지원이 옆에 주저앉은 바비가 넘겨진 머리카락이 미풍에 흔들리는 게 멋있는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려 한다. "가르쳐 준 것 같아." "뭘?" "그 자식. 대단한 놈이야." 알 수 없는 말들을 열거하는 지원이에게 입을 댈 수 없었다. "훗. 은지원 답지가 않군." "떠난 뒤에 후회." "........." "그 녀석이 지겨워." 떠오르는 것. 예쁘게 미소짓는 생글거리는 눈동자. "영화를 찍지 그래. 아주 좋은 소재야." 지원이의 머리맡을 맴돌던 손가락이 지원이의 얼굴을 잡아당긴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시선이 마주하고 바비의 눈동자가 이슬을 담고 반짝이고 있다. 세상속에 찌들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한 눈동자. "널 죽이고 싶어." 지원이의 말에 잠시 당황하던 바비가 입을 가리며 작게 웃어버린다. "단지 그 이유하나?" "..........." 돌려지려는 지원이의 얼굴을 잡아당겨 바비만의 특별한 입맞춤을 부어 댄다. 강렬하지만 조심스럽게.. "저리 갓!!" 바비를 밀쳐버리는 지원이 모래사장 위에서 일어선다. 미풍은 좀더 강해지고 칠흙같이 까만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무희를 즐기고 있다. "그 녀석을 거부한 건 너였어. 난 네가 바라는 것 같아서 해준 것뿐이고." "........." 비앙냥 거리는 말투가 싸늘한 눈동자로 바꿔지게 한다. 그리움에 대한 이글거리는 분노.. 그 분노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가슴이 저려오도록 그리워하는 것 뿐.. 하얀 이를 보이던 하얀 얼굴. 생글거리는 눈웃음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사랑스런 소년. 지원인 그 소년이 목이 매도록 그립다. 하얀 소년과의 꼬임 전가를 바비에게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네가 뒤늦게 깨달은 거 아니야?" "........." "너 같은 놈은 고통이란 걸 알아야 할거야. 킥킥.." "........." "넌 남을 사랑하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어." "........." "그 자식이 항상 천사인지 알았냐?" "........." "꼬마녀석도 네가 지겨울 만 했을걸. 하하핫!" "건방진 자식!!" 지원인 앉아서 조소를 띄우는 바비의 무릎을 사정없이 발로 밟아 버린다. "윽-----" "네가 뭘 안다고?" 지원인 한번 더 그의 온몸의 무게를 실어 바비의 두 무릎을 짓이긴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바비는 참기 힘들 것이다. 바비는 이빨 새로 빠져 나오는 신음을 삼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너만 아니였으면 우린 하와이에 있었을거야!! 네 녀석만 아니였어도!!"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지원이. 지원인 힘을 다해 바비의 턱조가리를 걷어차 버린다. 바비는 그대로 벌렁 나자빠지면서 코를 움겨줜다. 코를 감싸고 있는 녀석의 손가락 사이로 벌건 선혈이 흐르기 시작한다. "너만!! 너만 아니였어도!!" 지원이의 폭발된 분노는 가라앉지 않는다. 그는 쓰러진 바비에게 손을 가한다. 애달픈 그리움. 만지고 싶었던 욕구. 그리고.. 인정해버린 사랑이란 감정. '성훈이가 보고.. 싶어.' 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성훈이와 내가 주인공인 비극 말이다. 내가 그를 만난 순간부터 비극은 상연한 것이다. 무대의 커튼은 스르르 위로 말려 올라들었고.. 난 그를 내 곁에 묶여 놓는 장면부터 시작되었다. "춥지 않니?" "........" 죽음만이 그 커튼을 다시 내릴 수 있는 지겨운 공연. 앵콜도 받을 수 없는 단 한번의 공연. 우린 왜 서로 등만 바라본 채 사랑이란 감정에 파묻혀야 하는걸까? "덮을 거라도 갖다 줄까?" 내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은 이 비극이 황홀해 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는 없다. 너와 나. 우린 서로 지독하게 한곳만 바라본다. 각자 다른 등을 보며 나즈막히 속삭이지. '사랑해' 라고.. "가디건이라도 들고 올게." 신은 나에게만은 감정대신 이성을 더 풍부히 주었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난 이성대신에 감정을 먼저 앞세우고 있다. 성훈이의 물기어린 눈동자를 들여다 볼 때마다 난 이성보다는 감정을 앞세워 녀석의 턱 쪼가리를 후려치거나, 날 쳐다봐 달라고 소리를 쳐댄다. 내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넌 어릴 때 아주 개구쟁이였어. 지금도 얼핏얼핏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 스쳐지나가." 성훈이에게 숟가락을 집어 주고는 맞은편 의자위로 앉는 지용이가 피식 웃으며 성훈이에게 말한다. 웃는 얼굴이 슬퍼 보이지만 성훈이 눈을 돌려버린다. "놀이 동산 갈까? 너 바이킹 타는 거 좋아했잖아." "........" 말을 걸어보지만 아무런 대꾸도 없는 대화. 숨막히는 공간엔 지용이의 힘없는 음성과 시계 째깍대는 소리만 가득하다. "먹기 싫으면 억지로 먹지마." 부드러운 지용이의 음성에 성훈인 시선을 그에게 옮겼다. 작게 미소짓는 눈동자가 예쁘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 "네게 무언가를 사주고 싶어." "........." "악세사리 좋아하잖아. 우리 밥먹고 반지 사러 갈까?" "........." "아니면 목걸이? 것도 아니면 팔찌나." "........." 노려보는 눈동자가 '왜 그러냐' 며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것 같다. "해주고 싶어서.. 뭐든지 성훈이 네가 좋아하는건." "........." "네가 좋아하는 거. 내가 할 수 있는거면 다 해주고 싶어." "........." "우리 쇼핑 나갈까?" "........." 지용이의 이런 양면성에 대해 전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훈인 그의 사랑따위는 무시하고만 있으니깐. "원하는 것들. 뭐든 해주고 싶어." "훗, 그럼." "그럼??" "지원형. 지원형 곁에 데려다 줘." 노려보는 눈동자가 식탁위에 손을 집으며 일어선다. 일어서는 얼굴 가득히 지용이가 흘린 말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 성훈이의 몸짓에 화가 난다기 보다는 온몸에 느껴지는 싸늘함에 지용인 견디기가 힘이 든다.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 ".........." "난.. 할 수 없어." "할 수 있는 일이야.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단지 네가 하려고 하질 않아서일 뿐이야.." 흔들거리는 손. 잡혀있던 은수저는 구부러지고 만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대화. "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질 않아서가 아니라.." 시야에서 벗어난 성훈이가 눈에 비췄다면 수저고 컵이고 간에 잡히는 건 뭐든 던져 버릴 것 같았다. 다행히 비춰지지 않는 얼굴에 순간이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지용인 감사해 하고 있다. "그건 나더러 죽으라는 말밖에 되질 않아."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을 삭혀본다. "그건.. 나더러 죽으라는 거야. 나더러.. 넌 죽으라구 하는거야." '강성훈. 내가 죽으면 좋겠니? 내가 죽어버렸음 좋겠냐구!! 내가 죽었으면 정말 좋겠니? 그게 네가 바라는 거야??' 따뜻한 국물위로 떨어지는 맑은 액체. 뿌옇게 보이는 색색의 반찬들. '만약에..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너와 나의 이 지겨운 비극은.. 비극은 막을 내리겠지. 너, 그걸 바라는 거니?' 49)****** 작은 추억들 (past) 잠이 깨어보니 지용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닫아놓고 내 손목엔 밧줄을 묶어 놓고 나간 걸로 보아 밖에서 꽤 오랜 시간을 있다 올 것 같다. 행여 내가 동맥을 끓을까 고심하는 지용이. 두 눈으로 들어오는 따가운 아침햇살에 얼굴을 찡그려 본다. 햇살을 조금이라도 받으라고 커튼을 쳐놓고 간 것 같다. 난 손을 꼼지락거려 본다. 아직도 살아 남아 있구나. 두 눈에 어리는 것들은 이제 말라서 바닥이 날 때도 됐는데 마르질 않고 계속해서 아리고 아린다. 이 곳에 온지 얼마나 됐을까? 석달? 넉달? 바람이 제법 매서워질걸 보면 넉달은 지난 듯 하다. 그리고.. 지원형이 날 버린 건.. 일곱 개의 달이 지나고 있다. 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날 형의 손을 뿌리쳤더라면.. 그 감정들은 조금씩 형에 대한 원망으로 변해가고 있다. 날 버린 형에 대한 원망. 그리고 떨쳐지지 않는 형의 대한 기다림. 난 형을 원망해도 된다. 나, 강성훈은.. 은지원을 원망해도 된다. 이제는 그래도 된다. 형은... 날 망쳐 놓았고, 내 삶에 제동을 걸어 두었다. 그리고는.. 날 버렸다. 내가 사랑하던 형은 날 버렸다. 날, 버렸다. 초라한... 합리화. "쳇, 거지가 들어와도 쳐다는 본다더라!" 수원이 집으로 들어서는 재진인 문을 쾅 닫고는 수원이에게 푸념 섞인 음성으로 말한다. "거지만도 못하니깐 안쳐다보지!!" 잔뜩 짜증이 섞인 걸로 보아 연구브리핑이 막힌 것이 확실하다. "며칠 동안 연락한번 안 했는데 궁금하지도 않디?" "쳇." 고개를 돌려버리는 수원이를 쳐다보고는 쓰려오는 배를 매만졌다. "에고, 배고파라. 집에 먹을 거 없냐?" 신발을 벗고 들어와선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재진이가 실망하는 눈초리로 수원이를 쳐다본다. "뭐냐? 냉장고는 폼으로 있냐?" "먹는거나 밝히구, 그러니 넌 내게 무시만 당하는 거야!" "칫." 냉장고 문이 떨어져 나가도록 꽉 닫아버리고는 수원이가 앉아 있는 곳에 와선 드러누웠다. "일어나. 왜 여기에 눕고 난리야?" "좀 쉬자. 어제 잠 한숨 못 잤어." 누워있는 재진이의 보랏빛 머리위로 손을 얹으려던 수원이가 뻗었던 손을 힘없이 자신의 다리사이로 내려놓았다. 눈에 비추는 재진이의 목언저리가 온통 붉은 색이다. 불쾌함이 수원이의 온몸에 약을 바싹 올려 대고 있다. "개쉑. 구역질 나니깐 니집 가!!" "........." 반응을 보이질 않는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재진이가 미웠는지 수원인 손대신 발을 쭉 뻗어 재진이의 등을 뚝뚝 건들이기 시작한다. "야! 야, 이재진!" "........." "어쭈, 너 지금 반항하냐?" "........." "야! 이재진!!" "........." "경찰에 신고해버린다!!" "........." "안 일어나??!!" "........." "이재진!!!" "신고해. 신고하고 싶으면."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재진이의 사고 방식이 수원이에겐 신경질을 자아내게 한다. "너 같은 놈을 알고 지내는 내가 등신이지." 일어서서 주방으로 향하는 수원인 계속 투덜대며 재진이에게 욕을 퍼붓고 있다. '녀석. 날 만나서 배운 게 욕밖에 없냐?' "너 같은 양아치 새끼를 알고 지내는 내가 참 한심하다. 한심해!!!" '무관심하기는.. 몇 일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한번 물어나 보지.' "어휴-- 승질나. 저 새끼까지 와서 내 머리 복잡하게나 하고. 이러니 내 인생이 한없이 비참하기만 하지." 머리를 쥐어뜯는 수원인 연신 이욕, 저욕을 반복하고 있다. "은수원." "........." 욕을 하던 수원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재진이에게 얼굴을 돌린다. "나 보고 싶지 않았냐?" "지랄한다." 싸늘한 바람이 지용이의 등을 감싸고 있다. 몸에 느껴지는 냉기에도 불구하고 창고에 있는 소품들을 정리하는 지용이의 손이 즐겁기만 하다. 자신이 오랜 시간동안 적어 온 열 권이 넘는 일기장과 스크랩 해놓은 파일철을 쳐다보며 피식 웃기도 한다. "이건.. 성훈이 중학교 1학년 체육대회때 사진이구나." 노란티를 입고 응원하는 성훈이의 얼굴이 햇빛에 그을러 붉은빛을 띤다. "그리고 이건.. 중학교 2학년때 수학여행." 앨범을 넘기던 지용이의 손이 잠시 멈칫한다. 자신과 성훈이가 꼭 끌어안고 찍혀진 사진이다. 계곡물로 밀려던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에 성훈이가 떨어지지 못하도록 지용인 그를 잡아 꼭 끌어안았었다. 하얗게 웃는 그가 행복해 보인다. 죽어버린 영혼이 아니라 해맑게.. 아무런 근심 없이 웃고 있다. '예뻐. 성훈아. 넌 정말 예뻐.' 앨범을 끌어다가 심장이 있는 곳에 두고 꼭 안았다. 해맑은 미소가 심장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창고 안의 모든 물건들이 성훈이와 연결된 물건들이다. 하찮은 장난감 하나에도 성훈이의 손이 닿은 것들이다. 둘이서 낙서해 놓은 것마저도 스크랩되어 있고.. 그가 집에 찾아와 입고 잤던 옷마저도 이곳에 진열되어 있다. 지금 이 공간은 성훈이와의 12년간의 세월이 담겨진 곳이다. "널.. 사랑해. 성훈아." 이 공간안의 작은 추억들은 뭉치고 뭉쳐 지용이에게 편안한 안식을 준다. 성훈이가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지원이를 불러 댈 때도. 죽으려고 하는 그로 인해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지용인 이곳에 내려와 한참을 앉아 있곤 했다. 그에겐 유일한 안식처 같았으니깐. "넌.. 되찾을 수 없어!! 꼬마는 돌아오지 않아!!" "........." 떠나려는 지원이의 손목을 잡는 바비. 하지만 끈덕지게 붙잡는 바비를 무시한 채 트렁크를 옮기는 지원인 오로지 한가지 생각으로 가득하다. 눈웃음을 치며 자신에게 방글거리던 성훈이. 붉게 변하려 드는 바비의 시야따위엔 관심도 없다. "은지원. 사랑해." "........." 장난반 진담반. 아니 진담에 가까운 음성이였다. "돌아가지마. 돌아가도 넌 찾을 수 없어." "........." "너만 너 자신을 다치게 만들거야. 넌." "찾을 수 있어." 바비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어느새 물기가 어려 버렸고, 눈동자에 반짝이던 액체는 바비의 입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넌.. 꼬마녀석을 찾을 수 없을거야. 없다구!!" "........." "오히려 네가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깐.. 가지마." "........." "은지원 가지마!" "........." 현관으로 향하려던 지원이가 자켓안의 여권과 티켓을 챙기고 있다. "네가 되찾을 수 없는 이유 말해줘?" "........." "자존심 강하고 숨막히도록 차갑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 "........." 바비의 저런 모습은 처음본다. 지금 바비는 처절하게 지원이에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가지마. 은지원.." "........." "넌.. 돌아가도.. 찾지 못할거야. 왜냐면." "........." "방법부터 틀렸어. 너만 망가질거야. 그러니깐.." "찾는다. 그 녀석은 날 벗어날 수 없거든." 쾅--- 문을 닫고 나가는 지원이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입안으로 삭혀버리고. 잠시 얼에 빠진 듯 하다가 개미만한 음성으로 작게 속삭인다. "찾지 못해. 너의 그런 썩어빠진 자만심이 널 더 무너지게 만들거야. 넌, 무너질거야. 은지원! 분명히.. 넌 무너질거야." 50)****** 올가미 (past) "이거 정말 왜이래!!" 수원인 불끈 고개를 쳐들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팔짱을 끼고 그런 수원일 가소롭게 내려다보고 있는 공원에서 만난 사내. "내 몸에 더 이상 손대지마. 더러워!!" 제법 기개가 있다. 목소리가 우렁우렁 실내를 흔든다. 겁없이 사내앞으로 다가가며 대드는 수원이가 위태롭다. ".........." "이거봐. 난 내가 하고 싶을때만 해! 알았어?" "홀린 건 너잖아? 안 그래?"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비죽 웃는 사내.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그 사내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는 수원이의 주먹. "억!" 그러나 고꾸라지는 것은 수원이. 사내는 다시 팔짱을 낀 상태로 되돌아와 있다. 하여간 날렵한 솜씨다. 그러나 다시 달려드는 수원이의 고집도 보통은 아니다. 이번엔 사내가 보다 확실하게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찍어누른다. "하룻밤 상대로 날 선택했다면 너의 큰 오류야. 후훗.." "개새끼!!" 수원이의 지퍼를 내리는 사내의 차가운 손이 살 갖에 닿아 소름이 끼친다. 문득 떠올려지는 재진이의 얼굴이 수원이의 눈에 얇게 펼쳐진다. '쉬펄, 이러다 정말 빠져들겠어.'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묘한 쾌감이 일어난다. 그리고 사내가 재진이로 생각해버린다. 수원인. '난 한 녀석에게 얽매이지 않을거야. 내가 즐기고 싶은 녀석하고 즐기다 미련없이 끝낸다. 이것이 나의 사고방식. 나의 연애철학. 이재진.. 너의 존재는 내가 빠져들기 전에 외면하면 되는거다. 네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너의 대한 감정은 접어들겠지.' "이제 그만 찾아와." 열리지 않는 문틈으로 수원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문전 박대하냐?" "이제 그만 찾아오라구." "왜 그래?"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 아니 재진인 강하게 느끼고 있다. 분명히 수원인 자신의 눈을 피하고 있다. "나, 애인 생겼거든." 수원이의 발언에 재진이의 온몸이 꽁꽁 어는 것 같다. '애인? 애인이 생겼다구?' 재진이와 수원이 사이에 서먹서먹한 침묵이 감돌고 있다. "귀머거리야? 나 애인생겼다구!" 침묵을 깨는 건 수원이의 날카로운 음성이였다. 수원인 얼마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그의 철학을 만들어 나간 것이다. 철학. 그만의 연예철학. "하하핫, 애인? 애인이라?"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렇게 웃어야 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한 최선의 방어책이라 생각했다. 텅비는 자신의 가슴속이 하루종일 굶어서 일거라고 위안을 해본다. 수원이의 순수한 눈동자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 눈동자 한번만 보여줄래?' "그래. 애인 생겼다." "이제 임자 있는 몸이니 내가 기웃거리면 안되겠군." "........." 자신을 쳐다보질 않는다. "네 애인이 나 보기전에 얼릉 사라져 줘야겠지?" 재진인 고개를 까닥까닥거리고는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밀어버린다, 닫히는 순간에도 수원이를 눈 안으로 들어놓는 재진인 가슴언저리가 내려앉는 것 같다. 재진인 문을 닫고 현관문에 몸을 기댄다. 그리고 눈을 감아본다. '바보, 이재진.. 세상엔 사랑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 "서울로 올라 갈거야." 성훈이를 끌어다가 앞좌석에 앉히고는 안전밸트를 매주는 지용이가 쓸쓸하게 웃고 있었다. "긴 여행이였지? 서울로 올라가려면 세 네 시간은 걸려." "........."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고는 지용이의 부드러움에 빠져들지 않으려 한다. "푹 자둬." 앞좌석을 뒤로 밀어 내리는 지용이가 성훈이의 이마위로 입술을 놓았다. 지용이의 야윈 얼굴이 성훈이의 시야를 감기지 못하도록 한다. "왜 그렇게 쳐다봐? 눈감고 자." ".........." "감아." 지용인 동그랗게 뜨여진 눈을 손으로 덮어 버리고는 나즈막히 속삭였다.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웠어. 논문 준비도 해야 하고.. 돌아가면 몇 일 동안은 정신이 없을 것 같아. 밀린 게 한 두 가지가 아니구나." 멍한 눈동자. 두 사람의 긴 여행동안 지용인 원점에서 헤매기만 했고, 성훈인 더욱 더 지원이의 대한 사랑을 키워 가기만 했다. 그 사랑은 잔인하게 미움, 원망으로 번져 버렸고.. '지원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란 예제와 더불어 그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것까지도.. 오로지 지원이의 생각으로만 가득해져 버렸다. 떠오르는 것을 부정하고 정리해 보려고 해외로 겉돌기만 했다. 하지만 더욱 견고하게 떠오르는 실체. 떠도는 동안 하얀 미소를 단념할 수 없다는 걸 가슴깊이 깨달았다. 그 실체를 영원히 곁에 묻어두고 싶다는 결심을 했다. 그 전에 힘을 길러야 한다. 자신의 삶을 사회로부터의 영향을 받아도 굳건히 이겨낼 수 있는 힘. 그 힘의 필수는 물질이라고 지원인 판단했다. "경영수업 받겠습니다." 은장군 앞에 무릎을 꿇은 지원이의 행동은 전의 망나니 취급을 했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놀란 눈으로 아들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얼굴안의 주름들이 하나둘 펴지고 있었다. "아버지 자리.. 물러 받겠습니다." 이를 악문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미소에 정신을 쏟아 놓는다. "훗, 당연히 그랬어야지." "그 동안 실망 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들이 고분고분하게 나오는 게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골프채를 탁자 옆에 세워 놓고 찻잔을 든 아버지는 또 하나의 욕심을 내본다. "지원아." "네." "이회장 딸하고 결혼부터 서둘러라." 두 눈이 흔들리기 전에 바닥으로 내려놓는다. '결혼?' "네가 정말 정신을 차렸는지를 한번 증명해 보려므나." "결혼은.." "내 사업체를 물러 받고 싶다면 이회장 딸하고 결혼부터 해라." 일종의 시험이였다. 지원이에게 올가미를 씌어놓는 것이다. 더 이상의 방황을 없애려는 은장군의 시험. "왜? 싫으니?" "........" "그건." 능글맞게 웃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단호해 보인다. "네, 하겠습니다." '수용할 수 있다고 했지? 성훈이 너. 다른 여자에게 묶인다 해도 너 수용할 수 있다고 했지? 수용할 수 있다고 했잖아. 견딜 수... 있겠지?' 현관을 들어서면서 원인모를 싸늘함이 느껴졌다. "도대체 난방은 하는건지 모르겠네.." 볼멘소리로 잠시 짓걸이다가 안방에 보이지 않는 성훈이를 찾아 집안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조금 열린 욕실에서 물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지용인 욕실 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 "성훈아!!!" 붉게 물든 욕조을 보고 오열하다시피 성훈이를 끌어내는 지용이의 손과 옷에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다. "강성훈!!!" 성훈이의 손목 새로 쉴새없이 세어 나오는 붉은 액체가 성훈이를 말라가게 하는 것 같다. 그를 안아들고는 소파위로 올려놓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까맣게 타들어 간 눈가는 뜨여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앤블란스!! 앤... 앤블란스 보내줘요!!!" 하얀 피부는 붉은 액체로 물들여지고 있다. 지용인 놀란 가슴을 잡고 진정시켜보러 하지만 헛된 것일 뿐 그의 떨려대는 온몸은 진정이 되질 않는다. '지원이 그 새끼가 그렇게 대단하니? 네가 죽으려 결심 할 정도로 대단해?' “ 형이 가까이 있어도 형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날엔. 어쩐지 난 먼 곳에 홀로 있는 것 같아서 그저 기다리는 마음을 지니게 돼.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기다리다가... 거울 속의 형의 모습에 문득 놀라 가슴이 뛰어. 형도... 나와 같은 적이 있을까? ” - past end - 51)****** 미안해. "어휴, 저 미친새끼 또 왔네." 인터폰에 비추는 재진이의 모습에 인상을 써본다. [열어, 임마!!] "돌아갓! 왜 자꾸 찾아와서 난리야!!" [너 열 때까지 안 간다.] "우씨 너 정말 미쳤냐? 넌 안 된다고 했잖아!!" [안 된다니깐 더 군침이 서리는걸.] 능글거리며 말하는 재진이를 어떻게든 되돌려 보내려 한다. "돌아가 이 병신새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 이 등신새꺄!!] 지지 않겠다는 듯 계단에 쭈그려 앉는 재진이의 모습이 인터폰에 비춰진다. "어휴. 저 녀석을 어떻게 보내지?" [나 여기서 노래한다. 어~!] 한다면 하는 녀석이다. "항의가 들어오던 말던 난 몰라. 니 얼굴 팔리는거지 내 얼굴 팔리는거냐? 이 잡새꺄!!"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네가 안 열고 베기나!!] "맘대로 하셔!! 내가 알게 뭐야. 쳇!!" 인터폰에서 멀어져서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두 손을 뻗어 깍지를 낀 후 뒤지게를 펴고 하던 일에 열중하려 하던 그때.. [장수원은 이재진과 사귄대네요!! 장수원이 이재진을 사랑한대네요!! XX아파트 주민 여러분 다 들립니까??!! 1103호 장수원은 이재진꺼라는거!!] "저 미친새끼. 뭐라고 나불거리는 거야?" [장수원!! 니 서방님 계단에서 얼어죽어도 나 몰라하지마. 애정표현 정도껏해!!] 갑자기 들리는 재진이의 음성이 자신의 아파트 곳곳에 울러 퍼진다. "어휴. 정말 돌아버리겠네." 귀를 틀어막고는 노트북위로 얼굴을 묻었다. [장수원! 이재진이 너 사랑한다고 하잖아!! 이 등신새꺄 내 사랑은 받아야 될거 아니야!! 왜 내 사랑은 안 받을려고 해!!] 아파트단지 내에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윗층 아랫층에서 항의하는 주민들의 원성. 쉴새없이 울려대는 인터폰 벨소리. "어휴!! 저 망할 놈의 양아치새끼!!!" 어쩔 수 없다는 듯 현관문에 손을 대는 수원이. [장수원 내가 너 얼마나 사랑하는지..] 문을 열자마자 또 한번 소리를 질러댈 폼으로 서있는 재진이가 보인다. "어, 열었네!!" "........." "그럼 그렇지~" "쉬펄, 개새꺄 안 들어왓!!!" "차라리 통나무집이 나았을거야." 성훈이의 초점을 자신에게 향해 놓고는 지용인 미소를 띠며 말한다. "........" "이곳은 좀 춥지? 그렇지?" "........" 눈동자를 굴리는 성훈이가 안스럽게 지용일 쳐다본다. "성훈아.." "미안해." 슬픈 눈동자에 비춰지는 자신의 눈이 반짝거리는걸 느낀다. "아침 먹자." 성훈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지용이가 성훈이 곁에서 일어섰다. '미안해라니? 미안하다는 말을 왜 하는거지? 왜?' "........"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지원이 곁으로 가고 싶어한다는 걸. 성훈이에겐 지원이만 절대적이라는 걸. "성훈아, 이거 먹구 우리 요 앞에 산책 나가자. 호숫물이 참 맑더.." 쨍그랑-- 침대시트를 붉게 물들인 성훈이의 온혈이 지용이가 서있는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성.. 성훈아." 슬픈 눈으로 이대로 내버려두라는 표정의 성훈이. "서로 힘들잖아. 이대로 끝내자.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어." "성훈아." 벌써 몇 번째인데도 지용인 침착하질 못한다. 수화기를 든 손을 덜덜 떨려 자꾸만 놓치고, 내려앉은 가슴은 주체할 수가 없다. "여..여보세요." 앤블란스에 실려가며 지용인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 널 정말.. 놓아줘야 되는거야? 내 것이 되지 못하는 널, 이대로 보내야 하는거니?' 감은 눈은 뜨질 않는다. 지용이를 보기 싫은지 아니면 아주 깨기 싫은건지. '눈을 떠서 날 봐. 성훈아. 날 봐바. 슬픈 눈도 괜찮아. 날 증오하는 눈도 괜찮아.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을께. 그냥 너의 눈을 보여줘. 너의 눈동자가 어떤 빛깔이였는지 보여줘.' 지원이 남기고 갔던 연락처의 다이얼을 돌려본다. 하지만.. 신호가 가기도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는 지용이. 몸 속 가득히 치밀어 오르는 열기에 호흡이 곤란하다. '싫어. 싫어!! 나도 널 가질 권리가 있단 말이야. 나도 네 곁에 있을 권리가 있단 말이야. 내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건데? 내가 왜!!!' 수화기를 쳐다보며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 개자식에게 갈 바엔 차라리 그냥 죽어버려. 그냥!' 떨어지는 눈물에 수성잉크는 번져 버리고 지원이의 연락처는 조금씩 지워져 버린다. 성훈이를 침대에 눕혀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비우지 않았는데, 꼭 몇 해 동안 들어오질 않은 것 같아. 성훈이 너도 그렇지?" "........." 깜박이는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더니 천장을 바라만 본다. "먼지가 쌓여서 그런지 공기가 탁하다." 한숨을 길게 쉬고는 거실로 나와 이곳저곳에 청소기를 돌렸다. 청소기 소리에 묻히는 지용이의 울음소리. 하지만 성훈인 그의 울음소리를 소음 속에서 골라 들어버린다. 청소기소리에 분리되어 들려오는 지용이의 울음소리를. '지용아, 나 같은 놈 좋아하지마. 넌 정말 잘난 녀석인데.. 왜 나 같은 놈을 사랑하니? 왜 나 같은 놈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지용이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많았다. 차갑지만 모든 일에 뛰어난 그를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성훈이 말대로 지용인.. 유명 탤렌트보다 더 다재다능했다. 하지만.. 지용인 단 하나의 늪에 빠져서만 산다. 성훈이라는 늪. 빠져 나올 수 없는 12년의 허우적거림. 지용인.. 성훈이를 정말 사랑한다. "나 연구소 갔다 올게. 혼자 심심할 것 같아서 비디오 몇 개 빌려왔어. 전부 코믹물이야. 나, 갔다올게." 지갑을 탁자에 놓고, 열쇠를 들고 나오는 지용이. 성훈이의 손목을 밧줄로 묶어놓지 않는다. 습관처럼 들었던 밧줄을 쓰레기통에 힘없이 놓고는 성훈이가 있는 곳을 쳐다보며 눈에 이슬을 담는다. 흘리는 눈물만큼 아프다. 그 동안의 세월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살기엔 지용이의 추억들은 상처투성이다. '떠나.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버려. 내가 마음 먹었을때.. 도망가버려. 내 곁에서 멀리 도망가. 하지만.. 죽지는 말아라. 죽지는 마. 네가 숨쉬는 세상에서.. 난 널 증오라도 하고 살수 있도록 해줘.' "성훈아, 사랑한다." 힘없이 흘려놓고는 성훈이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마지막 고백일거야. 오늘 네가 떠나면 난 더 이상 널 보지 않을 테니깐. 다신 널 찾지 않을거야. 생각하지도 않을거야. 나, 정말 그럴거야.' 을미년스런 날씨. 비가 올 듯 하다가도 햇빛이 쨍쨍 비춘다. 중학교때 성훈이와 중얼거리던 '이별공식'이라는 노래가사처럼 이별하는 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더 슬플거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성훈인 그렇게 말했다. 이별하는 날엔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지용인 해가 쨍쨍 비췄으면 했다. 눈물을 보이면 떠나려는 연인이 다시 뒤돌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때 성훈이를 쳐다보던 지용이의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던걸 성훈인 알고 있을까? '그때... 하마터면 키스 할 뻔했어.' 성훈이의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뇌사스런 성훈이의 미소. '널, 잊을 수는 있을까?' 웃음은 접어들고.. 햇빛에 눈부심에 눈이 따갑다. "학생!!" 아파트 단지를 나가려던 지용이를 경비아저씨가 불려 세웠다. "이거 일주일전에 누가 꽂고 갔는데, 단지 내 꼬마들이 뜯어 봤나봐." 뜯겨진 봉투에는 은지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봉투 안을 들여다보던 지용이의 얼굴에 희열의 미소가 들리어진다. "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속지에 적혀진 내용은 지원이의 결혼식에 대한 초대장. 결혼 날짜가 5일후인 것을 확인하고는 성훈이가 있을 아파트로 들어가는 지용이. 햇빛이 쨍쨍거리는 게 좋았다. 저 햇빛이 지용이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것 같다. 이 햇빛이 성훈이에게도 닿아 있을 것이다. 하핫거리는 얼굴이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의 눈에 고인 액체는 너무 큰 대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훈아, 가지마. 그 자식에게 가지마.' 감사하고 있다. 지원이가 보내준 첩청장에.. 지용인 감사하고 있다. 지용인 감사하고 있다. 52)****** 그만해. "먹고 싶은 거 없어?" 늦게 들어 올 것만 같던 지용이가 일찍 들어와 성훈이에게 얼굴을 내민다. "생각해보니깐 연구소에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 "성훈아." "........" "지원이에게 가고 싶다고 했지?" "........" 지원이의 이름을 부르는 지용이의 말에 고개를 돌린다. 자신을 보지 않던 눈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만나게 해줄게. 성훈이 네가 가고 싶다던 은지원 곁에 데려다 줄께." '거짓말.. 또 날 속이려는 거구나.' 시선을 돌리려는 성훈이를 와락 껴안아 버린다. 그리고 그는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은지원 곁에 데려다 줄게. 하지만 넌 그 자식 곁에 남지 않을거야. 넌 어차피 내 곁에 머물거야. 아마도 넌...' 알 수 없는 쓸쓸한 웃음. 자신있는 표정의 지용이를 보고는 성훈인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집안에 들어와 한참을 기웃거리다 제 집인냥 널 부러지는 재진이가 맘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는 수원이. "쳇, 애인 집에 들락거리는 게 잘못된거야?" "애인?" "......." 잡아먹을 듯한 수원이의 시선따윈 아무렇지도 안다는 듯 웃기만 하는 재진이가 발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수원이를 쳐다본다. "미친새끼!! 돌아도 한참 돌았어!!" "돌기는 누가 돌아?" "너, 그러지 말고 병원 가보는 게 어때? 용인이 시설이 꽤 좋다고 하더라." "네가 병원에 데려다 줘." "어휴--- 저 싸가지." 널 부러졌던 몸이 잽싸게 수원이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얼굴이 닿을 듯 말 듯..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재진이의 웃는 얼굴에 수원이의 가슴이 방망이질하며 뛰기 시작한다. "너 나하고 있으면 가슴 뛰지? 그렇지?" "........." 시선을 돌리고 싶지만 차마 돌려지질 않는다. "너, 나 좋아하잖아. 안 그래?" 닿을듯했던 입술이 포개지고 수원인 재진이의 부드러움에 빠져버린다. 교묘하게 움직이는 혀끝의 감촉이 수원이의 손을 뻗게 만들고 재진이의 머리카락속에서 헤매이게 만든다. 한참동안 서로의 입술을 맛보고는 재진이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뗀다. "장수원." "........" 아쉬운 듯 재진이의 입술만 쳐다보는 수원인 그의 음성 따위는 듣기 싫은 눈치다. "사랑한다." 퍽--- 정통으로 맞은 재진이의 눈시울이 몹시도 쑤신다. 재진이의 품에 빠져나와선 그를 노려보는 수원이가 악에 바친 음성으로 소리 지른다. "뭐 어째??!! 미친 새끼!! 너 때문에 닭살 돗잖아!!" "아휴-- 아포." "사랑? 지랄하고 있네. 내가 그런 사탕발림에 넘어갈지 알아?" "새끼, 거 춈 손 맵네." "당장 꺼져!! 오늘 너한테 줄 돈따윈 없으니깐!!" "........." 매만지던 눈시울에서 손을 떼고 수원이를 올려다보는 재진이가 어설픈 미소를 띠며 수원이에게 고개짓을 한다. "씨폴. 이 미친쉑 보게나." "돈 필요없어." "........" "나. 게이거든." "뭐어??" 웃는 재진이가 다시 아파죽겠다는 듯 눈시울을 매만지고 있다. "그 새끼한테 가려면 예쁘게 하고 가야지." "........" 양손에 가득히 들고 온 쇼핑백을 보고는 성훈인 고개를 숙여버린다. "나 원 그 자식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알아야지?" "........" "너에게 어울린다는 색을 아무리 골라봐도 흰색이 제일인 것 같아서 온통 하얀색으로만 사왔다." "........" 쇼핑백에서 옷가지를 빼내 들고 성훈이에게 펼쳐 보이는 지용이가 작게 웃고 있다. 성훈인 경계심을 풀지 않고 지용이의 낭랑한 음성을 마치 연구하듯이 듣고 있다. 아직 얼굴은 부어 있고 지난번에 생긴 상처부위는 아직도 벌겋게 성이 나있다.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아침도 먹는둥 마는둥 하더니만.. 너 잘 지냈다는 거 보여줘야지. 그 자식 너 귀신인지 알겠.." "그만해." 오랜만에 들어보는 성훈이의 음성이었다. 오랜만에 담아내는 음성인지라 몹시 갈라져 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흡사 웅얼거리듯이 그렇게 말한다. 그만해. "그 자식, 하얀색 싫어해?" "제발 그만!!" 고개를 더 숙이려 드는 성훈이가 고통스럽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있다. "........." "그런 거짓말 따위. 안 믿어." "........." "그러니깐 그만해."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들썩거리는 성훈이가 몸을 작게 만들고 있다. 그런 성훈이 곁으로 다가가는 지용이가 하얀 스웨터를 바닥에 내려놓고 성훈이의 어깨를 감싸고 살며시 껴안았다. "거짓말 아니야." "........." "널 속이려 드는 것도 아니고.." "........." "정말 널 보내 줄려고 하는거야." "그만!! 제발 장난 그만쳐!!" 지용이의 품에서 빠져 나와 오열을 하듯 내뿜는다. 장난 그만 쳐라는. 맑은 눈이 너무도 슬퍼보여서. 맺혀있는 구슬들이 너무 힘없이 떨어져서.. 지용이 가슴이 허한 느낌이 든다. 저것들을 다 지용이 손에 쥐지 못하는 느낌. "하핫, 강성훈. 보내 준다는 데도 싫어?" "제발, 그만 좀 괴롭혀!!" 하얀 볼 위로 흩어지는 눈물들이 지용이를 원망하는 듯 하다. 입술을 꼭 깨물며 자신을 쳐다보는 눈이 고통스러워 미치겠다고 아우성 치는것 같다. 그런 성훈이를 쳐다보며 지용인 처량한 눈동자로 흘린다. "정말이야. 정말 널 그 자식한테 보낼려고 하는거야." "거짓말." "정말.. 널 정말 보낼거야." "날 아프게 하지마." 웅얼거리는 성훈이를 지용이의 눈에 담고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잇는다.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널 아프게 해? 성훈인 너무 예쁜데." 빙그레 미소짓는 지용이의 표정에 성훈인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슬픈 눈망울 대신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지용이를 올려다본다. "정말? 정말 형에게 보내 줄 거야?" '세상에 이토록 투명한 눈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이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눈동자. 이런 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널, 사랑해. 성훈아.' 53)****** 만약에. "그렇게 좋아?" 성훈인 빙글빙글 웃으며 지용이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거짓말 아니지? 그렇지?" 동그란 눈망울은 아직도 의심하는 것 같았다. 지용인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힘없이 웃는다. 바보라는 말과 함께. "그 자식 어디가 그렇게 좋아?" "헤헤.. 그걸 어떻게 말해?" 지원이가 턱시도를 입고 예식장에 들어가는걸 보면 맑은 미소 따위는 사라져 버린 것 같다. 그것은. 맑게 웃는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격이다. "성훈아, 만약에." "응?" "지원이 그 자식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어떻게 할거야?" "어? 지용아?" 당황해하는 눈동자. 하지만 그 당황함은 해맑은 미소에 사라져 버린다. "말해봐. 너.. 어떻게 할거야??" "말도 안돼. 형은 그럴 리 없어." "만약에 말이야." "만약이라는 것도 없어. 형은 그럴 리 없을 테니깐." "..........." "가끔은 여자와 동침을 하긴 하지만 결혼같은 건 안해. 안할거야. 형은 그런 거 안해." 고개를 젖으며 절대적 진리처럼 말한다. 성훈인. "만약에 하면?" "치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도 만약에.." "만약 같은 것도 없다니깐!!" "그냥 알고 싶어서 그래." "그냥?" "응." "만약에... 형이 그런다면 성훈인.." ".........." "성훈인 죽을거야. 형에겐 괜찮다고 했지만. 아니... 아마 그러지 못하고 죽어 버릴거야." ".........." "난.. 죽어. 죽어 버릴거야." 순간 섬짓하게 다가오는 성훈이의 입가의 미소가 지용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차라리 쓸쓸한 미소를 지어.. 아니면 슬픈 미소라도 지어.' 말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죽음이란 단어. 지용인 얼이 빠진 채 성훈이를 바라본다. '말릴 수 없을 것만 같아. 정말 죽어 버릴것만 같아. 지금껏 내게 보여준 너의 자해하고는 다르게만 느껴져.' "죽어 버릴거야. 난, 정말 죽어." '무서워. 그런 얼굴로 있지마. 차라리 슬픈 표정을 지으란 말야.' 두 눈을 감으며 감상에 젖어드는 성훈인 지원이 생각을 하는지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제발, 슬픈 표정이라도 지어. 제발.' 햇빛이 눈부시다. 나는 성훈이에게 햇빛을 보여주고 싶었다. 거실 깊숙이 들어와 있는 영롱한 빛줄기들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블라인드를 올리지 않는 방은 그대로 동굴이다. 그는 문을 등지고 앉아서 지원이를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은 쓸쓸하고 섭섭하지만 곧 성훈인 지원이를 단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로 뻗은 사랑을 알게 되겠지. 알게 된거라 믿는다. 알아줘. 내가 널 얼만큼 사랑하는지.. 내게도 기회를 주란 말이야. 하루종일 방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또 쓰는 것이 성훈이의 일과였다. 아마도 은지원을 만나면 같이 할 것들을 생각해 두는 것 같다. 행복에 허우적거리는 모습.. 지금은 그저 지켜만 본다. "영화를 볼까? 흰색스웨터가 좋겠지? 생선은 싫다고 했으니깐." "........" 몹시 기분이 상한다. 지금 느껴지는 건 질투가 아니라 녀석에 대한 파묻히지 않는 연민. 녀석이 가여워진다. 불쌍한 녀석.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어. "춤도 춰야지. 머리가 엉망이라고 한소리 듣겠다." 혼자서 작게 웃기도 하고 바닥에 적은걸 속삭이기도 한다. 난 헛기침을 몇 번 해대고 입을 연다. "저녁 안 먹니?" "........" "저녁 안 먹을 거니?" "생각 없어." "그래도 먹어야지." "내일이라고 했어? 응? 내일 정말 형을 만날 수 있는거야?" 동그란 눈이 기대로 가득 차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녀석을 어떻게 식장으로 데리고 갈까? "형을 만나면 뭘 먼저 해야 할지." "........" 아플거야. 성훈아. 너, 주저앉을지도 몰라. "형 앞에서 말 버벅거리면 안될텐데." "........." "날 데리려 온다고 했었는데.. 그때 형이 날 보고 웃었다." "........." "성훈인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미치는 줄 알았어."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걸까? 그 녀석의 결혼식을 보여주는 게 잘하는 걸까? 만약이라고 물었을 때.. 그때 네가 보여준 그 미소가 자꾸 날 불안하게 해. 이번엔 정말.. 널 붙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아. 널 바라보기라도 하려면.. 널 식장에 데려가지 말아야 할까? 죽어버릴 것만 같아. 널 보는 것 마저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아. "마지막 밤이 되겠지?" 성훈이가 침대에 누워 지용이를 쳐다보자 그가 힘없이 웃는다. '과연 그럴까?' "미안해. 지용아.. 그 동안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지?" 해맑게 웃는 성훈이에게 동정심이 느껴진다. 지용인 걸치고 있는 티를 벗어버리곤 침대위로 기어 들어간다. 침대에 엎드려 눕고는 베게닢에 얼굴을 묻는다. "그냥, 잘 거야?" '그럼 키스라도 할까?' "지용아, 잘 거야?" 지용이의 등에 닿는 가냘픈 촉감이 그를 유혹하려 든다. "잠이나 자. 내일 일찍 깨야 하잖아." "그런가?" 깔깔거리는 웃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지용인 베겟닢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올려 성훈이를 들여다본다. 눈을 꼭 감고 있는 모습은 하늘에서 갓 내려 온 천사처럼 빛이난다. 행복에 젖어 미소가 스며들어버린 얼굴. 자신과 있을 때 항상 저런 표정으로 잠이 들었다면.. "그 자식을 사랑해?" "........" "그 자식이 배신해도 사랑할거야?" "........" "만약에 딴 여자랑 살림 차려도.." "........" "그 자식이 딴 여자품에서 잠들어도 너 그 자식 사랑할거야?" "그럴 일 없을거야. 형은 그러지 않아." "성훈.." 자신의 얼굴에 닿는 손길이 좋다.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시선 가득히 들어와 환하게..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다. 온통 지원이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는 성훈이. "앞으로..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 "친구사이론.. 돌아갈 수 없잖아." 지용인 성훈이의 말에 고개를 저어 버린다. '아니.. 아니. 그럴 일은 없을거야. 왜냐면.. 넌 내 애인이니깐.' 성훈이의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놓는다. 하지만 그 입술에 입을 맞추지 않는다. 성훈이의 이마위로 살며시 내려놓는 지용이의 입술. '사랑해. 성훈아.. 정말 널 사랑해. 네가 그 자식이 결혼하는걸 보면 넌, 또 죽으려 하겠지. 이번엔 정말 널 말리지 못할 것만 같아. 아무래도 널 말리지 못할 것만 같아.' 얇은 두 눈이 뜨여져 지용이를 올려다본다. "지용아, 잘자." 눈웃음을 치는 성훈이가 다시 눈을 감는다. '널 그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 죽으려고만 하는 널.. 가만히 볼 수만은 없어. 사랑만 듬뿍 받아도 모자라는 넌데. 그 자식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는 채.. 그 자식만 쳐다보는 너. 그러기엔 넌, 너무 가여워. 가여워.. 너무 가여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난 지용이가 거실로 나왔다. 새근새근 잠이든 성훈이의 숨결이 지용이를 슬프게 만들어버린다. 지용인 거실로 나오자마자 담배 한가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그는 조용히 타 들어가고 있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빈속에 피워 선지 머리 속이 텅비는가 싶더니 어지럼증이 생긴다. '그 자식 결혼하는 거 보면 죽을거니? 정말 죽어버릴거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회색빛 담배연기 사이로 성훈이의 밝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예뻐. 너의 미소를 지켜주고 싶어.' 결심은 무너져 버린다.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은지원의 결혼식. '정말 죽어 버릴거니? 정말?' 온몸에 느껴지는 서늘함에 지용인 몸을 움추러 든다. 그리고 손을 뻗어 진열대에 숨겨두었던 첩청장을 꺼내어 은지원이라는 세 글자 머릿속에 입력시킨다. 뿌옇게 보이는 세 글자가 지용이의 눈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말려야 해. 네 녀석이 결혼을 해버리면 성훈인 죽어. 성훈인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릴거야. 이젠 나도, 성훈일 말릴 자신이 없어.' 담배연기에 매워서가 아니였다. 두 눈 가득히 맺혀진 눈물이 금빛으로 치장된 첩청장 위로 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너로 인해 성훈일 죽일 수는 없다. 내가 못 보더라도 죽일 수는 없어." 지원이와 함께 있는 하와이의 정경이 꿈속에 가득했다. 햇살에 눈이 부셔 조심스레 눈을 뜬 성훈이. 성훈이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내일이 왔다. 깨어보니 어제 함께 잠이든 지용이의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늦은 아침에 일어난 성훈인 급한 마음으로 정성들여 몸을 씻고는 어느 모습이 지원일 기쁘게 할까하고 이옷저옷으로 바꿔 입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용이 이 녀석은 어디로 간거야? 형에게 날 데려다 준다놓고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머금는 성훈인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침실의 삼면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너무 창백하잖아. 형이 굶었냐구 소리치겠다." 성훈인 바로 일어나 주방에서 식용유를 꺼내들고 검지로 살짝 찍어 자신의 입술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이러면 모해? 얼굴에 생기가 없는걸.' 성훈인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본다. '붉은 색.' 성훈인 씽크대에 진열된 과도를 집어들고 자신의 약지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조금 따가웠지만 아프지 않았다. 성훈인 세어 나오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 양 볼에 비비기 시작한다. "성훈이가 예쁘게 보이면 영원히 내 곁에 있을거지? 그럴거지? 지원이형." 지용이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현관이 열릴 때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지만 열리지 않았다. "이 녀석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입술을 쭉 내밀며 우리안의 짐승처럼 방안을 서성대던 성훈인 지쳐 늘어져 소파 위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퓨휴---" 소파 뒤로 몸을 기대던 성훈이가 진열대에 놓여진 금빛을 띄는 카드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게 뭐지?" 이상한 충동이였다. 지용이에게 온 우편물 따위엔 관심이 없던 성훈이였는데 이상하게 만치 눈에 띄는 카드가 성훈이를 이끈다. 성훈인 소파에서 일어나 진열대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집어든 카드위로 적혀진 낯익은 이름을 중얼거린다. "은지원. 이은주?" 첩청장. 얼이 나간 상태로 한참을 첩청장에 시선을 주던 성훈이가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져 버린다. '뭐야? 형. 지금 내 손에 들여진 게 뭐야?' 아닐 거라며 고개를 몹시 흔들어 대던 성훈이가 첩청장에 적혀진 날짜를 들여다본다. '2월 9일??' 달력에 시선을 돌리던 성훈이가 몸을 일으킨다. "오늘이잖아?!!" 몸 안의 근육들이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성훈이의 의지를 눌러버린다. 자꾸만 주저앉는 자신의 다리를 툭툭 쳐대며 성훈인 일어선다. "아닐거야. 아니겠지. 내가 직접 확인해 볼 거야. 그럴 리 없어.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믿지 않아. 이 새끼 어딨는거야!! 고지용 너 어디있어!! 어딨는 거냐구!!!" 두눈에 맺혀지는 것들을 흘려버리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결론을 내린다. 눈이 아릴정도록 소매끝으로 훔치고는 현관 앞으로 걸어간다. "형은 절대 그럴 리 없어!!" 54)****** 위기..Ⅰ 호텔 앞에 값비싼 승용차들로 붐비고 있었다. 조심스레 앞으로 내딛는 발은 무척이나 불안하고 하늘위로 높게 치솟은 호텔을 올려다보는 성훈인 어지럼을 느낀다. "아닐거야. 아니지. 형?" 온몸에 있는 근육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풀리려고만 든다. 호텔안으로 들어서는 성훈이가 호텔보이 앞으로 다가서려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멈춰섰다. 하지만 비상계단을 택하는 성훈이. 조마조마한 심장은 아닐거라며 예정된 결혼식을 부정하려고만 든다. '누군가의 결혼식. 형은 아니다.' 라는 체면을 걸고 있다. 비상구 계단 하나하나 올려놓는 발은 철근을 단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커다란 홀을 따라 화려한 조명들과 코를 찌르는 아이리스의 꽃향기. 두 사람이 마주한 가운데 붐비는 예식홀이 두 사람에겐 고요하기만 하다. "훗, 혼자왔냐?" 먼저 말을 건넨 쪽은 지원이였다. 한쪽 입술을 올린 채 지용이를 비웃는듯한 눈빛. 강한 눈동자와 고집스럽지만 매력적인 입술. 깔끔하게 넘어간 올빽의 머리카락.. 호주머니의 손을 걸친채 건방지게 서있는 그에겐 묘한 매력이 있다. 사람의 시선을 압도하는 강한 이미지. 저 강렬함에 성훈인 넘어간 것인가? "따로 얘기 좀 해." 고개를 숙이는 지용이가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축쳐진 어깨와 몹시 흔들리는 음성. 한 대 칠 것만 같았던 이글대던 눈빛도 없었다. "성훈인 어딨지?" 등을 돌리는 그에게 말을 걸지만 지용인 지원이의 말은 무시한 채 비상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나는 항상 성훈이의 등에 대고 말을 했다. 내가 말을 할 때는 방바닥을 문지르며 무위의 글씨를 새기는 그의 손가락이 멈춘다. 그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에 그 작고 가녀린 손가락 글씨로 속엣말을 다 뱉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속엣말은 너. 은지원에게만 향해져 있다. 몸은 나 고지용에게 묶여 있으면서도 마음은 오로지 은지원에게만 향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내 비극은 처음 시작한때부터 앤딩이 정해져 있었다. 단지 난 그것을 어떻게든 돌려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가 하루 종일 방바닥에 쓰고 또 쓰는 말들은 너, 은지원에게 보내는 슬픈 메시지들.. 그것으로 그는 침묵할 수 있는 힘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침묵으로 내 사랑을 거부하려고만 했다. 아니 내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이였다. 날 무시하는 행동이였다. 그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나는 너무 확실하게.. 너무 또렷하게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날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그만의 대사였고.. 그만의 독백.. 그만의 액션이였다. ” 하나하나 오르는 계단에 지원이와 함께한 시간들을 떠올린다. '아니지? 그렇지. 형?' 계단을 오르는 성훈인 무릎에 통증을 느낀다. '그냥 갈까?' 두 가지의 생각이 수없이 교차되지만 성훈인 계단을 계속 오르고만 있다. 지원이와 지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가끔씩 미소를 짓기도 하고.. 슬픈 표정을 지어도 보고.. 하지만 슬픈 표정이 더 많다. "네가 정말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어." 계단을 오르던 성훈인 잠시 멈칫한다. 익숙한 음성에 귀를 기울려본다. '지용이??' "이 결혼.. 그만둬." 지원이의 시선을 피한 채 나즈막히 속삭이는 지용이가 색다르게만 보인다. 자신앞에서 고개를 숙이려 드는 지용이. 지원인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앞에서 눈알을 굴리는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부탁한다. 이 결혼 무효로 해줘." 자신없게 떠들어대는 지용이의 머릿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풋, 이제 미치기라도 했나보군.' 비웃는 미소. 그 차디찬 미소를 담아내는 지원이의 싸늘한 얼굴.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서있는 지원이가 무언가를 한참을 생각하는 듯 하다가 지용이에게 말을 건넨다. "왜? 내가 왜 결혼을 하면 안되지?" "네가 결혼하면.. 죽어." "쿡, 나 때문에 누가 죽어?" "이번엔 정말 죽는다." "죽어? 누가?" 한쪽은 조이는 듯 하고 한쪽은 여유가 넘쳐 흐른다. "부탁한다. 제발 이 결혼 그만둬." "........" "이렇게 사정하마. 이번엔 그 녀석 견디지 못할거야." "훗, 강성훈이 부탁하디? 너한테 부탁했어? 내 결혼 막아달라고 부탁하디?" 한참은 꼬여있는 말투.. 지용일 비웃는 입가의 가득 실린 조소. "........" 손에 감춰지는 열기가 손을 뻗어 조소어린 얼굴에 펀치를 날리고 싶지만 지용인 입술을 깨물어가며 참고 또 참아본다. "죽는다. 정말 죽어." "........" "이번엔 정말 죽는다. 그 녀석.." "죽지 않아!" 짜증섞인 어투의 그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제발 부탁한다. 이번엔 나도 말릴 수가 없어. 성훈인.." "그 자식. 안 죽어.. 내가 결혼을 하던 말던 그 녀석은 내 곁에 있을 것이고, 내가 찾아가면 그 녀석 날 받아줄거야." "........" 자신만만한 음성은 비웃음을 흘리고 있다. '넌 내 발끝도 못 따라간다' 라는 말을 실어.. "성훈인 죽지 않아. 아니 죽지 못해." "........" "성훈인 내가 죽으라 할 때까진 못 죽어." "뭐?" "내 허락 없이는 죽지 못한다는 소리야? 알아들어?" "허.." "그 녀석은 내가 하라는 대로만 행동하게 돼있어." '니 까짓게 뭔데? 성훈일 네 인형취급을 하는거야? 니가 뭔데?' "그 녀석, 내가 죽으라 할때까진 못.죽.어." "너, 너..." 씩씩대는 지용이의 흥분섞인 숨소리. 창백한 얼굴은 노랗게 변해만 간다. "성훈일 데려오지 그랬어? 그 녀석 얼굴, 보고 싶었는데.." 시계를 매만지는 지원이가 지용이에게 등을 돌리려고 한다. "그 자식 손목 봤어??!! 자해한 흔적 봤냐구!!" "........." "난... 난 매일 그 녀석 손목 보면서 산다. 네 녀석 때문에 자해한 흔적만 보면서 산다구!!" "........." "혼자 두면 죽어 버릴까봐, 꼭꼭 묶어두기도 하면서.." "........." "성훈이가 죽을까봐 하루하루 맘 조려가며 산다. 젠장." 눈동자에 열기를 느낀다. 그리고 비상구 계단에 액면들이 무자비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이번엔.. 이번엔 말리지 못해. 이번엔." "핫, 고지용. 지금 네 태도 얼마나 웃긴지는 알아? 지금껏 잘 말려 왔잖아? 그런데 왜 못말린다고 아우성이야!!" 지원인 지용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지용이의 행동이 우스웠다. 아니 패배자의 모습에 유쾌함을 느낀다. "정말이다. 이번엔 자신이 없어." 낮게 깔린 음성은 울먹임을 감춰려 하는 것 같다. 분명.. 내가 사랑했던 사람일까? 차갑다. 너무 차갑다. 저 사람과 키스를 했고.. 무수한 밤들을 함께 한 사람일까? 저 사람만을 생각하며 정성스레 밥을 짓고.. 저 사람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내 생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는데... 내가 행복했던 시간들이 모두 거짓이 되도록 만들어 버리는 저 사람. 내 존재따윈 없애버리고.. 저 사람 하나만을 사랑했던... 내 자신이 늘 초라하게만 느끼도록 한 저 사람.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 내 자신보다 아꼈던 저 사람이.. 분명, 저 사람이 지원형이 맞는걸까? 낯설어.. 형.. 정말 낯설어. 건물 이중벽에 의해 추위를 느끼지 못할텐데. 얇게 입고 온 탓일까? 왜 이렇게 떨려대는 걸까? 그리고... 계단에 멍하니 서서 울고 있는.. 아니 지원형에게 애원하다시피하는 저 사람은 내 몸을 구타하고 험한 욕설을 퍼붓던 지용이가 맞는걸까? 지원형 앞에서 고개를 숙일 대로 숙이고 매달리는 저 사람이.. 내 몸을 강제로 탐하고 내게 상처만 입히던... 날 묶으려던 지용이가 맞는걸까? 왜.. 왜 그렇게 매달리는 거지? 지용아.. 왜 매달리는 거야? 형이 결혼하면 넌 날 소유할 수도 있는데.. 강제라도 날 소유할수 있을텐데.. 걸림돌이 사라져 버리는 건데, 왜? 왜 너의 자존심을 구겨가며 형에게 매달리는 거야? 내 가슴까지 아프게 왜 그렇게 매달리는 거야? 왜.......?? 55)****** 위기..Ⅱ "성훈인 견디지 못할거야.. 성훈인." "헛소리 집어치우고 그만 돌아가. 네 녀석 맞대고 잡담 늘어놓을 시간없어!" 지원인 돌아선다. 지용이의 시야에서 벗어나 그가 나왔던 비상구 문으로 향하려고 있다. 그.때. 툭--하는 소리가 비상구 계단 이곳저곳에서 울러퍼진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지용인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어본다. 부족함이 없던 그에겐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탁한다. 제발 성훈일 위해서.." 두 눈에 맺히는 것들은 열기 없는 대리석 바닥위로 떨어지고, 잘 닦여진 대리석 위로 몹시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떨어진 한 방울의 눈물속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찾아 버린다. 뿌옇게 그려지는 자신의 눈동자에서 또 한방울의 눈물이 떨어진다. '난.. 강성훈을 사랑한다.' "훗." "부탁하마. 성훈이 데려가도 좋아. 아니 난 성훈이 안 봐도 좋다.. 다신 성훈이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대신 성훈이가 세상에 존재하게만 해줘." "........." "그가 살아있다는 것만.. 그가 살아서 숨쉬는 것만 느낄 수 있다면 된다. 난 더 이상 바라지 않아. 더 이상 아무것도 그녀석에게 바라는게 없어. 단지 그녀석이 세상에 살아만 있으면 돼. 그 녀석 살아있기만 하면된다. 나, 그것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은지원 제발 부탁이다." "술수 쓰지마. 고.지.용." 차갑게 내뱉는 지원인 전혀 흐트려지지 않는다. 냉정 그 자체로 지용이에게 미소를 흘리는 지원인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차분해 지고 있다. 무릎을 꿇었다. 지용인 난생처음 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정해본다. 하지만 그의 몸짓은 쓸모없는 것이였다. 오로지 지원이에겐 쾌감만 선사할 뿐이다. 지금 지용이가 지원이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무모한 짓에 가까웠다. "은지원 이렇게 빈다. 제발, 제발 결혼은 하지마라." 눈물로 얼룩이 진 지용이가 지원이 서 있는 곳까지 기어서 그의 다리를 붙들고 사정을 해본다. 대리석에 부딪힌 곳이 몹시 아플텐데도. 몹시 쓰릴텐데도.. "죽어. 성훈인 죽을거야. 은지원 제발 결혼은 하지마라. 내가 사라져 줄게.. 내가 없어지면 되잖아? 그러니깐 제발 결혼은 하지마라." 울고 있는 창백한 얼굴. 조소가 가득한 또 하나의 번뜩이는 얼굴.. "하이 코메디인가? 고지용 우습지도 않아! 지금 네 행동이 얼마나 유치한지 알아?" "은지원.. 이렇게 빈다.. 그러니.." "돌았군!!" 지용이를 힘껏 밀쳐내고는 계단을 오르는 지원이. 밀쳐진 지용인 그 자리서 일어서려다 다시 주저앉고 만다. 무릎에서 느껴오는 화끈거림이 그의 기다란 몸을 주체하질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다시 시도를 해보지만 마찬가지로 주저앉고 만다. 지원이 비상구를 나가기 전에 그를 붙들고 다시 사정해봐야 한다. 결혼하지 말아달라는.. 일어서다 다시 주저앉고, 일어서다.. 하지만 지용인 일어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은뱅이처럼 앉아 있다. 눈물이 흐르고 입안에서 흐느낌이 전해온다. '성훈인 죽어. 내가 사랑하는 성훈인 죽어버릴거야.' "성훈인.. 널 위해서 내게 몸까지 팔았어." "........." 마지막 수단인냥 소리를 지른다. 울먹임을 숨기고 싶었지만 그의 의지하고는 다르게 떨려대는 입술이 지원이에게 자신의 초라함을 더욱 증명시킨다. 지용이의 흐느낌. "널 유치장에서 꺼낼려고 몸까지 팔았단 말이다!! 다 널 위해서!!" ".........." "날 찾아와서.. 몸을 팔았어." ".........." "날 사랑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 내게 몸을 팔았다." ".........." "내가 이 얘기를 할 정도면 심각하다는 생각 안 들어?" 울분을 참아내려던 지용이가 힘겹게 말을 토했다. 그의 눈언저리는 온통 물기로만 가득하다. 계단을 오르던 지원이가 멈칫하는 것 같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멍하니 계단에 멈춰서는 지원이. 지원인 입가가 몹시 터진 성훈이의 어설픈 미소를 떠올린다. 혼동의 상태가 잠시 일어서는가 싶더니 지용이 앞에선 들키지 않기 위해 성훈이의 미소를 떨쳐버린다. 그리고 그의 입에선 삐뚤어진 언어들만 담아낸다. "그럼 이번에도 성훈이를 돈으로 사면 되겠네. 그 자식 얼마나 되든? 넌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들었는데.. 넌 그런 쓸데없는 짓 잘하잖아? 그 자식 몸을 또 사면 되는거 아니야? 아님 내가 살까??!!" 입술을 깨물어 가며 말하는 지원이. 냉정을 잃지 않는 눈동자가 흔들려버린다. '날 위해서 몸을 팔았어? 날 위해서??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지? 왜 말하지 않은거야!!' 그때.. 그때 말을 했었더라면.. 그랬다면... 도대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한거야??!!' 원망스런 과거의 어느 날. 지원인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입술이 하얗게 튼 성훈이를 데리고 모텔로 들어섰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던 성훈이의 입술을 음미하던 지원인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시선을 피하던 그. 그때 어설픈 눈웃음을 치던 성훈이가... 자신을 위해 몸을 팔았다고 한다. 두 주먹을 꼭 쥔 채 지용이를 쏘아보는 지원인 일렁이는 분노를 느낀다. 기껏 몸이나 팔게 만드는 자신이 한심할 수가 없다. '넌.. 날 무능력하게 만들었구나. 왜 그런 짓을 한거야!!' 흔들거림을 참아 보려는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유지시키고 있다. 결코 남 앞에선 흔들리는 모습따윈 보여주지 않는다. 더욱이 상대가 고지용이라면. "돈이 필요하다면 연락해. 그 자식 보살펴준 돈은 지불하지.. 후훗.." 뒤돌아 가버린다. 지용이의 얼이 나간 얼굴을 무시한 채.. 그리고 뒤돌아서는 지원이의 얼굴이 몹시도 구겨져 버린다. 한쪽 가슴의 아려옴이 지원이를 괴롭히고. 그는 속엣말로 쉴새없이 중얼거린다. '참아. 조금만. 참아.. 내가 널 데리려 갈게. 강성훈, 조금만.. 나, 더 이상 무능력하지 않을거야. 다신 널 돈에 팔게 하지 않을거야. 그러니깐.. 참아. 조금만 참으면 돼. 조금만...' 지원이의 실체가 사라져버리자, 지용인 힘없이 바닥에 엎드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바닥을 쳐대는 손에 푸른 멍이 들라며 발악하는 것 같다. "성훈아.. 강성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층 아래의 성훈인 오열하는 지용이 곁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곁에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그만 하라며 말리고 싶었다. 믿고 있었던 사랑의 대한 실패에 절망하면서도 울고 있는 지용이가 걱정되고 그가 안스럽다. 아니 지금 성훈인 지원이 대한 절망보다는 바닥에 한없이 초라하게 엎드린 지용이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네 놈은 성훈일 쉽게 말해도.. 나에겐 그렇지 않아. 내겐 성훈인.. 내겐." 쉴새없이 쳐대는 주먹을 막아야 한다. 아니 막고 싶다. 계단에 발을 구르는 성훈이가 지용이에게 다가가려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을 지용이에게 들켜선 안될거라는 결론을 짓는다. 그것이 지용이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밑으로 한없이 추락해버린 지용이의 조금이나마 남은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다. 그리고... 다시 지원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오로지 한 단어만 그를 괴롭힐 뿐이다. 절.망. '확인할거야.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 할거야.' 이를 악물며 엘리베이터 속으로 몸을 숨기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벽에 기댄 채 스르륵 주저앉아 버린다. 눈에서 흘려 내리는 성훈이의 눈물속에 지원이의 대한 추억들이 가득하다. 행복했던 기억보다는 아픈기억이 많다. '거부하고 싶었는데, 사실이었어. 형을 믿고 싶었는데..' 흐릿하게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이 좁은 사각공간에 가득 매운다. 젖어 드는 눈. 초라하게 쭈그려 앉은 자세. '형을.. 정리해야 하는 거겠지? 이젠 형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 하는 거겠지? 이젠 정말 형을 원망해도 되는거야. 정말 그래도 되는거야. 난 그럴 자격이 있어.' 힘이 빠져버린 성훈이의 손가락이 식장이 있는 층의 버튼을 누른다. '그런대도.. 나, 형을 믿고 싶어.' “ 난 내 비극의 막을 연장하려 한다. 성훈이를 돌봐줘야 하니깐. 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줘야 하니깐. 난 살면서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내 커다란 실수는 성훈이를 만나게 된 것이고.. 강성훈이라는 같은 동성에게 끌리게 된 것이다.. 내 속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을 잠재우지 못하고 번민에 빠진 것이 실수였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한번도 단 한번도 깨달아 본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그런 감정은 나로서도 정말 다스리기 힘든 것이었다. 성훈이의 반짝이는 눈빛을 볼 때나 명쾌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그 작은 입술을 보면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였으니깐.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성훈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여자가 내게 달려 든다해도 난 넘어 갈 수가 없었다. 성훈이 만한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난 도저히 다른 여성에게 눈길조차 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간 것이다. 오로지 성훈이 만을 쳐다보며 살아야 하는것처럼.. 난, 그랬다. ” 당연한 일이였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람이 내 옆에서 12년 동안 숨쉬고 있었으니깐.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그러나.. 너를 향한 내 사랑은 너무나.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었어. 널 위해선 목숨따위야 얼마든지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목숨을 던지는 일보다 사랑을 참는 일이 더 힘이 들었던 거야. 네 곁에 그저 머무를 수만 있어도 큰 행복이라고 믿었던 거야.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므로 해서 난 항상 불안하고 아파해야만 했어. 내겐 한없이 소중한 네가.. 무시당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는데도.. 난 멈출수가 없었어. 나에게 대단한 네가 네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를 사랑하는 거야. 그가 딴 사람과 함께 한다면 죽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불안했어. 불안해서.. 정말 네가 죽어버릴까봐 걱정이 되서 찾아왔어. 그가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그런데... 그는 움직이질 않는구나. 네 영혼을 쥐고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그가 벌이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해. 내가 애원을 한다해도 내게 향하지 않는 네 마음을 그는 장난감처럼 휘젓고 있었던 거야. 너의 여린 마음을.. 너의 사랑을. 너에게 향한 내 사랑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비극을 그는 즐기고 있었어. 그것보다도 지금 난, 네가 쏟아 부었던 사람이 네 존재를 작게 생각한다는 게.. 날 아프게 해. 네 존재를 하찮게 깍아내리는 그의 행동이 날 아프게만 해. 막을 수가 없었어. 난 최선을 다했는데.. 내 힘으론 되질 않아. 집으로 돌아가면 온통 지원이 곁으로 돌아갈거란 기대로 가득한 널..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걸까? 나,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죽으려고 발악해댈 널.. 어떻게 막아야 하는걸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랑의 서약을 하는 내가 사랑했던 형.. 형을 믿고 싶었는데.. 아니 지금 나, 꿈꾸는거지? 그렇지? 형? 꿈이였으면 좋겠는데.. 꼬집어 대는 곳마다 통증이 느껴져. 광장에 홀로 남겨진 기분. 절망적이야.. 절망. 형이 눈부신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손을 잡고 단에 오르고 있다. 형은 그녀를 쳐다보고 웃고 있다. 행복한 웃음. 내 앞에선 항상 인색했던 형만의 웃음. 형.. 웃는 게 어울린다. 웃는 게 보기 좋은데.. 왜 내 앞에선 잘 웃지 않았어? 난 하루에 한번이라도 형의 웃음을 보고 싶어서 많은 노력을 했는데.. 많은 책을 뒤져가며 스토리도 짜보고, TV 코메디쇼 다 봐가며 형이 웃을만한 얘기들을 적어서 외워보기도 했는데. 형... 결혼을 왜 하는거지? 날, 사랑한 게 아니였어? 형이 말한대로 나.. 형에겐 아무것도 아닌거야? 그런거였어? 지금까지.. 나 형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던 거야? 형이 조금씩 보여줬던 감정들은.. 밤마다 즐기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던거야? 지금껏 형에게 난 그런 존재였어? 어지러워. 형이 뿌옇게 보여. 눈에 뭔가가 꼈는지 자꾸 닦아내도 앞이 흐리게만 보여. 앞이 너무 흐려서 형이 웃는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것 같애. 어지러움. 이제는..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겠지? 이제 난 집으로 돌아가서 눈이 빨갛게 충혈되서 돌아온 지용이를 위로해줘야겠지? 많이 울어서 힘이 다 빠졌을 지용일.. 위로해야겠지? 나 같은 놈 때문에 상처입은 그를 위로해야 하겠지. 그런데... 지용일 어떻게 위로할지 난감하다. 지원형.. 날 사랑한 거 아니였어? 날 사랑했던 거 아니였냐구? 자꾸만 이 질문이 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 또 형이 여자를 쳐다보고 웃는다. 웃지마.. 형을 미워하게 되잖아. 형이 미워질려고 하잖아. 형을 깨끗이 잊게 미워하는 감정도 일게 하지 말아 줘. 은지원이라는 이름을 아주 잊어버리게 그렇게 웃지마. 성훈이 녀석.. 내 앞에 있는 여자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쓰면 정말 예쁠 것이다. 활짝 웃는 얼굴에 은은한 연지를 찍어 놓으면 영낙없이 여자처럼 보이겠지. 녀석 정말 예쁠거야. 녀석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나온다. 성훈아, 조금만 참아라. 곧.. 널 찾아갈게. 널 데리러 갈게. 내게 사랑이란 감정을 가르쳐 줬으니깐. 이제 행복이란 걸 가르쳐줘. 너의 미소. 너의 흥얼거리는 노래소리. 그리고 너의 따뜻한 숨결이 그립구나. 성훈아, 사랑해... - 결혼 행진곡에 맞춰 축복을 받으며 행진하는 지원이. - 두 눈에서 눈물을 떨구며 식장에서 뒤돌아서는 성훈이. - 그리고... 비상구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지용이. 56)****** 사랑 그대로의 사랑. 들어서서는 힘없이 현관을 닫고 문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아 버린다. 흘려 내리려는 눈물을 잡아보려고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던.. 껍데기만 남겨지도록 쏟았던 지난 시간의 추억들이 더욱 뚜렷해져 더 굵은 눈물 줄기를 만들어 볼을 타고 흐른다. 한참동안 그렇게 멍하니 앉아만 있던 성훈이가 한숨을 깊게 쉬고는 일어선다. 숨소리가 규칙적이지 못하다. 자꾸 심호흡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눈언저리를 훔치고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향한다. 식탁위로 올려진 컵위로 냉수한컵을 따르고 한숨에 마셨다. 흘린 눈물만큼 넘기는 냉수.. 목이 메어온다. 그리고 탁자위로 컵을 놓고는 또다시 흐느끼며 울어버린다. 흐느낌은 조금씩 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텅빈 아파트가 울리도록.. "사랑했는데! 난 사랑했다구!!" 어둠속으로 묻혀버리는 자신의 소중했던 추억들이 포맷되듯 사라지고 있다. '생각이 안나.. 이러다 잊어버리겠어.' 지워져 가는 지원이의 얼굴. 그의 얼굴을 잊는다는 게 더 아픈 듯 주체할 수 없는 현실 따위는 접어버린다. 일어서서는 안방으로 향하는 성훈이가 정신없이 무언가를 찾고 있다. 행여나 그의 사진이 있을까? 그를 떠올린 물건이 하나라도 있을까하는 바램으로.. '없어! 없어!!' 지용이의 앨범을 꺼내놓고 이리저리 찾아헤매는 그의 얼굴은 없다. 흔적조차 없다. 두 사람이 한때는 사랑했는가를 증명해주는 물건따위는 없다. '없어. 형을 떠올릴만한 사진 한 장도.. 형의 손이 닿은 물건 같은 것도 없어.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앨범위로 떨어지는 구슬이 된 눈물 한 방울. 정리 할 것도 없다. 정리해서 상자에 정리할 물건같은 건 없다. 오로지 눈에 비춰지는 것.. 이리저리 널려있는 앨범 위에는 지용이와 자신의 사진이 가득하다. 페이지를 넘겨가던 손가락이 조금씩 힘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을 붙잡고 있는 지용이를 본다. '돌아가고 싶어. 이땐 아무 걱정 따위는 없었는데.' 헝크러진 마음은 조금씩 정리되고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역시 자신의 사진과 지용이의 사진이다. '넌 들어서자마자 뭐라고 할까? 형이 결혼했다고 말할까? 그리고 정리하라고 말할까?' 하지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버린다. '아니.. 넌 그렇게 말 안할거야. 넌, 내가 아파할까봐. 내가 울까봐. 숨기려 들겠지. 아마도.. 넌.' 문득 떠올려지는 지용이. 대리석 바닥에 앉아 흐느끼던 지용이를 떠올린다. '나까지도 아팠어. 너의 눈물이 날 아프게 하더라.' 성훈인 그렇게 다시 현실 속으로 들어온다. 오디오의 Replay를 고정시켜 놓고는 소파위에 몸을 깊이 묻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리할 물건 같은 건 없었다. 손으로 잡히는 건 없었다. 제대로 된 행복한 추억조차도 없었다. 성훈인 그저 눈물로써 지원일 지워 가는 것을 인정한다. '형이 준 게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형에게 주기만 했나봐. 내 맘이 텅빈 것 빼고는 아무 것도 없어. 참 슬프게도 형을 정리할만한 물건따윈 없더라. 형에게 받은 게 하나도 없어. 하나두..' 식장안의 지원이를 떠올린다. 하얀 턱시도를 입고 자신에게 궁색했던 미소를 보인 그. 성훈인 무릎을 좀 더 밀착시키고 스피커에서 들리는 음악에 귀기울인다. '형 없이도 나.. 견딜 수 있을까?' ♪ 꿈을 꾸나요. 나의 무릎 베고서 꿈의 강 넘어 내 맘을 보나요? 잠든 그대의 머릴 쓸어 넘기며 기도 드리죠. 영원한 사랑을.. ♪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췄었어. 형이 내 허리를 잡고 난 형의 목에 손을 두르고.. 그땐 정말 행복했는데.. 그땐 정말 형이 날 사랑하는 줄만 알았어. 형이 정말..' ♪ 눈을 감아도 찾을 수 있어. 세상이 끝났어. 깊은 어둠에 묻힌대도..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내 뺨에 흐르는 그대 눈물을 그 사랑을.. ♪ '이제 내가 듣고 싶었던 발라드 많이 들을거야. 억지로 듣던 음악들. 이젠 책을 찾아가며 이해 안 해도 되겠다. 이제 가슴 조리며 형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지? 이제는.. 형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거야. 그렇지? 내가 키스하고 싶을 때 키스하는 사람 만나도 되는 거겠지? 흐흣. 이젠.. 질질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되겠어.' ♪ 날 가득히 담은 그대 눈빛에.. 마냥 난 행복하죠.♪ '왜냐면.. 왜냐면 말이지. 이젠 형을 잊어 버릴거니깐. 정말 잊어 버릴거니깐.' 노래는 흘러나온다. 끓이지 않고 계속 흘러나온다. 성훈이가 흘리는 끓기지 않는 눈물처럼 흘러나온다. 성훈인 음악을 끄기 위해 일어선다.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는 하얀 몸둥이.. 그런데 그의 발에 걸리는 금빛의 카드가 성훈이를 기다린 듯 펼쳐져 있다. 뚜렷하게 적혀있는 이름 세글자. 은지원. 지원이의 첩청장. '아, 지용이 알면 안되지?' 성훈인 몸을 구부리고 첩청장을 주어 발견한곳에 갖다 두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 왜 이렇게 안들어오지?' 젖어있는 뺨을 소매 끝으로 닦고는 시계를 들어다 보는 성훈이.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엔 조명등만 켜 두었다. '지용이 들어오면 화부터 내야겠다. 아무일 없다는 듯 우선 투정부터 부려야겠어. 그리고 울먹이는 얼굴은 보여주지 말아야지. 오늘 내가 본 결혼식은 없는거야.' 텅빈 듯한 아파트. 황막한 사막 한복판에 홀로 서있다는 느낌이 든다. 성훈인 어깨를 빌려줄 사람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지용아, 빨리 들어와. 들어와서 나 안아 줘야지, 이 바보야.' 지원이에게 무릎을 꿇던 지용이의 사랑은 위대해 보였다. 자신을 위해 무릎을 꿇던 자존심 강한 지용이. 입술이 떨린다. 음악은 흐르고 성훈인 소파에 다시 앉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현관을 들여다본다. '넌. 날.. 왜 사랑하니?' '눈 두덩이가 너무 부어서 들어갈수가 없다. 녀석 들어서면 버럭 화부터 내겠다. 또 자신을 속였다고 날리를 쳐대겠지. 그리고 내일 아침부터 시위를 할거야. 단식투정을 하던 아니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던가. 그것도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 ..... ..... 성훈아, 제발 죽으려고 하지마. 이젠 네가 죽을 이유가 없어.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마. 네가 그 녀석을 위해 죽으려고 할수록.. 더 가여워져. 그러니깐 죽으려고 들지마. 제발, 제발 그러진 마.' 아파트 계단에 앉아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지용이가 담배 한가치를 꺼내 들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비상구계단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가로수 불빛. 라이터를 꺼내려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린다. "네가 어떤 놈인데, 그 자식에게 그렇게 매달린거야?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는데. 그 자식에겐 그것밖에 안된거니? 성훈이 너.. 그렇게 못났니? 네 자존심 다 버려가며 사랑한 놈이.. 그런 녀석이였냐구?? 네게 상처만 주는데.. 그렇게도 좋아? 그 자식에게 다 퍼줄만큼 그렇게 좋았냐구!!" 낮게 깔렸던 음성이 비상구안을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이어서 들리는 울음소리. 붉은 눈시울을 감추려 했는데, 지용인 또 울고 만다.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 성훈이에게 스며들지 않는 물위의 기름같던 사랑이란 감정. "젠장.." 베란다에 나가서 아래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소파에 다시 깊이 몸을 실어보기도 한다. '술마시는거니? 뭐라고 변명할까 대본이라도 짜는 거냐구? 왜 안돌아와? 빨리 들어오란 말이야..' 진열장에 숨겨진 금빛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지용아, 들어와. 네게 안기고 싶단말이야. 아니 널 안아주고 싶단 말야." 두 눈이 얼얼해 지는 것 같아서 고개를 휙돌리며 베란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으로 얼굴에 드리워지려는 물기를 공기중으로 날려 버릴려고 한다. 그때 달카닥하는 소리와 함께 지용이가 들어섰다. 자동적으로 켜진 조명 빛에 지용이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바보, 눈 퉁퉁 부은 거 다 알아.' "........." "네가 그럼 그렇지. 형에게 데려다 준다구? 쳇!" 코웃음을 치지만 성훈인 애처로운 눈으로 지용이를 쳐다본다. "그게.." "또 거짓말 한거지? 내가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시험한거지? 그렇지?" "그게 아니야." "네가 하는 게 다 그렇지. 지금까지 네 장난에 장단이나 맞춘 내가 등신이다!" "........." "나쁜 놈! 장난칠게 없어서." "그런 게 아니야." "너 같은 놈을 잠시나마 믿은 내가.." "지원이에게 오늘 연락이.. 왔는..데." '거짓말. 너 거짓말하려는 구나.' "너 생일 전까지 해외로 출장을 간다고.." '거짓말. 왜 거짓말을 해?' "그 전까진 싫어도..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아." '너의 거짓말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왜 그런 말을 해? 솔직히 말하지. 바보! 바보 고지용!' "칫! 또, 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정말이야. 이번...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얼굴. 그의 음성은 힘이 없다. 믿어달라는 듯 아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듯 억지로 담아내는 말 같다. 슬픈 눈동자로 지용일 보던 성훈인 입을 연다. "지겨워 죽겠네. 생일까지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그때까지 널 보고 살아야 하는거야?" "아... 아무래도." '죄지은 것처럼 고개 숙이지마. 그러지마.' 고개를 더 숙이려 드는 지용이를 보자니 또 눈물이 고여버린다. 웃음이 섞인 음성이 조금씩 울먹여 버린다. 성훈인 곧 눈물이 쏟아져 버릴 것만 같다. "나, 배고프단 말야!!" 뒤돌아서는 성훈이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감추려든다. '며칠동안은 형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울어도 되겠다. 눈물 같은 건 보여주기 싫었는데.. 그래도. 형이 내 모든 것이였다는거.. 알지? 힘들어.. 당분간은. 정리하기가 조금은 힘들어.' 성훈이가 배고프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달라고 말한 건 처음이다. 어벙벙하게 서서 성훈이가 들어간 안방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지용이 입안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이야. 네가 나에게 배고프다고 말한 건.. 들어오면 날 원망하는 눈으로 노려볼 줄 알았는데.' 그의 입가에 스며드는 미소가 쓸쓸해진다. '넌 모르고 있는 게 나아. 당분간이라도 너 웃는 모습 볼 수 있는거지? 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볼 수 있는거지? 그렇지?' 그의 쓸쓸한 미소는 소리를 낸다. 신을 벗고 소파위로 올라선 그가 손을 이마에 얹은 채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한다. 미미하게 부는 바람이 그를 춥게 만든다. 웃음소리. 그 속의 꼭꼭 숨기려 했던 허탈함. '미안해. 성훈아, 내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어.' 【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른 아침 감은 눈을 억지스레 떠야하는 피곤한 마음속에도 나른함속에 파묻힌 채 허덕이는 오후의 앳된 심정속에도 당신의 그 사랑스러운 모습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층층계단을 오르내리며 느껴지는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속에도 십년이 휠씬 넘은 그래서 이제는 삐걱대기까지하는 낡은 piano... 그 앞에서 지친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내 눈속에도 당신의 그 사랑스러운 마음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당신도 느낄 수 있겠죠. 비록 그날이 우리가 이마를 맞댄 채 입맞춤을 나누는 아름다운 날이 아닌 서로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잊혀져 될 각자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그런 슬픈 날이라 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당신께 사랑을 받기 위함이 아닌 사랑을 느끼는 그대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57)****** 널 만난 이후. "너 안 찾아오면 안되냐?" "왜, 아주 안 찾아 왔음 좋겠어?" 들어서자마자 겉옷을 벗고는 수원이를 잡아당긴다. "이거 놔." 재진일 노려보는 못마땅한 표정의 수원이가 재진일 한 대 칠것만 같다. "오랜만에 보는데 사랑의 키스정도는 해야지. 킬킬.." "미친놈." 재진이의 얼굴을 밀어 버리고는 자세를 똑바로 하려는 수원이. 재진이의 시야에서 벗어나려는지 안방으로 들어가려는 수원이의 발에 무언가가 걸린다. 푹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바닥에 대자로 뻗은 수원이. 바닥에 부딪힌 곳이 아픈지 연달아 이어지는 욕설에 재진인 빙그레 웃어버린다. "애같아." "쉬펄, 욜라 재수없어!!" "넌 가끔 정말 아이같아. 입만 다문다면 금상첨화겠지. 킬킬." "개쉑 네가 찾아오니깐, 이런 재수없는 일만 생기는 거라구!" 이물질이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온 몸을 털며 일어선 수원이가 투덜투덜 거린다. 그런 수원이의 모습이 귀여운지 등뒤로 그를 꼭 안은 재진이의 혀가 수원이의 귓볼을 간지럽힌다. "나 지금 기분 더러우니깐 건들이지마." "너, 심장이 두근거린다." "건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수원이의 목언저리를 꽉 깨무는 재진이 때문에 신음을 토해버린다. 그리고 정지된 상태.. 수원인 그냥 그대로 서서는 재진이의 행동을 받아들여버린다. 두 눈을 꼭 감고... 따뜻하고 달콤한 레몬티에 입에 대는것을 떠올린다. 시큼하지만 달콤한 레몬티의 알싸한 맛. 재진이의 손길에 취해서.. 재진이의 숨결에 취해서.. 바지버클이 내려가는 것도 의식하지 않고, 그의 살갗이 닿는 것에 거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슴을 쓸어주는 차가운 그의 손이 좋다. 가슴을 지나쳐 자신의 얼굴을 감싸주는 그가 좋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정지된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뒤척거리던 재진이가 일어서더니 옷을 찾아 앞뒤를 구분하며 입고 있다. 싱글벙글 노래를 흥얼대는 재진인 자신의 허리치수보다 네 싸이즈나 큰 바지를 들어올렸다. 엷은 청색의 힙합바지가 재진이의 골반에 끼어지자, 재진인 수원이를 쳐다본다. "기분 괜찮지? 거북하지 않지?" "........." "이젠 돈같은 건 지불하지 않아도.." "책상위에 있어. 가지고 가." "........." "난 뒷끝이 없는 게 좋아." "........." "잠시 분위기에 빠졌을뿐이야." "은수원, 그게 아니야. 난.." "피곤해, 열쇠 잠그고 나가줘." "은수원!!" "........."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꺼야? 내맘 정말 모르.." "닥치고 나가! 내가 너처럼 게인 줄 알아?" 꼬인 어투에 재진이의 인상이 구겨진다.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수원이를 쳐다보다가 차갑게 입을 연다. "그래, 나 게이다. 젠장. 너 만나고 나 게이됐다. 됐냐??!!" 쾅하는 소리가 등뒤에서 차가운 바람을 일으킨다. 흥얼대던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열쇠 잠그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순간.. 분위기에 취했을 뿐이야. 그 이상은 아니야. 그 이상은...' 입술을 꽉 깨물어 버린다. 등뒤로 느껴지는 땀방울이 공기로 날라가면서 싸늘함을 느끼게 한다. 온몸에 남겨진 끈적끈적한 액체들. 선명한 재진이의 자국. '찾아오지 말란 말이야! 네가 자꾸.. 찾아오면.. 찾아오면 자꾸 너에게 빠져들게 되잖아. 네가 찾아오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길들여져 버린단 말이야. 그러니깐 찾아오지마. 이 양아치 같은..' 한움큼의 이불을 입을 막고 울먹여 버린다.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그의 철학에 손을 대기 싫은 것처럼.. '이재진. 이 나쁜 놈.. 널 만난 걸 저주해.' 식탁에 앉은 성훈이가 숟가락을 들고는 지용이가 끓여놓은 북어국에 손을 대었다. 뜨거운 국을 후후 불어가며 입안으로 들어보내는 모습이 귀였다. 지용인 그런 성훈일 쳐다만 본다. "야, 이게 국이냐? 왜 이렇게 짜? 소금이다, 소금!!" 전과는 다르게 투정를 부리는 성훈이의 모습에 당황해 하는 지용이. "그, 그.. 그렇게.. 짜?" "그래, 이게 국이냐? 바닷물이지?" "........" 지용인 숟가락을 들고 국에 손을 댄다. 국에서 시작되는 뜨거운 김이 지용이의 눈에 들어가 눈물이 나오게 만들어버린다. 지용이의 모습을 보고 눈물이 맺히려는 성훈이가 급히 젓가락을 쥐고는 보기만해도 매워 보이는 겨자에 회 한점를 넣고 가득 찍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기 시작하자, 눈물이 날만큼 맵다. "맛있어?" "매워." "물줄까?" 곧 일어나려는 지용이가 냉장고로 향하려 하자 성훈이 그의 손을 잡는다. "국.. 먹으면 돼."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성훈이가 어설프게 웃는다. "겨자 조금만 찍어먹지. 이 눈물 좀 봐." 성훈이의 뺨을 닦아주는 지용이의 엄지손가락이 좋다. "물 줘." "어?" "물 달라구." "어, 잠깐만." 일어서는 지용이를 보자, 성훈인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울어버린다. '울지 않을려고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나와. 자꾸만. 울지 않을려고 했는데. 지용아, 나 네 앞에서 정말 안 울려고 하는데.. 자꾸만.' 58)****** 보상. "어디가?" 아이보리색 외투를 걸치는 지용이가 단추를 여밀자 성훈인 들고 있던 책을 내동댕이 친채 지용이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어, 킴스클럽에 갔다오려고.. 내일은 연구소 나가봐야 하거든. 내일은 시간에 없어서 들리질 못할 것 같아서." "이 늦은 시간에 혼자가려구?" "응." 목도리를 목에 칭칭 매는 지용이가 현관 앞으로 가서 신발을 신자, 성훈이가 급히 달려나와 그에게 입을 연다. "잠깐만.. 기다려!!" "응?" 당황한 지용이가 성훈이에게 말을 걸어 보지만 성훈인 안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다. "성훈아!!" "........" 작게 불려보지만 성훈인 나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성훈아, 뭐 부탁할거 있어?" "........" "강성훈!!" "........" "후나!!" 아무런 대꾸가 없자 지용인 신을 벗고 거실바닥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순간. "우리 같이 가자!" 그가 활짝 웃고 있다. 해맑고 밝게.. 예전에 지용이 머릿속에서만 가득했던 그런 미소를 짓고 있다. "심야 시간대에도 사람들이 많다. 그지?" 쇼핑카트를 밀며 몇 발자국 앞서가던 성훈이가 이 물건 저 물건을 집어넣고 있었다. 식품코너에서 인스턴트 식품만 카트에 집어넣는 지용이를 보자, 성훈이가 집어넣은 식품들을 차곡차곡 진열대에 올려놓았다. "맨날 인스턴트 식품만 먹일거야?" "어?" "이러니 내가 살이 안 붙지." "........" "내가 안 먹는 이유를 모르겠어? 맨 날 이런 것만 해주니깐 내가 안 먹지." 성훈인 입을 삐죽거리며 카트를 밀고 야채코너로 다가갔다. 그리고 양파와 당근, 시금치. 그외 채소들을 카트속에 가득히 메꾸고 있다. "나.. 그 걸루 음식할 줄 모르는데." 자신없게 말하는 지용이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성훈이에게 말을 건넨다. "누가 너더러 음식하래? 네가 하면 재료들만 아까워, 아깝다구!!" 투정섞인 음성을 흘리고는 육류를 알맞게 잘라놓은 냉동고 앞에 선다. "돼지고기만 싫어하지?" "어?" "너 돼지고기는 안먹잖아." "어.. 어." 성훈이의 행동이 무척 당황스럽다. 보이지 않는 행동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지용인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다리가 얼어붙는다. '너 왜 그래?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지용아, 그러지말구 이번 참에 돼지고기도 한번 먹어봐라. 동그랑땡 해줄게. 아마 좋아 할거야." 싱긋 웃는 그가 돈육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지용인.. 얼어붙은 다리를 조금씩 떼며 은은하게 번져 오르는 미소를 손으로 막아본다. '매일 이래 줄 수는 없을까? 행복해. 지금.. 그냥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곧장 갈꺼야?" 이것저것 가득히 쇼핑을 하고 차 트렁크에 짐을 싣던 성훈이가 지용이 말을 건다. 지용인 그럴거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치. 그러지말구 우리 영화나 한편 보고 들어가자. 응?" "영화?" "그래 영화." "이 시간에 극장 오픈한곳이 없을 텐데." 아쉽다는 듯 지용이가 말끝을 흐리자, 성훈이가 작게 미소를 짓는다. "바보. 넌 심야 영화관도 모르냐?" 귀엽게 들리는 성훈이의 독특한 음성이 지용이의 가슴을 또 떨리게 만든다. '녀석. 오늘 왜 이러는거지?' 앞좌석 문고리를 잡고 차안으로 들어서려는 성훈이. "야, 그렇게 서있기만 할거야?" 변화.. 성훈이의 행동에 정리가 안 된다. 지용인 심야영화관을 찾아 차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어렵게 찾아 차를 멈춰 세웠다. "성훈아, 다왔.." 아까전 만해도 노래를 흥얼거리던 성훈이가 새근거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녀석. 피곤하면서 무슨 영화니?' 잔잔한 미소가 떠올려진다. 잠든 성훈이의 눈 끝에 물기가 어려있다. 쓸쓸해지는 마음이 추락하는 느낌이 든다. 지용인 자신의 외투를 벗어 성훈이에게 덮어주고는 차문을 열고 나왔다. 야심한 밤인데도 북적대는 거리. 차갑게만 느껴지는 거리에 나와 지용인 입에 담배 한가치를 물었다. '너의 변화.. 잠시 내게 머물며 추억을 만들어줄 생각이니? 지원이에게 가기 전에 내게.. 보상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내가 잘못될까봐. 위로라도 하는거니?' 차창으로 비춰지는 성훈이가 두눈을 꼭 감은 채 잠이 들어 있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지용일 춥게 만든다. 그나마 목에 감겨진 목도리가 그의 몸을 어설프게 나마 보호해주는 것 같다. '차라리.. 정떨어지게 행동해.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 널 보내고 싶어지겠끔 만들라구.' 깊이 흡입한 담배필터가 힘없이 부러져 있다. 지용인 필터를 확인하고는 바닥에 떨구어 버린다. "근데, 성훈아. 지원이 그 자식이.. 그 자식이 결혼을 했어. 널 정말 데려다 줄까 했는데.. 그 자식.. 결혼했다." 두 눈에 아려오는 건 성훈이를 떠나보내려던 슬픔이 아니다. 성훈이에게 막연한 기대를 심어준 자신이 비참해서.. 거짓말을 해야했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난다. "성훈아." 차창너머로 성훈이를 보려던 지용이. 두 눈을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성훈이의 시선을 느낀다. 그 두 눈엔 이슬이 가득 묻혀 있다. 어둠 속이라 보이지 않을거라 생각했는지 그 모습 자체를 지용이에게 비추고 있다. 게워내고 또 마시고 게워내고 다시 또 마시고.. "은수원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응?" 수원이의 술잔을 빼앗아 드는 정환이가 이제 그만 마시라며 소리친다. "쉬펄, 홀렸어." "어?" "자꾸.. 떠올라. 자꾸. 왜 연연해하는지 나두 모르겠어!!" 사흘째 소식이 없는 재진이 때문에 속이 바짝 타버린 수원이다. "홀려? 누구에게?" "그 자식.." 테이블 위로 얼굴을 반쯤 묻은 수원이가 정환이를 올려다본다. "그 자식이 누구데? 네 눈에 거슬리는 놈이 생겼냐?" ".........." "너보다 잘난 사람을 만난 거야?" "나, 아무래두.." "아무래두?" "사랑에 빠졌나봐." "헉---" 정환이 들고있던 술잔을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우울해하는 수원이의 시선에 난처해하는 것 같았다. "너, 설마?" "그래. 나 미쳐간다." 테이블위로 얼굴을 가리는 수원이의 두 눈에 뜨거운 액체가 스며든다. '젠장 그 망할 자식을 사랑하나봐. 그 양아치 새끼를!!' 59)****** 질투라는 것. "웬일이야? 이재진. 너, 오늘 왜 이렇게 마셔돼?" "........." 재진이 옆에 앉은 소년의 오른쪽 귀 피어스가 유난히도 불빛에 반짝거린다. 피어스만큼이나 반짝이는 두 눈동자. 아니마 특성이 다른 남자들에 비해 조금 많아 보이는 여성스런 헤어스타일. 그리고.. 그만의 섬세한 성격. 또한 그만의 분위기.. "재진이 너 무슨 고민있어? 너 고민 있는거야? 너 고민있지?" "........." 활달하고 장난끼 가득했던 재진이의 모습은 깊은 수렁 속에 감춰진 것 같았다. "재진아.." "우혁이랑 잘 되 가냐?" 술을 마시던 손이 잠시 멈칫하면서 토니를 쳐다본다. "우리 혁이랑은 한쌍의 원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냠냠. 그러지 말고 고민있음 말해. 내가 누구냡? 나 자칭 상담자 톤 이잖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소년이 얼굴을 드리민다. "안승호." "응?" "나, 게이.. 됐어." 힘없이 떨구는 말에 이어 입안에 가득 알콜로 젖어버린다. "게.. 게이? 네가? 이재진 네가..?" 믿어지지 않다는 듯 두 눈동자가 의아해 하다가 잠시 후 깔깔대며 웃기 시작한다. "말도 안돼! 이재진!! 큭크 키키킥~" "........." "이재진이 게이가 됐다구? 재진이 네가?" 카페안은 몹시 시끄럽게 변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황당한 빛을 띠고 있다. 그걸 의식했는지 토니는 바텐더에게 귓속말에 몇마디를 건넨다. 웅성대던 카페 안은 잠시후 조용해지고.. 오로지 두 사람만 남아 카페 안에서 흐르는 재즈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애인 생겼냐?" 아까와는 다르게 진지하게 묻는 토니. 재진인 피식 웃고는 술잔에 반쯤 알콜을 채운다. "어떤 녀석이야? 이재진의 철학을 무너트린 그 사람이?" "대단한 놈." "대단해?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야?" "응." "생긴 건? 미소년 분위기?" "........." 재진인 말없이 입술을 축인다. "진행이 어려운가 보네. 바람같은 이재진을 고민하게 만들고.. 흣." "달라. 내가 만난 사람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나보다.. 더?" 빙그레 웃는 재진이. "넘어오게 하는 방법이 있을거야. 방법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내가 써먹은 방법을 한번 시험해 보는 게 어때?" "방법? 무슨 방...법?" "질투!!" "질투?"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는 토니는 벌써 승리의 표정를 짓고 있다. "분명히 넘어온다. 분명히.. 하핫!" "내가 할게. 손 시럽잖아.." 야채를 흐르는 물에 담구고는 닦는 성훈이의 하얀손이 애처러워 지용인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한다. "내가 할게. 그러니까." "양파나 까줘." "........" 빙그레 웃는 성훈이가 지용이의 어깨를 집고는 식탁위로 앉혔다. "얌전히 양파나 까주셔. 알쏘?" 다시 개수대로 가서는 야채를 닦는 성훈이가 나즈막히 노래를 흥얼거린다. 토막토막 들려주는 그의 노랫소리가 좋다. 노래 제목을 물어보지 않고도 지용인 무슨 노래인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성훈이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지용인 성훈이가 하는 거라면 모든지 알아내고 또한 그것에 관련된건 모든지 좋아했다. 양파를 까던 지용인 성훈이가 들려주는 노래구절에 가슴이 찡해온다. “ 눈을 감아도 찾을 수 있어. 세상이 끝났어. 깊은 어둠에 묻힌대도..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내 뺨에 흐르는 그대 눈물을 그 사랑을... ” '지금 나 행복해도 될까? 성훈아.. 나 행복해도 된다고 생각해도 되는걸까?' 또 맺히려하는 눈물.. 지용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양파를 까면서 양파의 매운 성질 때문에 매워서 운다고 할수 있으니깐. 앙파만의 특이한 성질때문이라고... 훌쩍대며 눈을 비비던 지용이. "울어?" "아니." "모, 울고 있네." "아니라니깐." 또 하나의 양파를 집어든다. '지용아, 울지마. 왜 그렇게 울어대? 바보.. 이제보니 지용이 너 울보구나.' "동그랑땡 할 줄은 알아?" "그럼~" "언제 해봤는데?" "어, 지원형이랑 하와이 있을때.." 순간 실수했다 싶어 성훈인 물기 어린 손으로 입술을 막았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흐른다. "다 깠어?" 먼저 말을 건넨 쪽은 성훈이였다. 지용이의 눈을 보지 않는 성훈이가 하얀 속을 보이는 양파 두 개를 집어들고는 도마위로 올려 두었다. 그리고.. 칼질을 시작하는 성훈이. 입술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깨물며 눈물을 참으려고 했는데, 그의 눈물이 얇게 잘라놓은 양파위로 떨어진다. 멈칫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져가기 시작한다. "맵네. 거 참 맵다." 훌쩍거리며 양파를 다져가는 성훈이. 울어버린다. 매운 양파를 다진다는 이유를 댈 수 있으니깐. 울어버린다. "참 맵다." 울먹이는 음성. 칼질을 하는 성훈이의 뒤통수를 보며 지용이도 훌쩍거린다. '내가 널 안아줘야겠지? 성훈이 너 많이 아플거야. 지원이 녀석이 널 찾아오지 않으면.. 너 많이 아플거야. 그렇지?' 식탁을 집고 일어서는 지용이가 성훈이의 등뒤로 다가섰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성훈이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양파 다진 건 안 파나?" 가라앉은 음성이 힘이 없다. 여전히 울먹거리는 성훈이가 애잔하게 느껴진다. "양파 다진 것도 팔면 우리가 사줄텐데. 그치?" "그러게.." 똑깍 소리를 내며 다져지는 양파. 매운 향내에 두 사람은 보이기 싫었던 눈물을 보여버린다. 서로 다른 상처에 대한 눈물. 단지 양파의 향내가 맵다는 근거를 두고.. 두 사람은 울어버린다. '안 울어거야. 안울어. 지용아, 정말 안 울거야.' "그거 네가 해주라? 으~~~응?" "안돼!!" "어우우우우아~~ 네가 해 주라. 응??" "안됀다니깐!!" "야야야야야, 된다고 해 된다고!!" "안----돼!!" "된다된다된다!!" 체면을 걸 듯 토니의 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재진이가 애교스런 음성으로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안돼!!" "된다!!" "안돼!!" "된다니깐!!" "안돼!!" "돼!" "어휴- 미치겠네. 정말.." "내가 한 끈질김 한다는 거 너 알지?" 눈웃음을 치는 재진이가 사악하게 입맛을 쩝쩝거리고 있다. "우혁이가 알게되면 나 죽는단 말이야!!" "혁인 내가 설득할게. 응? 해 주라. 어?" "안돼!!" "해줄거지?" "아~~~~~안돼!! "친구 좋은 게 모냐? 이참에 내 친구 구실 좀 열라 해줘잉~" "이게 정말 미쳤나?" 재진이의 행동에 적응을 못하는 토니가 팔뚝에 바싹 일어선 털들을 보고 연신 쫑알거린다. 미친 이재진이라고. "해줄거지~~ 잉??" 재진이의 어색한 애교는 토니의 굳건한 마음을 돌려버린다. "너도 인간이냐?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나 참." "잘되면 내 근사하게 한턱 내마. 킬킬." "어우~ 어떻게 이재진을 말려?" 단념했다는 듯 한숨을 길게 쉬는 토니는 구겨진 자켓을 매만지고 있다. "오늘 카페 봐줄까? 우혁이랑 데이트나 하고 와. 호홋." "미친놈." 불꺼진 집이 더 외롭게 만든다. 들어서자마자 웃옷을 벗고 거실바닥에 앉은 수원이의 눈에 냉장고가 들어온다. 비어있던 냉장고를 보고 실망하던 재진의 얼굴이 떠올려지는 수원이. '쉬폴 병이다. 병.' 다시 일어서서 웃옷을 입는 수원인 지갑을 들고 현관에 서서는 신발을 신고 있다. RRRRRRRRR-------- '혹시 이재진?' 신던 신발을 그대로 신고 수화기를 집어드는 수원인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여보세요?" [나다.] 차분하게 들리는 음성은 기다리던 재진이의 음성이 아닌 지원이의 음성이다. "쳇, 바쁘실 형님께서 왠일이시지?" [비꼬지마.] "아직도 기세가 당당하군. 이제 돈방석에 앉았는데 하찮은 내게 전화를 주시고?" [그 애. 기억하지?] '그 애?' "뭘 말하려는 거야?" [그 애. 네 집에 있었던 아이.] "우리 집에 드나든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기억 못하겠는데." [강성훈. 성훈이..] 한숨어린 음성이 수원이의 동공을 커지게 만든다. 술을 마셨는지 숨소리가 고르질 않는다. "시시콜콜한 얘기 주절거릴 거면 이만 끊어. 나 지금 바쁘다구!" [그 녀석. 네 아파트 같은 동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 녀석에게..] "그 생활 청산한 거 아니였어? 이제 형수한테나 잘해 보시지 그래!!" 잔뜩 짜증스레 말해 놓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수원이. [기다리라고.. 전해줘.] ".....?" [곧.. 간다고.] "그 자식에게 직접 전화해서 말해!! 왜 나한테 떠드는거야??!!" [......] 한참동안 말이 없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손. 멀어지는 음성이 몇 마디 더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이 전화한 것을 무척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흐릿하게 들리는 지원이의 음성은 몹시 말려들어 잘 알아 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 단어만은 뚜렷하게 들려 수원이를 멍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랑한다는.. '뭐야? 은지원. 지금 너 뭐라고 짓걸인거야?' 60)****** 원하는 만큼, 바라는 대로. "올 겨울엔 눈보기 힘들다." 베란다 창에 기대있는 성훈이의 눈이 별빛에 반짝이는 건지 아니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건지. "........" "눈이 보고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성훈이가 작게 속삭이듯 말한다. 음악은 그들이 있는 공간 구석구석 울려퍼지고, 커피잔을 매만지던 지용이가 베란다에 서서는 성훈이를 지켜보고 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커피향이 좋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입가에 미소를 담은 그가 슬퍼 보이지 않았다. 노란색 박스티가 그에게 썩 잘 어울린다. '빨간색으로 입혀놔도 이쁠거야. 나중에 너하고 똑같이 생긴 마네킨이나 수십개.. 아니 수백개 만들까? 만들어서 갖가지 색으로 옷을 입혀놓고 살까? 비록 넌 아니겠지만.. 행복할거야. 너와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지용아." "........" "지용아!" "........" 생각 속에 묻혀진 채 성훈이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지용이. '이쁠거야.' "고지용!!" "어?" 그제서야 성훈이의 음성을 파악하고는 긴장하듯 성훈이를 쳐다본다. "뭘 그렇게 생각해?" "어..어?" "치. 말까지 버벅이네." 한때는.. 자신도 누군가의 말에 버벅이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 지용이의 모습에서 오래 되지 않는 기억속의 자신을 들여다본다. '이상하지. 지용아, 지금 네 모습에서 날 보는 것 같아. 내 앞에서 자신없게 말하는 널 보면.. 예전의 날 보는 것 같아.' "왜.. 부른거야?" "......." "뭐, 필요한 거 있어??" "춤추자." "어?" "춤추고 싶어." "춤?" 지용이 앞으로 다가선 성훈이가 지용이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은 자신의 허리에 놓고, 자신의 팔은 지용이의 목을 감는다. 하얀 얼굴이 음악에 취했는지 두 눈을 감고, 미미하게 움직이다가 발을 떼고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감미롭게 들리는 노래의 음이 두 사람의 몸짓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노래가사는 왜 그렇게도 서글픈건지.. 두 눈을 감았던 성훈이의 얼굴이 지용이의 심장위로 떨구어진다. "지용아, 참 편안하다." 흘리듯 말하는 성훈이의 작은 음성에 지용인 멈칫한다. 심장위로 고개를 묻은 성훈이도 멈칫한다. "사랑해. 성훈아." 달빛아래서의 두 사람. 조심스러운 입맞춤.. 답답하다.. 창문을 열어놓았지만 불어오는 바깥공기에 답답한 마음은 가라 앉혀지질 않는다. 오로지 답답함만 느낀다. 창틀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다가, 아파트 구석구석을 훑어보기도 하다가.. 지용이가 나가고 나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창틀에 기대있는 성훈이. 사람들이 개미만큼 작아 보인다. '저곳에 섞이고 싶어.' 쓸쓸함이 밀려든다. 작게 웅크린 무릎이 쥐가 난다. 한 자세로 고정된 탓인지 척추에도 무리가 온 모양이다. 창에서 몸을 세운 성훈이가 작게 한번 미소짓고는 창틀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방안에 걸려있는 잠바하나를 집어들고 집밖으로 향한다. 메마른 가지를 보면서 사색에 잠겨있는 지용이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자료를 집어든 여자아이 하나가 지용이에게 머그컵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말없이 미소를 짓는 지용이를 읽을 수가 없다. "선배?" "......." "선배? 지용선배?" 몇번을 더 불렸을 때 그제서야 뒤돌아서는 지용이가 여자아이의 동그란 안경테를 주시했다. "눈이 쌓인 곳이 아직 있을까?" "네?" "눈 말이야. 하얀 눈.." "네? 눈..이요?" "응. 눈. SNOW.." "하핫." 냉정하게만 비춰지던 지용이의 감성적인 말에 여자아이는 당황해 하다가 눈웃음을 치고 만다. "선배 그런 것도 알아요?" "......." 책만 들어다 보던 눈동자가 차갑게 느껴지기는커녕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대관령 쪽으로 가면 아직 눈이 녹진 않았겠죠." "그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어?" "그럼요. 제가 약도까지 그려 드릴 수 있는 걸요. 그런데 선배, 왜 갑자기 눈을 찾아요?" "누가 보고 싶어해서." "선배 혹시.. 연애하세요?" "응." "정말, 연애하세요? 정말? 선배가?"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지용이를 쳐다보는 여자아이는 쉴새없이 입방정을 떨어댄다. 머그컵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이 지용이의 긴 속눈썹을 간지럽힌다. '눈밭에 섞인 그 녀석을 보면 어느 게 하얀건지 몰라 볼거야. 눈을 보고 싶어해. 성훈이가.. 우리 후니가 눈을 보고 싶어해.' 손에 귤을 가득 들고 아파트 벨을 눌러대던 지용이가 몇번을 눌러도 기척이 없자, 온몸에 싸늘함을 느낀다. '설마.' 들고 있던 귤 알들은 아파트 계단을 요란스레 굴러대고 불안하게 떨려대는 손은 열쇠는 따지 못하고 있다. 자꾸만 마른침을 삼켜대는 지용이가 한동안의 시름 끝에 아파트 문을 연다. 문을 열자, 텅빈 아파트 거실로 불어오는 바람이 창문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설마.. 설마 떠난거야? 설마.. 지원이 녀석에게.. 간 거야? 강성훈. 성훈아..'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붙들고 안방으로 향하는 지용이의 몸이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주저앉고 싶어한다. 안방의 형광등을 켜놓고, 한참을 둘러보다가 벽에 기대 주저앉는 그의 눈에선 눈물이 나오질 않는다. "내게 보여줬던 건.. 내가 불쌍해서 그런거야. 내가 혼자 남겨지면 내가 잘못 될까봐서.. 잠시나마 내게... 넌.. 잠시동안이라도 날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 그런거야." 넋을 빼고 중얼거리는 지용이. 방바닥을 짚었던 손을 들어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 한다. 머리가 아파온다. 불과 1시간 전만해도 빙그레 웃던 그는 갑자기 느껴지는 두통에 참기가 힘이 든다. "희망을 보여 준거라고 착각했어. 고지용. 등신같이 그 자식이 하는 행동에... 그 자식을!!" 웟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던 손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줌 잡고 있다. 자악하듯이 엎드린 그가 바닥으로 머리를 부딪혔다. 참기 힘든 두통이 지용이를 괴롭힌다. 성훈이라는 두통.. 날이 어두워 졌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커피숍에 앉아 있었던 성훈이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는 두눈을 동그랗게 뜨며 달려나갔다. '지용이 녀석 집에 들어 왔을텐데.. 전화를 할까?' 밖으로 나오자마자 비춰지는 공중전화 부스를 쳐다보고는 부스 안으로 들어선 성훈이. 수화기를 들자마자 고장인지 동전을 먹질 않는다. "에잇! 하필이면 이럴 때 고장이야!" 신경질 적으로 몇번 두들기고는 부스를 나서는 성훈이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제길, 돈이 얼마 없잖아.'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이촌'이란 글귀가 적혀진 버스를 보자, 남겨진 동전을 내고 버스에 올라탔다. '지용아, 엉뚱한 생각하지마. 말없이.. 널 떠나지 않아.' 61)******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남편이라고 불러야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손가락 하나도 데질 않는다. 그저 위스키 잔만 들고 서성거리는 남편. "지원씨, 이제 자야 할.." "........" 지원이가 손을 저으며 은주의 말을 막아 버린다. "매일 술만 마셔대면.." "신경쓰지마." 화가 나지만 자신이 먼저 좋아했다. 은주는 일어서더니 지원이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내려놓았다. "지원씬 제가 싫어요?" "........." "왜 제게 다가오질 않죠? 제게 매력이 없나요?" "........." 지원이의 목으로 느껴지는 은주의 속눈썹 때문에 간지럼을 느낀다. "전, 지원씨가 좋아요. 아니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에게 빠졌는걸요." 코끝을 자극시키는 은주의 버버리 향기. '녀석에겐 향기가 없어. 멍청하게 웃어도.. 예쁘다.' 꾸밈이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성훈이의 용기를 볼때면 웃음이 나왔었다. 자신의 목을 감고 있는 손이 지원이의 얼굴을 돌리려 한다. "지원씨.. 오늘은.." "성훈이.. 성훈이처럼 웃을 수 있어?" 차갑게 느껴지는 눈동자가 은주를 비웃는 듯 쳐다본다. '넌 성훈이 자리를 넘볼 수 없다' 는 의미의 눈빛.. “ 웃기지? 내 머릿속에 온통 그 녀석 생각으로만 가득해. 그 녀석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 녀석으로만 가득해. ” 두정거장이나 지나쳐 내렸다. 정신없이 뛰어대긴 했는데,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떨어지는 체감온도를 느끼기보다는 아파트에 혼자 있을 지용이가 내심 걸린다. 뛰고 또 뛰고.. 멈추지 않고 뛰던 발이 아파트 단지내로 들어섰다. 숨이 멎일 정도를 뛰어 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던 성훈인 15층에서 멈춰있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확인하고는 비상구로 들어간다. 두칸 세칸을 건네뛰며 올라선다. 그리고 격렬한 운동을 한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젖어 버린다. 현관앞에 섰을땐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옷소매로 닦아내고는 키를 들고 문고리를 잡았다. 따지 않고도 그냥 열리는 현관. 안방에서만 흘러나오는 형광등 빛이 성훈이를 맞이하고 있다. "지용아!" "........" 헐떡거리는 숨을 안정시키지도 않고 그를 부른다. "지용아." "........" 문이 열려 있는걸로 보아 지용이는 있을텐데도 아무 대꾸가 없다. "지용.." 신발을 급히 벗고는 안방으로 들어선 성훈이의 눈으로 축 늘어진 지용이가 비춰진다. 시선을 아래로 깐 채 가만히 앉아 있는 그가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뭐야? 있으면서 문도 안 잠그고.." ".........." "이러다 강도라도 들면 어쩔려구 그래? 도대체 정신이 있는거야?" ".........." 대꾸가 없다. 말 좀 해봐. "근데.. 넌, 언제 들어 온거야?" 잠바를 침대위로 던지듯 올려놓고는 지용이를 내려다본다. 꼼짝 않고 무언가에 잠겨 빠져 나오지 않는 지용이. "지용아?" 성훈인 쭈그러 앉아 지용이와 눈 높이를 동일하게 맞춘다. 불안한 듯 이리저리 굴러대는 지용이의 눈동자가 보는 이마저 불안하게 만들어 버린다. "지용아, 고지용!" ".........." 손을 뻗어 지용이의 어깨를 두들겨 본다. "야, 고지용!!" ".........." 두들기던 손이 지용이의 몸을 흔들어댄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 "그 새끼한테 갔었지." "지..용아." 쓸쓸하게 웃는 그의 입가가 살며시 들이어 진다. 망각의 상태로 접어들려는 듯 성훈이를 바라보지 않는 눈동자가 성훈이로부터 멀어지고 싶어하는 듯 하다. 아니 자신이 속한 현실에서 멀어지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새끼한테 가서 뭐하다가 기어 들어온거야? 아주 거기서 살지." "........" 삐죽거리듯 입술을 움직이는 지용이가 고집스럽게 손톱을 물어뜯는다. "내가 불쌍하디? 내가 불쌍해서 찾아 온거야? 내가 죽기라도 할까.." "그만." "내가 죽어서 니들 괴롭힐까봐?" "그만해." "내가 죽어서 그 자식 헤꼬질이라도 할까봐?!!" "제발 그만!!" 마른 입술이 떨려댄다. 지용이의 예쁘던 입술이 하얗게 말라 엷은 핑크빛으로 보인다. 색을 잃어버린 지용이의 입술이 떨려댄다. 입을 계속 열면 숨이 넘어 갈 것처럼 떨려댄다.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 나만 죽으면 되잖아! 내가 없어지면 강성훈 괴롭힐 사람은 없어 질 테니깐. 나만 없어지면.. 나만 세상에서 퇴장해 주면 되는거지??!!" "그만해. 제발." "어떻게 죽어줄까? 동맥 끓을까? 투신 자살할까? 아니면 독약 먹고 죽을까?" "그만!!" "그래 약 먹고 죽는게 났겠다. 수면제 이빠이 먹을까? 황산구리 먹고 죽을까? 아비산을 쳐먹을까? 것도 아니면 모르핀을 먹을까? 아니야, 확실하게 죽으려면 염산이 더 좋겠다. 킬킬.." "고지용! 그만 하란 말이야!!" 짝하는 소리가 차갑게만 느껴지는 공간에 울러 퍼진다. 지용이의 볼 위로 닿았던 성훈이의 손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세게 때린 볼이 따갑지가 않다는 듯 여유를 가지고 있다. 성훈이를 쳐다보는 지용이가 현실로 다시 들어오는 것 같다. 차갑게 쏘아보는 눈동자. 그러다 엷은 핑크빛이 하얗게 일어나면서 소리를 낸다. "훗..후후.. 하하하하...핫.." 자지러지게 웃는 지용이가 불안하게만 보인다. 위태스럽게 웃어 제끼는 그가 바닥을 쳐가며 웃는다. "웃지마." "하하하핫.." "웃지마, 고지용!!" "하하하하하하핫!!" 성훈이의 음성이 안 들리도록 더 크게 소리를 낸다. 저 웃는 소리가 엷은 울음소리처럼 들러온다. 엷은 울음보다 더 애절하게 통곡한다. 처절하게.. "지용아, 제발.." 지용이를 끌어다가 안는다.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 때문에 꽁꽁 열어버린 지용이의 몸을 안는다. 그가 춥지 않게 안아버린다. 잠시 후 웃음소리는 잠잠해 지고 안겨있는 지용이가 울먹이는 음성으로 성훈이에게 말을 토해냈다. "차라리.. 정떨어지게 행동해. 너란 애.. 정말 재수없다고 느껴지게. 강성훈이라는 인간. 다시는 보고 싶지 않게.. 그렇게.." "........" "내 머릿속에서 강성훈이란 인간은 생각하고 싶지 않게. 그렇게 만들어. 그렇게.." "......." "제발 널 가질 수 있다는 희망따윈 심어 주질 말란 말이야!!" “ 지용이 몸이 차네.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지용아, 넌 추워하지마. 내가 네게 준 상처는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거지? 너의 삐뚤어진 마음을 어떻게 펴줘야 하는걸까? 너에게 진 빚들이 너무 많아. 너의 마음 때문에 내가 더 아파와.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난 가진 게 없는데.. 난, 가진 게..... ” 성훈인 지용이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몸을 떼어낸다. 고개를 숙이고 속눈썹을 떨려대며 흐느끼고 있다. '나만 울보인줄 알았는데, 지용이도 울보네.' 살며시 띄어내는 미소가 예쁘게 보인다. 지용이의 고개를 들어올리는 성훈이의 손가락이 따뜻하게 달구어있다. 성훈이의 행동에 침을 넘기는 마른 입술. "날 사랑하니?" "........." 성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지용이가 동그란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왜, 날 사랑하지?" "........." "대답해봐. 왜 날 사랑하는지.." "........." "듣고 싶어. 알고 싶어." "........." "왜 나같은 놈을 사랑해? 왜 나같이 못돼 먹은 놈을.." "........." "내 곁에서 상처만 받았으면서." "........." "왜, 날 사랑해?" "너니깐. 강성훈이니깐. 나에겐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너니깐.." ― 성훈이의 손에 의해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단추알들. ― 성훈이의 손에 이끌려 바닥으로 깔려지는 하얀 시트. ― 성훈이의 인도로 하얀 시트로 눕혀지는 지용이. “ 너한테 난 지금으로서는 십만이나 되는 다른 인간과는 별로 다를 게 없는 사람일뿐이겠지. 하지만 내가 너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떨어질 수 없게 될거야. 너는 내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이 되는 거고 나는 네게 있어서 둘도 없는 사람이 되는거니까. ” 62)****** 현재진행형 & 과거진행형 "외출시엔 쪽지라도 꼭 적어놓고 나가야돼? 알았지?" 성훈이의 손길은 묘약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손길 하나로 지용이가 험악하게 변했다가 온화하게 변하기도 하니깐. "응. 알았어." 하얀 시트를 걸치고 나온 성훈이. 하얀 잇속을 반짝이게 하는.. 보기만해도 달콤할 것 같은 타액들. 어깨에서 시트가 살짝 흘러내려 하얀 피부를 드러내 놓는다. 지용이에게 성훈이 자체는 유혹. 나가려던 지용이가 갈팡질팡. "너만 보면.. 난 미칠 것 같아." 열었던 현관을 지용인 다시 닫아버리고는 성훈이를 끌어다가 그의 입술에 입을 댄다. 어깨를 쓸어 올리며 하얀 피부를 더듬는 지용이의 손이 행복하기만 하다. “ 허공을 바라보며 짓걸이기도 했어. 성훈이는 남자다. 성훈이는 나와 같은 동성이라는.. 잊으려고 수도 없이 생각도 했어. 이러면 안 된다고 고민도 했었어. 그런데.. 난, 벗어날 수가 없었어.” 지용이가 연구소에 가고 혼자 남겨지는 성훈이. 오랜 시간을 쭈그려 앉아 엉덩이에 쥐가 날텐데도 그렇게 앉아 있다. 일찍 들어오겠다고 웃으며 나간 지용이를 떠올리려 하지만.. 성훈인 어느새 지원이의 추억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제저녁의 편안함은 사라져 버리고 우울하다 못해 가슴이 답답함을 느낀다. '형을 잊을거야.' 일어서려는 다리가 몹시 저려온다. 주먹을 쥐고 무릎을 몇번 두들겨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서서는 무슨 옷을 걸친까? 고심하지도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을 어깨에 걸친다. 하얀색 파카는 그의 얼굴을 더욱 하얗게 보이게 만든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에서 신을 신으려던 성훈이가 다시 신을 벗어 놓고 주방으로 향한다. 준비된 듯 눈에 보이는 메모지와 필기구로 몇 글자 끄적거려 본다. 그리고 냉장고 장식핀으로 고정시켜 놓고 다시 신을 신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 '나가면... 어디로 갈까?' 저려오는 가슴이 성훈이의 뇌를 자극시키려 한다. 울지 않으려는 듯 눈을 꼭 감고 현관문을 열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거야. 아.마.도..' "지금 연락해." "누구한테?" 토니를 바라보는 재진인 눈을 깜박거리며 묻는다. "누구긴 누구야? 네 놈이 꼬실 놈이지!!" "아하~ 수원이." "아무튼 사랑이란 멀쩡하던 인간도 멍청하게 만든다니깐." 토니의 말에 하핫거리며 웃다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본다. "근데 넘어 갈까?" "어휴--- 확실하다니깐." 오늘따라 신경 쓰며 입고 나온 푸른벨벳의 세미정장이 그에게 썩 잘 어울린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토니가 입을 삐죽거리며 몇번째 물어오는 재진이에게 푸념석인 어투로 말한다. "쳇, 토니안 너 맞선보러 나가냐?" 잡지책을 들여다보던 우혁이가 못마땅하다는 듯 토니를 갈구고 있다. 그런 우혁이에게 어색하게 미소짓는 토니. "내 의지하고는 상관 없다는 거. 쬐금도 없다는 거 알아줘. 알지?" 그리고 다시 재진일 노려보는 토니. "네놈이 내 친구라는 걸 하늘에 대고 원망하고 싶다." "하핫." 발렌타인 데이를 실감나게 만드는 명동거리. 시끄러운 거리 위를 걷는 수원이가 지나가는 여자들이 들고 있는 예쁜 쵸콜릿 바구니에 시선을 빼앗긴다. '오랜만에 연락도 했는데, 초콜릿이나 사줄까?' 색색으로 예쁘게 포장된 쵸콜릿들이 수원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거 얼마죠?" 미리 포장된 바구니를 쳐다보며 묻는 수원이에게 황당하듯 쳐다보는 여종업원. "네? 초콜릿 사시게요?" 황당하다는 투의 반문에 수원인 포장된 초콜릿 봉지에 시선을 돌린다. "아니요. 아닙니다." 다시 복잡한 거리에 몸을 섞는다. '쉬펄. 발렌타인 데이 때 남자가 초콜릿 사면 안되나? 왜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야!' 약속시간은 아직도 45분 가량이 남았다. '제길. 왜 이렇게 일찍 나와서 추태냐! 은수원. 은수원? 핫, 내가 날 직접대고 은수원이라고 호칭했네.' 가려지지 않는 웃음. 아마도 재진이와의 약속때문이 아닐까? 함박 웃음을 보이던 그에게.. 낯설지 않은 얼굴이 비춰진다. '혹시.. 강성훈?' 쵸콜릿을 아무 거리낌없이 골라 드는 그가 신기하게만 비춰진다. 성훈이 옆에 다가서서는 말을 걸 기회를 노리는 수원인 성훈이의 얼굴이 어떤 빛을 띄는지 관찰하는 것 같다.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성훈이가 몸을 돌리려는 걸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수원이 몸에 부딪혀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진 초콜릿 때문에 두 사람은 허둥지둥 바닥에 흩어진 초콜릿을 주워 담고 있었다. 아무말없이 주워 담는 하얀 얼굴이 저번보다 더 야웠다는 걸 느낄 수가 있다. '이젠 뼈밖에 남질 않았구만.' 속으로 중얼거리다 일어서려는 성훈이에게 나즈막히 말을 걸어본다. "나, 못 알아보겠어?" 수원이를 내려다보는 성훈이의 눈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고개를 까닥거리는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세우며 어설프게 미소를 짓는다.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첼로 선율에 귀가 기울려 지질 않는다. '클래식이 싫어.' 조용히 눈을 감고 알수 없는 작자의 첼로선율에 귀를 기울리던 지용이가 떠올려 진다. 클래식만 고집해서 듣던 지용이의 편안한 얼굴. 대중가요을 접하지 않던 지용이가 성훈이에게 건네주던 서태지 CD들. '왜 난 너에게 절대적일까? 언제부터 나란 존재가 너에겐 절대적이 됐을까?' 내내 돌려대는 커피잔.. 하얀 손가락의 손톱들이 하도 뜯어먹어서 손톱살이 깊이 숨겨져 있었다. "그땐 실례가 많았어요." "........." 입을 먼저 연 쪽은 성훈이였다.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창백한 얼굴의 그려진 긴 그림자는 느낄 수가 있다. "괜찮아?" "......." 수원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성훈이가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다. 추운 듯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싼 그가 애처롭게 보인다. "그 자식 결혼식 때 난 가질 않았는데.." "........" 커피잔을 내려놓는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떨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급히 내려놓는다. 수원인 다시 입을 열려다 초콜릿이 든 바구니에 시선을 두었다. "아, 이거요." "누구 줄 사람.. 있는거야?" 내심 지원이를 생각해서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훈이 얼굴 가득히 그를 조이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으므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성훈인 수원이가 묻는 말에 답은 하지 않는다. 오로지 고개짓. 끄덕끄덕.. "지원형, 축하한다는 말도 못했어요.." "........." "형과 만나게 되면 전해 주세요. 결혼 축하한다고.. 행복하게 살라고요." 어색하게 웃는 그의 미소가 부자연스럽다. "지원이가.. 전화했는데." "새로운 사람이 생겼어요. 이 초콜릿 주인이죠." "그...래."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저밖에 몰라요. 제가 없으면 못사는 사람이래요." "........." "저도 그가 없으면 살수 없어요." "........." "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 빠르게 입을 놀리던 성훈이가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다. 유쾌하고 그늘이 없는 것처럼 낭낭하게 말하려 해도 그는 슬프게 보인다. 서툰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또 다시 커피잔을 돌려대는 손놀림.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음악은 두 어 차례 바뀌고.. 눈을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보던 성훈이가 커피잔에서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일어나야 겠네요. 약속.. 있거든요." 커피잔에서 풍겨 오르는 향이 성훈이의 옷깃에 스며든다. "저기.. 지원이가." "지원형에게 정말 행복하라고 전해주세요. 꼭.. 행복.. 하라고." 일어서서 커피숍을 빠져나가는 그를 쳐다만 본다. 초콜릿 바구니를 들고 쓰러질 듯한 걸음으로 빠져나가는 쓸쓸해 보이는 사람. '하핫.. 은지원. 아주 재밌게 됐는걸. 네놈이 무너지는걸 구경할 수 있겠어. 크큭..' 커피숍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쓰레기통에 초콜릿 바구니를 던져 버렸다. 번져 나오는 눈물을 닦아 내지만 자꾸 흘러내린다. "제길.. 흑..흐흐." 쓰레기통에 안겨진 초콜릿 바구니는 지원이를 떠올리며 습관처럼 사버린 것이다. 이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눈물을 토해버린다. '어쩌다 난 여기까지 흘러들었지? 날 이렇게까지 만든 사람이 누구야?' 자문의 답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건물 벽에 기대 울먹이는 성훈이가 흐느끼며 주저앉아 버린다. "형을 잊을거야!! 나 강성훈에겐 은지원이란 사람따윈 존재하지 않아!! 더 이상 형을 생각하지 않을거야!! 이젠 형에게서 벗어날거야..!! 형에게서.. 은지원에게서." “ 하얀 공간.. 온통 하얗기만 한 그 방에 형은 내 손을 잡아끌고는 문을 잡궈 버렸어. 들어서자마자 내 옷을 벗겨내는 형을 밀칠 수가 없었지. 형이 무섭기도 했지만.. 형이 잡은 내 손이 너무 따뜻했거든.. 늘 차갑기만 하던 형이 소중하게 내 볼을 감싸는 것도 좋았고.. 내 몸 구석구석을 자극하는 것도 좋았어. 날 쳐다보지 않던 형이 나만을 쳐다보는 게 좋았고.. 내게 입술을 맞춰 주는 것도 좋았어. 그때.. 정말 따뜻했어. 그 따뜻함이 좋아서.. 그냥 형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어. 아니.. 형의 움직임이 멈추질 않았으면 했어. 나, 형이 좋았거든. 그리고.. 사랑했거든..... ” 63)****** 거짓말 같은 시간. 성훈이라는 사람과 헤어지고 담배가 생각나서 편의점에 들어가 초콜릿을 집어들었다. 언제나 집어드는 건 키쎄스.. 하지만 오늘 내가 집어든 것은 블랙로즈라고 적혀진 정사각형모양의 초콜릿이다. '녀석 만나면 줘야지.' 왠지 뿌듯한 마음으로 재진이와 약속한 카페로 향한다.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블랙로즈를 받고 녀석은 꽤나 좋아할 것이다. '과연 좋아할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발렌타인 데이 날 초콜릿 챙기는 거 재진이 녀석은 알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난 재진이가 있는 테이블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두리번거리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녀석을 보고 있다. 블루블랙의 머리결. 어울린다. 블루블랙. 하지만 난 녀석 옆에 딱 달라붙어선 날 빼꼼히 쳐다보는 녀석을 주시한다. '저 기분 나쁜 녀석은 뭐야?' "뭐 시킬까? 수원인 넌 닥터페퍼만 마셨으니깐, 그거 주문할까?" 재진인 수원이의 눈을 보며 묻는다. 수원이의 얼굴이 약간은 굳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옆에 붙어서 잘도 떠들어대는 토니의 조용조용한 음성이 재진이를 간지럽힌다. "진아, 난 레몬에이드 마실래." 간지럽게 들리는 음성. 수원이의 얼굴이 더 굳어져 버린다. 재진이 옆에 앉아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있는 토니의 갈색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쉬폴. 날 왜 불러 낸거야? 이재진!' 주머니 속에서 손을 꺼내지 않은 수원인 사각형모양을 형이상한 모양으로 만들어 버린다. 알 수 없는 화가 끓어오른다. "난 녹차 마실래.." "녹차? 수원이 넌 녹차 싫어하잖아??" "내가 마시고 싶은 거 마신다는데 왠 참견이야?"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 수가 없다. 열이 올라 수원이의 얼굴이 붉어져 버린다. "진아, 근데 이 사람 누구양?" "응. 은수원이라고.." "전 장수원이라고 해요. 장.수.원." 입술을 삐죽거리며 퉁명하게 내뱉는 눈동자가 재진이만 노려보고 있다. "어. 어, 장수원이라고 전에 말했던 친구야." '친구??' "진아, 내 소개도 해줘." 재진이의 이마위를 덮고 있는 앞머리를 가지런히 만져주는 토니의 손놀림이 보기가 싫다. "어, 수원아 이쪽은 어제 만난 토니안이라고. 전부터.." "안녕하세요." 토니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저 재진이를 보며 입술에 압박만 줄 뿐이다. "진아, 이거 까줄게. 달콤한 게 올매나 맛난지 몰랍." 무슨 대화를 하는지 내용이 없다. 수원인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듣고 한 귀를 흘리고 있었다. 책을 많이 읽었는지 주절주절 대며 하는 얘기들은 재미는 있다. 테이블위로 올려놓은 커다란 초콜릿 상자가 수원이의 미관을 찌프리게 만든다. 게다가 자기 앞에서 초콜릿 포장을 까서 재진이 입속으로 집어넣는 토니의 행동이 수원이의 기분을 거북하게 만들어 버린다. '쉬폴 간다고 할까? 약속있다고 하고. 더 이상 앉아 있기 싫어. 토할 것 같아. 거북해..' "수원씨도 좀 드실래요? 진이는 단걸 싫어하거든요. 이거 드실래요?" 너무 예쁘게 포장해서 까먹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토니가 건네주는 초콜릿을 손안으로 장난만 치다 재진이가 꺼내놓은 담배에 시선을 둔다. "진아, 난 개인적으로 니가 보라색으로 머리 염색했을 때가 젤 좋아." "그래?" "그때 혜화에서 춤추는데 너 정말 멋졌어. 내 이상형이얍. 넌. 잉~" "하핫, 고만 띄워." "정말 이라니깐. 넌 비행기 태워서 둥둥 떠올린다 해도 아까울게 없는걸. 모~" "하하핫." 머리를 긁적이며 토니의 어깨에 손을 얹이는 재진이의 행동에 미관이 찌프러진다. '제길.' "수원씬 우리 진이 춤추는 거 봤어요?" "아니요." "진이 춤 정말 잘 춰요. 하늘을 나는 것 같다니까요. 진이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히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에궁~" 토니의 음성에 웃기만 하는 재진이가 얄미워 보인다. '병신 팔푼이같이 웃기는.. 정말 역겨워 죽겠네. 애인 만들어 놓고, 날 사랑해? 개.자.식!!' "진아, 아~~~~ 해봐." '젠장. 약속있다고 가버리자. 그런데.. 왜 발이 안 떨어져?' 초콜릿을 까서는 재진이 입속으로 넣어주는 토니를 한번 쳐다보고 재진이의 반응을 살펴보던 수원이.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저 실례 좀 할께요." 화장실로 급히 들어와선 세면대의 물을 틀어놓았다. 콱콱 쏟아지는 수도꼭지의 물이 수원이의 옷에 튀어 올랐다. 손에 쥐고 있는 토니가 건네준 초콜릿을 신경질 적으로 쓰레기통에 쳐놓고는 주머니에 있는 블랙로즈도 꺼내 들었다. "쉬펄새끼 뭐? 날 사랑해? 날 사랑한다면서 저 딴 새끼나 끌고 나와? 개자식!! 개새끼!!" 주먹으로 거울을 쳐대던 수원이가 세면대에 얼굴을 묻는다. 신경 써 가며 머리를 정돈했는데. 차가운 물이 수원이의 얼굴을 점령한다. '허---- 발이 떨어지질 않아. 저 새끼랑 키스도 할까? 설마 자기도 하는거야? 이재진.. 나, 너한테 뭐냐? 날 사랑한다는 말. 그거 장난이였냐? 날 가지고 장난 친거냐?' "어떤 것 같애? 수원이 말야." "얼굴이 굳어진 것 같더라." "저 녀석 그래도 꽤 오래 앉아 있네. 내가 누구랑 같이 있으면 곧바로 일어나 버리거든. 그나저나 너, 이런면도 있었냐? 왠 애교가 그렇게 철철 넘치냐?" "칫." "한 분위기만 잡던 토니안이 닭이 되니깐 의아해. 적응이 안 된다 야." "다음에 또 이런 부탁하면 그땐 너." "아이~ 그러지 않아도 혁이 무서워서 부탁 못해." 스트로를 빨고 있는 토니가 초콜릿을 까서는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근데, 그 초콜릿 어디서 났냐?" "응. 우리 앞집에 사는 여학생이 주더라. 아침에 나오는데 선물이라고 건네 주길래 들고 나왔지." "하핫.. 그래." "두 번 정도 더 만나면 될 것 같은데.. 반은 넘어온 것 같아." "야, 수원이 온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 녀석 머리를 감은 거야? "저기요. 수원씨 오늘 즐거웠어요. 음, 제가 운영하는 카페인데 심심하면 찾아오세요." Billy's Bar. 카민빛에 새겨진 토니안이라는 세글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토니가 날 끌어당기며 수원이에게 인사를 건넨다. "진이랑 영화보기로 예약했거든욥. 다음에도 수원씨 만났으면 좋겠네요." 이건 극본상 없던 것이다. 토니의 애드립인가? 난 얼떨결에 일어선다. 시선이 자꾸만 수원이에게만 쏠리는데 돌리려고 해도 잘 되질 않는다. "에궁~ 진아, 나 화장실 좀 갔다가 올께." 일어 세우던 토니가 방긋 웃더니 화장실로 가버렸다. 머리카락이 젖어 이마에서 물줄기가 생겨 얼굴위로 떨어진다. 한참 날 노려보더니 내 앞에 있는 담배 한가치를 꺼내 든다. "너 담배 끊었잖아." 라이터를 당기며 흡입하는 그가 시선을 내린다. 몹시 기분이 상한 것 같다. 하지만 들키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담배 다시 시작한거냐?" "콜록콜록." 오랜만에 태워서 그런지 식도로 매끄럽게 들어가질 않나보다. "그럴 줄 알았다. 힘들게 끓었으면서 왜 시작.." "닥쳐!!" 녀석의 말에 잠시 놀랜다. 차갑게 뱉는다 해도 저렇게 진지하진 않았다. 정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토니 괜찮지? 정말 귀여운 녀석이야. 가만히 있으면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착한 녀석이지. 토니를 네게 소개시켜 주고 싶었어. 그냥 너한테 보여 주고 싶어서.." "사귀는 거야?" 날 뚫어져라 쳐다본다. 담배연기에 뿌옇게 보이는 수원이의 눈동자가 날 자극시킨다. 키스.. 하고 싶어. "응." "언제부터?" 녀석이 반응을 보인다. 녀석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두워질 무렵 진정이 됐는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고는 눈물을 닦아 냈다. 일어서려는 성훈이가 다시 주저앉는다. '다신 쭈그러 앉지 말아야지.' 거리로 나와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몸을 섞는다. 커플끼리 팔짱을 끼고 호호거리며 지나치는 가운데 커다랗게 포장된 초콜릿이 눈에 뛴다. '아까 산거보다 더 이쁘고 크다.. 지용이 사다 줄까?' '녀석 들어오면 감동 좀 했으면..' 이곳저곳 매달아 놓은 풍선과 트리를 세워 장식해 놓은 초콜릿이 촛불에 의해 반짝거린다. 기름이 든 초로 가득히 불을 밝혀놓고 성훈이를 기다리는 지용인 남은 초콜릿은 어디다가 매달까 고민하고 있다. 방을 둘러 켜있는 초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것 같다. '선물도 살걸 그랬나?' 탁자 위에 샴페인을 올려놓고.. 오디오에 맞춰놓은 성훈이가 좋아하는 노래도 준비완료.. 이젠 성훈이만 들어서면 되는 것이다. "어딜 헤메고 다니는 거야? 곧 들어온다고 해 놓고선." 소파에 앉아 성훈이가 적어 놓고 간 쪽지를 집어드는 지용이. 딩동--- 기다리던 벨소리에 허둥지둥 일어서는 지용이가 꺼진 초가 있나 싶어 둘러보고는 현관으로 달려간다. 인터폰에 성훈이가 고개를 숙인 채 서있다. "짜식. 좀 일찍 다니지." 열어주는 손이 몹시 긴장한다. '좋아해야 할텐데. 많이 웃어야 할텐데.'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성훈이 앞에 빙그레 웃고 있는 지용이가 보인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닌.." 웃던 얼굴이 굳어지고 있다. 시선이 성훈이가 들고 있는 커다란 바구니로 가 있는걸 볼 수 있다. "모야? 집안 꼴이 왜이래?" 신경질적인 어투로 지용이를 쏘아대는 성훈이의 음성이 들어오질 않는다. 오로지 바구니에만 정신이 집중된다. "그거.. 뭐야?" "뭐?" "니 손에 들여진 거.." "이거.." "지원이 새끼 만나고 왔냐?" "........" "지원이 새끼가 그거 사주디?" "쳇." "그래. 지원이 새끼 만나고 들어왔겠지. 안 그래?" 정성스럽게 꾸며놓은 자신의 어설픈 트리에 시선을 준다. 말없이 다가가더니 손으로 쳐서 바닥으로 흐트러 놓는 지용이의 행동. "지원형 안 만났어!!" "........." 발로 짓이기는 트리 속 초콜릿들이 지용이의 발놀림에 엉망이 되버린다. "지원형 안 만나고 수원이 만났다구!!" "수원?" 더욱 구겨지는 얼굴. 지용이의 발놀림은 멈추고 성훈이가 서 있는 곳으로 향한다. "수원이 만났다구. 지원형 만난 게 아니라.." "그 새낀 또 누구야? 또 있었어? 지원이 새끼 말고 또 있었냐구!!" "고지용." 참을 수 없다는 듯 눈에 힘을 주는 성훈이의 눈시울이 붉다. "그래, 또 있었겠지. 강성훈이 누군데, 나가자마자 꼬셨냐?" "........." "저번에 늦게 들어온 건 수원이란 놈하고 자고 들어 온거지?" "수원이가 누군지 말해줘? 수원이란 사람이 누군지 말해볼까?" "그래. 말해봐!! 둘이 어떤 사이야?!! 네가 홀렸지?!! 넌 홀리는 거 잘 하잖아!!" "........." "불쌍한 척 하면서 입술 내미니깐 키스해 주디?" "........." 입술을 꽉 깨문 채 지용이를 노려보는 성훈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왜 말못해? 핫! 그래 내 말이 다 맞아서 할말이 없어?!!" "저질.. 지저분해." "뭐? 지저분해? 내가 지저분해?" ".........." 성훈이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밝혀진 촛불의 빛에 반짝거린다. "지저분한 거 너 아니야? 돈만 주면 살수도 있는게 너잖아. 안그래?" 상처만 주는 대화. 사랑만 하며 살아도 시간이 모자란 데. 이런 대화는 서로를 할키기만 해.. '젠장 이럴려고 한 게 아닌데.' "은수원. 은지원의 동생." "뭐?" 비앙냥거리던 지용이가 당황해하며 성훈이를 쳐다본다. 떨어지는 눈물이 붉은 눈시울을 더 붉게 만든다. "날 언제까지 속일려고 했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바본지 알아?" "성훈아." "형이 결혼한 거 모르는지 알았냐구!!" "강성훈." "지원형 한국에 없다는 것 알면서도 뚝하면 형 만났다고 난리나 쳐대고!" "후나.." "지원형 얘기로 날 자극하는 게 재밌어?!" 툭--- 들고 있던 것을 있는 힘껏 던져 버린다. 커다란 바구니는 성훈이의 맞은편 벽에 부딪혀 엉망이 되고. 예쁘게 포장된.. 바구니 속에서 수도 없이 쏟아진 쵸콜릿들. "그래 지원형 생각나서 샀다! 너 줄려고 산 게 아니라 지원형 줄려고 샀다구!!" '성훈아?' 입술을 부들거리는 성훈이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는 걸 느낀다. 턱선아래로 자리잡는 뿌옇게 보이는 눈물방울도 느낄 수 있다. "제길.. 잠시나마 내가 돈거지. 너 같은 놈 생각하고 저딴 거 산 게 후회 돼!!" 현관이 부서져라 세게 열어 제끼고 나가버리는 성훈이가 지용이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날 위해서, 나 고지용을 생각하면서.. 산거야? 나에게 주려구?' 멍한 눈으로 엉망이 된 초콜릿을 쳐다본다. 오색으로 포장된 초콜릿. 지용인 가만히 다가가 초콜릿 한 알을 까서 입속으로 집어넣는다. '나 주려고 산거야? 성훈아.. 날 생각하면서 산거니?' 입안 가득 달콤한 향이 퍼져 나가자 지용이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젖어든다. "달다. 참.. 달다." 눈을 감고 달콤함에 빠져들려던 지용이가 바닥에 나둥그레 진 초콜릿 몇알을 집어들고 현관을 급히 빠져나간다. 64)****** 이 만큼만 사랑할게.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바람이 지용이의 볼을 건들인다. '녀석 어디로 숨은거야? 성훈아, 어디로 간거야?' 아파트 단지내를 두세번 돌고는 처음 시작했던 곳에 멈춰섰다.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안정을 찾질 못한다. '미안해. 난 그런줄도 모르고. 성훈아, 내가 잘못..' 놀이터에 홀로 밝혀진 외등이 작은 어깨를 감싸고 있다. 그 어깨가 너무 작아서 알아보질 못했나 보다. 지용인 안도의 한숨을 깊이 몰아쉬며 작은 어깨가 앉아 있는 놀이터로 향한다. 녹이 슨 그네줄이 끽끽-- 소리를 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귀에 거슬이는 소리를 낸다. "추운데. 여기서.. 뭐해?" 더 이상 미안해 할 수 없다는 듯 똑바로 보질 못하는 지용이가 성훈이 옆 그네에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 "아까는.. 내가."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가라앉은 음성. 발만 이리저리 굴리는 성훈이의 움직임에 그네줄이 흔들리고 있다. ".........." "언제까지 날 속이면서 살려고 했어?" ".........." "내 생일이 지나고 난 후엔 어떻게 할려고 날 속인거야?" ".........."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다는 듯 지용인 더욱 고개를 숙여버린다. "우스웠어? 재밌었니?" ".........." "내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었니?" ".........." "날 속이면서까지 네 곁에 묶고 싶었어?" "성훈아." "그렇게 자신이 없어?? 내 앞에서 그렇게 자신이 없었냐구!!" ".........." 하얀 입김이 가로수 빛에 그림자를 만든다. 긴 한숨에 풍겨져 나오는 입김. 성훈이 옆에서 고개만 숙이려드는 지용이. 싸늘한 밤바람보다 성훈이 네가 차가우면 난 얼어버릴거야. "내 앞에서 고개 숙이지마." ".........." 추위에 발그스레 변한 지용이의 뺨에 파리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네줄을 잡고 있는 지용이의 손이 손금을 따라 하얗게 터가고 있음을 느낀다. '불쌍한 내친구.. 나 때문에 넌 이렇게 된거야. 널 내버려뒀다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그래.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다 내 잘못이지. 모든 게 다.." "사랑해." ".........." "정말 사랑해." '바보 같아. 고지용.. 정말 바보같아. 넌 자존심도 없니?' "난, 널 정말 사랑해." '지겨워. 사랑이라는 말. 너의 입에서 쉴새없이 들려주는 그 사랑이란 말. 정말 지겨워..' 성훈인 입술을 꽉 다물고 허공을 향해 또 한번의 한숨을 토해낸다. "사랑해." 슬픈 사랑노래를 불려대는 것 같았다. 그의 노래는 성훈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적실 정도로 구슬프게 들린다. "날 언제까지 사랑할래?" "끝날 때까지." ".........?" "내가 끝날 때까지." 모든 건 정해진 것처럼. 그의 미래를 모두 다 정한 것처럼 말한다. "내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만 널 사랑할거야." "..........." "내 눈으로 널 담을 수 있을 때까지." 영혼이 되서까지 널 맴돈다면 넌 숨이 막힐지도 몰라. 나라는 인간에게 질려버릴지도 모르니깐. 내가 살아가는 동안만 사랑할게. 내가 살아가는 동안만.. "내가 늙어서 흉하게 변해도 날 더 사랑할 수 있어??" ".........." "대답해봐. 그때는 지금보다 더 사랑할 수 있어?" "아니." ".........?" "이보다 더 이상은 사랑할 수 없어." '이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다?' "이 이상 더 사랑한다는 건 무리야. 이 이상 더 사랑한다면. 난 널 아프게 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테니깐. 이 만큼만.. 사랑할래. 이 만큼만." "........." 성훈이를 향해 쑥스럽게 웃는 지용이의 미소가 힘이 없다. 반짝이는 눈동자. 아름다운 내 친구. 아름다운 친구였어. 힘들 때마다 어깨를 빌려주던 나의 친구. "그네 밀어줄까?" "........." 일어서는 지용이가 성훈이 앞에 섰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성훈이의 볼이 물기에 젖어 무척 추워 보인다. '힘들다는 거 알지? 오랫동안 형에게 익숙해져버린 내 몸둥이가 널 받아들이질 않을거야. 네게 마음을 열고 싶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을거야. 후--- 차라리 내가 아무생각도 없는 인형이라면 더 좋을텐데. 네가 안고 싶을땐 네 품에 안기고, 네가 원하는걸 모든지 해줄 수 있는.. 그런 인형이라면 좋을텐데. 기다릴 수 있니? 지용아, 날 기다릴 수 있겠어? 그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는데.. 너.. 날 기다릴 수 있니?' 지용이의 손에 밀어지는 성훈이를 실은 그네가 하늘에 닿을 것 같다. 찬바람은 부드럽게 성훈이의 뺨에 부딪히고 떨어지는 눈물이 바람에 방향으로 꺽어진다. "그만. 지용아, 그만 밀어." 온몸에 싸늘함이 느껴질 정도로 높이 올라가는 그네. 붕 떠서 날라가 버릴 것만 같다. 눈을 꼭 감았던 성훈이가 두 눈을 떴을 때 지용인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그네는 조금씩 멈춰지고 지용이를 점차 올려다보게 된다. 그를 올려다 보다 그네를 멈추려던 성훈이의 발이 땅에 닿았을 때 반동으로 지용이의 품에 뛰어 들어 버렸다. 따.뜻.해. 성훈이의 심장이 미미하게 두근거린다. 그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달콤한 초콜릿 향내도 좋다. '너무 따뜻해서 떨어지기 싫어.' 지용이에게서 나는 향내가 좋지만 성훈인 지용이에게서 떨어지려고 한다. "그냥.. 그냥 이대로 있어. 너 지금 아프잖아. 너, 지금 어깨가 필요하잖아." 소중한걸 감싸 안 듯 꼭 안아주는 지용이의 품이 따뜻하다. 기승을 부리는 추위속에서 두어시간이 넘도록 앉아 있어서 그런지 온몸이 꽁꽁 얼어 있었다. '난 형밖에 없었어. 내 안엔 오직 형만 존재해. 지금 이 순간에도 형만 존재하는지 몰라. 그런데.. 나. 이래도 되는걸까? 너에게 안겨 너의 체온을 빼앗아도 되는걸까? 지용아.. 나 정말 이래도 되는걸까? 지용아, 제발. 나 정말 나쁜 놈 만들지마.' '그 자식은 내 뒤를 따라오질 않았다. 젠장.' 노트북을 열어 놨지만 손가락을 가져다 댈 수가 없다. 오직 한가지 생각으로만 가득한 수원이가 팔짱을 끼고 거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발 운동이 수원이 자신을 한심하게 만든다. '쉬폴 왜 연연해 하는거야! 왜!!'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쿠션을 힘껏 발로 차버렸다. '개.자.식!' 화가 나다 못한 수원이가 이렇게 지낼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내 생애 널 만난걸 욜라 재수없다고 하늘에 대고 원망한다.' 수화기를 드는 수원이가 익숙하게 재진이의 핸드폰 번호를 두들기고 있다. '이재진, 사랑해.. 네 녀석이 날 이렇게 만들어 놨으니깐. 니가 날 책임져.. 날 죽이든 살리든 네 맘대로 하란말야!' 몇번의 신호음. 신호음이 한번 한번 더해질수록 재진이의 음성을 기다리는 수원이의 속이 애가 탄다. [여보세요?] '니가 날 책임져.. 이 나쁜 새꺄!' "그 토깽이가 하는 녀석 잘 있냐?" 하려던 말과는 다르게 수원이의 입술이 움직였다.. 삐딱한 말투와 꼬여버린 자신의 내면이 어정쩡하게 비춰진다. [아~주 잘 있지. 지금 내 옆에 있는데, 지금 술마시고 있거든. 수원이 너도 나올래?] 웃음소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수원이의 음성을 맞이하는 수원이에겐 괘씸하게 느껴지는 웃음 섞인 음성. "됐어, 너나 실컷 쳐먹어!! 이 개같은 새꺄!!"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한숨을 길게 쉰다. '쉬폴 내가 무슨짓을 한거야?!' “ 눈시울이 뜨거워. 재진아, 니가 날 이렇게 만들어 놓은거야. 너 없음 못살게. 너라는 존재가 안되면 안되게. 네가 자꾸만 보고 싶어지게.. 네가 내 옆에 있어 줬으면 하게.. 너라는 존재가.. 내 속에 가득해 버리게. 네가.. 날 이렇게 만들어 놓은거야. ” "누구 전화야?" "수원이." 미소를 담고 있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재진인 어깨가 축 쳐져 있다. "하핫. 70% 는 넘어온 듯 한데?" "녀석이 먼저 전화한 건 처음이야." "그래?"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 "아니되지요. 좀 더 기다려봐." "........." "두 번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확실하게 매듭을 짓자. 확실하게 장수원을 이재진걸로 독점하는거야. 단 한번이면 게임오버야. 크큭." 윙크를 하며 붉은 칵테일을 넘기는 토니가 승리의 축배를 즐기고 있다. '독점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내 곁에 있어 줬으면..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 심어줘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수원일 독점한다는 건 그를 숨막히게 하는 잔인한 체벌에 지나지 않아. 난 그가 내 안에서 행복하길 바래. 그의 순수함을 찾아 주고 싶어. 그의 마음을 열어 주고 싶어. 하핫, 내가 너무 감상적으로 변해가는군. 나의 변화. 그 녀석이 내 심장속에 들어오면서 난 변해버렸어. 네가.. 장.수.원.. 네가 변화 시킨거야. 네가.' 65)****** 나보다 위에 있는 너. "일어나.. 성훈아." '난 두려워. 네가 날 깨뜨릴 것 같아서. 내 맘을 깨고 들어와 너로 날 물들일 것 같아서. 이젠 겁부터나.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게..' 아침부터 부산함을 떠는 지용이에게 등을 돌리며 시트로 얼굴을 가려 버린다. 따스라이 쏟아지는 햇빛의 눈부심이 성훈이의 잠을 깨워 버렸지만 지용이까지 가세해서 오랜만에 숙면한 성훈이를 깨우려 들었다. "성훈아~ 일어나. 해가 중천에 떴어. 야!" 환하게 웃으며 성훈이를 내려다보는 긴 속눈썹에 감춰진.. 며칠 전부터 웃기만 하는 눈동자. '착각하지마. 고지용, 난 널 받아들이지 않았어.' "우우웅." 시트를 끌어 내놓고 성훈이의 하얀 얼굴을 눈동자에 담아낸다. '너 이러는 거 너무 부담스러워.' "성훈아, 일어나아~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너무 화창해! 너무 아까울 정도로 화창해. 바람도 따뜻하고.." 웃고 있는 얼굴이 성훈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두 세번 톡톡 건들인다. "조금만 더 자자. 눈뜨기 싫다구." "제티 따뜻하게 타놨단 말이야. 얼릉 일어나." "조금만." "오늘 갈 데 있어. 어서 일어나. 응?" "갈데?" '모든 것은 나로 인해 움직여진다. 너의 삶에 내가 중심이 돼버린 착각이 들 정도로.. 넌 날 부담스럽게 만들어.' "어서 일어나, 안 일어나면 확 키스해 버린다." 짓궂은 장난.. 어릴적엔 이런 장난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날 자극시키는 장난이야. "하하핫, 하하하." 지용이의 손이 성훈이의 겨드랑이를 몹시 간지럽힌다. "일어 날꺼지?" "하핫. 지용아, 그만. 고지용. 하하핫!!" 쉴새없이 웃어 제낀다. 너무 웃어서 숨까지 가빠와. "하하하하, 지용아 그만." "일어날거지?" "하하하하핫. 지용아, 알았어." ".........." "하하. 알았어. 일어날게." ".........." 장난끼 가득한 얼굴이 숨이 넘어가도록 웃고 있는 얼굴을 소중하게 내려다본다. 너의 얼굴이 내 허한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해. "일어날게. 일어.. 날게." "사랑해." 지용이의 손이 멈춘다. 성훈이가 움직이지 못하게 그의 손을 꼭 잡고는 아직 봄햇살에 눈을 찌프리는 성훈이의 입술에 입술을 놓는다. 사랑해... "어딜 간다는거야?" 조촐한 식사를 마치자마자 두꺼운 오리털 잠바부터 꺼내드는 지용이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밖에 나가는데 왜 그렇게 두꺼운걸 꺼내들어?" "넌 하얀색 입어." "지용아, 왜 그래? 밖에 봐라. 저 햇빛 좀 보라구!" "난 파란색 입을게." "고죵, 밖을 보란 말이다~! 저 뜨거운 온도속에서 날 통구이 만들일 있냐?!" "칭얼거리지 말고 그냥 걸치라면 걸쳐!" '치~ 더러 지가 소리를 지르네. 도무지 알수 없는 녀석.' "자, 1박 2일동안 행복할 생각이나 하라구." 야윈 얼굴위로 젖어드는 미소. '알수가 없어. 무슨 꿍꿍이야?' 이 바람에 나도 날라갔으면.. 나도 날라가고 싶어. 차안을 가득 메운 서태지의 '하여가'. 지용이 옆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듣기가 좋다. "이렇게 떠나가 버린~ 너를 보려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기다려~ 네가 다시 돌아 올 때까지.. 이곳에서~~~" 맑은 음성으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따라 부르는 성훈이. "서태지가 그렇게 좋아?" 아무말없이 끄덕끄덕. '근데, 이젠 안 좋아하고 싶어. 형도 서태지 좋아했거든.' "나도 서태지 좋아." '넌 서태지 싫어했잖아. 대중음악은 침을 튀겨가며 비판만 해 대놓고는 무슨 서태지?' 차창을 향해 들어오는 햇살에 지용이가 쓴 썬그래스가 반짝거린다. "음악 이것밖에 없어?" "아니. 거기 찾아봐. 네가 좋아하는거 다 있을거야." 지용이가 입술로 가리키는 곳을 들여다본다. 온통 자신이 즐겨 듣는 노래의 곡이름만 적혀져 있다. '바보. 지가 좋아하는 음악은 하나도 없네.' "야, 클래식 듣고 싶어~!" 끼이익--- 갑자기 멈춰선 지용이의 차가 성훈이를 앞으로 쏠리게 한다. 앞으로 쏠렸다가 지용이를 쳐다보는 성훈이가 두 눈을 휘동그레 뜨고 지용이를 바라본다. "왜 그래?" "클래식 질색하면서 클래식 좋아한다고 하지마." ".........." "노력하지 말라구." 썬그라스 속에 감춰진 눈동자를 만져보고 싶어. 흔들리고 있을거야..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어가며 굴리고 있겠지. "누가 클래식 좋아한데? 그냥 듣고 싶다 이거지. 밥탱이 같으니라고!" 정말 듣고 싶어서 그래. 클래식 들으며 사색에 젖어드는 네가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그래. 네 모습에 나도 편안하게 미소 짓고 싶어서.. "휴게소 들리면 하나 사자." "됐어! 괜히 과민반응이야." 다시 움직여지는 지용이의 하얀 애마. 밟아. 더 이상 밟을 수 없을 만큼 빨리 달려.. 내 몸이 붕 떠버리게 밟아. 밟아... Billy's Bar. "걱정돼. 오늘이 벌써 며칠째야!" 의지와는 상관없이 술병으로 손이 갔다. '불안해. 그 녀석 무슨 생각으로 연락도 안하는거야.' "그럼 먼저 연락을 하던가." 재진이 앞으로 밀어주는 전화기. 수화기를 들면 수원이 집 넘버를 찍지 않고 흥분어리게 소리부터 지를 것 같았다. "전화도 하지 못할거면서 왜 그래?" "불안해. 녀석이.." "70% 야 70%! 뭐가 불안한거야? 지금 장수원은 자존심 싸움을 하는거야. 좀 기다려 보라니깐.." "네가 수원일 몰라서 그래. 그 자식이 어떤 놈인지." 성질 급한 재진인 수화기부터 들어올린다. 투---하는 신호음이 들리자 정신없이 7개의 버튼을 정신없이 눌러대는 재진이. 한참을 들고 서 있었으나 힘없이 내려놓고 만다. "받질 않아. 자존심이고 뭐고 가 아니야. 받질 않아." 두 주먹을 꼭쥔 손이 술잔에 압박을 가한다. "이재진. 그럼 찾아가봐. 찾아가서 말해. 지금까지 연극이였다. 장수원 속 좀 들여다보고 싶어서 떠본거다 이렇게." "토니형, 손님 오셨는데요." "우혁이?" "아니, 나와보세요. 처음 뵙는 분인데요." "처음?" 몸을 돌려 홀로 나갔던 토니의 눈으로 수원이의 거칠어진 얼굴이 비췄다. '이재진. 70% 넘어 섰는데. 80%야. 80%.' "어머, 수원씨 여기까지 찾아오시고.. 하하." "........." 노려보기만 한다. 네온에 비춰진 갈색 머리결이 검푸르게 비춰진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 수원이랑 같이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려고 했죠." '가증스럽게 웃네.. 맘에 안들어.' "뭐, 마실거라도.." "커피 주셨음 좋겠어요." "아, 커피요. 잠시만 기다려 봐요." 의자에 걸터앉은 수원이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 4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40년은 흘러버린 것 같아. 안색이 좋질 못해. 4일 동안 집밖으로 나오질 않았을거야. "이재진, 넌 나오지 마라." "........?" 곧 튀어나가 수원이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장수원, 나 너 사랑해.' 라고.. "오늘 만나는 거 포기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깐." "토니 안." "너, 나오면 안돼. 그냥 여기에 있어." "야!" "내말 들어." 방그레 웃는 토니의 머릿속엔 벌써 계산이 선 것 같았다. 즉흥적인 대본. "장수원이 뭐라고 떠들어댈지 뻔해." "어?" 재진이의 어깨를 두세번 두들기는 토니가 밝게 웃으며 홀로 빠져나간다. '이제 시작해 볼까? 이재진도 애인이 생기겠군. 큭크.' 어설프게 품어내는 담배연기가 그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거만하게 앉아 있는 폼 역시도 그의 꺼칠해진 얼굴하고는 맞지 않았다. "카페 분위기가 좋군요." 카페를 둘러보는 눈이 누구를 찾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제가 직접 인테리어 한 건데, 정말 분위기가 괜찮은가요?" "네." 풍겨대는 담배연기. 빈속이라 그런지 메스껍다.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 잠시 음악에 귀를 기울린다. 씨네마파라디소 OST를 째즈 버전으로 바꿔놓은 곡. 카페분위기를 더 살려준다. "재진이.. 언제부터 알고 지냈죠?" 입을 떼는 수원이의 입술근처가 하얀 버짐으로 가득하다. 환절기라 그런건가? "오래됐어요. 2년전에.." "그럼 재진이가 어떤 놈인지 알겠군요." 두사람 사이에 흐르는 음악이 냉냉하게 들려온다. 딱딱한 음성의 수원이는 입가에 미소를 유지하고 있지만 눈만은 고집스럽게 '내가 왜 이럴까?'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럼요~ 재진이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할수 있죠." "재진이 사랑합니까?" 담배재를 털지 않아 탁자위로 재가 날린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토니가 나즈막한 음성으로 속삭인다.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재진이도 당신을 사랑한답니까?" 눈동자에 핏발이 서있다. 며칠동안 밤도 못 잔 모양이군. "물론 사랑하겠죠. 근데 왜 수원씨가 제게 이런 질문을 하는거죠?" 얼굴이 붉게 변하는 수원이가 고개를 숙이는 게 보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필터만 남은 담배에 입을 댄다. 풍겨내는 담배연기가 매웠는지 콜록거리기도 한다. '훗, 이재진 90% 다 90%.. 이제 샴페인을 준비해도 되겠어.' 66)****** 늪. '아직도 멀었어..'라는 말을 남긴지 몇분 채 되지 않았는데 잠이 든 성훈이. 빨리 달리던 속도를 줄이고 덜컹거리지 않게 도로를 달린다. 해는 조금씩 저가고 지용이는 조심스럽게 핸들을 돌리고 있다. '천국이 있다고 믿는 건. 다 너 때문일거야. 너의 잠든 모습은 천사같으니깐. 천사는 아마 너처럼 생겼겠지.' 차창을 조금 열었을 때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이 목적지에 가까워짐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무릎을 손에 끼고 잠이든 작은아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린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움추려드는 작은 몸이 더욱 작아 보인다. '살 좀 찌워야겠어. 정말 뼈밖에 남질 않았네.' 씁쓸한 미소에 지용이의 앞 머리칼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사랑해. 네가 지겹다고 해도 할수 없어. 사랑해. 너만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흘러 나와. 성훈아, 사랑해." "강성훈. 성훈아~" 어깨를 흔들어대며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렸다. 감은 눈이 뜨면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보다 더 반짝거릴 것이다. 커다란 눈망울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있기에 그에겐 적절히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하아암~ 여기가 어디얍?" 뒤지개를 펴며 두리번거리는 눈이 생소한 곳에 차가 세워 있자,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지용이를 쳐다본다. "눈이 있는 곳." "눈?" 동그랗게 뜬 눈이 쏟아져 버릴 것 같다. 그리고 차창을 주시하는 그가 노을빛으로 물든 설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기부턴 걸어가야 해. 산장까지 20분정도 걸으면 된다고.." 지용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밖으로 나가버리는 성훈이가 황금빛으로 물든 설원을 힘껏 뛰어 가고 있다. 아이처럼 발자국 남는게 신기한지 이리저리 밟아보며 자신을 쳐다보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한참 혼자서 폴짝폴짝 뛰는가 싶더니 푹신한 침대에 눕듯 길게 누워 버린다. '후나!!' 차창으로만 바라만 보던 지용이가 성훈이의 행동에 급히 뛰어 나갔다. "돌이라도 있으면 어쩔려구 아무대나 누워 이 바보야!!" 흰 눈속으로 발목이 빠져 걷기가 힘이 든다. 이곳까지 차를 끌고 온 게 신기할 정도다. "성훈아~!" 아무말도 없다. 그냥 가만히 누워서 두 눈을 꼭 감은 게 마치 관속에 들어가기 전의 모습 같았다. 하얗디하얀 눈꽃 위에서 잠이 든 것 같았다. "강성훈??!!" 성훈이에게 달려들어선 그를 모질게 흔들어 댄다. '장난이나 쳐볼까?' "강성훈!!" '짖궂여도 잼슬거야. 크흐흐.' "성훈아!! 강성훈!!" "......." "성훈아, 성훈아!!" 다급하게 부르는 지용이의 음성에 이제 눈을 떠야겠다고 생각한 성훈이. 그런데 그의 뺨에 뜨겁게 떨어지는 무언가를 느낀다. 또르륵. 톡톡.. '바보. 너 우는거야?' "성훈아, 성훈아!!" 두 눈을 조심스레 뜨고는 깜빡거리며 지용이를 올려다봤다. 얼굴 전체에 번진 눈물이 지용이의 얼굴을 얼어 버릴 것 같다. "바부. 울기는 낄낄~" 지용이의 어깨를 붙들고 그를 깔고 앉았다. 하얀 눈밭은 좀 더 황금빛으로 물들고, 하얀눈을 뭉쳐서 깔려있는 지용이의 얼굴에 쏟아 부었다. "강성훈, 차가워 이거 무슨 짓이야~!" 웃음소리.. 웃음소리. 하얀눈을 뭉쳐서 입에 대기도 하고 손으로 모아서 하늘높이 뿌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얀 눈속에서 정신없이 눈싸움을 하기 시작한다. 지용이가 던지면 성훈인 좀 더 크게 뭉쳐서 던지고. 하지만 눈덩이를 맞는 쪽은 거의 성훈이 쪽이였다. "고지용, 너~!" "네놈이 아까 한 짓을 생각해 봐라!" "고죵!!" 웃음은 끊기질 않았다. 지용이에게 뛰어드는 성훈이가 또다시 그의 몸위로 올라탔다. 웃음소리.. 숨쉴 때마다 풍겨지는 따뜻한 입김. "하핫. 성훈아, 맘에 들어? 응?" 고개를 끄덕인다. '유쾌해. 너무너무 좋아.' "너무 좋다. 2월 중순인데도 눈이 남아 있다니.. 하하핫." 하얀 눈이 지용이의 얼굴에 이리저리 붙어 녹아 내리고 있다. 눈동자가 노을에 반사되어 금빛을 머금은 것 같았다. '춥겠다. 지용이 얼굴이 꽁꽁 얼겠어.' 점점 지용이에게 내려앉는 하얀 얼굴.. 따뜻한 숨결. '너의 입김이 내 얼어붙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어.' 지용인 두 눈을 감아 버린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성훈이의 입술이 파랗게 얼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달구어 주고 있다. '네가 항상 곁에 있다면 추위 같은건 느끼지 않을거야.' 자신의 입속에서 머뭇거리며 움직이는 성훈이의 감촉이 좋다. 조심스럽고 어설프게 진행되는 그만의 입맞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몸이 얼었어." 산장으로 걸어가는 성훈이가 손을 호호 불어가며 걷고 있었다. "업어줄까?" "됐어. 지도 부실한 주제에.. 누굴 업어?" "뭐어?" 웃음이 섞인 음성은 인상을 억지로 구기며 성훈이를 들어 올렸다. "뼈밖에 안 남은 주제에 누구더러 부실하대?"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지용이 속이 상할 정도이다. "야, 내려놔!!" 바둥바둥대며 지용이의 볼을 잡아떼는 성훈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 "정말 놓을까?" "치~ 그래 놔봐~!!" "정말 그냥 놔버린다." "놔봐~!!" "그래, 좋아 정말 놔버린다." "놔보라니깐~!" 두눈을 지긋히 감으며 새초롬하게 말하는 성훈인 '설마 지용이가 놓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하고는 반대로 지용인.. 성훈이를 안은 손을 빼버리고 바닥으로 성훈이를 놔버렸다. 엉덩이를 찌었는지 아프다고 호소해대는 성훈이가 정말 놓을 줄 몰랐다는 투로 지용이를 째려본다. "놔달라고 정말 놔버리냐? 이 나쁜놈아~!" 투덜투덜 거리는 성훈이가 일어서지 앉고 엉덩이를 매만지고 있다.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엉덩이를 매만지는 성훈이가 다시 손에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춥니?'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지용인 소리없이 웃어버린다. "자 업혀." 성훈이 앞에 등을 보이는 지용이가 업히라는 포즈를 취한다. "........." "업혀." "........." "강성훈, 빨랑 업혀." "........." "빨랑 업혀. 춥잖아." "........." "어휴-- 빨리 업히라니깐." 성훈이의 체온을 기다리다 끝내 뒤돌아보는 지용이. 흐린 눈으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성훈이가 보인다. '왜 울어? 왜 우는거야? 내가 또 뭐 잘못한거니?' 눈을 내려 깔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숨을 죽여가며 턱선으로 모아모아 뚝뚝 흘리고 있다. 턱선에 고인 눈물방울이 하얀 입김으로 감추려 하지만.. 사선을 그리며 떨어진 눈물은 숨겨지질 않는다. '울지마. 울지마..' "나 정말 나쁜 놈 될 것 같아." "........." "지용아, 나 나쁜 놈 만들지마." "........." "네가 너무 잘해주면.. 나, 난 말이야." "춥다 어서 가자." 성훈이를 억지스럽게 자신의 등에 업고는 걷기 시작한다. 지용이의 뒷목으로 따뜻한 입김이 전해져 온다. 아직도 우는건지 싸늘하게 식은 눈물 방울이 지용이 목을 간지럽힌다. "성훈아, 사랑해." ".........." "사랑해." ".........." "사.. 랑해." 악몽에 시달려 잠이 깼다. 자신이 없는데도 하얗게 웃기만 하는 성훈이의 모습에 지원인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다. 지용이 옆에서 함박꽃웃음을 짓는 성훈이. '꿈일 뿐이야.' 떨려대는 손으로 담배 한가치를 들어올린다. 은주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고, 창문으로 비춰지는 블루톤에 아직 해가 뜨지 않았음을 느낀다. 쉴새없이 내뱉는 담배연기.. 두 개째 꺼내 들었다. '그 놈 앞에서 웃지마라. 그 놈 앞에서 웃는다면 네 목을 조여 버릴지도 몰라.' 함께 지내는 동안 하찮게 생각했던 것마저도 떠올려 진다. '넌.. 이상한 힘이 있어. 날 변화 시켰고. 네 놈이 아니면 안되게.. 만들어 버렸어. 늪에 빠진 것처럼 자꾸만 빠져 들어가. 네가, 보고 싶다. 성훈아..' 【 어둠이 쌓여든 들녁에 빈 가슴으로서는 그런 날이 있었다. 너무 쉽게 뒤돌아서서.. 널 떠났지만 끝내 너와의 멀어짐은 오히려 가까이에 있었다. 저 부는 바람 너의 살갗에 닿는 바람이라 한없이 따스했고 저 잘게 부서지는 햇살도 널 맞으려 생각하니 온몸으로 그 햇살을 맞았고.. 저 동그마니 뜬 새벽달은 너의 불면으로 인해 보고 있을 것 같아 그 달 또한 소중하게 올려다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내 곁을 떠난 너로 인하여 새롭고 소중하게 보였다. 나에겐 그런 날이 참 많이도 있었다. 】 67)****** Your breath close to me. "조금만 더 잘래." "일어나.. 지금 출발해야, 저녁에 도착한다구." "조금만.." 지용이의 목을 끌어들이는 성훈이가 두 눈을 생글거리며 그의 얼굴을 자신의 심장속으로 놓았다. 콩알만하게 들려오는 성훈이의 심장소리가 지용이의 눈을 감게 한다. "성훈아, 행복하니?" "......." "행복하니? 대.. 답해봐." "......." "네가 원한다면 매일 이렇게 해 줄 수 있는데.." "......." "네가.. 내 곁에 있어 준다면." "......." "네가." "좋아. 너무 좋아. 너무.. 좋아." '내 가슴을 울리는 너의 작디작은 속삭임. 내가 좋아?' "난 널 사랑해. 성훈아." "......." "난 정말 널 사랑해." '하루에 몇 번이나 들려 주는걸까? 사랑한다는 소리. 지겹게 들려주는구나. 내일은 네가 몇번이나 하는지 한번 세볼까봐.' "일어나야겠다. 내가 너무 늦장만 부리는 것 같아." "아니,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있어. 조금만.." [만나!]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수원이의 음성이 몹시 쉬어 있었다. 표현을 하자면 울다울다 지친 음성. "핫. 장수원이 날 만나자고 하고.. 내일은 서쪽에서 해가 뜨겠네." [잡말 말고 만나! 할말 있다구!!] "할말? 무슨 할말?" 약올리듯 말하는 재진인 수원이의 앙칼짐을 즐기는 것 같다. [나와. 나오라구! 저번 그 카페에서 기다릴테니깐 나와!] "장수.." 뚜--- 얼을 놓고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본다. 아직도 앙칼진 수원이의 음성이 재진이가 든 수화기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만나자구? 만나?' "장수원 전화지?" 재진이의 어깨를 집고 돌아 의자에 앉는 토니가 미소를 머금은 채 재진이를 바라보고 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화기를 내려놓는 재진이의 얼굴이 붉게 변해 있었다. "이제 마지막 대본이나 준비해 볼까?" "........." "샴페인 준비할까? 오늘은 우혁이랑 맘놓고 데이트나 해야지. 아무리 극중에서 실연 당한 거 라지만 내가 속이 쓰리지 않을까? 하하핫.." 토니가 탁자에 손을 두들기며 쾌재를 부리고 있다. "극이 막을 내리긴 할까? 더 악화된다면.." "악화 됐다면 내게 찾아오는 일 따윈 없었어." "........" "그를 읽어봐. 네놈이 사랑한다면서 읽지도 못해?" "빈틈이 없으니깐. 수원인 빈틈이 없거든." "벌써 막은 내렸어. 내가 중간에서 촉매 역할을 하지 않았어도 막은 내렸었어." "........" "장수원과 이재진 해피앤딩 스토리야." "훗." 토니를 향해 작게 웃고는 병맥주에 입을 댄다. 이 알싸함.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 되는건가? 화장실을 몇 번 기웃거렸는지 셀 수가 없다. 네 번이던가? 다섯 번이던가? 머리에 바른 헤어무스가 비가 내려서 그런지 더욱 촉촉하게 머리를 가라앉는다. '제길 괜히 바르고 왔네.' 투덜거리며 집 앞에서 이틀 전에 샀던 담배를 꺼내 들었다. 스무 가치 중에 두 가치만 덩그란히 남아 있다. '끓으려고 했는데. 개.새.끼! 다 너 때문이야!' 잿털이에 재를 두들기는 손이 카페문만 주시하고 있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 거릴때마다 경직된 채 들여다보는 수원이의 눈동자. '확실히 하자구. 이재진. 내가 널 먼저 좋아한건 아니야. 그건 확실히 해. 네놈이 먼저 날 사랑한다고 떠들어 댔으니깐. 내가 먼저 널 사랑한건.. 아니라구.' 연신 중얼거리는 입술. '내가 먼저 사랑한 건 아니라구.' 딸랑거릴 때마다 고개를 들어올린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재진이의 얼굴. '설마.. 날 바람 맞치진 않겠지? 그랬다간 나한테 죽을지 알아!' 조금씩 불안해지는 수원인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분침이 3자를 가르키고 잠시 후 들여다 봤을땐 8자를 가르키고 있다. '개쉑 왜 안오는거야? 왜!!' 다리를 떨어댄다. 초조 할때마다 나타나는 그만의 버릇. 손목에서 돌아가는 초침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차가 막히는 거겠지? 그렇지? 차가 막혀서 늦는거지?' 연락만 하면 10분도 안돼서 자신을 찾아와 주었다. '차가 막히는 거야. 그럴거야.' 그리고.. '이재진, 사랑해.' "그만 들어가자. 응?" "잠깐만.. 좀 더 지켜보자구." "저 녀석 기다리는 거 못해. 기다리다.." "기다려. 기다린다구. 아마 너 올때까지.. 아니 카페문 닫힐 때까지 기다릴거야." 해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토니가 얄미울 수가 없다. 생각 같아서 그냥 들어가고 싶은데..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인데." 재밌는지 수원이 앉아 있는 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토니. '손톱까지 깨물고 있어. 파랗게 질린 얼굴 좀 봐.' "한 20분 후에 들어가자구. 크큭" "지금.. 들어갈래." 토니는 급히 차 밖으로 나가려는 재진이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달랜다. "조금만.. 조금만 있다 들어가. 장수원은 기다릴거야. 네가 올 때까지 꼼짝도 않고 저렇게 기다릴거야." "........" "왜냐면.. 장수원이 널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이니깐." '눈에 보인다? 수원이가 날 생각하는게.. 보인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수원인 거칠게 쥬스잔을 들어 마른 목을 축이고 있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시계를 들여다보는 수원이의 눈동자. 그리고... 이어지는 손톱 깨물기. '수원아, 오늘부터 넌.. 내꺼다!' 장수원의 불변의 진리. 살아가다 보면 불변의 진리라는 건 모두 무너져 버려. '사정이 있는 거겠지? 사정이 있어서 늦는걸거야. 이럴 줄 알았다면 핸드폰이라도 들고 나올걸.. 나한테 연락했을거야. 늦는다고.. 아마 늦는다고.' 하지만 손에 잡혀지는 핸드폰의 실체가 수원이를 구렁텅이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제길, 왜 들고 나왔을까?' 들고 온 핸드폰의 앤드를 길게 눌러버린다. '올거야. 넌 올거야. 내가 알아. 넌..' 딸랑거리는 소리에 수원이 몸이 세워 진다. 일으켜진 몸을 앉히려 하지만 재진이 뒤에 따라 들어오는 그림자에 한숨이 길게 내뱉는다. '쉬폴, 저 새낀 왜 달고 나온거야!' “ 넌 자꾸만 따뜻한 숨결로 들어와. 이 편안함에 날 길들이지마. 널 내 안에 품기가 두려워져.. 들어오지마. 끼어들 자린 없어. 제발, 날 두들기지마. ” "뭐 마실래?" 휴게소에서 차를 멈추고는 성훈이에게 묻는 지용이의 얼굴엔 부드러움이 가득하다. '날.. 두들기지마.' "콜라 마실란다. 나 콜라 사다줘." 장난스런 어투는 아까전부터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다. "그렇게 껌 씹으면 턱에 각 생긴다." "벌써 생겼는데 모 어때?" "핫, 그래서 더 네모나게 만들려고?" "왜? 나, 얼굴 네모해지면 싫어할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성훈이가 지용이에게 물어온다. 고개를 가우둥거리더니 안타까운 미소를 머금는 그가 고개를 놓으려 한다. "내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더 씹어 댈려고?" '힘이 없어. 자신이 없는거야? 왜 그렇게 고개만 숙여대?' "나 콜라 말고 오렌지 쥬스로 사다줘." 지용이를 쳐다보던 성훈이가 눈을 돌려 테잎을 이리저리 손대고 있다. 차문 앞에 서서 성훈이의 행동을 들여다보던 지용이. "클래식 사다줄까? 모차르트.. 아니면?" "너 듣는 걸로.. 너 맨날 듣는 거 있잖아." "바흐?" '매일 지겹게 듣던 곡이 바흐라는 사람의 거였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알아서 사와!" 짜증스럽게 말해놓고도 성훈인 자신의 어투가 맘에 안 드는지 고개를 획 돌려버린다. '내가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니? 내가 함께 죽자고 하면.. 아니 내가 죽으면 따라 죽을 수 있어?' "조금만 기다려." ".........." "차 밖으로 나오지마. 바람이 차다." 차 문을 닫고 휴게소매점으로 들어가는 지용이의 어깨가 한참은 쳐져 있다. 질겅거리며 다시 씹어대는 껌. 그러다 성훈인 차 뒤에 있는 티슈를 두 장 뜯어 껌을 뱉어 낸다. '날 생각하기 전에 널 먼저 생각해. 널 먼저 아끼란 말야.' 이를 꽉 깨물어 버린다. '네가 자꾸 들어오려고 해. 내 안에 자꾸만 들어 올려고 해. 그러지마. 지용아, 넌 상처만 받을거야. 날 자꾸 나쁜 놈 만들지마.' 한마디도 않고 재진이가 꺼내놓은 담배케이스에 손을 댔다. 수원이 손에 집여졌던 담배필터는 벌써 열 한 개째.. 재진이 옆에서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토니의 나긋나긋한 음성이 듣기 싫다. '진아! 진아! 진아!! 젠장 음악이나 시끄럽게 틀것이지.. 왜 이렇게 꾸리해?' "진아, 나 헤어스타일 바꿀까? 이번에 짧게 한번 잘라볼까?" 재진이 품에 안겼다가 손을 잡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던 말던 상관하지도 않고 이어지는 토니의 행동이 거북하기도 하다. 하지만 수원이의 마음 한켠엔 부러움으로 가득하다. "진아, 오늘 카페에서..." 간질거리는 음성. 낭낭하고 부드럽기만 하는 토니의 목소리. 여리게 보이는 그만의 몸짓. 분위기. '내가 저렇게 행동한 적이 있었던가?' 폭력적이고 거친 말들만 뱉어냈다. 재진이가 오면 무조건 욕설부터 시작됐던 자신이 입술이 떼어버리고 싶을 정도다. "너!" ".......??" "이재진, 너!" 앞에 앉은 두 사람의 얘기만 듣던 수원이가 입을 연다. 재진이를 노려보는 눈이 아까전부터 무너져 있는데도 남은 자존심으로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왜? 장수원 뭐, 할말 있냐?" "........" 벌써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지 않아도 재진인 그가 할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원이가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놀라진 않는다. '화났다고 깽판칠려나? 아니면..' "뭐 할말 있냐구?" 고집스럽게 노려보는 눈동자에 얇은 유리알이 박히는 듯한 착각을 갖는다. '설마..' 수원이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앞에 있는 체리콕을 들어 올렸다. 입에 닿은 빨간 액체가 달콤하고 시큼하다. "저 새끼, 사랑해?" "푸핫." 입에 댔던 체리콕이 탁자위로 뿌려진다. 당황스런 눈으로 수원이를 쳐다보는 재진이. "사랑하냐구?" "........" "네 녀석 옆에 있는 저 새끼 사랑해?" "장수원." "저 새끼냐? 나냐?" "........" "말해!! 저 새끼야?! 나야?!!" "........" 신경질적으로 물어떼는 수원이의 입술. 불안한 듯 흔들어 대는 맑디맑은 눈동자. 며칠 밤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해 거칠어진 피부.. "말해! 이 개같은 새꺄!!" "훗, 장수원. 뭘 원해?" 68)****** 매듭. "양다리 걸치지 말고 선택하라구!!" "내가 뭘 어쨌길래?" 입가에 여유롭게 자리잡은 미소.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수원씨 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진아?" 재진이의 연기에 보조하는 감초스런 연기. '완전히 걸려들었군. 장수원.' "당신도 알고 있어야 할거야! 재진이 이 새끼 내 아파트에서 날 사랑한다고 날리 쳤다구. 그것도 얼마 안된.." "훗." 수원이의 행동이 우스운지 웃고 있다. 날 비웃는거야? 웃고 있는 얼굴에 불만이 어린다. 떨리는 손이 갑작스레 재진이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한가득 쥐었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저 새끼야, 나야? 어?!!" 두 눈동자가 재진이를 다그친다. 말해! 말하라구!! "어머, 수원씨 무슨 짓이예요. 이거 놓고 말해요!!" "넌 저리 찌그러져 있어!" 수원이의 손을 툭툭 때리며 말리는 토니를 밀쳐버린다. 하지만 또 한번 덤벼들어 수원이의 행동을 막으려 했다. "이거 놓고 말해요!!" "쉬폴, 넌 꺼져!!" 오로지 재진이의 눈. 말해. 말하라구.. '제발, 날 선택해.' 수원이의 손에 밀쳐지는 토니의 얼굴에도 미소가 스민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날 사랑한다고 소리쳤잖아!!" "하핫, 장수원." "양다리 그만 걸치라구. 둘 중에 누구야? 저 새끼야, 나야?" "........."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지금까지 장난이였어? 나한테 장난친거야?" "........." 소란스럽게 변한 카페는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이 테이블에 시선이 주목되었다. "날 선택해. 날 사랑한다며?" 간절한 눈동자. 자신을 선택하라며 매달리고 있다. "널 선택하면 날 사랑할거야?" "........" 몹시 흔들어대던 손에 힘은 놓는다. 하지만 여전히 재진이의 멱살을 붙들고 있는 수원이. "증거를 보여봐." "증거?" "토니 녀석은 길 한복판에서도 날 붙들고 키스할 놈이야. 너, 그렇게 해줄 수 있어?" '어쮸, 이재진이 이것봐라. 영화찍어라~ 영화찍어~' 재진이의 말에 얼굴이 붉혀진 토니가 멀뚱히 수원이를 쳐다보고 있다.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내게 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안 그래, 장수원?" "........."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거 놔." '네가 원한다면 나 뭐든 할 수 있어.' "사.랑.해!" 카페가 울려 퍼져라 아주 뚜렷하게 말하는 수원이. 예상밖이였다는 듯 큰 눈을 뜨는 재진인 가슴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다. "뭐.. 라고 했어? 안 들려." "사.랑.한.다.구!!" 수원이의 얼굴이 닿는다. 주위의 웅성거림 같은 건 의식하지 않고 재진이의 입술을 훔치는 수원이. 재진이가 자신의 것이라고 만천하에 알리는 것처럼 길고 깊은 키스에 열중한다. '내가 이렇게 까지 했는데, 지금부터 딴 놈 쳐다보면 나한테 죽을지 알아.' 깊게 들어오는 수원이의 숨결이 재진이 가슴속에 가득하다. 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몹시 소란스러운 배경. 두 사람을 지켜보던 토니는 얼굴을 돌려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주시한다. '우혁이가 도착했을까? 엔지가 한번도 나질 않아서 너무 빨리 끝났는걸. 이쯤에서 내가 퇴장해야 하는데, 밖은 추울 듯 싶고. 우혁아, 텔레파시가 통한다면 지금 달려와. 재미없게 너무 빨리 막이 내렸어.' "역시 서울은 서울이구나. 들어오자마자 막히.." 성훈이의 시선을 빼앗는 곳. 곁눈질로 성훈이를 쳐다보던 지용인 성훈이의 시선이 닿은 곳을 찾고 있다. "뭘 그렇게 봐?" "........." "성훈아?" "내가 잊고 있었어." 중얼거리는 음성. 입가에 번진 공허한 미소는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성훈아, 왜 그래?" "잊고 있었어." '저기에 앉아 있는 저 사람. 지원형의 동생.. 그리고 보니 너와 함께 한 시간동안 형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 내가 형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니.. 나도 형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가? 하루도 형을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미칠거라고. 난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래 성훈아? 어?" 차창을 열고 카페 유리 막 너머로 비추는 두 사람을 보고 있다. '내가 형을 잊고 있었어. 지용이 너와 함께 한 시간동안 말이야.' "왜 그래? 누구 있어?" "........." 지용인 혹시나 성훈이 지원을 보았을까 하는 눈으로 불안해한다. 신호가 바뀠지만 지용이의 흰색 티부론는 움직여지질 않는다. '나, 지원형을 너와 있는 시간동안 잊고 있었어. 단 한시간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내가 믿었던 그 사랑을.. 너와 함께 지낸 1박 2일의 시간동안 잊고 있었어.' "성훈아. 왜 그래?" 눈물이 맺히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멈춰지질 않는다. '아주 까맣게... 내가.. 내가 그토록 사랑한다고 믿었던.. 나의 형을 잊고 있었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랑할거라 다짐했던.. 나의 형을... 나의 형을 내가.. 잊고 있었어. 내가 믿고 있던 사랑을 까맣게.. 아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과연 사랑이란건 중독성이 있는걸까? 지금 내 눈에 비치는 널 보면 중독성이 있는 것도 같지만..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아까 전화론 일찍 들어온다고 해놓고는.." 하늘은 정말 푸르더라. 너도 내가 본 하늘처럼 맑아 보였으면 좋겠어. "일찍 들어 올려고 했는데." "저녁은 먹은거야?" 톡톡 튀는 음성으로 지용이의 말을 잘라 버리고 그의 변명따윈 듣질 않는다. "어? 어." 말을 버벅거려. 내가 형에게 보였던 것처럼.. 너도.. 내 앞에서 발톱을 잃은 맹수처럼 자세를 나추고 버벅거린다. "하암~ 정말 지루해서 안되겠다. 집에 있다보면 너무 지루해. 미칠 것만 같다니깐." 소파에 몸을 던져 놓고는 TV 리모콘과 오디오 리모콘 중 뭘 들까 망설이다 오디오 리모콘을 들어올린다. 잠시 후 잔잔하게 들리는 음악은 성훈이 입속에 베여있는 발라드 노래. 작게 웅얼거리는가 싶더니 점점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웃옷을 벗고 거실로 눈을 돌린 지용이가 성훈이의 행동을 지켜만 본다. 다리를 까닥까닥 움직이면서 박자를 맞춰가며 노래를 부르는 그가 하루종일 지루함을 지용이에게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오늘 뭐했어?" "눈을 감아도 찾을 수 있어~ 세상이 끝나서 깊은 어둠에 묻힌대도~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내 뺨에 흐르던 그대 눈물을 그 사랑을~" 지용이의 질문엔 아랑곳없이 더욱 목터져라 부르는 성훈이가 지용이가 늦게 들어 온 것에 대해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오늘 정말 사정이 있었어." "나 가득히~ 안은 그대 모습에~~" "전화할려고 했는데, 그럴 시간마저.. 없었.." "지용아!" 갑작스레 일어나선 지용이를 빤히 쳐다보는 성훈이의 눈동자가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 "우리 노래방 가자!" "어. 어?" 당황한 채 얼굴이 붉어지는 지용이가 생글거리는 눈동자에 말이 나오질 않는다. "노래방 가자구!! 노래방!! 나 넘 심심해서 죽을 것 같단 말야. 지용아, 우리 노래방 가자. 너 나랑 노래방 간적 한번도 없잖오?" "그건.." 노래를 흥얼거리지도 않는다. 음악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는 지용이기에 노래방을 찾은 적도 없었고, 마이크를 들고 목터져라 노래를 불러본 적도 없었다. "왜? 시로? 내가 가고 싶은데도 시로?" 삐지겠다는 말투. 생글거리던 눈이 가는 실눈으로 만들어 지용이를 째려보고 있다. "그건.. 그건 성훈아." "나 노래방 가고 싶어. 너 노래하는 거 보고 싶단 말야." "나.. 노래 못해." "난 네가 노래 부르는 거 보고 싶어. 듣고 싶어." "나 음치라서." "휴--- 심심해 미치겠어~" 단념했다는 듯 다시 소파에 몸을 실은 성훈인 푸념어린 음성으로 억지스레 노래를 따라 부른다. "노래는.. 성훈이만 부르면 안될까?" 기어가는 음성으로 성훈이에게 말하는 지용인 죄지은 사람마냥 성훈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나 혼자서 무슨 재미로 부르냐?" "다음에.. 난 다음에 보여주면 되잖아. 다음에." "싫어. 가봤자, 재미없겠다." "정말 보여줄게. 이번엔 성훈이 노래하는 거 보여줘." '내 앞에서 자신없는 표정으로 그러지마. 자신없는 음성으로 내게 말하지마. 그런 눈으로 내게 애원하듯 그러지마. 어깨를 펴고 날 쳐다봐.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내 앞에 있지 말라구.' "옷 가져올게." '내 앞에서 당당해져. 나, 아무것도 아니야. 넌 나보다 더 잘란 사람이야. 전처럼 내 앞에서 악을 쳐대도 좋아. 욕을 해도 상관없어. 내 앞에서 애처롭게는 행동하지마.' "나 술도 사줘." "어?" "술도 사달라고.. 술 먹고 싶어." "술도 못하는 놈이 무슨 술이냐?" "사줄꺼지? 사주면 노래 지겹도록 불려줄게." 69)****** 바보같이 나는. "눈치 못 채게 10분씩 추가 넣어 주세요." 지용이의 지갑에서 초록빛 나는 현금지폐가 카운터 앞에 있는 여자에게 내밀어 진다. "네, 알겠습니다." 카운터기에 현금을 집어넣는 여자는 지용이를 보며 코끝으로 웃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가 예사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것 마냥.. 뒤돌아 서는 지용이가 뒷 호주머니에 지갑을 집어넣고 안내되었던 룸안으로 들어간다. 양손에는 캔 커피와 오렌지 쥬스캔을 들고. "술이 아직 깨지 않았지?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잖아. 술도 약한 게 혼자서 5캔이나 먹고." 들어선 지용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모니터만 바라보는 성훈인 전주가 끝나자 건조한 입술을 움직인다. 작게 열어 중얼거리듯.. 그렇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 눈물하나 떨군 사이~ 모든 것들은 이렇게 빨리 사라지고 마는데~" 룸 안에 들어갔을 때엔 술기운에 쳐져있는 성훈이가 무릎을 끌어안고 화면을 주시하고 있다. 마이크를 들지 않고 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는 성훈이. "뭐해? 마이크 들고 부르지?" "내 사랑도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난 몰랐던 거야~ 너도 몰랐을 거야~ 너에게 누구인지~~" 쥬스의 핀을 따주며 성훈이 앞으로 내민다. 고개를 무릎에 붙이고 화면을 주시하는 눈동자가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한다. '피곤한 거지? 그래서 하품.. 한 거지? 술기운이 오르니깐 졸려서 그러는거지?' 일종의 바램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캔커피의 핀을 따고 한 모금 넘겨본다. "그때엔 어떻게 할래~ 아무도 네 곁에 없을 때~ 그때 내 생각이 난대도~ 내가 없다면 세상에 내가 없다면~~ 아니야~ 이젠 날 잊어~ 네가 슬픈 건 못 보겠어~~ 잊었다는 것까지 잊어~ 그래 줄 거지? 정말 내일부턴 나도 널 모를게~~" 주르륵--- 반짝이던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지는걸 보고는 지용인 긴 한숨을 쉬어버린다. '지원이 새끼 생각하는구나.' 나즈막히 들려오는 성훈이의 미성. 커다란 스피커에서 울려대는 반주에 묻혀 성훈이의 울먹이는 노래소리는 잘 들리진 않는다. "우리 그만 갈래?" "그 누구도 만나기 싫어~ 어떤 곳도 가고 싶지 않아~ 혹시 지금이라도 네가 나를 찾을지 몰라~ 그때엔 어떻게 할래~~" "성훈아 피곤하면." "아무도 네 곁에 없을 때~ 그때 내 생각이 난데도~ 내가 없다면~ 세상에 내가 없다면~~" "강성훈." "아니야, 그냥 날 잊어~ 네가 슬픈 건 못 보겠어~~ 잊었다는 것까지 잊어~ 그래 줄거지? 정말 내일부턴 나도.." 흐르는 반주부분의 가사를 읽지 않는다. 그저 울먹임뿐. 그리고.. "형을 모르고 싶어.." 또 한 방울이 맺혀선 떨어져 버린다. "........." "미워하고 싶지도 않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자꾸만.. 떠올라. 뭘하든지. 형이 내 앞에 있어." "........." "생각하지 않을려고 노력하는데도.. 자꾸만 형이 내 앞에 나타나는 거 있지?" "........." "생각하면 안 되는데, 자꾸만 형이." "성훈아, 그만해. 듣기.. 싫어." "지용아, 나 형이 지금.. 너무 보고 싶다. 형이 보고 싶어서." "........." "보고 싶어서 눈물이 자꾸만 나." '멈춰..강성훈.' "내가 네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 형을 생각하면 안되는데.. 형이 생각나." '제발 그만해.' "형이 했던 행동들도 모두.. 생각나. 형이 했던 말들도." '강성훈, 제발 닥쳐! 듣기 싫단말야!!' 긴 한숨에 엉켜진 성훈이의 음성이 술기운에 찌들어 진 듯하다. "네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지. 지용아?" ".........." "나, 네 앞에서 이러면.. 정말 안 되는 건데." ".........." "정말.. 네 앞에서만은 이러면, 정말 안 된다는 거 잘 아는데.." '제발 닥쳐.' "나 정말 이러면.. 나 자꾸 이러면. 벌 받을거야. 그렇지? 그렇지?? 지용아? 하하." 웃음으로 넘기려는 성훈이가 무릎에 얼굴을 숨긴다.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싶었는지, 예약해둔 곡이 몹시도 시끄럽다. 가만히 성훈이를 바라보던 지용이가 몸을 일으켜 성훈이 옆으로 가서 소리없이 앉는다. 긴 한숨이 연이어 나오고 성훈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지용인 자신의 손이 굉장히 머뭇거리고 있다는 걸 느낀다. "성훈아, 고개 들어와. 응?" "........." 속에서 일어난 광분은 삭힌 채로 그의 아픔을 포옹해보려고 노력해본다. '술기운에 그러는거야. 그렇지? 널 이해해야 하는거겠지? 내가 지금 화를 내면 안 되는 거야. 성훈이 널 때려선 안 되는 것이고.' "성훈아." "........." 굉음에 가까운 음악에 지용이의 음성은 시끄러운 전자음에 흩어져 버린다. "성훈아, 얼굴 좀 들어봐." 조심스럽게 성훈이의 얼굴을 들어올리고는 그의 얼굴을 시야에 담는다. "나 왜 이럴까? 난 왜 이 모양이지?" ".........." "나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 걸까? 난 도대체 왜 이렇게만 살아야 하는거야?" ".........."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내가 무슨 죽을죄를 졌길..." 울먹임을 듣기 싫었는지 성훈이의 입술을 막아 버린다. 길게 늘어진 소파위로 성훈이를 거칠게 눕혀버리고는 그의 울먹임을 막아 보려는 듯 떨려대는 입술속으로 아니 그의 가슴속으로 지용이의 혼을 불어넣는다. 성훈이의 남방 속으로 손을 집어놓고 그의 가슴을 쓸어주고. 살그머니 빠져나가는 손은 성훈이의 바지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예약해 두었던 곡은 조용한 곡으로 바뀌었고.. 한숨을 길게 내쉬려는 성훈이의 입술은 자꾸만 지용이의 입술로 막아져 버린다. 술기운이 체 가시지 않은 성훈이에게 양주 반병을 비우게끔 만들었다. 가까운 호텔로 들어서자마자 남방을 뜯어버리고는 하얀 가슴에 붉은 자욱을 세겨 넣었다. 침대에 눕히기도 전에 성훈이는 알몸이 되어 있었고 얇게 깔린 카펫위에서 두 사람이 엉킨 채 비벼 대기도 했다. 새벽무렵 갈증 때문에 일어난 지용이가 담배하나를 물고는 양주병에 남은 소량의 술을 식도로 넘겼다. 시체처럼 늘어진 성훈이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일어서는 지용이의 입속에서 콧노래가 세어나온다. '정말 행복하게 해줄게. 이제 내 앞에서 울지마. 내가 널 울리지 않을거야. 그러니깐, 네 머리속에 그 자식. 지워버려. 나만 생각해. 나만.' "으음." 속이 뒤틀리는 건지 몸을 뒤척거리는 성훈이가 고통스럽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쥐고 있다. 열이 나는지 핑크빛으로 변한 얼굴에 땀방울이 가득하다. "성훈아." 성훈이의 이마에 맺혀있는 땀방울에 손을 데고 닦아 내린다. 감긴 눈커플이 파르르 떨리더니 안정을 되찾고 다시 꿈속을 헤매는 것 같다. "사랑해. 성훈아, 사랑해." 성훈이의 얼굴위로 자신의 얼굴을 대는 지용이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랑해. 널 정말 사랑해." 작게 들리는 성훈이의 숨결이 지용이의 뺨에 열기를 느끼게 한다. "널 죽여서 내 곁에 묻고 싶을 정도로.. 널, 사랑해." 사.랑.해... 악보를 들고 지용이 앞에선 사내아이의 머리색은 구리빛이다. "선배 피아노 치실줄도 아세요?" 분명히 강당 밖에서 들리던 음성은 지용이의 것이였다. 감미롭게 들리던 음성은 사내아이가 들어서자마자 멈추어 버렸고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는 지용이만 남아 있었다. "선배 노래 잘하시던데, 가수해도 되겠어요. 진짜 지용선배 맞아요?" 멎젓은 웃음은 그의 수줍은 얼굴을 감추려고만 한다. "참, 선배 왜 절 찾으셨어요?" "부탁할게 있어서." "부탁이라니요?" "혹시 알고 있는 째즈카페 없니?" "째즈카페요?" "응." "빌리시려구요?" 열어놓은 창문사이로 들어오는 미풍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진 입가의 미소.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지용이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 있었다. "비용이 꽤 될텐데요. 카페는 뭐에 쓰시려고 그러는데요?" "노래만 부를거야. 분위기 좋은 카페 없니?" "제가 아는 형이 카페를 하는데. Billy's Bar 라고 하는 분위기 죽여주는 카페가 있어요." "그래?" "애인 생겼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만 혹시 기념일 치루시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지용이가 미궁에 묻히는 미소만 짓는다. "선배가 이런 면이 있었다니. 여학우들이 알면 모두 통곡 하겠는걸요!" 지용이의 미소에 따라웃는 사내아이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몇명이나 초대 하실거예요?" "단 한사람." "한사람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후배에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눈가에 접혀지는 주름은 이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단 한사람. 나의 성훈이. 그에게 들려줄게 있어서. 그가.. 내 노래를 듣고 싶어해. 그가.' 나란히 선 지원이와 은주가 한쌍의 원앙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아들이지만 깔끔하게 차려입은 까만 정장이 지원이의 모습을 더 빛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하늘빛 투피스를 걸친 은주도 시선을 모르게끔 꾸몄다. 노부부 앞에 공손히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는 지원이의 얼굴이 몹시 상해있다. "피곤한 게로구나." "네." 쌀쌀맞게 대꾸하는 아들의 시선은 은장군의 시선을 마주하질 않았다. "아버님, 어머님 전화 자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제가 정신이 없어서요. 그 동안 두분 건강은." 은주의 나긋나긋한 음성이 지원이의 인상을 더 구겨지게 만든다. 애를 쓰는 은주의 음성은 저편으로 몰아버리고는 지원인 고집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피곤합니다. 그만 쉬겠어요." 노부부의 답을 기다리는 지원이가 곧 일어설 것처럼 자세를 취한다. 냉정한 음성은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노부부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 윗 층에 올라가서 쉬려무나." 고집스럽기는 은회장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입가에 여유스런 미소를 담고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층으로 올라서자마자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어버리는 지원이가 침대에 몸을 맡긴다. 뒤따라 들어온 은주가 몇마디 건네자 귀찮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고 다시 침대에 고개를 묻었다. "지원씨. 씻구.." "나가." "네?" "나가라구." "지.. 원씨??" "나가란 말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지원이의 음성에 이를 악무는 은주가 불만에 어린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본다. "제게 화난 게 있나요?" "닥치고 나가." "여행내내 차갑게 대하시고, 집에 들어서자 하는 소리가.." "귀까지 먹었어? 나가란 소리 안 들려??!!" 일어나기 싫은 몸을 일으켜 은주를 쏘아보는 지원이가 침대옆에 있는 조명등을 손을 쳐서 부셔버린다. "지원씨?" 황당한 듯 쳐다보는 지원이가 저렇게 난폭했는가를 떠올려본다. 자신이 꿈꿔왔던 것과는 다른 생활. 잘못된 결혼. "하긴. 너 같은게 뭘 알겠어? 웃는 것조차도 제대로 못하는게." 입을 삐죽거리며 차갑게 내뱉는 말들. 지원이의 괴팍한 어투에 더 이상 참기 힘든지 은주의 인상이 바꿔버린다. 상냥한 음성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지원을 내려다보는 은주의 따뜻한 시선도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그 성훈인가 하는 여자." ".........." "결혼전 그 여자랑 어떤 사이였는지.." "여자? 하핫.. 하하하하!" "그 여자 누구죠? 누구길래?!" ".........." "도대체 누구길래 당신 이러는 거죠? 왜 제게 이러는 거냐구요!?" "성훈인 여자가 아니야. 너처럼 허영에 들뜬 여자가 아니라구." "지원씨??" "성훈인 내가 사랑하는 남자지. 넌, 그와 내 생활을 보호해줄 보호막에 지나질 않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은주는 눈앞이 깜깜해짐을 느낀다. "남자? 남자를 사랑한다구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절 내 쫓으려 하지 말아요. 당신의 아픔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구요!!" "사랑해서 결혼했다? 우리 집안을 보고 결혼한 게 아니고?" 꼬인 어투는 결혼한 순간부터 이어졌다. "지원씨, 전 당신을 오래 전부터 사랑해 왔다구요. 당신이 절 처음 본 순간이 아니라 그전부터.." "당신집은 돈이 많고 우리집엔 권력이 있고. 아주~ 좋은 만남이야." "지원씨!" "그런데 어떡하지? 난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 흥미가 없다구. 손도 데기 싫어." "........." "당신이 성훈이라면 모를까? 하하하하핫." 웃음소리는 끓이지 않는다. 은주를 비웃는 건지. 아니면 자기자신을 비웃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녀석 생일이 며칠 남질 않았구나. 성훈아, 내가 데리려 갈게. 이젠 너의 손놓지 않을거야. 내 앞에서 웃게만 해줄게. 혹시, 지금 울고 있는 거 아니지? 울지마.. 내가 데리려 갈 거야. 영원히 널 내 품에 안고 살 거야.' “ 성훈아, 이제 널 행복하게 해줄게. 울리는 일따윈 하지 않는다. 약속하마. 다신 울리지 않는다. 다시는... ” 70)****** 내 맘을 알고 있니? "어휴-- 내 목언저리 좀 봐. 몇 일이 가도 없어지질 안잖아. 다시 한번 이러면 정말.." "거울 그만 보고 옷이나 입어." "이번엔 또 어딜 가자는 거야?" "어딜가든 그냥 아무말없이 따라 나서주면 안되냐?" "내가 벙어리야? 아무말도 안케?"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는 거니깐 그냥 따라와." 며칠동안 지용인 내 몸에 손 하나 까닥대질 않았다. 호텔에서 돌아온 날, 난 그에게 소리를 버럭 질러가며 내 몸에 묻은 그의 흔적을 씻고 또 씻어냈다. 그가 지켜보는 공간 안에서. 그의 시선을 받으며.. 의식하며 씻고 또 씻어냈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 지용이와의 잠자리는 그다지 유쾌하질 않다. 아니 거부하고 싶다. 그를 위해서. 그를 강성훈이라는 늪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어딜가는건데?" "키스해주면 말해줄게." "어휴--- 색마같으니라고. 틈만 주면 저래." "여긴 뭐하는 곳이야? 엉? 손님 하나도 없네?" 이리저리 둘러보는 맑은 눈동자가 카페주위를 맴돌고 있다. 푸른빛으로 떨어지는 네온싸인이 성훈이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여기 앉아." 의자를 빼어주는 지용이가 성훈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여긴 왜 손님이 하나도 없오? 분위기도 춈 좋은데." 입술을 쭉내밀며 의아하다는 눈동자를 띠고 있다. 지용인 고개를 살짝 흔들거리며 작게 미소를 띄어 준다. "잠깐만 기다려." 의자에 앉혀주고는 카페 중심에 위치한 무대로 올라가는 지용이가 한참 무언가를 손대는가 싶더니 주위가 어두워지고 무대 위에만 황금빛 조명등이 들어왔다. 황홀한 조명등에 비춰진 지용이의 모습이 지금껏 보았던 그의 모습 중 가장 멋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하는 거야? 고지용." 의문을 가지고 작게 중얼거리던 성훈인 지용이가 마이크 앞으로 다가서자 아무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눈빛의 지용이가 그의 입을 막는 것만 같았다. 톡톡-- 마이크를 두 어번 두들기던 지용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 칠 줄도 모르는 게 왜 피아노 앞에 앉는 거야? 오늘따라 저 녀석 왜 저렇게 폼잡고 날리지?' 의문은 더해가지만 그는 묻지 않는다. 그저 지용이가 이어갈 행동을 말없이 주시하고만 있다. 잠시 후 둘만이 있는 카페에 피아노 선율이 흘러 흩어진다. 구슬프지만 아름답게. 지용이의 긴 손가락이 흰건반과 검은건반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지금 지용이의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만 비춰진다. '피아노.. 배웠었어??' 의문은 더해가지만 마이크 쪽으로 입술을 놓는 지용이 때문에 머릿속에서 떠올려지는 건 접어 버린다. ♪ 내 마음 알고 있니. 너 없는 삶이란 건 한번도 꿈꾼적이 없는 나란 걸.. 널 처음 만났을 때 하늘에 맹세했어. 이 세상 끝날까지 너를 지킨다고.. ♪ '뭐야? 고지용. 지금 너 뭐하는거야?' 생각 같은 건 떠오르지 않는다. 이어지는 지용이의 음성에 자꾸만 빠져든다. 늪에 빠져드는 것처럼.. 지용이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성훈인 빠져들고 있다. ♪ 어젠 많이 울었었지. 너의 눈물 보며 나도 많은 걸 알았어. 항상 나 혼자만 너를 사랑하는 줄만 알았어. 한번도 니 마음 말한 적 없잖아. 이 세상 행복 다 준다해도 너와 바꿀 순 없는 걸 알아. 세상이 내게 준 행복 그게 바로 너라는 걸 알아. 감사해 널 만날 수 있으니. ♪ 간주가 흐르고 피아노 건반위로 눈을 내려놓는 지용이의 눈동자에 성훈이의 두 손이 모아진다. 두 손을 모으고 그가 불려주는 노래에 열중을 한다. 부드럽게 울러 퍼졌던 지용이의 음색. 황금빛에 반짝거리는 유리알이 지용이 눈에 걸려져 있다. 떨리지만 정성스레 노래가사를 잇는 지용이의 입술이 성훈이의 가슴 한구석을 아프게 건들어 버린다. 찡해오려는 가슴을 어떻게든 쥐여보려 하지만 쿡쿡 찔러대는 가슴은 좀처럼 물러설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가슴속으로 두 손을 모으고 심장쪽에서 들끓어오는 눈물을 참아 보려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성훈이의 힘으론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피아노 선율. 두 사람만의 공간.. ♪ 우리 함께 있는 동안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은 하지 말아. 서로 미워한다는 게 아마 많이 힘들테니까 그래도 밉다면 조금만 미워해. 우리의 사랑 하늘이 우릴 갈라놓을 그날까지 난 너를 사랑하고 싶어. 그런 내 마음을 받아주겠니? 고마워. 널 사랑할 수 있어.. ♪ 피아노 선율은 아쉬움을 가지고 멈춰 버린다. 환호성도 없는 공연이다. 단 한사람을 위한 공연. 성훈이만을 위한 지용이의 라이브 콘서트. 피아노 앞에서 일어서는 지용이가 고개를 돌려 성훈이를 바라본다. 두 볼에 길게 그어진 물기는 황금빛에 반짝거린다. "성훈아, 내 곁에.. 영원히 있어줘. 날 떠나지 말고 영원히 있어줘. 넌 나에겐 특별한 사람이니깐. 처음부터 넌 내게 특별하고 소중했으니깐. 내 삶의 일부니깐." ".........." "내 삶의 일부니깐, 날 떠나지 말아. 네가 떠나버리면.. 나라는 존재는 사라져 버려. 그러니깐. 내 곁에서 날 붙들어줘. 날 잡아줘. 내가 방황하지 않게." "..........." "네가 떠나버리면 난 나 자신을 놓아버릴지도 몰라." "..........." "내가 날 놓지 못하게.. 네가 날 잡아줘. 네가.." '놓다니? 그 말뜻이 뭐야?' "내가 날 놓지 못하게. 네가 날.. 제발 내 손을 잡아줘. 내 손을 네가 잡아줘." 애절하게 들리는 음성은 노래가사보다 더 슬프게만 들려온다. 두 눈 가득히 맺혀있던 유리알의 파편들이 볼에 그어진 길을 따라 다시 한번 가려 지른다. "난 바보처럼.. 널 너무 사랑해. 이런 나 자신을 멈출 수가 없어. 너에게 너무 깊이 빠져버려서.. 네가 없으면 안돼. 난 네가 없으면 죽어. 난 사라져 버려. 난.." ".........." "사랑해. 난 널 사랑해." ".........." "사랑해." ".........." 답을 하지 않는 입술은 자꾸만 떨고만 있다. 답이 없는 입술의 주인의 눈에도 유리알들이 가득히 박혀져 있다. 긴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울먹거림을 막아 보려는지 심호흡을 하기도 한다. 왼쪽 눈동자에서 샘이 넘쳐흐른다. "성훈아, 사랑해. 사랑해.." ".........." 또 다른 길을 만든다. 마이크에 담겨지는 숨결이 애틋하게 들려온다. 애틋함에 숨이 막혀온다. 저렇게 말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단 한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자기 존재를 상실해버린 사람이 있었던가? 자신이 사랑을 쏟아 부었던 사람은 저런 말 한마디 해주질 않았다. 지금... 성훈인 지원이라는 실체를 잊어버린 채 평정하고 싶어진다. 잊어버린 사람은 떠오르질 않는다. 오로지 자신 앞에서 눈물을 길게 늘어트리고.. 자아를 상실해버린 그만 보일 뿐이다. '너무... 행복하다. 나만을 위해서 이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지용아, 나 지금 너 때문에 가슴이 아파와. 너의 두 눈에 어린 눈물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다른 한사람에게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게. 너무 날 아프게 해. 이런 특별함이 익숙하지 못하다는 게 너무 아파. 넌 당연하다는 듯 내게 말하는데.. 난 어떻게 된게 네가 해주는 것들이 힘에 겨울까? 왜 익숙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걸까? 왜 받는다는 게 두려운 걸까? 날 이토록 아껴주는데..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데.. 내가 매일 듣고 싶어하는 말들과.. 내가 꿈꿔왔던걸 네가 다 해주고 있는데.. 난 왜 다른 곳만 보고 있었을까? 왜 너의 마음을 피해야만 했을까? 넌.. 날 너무 기쁘게 만들어. 끼어 들 수 없는 내 허전한 자리에 네가 자꾸만 들어 설려고 해. 그리고.. 난 너의 문을 두들기고 싶어져. 너의 문을 열고 너의 품에서 편하게 살고 싶어져. 널 내 늪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으면서도.. 나 지금 욕심이 생긴다. 지용아, 나 욕심이 생겨...' "눈 비비지마." 짠 눈물에 뻑뻑해진 눈동자를 손등으로 비비고 있는 성훈이의 손을 지용이가 잡아 내렸다. "눈이 자꾸만 따끔거려." "어디 봐봐." 맑은 눈동자가 붉은 줄로 가득하다. "약국 갔다올게. 잠깐만 기다려.." "아니.. 괜찮아." 차문을 따고 내리려는 지용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 질거야." 지용이를 향해 방긋 웃어보이지만 그 웃음은 그저 보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따끔 거린다며?" "나보다 네가 더 따끔 거릴걸." "난 아무렇지도 않아." "치. 모가 아무렇지 않아? 눈이 두 배로 부었는데.." "붓기. 네가 빼주면 되잖아." "어?" "네가 빼죠. 너의 입술로.." "쳇. 고죵! 갈수록 음흉해지는 것 좀 봐." 성훈이의 삐죽거림에 작게 웃는 지용이가 핸들위로 손을 놓았다. "뭐 좀 먹을까? 시간이 너무 늦었나?? 성훈아, 배고프지? 생각해보니깐 저녁도 걸렸네." "지용아.." 작게 들리는 음성에 고개를 돌린다. 진지하게 깔리는 그의 음성에 지용인 긴장하게 된다. '아픈 말은 하지마. 떠나겠다는.. 날 위한다는 소리는 더욱더.' 오랫동안 보아왔기에 성훈이가 진지하게 입을 열 때마다 두려움을 느낀다. "나, 노력할게." "어?" "노력.. 한다구." 수줍게 말하는 성훈이가 고개를 내려놓는다. "그 말. 내가 듣고 싶은 말로 해석해도 되는거야?" 눈을 쏟아질 것처럼 크게 뜬 지용이의 음성은 너무 가슴이 벅찼는지 울먹거리는 것 같다. 성훈인 고개를 끄덕거리며 뜯어먹은 손톱 근저리를 만지고 있었다. "나, 너 안아도 돼?" "응?" "나 지금 너 한번 안아봐두 되냐구?!" 멍청하게.. 너무 좋아서 웃고 있는 지용이가 성훈이의 고개를 들게 만든다. '그렇게 좋니? 내 말 한마디가 널 그렇게 기쁘게 만드냐구?' "안...될까?" 어렵게 말하는 그가 성훈이에게 보채고 있다. "피곤해. 집으로 가자." 건조하게 말을 흘리는 성훈이. 실망했는지 핸들로 다시 손을 얹는 지용이가 시동을 걸려고 한다. 하지만 뭐가 그리좋은지 신이 난 지용인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자꾸만 입술을 열고 웃고 있다. 그런 지용이에게 손을 뻗는다.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하얀 손을 놓았다. "이렇게.. 붙들고 있으면 되는거지?" "성훈아." "바보. 운전 안 할거야? 왜 쉴새없이 울어대?" "지용아." "응?" "나 일하고 싶어." "일?" "응." "갑자기.. 무슨 일?"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나 영어 잘하잖아. 가만히 놀고먹고 싶진 않아. 썩이기도 아깝고.. 번역일 같은 것 좀 하고 싶어." "번역? 그냥 있어. 너더러 생활비 보태란 소리 안한다구." "생활비를 떠나, 너 없을 땐 너무 지루하단 말이야." "나 졸업하고 그때 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이나 하는 게 어때?" "고죵!! 너 둑을래!!" "어 알았어. 알았어. 알아볼게. 고만 꼬집어." "이 나쁜놈~ 내가 네 마누라냐? 내가 부엌떼기 줄 알아?" "강성훈, 나 운전하고 있잖아. 그만~ 그만~ 꼬집어. 그만!" "매일 내가 맞았으니깐 오늘은 네가 한번 당해봐!" "아, 강성훈 그만 꼬집어~" "낄낄~" 71)****** 夢中人(몽중인) "지원씨 제발 그만 마셔요." "이거 놔." "지원씨, 제발.. 이러지 말아요." "에씨, 이거 안놔!!" "아버님이 아시면 어쩌시려구 이래요? 지원씨!" 지원이 들고 있는 스카치잔을 빼앗아 드는 은주가 두 눈에 눈물을 흔건히 맺혀선 애원하듯 쳐다본다. "쳇, 이젠 별 게 다 날 막으려 드는군." "지원씨 제발." 저녁 무렵 시동생 수원이의 전화통화 후 지원이의 행동은 더욱 더 포악해 졌다. 그의 냉대는 좀더 심해졌고, 상스런 단어 역시 가리지 않았다. 시동생의 전화를 받고 얼굴이 굳어지던 지원이의 얼굴을 잊을수가 없다.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던 남편.. 떨려대는 손가락은 담배를 집지 못해 자꾸만 떨어뜨리기도 했다. 강하게만 느껴지던 눈동자는 잘못 본것인냥 여리게 흔들렸고 올빽으로 잘 넘겨있던 머리카락은 몇가닥 흘러 내려 그의 형상이 발톱잃은 맹수의.. 초라하게 남은 가죽 같았다. 구겨지는 셔츠와 신경질적으로 풀어헤쳐진 회색빛 넥타이. 그리고 바닥으로 나동그레지는 셔츠 단추들. "지원씨.. 제발. 아버님 보시면." 지원이의 셔츠를 붙들고 쓰러지듯 주저앉는 은주가 숨을 죽여 울먹거린다. 울먹거리는 소리가 깊이를 더해가고, 한숨을 쉬며 비틀대는 지원이 마시던 술의 병채를 붙들고 은주를 털어내 버린다. 소파에 쓰러지듯 눕는 지원이. 그의 입에서 조그마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세상 모든것을 상실해버린 쓸쓸한.. 그만의 행동.. 그만의 표현이였다. "눈을 감아도 찾을 수 있어~ 세상이 끝나서 깊은 어둠에 묻힌대도~" 구슬피 울어대는 은주의 울먹임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소파에 늘어진 그는 술병을 입에 대고 식도에 건조함을 젖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흥얼거리는 노래소리.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알아 들을수 없는 음이지만 그가 읖는 가사는 또렷하게 흘려 들었다. 말려지는 혀의 움직임이 정확하게 발음하려고 고집스럽게 움직이는것 같다. '나만을 위해 흘려주던 그 눈물이 그리워. 내편은 오로지 그애 뿐이야. 강성훈. 성훈이. 이 세상에 오직 내편이 되주는 나의 성훈이. 내가 죽으라면 정말 죽을 것 같은 녀석. 나만을 쳐다봐야만 하는 녀석. 나의 예쁜 녀석. 나만의 것.. 그런데.. 그 녀석에게 딴 사람이 생겼다구? 하하하. 그말을 믿으라구??' 취기에 움직여지는 입술.. 술병에 입을 대고 또 한모금을 들이킨다. 그러다 아예 술병을 입에 대고 벌컥벌컥 넘기기만 한다. 숨을 쉬지 않고 들이대는 술병의 내용물이 눈에 뛸 정도로 사라지고 있다. 미쳐 입속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한 술줄기가 하얀 셔츠에 갈색빛 길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갈색 피부에선 은은한 향수내음이 아닌 그의 입속에서 풍기는 내음. 지독한 술내음. 마신다. 한방울이라도 남지 않도록.. 지원이의 입속으로 털어 넣는다. 지금 그가 처한 현실이 몹시 고통스러운 듯 그렇게. "지원씨 제발 그만 마셔요. 자꾸 이런 모습 비추시면 전 어떻게 살라고 하는건가요? 지원씨!!" "쉬펄! 향수 좀 작작 뿌려!! 성훈인 너처럼 독한 향수 안뿌리고 다닌다구!!" 너무 그리운 얼굴. 성훈이의 얼굴이 꿈속에서 나타났다. 그는.. 지용이의 옆에서 해맑게 웃기만 한다. 자신더러 보라는 듯.. 꼭 보고 있으라는 듯 웃기만 한다. "지원씨." "그 자식이 아무래도 불안해." "지원씨?" "아무래도.. 그 자식을 찾아와야겠어." "........?" "그 자식이 고지용 그 새끼한데 넘어가기 전에 데려와야 겠다구!!" 불안해져 오는 지원이. 두 눈을 감는 그의 입술에 성훈이의 청초함이 아닌 은주의 입스틱 묻은 입술이 와 닿는다. '젠장, 나 왜 이렇게 불안 한거지? 강성훈은 나만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왜 자꾸 불안한거지? 은지원 뭐가 불안하거야? 도대체, 뭐가??!!' “ 새벽녘에 잠이 깼을 때, 내 곁에 있는 널 보고 난 울기도 한다. 이게 꿈이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난 내 볼을 사정없이 꼬집어 대기도해. 내가 사랑하는 너. 밝게 웃는 너의 얼굴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게 내 안면에 미소를 가져다줘. 하지만 익숙지가 않아서 언젠가 이 행복이 하루아침에 부서져 버릴까봐, 겁도 나. 내 곁에 머물러 있는데. 내 곁에서 웃고, 잠들고, 깨고.. 함께 아침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그러는데.. 난 네 곁에서 정말 행복한데. 너무 행복해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 겁이나. ” "번역일 재미있어?" "그냥, 그래." 지용인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는 성훈이의 무릎맡에 누워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피곤하지 않아? 아침부터 노트북만 쳐다보더니, 새벽내내 쳐다만 볼거야?" "이 페이지만 끝내구." "그만해라." "이 페이지만.." "쳇, 괜히 일 알아봤네." "너 피곤하지도 않아? 안 잘거야?" "너 자는거 보기전에 나도 안자." "지용아, 할 일없으면 가서 커피나 끓여와라." "커피? 안돼!! 너 오늘 커피 마신거 내가 본 것 만해도 세 잔이라구." "그러면 방해하지 말고 먼저 가서 자." 쉴새없이 사전을 들여다보다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지용인 입을 삐죽거리다 성훈이의 턱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야, 간지려. 손 치워." "얼마 받지도 않을텐데, 몰 그렇게 신경쓰냐? 내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이 얼만데." "내가 너처럼 부잣집 도련님이냐?" "내가 영원히 데리고 살텐데 왠 돈을 벌어?"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커피나 타다 줘." "커피는 절~~대루 안돼." "그럼 가서 자." 사전을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의문을 가지며 스페링 하나하나를 불러대기도 한다. 맑은 눈동자를 가리는 안경테가 빛을 내고 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사전의 얇은 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볼을 부풀리기도 하고 입술을 이리저리 돌리기도 한다. '넌 가만 둔다는 건 내겐 고통이야. 참기가 힘이 든다구.' 동그란 눈이 깜박거리기도 한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 고등학교 때 시험 공부한다며 함께 밤새 울 때도 지용인 책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성훈이의 하얀 얼굴. 그리고 열중하는 눈동자가 반짝일 때마다 심장이 콩닥콩닥 떨려댔다. 지금 성훈이의 모습도 지용이를 참기 힘들게 만든다. 지용인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잡아당긴다. "야, 나 지금 사전..읍.." 성훈이의 손에서 떨어지는 사전이 탁자위에 둑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소중하게 성훈이의 얼굴을 감싸고도는 손이 그의 머리를 놓아줄 생각을 하질 않는다. 성훈이의 목구멍으로 들이닥치는 지용이의 혀. 그의 타액. 그만의 거칠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는 입맞춤. 성훈인 자세가 불편한지 지용이의 얼굴에서 떨어질려고 안간힘을 써본다. 하지만 지용이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훈이. 거칠게 들어와 헐어버린 입천정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성훈인 빠져나가기는 무리다 싶어 허리를 좀 더 숙이고 지용이에게 몸을 맡겨 버린다. 조반은 8시 정도에 이루어 졌다. 불같은 성격의 은장군은 꼭 정해진 시간에 모든 게 행해져야 했다. 은장군은 지원에게 시선을 주고는 입을 연다. "오늘 지방에 있는 공장들 둘러보고 오너라." 은장군의 말에 고개를 쳐들어 대는 지원이가 놀란 듯 하다. 하루하루 거칠해지는 아들의 얼굴. 숨을 쉴때마다 풍겨져 오는 술내음에 몹시 노해야 하지만 은장군은 모른척 넘어가려 한다. "아버지 오늘은." "조금씩 배워 가야 하는 것 아니겠냐? 오늘 당장 내려가 보도록 해라." "아버지." "김기사에게 말해뒀다. 회사로 가지 말고, 얼굴 익힌다 생각하고 곧장 그곳으로 향하거라." 젓가락을 놓지 못하는 지원이가 은주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지원이의 시선을 받는 은주가 고개를 푹 숙이며 지원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 부들대는 주먹을 억지스레 참고는 힘없이 놓는다. '여우같은 기집애. 저년도 아버지편이군.' 생각 같아선 은주의 얼굴을 주먹으로 쳐버리고 싶지만 지원인 은장군 말에 수궁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한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나 오늘 출판사 갔다 올테니깐, 집에 전화해도 나 없을거야. 일찍 들어갈 거니깐. 나 전화 안 한다." 알아듣게 말하는 성훈이가 방글거리며 웃는다. 그 미소에 지용이도 작게 미소를 띄운다. "성훈아, 이거 받아." 성훈이에게 내밀어진 통장과 도장. 그리고 DEBIT CARD. "이걸 왜 나한테 줘?" "오늘 나가는 김에 뽑아서 써. 너 여름옷도 없던데, 옷도 사입고." "이런거 필요 없오. 내가 거지인 줄 알오?" "그러지 말고 받아둬. 내가 가지고 있으면 헛된 곳에나 쓴다구. 네가 관리해줘." "그러다 나 뒷주머니 차면 어쩔려구?" 눈을 동그레 뜨고 지용이에게 묻는 성훈이의 양볼이 또 부풀려 있다. 지용인 그런 성훈이의 표정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잡아끌었다. 성훈이의 몸은 지용이의 품안에 안성맞춤으로 들어온다. 그를 꼭 안은 지용인 성훈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에게 작게 속삭인다. "뒷주머니를 차든 마음대로 해. 돈 같은 건 필요 없어. 단지 너만 있으면 돼. 너만 내 곁에 있어주면 되는 거야. 돈 같은거. 난 필요 없어." 창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지용인 따뜻한 커피잔의 향을 음미한다.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그의 긴 머리카락이 긴 시간이 지났음을 암시해준다. '오늘 머리나 다듬어야겠어.' 입가에 스며드는 그의 부드러운 미소. 지금 성훈이와의 생활이 멈추어 버리기를 바라기만 한다. "지용선배 전화왔는데요." "전화??" '성훈인가? 오늘 전화 안한다고 했는데..' 후배의 손짓으로 연구실에 마련된 전화기 위로 손을 올렸다. "여보세요?" [오랜만이군. 고지용.] 그다.. 성훈이의 심장속에서 안위하는 사람. 지용이의 가슴 한구석에 잠들었던 떨림이 깨어나고 있다. "........" [집에 전화하니깐 아무도 없어서..] 그다.. 성훈이가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사람. 그가.. 자신과 성훈이의 사이에 들어오겠다고 말한다. 집에 있는 성훈이를 데려 가겠다고 말한다. 성훈이를 자신의 품에서 데려가겠다고.. 72)****** 사랑, 집착 & 중독 집에 황급히 들어선 지용이가 성훈이에게 건네주었던 자신의 핸드폰넘버를 두들긴다. 떨려대는 손놀림과 가라앉아 버린 가슴이 몹시도 쓰리다. '가지마. 넌 내 옆에 있어야해. 노력한다고 했으니깐. 제발 가지마. 젠장 왜 이렇게 떨려대는거야!!' 손에서 밀려나는 수화기를 침착하게 들어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잘 잡히지 않는 수화기. "어, 지용이 빨리 들어왔네." 흐려지는 눈동자로 뒤를 돌아봤을 때 그가 해맑게 웃고 있다. 하얀 봉투를 자랑하는 듯 그에게 보이며 맑게.. 활짝 웃고 있다. "나 보수 받았다~! 제법 두둑해~!!" 그는.. 해맑게 웃고 있다. '너, 날 떠나지마. 네가 떠나면 나 죽어. 죽어 버릴거야.' "몰 그렇게 생각해?" 골똘히 생각하는 지용이의 어깨를 두들기며 성훈인 말을 걸었다. 그 앞에 푸른 사과를 들고와서 과도를 집어드는 성훈이가 미소를 머금는다. 쭈그려 앉아 지용이를 한번 쳐다보다가 과일을 깎는 손을 주시하다가.. "지용아, 몰 그렇게 생각해? 응?" 지용이가 무얼 생각하는지 내심 궁금한 그의 눈동자가 지용이에게 물어온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생각 안해." "치, 니 이름 두 세번 불려도 못 듣는 것 같던데.. 몰 그래?" ".........." "무슨.. 문제 생긴 거야?" 사과 껍질을 벗기다 말고 지용이의 내면을 읽어보려고 한다. "성훈아." "응."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또 만약이래. 너 만약이란 소리하면 나 겁부터 나는 거 알아?" "그럼.. 혹시말야." "만약이나 혹시나 똑같게만 들리잖아." "그런가?" 작게 세어나는 그의 미소가 힘이 없다. '무슨 일 생긴 거 확실하구나. 형에게 연락온거니? 형을 본거니?' "말해봐. 무슨 말할려고 한거야?" "혹시." "그래 혹시?" "지원이가 널 찾으면 너.. 그 녀석에게 갈거야?" 얇은 유리막이 쳐지는걸 알아차리는 성훈인 지용이의 질문에 아무말도 하질 못한다. '바보.. 그런 소리 왜 하는거야?' "지원이가 널 데리려 오면 따라 갈 거야?" "........"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버리는 성훈이가 깎던 과일에 손을 댄다. 그런 성훈이를 흔들어서라도 대답을 받아 내고 싶지만 성훈이가 하는 말이 자신이 생각하는 반대의 상황이라면 지용인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는 성훈이가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한다. "너, 안...간다는 거지? 내 손잡아 준다고 했으니깐." "........" "성훈인 내 손잡아 준다고 했으니깐. 나 혼자 두고 안 떠난다는 거지?" 성훈이의 대답대신 지용인 자신의 바램으로 말하고 있다. '지용아, 왜 그러는거야? 아직도 그렇게 불안하니? 내가 하는 게 부족하니? 노력한다고 했잖아. 나 노력한단 말야.' "성훈인 내 곁을 떠나지 않을거야. 내가 널 사랑하는걸 아니깐.. 내가 성훈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걸 아니깐." 얇은 유리막 속에서 지용이가 멀어져 버린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을 포기하려는 듯한 눈동자. 극심한 공포심을 안겨주는 지용이의 공허하게 변해버리는 눈동자. '그런 눈, 보이지마. 나 무서워. 지용아, 그런 눈.. 싫어.' “ 내 불안함은 자꾸만 켜져만 가고 새벽마다 일어나 성훈이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제대로 잠이 들 수 있었다. 내 옆에서 새근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이든 그의 입술을 느낀 후에야.. 난 잠이 들 수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옆에서 아직 깨지 않고 잠든 그를 보아야만 난 내 하루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나의 속병은 조금씩 커져만 가고... 성훈이를 곁에 있어도. 내 앞에 있는데도.. 난 자꾸만 그를 의심하며 내 늪으로 좀 더 끌어당긴다. 그가 숨막힐 정도로.. 난 그를 내 늪으로 끌어들이기로 한다. 내 늪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끌어들이기로 한다. ” "씨폴, 이재진!!" 현관을 들어서는 재진이를 향해 들고 있던 책을 던져 버린다. "어라? 쌘대?" "내가 외박은 안 된다고 했지? 그런데 외박을 하고 들어와?!" 수원이가 씩씩거리든 말든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재진이가 얄미울 수가 없다. "내가 외박한다고 전화했잖아." "가능하면 들어오라고 했잖아!" "누가 외박하고 싶어서 외박했냐? 바람 나게 만드는 건 너 아냐?" "뭐? 바람나게 만들어?" 시큰둥한 표정으로 냉장고로 향하는 재진이의 뒷통수에 잡히는 걸 던져버렸다. '미워 죽겠어. 안 달란 새끼는 저놈인데 장수원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 "이딴 거 던져봤자 아프지도 않어. 좀 단단한 거 던져서 내 머리 깨봐." 서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왜 이렇게 보기 싫은건지. "나쁜새끼. 난 너 때문에 잠 한숨 못 잤는데 뭐?" "들어와봤자,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하는 게 누군데?? 내가 이 젊은 혈기로 독수공방 할 일 있냐??" '우씨, 저 새끼 생각외로 음큼하단 말야.' "어휴--- 그만두자. 논문준비로 복잡하단 녀석 견들이기도 싫어."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꺼내드는 재진이가 턱선으로 물을 흘러가며 마셔댄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수원이가 시선을 아래로 두고 나즈막이 속삭였다. "허락하면.. 외박 안 할거지? 밤늦게 까지 책 안들여다 보고 너랑 놀아주면.. 외박.. 안할거지??" 생수병을 입에서 떼는 재진이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수원이에게 눈을 돌린다.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헤메고 있다. 붉게 물들어 가는 양 볼이 순수한 아이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수원아." "........" "논문 끝날 때까지 만이다." "어?" "논문 끝날 때 까진 건들이지 않을게." "그 동안 계속 외박하려구?" 수원이의 당당하던 음성은 어느 날부터 사라져 버렸다. 중얼거리듯 말하는 수원이. 재진인 고개를 가로젓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띄어준다. "네 녀석 성격 뻔히 아는데 내가 바람 나겠냐? 어제 클럽에서 놀았어. 술도 마시고..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포카도 하고.. 됐니?" 그제서야 수원이의 눈동자는 자신만만한 눈동자로 변화된다. "네 놈이 그럼 그렇지? 날 두고 바람날 녀석 아니란거 나 다 알고 있었어." 장난스레 웃고 있는 수원이가 재진이에게 던진 얇은 잡지책을 들여다 본다. "야, 아침먹자. 어제 점심부터 굶었더니 속이 쓰리다 야~" "난 밥할 줄 모르니깐 네가 알아서 해 먹어." "집에 있으면서 밥 하는거나 배우지, 넌 책만 들여다 보냐? 어흐. 이거 걱정되는구만. 둘 다 요리하는 거 하고 거리가 머니." "아쉬운 놈이 알아서 지어먹어." "넌 전생에 공부 못해서 죽은 귀신 붙었냐?" "너처럼 무식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배워야 하는거야." "뭐? 내가 무식하다구?" 낄낄거리는 수원이에게 달려드는 재진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네가 내 품에서 눈을 비비며 깨는 게 좋아. 너 내꺼 맞지? 공부하고 결혼한다면 내가 요리를 배우는 수밖에.. 수원아, 네가 하고 싶은 거 뭐든지 하고 살아. 네가 행복하다면 난 뭐든지 다 좋아. 너만 행복하다면 말야. 그나저나.. 내일 요리학원이나 등록할까?' "어딜 갔다 온거야!!" "요 앞 슈퍼 갔다왔어." "누구 만났어? 너 떠날려고 한거지?" 안절부절못하는 눈동자. '지용아, 너 자꾸 왜 그래?' 내 손에 들여진 바게트빵과 신선한 과일들이 보이는 데도 지용인 내게 소리를 쳐댄다. 어딜 갔다와? 누구 만나고 왔어? 이게 지용이의 병일까? 내가 지용이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 저번에 내가 말을 하지 않고 나갔을때도 지용인 저렇게 말한다. 어딜 갔다 오느냐, 누굴 만난거냐, 떠날려고 한거냐. 지용이의 저런 모습에서 난 아픔을 느낀다. 불안하게 굴려대는 눈동자가 허공을 헤맬까 걱정되게 만든다. 영원히 몽중속에 갖쳐버릴 것 같은 지용이의 유리알같은 눈동자. 유리알처럼 부서져 버릴것만 같은 눈동자. 지용인.. 날 불안하게 만든다. "요 앞 슈퍼 갔다왔어. 너 아침은 간단하게 먹고 싶다고 해서." 그를 안심 시켜주기 위해 난 웃는다. '지용아, 이러지마. 나 네 곁에 있잖아.. 네 앞에 있잖아.' 하지만 현관을 들어서려 하자 지용인 내게 달려와 들고 있는 것을 던져 버리고는 내 웃옷부터 들춰 올린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굴려댄다. "이거 누가 이런거야?" 내 몸에 남은 흔적들은 모두 지용이의 것이다. 하지만 지용인 날 믿질 않나 보다. 정신을 놓을 것만 같은 음성으로 내 몸을 흔들어댄다. '누구야 누가 이랬어..' 하며 날 다그친다. "네가 이랬잖아." "너 나가서 뭔짓 했어? 누구 꼬셔서 놀다 들어 온거야?" 곧 내리 칠 것만 같은 주먹이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댄다. '나 이제 네 앞에 있잖아. 네 앞에 이렇게 서 있잖아.' "너 어디가서 뭐하다 왔어?!" 지용이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한다. 이성을 잃어버리는 눈. 공허하게 변해버릴 것 같은 눈동자로.. 정신을 놓을 것만 같은 눈동자로 날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지용아, 너 왜 이러는거야?' "나 슈퍼 갔다 왔어. 10분도 안 걸릴 것 같아서 쪽지 안써놓고 간거야.. 지용아, 정말 슈퍼 갔다 왔어. 가서 과일도 사고 빵집 들려서 빵도 사고.." 어떻게든 안심을 시켜야 한다. 창백한 얼굴. 파랗게 질린 입술이 몽상속으로 들어가는걸 막아야 한다. "나, 지금 네 앞에 있잖아. 지용이 앞에 이렇게 서있잖아." 내 말을 듣고 한참 후에나 그가.. 돌아오려고 노력한다. 내 멱살을 쥐었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들고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자신이 왜 그랬는가를 자책하며 흔들어댄다. "흑.. 흐흐.." 지금 그의 몸짓이 너무 가여워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 울먹거리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지용이. '내가 널 이렇게 만든거야. 너의 병을 내가 켜지도록 내버려뒀어. 내가.. 그렇지? 지용아..' 자책하듯 머리를 쥐어짜는 그를 내 품으로 끌어당긴다. "지용아, 그만.." 그가 내 어깨에 고개를 올려놓고 울먹거린다. 내 이름을 몇번 불려주고 '미안하다' 며 몇번을 중얼거린다. "내가.. 아침에 눈을 뜨기 전에 아무대도 가지마. 네가 날 떠나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만 가득해져. 이런 생각.. 하기 싫은데, 네가 보이지 않으면.. 난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도 이러기 싫은데." "안그럴게. 다신 안 그럴게. 네가 깨기 전엔 아무대도 안 갈게." 그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진하고 잔인하게 멍이든 그의 가슴을 헤아리지 못한 게 내 잘못이다. 그의 병을.. 난 치료 시켜 줘야 한다. 난 노력해야 한다. 다신 그가 불안하지 않도록.. 내가 안보여도 잘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한다. 난... 지금껏 지용이의 아픔따위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에게 새겨놓은 상처를 헤아려 본적도 없다. 내게 안겨 있는 지용이의 손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그의 손과 나의 손을 마주 잡게 했다. 지용아, 내가 널 이렇게 붙들면 되는 거지? 그러니깐 이제 이러지마. 난 지용이 곁에서 떠나지 않을거야. 지용이 곁에 있을거야. 나, 노력한다고 했잖아. “ 누구도 지용일 나무랄 수는 없다. 내가 그를 망쳐 놓았기 때문이다. 지용인 내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난 그를 모른 척 했다. 그 손을 잡아 주지 못한 댓가로 난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를.. 난 아프게만 했다. 그를 아프게만 한만큼.. 나도 되돌려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해."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스물 네 번째.. 정말 지겹게도 들려주는 지용이의 사랑한다는 소리. "그 단어 좀 아껴. 넌 쉴새없이 들려주냐?" 볼을 이리저리 부풀려가며 짜증섞인 어투로 말한다. "하하. 내가 넘 해프게 써댔나??" "그래. 너무 해프게 들려줘." "그래도 하루에 한번이라도 이 소리 안 들으면 이상하지? 아마 이상할걸. 뭔가 모자란 듯한 느낌도 들고 말이야." "쳇." 지용인 그제 아침에 내가 잠든 그를 두고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슈퍼에 갔다 왔을 때 불안하게 날 쳐다봤다. 들어서자마자 날 꼭 안고는 울기부터 시작한다. 난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내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게 된다. 여리디 여리게 변해버린 지용이를 볼때면 내가 지용이 곁을 떠나선 안된다는.. 아니 그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지용아, 나 오늘 서점에 갔다 올거거든. 낮에 전화 안 받는다고 이상한 생각하지마. 알았지?" 그의 눈동자가 쓸쓸하게 변한다. 그도 자신의 행동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 듯 싶다. 이성을 잃고 딴사람처럼 행동할 때의 그를 떠올리는 것 같다. 불안하게 날 쳐다보며 흔들어대는 그의 힘. "지용아, 오늘 일찍 들어와라. 내가 스파게티 해놓고 기다릴게." "그래." "스파게티 싫어? 딴 걸루 해줄까? 응?" "........." "말해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 “ 그런 눈으로 있지마. 너의 늪이 굳어버리지 않게 내가 노력할게. 지용아, 그런 눈으로 제발 있지마. 내가 날 더 미워하게 만들지마. 내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내가 노력할게. 내가 노력해서 지용이 네 늪으로 빠질게. 너의 늪주위를 배회하지 않게 해줘. 내가 늦게 찾아가게 만들지마.” 73)****** 망각의 그림자 -Ⅰ "으음. 제발 가지마. 내 손놓지마." 고요한 새벽이었다. 지용이의 신음소리에 잠이 깬 성훈이가 조명등에 비춰지는.. 땀에 젖은 얼굴을 들여다보고 기겁을 한다. "지..지용아!" 다급하게 그를 흔들어 깨우지만 그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손을 놓지말라며 울먹이는 그가 성훈이를 애달프게 찾고 있다. "지용아, 나 여기 있어! 눈을 떠!! 눈을 떠서 날봐!!" "내 손놓지마! 내 손놓지마!!" "지용아!!" 땀방울은 지용이의 온몸을 점령한 채 그의 몸을 싸늘하게 만들고 있다. "내 손. 놓지마!!" "지용아! 나 여깄어!! 성훈이 여깄어!!" 그의 손을 꼭 쥐고는 흔들기 시작한다. "제발.. 가지마!! 흑." "지용아, 나 여깄어! 제발 눈을 떠!!" 성훈이의 하얀 눈물이 지용이의 얼굴로 스며든다. 그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과 함께 섞여서는 그의 턱 선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다. "일어나! 고지용!! 제발 일어나!!" 찬 물수건으로 그의 몸을 정성스레 닫아주고 지용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수척해진 얼굴은 더 이상 열을 내지 않는다. 속병을 애달프게 앓고 있었다는 증거를 그가 보인다. 하얗게 튼 입술을 촉촉한 상태로 유지해주고 싶지만 축여주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술은 또다시 말라 버린다. 지용이의 이마에 얹여진 물수건을 집어들고 다시 한번 찬물에 담궈 꼭 짜낸다. 그리고 다시 그의 이마에 얹이려 할 때 지용이의 슬픈 눈동자가 힘없이 뜨여졌다. 강하게 보이던 그는 사라져 버리고 약하게만 느껴지는 그의 껍데기만이 남겨져 있다. 굶주림에 지쳐서 어이없이 쓰러져 버린 초원 위의 맹수처럼.. 사랑에 굶주린. "깼어? 아프면 말을 하지. 바보처럼 암말도 안 하냐?" 핀잔섞인 어투로 그에게 말을 걸어본다. 하얗게 튼 입술이 작게 움직이며 미소를 짓는다. 성훈이가 자신앞에 있다는걸 확인하려는 듯 힘겹게 그를 쳐다보았다. "병원가자. 일어 설 수 있겠니?" "........" "몸이 많이 쇠약해 진 것 같다. 지용아, 일어 설수.." "사랑해." 기어 들어가는 음성. 성훈인 참아냈던 눈물이 한순간에 눈동자에 아른거린다. 그의 애절하게 들리는 음성때문이 아니라 그의 눈에 비추는 자신의 모습이 그에겐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잡을게. 네 손잡을게. 그러니깐.. 그만 힘들어해." "........" "혼자서 힘들어하지마. 내가 널 지켜줄게. 흑흐. 이제는 내가 널 지켜줄게. 지용아, 이젠 내가 널 지킬게." 흐느낌을 손으로 막고는 지용이의 가슴으로 얼굴을 내려놓는 그의 눈동자에서 짠내를 상실한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 “ Rememeber the time I get to falling in love. 내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던 때를 기억해. Spend the time with you to get the look in my eyes. 그리고 너의 모습을 내 눈에 담기 위한... 시간을 보내왔지. So with you again, so what can trust in you 그래서 너와 다시 함께 있어. And I Know our love's gonna be taking longer.. 난 우리의 사랑이 오랫동안 지속될거란 걸 너에게서 볼 수 가 있어. that's endless love... oh baby.. 그것이 영원한 사랑... .. "아직 몸도 안 좋으면서 어딜 간다는 거야?" 말끔하게 정장으로 챙겨입은 지용인 성훈이가 막고 나서는대도 나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병원에서도 너 편히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 안정이 최고! 너도 같이 들었잖아!!" "오늘은 꼭 나가 봐야돼. 걱정 안하게 일찍 들어올게. 일찍 들어오면 되잖아.." 빙그레 웃는 그가 성훈이를 달래는 투로 말한다. 하지만 걱정되는 그의 마음은 지용이를 보는 게 불안하기만 하다. "어딜 가는 건데? 나도 따라가면 안 되는거야?" "........." "너 차 몰고 나갈 거잖아! 그러다 어지러워서." "나 약골 아니야. 어렸을 때 병치레도 안했다구. 잠시 몸살난 거 뿐인데, 왜 그래?" "그래도 병원에서.." 말끝을 흐리며 가지말라고 말하는 그의 시선이 불안하기만 하다. 그런 성훈이를 자신의 시선에 품고는 부드럽게 말을 잇는다. "꼭 가봐야 하는 곳이야." "........." "내 걱정하지마. 일찍 들어올게." "........." "오늘 성훈이 데리고 가야 하는곳이 있는데 어떻게 늦게 들어오니?" '난 네가 잘못 될까봐. 걱정돼. 이제서야 네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데.. 네가 날 두고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겁이나. 나, 너에게 길들여지기 시작했단 말이야.' "일찍 들어올게." 성훈이에게 등을 보이고 뒤돌아서는 지용이. "잠깐 지용아." 성훈인 지용이를 돌아 세우고는 그의 타이를 만져주기 시작한다. "담배 많이 피면 안돼. 아냐, 담배는 암수야. 또 술은 무조건 안돼. 그리고 나가서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 타이를 만져주는 성훈이와 자신의 형체가 벽쪽에 걸려진 전신거울에 그림처럼 비춰진다. 다정하게 보이는.. 아니 자신이 간절하게 꿈꾸던 그림이였다. 지용인 참지 못하고 '크큭'거리며 웃어버린다. "왜애?" "하핫." 성훈인 지용이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고 있는 지용이가 자꾸만 키득키득 거린다. "왜 그래? 왜 웃는거야?" "자, 이렇게 서봐." 거울속에 비추는 두 사람의 모습. 금술 좋은 한쌍의 원앙같다. "이제보니 지용이 키가 크구나. 지용아, 내 어깨에 손 좀 얹어봐." 성훈이가 시킨대로 손을 얹었던 지용이. 자신의 귀까지 오는 성훈이가 얼굴을 지용이에게 다정스레 기대자 지용인 참지 못하고 꺄르르 웃어 버린다. "하하하. 꼭 신혼부부 같잖아." 거울속의 두 사람은 행복해 보인다.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서있는 두 사람은 외부에서 전해올 회오리바람의 영향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이제 정말 가봐야겠다." "하하. 그래. 일찍 들어와야 해." "응.." "꼭! 꼬~옥 일찍 들어와야해." "응." 현관 앞으로 가서 구두위로 발을 올려놓는 그가 현관문을 열자, 성훈인 아쉬운 듯 그를 불러 세운다. 뒤돌아선 지용이의 얼굴이 보이자 성훈인 방그레 웃으며 입술을 움직인다. "나, 네가 너무 좋아. 지용아, 나 네가 너무 . 너무 . 너무 . 너무좋아!!" 햇빛보다 더 눈부신 얼굴. '듣고 싶었던 말이야. 조금이나마 날 좋아하기를.. 너에게 사랑한다라는 말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아. 좋아한다는 말만으로도 난 세상 모든 걸 가진 것 같아. 난.. 이 세상에서 더 할 수 없는 부자가 되는거지.' "사랑해, 성훈아." '쉴새없이 들려줘도 좋아. 매일 눈을 뜨면 내게 들려주는 그말. 너의 그 지겨운 말. 사랑한다는.. 그 말.' "지용아, 난.. 네가 너무 좋아." 폭풍의 전야제. 그들의 햇살을 깨고 어두운 세상으로 걷쳐버리는.. 그들을 덮칠 폭풍은.. 이미 그들 가까이 자리잡고 있었다. 현관문을 닫고 테라스로 나가 지용이의 흰색 티부론이 아파트 단지 내게서 빠져나가는걸 보고 난 뒤에야 거실로 들어섰다. 안방으로 들어와 서성거리다가 자신이 흘러놓은 말을 떠올려 본다. '좋아한다니? 후훗. 인심 쓴 김에 사랑한다고 말할걸. 사랑한다고 말해 버릴걸 그랬어.' 작게 세어 나오는 숨결을 자신의 손등으로 느끼고 눈을 감으려다 달력을 주시하게 되었다. 2월 22일. 붉은 펜으로 예쁘게 원을 그려놓는 지용이의 흔적. '어라? 내 생일 이잖아. 그런데 고지용, 내 생일도 모르고 지나쳐? 고죵.. 너 들어오기만 해봐. 감히 내 생일을 잊어버려? 음.. 아니다 이번만 참아준다. 네가 아팠으니깐.. 하핫..' 해맑은 미소로 번져버리는 성훈이가 지용이가 벗어놓고 간 그의 체온이 가시지 않은 옷에 손을 댄다. 은은하게 풍기는 다비도프의 향이 아직도 베어 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랑할게. 지용아." 74)****** 망각의 그림자 - Ⅱ 봄이 알리는.. 몹시 화창하게 개인 날씨. 화창한 날씨를 질투하듯 먹구름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이 시계로 할게요. 예쁘게 포장 부탁합니다." 종업원에게 시계를 맡기고는 진열해 놓은 팔찌들을 주시한다. "저번에 뵐 때보다 얼굴이 많이 수척해 지셨네요." "........" "참 저번에 부탁하셨던 커플링은 안 찾아가실 건가요?" "........" 종업원에 말에 눈웃음만치는 지용이. ".... 아직 승낙을 못 받으셨나 보죠?" 지용이가 아무말이없자 어두운 음성으로 묻는 종업원에게 은은한 미소를 흘리던 지용이가 하얗게 튼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도.. 같이 포장해 주세요." 지용이의 미소에 종업원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여자친구에게 승낙을 받아 냈나 보죠? 하하.. 축하합니다." 종업원은 자신의 일인냥 지용이에게 계속 축하한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화창하게 개인날씨. 이 맑음을 질투하듯.. 먹구름은 다가오고 있다. "세워!" "네?" "귀먹었어!! 세우란 말야!!" 지원이의 쌀쌀맞은 어투에 김기사는 인도쪽으로 차를 바짝 갔다댔다. "내려!" 굳은 표정과 고집스런 눈동자가 김기사의 이마에 땀방울을 맺게 만든다. "회장님께서 도착하는 즉시 집으로 모시라고.." "잔말 말고 내리란 말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폼새가 은장군과 닮았다. 강렬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역시 아비와 꼭 닮아 있었다. "뭐해? 내리라구!!" 또 한번의 역성에 머뭇거리더니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 닫으며 차 문을 따는 것이 주눅든 사람 같다. "도련님 회장님께서.." 뒷 자석에 앉아 있던 지원이가 운전석에 앉자마자 김기사를 향해 차디찬 냉소를 흘린다. "아버지껜 머리 좀 식히려 갔다고 전해드려." 액셀레이터에 발을 놓는 지원이가 고개를 돌려 앞을 주시한다. 고집스런 입가가 잠시 미소를 띄는것도 같았다. 불안하게 쳐다보는 검은 정장의 김기사는 아직도 땀방울을 훔치는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어디 시작해 볼까?" 알수 없는 미소. 판도라의 상자를 찾아 떠나는 순수한 아이의 미소 같았다. 신들로 부터 인간에개 보내지는 보기에도 훌륭하고 마음을 끄는 선물. 판도라의 상자. 행복의 상자. 김기사는 지금 이 순간 어릴적 새 로봇을 들고 마냥 좋아하던 지원이의 모습이 떠올려 지는 것 같다. "도련..." 쌩하며 달려가는 BMW. 몹시 다급하게 무언가를 찾아가는 사람. 승용차는 불안하게 달려가고 있다. “ 판도라의 상자. 행복의 상자. 아니 불행의 상자.. 그 상자에서 온갖 불행이라는 날개를 가진 시간들이 솟아오르기만 했다. 밤낮없이 서로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 것. 단지 한가지 불행만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는데. 판도라는 제우스의 뜻에 따라 뚜껑을 닫고 말았다. 그래서 그것은 아직 상자안에 남아 있는데. 그가 마지막 불행에 풀어주기 위해.. 떠나고 있다. 그는.. 그속에 남아 있는 불행을 최대 행복의 보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름. 행복한 날들을 위한 희망이라는... 보물. 하지만 그에게.. 희망은... 불행중에서도 가장 큰 불행. ” 통나무집을 관리해주는 노부인의 청소가 마쳐지자, 핸드폰을 꺼내 미리 예약해놓은 이벤트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수목원하고 가까운데.. 오시다 보면 호수도 보일겁니다. 그리고 장미는 충분히 준비 됐겠죠?" 블라인드를 쳐버리고 밖을 내다본다. 잔잔하게 흐르는 호수가 반짝이면서 한눈으로 들어오고.. 봄을 알리는 전령들이 마른 가지에 마법의 가루를 뿌려놓고 있었다. 연하게 나온 꽃눈들과 물풀들.. "네.. 통나무집이요." 철저하게 계획한 이벤트. 핸드폰의 캡을 닫고는 소파위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그리고.. 지용인 준비해 온 것들을 쏟아 붓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예쁜 모양의 하얀 초가 불을 밝히지 않아도 그 만의 빛이 난다. 하얗게 터진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미소를 자아내는 그의 머리카락이 햇살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갈색빛을 띤다. 오늘의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지용이도 맑게 갠 기분이다. '널 행복하게 해줄게. 네가 원한다면.. 매일 이렇게 해줄게. 나 자신있어. 성훈아, 난 정말 자신있어. 자신... 있어.'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소파를 옮기는 그의 몸에는 힘이 없다. 가냘프게 움직이는 허리선은 한참을 있다 움직이곤 한다. 하지만 어디서 생성되는 힘인지 지용인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소매깃으로 닦아내고 성훈이 만을 위한 생일이벤트를 꾸미고 있다. 성훈이 만큼 하얀 초들과.. 한사람의 손으로 들어갈 두가지 선물은 탁자위에서 포장만큼이나 아름다운 빛을 낸다. 마치.. 포장이 뜯겨지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미역국 끓여놓으면 반성 좀 할거얍. 하핫." 생글거리며 웃는 성훈이가 저녁준비로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뻐꾸기 시계가 5자를 가르키며 뻐꾹되고, 성훈이만 있는 공간엔 금빛으로 물든 노을이 길게 들어서고 있었다. "근데, 요 녀석 일찍온다 해놓고 왜 이리도 안오지? 전화도 안하.." RRRRRRRR---- 중얼거리던 입술이 멈추기전에 전화벨이 유쾌하게 들려온다. 젖은 손을 빨간 앞치마에 아무렇게만 문지르고는 수화기를 들어올리는 성훈이가 소리를 지른다. "야! 고죵!!" [어, 성훈아.]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지용이의 음성이 먼거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지글거려서인지 지용이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안들렸다를 반복하고 있다. "너 어디야? 일찍 들어온다고 약속했잖아. 그리구 전화하랬는데 왜 전화 안해??" 잔뜩 심술난 음성으로 말하지만 성훈이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다. [미안. 미안.. 내가 정신이 없었다. 헤헤~] 반성하는 듯한 음성에 성훈인 더 이상 쏘아 붙질 못한다. "어여 들어와. 저녁 준비하고 있단 말얍!" [어, 그래그래.]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지용이의 웃음띤 음성에 성훈이도 따라웃는다. [들어가면서 뭐 사갈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뭘 사와? 그냥 들어와. 아니다! 딸기! 딸기 사와라."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성훈이가 눈웃음을 치고 있다. 그가.. 보든 안보든 간에. [지금 들어갈게.] "지금 당장 들어와~ 알았지? 옆길로 세면 너 두글지 아로!" [응. 빨리 들어갈게.] 황금빛으로 물든 호숫가의 정경은 예쁘다. 하얀 장미만으로 문을 만들고 그곳에 전기 초를 달았다. 전원만 올라가면 천국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천사가 사는 곳은 천국이니깐. "수고 하셨습니다." 이벤트 회사 직원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는 잘 꾸며진 통나무집의 눈부심에 만족스런 미소를 보낸다. '이제 성훈이만 데려오면 되겠다.' 하얗게 까진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축이기는 하지만 건조한 봄바람 탓인지 자꾸만 말라 들었다. 조금은 싸늘한 바람이 불어 지용이의 뺨을 건들인다. 지용인 집안으로 들어가 벗어놓은 정장마이를 들어올린다. 붉은 와인과 건들이면 금새 깨질 것 같은 두 개의 와인잔. 그리고 성훈이를 위한 두 개의 선물. 지용인 두 개중 하나를 들어올린다. '집에 가자마자 껴줄까? 나 혼자 골랐다고 골내면 안되는데..' 속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려던 지용인 고개를 가로로 젖고는 벽난로 위쪽의 진열대 위로 숨겨 버린다. "조금 더 있다가 꺼내야지. 노력한다고 했으니깐. 성훈이가 노력한다고 했으니깐. 그때. 껴줘도 되겠지? 지금은 너무 이른거야.. 그렇지? 후나?" 하얀 장미로만 치장된 집. 하얀 장미 꽃잎과 중독 될 정도로 진하게 풍겨지는 장미향.. 덩굴도 없이 흰장미로만 감싸여진 통나무집. 현관을 따고 나왔을 때 매서운 바람이 하얀 꽃잎을 지용이에게 날려 준다. 힘없이 날려지는 장미 꽃잎들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너무도 멀리 날라가는 하얀 자욱들. 너무 먼 곳으로 날리는 것이.. 지용이의 몸짓을 닮았다. 숟가락에 미역국을 조금 떠서 입술에 대는 폼이 새댁같은 인상을 준다. 하늘거리는 하얀 실크셔츠를 입고 하얀 힙합바지를 받쳐입은 성훈이가 한쪽 손으로는 앞머리를 잡고, 끓고 있는 미역국의 맛을 보고 있었다. 가지런히 찰랑거리는 머리결이 검은빛도 띄고 푸른빛도 띈다. 동그란 눈동자가 미역국의 간을 보고 만족한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녀석 들어오면 맛있다고 날리 치겠지? 하하. 고죵 얼릉 들어와라~ 내가 너 좋아하는 새우튀김까지 만들었단 말야." 앞치마를 벗어버리고는 거실로 나온 성훈이. 석양이 들어간 아파트 거실의 분위가가 아주 근사했다. 스러지는 옅은 햇빛에 섞여 곳곳을 물들이고 있는 황금빛의 색조는 마치 잘 만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겨진다. 소파에 늘어져 있는 금빛. 성훈인 소파에 앉아 안경을 들어올리며 책을 읽는 지용이를 떠올린다. 창을 등지고 앉아 역광으로 새겨지는 그의 실루엣은 의도적으로 연출. 지용인 성훈이의 상상속의 주인공인 한 스틸처럼 보였다. '빨리 들어와. 성훈이가 지용이 기다리고 있잖아.' 하얀 옷으로만 치장한 성훈인 창틈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이 싸늘하지가 않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환한 웃음을 보이는 하얀 사람. 가늘어지는 눈동자. 가지런히 드러나는 치아. 웃음의 결을 따라 패이는 부드러운 눈주름.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딩동-- 황금빛으로 물든 아파트의 정적을 부숴지고 성훈이의 웃음은 좀더 강도가 깊어진다. "고죵! 양반되기 글렀다. 낄낄~" 현관으로 헐레벌떡 뛰어가 문을 따는 성훈이가 하얀 잇속에서 지용이의 이름을 부른다. "고죵!! 너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내가 얼마나 기다린지는 알아?? 그리구, 딸기는 사왔.." 어린아이의 말투로 귀엽게 말하던 성훈이가 현관을 열었을 때.. 하얗게 웃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오랜만이야. 강성훈." 갈색피부는 하얗게 떠 있다. 올빽으로 올려진 칠흑같은 머리결. 전에 간절히 보고 싶어했던 강한 빛의 눈동자가 노려보고 있다. 핑크빛 입술에서 새어나온 이름에 화가 난 듯. 성훈이를 노려보며.. 그가 서 있다. 75)****** 망각의 그림자 - Ⅲ "훗, 얼굴색이 좋군." 하얀 얼굴을 보자마자 그를 부둥켜안고 '사랑해' 라는 말을 할참이었다. 하지만 하얀 얼굴을 감상하기도 전에 들어버린 이름에 지원이의 입속에서 '사랑해' 란 단어는 가슴속 깊이 묻혀 버린다. "........." 당황해하는 눈동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지원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곧 쏟아질 것 같은 갈색빛 눈동자가 몹시 혼란스러워 하는 듯 하다. "가자." 차갑게 내뱉는 지원이의 어투는 그대로였다. 변한 게 있다면 지원이의 볼살이 사라져 버린 것.. 지원이가 손을 뻗어 하얀 손등에 닿았다. 바깥날씨가 싸늘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시켜주는 것처럼 차갑다. 흠짓 놀라며 지원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드는 성훈이가 지원이에게서 한 걸음 물러선다.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공유한다. 거리. 두 사람의 거리는 무척 멀게만 느껴진다. "무슨 일로 오셨죠? 은.지.원씨." 성훈이가 처음으로 건네는 말 이였다.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낯설게 말하는 성훈이의 음성은 부자연스럽다. 지원이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은 바닥으로 깔려져 있고. 갈려지려는 음성이 담는 건 어색한 경어. 지원이의 이름을 이를 악물며 들려준다. "데리려 온다고 했잖아. 강성훈." "핫, 데리려 온다구요?" "꼬지말고 따라나서." 지원이의 눈동자 아래는 검게 물들어져 있었다. 그도.. 잘 지낸 것 같지가 않았다. 지원이의 손이 또 다시 뻗어진다. 하얀 손등을 잡아 보려는 갈색 손. 하지만 닿으려 하자 또 한 발자국 물러서는 성훈이였다. 그런 성훈이의 행동에 지원이의 이마에 깊은 홈이 생기기 시작한다. "너 왜이래?" 짜증스런 어투가 들려오자, 바닥을 향하던 맑은 눈동자가 지원이를 외면한 채로 입술을 움직인다.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려요. 그날 만나 뵙고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 "신부가... 예쁘시더군요." "........." "진심으로 행복하시기를 바래요." "닥쳐!!" "아들 딸 낳고 잘 사시길 바래요." "........." "정말 너무너무 행복하시기를 바.." "닥쳐!!!" 물러서 있는 성훈이의 어깨를 꼭 집고는 그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닿기를 바란다. 지원이의 차가운 어투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고.. "다신 볼일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찾아 오셨죠?" "강성훈!" "뭘 하시려고 이곳까지 찾아 오셨어요?" 비꼬는 말투에는 그 동안 그가 어떻게 지냈는가를 면밀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지원이에게 지쳐 버렸다는..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결심했다는 그런거. 그를.. 증오하며 원망해도 된다는 의지를 강렬하게 비춰주는 듯 하다. "헛소리 집어쳐!" "당신이 찾아오면 제가 실실거리며 따라 나설 줄 아셨나요?" "강.성.훈!!" "전 은지원이라는 사람. 지워 버렸어요. 아니,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돌아가세요." "성훈.." "곧 지용이가 올 시간이네요. 지용이가 당신을 보기 전에 사라져 줘요." "내 손에 죽어볼래? 죽이기 전에 닥쳐!" 이마에 생성된 홈은 화가 난 지원이의 일시의 감정이 아닌 앞날에 대해 불안한 그의 생활이 한순간에 엿보는 것이였다. 성훈인 명령조의 지원이 때문에 흐릿해진 눈동자가 변해버린다. 그와 지냈던 모든 것들이 떠올려진다. 행복했던 추억보다는 아픈 추억이 더 많아. "무슨 권리로? 형이 무슨 권리로 날 죽여??!!" 피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지원이를 쏘아본다. 투명하게 맺혀진 물기가 떨어지지 않은 채 고이기만 한다. 원망과 분노.. 증오.. 모든 것이 혼합되어 있는 눈물. "내가 결혼하던 말던 너 상관 않는다고 했잖아!!" 패이는 곳의 홈은 좀더 깊어지고 일그러지는 인상에는 불안한 기운이 가득하다. 충혈 된 눈동자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고.. 불안해하는 눈동자가 마치 애원하는 것 같았다. '이러지마. 강성훈.' 이라고.. "돌아가. 지용이 올 시간이야." "........." 차갑게 내뱉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자꾸만 갈라지려고만 든다. "지용이가 형을 보면.. 지용인." "그 자식 오던 말던 상관없어. 넌 날 따라갈 테니깐."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있게 말하는 지원이의 강한 눈동자가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맡겨 두었던 물건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하다. 아니.. 그 이상의 생각 같은 건하기 싫다. 자신에게만 향해 있던 해바라기가 시들어 버린 것을.. 확인하고 싶지가 않았다. 지원인 그의 꿈속에서 보여졌던 장면들이 현실로 펼쳐지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항하고 있다. "하하핫! 웃기지도 않아!" "........" "너무 웃겨서 눈물이 다나네. 하하하!!" "........" "뭐가 그렇게 자신 만만한거지?" "........" "내가 형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길 바래?" "그만 웃어!" "난 형의 인형이 아니야. 난 형 따라가지 않을거야.. 왜 그렇게 자신 만만해? 내가 형의 소유물이야? 내가 왜 따라가??" 배를 움켜쥐고 웃는 성훈이. 감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지원이의 가슴을 얼어붙게 만든다. 분명히 슬픈 눈물일거라고 믿고 싶다.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눈물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 성훈이가 보여주는 눈물은 자신에 대한 원망과 미움. 증오로만 똘똘 뭉쳐져 있다. '강성훈, 이러지마.' 그의 동요에 열이 나는 지원이가 성훈이를 붙든 어깨에 힘을 준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조이고 싶다. "강성훈. 투정 그만 부려. 목을 비틀어 버리기 전에.." "꺼져." '뭐어??' "내 앞에서 꺼져 버리라구!" "강성훈!!" "난 은지원이라는 인간 잊었어.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 그러니깐 꺼져!! 꺼져 버리라구!!" 하얀 얼굴이 하소연을 하듯 소리를 지른다. 언제나 자신을 따라 줄 것만 같았던 눈동자가 몹시 낯설다. 지금 그가 흘러내리는 눈물 역시도 낯설게만 느껴진다. "지용이가 올거야. 지용이가 형 보기 전에.. 사라져 줘." "........." "우리 둘... 건들이지마. 지용이랑 나. 형 때문에 힘들어 지긴 싫어. 난." 새로운 세계에 물들어 버린 그의 몸짓이 지원이의 손에 힘을 품게 만든다. 지원이가 느꼈던 불안함의 실체가 뚜렷해지는 순간이다. "날 사랑하지?" "........" "강성훈, 날 사랑하지??!!" "........" "대답해! 날 사랑하지!!??" 어깨를 흔들어본다. 성훈이 몸 속의 모든 기관들이 울렁거릴 정도로 흔들어댄다. '나뿐이라고 했잖아. 나만 사랑한다고 했잖아!!' 눈을 들어올려 지원이와 시선을 마주하는 성훈이의 쓸쓸한 미소. "사랑했어." '과거형이잖아. 사랑한다라고 해! 너 나만 사랑한다고 했잖아!!' "난, 형을 진심으로.. 나 자신까지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어." "......." "난, 정말.. 형이 아니면 안될 정도로 사랑했어. 형을 너무 사랑했어. 지독하고 잔인하게." "........." "형은.. 나의 전부였어. 날 포기할 만큼 사랑했어." "그래.. 그러면 되는거야." 성훈이의 말에 불안했던 기운은 가셔 버린다. 그리고 입술에 맺혀지는 쾌재를 성훈이 앞에서 숨겨보려고 노력한다. '그래.. 넌 나만 사랑해야해. 네가 날 네 전부로 만든 것처럼.. 나도 널 내 전부로 만들었으니깐. 넌, 나만 사랑해야해. 나만..' 하얀 셔츠에 놓였던 손에 힘을 조금씩 빼고는 쓸어주듯 매만진다. "난 형을 질려 버릴 정도로 쳐다봤어. 난.. 형만을 사랑했어. 내 안에 형만 존재할 정도로.. 날 주체하지 못할정도로.. 형만, 오로지 형만 사랑했어." "됐어. 그만해도 돼."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아." 미소를 유지하며 똑똑히 들려주는 음성에 멍해지는 느낌. 부드럽게 매만지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 "나, 이제 형 사랑안해. 사랑하지 않아." '뭐라구? 날 사랑하지 않아??' "나 이제 형, 사랑 안 해." ".........." "난 형을 몰라. 형이 어떤 사람이였는지.." ".........." "난 내 머릿속에서 형을 지워 버렸어. 잊어 버렸어. 내 안에서 형을 버렸어. 이젠 형 사랑안.." 흘러나오려는 단어들을 부정하는 듯 성훈이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그의 핑크빛 입술을 막아버리고는 숨도 못 쉴 길고 긴 키스를 부어댄다. 지원이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싶은 듯 밀쳐내려는 성훈이의 반항도 만만치는 않다. 벽에 머리를 여러번 부딪히고 가지런했던 머리카락도 제멋대로 엉겨버렸다. 지원이의 품에서 나오려 하지만 늪 속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면 더욱 더 깊숙이 빠져든다. 전에 간절히 원했고.. 경험했던 늪 속에 익숙해지려고 하는 성훈이. 성훈이의 몸이 지원이의 입술에 반응하고 있다. 지원이를 밀치려던 손은 버릇처럼 그의 목을 감싸고.. 있다. '멈춰야해. 강성훈. 멈춰!! 지용이가 올거야. 지용이가 지금 날 본다면.. 지용인.' 떼어지지 않는 입술에서 비릿한 맛을 느낀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성훈이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지원이의 입술. 입술의 사이로 느껴지는 붉은 선혈에는 신경쓰지 않고 성훈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지원이의 눈동자가 지나칠 정도로 떨려댄다. "날 거부한다. 이거야??" 씁쓸하게 머금는 냉소. "너무 늦었어. 형, 형은 너무 늦게 찾아왔어." "헛, 늦게 찾아왔다??" 슬픈 눈망울에서 밝은 빛이 세어 나온다. 측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서 자신의 자리가 비워 버렸음을 흐릿하게 감지 할 수가 있다. "넌 날 떠나서 살수 없어!! 넌 내꺼니깐!!" "이거 놔!!" "넌, 내꺼야!" “ 넌 나만 사랑해야해. 처음부터 신은 널 그렇게 만들었어. 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고 널 만들었단 말이야. 넌.. 나만 사랑해야해. 날 잊었다는 말은 용납할 수 없어. 넌 날 항상 너의 전부로 여겨가며 살아야해. 난 너의 전부야. 네가.. 내 전부가 되 버린 것처럼.. 난 언제나 너의 전부로만 존재해야해. 성훈아, 난 널 사랑해. 유일한 내편. 내 생애 처음으로 소중하게 느껴지는 사람. 내 삶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내가 갖고 싶은 사람. 넌 내 인생의 유일한 빛이란 말이야. 내 건조한 삶을.. 네가 맡아줘. 강성훈 부탁할게. 날 모른단 말은 하지마. 날 잊었다는 말은 하지마. 날 지워 버렸다는 말은 하지마. ” "굵고 예쁜 것만 싸주세요." "집에 아이 가진 사람이 있어?" 상자속의 빨간 딸기들은 성훈이의 입술빛으로 보인다. 의아해 하는 과일가게 아주머니의 말에 헛웃음을 짓는 지용이는 하늘에 둥실 떠있는 듯한 기분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성훈이의 손을 잡아끌어 통나무집으로 데려가고 싶다. "학생, 얼마 어치 줄까?" "예쁘고 굵은 거 모두 싸.주.세.요." 황혼빛에 반짝이는 지용이의 눈동자는 금박이 뿌려지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헬슥한 얼굴과 하얗게 튼 입술속에서 드러나는 치아도 얼마 남지 않은 햇빛으로 치장되고 있다. 금빛에 물들어버리는. 지상으로 떨어져 길을 잃어버린 가녀린 천사의 모습.. 빨간 딸기의 달콤한 향을 뿌리며 성훈이가 있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고 있다. 지용인. '녀석. 딸기 좋아하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 눈이 뜨인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람의 눈을 크게 뜨고 끊임없이 나 자신에 경탄하기를 계속한다. 슬픔 끝의 환희가 왜 환희 끝의 슬픔만큼 크지 않은 것일까? 그 이유는 슬픔 속에 있을 때 넌 그 슬픔 때문에 상실 당한 너의 행복을 생각하지만.. 행복 속에 있을 때.. 넌. 너 자신이 그 행복 때문에 면한 고통을 생각하는 일이 전연 없기 때문이야. 그러니깐.. 행복한 것이 너의 본래의 진면목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감각과 심장이 지탱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일정량의 행복이 할당되어 있어야 하는데.. 난.. 일정량을 통제하지 못하고.. 부어대기만을 십 이년.. 난.. 십 이년동안을 너라는 틀에서 고집스럽게 생활해 왔다. 태어났을 때부터 너라는 존재에 운명지어진 것처럼. 너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그런데.. 네가 조금씩 내게 고개를 돌린다. 태양만을 숭배하던 해바라기가.. 구름에 가려졌던 달을.. 바라본다. 지금의 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사랑해.. 강성훈. ” 76)****** 망각의 그림자 - Ⅳ (1) 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여섯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베개잎을 물고 엉거푸 긴 한숨을 쉬는 성훈이의 두 눈동자에선 눈물이 쉴새없이 떨어지고 있다. 베개가 흡뻑 젖어버릴 정도로.. 침대에서 콧노래를 흥얼대며 일어서던 지원이가 샤워를 마치고 성훈이 앞에 몸을 비춘다. 진한 담배향이 성훈이의 몸에 베기게 만든다. "옷 입어." "........." 보이는 옷가지를 성훈이에게 던지는 지원이. 거울로 비춰지는 성훈이는 꼼짝도 않고 흐릿한 눈으로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검은 머리결에서 튀어오는 차가운 물방울이 성훈이의 볼에 닿는다. "강성훈, 당장 일어나서 옷 입어." "........." 처음부터 끝까지 명령조. 성훈이의 볼 위로 닿는 차가운 입술에 그는 또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뜨린다. '사랑했어. 형.' "네가 살 곳은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당분간 호텔에서 지내." '그런데.. 함께 지낸 시간동안 난 왜 아파하기만 했을까?' "뭐해? 일어나라니깐." '불안하고.. 너무 아팠어. 내 속이 까맣게 탈 정도로.. 내 두손으로 잡혀지지 않는 바람에 손을 뻗듯이 형을 사랑하는 건 내게 뼈까지 깎아 내리는 혹독한 체벌 같았어. 형이 곁에 있어도 난 늘 한숨을 쉬어야 했고.. 형 앞에서 작게 구겨져야 하는 난 외롭고 쓸쓸했어. 난 형을 원한만큼... 형이 그립고 간절했었어. 형 앞에서 수그려지는 내 고개가.. 내 자아를 갈아먹고 있었고.. 내 자아가 사라지는 것조차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야 했던 내가.. 형을 보면서도 목말라야 했던 내가.. 너무 비참했어. 내 감정을 하찮게 여기는 형을.. 원망하는 것조차 힘겨워 해야 하는 내가.. 너무.. 비참하고 초라했어. 형을 내게로만 향하게 할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내가.. 초라하고 한심했어. 늘.. 형의 뒷모습을 보며 형을 기다리는 것도 힘들었어. 아니 지쳐버렸어. 그래서.. 접었어. 형에게 향해 있던 내 시선을 돌려 버렸어. 하지만.. 사랑했어. 정말이야. 정말 형을 사랑했었어. 내 자신보다 형을 먼저 생각하고.. 내가 사는 단 하나의 의미이기도 했어.' "강성훈. 옷 입고.." '원하는 형이 내 앞에 있어. 날 데려 가겠다고 말하는 형이.. 내 앞에 있어.' "강성훈! 일어나라니깐!!" "원하는 걸 얻었을 테니깐. 이제 그만 가죠." ― 멈춰. 형과 나의 지독했던 관계. 이제 그만 하고 싶어. "........." "그리고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마." ― 나 이제 그만 불안해하고 싶어. 나 이제 형을 그만 기다리고 싶어. 가시밭을 걷는 비틀거리는 걸음. 그만 걷고 싶어. 나도.. 사랑을 받으며 살고 싶어. 편하고 싶어. "........." "형, 아내한테나 잘해." ― 형은 세상이 정해 놓은대로 살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 흐르듯.. 형은 그렇게 살아. "잡말 말고 일어나서 옷이나 입어! 헛소리 집어치우고!!" "말했잖아! 난 형 따라가지 않을거라고!!" ― 날 바라보는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이제 그도 나도 편하게 지내고 싶어. 난 그의 손을 붙잡아줘야 해. 내가 힘들 때마다 함께 지내준.. 그의 손을. 지원이를 쳐다보지 않는 눈동자는 물기가 끓이지 않는다. 늘상 흘려대던 눈물이라고 단정짓고 싶었지만 지원인 지나칠 수가 없다. "투정 받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만해!" "투정 아니야." "뭐가 문제야! 내가 결혼한 것 때문에 이러는거야?" "........." 쳐다보지 않는 흐릿한 눈동자를 지원이에게 돌려본다. 괴롭다는 듯 바라보는 눈동자가 자신을 건들이지 말라고 경계망을 치는 듯 하다. "결혼했어도, 그 여자랑 몸을 섞은 적 없어. 이제 됐냐?" "........." "그 여자 건들인 적 없단 말이야!" "........." "병신처럼 울지만 말고 대답해!" "........." "강성훈!!" "너무 늦었어. 형이 날 데려가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구.." ― 새로운 세계에 적응을 해버렸어. 형이 날 떠나 있던 시간동안 그의 몸짓이나 눈빛이.. 날.. 물들였다고. 난 그의 배려를 받으며. 그의 세계에 조금씩 빠져 들어갔어.. 그에게.. 날 허락해 버렸어. '뭐야? 또 투정이야?' "난.. 지용이 떠날 수가 없어." '뭐.. 뭐?'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성훈이의 나즈막한 음성에 지원인 한참동안 성훈이를 내려다보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원인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동안 두 사람의 생활이 궁금해진다. 꿈속에서 나타났던 두 사람의 모습이 이리저리 마구 엉키고 있다. "돈 때문에 그래? 강성훈??!!" "........." "돈 때문이라면." "난 지용이 사랑해." ― 지용인 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많아. 내가 형의 등을 보며 흘린 눈물보다 곱절로 더 많아. 그의 몸짓이 내가 그에게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걸 느껴. 그의 세계에서 난 그의 중심으로 돌아가. 그런 그의 세계에서 내가 사라져 버린다면..지용인.. 견뎌낼 수 없을 거야. '말도 안돼. 나만 사랑한다고 했었잖아!!' "난.. 지용이를 사랑해." 지원이의 시선을 피한 채 일러주는 소리. '어디서부터 너와 나의 인연은 꼬여 버린걸까? 꼬였어도 넌 내 곁으로 돌아 왔는데..' 눈을 감아 버리려는 성훈이의 얼굴을 들어올린다.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눈동자. '강성훈 날 쳐다봐!!' "........." "내가 어떻게 할까? 이혼할까? 어떻게 하면 되겠어?? 어??!!" "........." "내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겠어??" '형의 지금 이런 모습.. 형같지 않아. 낯설어. 형은.. 단 한순간도 날 사랑하지 않았잖아.' "어떻게 하면 되겠어? 네 녀석 꼬인 거 어떻게 하면 풀래??" "........." "우리 다시 하와이로 갈까? 강성훈! 네가 가고 싶다면. 같이.." "그냥.. 돌아가죠. 제발 가죠." "........." 흐린 시선으로 지원이를 힘들게 바라보는 눈빛에 지원인 눈을 커다랗게 뜬다. "나 지용이에게 너무 잔인했어. 빚진 것도 많아. 형이 날 아프게 할때마다 지용인.. 지용인 내게." 성훈이의 입술에서 지용이의 이름이 불려지는 게 싫다. 지원의 입술로 막혀지는 자신의 입술. 성훈이의 두눈은 아득히 먼 곳을 더듬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떨리는 입술은 지원이의 입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렸고, 축축하게 젖어드는 자신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리없는 통곡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리라.. ― 형을 잊어간다는 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형은 알까? 형.. 너무 늦어 버렸어. 형이 날 찾기에 내 안에 형은.. 너무 작은 존재로 소멸돼 버렸어. 엘리베이터는 지용이가 성훈이를 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 고장이 나 있었다. 비상구로 오르며 피식피식 웃는 지용이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잠긴 목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들고 있는 딸기의 달콤한 향내를 맡으며 흐뭇해하기도 한다. "딸기 먹는 성훈이 참 귀여웠는데.. 혼자 다 먹게 할까? 아니야.. 통나무집 가서도 먹어야 하는데, 체하기라도 하면 안되지.. 암~" 두층을 남겨주고 천천히 오르는 지용이. 계단을 오르다 문득 자신의 발에 걸리적거리는 구두끈이 지용이에게 집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시간을 끄는 것 같다. 딸기를 옆에다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다리보다 높이를 두고 묶으려 할 때 문득 빨리 들어오라는 성훈이의 말이 떠오른다. 지용인.. 빙그레 웃으며 구두끈을 묶지 않은 채로 계단을 성급하게 오른다. 겨우 두 층 인대도 숨이 차 오른다. 숨이 차오르는 건 지용이의 허해진 체력 때문이기도 하다. 벨을 누르려다 성훈이를 놀라게 해 주고싶어 지용인 자켓주머니에서 현관열쇠를 꺼내든다. 문고리를 잡으려 할 때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은 열쇠를 돌리지 않고도 열려 버렸다. 조용한 공간에 나즈막히 들리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자나?' 신발을 벗으려는 그에게 낯선 검은 구두가 건들여진다. 고개를 천천히 내려보는 그가 내려앉는 가슴을 쥐어 보려고 뜸을 들이고 있다. '아니지.. 성훈아.. 내가 생각하는 거.. 아니지?' 낯선 구두 한 켤레. 이리저리 흔들려대는 눈동자에 얇은 보호막이 쳐지는 듯 흐릿해진다. 그의 시선으로 담지 말라며.. 그를 보호해 주는 듯. 지용인 휘청거리는 자신을 몸을 지탱하며 거실을 가로질러, 숨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손에 쥐어진 딸기봉투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매워진다. 달칵---- 차라리 보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들고 있던 딸기들은 방안 가득히 굴려 떨어지고, 휘동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성훈이의 눈동자와 지용이의 눈동자는 마주하고 있다. 문열리는 소리와 딸기를 담은 비닐봉지 때문인지 또 다른 눈동자와 지용이의 눈동자는 마주친다. "지.. 지용아." 77)****** 망각의 그림자 - Ⅳ (2) 그는 이미 마음을 다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다. 뿌연 영상을 담아 내듯 자신의 눈속으로 들어오는 하얀 나체와 갈색 피부가 꿈이기를 바란다.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다고.. 비틀.. 휘청거리는 전신이 주체하질 못한다. "어.. 어떻게 이럴수가 있어??" 떨려대는 입술이 성훈이를 향해 물음을 던진다. 방안 가득히 붉은 딸기알이 떨어져 달콤한 향내를 풍긴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존재하질 않고 몹시 역한 내음으로 가득한 세 사람의 공간. 지용이에겐 속의 있는 내장들이 모두 밖으로 비집고 나올 것처럼 역한 내음으로 가득하다. 지겹게 삭여온 관계. 세게의 꼭지점. 삼각구도.. "내 손잡겠다고 했잖아! 오늘 아침엔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내가.. 내가 지금까지 뭘 하다 왔는데.. 내가 지금까지!" 끓기는 음성으로 성훈이에게 들려주는 불안정한 목소리. "지..지용아." 지원인 자신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성훈이를 뒤에서 감싼다. 성훈이를 꼭 감은 갈색 팔은 지용이에게 경고하는 것 같다. 자신의 소유물이니 건들이지 말라는. 강성훈은 은지원꺼라는.. 그런 의미의 경고. "훗, 고지용 어때? 그림 좋지 않아??"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그가 지용이에게 거센 해일처럼 다가온다. 강한 바람에 자신을 잡던 가느다란 실 한가닥이 여기저기로 휘날리고.. 더 이상 풀 수 없이 엉켜버린 실타래에 미련을 버리고 싶어진다. "네가.. 그럼 그렇지. 내가 없을 때마다, 저 자식 불려 들였지?? 일 핑계 삼고 나가서 저 자식 만나고 그랬지??" 흥분어린 어조와 하얗게 질리는 창백한 얼굴. "지용아, 그게 아니야!!" 지원이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더욱 더 갈색피부에 자신의 몸이 맞닿는다. "내가 지금까지 뭘 하다 왔는지 알아?" '지용아, 아니야! 난..' "강성훈! 내가 뭘 하다가 왔는지 아냐구!!" "고지용, 우린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깐 자리 좀 비켜주지 그래." 여유있는 음성. 자신을 비웃는 안색. 성훈이의 목언저리에 닿는 지원이의 입술선. 다시 겹쳐지는 두 사람의 입술. 그리고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멍해져 있는.. 맑은 눈동자. '가식이야. 날.. 불쌍한 눈으로 보지마. 실컷 즐겨놓고 내 앞에서 아닌 척 하지마. 지금까지 넌 날 가지고 놀았어. 난 널 너무 사랑하는데.. 난, 너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던거야. 내가 널 사랑한다는 흠집을 잡아서.. 넌 날.. 속여가며 내게는 노력한다고 해놓고선.. 내 손잡아 주겠다고 해 놓고선.. 날 좋아한다고 해 놓고는.. 저 자식과 놀아나고 있었어. 지금까지.. 저 자식과 놀아나고 있었던 거야.' 툭--- 휘청거리던 몸은 어이없이 넘어가 버린다. 빨간 딸기알 위로 무릎을 대는 그의 바지가 붉은 물로 물들여진다. 제멋대로 으깨진 딸기의 단내는 더욱 더 풍겨오고.. 접혀진 무릎에선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머릿속의 혼란만 가득하다. 많은 것들이 지나가고 자신이 먼저 뭘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속을 점령하려 드는 듯 하다. 그의 의지를 부셔버리고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라는 어둠의 기운이 그를 감싼다. "난 십 이년동안 사랑했어. 네가 성훈이를 알기 전보다 훨씬전에.." "........." "성훈이가 어떻게 자는지 어떤 음식을 잘 먹는지.. 기쁠땐 어떤 표정을 짓는지 피곤할땐 어떤 표정을 짓는지.. 곤란할땐 어떤 표정을 짓는지.. 불안할땐 어떤 버릇이 나오는가도.. 난 오래전에 알고 있었어. 성훈이가 남기는 지문도 아까워서 난 성훈이가 만진 물건들마저 소중하게 간직해왔어. 그것들이.. 모두 성훈이의 일부 인 것처럼." "........." "성훈이가 웃는 표정들도 하나도 남김없이 내 머릿속에 기억시켰고.. 성훈이가 화내는 모습도.. 짜증내는 모습도.. 모두 난 기억시켰어. 행여 잊어버릴까 하루하루를 기록하기도 했고." 지용이의 음성에 두사람의 입맞춤은 멈춰 버린다. 아직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성훈이가 눈에 보여진다. 멍하니 자신이 할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슬픈 눈망울. 지용인 성훈이의 눈동자에 빠지지 않으려고 허공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지금도 성훈이의 학창시절 짝들 이름까지 외우고 있고.. 성훈이가 좋아했던 이성의 이름까지도 난.. 다 알고 있어. 성훈이가 불연듯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궁금해 할까봐 그들의 연락처도 가지고 있고.." '지용아..' "성훈이가 읽었다는 책은 함께 공감하고 싶어서 밤을 새가며 읽었었고, 성훈이가 좋아하는 서태지 노래도 함께 공감하기 위해 수 십번 수 백번을 들었어. 성훈이와 내 사이의 차이점을 버리고 싶어서.. 난.. 뭐든지 성훈이에게 맞춰갔지. 난 성훈이를 사랑하니깐." 가슴속 깊은 곳에서 토해져 오는.. 애절한 사랑이야기. 지용인 성훈이에게 향한 자신의 집착같은 사랑을 게워내고 있다. 목까지 차오른 그의 사랑을 감당하기 힘겨워 게워낸다. 성훈이가 잊고 있던 것들을 늘어놓는 지용이의 입술은 연신 떨리고 있다. 성훈이를 털어 버리면 빈껍데기만 남을 것 같은 사람. "난 성훈이라면 모든지 알수 있어. 성훈이가 웃고 있어도 성훈이의 슬픔을 읽을 수 있어. 활짝 웃고 있어도.. 난 알수가 있어.. 그의 어깨를 보아도 그의... 뒷모습을 보아도 난.. 알 수가 있어." "........" "중학교 때 성훈인 부모님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는데, 그때 날 찾아와 주었다.. 날 찾아와서 나 밖에 없다고 말했었어. 그런 성훈이에게 고마워서 난 한달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성훈이 곁을 떠나질 못했었지. 네가 성훈이를 힘들게 했을 때도 성훈이 곁에 있었던 사람도 나였어. 나만이 성훈이 곁에서 성훈이를 위로했었어. 성훈인.. 힘들때마다.. 날 찾아 왔었다구." "........" "난 성훈이가 작게 보여주는 행동하나 하나에 감사해 하며.. 살았어. 내 일생의 절반을.. 난 성훈이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었다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성훈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니깐. 난 성훈이에게 내 모든걸 다 줄수 있어. 네가 해줄 수 없는것들. 난.. 성훈이에게 다해 줄수 있어. 나 자신까지도 줄 수 있어. 사랑하니까.. 난 성훈이만 사랑하니깐." 성훈이는 지용이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지원이도 지용이가 힘들게 꺼내드는 말을 냉정하게 지켜보고만 있다. 느껴지는 불안감.. 쫓기는 듯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순간 성훈이의 시선을 바라보았을 때 지원이는 자신의 등골이 싸늘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난.. 성훈이의 뒷모습을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어. 성훈인.. 내게 뒷모습만 보였으니깐. 넌, 성훈이의 웃는 모습만 보았겠지? 지금껏.. 난.. 널 쳐다보는 성훈이의 뒷모습만.. 보아왔어."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통의 시간들을 게워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고통을 소유했던 사람처럼. 하얀 얼굴의.. 슬픈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면서 지용이에게 향하고 있다. 그 눈동자는 자신의 빛을..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들을.. 고통을 게우고 있는 그에게 허락하려는 것 같았다. 지용이에게 빨려 들어가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건 집착이지! 사랑이 아니야!!" 구슬프게 들려대는 지용이의 음성을 막고는 지원이가 나선다. "........." "네가 하는 건 집착이지, 사랑이 아니라구!!" "........." 지용이에게 싸늘하게 쏟아붙는 조롱투의 말. 성훈이에게 들려주며 약간씩 수그러들던 흥분이 폭파하듯 터져 버린다. "탐욕같은 집착을 사랑에 붙이지마!!" "난 사랑이야!!" "사랑? 그게 사랑이야?? 네가 하는 소리는 정신병같은 집착이라구!" "난 사랑이야!! 난 성훈이를 사랑해!!!" 타오른다. 지용이 몸속에 잠재되었던 불꽃이 지원이로 인해.. 가슴속에서 일어나 버렸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지용이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녹아버리는 듯한 빛의 세계는 지용이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빛이 없는 곳에 지용이는 외톨박이가 되어 버린 듯 하다. 더 할수 없는 고통을 주체 할 수가 없다. '성훈아, 내 곁으로 와줘. 나 너무 아파. 나 무서워.' 물기에 젖어 버리는 눈동자가 고통스러워 하다가 공포 스럽게 변해버린다. 파르르 떨며 어깨를 감싸는 그가 자신의 몸을 추스리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집착 그만해. 고.지.용!" '성훈아, 내 곁으로.. 제발.' 움직임이 없는 성훈이. 그는 아직도 갈색팔에 안겨 지용이를 내려다보고만 있다. 슬픈 눈이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순간이지만.. 두 사람이 엉겨있는 모습은.. 하늘에서 정해놓은 듯 했다.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작렬--- 망각의 문은 조금씩 열리고 있다. 열리는 문틈으로 눈을 들어올리는 지용이의 눈동자는 현실세계와 연결된.. 제멋대로 엉킨 실타래를 끓고 싶어한다. "난, 성훈이를 사랑해." 흥분어린 눈동자. 떨려대는 입술. 머질 것 같이 불안한 숨소리. "고지용, 여기를 봐. 지금 나와 성훈이. 그리고 거기에 주저앉은 너." "........." 지원이가 구분짓는 두 공간은 하나이지만 지원이와 성훈이가 있는곳은 높은 곳이었고, 지용이가 존재하는 곳은 아무렇게나 파해 쳐진 무덤 같았다. 지용인 초점 없는 시선으로 성훈이를 바라다본다. '성훈아, 내 곁으로 와죠. 내 옆으로 와서 내 손 잡아줘. 나, 놓을 것 같아. 나.. 나 자신을 포기할 것 같아.' "우린 사랑이고, 넌.집.착.이.야." 성훈이의 몸을 꼭 안으며 지용이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원이의 입가에는 자신이 넘치는 미소가 어울려져 있다. 두사람 사이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충고하는 것처럼 차디찬 냉소를 흘리고 있다. "난 사랑이야!! 난 성훈이를 사랑한다구!!" "상황 판단이 어려운거야? 고지용!!" "난.. 난." 굴려대는 눈동자. 현실에서 멀어지고 싶어하는 듯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내 곁으로 와. 내 손잡아.. 어서 내 손 좀 잡아줘!!' "강성훈은 날 사랑한다고 했어. 지독하고 잔인하게.." ".........." "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자리가 없어." "난.. 난.." 끓기 듯 들여오는 숨소리. 컥컥거리는 기침소리. 파랗게 질리는 핏기없는 얼굴. "알아들었으면 자리 피해주지 그래? 우린 할 일이 있거든." 지원이의 입술이 성훈이의 가슴위로 올려진다. 꼭 안은 팔은 거칠게 움직이고 멍하게 얼어붙어 있는 몸에 자극을 가하기 시작한다. 지원이의 행동에 굴리는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 "난 사랑해!! 사랑한다구!!" "지용.." 성훈이의 입술에서 흘려내려는 지용이의 이름을 지원이는 막아버린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이어지는 지원이의 손길. 멍하니 지용이의 눈만 바라보는 성훈이는 지원이에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내 손.. 잡아줘. 성훈아." 힘없이 여리게 들리는 지용이의 음성. 곧 놓아 버릴 것 같은 눈동자. 그 눈동자가 있는 힘을 다해 성훈이를 올려다본다. 지용인 성훈이에게 구조요청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의식 저편으로 흘러들지 못하도록 잡아달라고 손을 뻗고 있다. "성훈아, 내 손잡아 준다고 했잖아. 내 손.. 잡아 주겠다고.. 너 그랬잖아." 간곡히 부탁하는 어조를 띄며 제발 붙잡아 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지원이를 떨쳐버리고 지용이의 손을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훈인 지원이의 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그의 늪속으로 빠져들기만 한다. 허공에서 멈춰버리는 눈동자에 한줄기 눈물이 떨어진다. 그 눈물은 현실세계와 타협하는 눈물이 아닌 거친 폭풍우 속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한마디로 망각의 길로 들어선다는.. 세상을 향해 작별을 고하는 의미로 흐르는 눈물이다. 공허한듯.. 힘도 없이 떨어져 버리는 눈물방울들. "난... 난, 정말 널 사랑하는데.. 내가 보여주는 것들이 너에겐 아무것도 아니였어. 잠시 난.. 착각은 한거지. 조금이나마.. 네가 날 바라봐 주길 바랬는데." 웃음섞인 음성은 공허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지용이의 입술은 작게 벌어진 채 웃어버린다. "해바라기는.. 태양만 쳐다보게 되있어. 달을 쳐다보라고 강요 할 수는 없는 거야. 그렇지? 성훈아??"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쓸쓸한 미소로 입술이 다물어 진다. 모든걸 포기하고 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사람의 모습 같다. '지용아.' "내 차례는 없는거야. 태양만 쳐다보다 시들어 갈테니깐." '지용아, 난.. 해바라기가 아니야.' 구름에 가리워진 달은.. 얼굴을 감춘다. 망각의 문으로 들어가.. 자신의 월광을 감춰 버린다. "후후,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는거지? 오늘 무척 바쁜데.. 성훈이를 데리고 갈곳도 있고, 생일축하도 해줘야 하는데.." 흐릿한 눈동자가 방바닥에 떨어져있는 빨간 딸기하나를 집어든다. "성훈아, 딸기 사왔어. 너 어딨는거야? 네가 일찍 들어오라고 해서 신호까지 어겨가며 달려왔는데.. 성훈이 녀석 도대체 어디에 있는거지?" '지..지용아??' "후훗. 그 녀석 딸기 먹을 때 정말 이쁜데. 성훈아, 한번 먹어봐. 참 달아. 너 줄려고 특별히 단 걸루 사왔거든." 멍청해 보이는 음성이 아까전의 지용이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는.. 망각의 문앞으로 바짝 들어서고 있다. "지용아!!" "성훈이가 없어. 우리 성훈이 어딨지? 말도 안하고 나갈 녀석이 아닌데.. 성훈이 어디간거지? 오늘 데려 갈곳도 있는데.. 오늘 아주 바쁘단 말이야." 지용이의 행동에 침대위의 지원이가 멍해진다. 자신의 품속에서 불같이 빠져나가는 성훈이가 지용이 곁으로 달려드는 것을 보고도 지원이는 멍하니 지용이를 쳐다만 본다. "지용아!! 나야, 나! 고지용!!" "아, 맞다. 창고 청소도 안하고 왔네. 먼지 많이 쌓였을 텐데. 먼지 때문에 성훈이 지저분하다고 들어가지도 않을거야. 성훈인 더러운 거 싫어하거든.." "지용아 정신차려!! 나 쳐다봐!!" "창고 안에는 성훈이랑 함께 보낸 추억들로 가득해. 난 그 곳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져. 나와 성훈이의 모든 것이 그곳에.. 있거든. 그곳에 날 쳐다봐주는 성훈이가 있어. 내 성훈이.. 내가 사랑하는 성훈이. 그런데.. 어디있지?" "나 여깄어!! 지용아, 나 네 앞에 있어!!" "성훈인 어딨지? 성훈이가 보이질 않아." "널 보고 있어. 나 지금 이렇게 널 보고 있어! 지용아!" 흐느껴 울며 지용이를 몹시 흔들어본다. 돌아오라며 그의 시선을 돌려보려고 노력해 본다. "성훈이. 넌 성훈이가 아니야. 우리 성훈인 얼마나 예쁘게 웃는데.. 우리 후니가 얼마만큼 예쁘게 웃는지 너 알아?" 바보처럼 웃는 얼굴. 이미 망각의 문으로 한 발자국 들여놓았다. "지용아, 네 손잡았어. 네 손잡았잖아! 나 이렇게 붙들고 있잖아!!" 지용이의 손을 꼭 쥐고 그의 시선에 자신이 들어가기를 바란다. 눈물 범벅이 된 하얀 얼굴이 자꾸 자신을 부른다. "성훈이." "그래. 나야 성훈이. 지용아, 나야 성훈이!" "내가 여기에 왜 있지? 오늘 할 일도..." 지용이의 입술은 쉴새없이 움직이고는 있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그의 음성. "지용아, 너 왜 그래? 지용아??" '내 목소리가 안 들리네. 왜 이러지? 나 왜 이럴까? 왜 소리가 나질 않지? 성훈이 찾아서 해야 할말이 아주 많은데.' "지용아!!" 지용이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지만.. 그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용아, 내가 잘못했어!! 나 이제부터 잘할게. 너 힘들지 않게 속썩이지 않을게. 이제 지용이 너만 쳐다볼게. 너만 보고 웃고, 울고.. 너만 생각하며 살게. 지용아, 이러지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흐흐..흐.." 지용이의 시선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울먹이는 성훈이가 두 눈으로 들어온다. "나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 사랑하면 이러지마. 나 아프게 하지마." "성.." '성훈이가 울고 있나봐. 성훈이 너, 왜 울고 있니? 울지마. 넌 웃는 게 제일 예뻐. 울지마. 울지마..' 공허하던 눈동자가 성훈이를 한번 주시한다. 그러다 조금씩 내려지는 눈커플. 감기는 두 눈으로 자신을 몹시 흔들어대는 하얀 얼굴을 담는다. 소중하고 안타깝게.. 마지막으로 담아 내려는 듯 그렇게.. '우리.. 성훈이.. 내 앞에 있구나. 그런데 어떡하지? 성훈이 널 위로해 줄 수가 없는데.. 몸도 마음도 움직여지지 않아. 감각이 없어. 후훗, 차라리 잘됐어. 힘들어. 힘들었어.. 나 너무 피곤해거든. 나 이제 쉬고 싶어. 널 바라만 보는 거 정말 힘들고 아파. 너무 쓸쓸해. 너에게 중독 되버린 내가 널 빼면 아무것도 아닌 내가 너무 비참해.' "지용아, 제발! 흐흑. 지용아!!" '비참한 건 견딜 수 있어. 하지만.. 이젠 네게 닿을 수 없다는 걸. 나 자신이 절실히 깨달아. 넌 영원히 나라는 인간 담지 않을거야. 나역시 널 담지 않을거야. 이제 널 포기하고 싶어. 아니.. 널 포기한다는 건 나 자신이 용납할 수 없을거야. 그러면.. 날 포기해야겠지. 날, 놓으면 되는거야. 내 남은 의지로 날.. 닫아 버리면 되는거야. 날 묻어 버리면 되는거야. 하지만... 오늘까지만.. 오늘까지만 널 담을게. 오늘까지만 널 기억하고.. 내일부턴 널 잊어버리고.. 모르고 싶어. 울보.. 성훈이.. 울지 말고 웃지. 넌 웃는 게 더 예쁜데.' 눈커플은 피곤한 듯 내려진다. 두 눈에 맺혀있던 물기가 응어리진 듯 굵은 방울을 만들며 흘려 내린다. "지용아! 눈떠!! 지용아!!" "........" "지용아! 너 이러지마! 나 혼자 두고 이러지마!" 울부짖는 소리에도 지용이는 눈을 뜨지 않는다. 두 사람을 쳐다보는 지원이의 가슴속의 암담함을 느낀다. 지원이는 차가워진 눈초리로 지용이 곁에 있는 성훈이를 쳐다본다. 끓어지지 않은 굵은 체인에 묶여버리는 성훈이 같았다. 지용인 성훈이를 붙들고 있는 것 같다. "조금씩 사랑하려고 했는데.. 그럴려고 했는데.. 사랑할게. 지용아! 사랑해!!" 망각의 문은 닫치고 있다. 가지런한 길을 따라 망각속으로 들어가는 지용이. 그의 발걸음을 붙드는 음성에 잠시 멈칫한다. '내가 정말 미쳤버린 걸까? 후후훗. 환청까지 들리다니.. 나, 아무래도 정말 미쳤나보다.' "사랑해." 지용이의 모든 신경세포들이 자극을 받았지만 성훈이 품속에 지용인 눈을 뜨지 않는다. "지용아, 사랑해..." - 성훈이 품에 안겨 몽중인이 되버린 지용이. - 그런 지용이를 꼭 안고 서글프게 울고있는 성훈이. - 그리고.. 자신 앞에 두 사람을 보고 사색이 되버리는 지원이. “ 주제넘게 해바라기를 원했어. 활짝 펼쳐진 얼굴이 좋아서.. 고개 숙이지 않고 올려다보는 얼굴이 좋아서.. 해바라기만 쳐다봤어.. 주제 넘은 '달'이였지. 해바라기가 월광에 물들여지기를 바랬다니..” “ 너의 늪지대에서 서성이다가 난 너의 늪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너의 늪은 기다림에 메말라 딱딱하게 굳어져 버리고 난 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도 가르쳐 주지도 않고.. 넌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미쳐 손 쓸새도 주지 않고.. 넌 굳어버렸다. 내가 발을 들여놓았을 때 넌 내 발을 거부하고 있었다.” 78)****** 얼음성으로 들어가. (번외) 뿌옇게 흐려진 시선으로 그는.. 한 발자국 전진합니다. 벽을 짚고 서서 오랫동안 그 안에 존재하던 중심을 잊어보려 노력했습니다. 매달리고 의지하고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소멸되어 버린 세상. 검은 비가 내리고 몽롱한 안개가 일고 아주 여러 날 모래 바람이 시야를 가로막았습니다. 한기속에서 어둠이 스러지고 더 깊은 현기속에서 소리도 없이 빛이 스러졌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생성되는 끊임없는 부정으로 인해 그는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 네 손 잡았잖아!! 이렇게 잡고 있잖아!! 태양은 뜨지도 않고 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한사람이 있었지만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라는 말을 한사람이 있었지만 또한 기억나질 않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눈을 떴을때, 찌프러진 안면으로 하늘을 올려다 봤을때 태양은 하늘 정중앙에 떠 있었습니다. 심한 갈증을 느낄 때쯤 그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쌓을 뿐인 그것.. 성긴 모래비였습니다. 건조한 비. 모래비.. ― 네 곁에 이렇게 있잖아. 내가 잘못했어. 지용아. 반복되던 시간들. 그때부터 눈을 가늘게 뜨고 세상을 내다보기 시작합니다. 고통스런 시간들이 행복하던 시간을 가리고 암울한 세계를 건설합니다. '싫어. 너무 허무하잖아. 내가 살아온 스무 몇 해가 너무 허무하잖아..' 사막.. 불현듯 그가 보고 있는게 사막이 아니라 그의 중심의 마음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의 중심이였던.. 강성훈. 너무 허술하게 시작됐던 사랑이라는 건축현장. 처음부터 부실했던 공사였습니다. '네가 없는 세상이 너무 무서워.. 돌아갈까?' 하지만 그는.. 걷습니다. '됐어. 다시 돌아가면.. 난 죽어버리고 말거야.' 오랫동안 머물렀던 절대적인 존재에 대항하기 위해.. 걷습니다. 쉴새없이 걸었습니다. 그에게 들려오는 맑은 미성을 거부한채로 걸었습니다. 걷고 또 걸어 그는 자신의 몸에 평안을 안겨줄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끓임 없이 걸었습니다. 미성이 그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불려대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지녔던 그만의 중심을 잃어서 미성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는... 잊고 싶어합니다. ― 고지용, 눈을 떠!! 나, 여기 있잖아!! 지금 네 앞에 있잖아!! 제발 눈을 떠! 흐흑. 네 곁에서 떠나지 않을께. 너, 깨어나도 나. 네 곁에서 꼼짝하지 않을께. 그러니깐 제발 눈을 떠!! 눈을 뜨란 말야!!! 자신의 몸이 몹시 흔들리거나 작은 충격들이 덥치 곤 했습니다. 그 다음으론 그의 뺨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처음 며칠동안은 목이 잠긴 음성이 윽박도 지르고 처절하게 울기도 했습니다. ― 지용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흑흐.. 너만 쳐다볼게. 남은 생 동안 너만 바라보면서 살게. 그러니 눈을 떠. 눈을 떠서 날 봐줘. 지용아, 제발 눈 좀 떠. 응? 그가 버리고 온 껍데기에 하얀 손길이 정성스레 그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가 간절히 원했던 하얀 얼굴이 하루종일 그의 곁에 앉아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 지용아, 장미꽃이 한창이야. 너무 이뻐. 향기도 좋아. 향기가.. 정말 좋아. 지용이 너도 맡고 있는거지? 그렇지? 아주 먼 곳에서 모래 폭풍이 휘몰려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이 마르고 허기가 느껴졌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런걸 해결할 만한 장소는 전혀 눈에 뛰질 않았습니다. '널 떠나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그는 힘없이 고개를 숙입니다. 얇은 층을 이룬 모래가 미세한 언어의 미립자로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감지한 것은 언어가 아니고 그것과 유사한 무엇도 아니였습니다. ― 지용아, 성훈이 울고 있는데.. 나, 울고 있단 말야. 나, 울고 있으면 눈물 닦아줘야 하잖아. 위로해야 하잖아. 이 바보야!! 일어나란 말야!! 흐흑.. 부식된 기억의 저편에서 바람꽃처럼 혹은 안개꽃처럼 어른거리다 이내 의식의 암층으로 사라져 버리는 희미한 잔해. '울지마. 나 없어도 잘했잖아. 익숙해 질거야.' ― 지용아, 커플찻잔을 샀어. 흰색이랑 파란색인데.. 흰색은 내꺼구. 파란색은 네꺼야. 너 깨어나면.. 이 컵에다가 제티 아주~ 맛있게 타줄게. 같이.. 마시고 싶지 않니? 어느 순간 그는 이빨을 드러내고 정신이 박약한 인간처럼 웃어 보였습니다. 그에게 들려오는 말들을 모두 환청으로 단정짓고.. 그는 웃어 보입니다. '날 끌어내려 하지마. 너무 늦었어. 소용없다구.. 후훗.' ― 지용아, 낙엽이 떨어져. 플라타나스 잎이 다 떨어지고 있어. 아파트 뒤의 산도 울긋불긋 한 게 예쁘게 물들어져 있어. 같이.. 등반하면 좋을 텐데. ― 지용이 머리 잘라야 겠구나. 이러다 단발머리 되겠다. 쿠쿡. 오늘 목욕 시켜줄까? 에고, 나 일한다는 핑계루 우리 지용이 목욕도 제대로 못시켜줬네. 중심이 그의 의식에 그도 모르게 끼친 영향에 관해 그가 생각하기 시작한 건 아주 오래 전 일었었습니다. 해맑기만 하던.. 순수하던 시절에 그는 그 자신을 내몰아 버리고 새로운 중심을 맞이했었습니다. 그래서.. 중심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아주 대단한 재해였습니다. ― 지용아, 나 추워. 지금 나 안아주면 안될까? 일어나서 내 몸을 좀 달궈죠. 응? 지용아, 그래주면 안될까? 나, 춥단 말이야!! 그러나.. 그는 걸었습니다. 미성을 뒤로 한 채. 미성의 존재를 무시한 채로.. 쉬지 않고 걸어 들어갔습니다. 망각의 세상으로.. 그는 들어갑니다. 들어가는 내내 그에게 들려오는 맑은 미성이 그의 귀에 거슬립니다. ― 지용아, 이거 생각나니? 중학교때 너랑 야영 갔을때 찍은 사진인데.. 기억안나니? 말은 못해도.. 언제나 그가 말하고 싶어한 것은 인간적인 것이였습니다. 검은 모래 폭풍이 끝없이 휘몰아치는데, 그런데도 귀가 먹먹할 정도로 적막한 사막의 무풍지대. 그는.. 한동안 사랑이라는 것에 집착해 봤습니다. ― 지용아, 너무 멀리 있는것 같아. 날.. 여기다 혼자 내버려두고.. 넌 너무 먼 곳에 있는 것 같아. 왜, 날 보지 않니? 가끔씩 그의 귀가 솔깃해 뒤를 돌아보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시해 버립니다.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찾아가는 평안의 장소가 녹아 버릴 것만 같았기에.. ― 언제쯤.. 돌아올래? 그곳에서 헤매는 거 피곤하지 않니?? 중심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일었습니다. 그를 놓고.. 그 자신도 편안해 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중심을 없앤다는 건 그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심을 놓기에.. 그는 중심에게 쏟아 부은 것들이 엄청나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없애는 것으로.. 그는 선택했습니다. ― 날 안아줘. 미친 듯 횡행하는 광기의 파편처럼.. 쩡쩡.. 어디에선가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얀 설밭에 외로운 발자국이 스밉니다. 건조하디 건조한 사막을 지나 그가 도착한 곳은 몹시도 싸늘한 곳입니다. 보랏빛으로만 가득한 유리알들이 그를 향해 내려옵니다. 그러나 그에게 불어오는 모진 눈보라에도 끄떡없이 걸었고 그가 쉬어야겠다고 맘먹었을 때쯤.. 그 앞에는 커다란 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몇 억년 동안 그를 기다린 것처럼 쓸쓸하고 외롭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친 손을 내밀어 성문을 두들겼습니다. 커다란 얼음 성문은 그가 찾아올 것을 알았는지 아무 거리낌없이 열렸습니다. 그는.. 성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합니다. ― 지용아, 키스해줘. 그는 멈칫합니다. '그럴리 없어. 환청일거야.' 그는 고개를 두 세 번 가로 젖고 움직이려던 발을 듭니다. ― 지용아, 나 네곁에 있어. 날봐. 나야, 나 성훈이. 강성훈.. ― 네 곁에 항상 함께 할게. 응? 연대를 추정할 수 없는 아뜩함 속으로 이따금 블루빛 섬광이 스쳐갑니다. 그리고 아주 먼곳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밀폐된 공간으로 그것은 견고한 벽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에 대해 흐릿한 눈동자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 네 앞에 있어. 지용아, 성훈이.. 여기 있어. '믿지 않아. 이젠 속지 않아.' 자포자기로 자해를 일삼던 생활들. 그는.. 지쳤습니다. 폭풍이 부는 밤은 비교적 조용하지만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그는 그런 밤에도 좀체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은밀히 육체를 내 놓았던 중심. 그의 중심은 그의 것이 아니였습니다. 성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그를 얼게 만들던 바람은 흔적을 감추었습니다. 더 이상 움추리지 않아도 되었고.. 그는 좀 더 깊숙이 성안으로 몸을 내던집니다. 성 끄트머리에서 피어오르는 은빛 바람이 그를 내려다봅니다. 그를 인도하기 위한 전령같아 그는 바람을 쫓기로 합니다. 한참 바람을 쫓아갔고 그의 발이 멈출 때 그 앞에는 커다란 보랏빛 얼음 성좌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를.. 기다린 냥 외롭고 쓸쓸하게 있었습니다. 순간 그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고.. 그는.. 성좌에 앉아 잠시 쉬고 싶다는 욕망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몸을 맡겨 버렸습니다. 의자에 앉는 순간 그에게 커다란 거울파편이 날라 들었고.. 그것은 그의 슬픈 눈동자에 깊이 박혀 버렸습니다. 보랏빛 눈동자. 성안의 투명함보다 더 투명하게 변색한 그의 머리칼은 은빛. 고집스레 다물어진 푸른 입술.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게 변해 버린 얼굴. 그는.. 성안의 모든 것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빼앗겨 버립니다. 그에게 남아 있던 온기와.. 그의 중심.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채 멍하고 허한.. 유리알 같은 시선으로 그는 성좌에 앉아 있습니다. 성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빼앗기지 않은 온기가 마지막으로 그의 볼에 따뜻함을 줍니다. 투명해진 시선에 가득 담은 따뜻한 물줄기. 그의 눈물은 이것이 마지막 일껍니다. '사랑따위.. 그런 고상한 말. 내 앞에서 하지마. 네가 날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건 네 스스로의 길을 못 찾고 있기 때문이야. 이런 곳에 아직도 사랑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얼간이는 없어. 돌아가서.. 되풀이하기 싫어. 난 믿지 않아. 너의 입술로 부르짖는 그 고상한 말. 더 이상.. 네게 속지 않을 거야. 돌아가기.. 싫어. 이곳이... 내게는 편해.' 불빛이 완벽하게 소멸된 어둠속에 앉아 그는 소리없이 입술을 치켜세웁니다. 그리고 소리 없는 미소를 짓습니다. '후훗.' 따뜻했던 온기는 성안의 냉기로 얼어 버리고 그의 핏줄을 따라 흐르는 붉은 선혈도 꽁꽁 얼어 버리고 맙니다. 그를.. 깨워줄 새로운 중심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는 동면을 즐길 겁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머무를 겁니다.. 『 너무 오랫동안 나는 별을 바라보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별만 바라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별을 바라보면서 너무 많은 사랑과 꿈과 희망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의 꿈과 별 하나의 희망이 쓰러지는 동안 나는 별보다 더 냉랭한 빛으로 나이를 먹었고, 실현되지 않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별보다 더 먼 거리로 내 자신을 이격 시켜왔다. 하지만 불행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확인되는 것인가. 오랫동안 별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어느 하루도 내 뇌리에서 별을 지워 본적이 없었다. 봄의 사자자리.. 여름의 전갈자리.. 가을의 페가소스자리.. 겨울의 오리온... 그것들의 각도도 정확하게 내 머리 속에 각인 돼 있다. 가을엔.. 페가소스자리. 』 “ 성훈인 저기 페가소스자리 옆에 있는 별 해라. 제일 반짝이고 제일 큰 걸로.. 난 네 별 옆에 제일 작은 별로 할게. 제일 작고 빛도 제일 안나는 걸로.. 나중에.. 우리 둘 다 하늘로 올라가면 서로를 잘 알아볼 수 있게. 잘 기억해둬. 난 덜 반짝이고 넌 제일 반짝이고.. 난 작은 별이야.. 반짝반짝 작은별~ 하핫!! ” 79)****** Air for the 'G' string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시간들이 흘러갔다. 지용이의 눈동자에 자신이 머무르지 않았음을 느낄 때 성훈인 한숨을 길게 토해내며 울먹거리곤 했다. 막막했고, 두려웠다. 지겹도록 쫓아다녔던 지용이의 시선이 그리워 그의 볼을 비벼보고 안겨보기도 했지만, 성훈이에게 남은 건 지용이의 빈 껍데기일 뿐이다. 지용인..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닫아 버린 상태다. 시린 바람이 성훈이를 춥게 만들어 옷깃을 세우는 날이 많아졌다. "춥지 않아?" ".........." "겨울이 빨리 오려나봐." "..........."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울 거라는데." 처음엔 자신을 바라봐 달라며 울부짖었다. 또한 모진 소리를 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돌아와 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성훈이가 현실속에 남아 해야 했던 것은 그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그를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느 정도의 세월을 흘려 버리든.. 달을 거듭할수록 깨닫게 되었다. 그가 온전하게 자신에게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여행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한 자리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용아, 음악 들을래? 클래식 들려줄까?" ".........." "바흐.. 아니면 모차르트?" "..........." "바흐가 좋겠지? 너 바흐 좋아하잖아." "..........." "G선상의 아리아? 프렐류드.. 뭐가 좋을까?" "..........." 성훈이의 음성은 부드러워졌고 어린아이를 다루듯 지용이에게 상냥하게 말한다. 그는.. 망각의 세계에서 떠돌고 있으니깐. 언젠가 그가 돌아올거란 신념을 가지고 성훈인 하루하루를 보내주고 있었다. "이번주 내로 퇴원하게 될거야. 담당선생님과 상담했는데. 네가 많이 호전됐다고.. 이제 통근치료를 받아도 된다고 하네." "..........." 숨죽인 채.. 슬픔을 감춘 채 늘 조심스럽게 떨리는 성훈이의 눈빛. 그 눈빛은 상채기 투성이의 가슴에 다시 찔리는 듯한 아픔이 서려 있었다. 간절히 지용이의 음성을 기달려 보지만 오늘도 헛된 일 같다. "내일 아침 일찍 통나무집 가서 대청소하고 올건데. 나 안 보인다고 도망갔다고 생각하지마." "............" "알았지?" 성훈이가 보이지 않을때마다 어딜 갔다 왔냐고 다그치던 음성은 없었다. 그를 흔들어 대던 손도.. 없었다. 반달 눈을 만들고 휄체어에 몸을 앉힌 지용이에게 말을 걸어 보지만 지용인 작은 눈빛도 허락하지 않는다. 성훈이의 맑은 미소에도 그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성훈이를 보지 않는다. 그의 중심이였던 성훈이를 빈 껍데기는 수용하지 않는다. 성훈인 슬픈 두 눈으로 변색되어 지용이 무릎에 고개를 묻는다. "언제쯤.. 돌아올래?" ".........." "그곳에서 헤매는 거 피곤하지 않니??" ".........." 조심스럽게.. 들키지 않게 떨어뜨린다. 힘겹게 좁혀왔던.. 거리만큼의 눈물. 오늘도 성훈인 지용이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텅 비워버린 지용이에게 나즈막히 속삭여 댄다. '내게로.. 돌아와줘. 날 쳐다보며 말해줘야 하잖아. 지겹다고 짜증내지 않을게. 제발, 돌아와. 돌아와서 말해줘.. 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줘.' 『 병원은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정신병동에 찾아 든 매력적인 눈빛의 그가 환자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포악하게 성이 난 그를 멈추도록 저지하는 자는 없었다. 간호사들은 그를 말리다 이벽쪽 저벽쪽으로 나동그레 쳐지고 환자의 멱살을 꼭 쥔.. 성난 눈동자가 또 한번의 주먹을 날리려고 했다. "고지용! 네가 왜 이러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 "연극 그만해! 고지용!!" 성훈이가 자신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이번 생을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를 잊어버리자고 말했다. 이제 은지원에게 벗어났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그가 이별을 고한 것이다. 은지원이 허망하게 채인 것이다. "환자노릇 그만 하란 말야!!!" 주먹이 뻗어졌다. 인중이 피범벅으로 된 환자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다. "아악!"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간호사들이 비명을 질려댄다. 겁에 질려 입을 틀어막는 간호사도 있다. "은지원!! 그만!!" 앙칼진 음성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은 성훈이였다. 그리고 험하게 쏟아지려던 주먹은 조심스럽게 가라앉았다. "강성훈, 언제까지 여기 있을래?!!" "........" "저 자식은." "형, 도대체 왜 이래?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러냐구?!!" '난 알 수 있어. 너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어.' "형이 왜 이러는지 나 이해가 안가." '넌..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어. 알 수 있어. 난..' "내가 알던 은지원은 이러지 않았어." '난 변했어. 너로 인해.. 네가 변화 시켰어.' "오지마. 형." "훗.." "찾아오지마. 형은 여기 오면 안돼." "후후훗.." "지용인 환자야. 형과 내가 지용일 저렇게 만든거야. 찾아와서 지용이 그만 괴롭혀!!" "쳇, 갈수록 과관이군." "지용인 아파! 아프다구!!" 목에 핏발을 세워 내뱉은 음성이 갈라진다. "네가 살집 구해뒀어. 그 집으로 들어가." 지원이는 단호하게 전달한다. 부드럽게 말하는 것도 아닌 일종의 명령처럼. 지원이 말에 얼이 빠진 성훈인 앞에 있는 그를 차디차게 노려본다. '엇갈린 인연을 바로 잡기엔 너무 늦었어.' "내게 명령하듯 말하지마." '우리 사이에 변한 건 없어. 변한 척 하지마. 성훈아..' "형이 뭔데? 내가 형 소유물이야?" 성훈인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원인 그것을 받아들일수 없어 스스로에게 체면을 건다. 성훈인 변하지 않았다는.. 하지만.. 그는 변해 버렸다. 언젠가부터 그는 변해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낯섦. 그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지원인 뚜렷이 받는다. 한번도 세상에 부대낌을 받아 본적이 없는 것처럼 여리기만 하거나, 그래서 감당할 수 없게 괴로워하거나.. 자신의 말한마디에 눈물이나 뚝뚝 흘려대던 유리같은 소년이였다. 적어도 지원이 아는 성훈이의 모습은 그랬다. 그러나 지금 성훈인 마치 모든 것에서 다 벗어 난 것처럼 그렇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낮게 침몰한 성훈이의 모습. 아니 어쩌면 지원 자신이 더욱 더 낮게 가라앉아 버린지도 모른다. 이상했다. 몽중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이상하다. "긴말 말고 들어가 살아!" 성훈이와의 대화를 연장시키면 무언가가 폭팔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지원인 성훈이의 다음 대사에 극심한 공포심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지원인 낮게 가라앉는 가슴을 손으로 쥐고 자리를 일어서려 한다. '강성훈. 사랑한다니깐!' "은지원." "......" "나, 강성훈을.. 사랑은 했니?" 고개를 푹숙이며 힘없이 털어놓는 것 같았다. 과거속에서 허하게 상한 가슴을 도려내리는 듯 성훈인 도리는 곳의 통증을 느끼며 그에게 낮은 음성으로 묻는다. 사랑은 했니. 라고.. "가지고 논거 아니였어??" 허탈하게 웃으며.. 모든 것이 과거의 악몽이라도 된냥 떠들어댄다. 지원인 안주머니에서 두 개의 열쇠가 걸려진 열쇠고리를 탁자위로 내려놓았다. "사람 보낼테니깐, 준비해." 갑자기 일어서려니 현기증이 일었다. 지원인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발에 온힘을 넣고 꿋꿋하게 일어섰다. "이거 가져가!" "강성훈!!" "이제 난.. 은지원의 놀이감이 아니야." 지원이의 팔목을 붙들고 그의 자켓 주머니에 열쇠고리를 들어 넣었다. 아무 장애없이 쏙 들어가는 것이 지원이의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 준다. 하얀 손이 자신의 갈색손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현기증 난다. 성훈아, 그만하자. 응?' "이제 더 이상 형의 놀이감 아니야. 섹스상대가 그리우면 딴데가서 찾아봐!" "도대체 뭐가 문제야? 뭐, 때문에 이러지?" "............." "고지용, 저 새끼가 환자노릇해서 그래?" "지용일 함부로 말하지마. 형에겐 내가 놀이감이였을지 몰라도 지용인.. 지용인 달랐어." "고지용, 동정 그만해. 네가 이럴수록 저 자식이." "핫? 동정?" 그는 지원이의 선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벗어나서 새로운 선상으로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동정이 아니면 그럼 뭐야? 너 지금 고지용 동정하잖아. 고지용 돌봐줄 사람 없으니깐." "동정은 아니야. 그리고.. 말했잖아." "......" "난.. 형 모른다고.. 난 은지원이 누군지 몰라. 그러니깐..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마. 아니 우리 앞에 나타나지마. 달갑지 않아. 형 얼굴.. 은지원 얼굴. 은지원한테서.. 벗어나고 싶어."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아프게 한만큼 지원일 아프게 할키는 것이 아니라, 정녕 지원이를 잊고 새로운 선으로 들어가 안주하고 있는 듯 했다. 똑바로 자신을 노려보는 똘망똘망한 두 눈동자가 낯설다. 두 눈동자에 자리 잡혀 있던 자신의 형체는 사라지고 없는 것 같다. '벗어나고 싶다?? 달갑지 않다???' "찾아오지마.. 형 보는거.." "내일 오후 4시야. 준비하도록 해." 흔들림이 없는 그가 자신의 머리위에서 굴림하기를 원한다. 성훈이에게 지원인 항상 명령이였다. 지령을 내리는 상관처럼 다가오기만 했다. "지겨워. 정말 지겹고 역겨워.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이는 행동하나하나가 새롭다. 낯설기만 하다. 지원에게 내뱉는 성훈이의 말은 직격탄이다. 지원이의 가슴을 뚫고 한없이 돌진하는 직격탄. "은지원이란 인간 정말 싫어!! 지긋지긋해!!!" ".........." "모르겠어? 이제 나에겐 네가 아무 의미 없는 거." ".........." "널 떠난 거 모르겠냐구!!" 성훈이가 던진 돌멩이의 파문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아니, 이것은 돌멩이 정도가 아니라 숫제 집채만한 바위를 내 던져서 호수의 밑바닥까지 뒤흔들어버린 꼴이다. "널 알게 된걸 저주해.. 정말.. 네가 싫어. 소름끼치도록 네가 싫어! 너만 만나지 않았어도 난 이렇게 되지 않았어!! 네가 날 망쳐놨어!! 내 인생 다 밟아 놓고!! 뭐? 나더러 또 너한테 목매 살라고??!!" '성훈아, 그건 내가... 살면서 다 갚아 나갈께.' "뻔뻔스러워. 역겨워. 토할 것 같아!!" 지원이의 가슴은 샅샅히 분해되고 또 분해된다. 지원이 못지 않게 차갑게 내뱉는 성훈이 역시 조각조각 분해되어 버린다. 그 동안의 앙금을 모조리 분해하고 싶은지도.. "날, 이렇게 만든.. 널.. 증.오.해. 난 널 떠났으니깐, 다신 날 찾지마!!" 똑똑히 들리는 그만의 음성. 차디찬 얼음파편들을 지원이에게 달려든다. 온몸에 차가운 기운을 느낀다. 으스스하게 온몸이 추워지더니 지원인 자신의 어깨를 무의식적으로 안아 버렸다. 또한 무의식적으로 뱉어 냈다. 뱉은 입술은 몹시 떨리고 있었고, 성훈이는 여지껏 격었던 지원이의 모습과는 무척 생소한 안면을 대했다. "강성훈. 안 들은걸로... 할게. 그런.. 말. 다신 하지마." 성훈이에게서 뒤돌아서는 지원이의 다리가 휘청거린다. 그런 지원이의 뒷모습을 보는 성훈이의 가슴은.. 많이도.. 너무 많이도 아프다. "오지마!! 찾아오지마!! 달갑지 않아!! 보기 싫어!!!" 지원이의 뒷통수에 대고 소리치는 성훈이의 하얀 볼위로 따뜻한 액체가 스며든다. 떨어지는 액체는 수를 샐수 없어져 버렸고, 오열하며 주저앉는 성훈이의 가슴이 두 동각이 나 그를 몹시도 괴롭게 만들었다. '제길. 뭐야 형.. 안들은 걸로 한다는 말 따위가 뭐야. 형답지 않게 뭐야. 형답지 않게 그런 약한 모습 뭐야?? 이제 와서 그런 모습 보여주면 뭐해?? 형을 사랑했던 성훈이 마음은.. 떠나고 없는데... 형을 사랑했던 시간들을 모두 비워 버렸는데.... 모두 놓아 버렸는데...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날려 버렸는데.' 』 80)****** 한잔의 독약처럼 슬프고도. 거리에는 어느새 가을이 깊어 있는 모양이었다. 청소부에게는 결코 낭만일수가 없는 은행잎들이 우수수 흩어진 거리, 그리고 가을이었다. "이재진!" 병원을 나와 정거장에 막 스쳐 걷는데, 수원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원이도 지금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진인 등을 돌려 수원이를 바라보며 엷은 웃음을 지었다. "이 무식한 놈아! 내가 언제 밥해달라고 투정부린적 있어??!! 네가 우리집 가정부야? 누가 너더러 요리 배우라고 등떠민적 있어??!!" "........" 수원이가 들고 있던 가방으로 재진의 어깨를 후려쳤다. 오른손에 하얀 붕대로 돌돌 말아 놓은 것이 내심 속이 상했나 보다. "미친새끼! 누가 요리 배우래?" "오늘 바쁘다며.. 여긴 왜 왔어?" "쉬펄." 손을 데었다는 소리에 병원으로 날라오듯 달려온 수원인 재진이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몹시 안절부절하고 침착하지 못한 게 오는 내내 걱정한 것 같다. 엷은 미소를 띠고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재진이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한다. "오늘 한일은 다 끝낸거야?" 재진이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인다. 아직도 수원이의 시선은 재진이 손에 쏠려있다. "그럼 집에 빨리가자~" "........." "오늘 배운 거 복습해야지. 난 돌아서면 까먹잖아.." "........." "까먹기 전에 어여 가자." "당장 때려쳐!!" "오늘의 요리는 닭도리탕~!" "때려쳐!!" "아주 맛있어. 좋아할거야. 하핫." "집어치우라니깐~! 병신새꺄!!" 통나무집을 지키던 노부인이 성훈이를 맞았다. "지용학생이 그대로 나두라고 당부해서 그대로 두긴 했는데.. 장미꽃이 말라서 보기가.. 흉하네." 노부인의 알 수 없는 말을 들으며 호수를 돌아 통나무집 현관이 보이는 곳까지 들어섰다. "몇 달동안 오질 않아서 치울까도 생각했는데.. 한나절동안 공을 드린거라 치울 수가 있어야지." ".........." "장미가 몇 송인지 수를 샐수가 없었어. 몇일동안 장미향만 맡으면서 살았다니깐. 눠집 규수, 생일잔친지 뭔지 한다고 일꾼들 불러다 놓고 집을 꽃천지로 만들더구먼..." 장미향기는 없었다. 추하게 녹쓴 장미대문 뼈대만 앙상하게 남겨져 있었다. 통나무 곳곳에 장미 줄기가 감겨져 있는 것이 간혹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싱싱함이란 존재하질 않았다. 아니.. 장미꽃잎이 달려 있었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모든 게 멈췄고, 바람에 날라가 버렸다. 지용이가 망각의 세계로 떠난 순간부터 모두 날라가 버렸다. 노부인이 통나무집 현관을 따고 '학생!'하며 불러보아도 성훈인 움직일수가 없었다. '이거였어? 아픈 몸으로 나간 이유가.. 이걸 준비하려고.. 그 몸으로 나간거였어? 이것 때문이였어?? 이것 때문에.' “ 내 손잡겠다고 했잖아! 오늘 아침엔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내가.. 내가 지금까지 뭘 하다 왔는데.. 내가 지금까지...” 노부인이 같이 청소해 주겠다고 나섰지만 성훈인 거절하며 통나무집에 남았다. 해가 뉘엇뉘엇 저서 날이 어두워졌다. 방안을 환하게 밝히기 위해 스위치를 올렸는데, 그가 켠 것은 방안 스위치가 아닌 지용이가 준비했던 이벤트 스위치였다. 방안을 빙그레 돌며 늘어놓은 전기초가 눈에 부시다. 이곳저곳 엉겨있는 장미 줄기를 따라 초들이 줄을 섰다. 말라서 흔적이 사라져 버리려는 장미꽃. 먼지까지 뒤집어 쓴 것이 자신의 몰골과 동일해 보인다. 성훈인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애써 깜빡거리며 울음을 참아내고 있다. 한쪽 벽 전체에 자신의 웃는 사진을 붙여놓은 브로마이드가 보인다. 탁자 위엔 녹아서 엉겨붙은 생크림 자욱이 보인다. 그 옆에 두 개의 와인 잔이 보이고 붉디붉은 와인이 보인다. 그리고 노랗게 변색된 하얀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어내고는 카드를 펼쳐본 순간.. 성훈인 참았던 물기를 엎질러 버린다. 한참 멍하니 서 있다 맥이 빠진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성훈아, 사랑해.” 그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이다. 전엔 지겹게 들렸으나, 지금은 간절하게 듣고 싶은 말. 너무 많이 들려줘서 습관처럼.. 당연한 것처럼 듣었던 말. '이렇게라도 나에게 들려주고 싶었니? 난, 네게 직접 듣고 싶어. 너의 목소리로... 네가 직접.. 내 앞에서 들려주기를 원해.' 가장 진부한 사랑고백. 긴 시간동안 고민한 끝에.. 지용이가 선택한 가장 아름다운 사랑고백. 헤아릴 수 없는 수식어들이 있었지만 지용이의 마음을 대신할 수 없었다. 여자의 손이 지원이의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입술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름모를 낯선 여자들의 타액과 알콜뿐이었다. 온 몸에 퍼져 있는 세포들이 몇 달째 알콜로 저려가고 있었다. "꺼져!" 지원인 몸을 주체하려고 노력하지만 허사일 뿐이다. 그가 일어서려고 노력할수록 그는 더욱 더 흐트러진 자세로 소파 깊숙이 묻히고 있었다. "호홋. 많이 취하셨나봐." "자기 참 귀엽다~" "자갸, 자지 말고 더 놀자. 응?" 낄낄거리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어지럽게 들러온다. 자신의 손에 말깡한 게 느껴진다. 부드러운 젖가슴 위로 자의가 아닌 타인의 손에 의해 움직여진다. 요염하게 꾸며 놓은 여자들이지만 천하게 행동하는 건 숨길수가 없다. "자갸, 기분 좋아??" 요란한 전자 키보드소리. 음악과 어울리지 않은 상그레. 사선을 그려가며 떨구는.. 메말랐던 눈물. '강성훈, 날 떠나지마.' “ 제발 좀 말해줘. 성훈인 넌 알잖아. 네가 가르쳐 준거니깐 넌 잘 알잖아. 쉬운 말로 알아듣게 좀 가르쳐 줘. 나도 동맥 끊어볼까? 나도 내 정신 놓고 멍청히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널 되찾을 수 있는걸까? 어떻게 하면 널 내 곁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을까? 성훈아..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거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거냐고.. 내가 어떻게 하면!!!!” 독한 알콜냄새가 진동을 했다. 지원이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은주는 지원이의 어깨를 잡고 사정없이 흔들어 댔지만 지원인 은주가 흔드는 대로 그냥 흔들리며 신에게 답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는 아무런 응답도 내려주시질 않았다. "지원씨 정신차려봐요! 네?" 쓰러지듯 안기는 남편의 몰골은 몹시 흐트러져 있었다. 잘 빗어 넘겼던 올빽의 머리도 잘 정돈되었던 셔츠도 지원이의 속처럼 몹시.. 아주 몹시도 흐트러져 있었다. 그의 가슴이 산산이 부서져 내려진것 처럼. 은주에게 어깨를 붙잡힌 채로 마구 흔들리며 왈칵 울음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한다. "강성훈!! 강성훈 돌아왓!!" "지원씨!! 제발 정신 차려요!!" "강성훈!!" "지원씨!!" "돌아와.. 병신새꺄!!" "지원씨, 정신 좀 차려봐요!" "돌아와.. 돌아와." "지원씨." "성훈아.. 강성훈, 제발." "지원씨.. 일어나요." "성훈이.. 강성훈..흐흑." "지원씨??" "성훈이 좀 잡아줘.. 부탁할게. 그 자식이 떠나지 못하게 좀 말려줘." 여리디 여려 붙잡으면 부서 질 것만 같은 유리그릇 같다. 자신의 몸을 알콜로 적히고 주저앉아 흐느끼는 모습이 북적되는 광장에서 엄마 손을 잃고 헤매이는 아이처럼 느껴진다. 너무 약해 잡아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아이.. 은주는 그녀의 머리속에 강하게만 자리잡은 남편이 먼 곳으로.. 아주 먼곳으로 출장 간거라고 믿고 싶다. 이런 남편의 모습은 처음본다. 얼굴 가득 눈물과 콧물로 가득한 사람은 자신과 백년기약을 한 남편이 아닐거라고 체면을 걸어본다. "성훈아.. 성훈아. 흐흐.." "지원씨.. 일어나요." "날 사랑한다고 했어. 날 사랑한다고.." '차라리 화를 내세요. 제게 화풀이를 해요. 지원씨.. 절 냉대해도 좋아요. 주저앉지 말아요. 당신의 모습이 너무 가여워요. 당신이 무너진 것 같아요. 지원씨.. 제발...' 다른 사람으로 가슴을 채운 남편.. 은주는 자신의 가슴으로 지원이의 얼굴을 끌어 당겼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그녀의 가슴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제 잘할수 있는데.. 이젠 정말 잘해줄 수 있는데..." '성훈이라는 사람.. 그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당신이 주저앉을 만큼... 당신이 눈물을 보일만큼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당신의 전부인가요?' 어린아이를 달래주듯.. 은주의 손은 지원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남편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성훈이란 이름에 입술을 깨물어가며 그를 달래주고 있다. 울지 말라며. "제발.. 못 떠나게 잡아줘. 흐흑.. 그 녀석 좀 잡아줘." '만약.. 당신의 전부라면 그가.. 너무도 부럽네요. 제가.. 그 일수 없을까요?' "내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데.. 내가 애정을 느낀건.. 성훈이가 처음이란 말야. 흑.." "지원씨.." "내가 사랑한 건 처음이란 말이야!!" '오늘밤.. 당신의 성훈이가 되어 드릴게요. 울지 말아요.. 지원씨... 울지 마세요.' 지원이가 흘려 내린 눈물이 은주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눈에서 뱉어내게 만든다. 그녀는 오늘밤 눈물을 쏟아가며 잠이 들것이다. '당신이 부르는 그 사람이 밉네요.. 당신처럼 단단한 사람을 무너지게 만드는.. 당신을 지배하고 당신의 전부로 만든 그 사람이 너무 밉네요. 당신을 아프게 만들 수 있는 그가... 밉네요. 전.. 은지원.. 당신을 사랑해요. 저도.. 당신이 처음이랍니다. 당신이 성훈이란 사람을 사랑하듯이..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지원씨. 이제 그만 울어요. 그를 잡아 드릴게요.. 당신이 아프지 않게.. 그를 당신곁으로 인도할게요.' '성훈아.. 너 아니면 안돼. 난 네가 없으면 안된다고.. 네가 없으면 난...' 지원이는 더욱 깊은 곳으로 낮게 가라앉아 버린다. 그리고.. 속절없는 외침만 그의 산산이 부서진 가슴속에서 공허하게 떠돌 뿐이다. '난.. 네가 아니면 안돼..' 81)****** crying game. 가을의 싸늘함이 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양 어깨가 움찔거릴만큼 차안이 추워, 시동을 걸어 히터를 작동시켰다. 주차장에는 회색의 거대한 레미콘 트럭이 삐뚜름히 정렬된 차들을 피해가느라 한참 애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오늘 퇴원수속 밞고. 출판사 들렸다, 통나무집으로 가야겠다. 그나저나.. 지용이가 좋아해야 할텐데." 차천정으로 환한 빛이 모여들고 하늘은 푸르고 투명한 빛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새벽 하늘이 안개 때문에 온통 뿌옇던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성훈인 눈두덩을 비비며 핸들에 손을 놓는다. 어제 늦게까지 일한 덕에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가 없다. 비몽사몽간에 성훈인 차안으로 몸을 실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훗. 어제 무리했나? 피곤하다."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엑셀레이터를 밟으려던 그. 똑똑-- 차창을 두들기는 소리에 성훈인 졸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든 꽃이 불쑥 원기를 얻어 빳빳이 고개를 쳐드는 것처럼 조금은 놀란 눈으로 차창 밖을 응시한다. 차창을 내리며 차창을 두들긴 사람의 형체를 올려다본다. "강성훈씨?" 자신의 키보다 10cm정도 커 보였고, 덩치는 자신보다 두 배로 보인다. "네, 제가 강성훈 인데요." "쉽게 찾았군." 썬그라스의 감춰진 사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사냥감을 찾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거놔요!!" 주차장에 울러 퍼지는 성훈이의 비명소리는 입속으로 들어오는 하얀 천의 무향에 잠이 들어 버린다. 그는.. 의식을 잃은 채 사내의 손에 끌려가고만 있다. "상처하나 내지마." 휴대폰을 들고 화장대 앞에 앉는 은주의 얼굴은 생기 있어 보인다. 간밤에 지원이의 손길을 받으며 그녀는 잠이 들 수 있었다. 부족함이 없는 터치였고, 그녀에게 달콤한 신혼 첫날밤 같았다. 단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자신의 이름이 아닌 강성훈이라는 이름이 지원이 입술에서 쉴새없이 울렸다는 것. 그래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침대위에서 지친 듯 잠든 남편을 거울을 통해 바라본다. 눈주위에 노란 멍울이 생겨 있고, 두 볼에 자리잡혔던 볼 살은 사라져 제법 사내의 골격을 확연히 들어내 보였다. [도망 못 가게 지하실에 강금했는데, 공주님이 원한다면.] "지하실은 안돼. 제일 좋은 방으로 정중하게 모셔." [훗후, 질문 있어.] 사내의 걸걸한 음성에 귀찮다는 듯 두 눈을 지긋이 감아 보았다. "뭐가 궁금해?" [도대체 이 꼬마녀석은 누구야? 이은주 스타일은 아닌데.] "훗." [결혼생활에 실증을 느끼는 거야? 다른 남자가 필요해?] "미친놈. 끓어!!" 휴대폰의 캡을 닫아버리고는 앞에 보이는 결혼사진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지원이의 싸늘한 눈빛이 은주의 동공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심장을 시리게 만들어 버린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당신 손에 쥐어 드리겠어요. 하지만.. 제 품에서 벗어날 생각은 말아요. 만약.. 당신이 제 품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전.. 당신의 심장에 비수를 꽂을 겁니다. 제 손으로 직접 꽂을 거예요. 제 손에서 벗어난다면.. 차라리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요. 당신을.' "선배!" 상아색 원피스. 상아색 헤어밴드. 수원이에게 다가오는 후배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다. 눈동자만큼이나 반짝거리는 입술연지는 오래 전부터 수원이의 시선을 끌고 싶어했다. "수원선배!" 수원인 가늘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작년에 교양과목을 함께 듣던 명랑하고 쾌활하던 후배로 기억된다. 부연을 덧붙이자면 집안과 집안의 친분이 두터워 혼사가 오갔던 적도 있었다. 은주가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소녀끼를 덜 벗은 은하가 형수가 되었을 수도 있다. 똑똑하고 활발한 성격에 미모까지 갖춰진.. 나무 랄 때가 하나 없는 그런 완벽한 신부감이다. "여긴 왠일이야?" "왜긴요." "넌, 예술학부잖아. 예술관은 저쪽인데." "보고 싶어서 왔어요." "응??" "선배가 보고 싶어서 왔다구요. 선배는 저 안 보고 싶었어요?" 동그란 눈동자가 눈가에 애교어린 잔주름을 만든다. 장난처럼 들리는 웃음섞인 음성도 듣기가 좋다. "호홋.. 선배 얼굴이 빨개 지셨네요. 장난이예요. 장난. 저 때문에 당황하셨나봐요. 오늘 저녁에 M.T 가는데. 선배 얼굴도 보고 도서관에도 들릴까해서 온거예요." "어.. 어, 그..그래." '이건 무슨 향기지? 근처에 꽃집이 있는건가?' 어디서 풍겨져 오는지 자스민의 강한 향내가 수원이의 후각기관을 건들이고 있다. 그의 마음을 두들기고 있는지도. '도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두 눈이 뜨여지질 않아. 움직일 수도 없어.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기억을 되살려 마지막으로 자신이 눈을 떴을 때를 떠올려본다. 지용이가 몰았던 애마에 몸을 실었었다. 그의 퇴원수속을 하려고 일을 하다가 나와 병원으로 향하려고 했었다.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이 정지된 곳을 둘러보았다. 하얀 벽면과 고전풍으로 잘 꾸며놓은 인테리어. 별안간 이상한 느낌이 뒤통수를 찔렸다. 얼핏 고개를 들자 거울속에서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공주님의 명령이야. 네가 필요하다고 하시더군."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성훈이에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공주님?' "그녀가 널 원해." '원해? 누가 날 원한다는거지?' 귓가에서 시계추가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적한 시골의 풍경이 커다란 샤시면을 장식하고 있다. "후훗.. 공주님께서 다시 장난감을 구입하시는 거야. 크큭." 분열된 의식속에 아련히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앞이 핑 돌고 깜깜하다. 성훈인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마침내 밑동이 잘려 중심을 잃은 나무처럼 픽 쓰러져버린다. 머리에서 가득히 떠오르는 지용이의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나뒹군다. 먼 곳을 향해 있는 슬픈 시선. 얇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한기를 느끼는 지용이의 여린 모습.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고여버린다. '지용이에게 가봐야 하는데. 날, 기다릴텐데. 나 없다고 불안해할텐데.' 바비인형처럼 치장한 은주. 그녀의 몸에선 아이리스 향기가 난다. 지원이를 달콤하게 깨워줄 아이리스향. "지원씨, 이제 일어날 시간이예요."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지만 취기에서 아직 깨지 않은 모양이다. "지원씨." 갈색피부가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고, 어깨를 넘어가는 곳에 작게 새겨진 전갈문신이 매력적이다. 은주는 전갈의 형체를 손으로 그려가다가 그의 어깨위로 고개를 떨구였다. 짙고 숱이 많은 지원이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간밤에 자신의 품에서 잠이든 지원이. 그에게선 바람 냄새와 함께 술냄새가 풍겼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신체에서 춤 추웠고, 멈추지 않기를 갈망했다. 어둠속에서 그의 등위로 올라간 그녀의 손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부드러운 입술. 살짝 튀어나온 이마, 적당하게 솟아오른 콧날. 창백해진 얼굴색. 이 모든 것을 은주는 사랑한다. "당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요. 당신이 원하는 장난감이예요. 후훗. 당신이 칭얼대며 사달라고 했던.. 장난감을 구입했어요." "수원선배!!" 상아빛으로만 치장한 것이 한 눈에 띄었다. 캠퍼스로 나오자마자 달려드는 애띤 얼굴이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침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수원이만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은 당황스럽게 그녀를 맞이하는 수원인 작은 눈웃음으로 그녀에게 고개짓을 했다. "오늘 M.T간다고 하지 않았나?" "가기 싫어서 빠졌어요. 대신 잉어나 낚으려고 남았죠." "잉어? 낚시 가는 거야??" "벌써 낚았는데요." "어??" "선배말이예요. 수원선배!" "........" 투명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에 잠시.. 아주 잠시동안 수원인 자신이 어디로 향할려고 했는가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가 당돌히 담은 말에 조금은 웃음이 나와서 피식 웃어버리기도 한다. "선배 저녁 안하셨죠?" "어? 어.. 으..응." 억지스럽게 말하듯 했다. 조금 전 만해도 누군가를 떠올리며 급하게 계단을 내려온 것 같았는데. "선배, 저녁 사주세요!" 어슷하게 서있는 수원이의 팔짱을 끼고 은하는 전진하려고 했다. "저기 은하야." "핏, 오늘만은 도망 못 가세요." 생글거리는 그녀의 팔에 이끌려 수원이의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향기가.. 좋다. 모든 여자에겐 이런 향기가 나는걸까?' 그는 자스민향기에 취해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을 잊어버리고 있다. 유혹의 향기. 자스민. 수원이만 생각하면 가슴이 마구 풀어진다. 풀어지다 못해 물이 되어 흐르는 것 같기 까기 하다. 도대체 그 놈의 어디가 자신을 이렇게 사로잡는 것일까? 어설픈 자문. 자신이 생각하고도 우스웠는지 재진인 마른입을 축이며 미소지었다. 갑작스레 걸려든 수원이의 전화. [야! 꼼짝 말고 학원 앞에서 기다려. 오늘 나랑 같이 병원가자! 나, 지금 갈테니깐. 알았지?] 학원 앞에서 그를 기다리며 재진인 오늘 배운 요리를 언제 수원이에게 선보일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수원이에게 맞춰진 자신이 생활에 손톱만큼의 불만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행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나저나.. 올 시간이 꽤 됐는데.' 수원이가 내릴 버스정거장을 유심히 지켜보는 재진이. 원활하게 움직이는 자동차들의 움직임에 시계를 자꾸만들여다 보게 된다. 10분.. 20분.. 40분.. 50분. 자신이 학원 앞에서 한시간 가량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쯤 하늘 위에서 물방울이 재진이의 이마위로 떨구어졌다. 뚝뚝--- 쏴쏴쏴------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물이 순식간에 굵은 장대비로 변했고 재진이 팔을 감싸던 붕대가 금새 빗물에 젖어버렸다. 그의 청보랏빛 머리칼도 젖어 버렸고, 그가 걸치고 있던 하얀 남방 역시도 모두 젖어 버렸다. '비나 피하게 커피숍에 들어가 있을까? 아니야. 수원이 녀석 내가 여기에 서있지 않으면 간줄 알고 토라질거야. 풋. 그나저나.. 무슨 일이 생긴건가? 학교가 코앞인데.' 장대비는 재진이를 두들기고 있었고, 학원앞의 상점들이 하나둘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어둠은 재진이 서있는 곳에 잔뜩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빗줄기에 전해오는 싸늘함. 얼 것같은 온도. 재진인 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입속에서 풍겨오는 입김에 그의 체감온도가 조금 더 내려앉는다. '녀석. 우산은 들고 있는지 모르겠네. 아침에 옷도 얇게 입고 나갔는데.' 끼니때가 되자 입술을 봉했던 테잎이 제거됐다. "절 놔주세요!!" 수많은 물음들을 생략하고 꺼낸 첫마디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것은 하얀 얼굴의 입술선을 보아도. 그의 여린 어깨가 떨리는 것을 보고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건 곤란해. 공주님이 오셔야 해결되는 문제거든. 후훗." 입술선은 항상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것이 그가 태어났을때부터 지닌 표정처럼 익숙하게 올라가 있었다. 검은 선그라스 안에서 굴러대는 색 모를 눈동자가 성훈이의 반항하는 여린 몸짓을 몹시 귀여워하는 것 같다. "왜죠? 제가 왜??" "공주님이 원하니깐." "공주님? 당신이 말하는." "얼음처럼 차가운 공주님. 크큭." "그 공주님이라는 사람의 정체가 도대체." 성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서 나가버리는 검은 정장을 원망스럽게 노려본다. 물음은 끝이 보이질 않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용이의 공허한 눈동자가 그를 암담하게 만들기만 한다. "지용이가 기다린단 말이야. 지용이가.." 조금씩 어둠은 내려앉고 성훈인 자신 앞에 자리한 식기들은 신경적으로 걷어차 버렸다. 수갑으로 채워진 손목은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주었고, 발목에 묶여진 노끈이 꽉 동여매어 있어서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다. 한 자세로 있을려니 몸을 움직일 때마다 경련이 일어난다. "왜지? 왜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지??" 물음은 시작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성훈인 두 눈이 흐려짐을 느낀다. "지용이가 기다릴거야. 날 찾아 울고 있을거야." 천둥이 몹시도 기세를 부리고 있다.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내리쳐대는 굵은 빗줄기가 가을을 삼키고 있었다. 지원이의 눈은 안으로 향하고 있고 외로워 보였다. 저런 지원이의 모습을 보는 은주의 눈이 날카로워져 간다. 그녀가 알고 있는 지원인 절대 저런 눈으로 있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 자신감으로 가득하던 사람. 세상을 이끄는 알 수 없는 절대적인 힘. 이것이 그녀가 지원이에게서 느낀 커다란 매력 이였다. "당신이 무얼하던 상관하지 않겠어요." 은주가 꺼내는 말에 신경쓰지 않고 옷장을 여는 그의 손은 힘이 없이 축 늘어져 있다. "하지만.. 제가 은지원의 아내라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 "전 은씨 집안의 며느리예요. 은씨 집안의 대도 제가 이어야 하구요." ".........." "당신을 닮은 아이를 갖고 싶어요." ".........." "당신의 아이를 갖은 다음엔 당신이 뭘 하던 상관하지 않겠어요." "풋, 독수공방하시더니 미쳐가는군." 은주가 나열하는 말에, 지원인 어이없다는 듯 냉소를 품었다. 무시하는 어투. "강성훈." 그녀의 입술이 동그랗게 움직이며 지원이의 중추신경을 자극시킨다. 셔츠단추를 여미려던 지원이 은주를 쳐다보자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장난감을 구해 뒀어요." ".........?" "당신이 원하던 사람을 붙잡아 두었죠. 풋." '무슨 소릴 하는거지?' "당신이 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가 있는 곳을 가르쳐 드릴게요." ".........?" "그곳엔.. 당신의 장난감이 기다리고 있죠." "무슨 소리야??" "강성훈, 그 사람." "성훈이?" 얼굴 색을 선홍빛으로 변하는 날렵한 눈동자가 흥분 어리게 은주의 시선을 쫓았다. "당신에게 잡아 드릴게요. 대신 절 당신의 아내로 인정해 주세요. 당신 아이를 갖게 해 달라 구요." 지원인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주를 쳐다본다. 노랗게 뜬 눈가에 힘이 주어진다. 그녀는 성훈이를 이용해 제안을 걸어온다. 어떻게 보면 지원이 받아들이기에 아주 쉬운 조건인지도. "어디야? 어디에 있어??!!" 82)******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비는 줄기차게 흘려 내렸다. 은하가 떠드는 수다는 지루하지 않고 흥미스럽다. 코맹맹의 소리의 낭낭한 장난투의 음성도 재밌고. 그것보다는 그녀의 반짝거리는 입술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핑크빛 연한 입술연지의 맛은 복숭아처럼 달콤하지 않을까? "지원오빠는 잘 지내요? 결혼식장에서 뵙고 그 뒤론 한번도 뵌 적이 없는데." "........" 지원이란 이름에 수원이의 인중이 고집스럽게 변해버린다. "그날 수원선배가 보이지 않아서 섭섭했어요." "........" "오랜만에 수원선배 얼굴구경 좀 한다고 했는데.." "........" "학위 따신다고 집에도 안 들어가신다고 들었어요." "........" "공부가 그렇게 재밌어요?" 입술을 깨물며 눈웃음을 치는 은하의 뽀얀 피부가 수원이의 눈안에 가득차고 있다. 아기솜털로 가득 매운 투명한 피부. 뽀얀 피부는 달걀을 만지듯 매끄러울 것이다. '만져 보고 싶어.' 충동이였다. 갑작스레 만져보고 싶다는 욕구가 수원이의 머리 끝까지 치닫고 있었다. "수원선배는 어릴적이나 지금이나 같아요. 과묵하신 건." "........." "선배, 그거 알아요?" ".........?" "제가 선배 좋아한거요." "어?" 불에 댄 듯 열이 오른다. 이상한 감정이 수원이를 사로잡는다. "지금도." "........." "좋아해요. 선배를." 레스토랑에 울리는 피아노 선율이 비내리는 소리를 죽이고 있다. 은하를 쳐다보는 수원이 몸이 굳어져 버린다.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다. 마주보고 있는 눈동자에서 이상한 전율을 느낀다. "사귀는 사람 있어요?" '재진이.' 깜박 잊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급하게 뛰어 나올 때 재진이에게 전화를 했었다. 기다리라며 일방적인 약속을 했었다. "선배??" "어??" 멍해지려는 시선이 긴장되 옆에 있던 글라스를 엎지르고 말았다. 차가운 냉수가 식탁위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선배, 제가 실수 한건가요??" "아..아니." "........." "저기 은하야." "네??" "지금.. 집에 들어가 봐야 하거든." 마음은 급하지만 은하와 앉아 있는 이 공간에서 쉽게 일어나고 싶진 않다. 웃긴 감정이 수원이에게 인 것이다. 어쩌면 자스민 향기에 젖어. 그 향기에 매료되고 싶은 지도 모른다. "늦은 것 같아. 그만, 들어가야겠어." "........." "데려다 주고 싶은데." "괜찮아요. 바쁜 일 있으면 어서 들어가 봐 야죠." "정말, 괜찮아?" "정말, 괜찮아요." "........." "대신.. 다음엔 집앞까지 데려다 주셔야 해요." 투명한 미소는 수원이의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여 버린다. 티없이 맑고 순수한 미소. 꾸밈이 없어 보인다. 자스민 향기는 은은하게 풍기고 수원인 짧은 시간동안 두 눈을 감아 보았다. '이건 무슨 감정이라고 하는거지? 내 연예이론엔 이런 건 없는데. 이런 건 정의 되 있지 않는데.. 이런걸, 뭐라고 하는 거지? 이런걸.. 뭐라고 하는걸까?' 급히 레스토랑에서 빠져 나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런 제길." 휴대폰 전원이 꺼진 채 가방을 지키고 있었나 보다. 수원인 두리번거리다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 들어섰다. 바삐 움직이는 손은 지갑에서 공중전화 카드를 꺼냈고 수화기를 들고는 재진이의 휴대폰 번호를 입력 시켰다. RRRRRRR--- RRRRRRR---- 몇번의 신호음은 들렸지만 받질 않는다. 재발신 버튼을 누르고 다시 한번 번호를 입력시킨다. 하지만 여전히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고 만다. "어휴-- 장수 정신을 어디다 쏟고 다닌 거야??!!" 자신을 원망하며 이번엔 집에다 전화를 걸어본다. 집 넘버를 누르면서 느껴지는 초조함이 수원이 마음을 더욱 바쁘게 만든다. "젠장! 왜 받질 않아!!" 불안함이 밀려들고 수원인 재진이 다니는 학원으로 급히 몸을 옮겼다. 오들오들 떨린다. 온몸이 경련이 일도록 오들오들 떨리고 있다. 수원이가 오지 않았는데도 그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깊은 밤에. '몇 시간쯤은 기본이야. 기다릴 수 있는데 까지 기다려 보지. 뭐.' 그는 닫혀진 학원 유리면에 기대고 서서 담배 한가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쉴새없이 떨어지는 빗줄기를 올려다본다. 눈길은 떼어지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는 일과 밤하늘을 우러르는 일에 몰두하려 한다. 지퍼라이터를 당기고 불을 붙이려 하지만 빗줄기는 심술궂게 불꽃에 떨어진다. 다시 한번 켜려는 순간. "야! 이 등신아!!" 비 내리는 소리와 함께 흠뻑 젖어 있는 수원이가 재진이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후훗, 지각생이군. 하지만.. 올 줄 알았어." 수원이를 보자, 피식 웃지만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담배를 끼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의 피곤한 몸이 그 자리에 길게 눕혀져 버린다. "이.. 이재진??!!" 누군가 한번쯤은 피터팬이 사는 곳을 꿈꿔본다. 슬픔, 증오,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곳. 에버랜드. 망각의 공간에서 떠도는 그는 피터팬의 나이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꼬마들은 얼마나 빨리 어른이 되는 것일까? 세상이 푸른빛의 동화가 아니란 걸 깨닫는 순간에? 아침이 열리는 까닭이 신기한 모험이 아니란 걸 눈치채게 되는 순간에, 아니면 어른들의 한숨이 객적은 습관만은 아니란 걸 알게 되면서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로 발을 들이밀게 되는 걸까? ..... 지금 지용이는 겨우 스물 두 살의 나이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알고 가라앉아, 이제 잠들어 버리려는 그는 그의 키의 반 쯤이였던 시간을 꿈꾼다. 숲가의 연못 옆에서 사슴과 벗하여 뛰어 놀고, 한껏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다 눈을 뜨면.. 싱그러운 풀 냄새가 코를 핥고 온통 기쁨으로만 존재했던 시간을. 해맑은 미소를 흘리며 대지의 여신에게 안기던 그때. 멍한 눈동자가 조금은 흔들리며 약하디 약한 미소를 담고 있다. 웃음소리로만 가득한 공간은 푸른 대지로 깔려 있고 이름 모를 들꽃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불연 듯 하얀 바람개비를 갖고 싶어하는 하얀 소년을 그는, 바라보게 되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디서 봤지?' 어린 지용인 걸음을 느추며 고사리 같은 손을 목뒤로 끌어내 목언저리를 어루만지며 하얀 소년에게 다가갔다. 가슴이 두근대며 떨려온다. 새색시의 볼에 찍어 넣은 연지처럼 두 볼이 핑크빛을 뛴다. 하얀 바람개비는 미풍에 실려 잔잔히 돌아가고 있다. 바람개비를 달라며 손을 내미는 소년의 시선이 슬퍼 보인다. 바람개비가 아닌.. 그의 손을 내밀어 달라는 것 같았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거야? 왜 그런.. 눈으로.' 슬픈 눈망울이 햇살에 반짝이려 할 때 지용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얀소년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며 바람개비와 함께 지용이에게 뻗어질 때 그는.. 소년 뒤에 어둡게 그어진 그늘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건 또 뭐지?' 체면에 걸린 냥 지용이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소년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 보지마. 보지마.. 하얀 소년의 미성은 흐릿하게 들렸고 그림자를 확인한 순간 지용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얀소년이 그의 눈을 가리고 보지 말라고 윽박 질렀어도 자신의 동심 어린 두 눈으로 보고, 확인까지 해버렸다. 지용이의 눈을 가렸던 성훈이의 손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일까? '너에겐 은지원만 존재해. 넌 오직 한사람뿐이지. 내가 너의 손을 잡는 들.. 내 존재는 너에게 항상 두 번째였어.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지용인 하얀 소년 앞에서 고요히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보랏빛 공허한 눈동자로 변해 버렸다. 차를 몰고 가던 지원인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며칠전부터 아파왔던 심장부위에 통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핸들위로 얼굴을 묻어두고 긴 신음을 이어서 내뱉는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생성되어 뺨으로 가지를 치듯 굴러 떨어진다. 앞으로 6km정도만 가면 성훈이가 있는 별장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묘한 기운으로 가득한 밤이다. 하늘은 잔뜩 흐린지 달빛구경도 할 수가 없다. 바늘로 찔려대는 듯한 통증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뒷차의 클락션 소리.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엑셀레터를 힘껏 밟는다. 은주가 일러준 별장. 지원인 도로를 타는 동안 들뜬 가슴을 가라앉히질 못했다. '성훈이가 있다. 나의 성훈이가 있다.' 통증이 조금씩 가실무렵 지원이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성훈이가.. 나의 성훈이가 날 기다리고 있어. 성훈이가.." 그는 달리고 있다. 그가 고속도로를 달린 것은 순전히 끓어오르는 가슴속의 투지 때문이였다. 강성훈이라는 투지. 번잡한 도로를 뚫고 나와 고속도로를 타는 지원이. 속도를 가르키는 전광판의 숫자가 140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동안 차안에는 차분하게 가라앉힌 발라드 음악이 줄기차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훈이와 함께 이 반주에 춤을 췄었다. 시종일관 추월선을 달려서 앞을 가로막는 자동차들한테서 비상등을 깜박거리면서 단한번도 쉬지 않고 그는 속초까지 달린다. 달리면서 오로지 성훈이에 대한 생각 뿐이였다. 카오디오의 볼륨을 좀 더 높인다. '사랑한다고 고백할거야. 내 곁에서 날 잡아 달라고 고백할거야. 오로지.. 너뿐이라고 고백할거야.' 우선은 비를 피해야 했다. 공원 등나무 벤치로 재진이를 끌고 온 수원인 눈이 감긴 재진이의 뺨을 몇 번이고 두들겼다. "야, 장난 그만 쳐! 일어나란 말야!!" "........" "이재진! 눈떠, 이 병신아!!" 재진이를 몇 번 흔들고는 포기했다는 듯 그의 고개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도록 만들었다. "장난이 길면 재미없어. 일어나라구!" "........" 미안한 마음에 수원이의 음성은 기어 들어갔다. 줄기차게 흘려대던 비는 어느덧 그쳤고, 저 만치에서 비춰는 외로운 빛들이 이리저리 섞이고 있었다. 행인도 없는 공원은 정적으로 가득 차고 있다. 등나무 옆에 설치된 공중전화 박스에서 새어나오는 흰색의 불빛과 가로등의 붉은 색 불빛만이 그 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마치 두 사람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도시처럼 멀리서 달리는 차 소리가 들렸고, 귀뚜라미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들어가게 눈떠. 약속 어겼다고 골탕 먹이려는 거야?" "........" "혹시 너 업고 가라고 투정부리는 거냐?" "........" "이재진!! 너 지금 시위 하는거야??!! 네가 얼마나 무거운 줄 알아??" "........" "쉬펄. 오지 않으면 집에 들어갈 것이지. 왜 기다리고 난리야?" "........" "아휴- 답답해!!" "........" 미안함은 심도를 더해가고 수원인 곁눈질로 재진이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까 레스토랑에서 본 은하의 손과는 다르게 거칠고 질긴 가죽으로 둘러 싸여 있다. 괜한 짜증이 인다. "이재진, 화내기 전에 일어나. 장난 계속 칠 거면 나 혼자 집에 들어간다!" 괜한 짜증에 더해 화까지 났다. 이유 없는 화였다. "곰탱이처럼 미련하게.. 네가 계집애야? 네가 춘향이라도 되는 줄 알아??!!" "........" "미련해!!" "........" 일어서려고 맘먹었을 때 수원인 자신의 무릎에 무게를 느낀다. 수원이의 무릎위로 올려진 재진이의 입술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재진..아??" 불빛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재진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다. 그 창백한 얼굴은 몹시도 아파 보인다. 떨려대는 입술도.. 미미하게 움찔거리는 감은 눈도. "수원아. 수..수원아." 재진이의 떨림이 그의 체온이 수원이의 무릎으로 가득히 실려져 온다. "야, 이.. 이재진! 너, 어디 아파?" "으..음." 심술궂게 떨어지던 빗소리에 재진이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조심스레 재진이의 얼굴로 손을 대던 수원이가 기겁을 하며 재진이를 흔들었다. 그의 몸은 불에 타다 만 사람처럼 뜨겁다. 그 열기에 재진이의 입술을.. 아니 그의 온몸을 태워 버릴 것만 같다. "이재진!!" "........." "야, 이재진!!" 성훈의 머릿속에 웡하는 소리가 들리며 전신에 힘이 빠지고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을만큼. 방문 밖의 웅성거림에서 똑똑히 구분 지을 수 있는 목소리. '설마. 지원..형?' 아니기를 바라며.. 입술을 꼭 깨물어 댄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의 핼슥해진 얼굴이 나타났다. 순간 무너져 내리는 가슴한구석에서 성훈이에게 신음소리를 뱉어내게 만들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원이의 얼굴이 몹시도 거칠어 보인다. 밀납같은 얼굴. 새파래진 입술. 분주히 뛰어온 사람마냥 얼굴 곳곳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다. 지원 뒤에서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던 사내가 문을 닫고 조용히 나가자 지원인 성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다가가자 멈춰서는 지원이. 정지된 시간마냥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다. 바라만 보아도 많은 얘기를 나눈 것처럼 느껴진다. "보고 싶었어." 지원이 침묵을 깨고 손을 내밀자 성훈이의 가슴에 이상한 파문과 격동을 일으켰다. 결별을 선언하고 남남이 되었어도 그의 음성 하나만으로 이미 송곳이 되어 가슴을 찔러오는 고통의 원천이 되는 사람. 은지원. 밤이 깊어 달빛이 차창밖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훈인 주먹을 꼭 쥔채로 일렁이는 감정을 평정하기 바빠진다. 그리고 맘속으로 수없이 외쳐댄다. '믿지마. 강성훈' 이라고. "쿡, 은지원이 이런 유치한 짓을 할 줄 몰랐어." "........." "형은, 항상 날 힘들게만 만들어." 긴 한숨. 흔들리는 시선. 성훈인 서늘하게 느껴지는 바람속에서 가슴 가득 까닭 모를 격정과 또 그만큼의 불안감이 고개를 들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의 그림자만 느껴도 난 가슴이 아파. 넘어가지 않아. 형이 뭐라 해도.' 83)****** 눈빛은 말하고 있잖아. 성훈이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이 돌발적인 감정은 세상을 놀라게 만들 폭풍우를 가져온 회오리바람이었다. 바람부는 들판에 외롭게 피어있는 작은 달맞이 꽃 같은 그에게 폭풍우가 던져주는 거센 바람과 폭우는 실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원인 성훈이를 쳐다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담배만 계속 피웠고 폭풍우를 예고하는 별장공기에 두려움만 가득했다. 성훈인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지원이의 시선을 맞으며, 얇은 침대시트가 어떤 보호막이라도 되는 듯 꼭 쥐고 있었다. "지용인 많이 좋아졌냐?" "........." 먼저 지용이의 안부를 묻자 의아한 눈빛으로 변해버린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통근치료를 받을 정도면." "........." 지원이 왼손은 링을 찾고 있었다. 오는 동안 쉴새없이 옹알거리던 한마디를 떠올리며. '사랑해.' "더.. 마른 것 같구나." "........." 지원인 그의 손에 일부가 된 것처럼 링을 꼭 쥐어본다. 일종의 다짐처럼. 거사를 치룰 사람처럼 긴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다. 성훈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진다. 부드럽게 만져지는 입술이 아닌 가을바람에 건조하게 변해버린 입술이였다. "성훈아." "휴--- 이제 더 이상 형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 "항상 형은 방법이 틀렸어." "........." "하하핫, 이런 유치한 일까지 벌릴 줄 몰랐네." "........." "내 몸 생각에 안달이 난 거야?" "그만 떠들어." "왜~? 처음부터 형은 내 육체에만 관심이 있었잖아." "........." "내 말이 틀려??" '그건 아니야. 성훈아. 난..' "후훗, 그래. 처음부터 난 형에게 섹스상대일 뿐이였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 "시작해." "강성훈?" "빨리 하란 말이야!! 시간 끌지 말고!!" "혼자 판단하지마!" "그럼 형이 원하는 게 뭐야? 이게 아니면, 뭐냐구!!" '너야, 너 자체. 네 영혼. 너의 사랑.' "내가 형을 원했을 때 형의 그 잘난 자존심때문에 상처만 받았어. 형의 질긴 무관심에 난 말라가고 있었고, 형에게 맞춰가는 내 자신은 한없이 밑바닥만 기었지. 한번이라도 따듯한 소리 해 본적 있어?" "........." "내가 형을 떠난 이유 아직도 모르겠어??" "고지용이 정상이 아니니깐. 쓸데없는 책임감에 묶여있을 뿐이야." "하하핫. 책임감? 형이야 말로 혼자 판단하지마. 책임감이 아니야." '그럼?' "사랑이야. 난 지용일 사랑해." "거짓말 하지마." "진심이야." 맑은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꼭쥐여진 링에 압박을 가하며 이를 부드득 갈아본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화를 억지로 삭이며 성훈이의 언어들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지를 생각했지만 좋은 답이 금방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기만 하다. "빨리 끝내."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셔츠단추에 손을 대는 성훈이의 행동에 지원이의 주먹은 더욱 더 꼭 쥐여진다. "강성훈! 너야말로 날 힘들게 해!! 너 알아??!!" 지원인 성훈이의 몸을 반쯤 숨겨준 이불을 확 잡아끌었다. 성훈인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긴장한 채 떨고 있었다. 이미 태풍의 도래를 단단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네가 날 우습게 알다니." "끝나면.. 날 보내줘." "........" 울먹이는 음성에 끓어오르던 분노는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지용이가 기다릴 거야. 그 불쌍한 아이. 내가 아니면 안 된다구. 내 손길이 없으면 불안해서 많이 아파한단 말이야." "........" "형은, 내가 없으면 살수 있지만.. 지용인 아니야." "........" "그러니깐 날, 보내줘. 응?" 아래로 내리 깔린 시선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그 빛은 미온의 액체 상태다. 지원인 성훈일 붙들었던 손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 섰다. 거리를 두고 그는 성훈이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자신을 위한 눈물이 아니다. 저 눈물은 고지용을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이다. 갑작스레 서러움이 지원일 덮치고 있다. 성훈이가 뿌옇게 보여지자 지원인 뒤돌아 선다. 그리고.. 막혀있는 입술을 열었다. "나도.. 네가 없으면.. 살수 없어." 아래로 깔려 있던 시선을 올렸을 때 방문은 닫쳐 있었고 지원인 보이지 않았다. "나도.. 한때는 형이 없으면 살수 없었어. 하지만." 입술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돌고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침대시트에 얼굴을 묻고 오랫동안 묵은 눈물을 흘려 보낸다. '거짓말일거야. 날 잡기 위해 그런거야. 형 말에 속지말자. 속지말자.' "네가 애야? 엄살이게!" 수원이의 손을 잡아당기는 재진인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많이 놀랬지?" "아프려면 죽을병이라도 걸리던가. 그래야 걱정이라도 해주지. 그깟 비 한번 맞았다고 몸살이냐?" "........" "오늘.. 늦을 거야. 약은 식탁위에 있어. 챙겨먹던 말든 맘대로 하셔." 재진이의 시선을 피한채 책을 챙기는 수원이가 재진이에게 퉁명스럽게 말한다. "수원아." "왜?" "이리와 봐." "시간없어. 늦었단 말야." "잠깐만 이리와 봐." "이씨~ 왜에??!!" 투덜거리며 재진 앞에 서는 수원이가 누워있는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눈 좀 맞추고 살자. 얼굴 잊어 버리겠잖어." "미친놈!" 무언가, 전하고는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자스민향기. 수원이가 짜증스럽게 퍼붓는 동안에도 은은하게 자스민 향기가 났다. 알콜로 몸을 물들이고 성훈앞에 선 지원인 비틀거리고 있었다. 역한 술 내음이 방안 구석구석으로 방향제마냥 퍼져갔다. 지원이의 노랗게 질린 안면이 성훈에게로 향했다. 그 얼굴빛은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해 있었다. 성훈인 지원이의 아랫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는게 분명히 느껴졌다. '그래. 나는 한때 당신을 한없이 사랑하던 멍청이였다.' 지원인 충혈된 시선으로 성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쓰러질 듯 다가가 성훈이의 손을 잡아챘다. 단말마의 비명같은 소리가 성훈이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그러곤 무섭게 찬 손이 성훈이의 손안에서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지원인 성훈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말해봐. 고지용이 좋아?" 지원이는 성훈이의 눈을 쏘아보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원이가 보고 있는 것은 성훈이가 아니였다. 그건 은지원, 자신의 모습. 그 썩은 나무토막 같은 자존심으로 무장했던 은지원이였다. "다시 말해봐! 고지용을 사랑해??!!" 빼내려고 애쓰던 성훈이의 손에서 꿈틀거림이 멈추었다. 단지 당혹스러운 시선만이 지원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지원이의 그런 눈빛속에는 가장 처참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격렬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건 물론 자아를 비판하는 그 실체뿐이였다. 상처받지 않기위해 피해왔던 시선. 숨기며 꾹꾹 눌려왔던 사랑이라는 감정. 자신이 아닌 다른 실체가 자신의 영혼을 뒤흔드는걸 무시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말해!" "형.." "나만 사랑한다고 말해!!" "......." "날 사랑하잖아!!" '형, 이러지마.' "넌 나만 사랑했다고 했잖아! 날 떠나서 살수 없다고 떠들었잖아!!" '너무 작아 보여. 초라해 보여.. 형.' "날 떠난다고? 날 떠나서 산다고??!!" '형의 모습이 날 아프게 만들어. 형.. 차라리 싸늘하게 말해. 차라리 소리를 질러. 윽박을 지르고 반쯤 죽을 정도로 때려. 내가 흔들리지 않게. 제발 그렇게..' "나도 너없이는 못살아. 너없인.." "형." "날, 혼자 내버려두지마. 강성훈. 나 무서워. 네가 없으면 난.. 깜깜하단 말야." '형도.. 눈물이 있었네.' 비로소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성훈은 지원이의 이어지지 못한 질문에 대답을 했다. 그들 사이의 일을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지나 있다는 것이 진선의 느낌이었고 그렇다면 지원에게도 무한정의 격려가 필요할지 몰랐다. "형.. 형은 이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알던 형은 이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알던 은지원은 항상 강한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강한 사람이여야해. 은지원은.. 그런 사람이야. 성훈이가 알던 지원형은 그런 사람이였어." "널.. 사랑해. 성훈아." "........" 부드러운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져 버린다. "사랑해.. 사랑한단 말야!!"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들어었다. 하지만 성훈인.. "믿지않아. 술기운을 빌려 말하지마." "사랑해." '내가 넘어 갈거란 생각하지마.' "사랑해. 성훈아, 나 정말.. 네가 없으면." 지원일 밀쳐내고 싶다. 그가 자신을 건드리는 손길을 피하고 싶다. "사랑이라는 말로 날 묶으려고 하지마. 형에겐 어울리지 않아." "성훈아.. 난." "사랑이라는 말. 그렇게 쉽게 사용하는거 아니야. 거북해. 듣기 싫다구!" "난." "형은 사랑이 뭔지도 모르잖아!!" "나, 알아. 그게 뭔지.." "........" 여린 몸짓. 지원이가 성훈이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서글프게 울먹거린다. "이렇게 빌게. 날 혼자 버려두지마." "........" 성훈앞에 무릎을 꿇고 성훈이의 눈길을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애써 지원이의 시선을 피하는 성훈인 입술만 고문하고 있었다. "성훈아, 날 봐죠. 응?" "약한척.. 하지마. 형이 뭐라해도.. 난 믿지않아!" "날 봐. 날 보면서 말하란 말야!!" "맨 정신일 때 말해. 술기운을 빌려 말하지 말라구!!" "내가.. 어떻게 해야해? 어떻게 하면.." "날 묶으려는 수단일 뿐이야. 형은.. 사랑이 뭔지 몰라. 사랑이 어떤건지.. 형은 몰라." "죽어버릴까? 아니면 지용이처럼 병신 될까? 그러면 내게 올래? 응?" "왜이래? 형답지 않게 왜 이러는 거야!!!" 지원이의 눈을 쳐다본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고 눈물에 젖어 아파하고 있었다. "나 다운 게 뭔데? 나, 다운 게 뭐니?" 지금도 여전히 희미하게 지워져가는 의식의 끄트머리에서 대롱거리는 의구심이 있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얼음성에서 눈을 뜨게 했는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얼음성에 갇혀 조금씩 몸이 얼음속에 잠기고 있다.. - 오늘도 들리지 않는데. 이제, 포기한건가?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성의 주인. - 미련을 버려. 이제 얼음속으로 널 맡겨.. '사정이 생겼겠지.' - 그를 아직도 믿는건가? 수없이 속아 왔으면서도 믿는건가? 멍해진 시선으로 성주인에게 대꾸를 한다. 빛이 없는 세상.. 지용이의 눈동자는 조금 더 짙고 깊은 보랏빛을 띈다. - 넌 아름다워. 성안에 갇힌 게 아까울 정도로 눈이 부셔.. 너의 심장을 얼게 만들어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날 내버려둬.. 건들이지마.' - 차가운 아름다움. 너무 건조해졌군. 한기가 지용이의 얼굴선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그의 입술을 조심스레 두들겨 주었다. '날 만지지마.' - 널 받아준 곳은 없었어. 하지만 난 널 받아 들었고.. 지쳐있는 심신에 고통을 사라지게 만들어줬어. 이정도의 성의를 보였다면 그만큼의 댓가를 치뤄야 하는거 아닐까? 아직도 판도라의 상자를 기대하는건가? '희망은.. 없었어. 하지만..' - 하지만? '기대하고 싶어. 난 아직 얼지 않았으니깐.' - 냉기가 부족한 것 같군. 좀 더 냉정해져. 동정심에 이끌리지마. 조금씩 얼어가는 지용이의 심장. 그는 얼음성을 지탱하는 하나의 얼음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는.. 올거야.' - 푸하하핫! 그는 오지 않아. 네가 귀찮아서 떠났다구, 왜 돌아오겠어? 사랑한다해도 너같은 상태라면 떠나가는게 현실인데, 사랑하지도 않은 널 기다려 주겠어? 지금쯤 지원이란 놈의 품에서 애정놀음에 빠져 행복에 젖혀 있을테지. '올거야. 올거야.' - 작은 기대도 하지마. 그러다 정말 넌 얼어 버릴거야. '날 얼도록 만드는 건 그가 아니라 너야. 내 자아. 너도 내 일부분일 뿐이야. 성의 주인. 후훗, 내 의지로 널 녹여 버릴 수도 있어.' - 날 녹인다면 너도 상처받을텐데. '상처받아도 상관없어.' - 네가 여기에 얼마나 머물러 있었는지 알기나 해? 그 시간동안 그의 마음이 널 기다렸을 거라 생각해? '성훈인 날 떠나지 않아.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그는.. 내 곁을 떠날 수 없어.' - 후후훗, 그는 며칠째 널 찾아오질 않잖아. 대꾸도 없는 네게 지쳐서 도망갔을걸. '정말, 그럴까?' 성의 주인의 말에 꿈틀거리는 지용이의 심장. 자아에게 묻는 자문 같은 것이였다. 이 상태로 유지되면 성훈이가 진짜 떠날지도 모른다는. 멍하던 눈동자는 초점을 찾아 힘이 들어가고 움직여지지 않던 손가락이 꼼지락거려진다. - 그는 이제 널 귀찮아 하는거야. 네게 질려 버렸겠지. '그렇지 않아!' 냉기로 가득했던 심장에 작은 핏줄에서 열이 발산된다. 작은 희망으로 남겨놓았던 빛 한줄기처럼. - 윽--- 뜨거워. 냉정을 찾아!! '그는 날 떠나지 않아. 날 이곳에 이렇게 내버려두고 떠날 수 없는 놈이라구!!' - 그래서 그를 믿는다? '그건.. 그래! 믿어!!' - 훗, 역시 넌 눈이 멀었어. 어리석어. '사랑은.. 그래. 눈먼 사람들이 하는 게 사랑이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시간도 모자란데.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사랑이란 게 그래. 어리석은 감정이지. 신이 만든 가장 잔인한 고문 같은 거야. 내겐.. 그랬어..' 84)****** 널 사랑하게 된걸 후회해. 별장에 있는 동안 성훈이의 위 속은 비어 있었다.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았고 술만 마셔대는 지원이만 쳐다볼 뿐이였다. "씨! 술 가져와!!" 방과 거실의 거리는 멀었다. 소파에 몸을 묻히고 술병이 동날 때마다 지원인 입을 열었다. 성훈이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고 술잔에 술을 따르기만 한다. 가서 말리고 싶을 정도로 술만 마셔 재끼는 지원이가 측은해 보이기까지 하다. "귀 먹었어?? 술 가져와!!" 별장지기 노인이 진열장에 진열해 놓은 독한 양주병은 하나들고 나타났다. "도련님, 그만 마시세요. 도련님이 자꾸 이러시면 장군님께.." "전화해서 일러바치시겠다? 이거야?" "도련님 말씀이 지나치.." "이 늙은이가 어디서 함부로 지껄이고 있어? 당장 이집에서 나가, 나가라구!!" 심술은 늙은 노인이 다 받아내고 있었다. 손자 뻘 대는 지원이가 포악해 질수록 노인의 언성도 조금씩 높여지기만 한다. "도련님, 아가씨께 연락할게요. 그만 서울로 돌아가세요." "뭐? 그 빌어먹을 여우를 부르겠다구?" "도련님 건강이." 성훈이의 동공이 커져버린다. 지원인 들고 있던 술잔을 노인의 머리를 향해 던져버린 것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그 계집애를 부르겠다구??!!" 성이난 지원인 손에 잡히는 것을 노인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노인은 바닥에 쓰러진 채 깨진 이마를 만지고 있었다. 유리파편에 검붉은 액체가 스며들고 성훈인 안되겠다는 듯 일어섰다. "그만해!! 지원형!!" 손에 든 빈병을 허공에서 멈춰졌고 자신을 부르는 곳을 응시한다. "그만. 지원형, 그만해." "........." "내게 화풀이해. 나한테 화풀이하면 되잖아!" "........." "형!" 거실로 내 딛으려 했던 발에 힘이 풀린다. 현기증이 느껴 방문을 붙들고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성훈인 찢어지는 마음으로 손을 허공에 내린 채 여린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러지마. 형, 제발.. 이러지마." 성훈인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끝내 바닥에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그런 성훈이를 보자 술병이 든 채로 마셔 제끼는 지원이의 눈에 과포화상태의 눈물이 쏟아져 버린다. '널 알게 된걸 후회해. 널 손댄걸 후회해. 널 사랑하게 된걸 후회해..' "선배는 공부하는 모습이 어울려요." 작은 속삭임으로 그녀가 수원이를 건들었다. 따뜻한 입김에도 자스민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도서관에는 몇몇 사람들만 자신의 학문에 빠져들어 있었다. "여기 계실 줄 알았다구요." ".........." 투명한 미소의 그녀가 수원 옆에 앉아서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점심 같이 할래요?" "생각없어." "공부랑 결혼할거예요? 그러다 더 마르면 어쩔려고 그래요?? 일어나요. 어서." "저기, 은하야." 갑작스레 끌어내는 팔은 약한 힘이였지만 수원이는 은하의 힘에 끌려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사귀볼래요?" "풋." 먹던 음식물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당황해서 은하를 올려다보는 수원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 애인 없다면 제가.. 하고 싶어요. 선배 애인." "........" "애인.. 있겠죠? 설마, 선배를 싱글로 내버려 둘 여자가 있을까요?" "........" 눈웃음을 치고 있지만 쓸쓸한 기운이 입가에 머물려 있었다. "그 여잔 예쁘겠죠? 선배 애인이 되려면, 참 예쁠거예요. 그쵸?" "........" 집에 재진이가 있다. 약은 챙겨 먹었을련지를 떠올려 보지만 어느새 그의 눈은 은하의 하얗고 가는 목선에 가 있었다. "그 여자분.. 부럽네요." "여자친구 없어." "정말?" "없어. 그런 거." "정말, 애인 없어요?" '애인. 애인은 있지.. 재진이. 그 바보같은 새끼.' 알수 없는 미소를 짓는 수원이가 국을 떠서 입 속으로 들어 넣었다. "나 오늘부터 선배 애인할래요. 나, 받아 줄거죠?" "그래." 너무도 쉽게 말해버리는 수원이. 은하는 갑자기 일어나 수원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대담한 행동. 수줍게 변하는 은하는 설레임으로 가득한 표정이다. "나, 수원선배에게 도장찍었어요. 선배는 내꺼예요! 정은하꺼!!" 키득키득 웃으면서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전혀다른 내음. 전혀 다른 입술의 촉감. 자스민 향기. 은하는 재진이와 전혀 다르다. 지원이 깨어났을 무렵은 이미 한밤중이 지나서였다. 그가 자기혼자 썰렁한 거실의 소파 위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의식은 희미한 채 온몸에서는 열이 나고 목에서는 갈증이 났다. 그는 일어나려 애썼지만 온몸이 솜처럼 나른해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소파 위에 쓰러진 채 중얼거리듯 성훈이를 불렸다. "성훈아, 강성훈. 나 좀 일으켜줘." 심장부위의 통증. 송곳으로 꾹꾹 찔려대는 듯한 고통이 지원이의 온몸에 전율을 준다. "성훈아, 헉. 성훈아~"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혀 버린다. 며칠 전에도 통증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었는데. "강성훈! 나 좀. 나 좀 어떻게 해봐!" 참기 힘들 통증은 더욱 더 심해지고 가슴을 쥔 채 통증을 호소하는 그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괜찮으십니까?" 성훈이를 감시하던 은주의 사람 같았다. "성훈이. 성훈이 좀 불러죠." "........." "그 애더러 내가 많이 아프다고 해줘. 내가 많이 아파서.." "병원으로 먼저." "그 애. 그 애만 있으면 돼. 성훈이 좀 불려줘. 응?"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한다는 건. "불려 드리죠." "공주님." [지원씨는 어때? 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지?] "공주님은 온달에게 시집갔더군. 이런 평강공주님이신가?" [쓸데없는 소리말고, 지원씨. 우리 지원씬 어때?] "술만 마시더니 몸에 무리가 온 것 같아. 병원으로 옮기면 그때 전화하지." 핸드폰의 캡을 닫아 버리고 성훈이 있을 방문을 열었다. 웅크리고 앉아 울먹거리는 그가 작게만 보여진다. "나가봐. 소파에서 죽어 가시던데. 왠만하면 받아주지 그래?" "......." 사내의 음성에 고개를 드는 성훈이가 입술을 앙다물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내말 안 들려? 죽어 가신다고." "병원으로 옮겨요. 제가 가봤자 형에게 득 될 건 없으니깐." "죽어도 강성훈이라는데. 난 명령에 따라서 움직여. 공주님이 지시한대로 네가 은지원의 장난감만 되면 내 임무는 끝이야." "장..난감??" "내게 명령한 건 은지원이 아니야." "그럼?" "나의 공주님. 크큭." 사내의 말이 끝나자 침대에서 일어서는 성훈이가 발을 질질 끌며 거실로 향했다. 그런 성훈이를 보자 사내의 입꼬리는 더욱 더 높이 올라가기만 한다. “ 형. 얼굴이 왜 그래? 얼굴이 왜 그렇게 야웠니? 아픈 사람 같잖아. 환자마냥 얼굴이 너무 창백해. 왜이래? 왜 이렇게 약해졌어?? 형이 낯설게 왜 이래? 응? ” 소파에 누워있는 지원이의 뺨을 어루만진다. 창백하게 잠들어 누워 있는 지원이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성훈인 앉은 채로 밤을 새웠다. 온몸에 맥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손끝하나로만 건들려도 이내 풀썩 쓰러져버릴 것 같은 몸을 겨우 버티고 앉아서 성훈인 지원이와 자신을 생각했다. 두 사람의 질긴 인연의 줄. 야윈 지원이의 얼굴을 내려보자니 성훈인 눈물이 영글영글 맺혀버린다. 눈꼬리는 이미 젖혀 버린 상태였고, 눈망울에 한 방울 맺혀 있는 게 아슬아슬하다. '이건 뭐야? 도대체 이건 뭐야? 내가 사랑했던 사람. 날 포기하고 날 버려도 될 만큼 내가 사랑했던 사람. 하지만.. 지금은 날 가두려 드는 사람.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 그런데 그가 자신 옆에 누워있다. 자신의 손을 어린아이처럼 꼭 쥐고 옆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젖은 얼굴을 한 채 가끔씩 어깨를 흐느껴가며 지금 그가 한 공간에 잠들어 있다. '뭘까? 이제 형은 나에게 어떤 사람일까? 왜 자꾸 날 흔들어대? 왜!!' 성훈인 또 지용이를 생각했다. 자신에게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했던 친구. 성훈인 그의 손을 잡아 주질 못하고 그를 떠나보냈다. 놓쳐버렸다. '혼란스러워.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더러 어떻게 하라구??!!' 새벽녘에 눈에 뜨여졌다. 순간 스쳐간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본듯한 얼굴. 생생하게 자신을 노려보며 성훈이의 손을 붙들고 있다. '아니야.' 불안감이 병실을 맴돌고 지용이가 있는 곳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 우린 사랑이고, 넌.집.착.이.야.] 성훈이의 몸을 꼭 안으며 지용이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사람. 입가에는 자신이 넘치는 미소가 어울려져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 자리가 없다고 충고하는 것처럼 차디찬 냉소를 흘리던 성훈이의 사람. 불연 듯 다가오는 그의 찬 음성과 그의 그림자가 지용이를 흔들고 있다. '네가 지원이 손에 붙잡혀 있지 않았어도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았을까?' [ 넌.집.착.이.야.] 잔인했던 시간. 자신을 밟고 성훈이를 차지하던 차가운 미소. '그때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았어. 하지만 지원이 손에 붙들려 있지 않았어도.' [ 넌, 집착이야! 넌, 집착이야!!] '그때 그에게 붙들려 있지만 않았어도.' [ 넌, 집착이야! 넌, 집착이야!!] '사랑이야. 난 사랑이라구!' 벌떡 일어선 지용이가 고개를 흔들기 시작한다. 고통은 심해지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지용이의 머릿속에 온통 아픔의 시간들이 돌고 돌 뿐이다. '신경쓰고 싶지않아. 상관하고 싶지 않아.. 난 잊어버리고 싶어.' 온몸을 흔들던 지용인 침대 옆의 있는 모든 물건들을 벽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전화기며 책이며.. 그리고 성훈이와 함께 있는 액자까지도. '붙들려 있지만 않았어도. 내 손을 잡아 줬을거야.' 병실 안은 싸늘한 공기로 덮혀 있었고, 지용이의 심장이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머리를 흔들던 지용이의 시선으로 사진 속의 그가 들어온다. '성훈이?' 떠올리기 싫었던 마지막 장면이 지용이에게 다가온다. '그래. 붙들려 있지만 않았어도.. 내 손을 잡아 줬을지도 몰라.' 차가운 미소에 안겨있던 슬픈 눈망울을 떠올린다. 슬픈 얼굴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들려줬던 말을 기억하려 하지만 기억의 저편 깊숙이 묻혀져 있었다. '내게 뭐라고 했었지?' 허공만 떠돌던 눈동자가 바닥에 널 부러진 액자에 고정시켰다. '너, 어디로 갔니? 보고 싶어. 너 어딨니? 응?' 85)****** 중독의 향기. 넓게만 느껴지는 병실에는 침대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는 한사람만 존재한다. 그의 시선은 슬픔이 박혀 너무도 먼 곳에 정착되어 있다. 먼 곳에 치달아 있는 시선. 그를 어루만지며 두들기던 따뜻한 손길은 며칠째 느껴지질 않는다. '어디로.. 갔니?' 훤한 이마에 맺힌 식은땀. "고지용씨 약 드실 시간이예요." '내가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걸까?' 상냥한 간호사가 지용이에게 물 컵과 약을 건네주었다. 흐려진 시선으로 간호사가 건네는 것들에게 눈길을 돌린다. 그 시선에는 맑디 맑은 샘물이 고여 있었다. "성훈." "고지용씨??" 반응. 지용이의 말문이 트인 탓인지 간호사는 급하게 뛰어 나갔다. '어디에 있죠? 나의.. 성훈이.' 눈물이 흐르지도 슬픔이 솟구치지도 않는 밤을 보냈다. 오랜만에 편안한 잠이였다. 더 이상 허공에 손을 뻗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됐다. 그는.. 성훈이의 품에서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잠이 깬 지원이 옆에 잠든 성훈이를 보자 씨익 웃어 보이며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는다. '꿈이 아니였구나.' 꼭 끌어안은 지원인 어린아이마냥 성훈이의 가슴 안으로 비벼대며 어린양을 부리고 싶어한다. 갑자기 장난끼가 발동한 지원인 일어나자마자 오디오 앞으로 다가갔다. 급히 찾아내는 곡은 어릴 적 누나가 좋아하던 솔리드의 곡이다. "있을텐데. 어디 있더라? 앗, 찾았다!" 개구쟁이같은 미소가 피어올랐고, 하얀 티셔츠와 아이보리 힙합바지는 소년티를 덜 벗은 어른처럼 보여진다. 디스플레이를 열고는 무지개빛 나는 CD를 집어넣었다. 선곡을 하고는 리모콘을 들고 성훈앞에 선다. 볼륨을 있는대로 높이고는 성훈이의 귓볼를 조심스럽게 깨물었다. "아---" 성훈인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눈 커플을 살며시 들여 올렸다. 눈이 뜨여지자 마자 지원인 기다렸다는 듯 플레이를 눌렸고 스피커를 통해 전주가 들려온다. "뭐, 하는거야?" "쉿!" ♪ 우리들이 나누었던 몇 마디 때문에 그대 너무 고민하지 않았으면 해요. 어제 내가했던 말은 진심이 아니었는데 그댈 아프게 했다면 내가 미안해요. 그대가 나의 모자란 부분 채워줄 수가 있다면. 내가 노력할테니, 마음에 없는 헤어지잔 말하지 말고 이제 그만 화 풀어요.. 우리들이 나누었던 몇 마디 때문에 이별만은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요. 우리만이 일생을 두고 이루어야할 사랑인데 언제나 좋은 일들만 있을 순 없어. 그대가 나의 모자란 부분 채워줄 수가 없다면 내가 노력할테니, 마음에 없는 헤어지잔 말하지 말고 이제 그만 화풀어요. 살아감 속에 아픔들은 우리 만남에 그만큼의 행복을 가져다 줄꺼라 믿고서 마음에도 없는 헤어지잔 말하지 말고 이제 그만 화풀어요 ♪ 간주가 흐르자 그제서야 성훈이의 입술에 두웠던 지원이의 검지손가락이 풀어졌다. "화.. 풀거지?" 지원이 보이는 어설픈 미소에 성훈인 빙그레 웃어 보였다. "형에게.. 이런 면도 있었네." "또 다른 모습도 보여줄까? 응?" 사뭇 다르게 보여지는 해맑은 소년같은 모습. 그 모습엔 어떤 상처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순수하다. "이제 그만~ 화풀어요~" 노래가사를 따라 부르는 지원이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린다. '지금 내 앞의 형 모습. 지용이를 보는 것 같아. 지용이..' "우리 산책 나갈래? 집에만 갇혀 있어서 답답하다." 씩 웃으며 거실로 나가는 지원인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일어나, 강성훈! 하핫." '내가 없는 지용인... 어떻게 됐을까?' "선배!" 수원이 앞에 다가선 은하가 긴 생 머리를 찰랑거리며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계단을 뛰어 오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는 정말이지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또 기다린거야?" "그럼요!" "........" "전 선배 기다리는 게 일이잖아요." "호출을 하지. 그럼 빨리 나왔잖아." "생각같아선 호출기만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공부 방해할까봐 그만 뒀어요." "그래도 다음 부턴 기다리지 말고 음성 남겨." "그 말. 후회 안 할거죠?" 은하에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원이가 작은 웃음을 보인다. "우와~ 선배, 웃을 줄도 아네요. 호홋." "........" 자신의 팔을 두른 그녀의 향기가 좋다. "선배 저, 술 사주세요." "술??" "네, 술 사주세요." "........" "저, 술 잘 마셔요. 우리과에서 제가 술고래로 통하는 걸로." 경쾌한 하이톤의 웃음소리. 석양이 물든 하늘은 한 낮에 비해 지면에 와 닿아 있었다. 가을하늘아래 한쌍의 연인을 손가락질 할 사람은 없었고, 극히 자연스럽게 보이는 두 사람을 두고 심판하는 사람도 없었다. 자스민 향기는 수원이의 몸에 더욱 깊숙이 스며든다. 중독의 향기. "누난 내 어머니 같은 존재였어. 사진 속의 누난 어머니를 꼭 닮았거든." "......." "천사같았지. 항상 내 편이였고. 그런.. 누나가." "......." "죽어 버렸어." "......." "고통사고였지." "......." "도로 한복판으로 공을 주우러 가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 "훗훗.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누이는 나 때문에 죽은 셈이야." "아니야. 형." "내가 의지하는 것들은 항상 파괴되고 말아. 나로.. 인해." "형." "누이의 죽음으로.. 내편은 사라졌었어. 날 감싸주는 사람. 날 사랑해주던 사람. 내 편은 누나 뿐이였으니깐." "......." "그런데.. 내 편이 생긴거야. 내가 세상에 존재하도록 만들어주는 사람 말이야." 색색의 낙엽이 어울어진 산책로는 따뜻한 가을햇살로 포근하게 감싸지고 있었다. "너야, 내 편. 성훈이 너." 맑은 눈동자로 지원이를 바라보는 성훈이가 이내 눈물을 보이고 만다. "녀석, 넌 계집애도 아닌 게 눈물이 많더라." "......." 씩 웃으며 산책로를 걷는 지원이가 지는 해를 보며 멈춰섰다. "나 아주 못돼먹은 놈인 거.. 나도 알아." "........" "난.. 지금껏 나밖에 몰랐어." "........" "나란 놈은.. 탄생부터가 저주받았거든." "........" "내 어머닐.. 죽이고 태어난 게 나야." "........" "아버진.. 어머니보다.. 아들을 원했어." "........" "난.. 어머니의 배을 찢고 세상에 발을 들였지." "........"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게 나야." "그건 형 잘못이 아니야." "아들이 아니였다면.. 아들만 아니였어도.. 어머닌 돌아가시지 않았어." "형." "그만 들어가자. 바람이 차다." 뒷모습에서 쓸쓸함을 맛본다. 상채기투성을 감추며 살아온 사람. 느껴지는 상처가 길게 그림자를 만든다. "이런 소리했다고.. 날 불쌍하게 보진 마. 내가 가족 얘기 꺼낸 건 네가 처음이야." "......." 걷던 그가 갑자기 멈춰서서는 성훈이에게 말을 건넨다. "성훈아." "응?" "너, 내 편.. 맞지?" 뒤돌아서는 그가 슬픈 미소를 흘리며 손을 내민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형은 뭐였을까? 강한 줄만 알았는데.. 상처투성이야. 너무 여려. 지금껏 그 아픔들을 혼자서 견뎌 온 거야? 그래서.. 그렇게 거칠었던 거야? 응?' "우리 이제 떨어지지 말자. 항상 붙어 다니자. 알았지??" 은은한 미소는 오래 전 어린 그의 표정을 되살리는 것 같았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확인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어린아이의 미소. 연두빛 풀잎만큼이나 순수했을 때.. 어린 지원이의 미소일 것이다. 지용인 사흘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파고드는 것은 일말의 고독감뿐이었다. 사흘동안 내내 그는 텅빈 병실에 내버려진 채 혼자 앓고 있었다. 그를 찾아오는 방문객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는 가끔 손가락을 움직여 '성훈' 이라는 글자를 허공에 대고 그려댔다. 막을 내리지 못한 희극.. 비극으로 예상되었던 희극을 돌려보고 싶었다.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면 혹독한 추위로 무장한 성안이 아니고.. 그에게 물어오는 음성도 없었다. 먼 시선으로 창밖을 응시하며 지는 해를 바라보던 지용이.. 반짝이는 눈동자. 그의 눈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쏟아져 버린다. '어딨니? 나 말라가고 있잖아. 나,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어딨니? 응?' "장수원. 아니야?" 토니 옆에서 콜라캔을 만지작거리던 우혁이가 토니의 어깨를 치며 물어왔다. "장..수원??" "왜, 토니 네가 이재진 애인 역활까지 해가면서.." "아~ 재진이 애인. 장수원~" "그래." "근데 왜??" "그저께도 붙어 있더니만." "뭘, 말하는 거야??" "저 두 사람 말이야." "두..사람??" "사귄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그걸 우혁이가 어떻게 알아?" "같은 동아리거든." "헛소문일거야. 두 사람 친구사이겠지, 모.." 눈웃음을 치며 우혁이에게 시선을 주는 토니가 커다랗게 변해 가는 우혁이의 시선을 쫓아, 뒤를 돌아보았다. "저게 친구사이냐?" 수원이와 은하의... Deep kiss. 입이 떡 벌어진 우혁이는 있을 수 없다는 듯 토니를 쳐다보았다. "친구, 사이일거야." "훗, 저 녀석 능력 좋은걸. 바이라니. 하핫!" "우혁아, 못 본 걸로 해라." 두 눈을 지긋이 감는 토니는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깨물어 본다. '이재진. 복도 없는 놈. 저런 놈한테 간이며 쓸개까지 빼줬냐? 그렇게 공 드릴 가치가 있었어?' "승호야, 그만 나가자. 기분 더러워서 술이 안 넘어 갈 것 같아." '설마,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알고 있다면 지금쯤 넌..' "토니안? 그만 가자니깐!" "그, 그래. 알았어." 별장의 내부는 모두 나무로 장식되어 있었다.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흐르는 황갈색 나무벽과 바닥에서는 싱싱한 나무 냄새가 코를 찌른다. 현관의 반대쪽은 커다란 응접실이었고 바깥쪽 벽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울긋불긋한 가을 단풍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원인 두 팔로 성훈이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춤..출래?" "........." "싫어?" "........." "넌 떠드는 게 잘 어울려.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심술난 것처럼 보인다구." "........." 지원인 성훈이를 이끌어 세운 후, 그의 가느다란 허리에 한 손을 감고 몸을 조금씩 움직인다. 두 사람 사이에 깔리는 음악은 없었다. 오로지 바람 부는 소리와 풀잎들의 부딪힘 소리. 귀뚜라미 우는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 동안 나, 미웠지?" "........." "많이 미웠을 거야. 나도 널 대하는 내 자신이 너무 미웠으니깐." "........." "하지만.. 성훈아." "........." "성훈아." "........." "그만, 미워할래?" "........." 두 사람의 움직임은 멈췄고 젖어 든 시선은 지원이를 피해 울먹임을 잠재우려 한다. "성훈아, 그만 미워해줘." "형이.. 아닌 것 같아. 내게 사정조로 말하지마. 형에겐 어울리지 않아. 그냥.. 명령조로 말해도 나.." "따뜻한 말. 같은 건. 그런 건 익숙하지 못해." "........." "하지만.. 이제부턴 노력할거야. 성훈아." "나, 흔들지마." "........." '흔들지마. 흔들지마.. 이러다 형 곁에 계속 머물고 싶어 질거야. 형에게 다시 길들여 진다구. 날, 붙들려고 하지마.' 응접실 구석의 페치카에서는 마른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원인 한 꺼플씩 성훈이 걸치고 있는 것을 벗겨내고 있다. 86)****** 나만 생각해. 일주일하고 네 시간. 급속도로 진전되는 두 사람의 관계. "은하야, 정신차려!!" "으응. 선배." 일어서지 못하는 그녀는 취기가 오를 대로 올라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술이 약하면 말을 해야지. 무턱대고 마시면.." "......." "너무 늦었다. 빨리 집에." 은하를 일으키려는 수원이의 손을 끌어당긴다. "집에.. 들어가지 말아요. 선배도.. 나도." "은하야." 묘한 감정이었다. 갈색 원피스에 숨겨있는 하얀 살결이 수원이를 이끌어 댄다. "오늘.. 우리 함께 있어요." ".........." "함께 있어요. 선배랑 나랑. 단둘이 함께.. 있어요." '재진이가 알면 어떻게 될까?' 달리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끊임없이 수원이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창밖의 거리는 한껏 가을 기운으로 만연해 있었고 그의 곁에는 자스민 향기의 그녀가 앉아 졸린 눈을 비비며 수원이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은하의 오피스텔이었고 비틀거리는 은하를 부축하고 엘리베이터를 누르던 수원이의 가슴으로 순간순간 끊겨지는 숨결이 느껴졌다. "나 처음이에요." "........." "정은하가 좋아한 사람은.. 선배가 처음이에요." "........." "그래서.. 매일 밤 기도했어요." "........." "선배가 저의 첫 남자가 되기를." "........." "선배에게 은하가 마지막 여자가 되기를." "........." "나, 선배를 너무 좋아하나봐요." "........." "선배가 너무 좋아요." '재진이가 알면 어떻게 될까? 오늘밤. 내가 여자를 끼고 잠이 든걸 안다면.. 내가, 평범한 생활을 꿈꾼다는 걸 안다면.. 재진인 어떻게 될까?' 수원인 엘리베이터 closed를 누르고 은하의 입술에 입을 대었다. 거부하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몸짓. 지원이의 입술은 쉴새없이 성훈의 얼굴을 더듬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성훈이의 등을 훑어 엉덩이로 내려오자 성훈인 몸을 떨면서 지원이와의 거리를 두려한다. 하지만 지원이의 힘에 이끌려 성훈이의 하반신이 그에게 밀착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처럼 지원이의 몸에서 열기가 발산된다. 이런 식으론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지원인 성훈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침실의 문을 발로 차 열고는 그를 침대위로 길게 뉘었다. 알몸이 된 성훈인 침대위에 누워 지원일 올려다보았다. 슬픈 두 눈망울에서 액체가 흘러나오자 지원인 엄지손가락으로 하얀 볼의 물기를 제거 시켜준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갈색피부를 숨겨주는 천들을 벗겨 낸다. 스웨터를 벗고 티셔츠를 벗고.. 바지를 벗고. 지원인 성훈이 위에 몸을 대로는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닿는 부분마다 경련이 일어났고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성훈인 억눌린 신음소리를 뱉었다. 지원이의 입술이 그의 깊은 곳에 닿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이 굳히더니 전신을 떨어댔다. 성훈의 두 다리를 힘껏 뻗쳐져 있었고 발가락 끝은 잔뜩 안으로 굽혀졌다. 성훈이의 얼굴은 조그만 땀방울로 덮여 있었다. 이윽고 지원인 그의 몸 위로 올라와 서슴없이 자극을 주기 시작한다. 숨이 막힐 듯한 신음소리가 침실에서 울러 퍼졌고, 지원이의 두 다리는 성훈이의 허리를 휘감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결코 서두르지 않은 움직임. 기합을 넣는 듯이 규칙적인 신음소리. 하얀 피부의 눈선 끝에 매달린 눈물 방울들. 지원인 성훈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누웠다. 두어 차례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성훈인 천장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이 땀에 젖어 나른한 몸은 머리를 들 힘도 없었다. 그런 성훈이를 올려다보던 지원이가 입술을 내밀어 그의 이마를 눌렀다. 그리고는 그의 눈시울을 누르고 다시 코와 입술에 부딪혀 왔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성훈인 울먹임이 섞인 한숨을 내려 쉬었다. 문득 밀려드는 서러움이 그를 어두운 거리로 내 몰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이러면 안돼. 이건.. 정말." "생각하지마." "나, 정말 이러면." "머리 굴리지마." "안돼. 형에게도 나에게도.. 그리고." "나만 생각해." "나, 때문에.. 나, 하나 때문에.. 흑..흐흐흑." "성훈아, 생각하지마." "난.. 난, 정말.. 지옥에 떨어질거야." "같이 떨어지자. 그럼, 됐지?" "어제 전화도 없이 어디서 잔거야?" "........." 새벽에 들어선 수원이를 보자 재진인 힘없는 미소를 보이며 묻는다. 수원이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자스민 향기. "짜식, 못 들어오면 전화를 해야지. 손은 폼으로 달고 다니냐?" "........." "얌마, 피곤해? 어제 잠도 못잔거야?" "........." "도서관에서 밤샜구나." "........." "어휴, 저 공부벌레. 그래 넌 책이랑 결혼해서 살아라." "........." 장난투의 말을 던지곤 냉장고로 향하는 재진이가 생수통을 꺼내들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자스민 향기. 자스민. 제기랄!' "이재진!!" "나, 귀 안 먹었어." 안방으로 들어갔던 수원이가 갑작스레 뛰쳐나왔다. 웃옷을 벗고 재진 앞에 선 수원이. "너, 결혼 같은 거.. 생각해 본 적 있냐?" '너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 어젯밤.. 자스민과 함께 보냈구나. 쉬펄 열라~ 뻔뻔한 새끼. 넌 완전범죄라는 것도 모르냐?' 어설픈 흔적이 수원이의 가슴에 물들어 있었다. 재진인 그의 몸에 남겨진 흔적을 무시하기 위해 커다란 웃음소리를 냈다. 한동안 웃는 그에게 수원인 짜증 섞인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재진! 내 말이 우스워?" "장수원." "........" "우리 결혼할래?" "미친새끼." "그럼 헤어질까?" "뭐어??" "하핫. 왜 당황해? 놀란 토깽이같잖아." "........" "씻고 자라. 피곤해 보이는데." "........" '빌어먹을. 생각같아선 반쯤 죽여버리고 싶어.' "이재진. 나 배고파." "내가 가정부야??!! 니 손으로 해 쳐먹어!!" "왜 화내고 지랄이야!!" '여자라? 쳇, 정말 빌어먹을 이야.' "여기 앉아." "........" 지원이가 경대 앞 의자를 끌어내며 성훈이를 부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지원이를 보지 않는 성훈이의 두 눈이 소금기로 가득하다. "바보 같기는.. 누가 널 보면 내가 너 맨 날 울리는 줄 알겠다." "........" "이리와. 여기 앉으라니깐." "........" 꼼짝 않고 앉아 있는 폼이 잠시후면 엉엉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소금기로 가득한 얼굴. 저것들이 모조리 세상 밖을 구경한다면 그 자체가 녹아 버릴 것만 같다. 소금 인형처럼. 지원인 성훈이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끌고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혀 주었다. "고개 들어." "........" 지원이의 말은 경청하지 않은 듯 고개는 더욱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얼굴 들어봐." "........" 지원이의 손에 이끌려 들어올려진 하얀 얼굴이 거울 속에 빠져 있었다. "많이 자랐구나." "........" "너무 야위서 얼굴에 각 생긴 것 좀 봐." "........" "살 좀 쪄. 처음 만났을 땐 볼도 통통한 게 이쁘더니만."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무언가 하나가 빠져 버린 것 같다. 일반을 포기하고 이반으로 들어선 자신의 모습에서 찾기 힘든 하나. 그것의 이름은 행복. "지용이 말이야. 지용이.. 어떻게 됐을까?" 굳어지는 안면. 차가워지는 시선. "나만 생각하랬잖아!!" 싸늘한 목소리. 파릿하게 변하는 입술 선이 탁자위에 있는 양주병을 들어올렸다. 급하게 마셔대는 술은 지원이의 몸 속으로 100% 들어가질 못한다. "형!" 보지 못한 성훈이가 지원이가 든 양주병을 뺏으려 하자 지원인 성훈일 벽으로 무참히 밀어버렸다. 벽을 타고 스르륵 주저앉는 성훈이의 입가에서 피가 세어나온다. 벽을 부딪힐 때 입술을 너무 꼭 깨물었나보다. "나만 생각해!! 나만 생각하라구!! 그게 그렇게 어려워??!! 왜 그 자식 이름을 들먹거려!! 왜!! 왜!!" 한동안의 욕설이 퍼부어졌고 성훈인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고 이러는 거야?? 나.. 정말 어떻게 해야해??' 지원이의 다른 모습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망각 속으로 들어간 지용일 잊고 있었다. 침대 속에서 몸을 부비적거리다가 눈을 뜬 성훈이가 악몽에 시달린냥 두려움으로 가득 묻혀 있었다. '지용이.' 모진 눈보라 속에 맨발로 서서 자신을 쳐다보는 지용이가 몹시도 추워 보였다. 자신에게 안아달라며 손을 내미는 그의 얼굴. 슬픔 속에서 소멸 돼버린 멍한 눈동자. '지용인.. 어떻게 됐지?' "그 잘난 온달장군이 공주님과 결별을 선언했다더군." "........" 방문 앞에서 성훈이가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너 하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어." "........" "공주님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지." "........" "은지원 손에 장난감만 쥐어 주기로 했는데. 그 장난감 덕에 공주님께서 슬퍼하다니." "........" "도도하기 짝이 없던 공주님이 슬퍼 할 줄은 몰랐어." "........" "강성훈. 온달장군이 무모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정리해. 장난감은 장난감일 뿐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는.." "왜 그런 소리를 내게 하죠?" 의문의 지닌 청아한 눈동자. 흡입력 있는 손 눈썹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사했던 은지원과는 너무 차이가 있거든. 그가 공주님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해." "........" "너로 인해 한 여자의 일생이 구겨질 수도 있어." '나로 인해 지용이의 일생이 구겨질 수도 있다.' "........" "은지원은 공주님의 남편이야." '한 가정의 가장. 그래. 형은 결혼했지. 한 여자의 남자로써, 형은.. 살아가야 하는 거겠지.' "넌 은지원을 망하게 만들 뿐이야." '하지만.. 눈을 떴어요. 형은 절 사랑해요. 이제서야 형의 진심을 알았다구요. 형과 나, 너무 늦은 건가요?' "저녁에 은지원이 올거야. 잘 생각해둬. 난 공주님이 불행해 지는 건 싫어. 네가 싫다면 억지로 라도 떼 낼 수밖에 없어." '이기적이라 해도 나, 지금은 형 곁에서.. 형을 안아주고 싶어요. 지용이도 당신의 공주님도 모두 의식하지 않고 형을 안아주고 싶어요. 형을.. 나의 형을.' 시선을 밑으로 둔 성훈이의 두 눈에서 서글픈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 '아직까지도.. 형을 담고 있었나봐요. 이렇게 가슴이 아플 줄 몰랐어.' 87)****** 돌아눕기. 여기는 어딘가. 헐벗은 황무지. 그리고 벼랑, 벼랑 끝의 바다. 아아, 바다. 목선 하나가 거침없이 파도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곤두박질치듯이 파도 속으로 휘어 감기고 그리고 또다시 치솟아 올랐다. 산산이 깨어져나갈 듯이 목 손이 흔들린다. 미친 듯이 흔들린다. 찢어져 나부끼는 것은 목선에 달려 있는 돛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뭐했어?" "......." "나 어디, 갔다 온지 궁금하지 않아??" "......." 성훈이에게 다가와 미소를 보이는 지원이는 들어서자마자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심심했나 보네. 시큰둥한게." "형." "성훈아, 손 좀 내밀어봐." "형, 할말 있어." "손 좀 내밀어 보라니깐~" "........" 아이같은 웃음. 찢어진 채 거친 파도에 휘어 감겨도 끝내 내려앉지는 못할, 끝내 고개를 처박히지는 못할 단 하나의 사람. "사랑해." 성훈이의 손바닥위로 떨어지는 작은 링하나가 뿌옇게 변한 여린 시선에 물기를 담게 만든다. 반짝이는 금빛. 성훈이 손위로 떨어진 금빛은 지난 상처를 보상해 주려고 더욱 빛을 발산한다. 지원이의 미소만큼이나 눈부신.. 그리고 값진. 여전히 미소를 짓는 지원이가 성훈이 더러 껴보라는 시늉을 보인다. "네 손이 작을 줄 몰랐어. 줄여왔으니깐 이번엔 아주 잘 맞을 거야. 하핫." '이번엔? 무슨.. 소리지?' "녀석, 사내녀석이 계집애 손처럼 작기는." '이 디자인 어디서.. 많이 봤던 건데.' "에이, 씹. 생각보다 쑥스럽네." '전에 하와이에서.. 봤던.' "보기만 할거야?" '그때.. 그 진열대에 있던 커플링??' "야, 내 말 듣고 있어??" '그때 그 커플링. 맞는 거야? 형??' "얌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맞아. 그때.. 그 커플링. 내가 너무 갖고 싶었던 커플링. 특이한 디자인 때문에 한눈에 들어왔던. 날 생각 했던거야. 나란 인간을 무시한 줄만 알았는데. 행복해. 나 지금 행복해. 하지만 형과.. 나.' "껴봐." '너무 행복하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너무 행복해. 하지만.. 형.' "뭐해? 껴보라니깐." '이렇게 행복한 거.. 나, 느껴도 되는걸까? 이러면.. 안 되는 거지. 그렇지?' 맘이 급한 지원인 안되겠다는 듯 성훈이의 손바닥 위에 링을 집어들고 끼워 주려한다. 하지만. "받을 수 없어. 받아선 안돼. 받고 싶지 않아." "강..성훈?" "나 가야해. 지용이 곁으로 돌아 가야해." "뭐...어??" 굳어지는 안면을 피해 뒤돌아 선다. 힘없이 감는 두 눈에서 금빛으로 치장한 물기가 떨어진다. 노을 빛으로 물든 눈물. 지원이가 보여준 금빛에 물든 눈물. '자신이 없어. 나, 형만큼 냉정하질 못하거든. 나 때문에 아파할 사람이 눈에 밟혀서.. 나, 형과 함께 할 수 없어. 형이 내게 소중했다면 지용이도 그래.' "너, 지금 뭐라고 떠벌렸어??!! 또 그 새끼야??!!" '형만큼 지용일 사랑해. 진심으로.. 형과 함께 있어도 문득문득 지용이 얼굴이 떠올라. 그 애에게 해주고 싶은 것도.. 많아. 내가 형과 하고 싶었던 게 많았던 것처럼. 그 애가 날 지켜줬던 것처럼.. 나도 그 애를 지켜주고 싶어.' "그 아이 많이 아파할거야. 지용이에게 가야해." 물건 부서지는 소리. 몹시 성난 음성. 성훈이 등뒤로 느껴지는 지원이의 파도가 험상궂게 성훈이를 덥치려고 한다. "사랑한다구!!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 "뭐가 부족한거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어??!!" "......." "말해봐!! 강성훈!!" "......." "내가 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야?" "......." "내가 더 어떻게 해야 네놈 맘에 풀리는 거냐구!!" "......" "노력하고 있잖아! 나 이렇게 노력하고 있잖아!!" "미안." 성훈이의 등뒤로 쏟아지는 거센 파도가 그를 삼켜버린다. 그의 귓가로 들려오는 떨리는 숨결과 따뜻한 입김이 성훈의 입에서 흐느낌을 불러낸다. "형. 난, 흑.. 흐흐흑." "성훈아, 내가 잘못했어! 널 혼자 두는 게 아닌데.. 내가 정말." '잘못한 거 없어. 형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잘못된 게 있다면..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인연이 만난거. 형과 나,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우린 만나면 안 되는 악연이었던 거야.' "사랑한다니깐! 사랑한다구!!" "형, 제발." 순간이었다. 성훈이의 등뒤로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너지는 소리의 근원은 지원이. 몹시 고통스럽게 담아내는 신음 뒤로 하얗게 변색된 지원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형? 지원형??!!" "........" "정신차려! 형!! 지원이형!!!" "........" "밖에.. 아무도 없어요??!! 도와주세요!! 형이!! 누구 없어요!!" 별장이 떠나갈 정도의 외침에 사내가 들어왔다. 사내가 들어섰을 땐 하얀 소년이 자신의 발밑에 쓰러진 지원일 몹시 흔들고 있었다. 하얗게 변질된 갈색피부에 끓이지 않고 하얀 소년의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 "형! 지원형 눈떠. 형!!" "무슨 일이죠?" 뒤늦게 들어선 별장지기 노인이 지원이를 보자, 사색의 표정으로 바꿔버린다. "도련님!!" 노인이 지원이에게 다가서려 하자 사내가 가로막고 급한 음성으로 외친다. "가까운 병원, 어디야??!!" 뚝욱-- 뚝--- 쏴쏴쏴----- 갑작스레 유리창을 쳐대는 빗줄기가 점차 요란해 진다. 성훈이의 울음소리처럼 요란하게 들리는 억센 빗줄기. "지원형!! 형-----!!" 열려진 테라스 창으로 강한 바람이 들어온다. 그 강한 바람에는 물기가 섞여져 테라스 바닥을 흥건히 젖히고 있었다. 우르르 쾅쾅-- 수원이가 하늘 위에서 울어대는 천둥소리에 두 눈을 찡그려 본다. '갑자기 왠 비야?' 테라스 창을 닫고 뒤돌아 서려던 수원이에게 강한 팔이 휘감아 돌았다. 자신의 발밑으로 빗물이 뚝뚝 흐르는게 재진이 비를 맞은 모양이다. "밤늦게 어딜 쏘 다닌거야?" "........." "왠 청승? 비 맞고 돌아 다녔냐?" "향수, 바꿨니?" "........." 자신의 목언저리에 따뜻한 입김이 속삭여진다. 재진의 말에 뜨끔해진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는다. '향수? 몇 번을 씻어 냈는데.. 무슨.. 소리야?' "이 냄새.. 예전에 사귀던 기집애한테서 나던 냄새야." '뭐야? 이재진. 뭐가 알고 싶은 거야??' "어제 어디서 잤어?" "무슨 소릴 하고 싶은거야!!" 뒤돌아 서서는 재진이의 시선과 마주한다. 힘없는 미소를 머금은 재진이가 쓸쓸한 눈으로 서 있다. 그 눈빛에는 수원이 자신이 조금씩 소멸해 가고 있다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디서 잤냐고." "어디서 자긴.. 도서관." 생각과는 달리 거짓말 하기는 힘이 든다. 이미 재진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수원이를 쳐다보고 있었기에.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 "옆에 앉았던 여자가 향수 범벅을 했나보지?" "무슨 얼어죽을 향수 냄새야? 난 모르겠..는데." "........" "너, 개 코야? 왜 나지도 않는 냄새가 난다고 날리.." "됐어, 그만하자." "이재진!" 차갑게 뒤돌아서는 재진이가 두어 걸음 걷더니 다시 뒤돌아 선다. "누군가 그러는데. 잘난 애인일수록 간수 잘하라고 하더라." "무..무슨 소리야?" "알고 있던 선배 애인이 변심을 했대. 모르는 척 넘기려고 했는데..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하잖아. 크큭." "......." "지독한 향수 냄새에 알아 봤다고 하더라." "그래서 날 의심한다는 거야?" "의심? 왜? 찔려?? 하하핫!!" "........" "네 놈의 너무 잘난 녀석이라 말한 것 뿐이야." 멈췄던 걸음은 욕실을 향해 천천히 움직인다. 그런 재진일 불안한 시선으로 수원인 쳐다볼 뿐이다. '아니야. 녀석이 알리 없어. 저런 멍청한 놈이 뭘 알겠어. 모를거야. 저 녀석은 멍청해서 모를거야. 알 리없어. 저 녀석은..' 테라스 창은 거센 바람에 흔들리고 수원이가 서 있는 곳을 짓밟고 싶어한다. 불안한 밤은.. 굳은 빗줄기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성훈인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서 바람에 수목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억세게 퍼붓던 비는 이미 가랑비로 변해 열린 창문 사이로 한줄기씩 바람에 실려 실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길고 긴, 영원히 지샐 것 같지 않은 긴 밤이었다. 초점을 잃은 그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다. 눈물은 모두 흘러 메말라 버린 것 같았다. 그의 삶 속에 흘린 눈물은 이미 너무나 많은 탓이었다. 그는 이제 눈물에 지쳐 더 이상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에 넘어간 지원이의 얼굴이 생생하기도 하고 몇 백년 전에 보았던 얼굴 같기도 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밀납같았던 얼굴. "들어가 봐." 방문을 열고 나온 사내가 성훈이에서 싸늘하게 던진 말이었다. 충혈된 눈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들어갈 자신이 없다고 한다. 튼 입술에 압박을 가하며 지원을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들어가든 말든 네 맘대로 해." 귀찮다는 듯 성훈이의 시선에서 물러서는 사내가 보이자 성훈인 그의 옷자락을 잡고 기어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형, 우리 지원이형. 괜찮은 거죠? 우리 지원형." "........." "형, 아프면 안돼요. 형이 아프면.. 전." "들어가봐. 들어가서 직접 보면 되잖아!"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지키던 공주의 편에서 돌아 선 듯 하다. 아마도 지원이와 성훈이 두 사람이 붙어 있는 모습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합리화가 된 듯 했다. 그것은.. 동성의 사랑도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 자신이 본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연인보다 단단하고 끈끈한 애로 묶여 있었다. 두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신들이 짝지어 놓은 것처럼 보여졌다. 한 사람씩 떼어놓으면 안될 것처럼. "지원형 볼 자신이 없어요. 흑.. 형이 아픈 건 처음이거든요. 형은 항상 강하기만 해서.. 약한 모습을 보면." "멀쩡해. 멀쩡하다구. 그러니 들어가 봐." ".........." "참. 은지원이 쓰러지지 않게 충격 주지마." ".........." '그나저나 종합검진이라? 건강상태가 극도로 쇠약해 졌다니 후훗.. 공주님이 알면 졸도하겠는걸.' 난 무거운 걸음으로 형이 누워 있는 침실로 들어섰다.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생각보다 더 창백한 형의 얼굴이다. 난 침대 머리로 다가가 형을 내려다보았다. 바싹 말라버린 형의 입술 살이 하얗게 일어나 있다. 형 많이 아파? 형이 링겔맞고 누워 있으니깐 이상하다. 몸이 많이 약해 졌어. 전엔 살이 붙어서 크게만 보였는데 이젠 꼬맹이처럼 작아 보이네. 난 마음속으로 형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 본다. 형, 이 비극이 왜 생긴 것일까? 내가 이 사건의 주범인거야? 내가 형을 이렇게 약하게 만든 거야? 아니지, 아닌거지? 그렇지? 두 눈이 흐릿해져 형의 얼굴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한다. 형, 아프지마. 형이 아프면 성훈인, 행복하게 살수 없어. 형을 아무리 미워 한다해도 형이 아프거나 불행하면 나, 형이 신경 쓰여서 같이 앓을 거야. 그러니깐.. 아프지마. "성훈.. 성훈아." 형의 두 눈 커플이 힘겹게 뜨여져선 날 올려다보고 있다. 무거운 듯 애써 내게 올리려는 팔은 얼마 올라오지 못한다. "형,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만 만나지 않았어도.. 나란 애. 모르고 살았더라면.. 아마 그랬더라면.. 이런 일 없을텐데. 다 나 때문이야. 다 나 때문에 이런 거야. 모든 게 다 나, 때문에... 흑." 두 눈에 솟아오른 액체가 내 두 볼에 따뜻하게 만든다. 난 형의 손에 내 얼굴을 묻고 소리를 죽여 울어버린다. “ 좋아하는 것은 등을 보일 때 가슴이 아프지만. 사랑하는 것은 등을 보일 때 눈물부터 떨어지는 거래. 좋아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정답게 얘기 나누지만. 사랑하는 것은 아무 말도 못하는 거래. ” 88)****** 난 바라만 봐야 했었어. 성훈이 문을 두들기고 나타나자 링겔바늘을 빼려던 지원이 손이 멈췄다. 싸늘한 눈동자로 성훈일 한번 쏘아보고는 자신의 팔뚝에 남겨진 바늘 자욱을 내려다본다. "죽.. 끓였는데, 입맛이 없어도 좀 먹어." "......." "죽 끓이다 보니깐 옛날 생각나더라. 형하고 하와이에서 살 때 형에게 밥해주던 그 때가.." "보기 싫으니까, 꺼져." 차가운 지원이의 말에 가슴 한켠에 길고 날카로운 손톱자국이 생겨난다. 하지만 성훈인 신경쓰지 않고 밝은 음성을 내 지르려 노력해 본다. "오랜만에 끓이려니까 잘 안되더라. 형 이것 좀 먹고.." 지원 옆으로 다가와 앉으려는 성훈이가 지원이에게 죽을 내민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에선 고소한 향이 빠져 나왔다. "쉬펄, 귀먹었어? 꺼지라고 했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지원이가 성훈일 잡아먹으려는 듯 노려보았다. "약, 먹어야 하니까. 억지로라도 먹어야." "나가!! 내 앞에서 꺼지라구!!" 성훈이에게 쏟아 붓는 지원이가 그가 들고 있는 쟁반을 손으로 쳐버렸다. 뜨거운 김이 오르던 죽 그릇이 방 바닥에 떨어져 이곳저곳에 분화구가 생긴 것 마냥 김이 피어오른다. "........" 쏟아져 버린 죽 그릇이 방바닥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다. 먼 시선으로 그것을 주시하던 성훈이가 고개를 숙이며 이를 악문다.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자 성훈인 이를 악문 입술을 열어 나즈막히 속삭인다. "다시.. 떠올게." 떨리는 한숨을 쉬고는 떨어진 것들을 조심스럽게 훔치는 성훈이 뒤로 베개가 날라 들었다. "동정하지마. 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고지용이랑 똑같아 보여??!!" "......." 삐딱한 음성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릇을 쟁반위로 올리던 성훈이의 볼이 조심스럽게 젖어 버린다. "꺼져! 사라져 버려!! 동정? 핫, 내가 네놈 동정 받을려고 앓아 누웠다 생각하나 본데, 착각하지마. 강성훈! 난 고지용처럼 비열하지 않아!!" "......." 지원이의 음성은 사방 벽에 부딪혀 성훈이의 머리를 울리도록 만든다. "쉬펄, 뭐해??!! 나가란 말이야!!" "......." 지원인 자신의 손에 닿는 것을 찾고 있었다. 온 몸 속에 들어있던 분노를 성훈이에게 퍼붓고 싶은가 보다. "나가!! 나가!!!" "......." 식기를 매만지던 성훈이의 고사리 같은 손이 입가로 옮겨와선 소리를 죽여 울먹거린다. 그 소리를 지원이가 들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 같다. "안 나가??!!" "......." "쉬펄, 내 눈에 띄지 말란 말이야!!" "......." 울먹이던 성훈이 숙여졌던 고개를 쳐들고 지원이를 올려다본다. 하얀 얼굴에 빗물이 쏟아진 것처럼 흥건히 젖어 있다. 지원인 손에 잡혀 있던 블루빛 꽃병을 손에 쥔 채 화를 삭혀내는 듯 하다. "이러지마." "......." "이러지마. 제발.." "......." 울먹임이 사방에 울려퍼지자 지원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고 숨을 고루 쉬려고 심호흡을 했다. "너 같은 놈이 날 우습게 봐? 네 까지게 날 떠나서 살수 있다 생각해? 네가 감히 날 떠난다 이거야? 네 까지게??!!" "........" "나, 없이 살수 있다? 그 머저리 같은 놈 품에 가서 살겠다 이거지?" "........" "네 놈이 뭔데,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네 까짓게 뭔데!!!" "......." "내가 얼마나 날 구겼는지 알아? 널 되 찾을려고 얼마나 날 구겼는지 아냐구!!" "......." "내 자존심같은 건 다 버렸었어. 네 앞에선 사치라고 생각해서 다 버렸단 말이다!!" "......." "빌어먹을. 그런데도 그 자식이름이 나와? 그 자식한테 간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냐구??!!" "......." "내가 얼마나 비참해야지 직성이 풀려? 어디까지 추락하길 바라냐구!!" 성훈이는 영혼을 사로잡힌 사자(死者)가 되어 더욱 처절하게 울고 싶어진다. 아픈 기억으로만 무장된 지원이와의 추억이 순식간에 펼쳐 보인다. 무슨 역학운동마냥 안간힘을 쓰고 성훈이를 끌어내는 듯 하다. "바라는 거.. 없어." 대충 치우고 일어서는 성훈이가 방을 빠져나가 방문을 닫고 문을 기대 힘없이 주저앉았다. 넘쳐대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입술을 떨려대며 서글프게 흐느꼈다. 잠시 후 방문 뒤로 링겔병 깨지는 소리에 성훈이의 흐느낌은 좀 더 짙어져 간다. "젠장.. 힘들어. 힘들어. 형." 인터폰으로 비춰지는 여자의 모습에 재진이의 눈이 커다랗게 변해버렸다. 색깔이 고운 목티를 안에 받쳐입고 우아해 보이는 숄을 겉에 걸쳤는데 어제 본 텔레비젼 연속극에 나오는 여주인공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여자의 눈동자가 가을 하늘만큼이나 청아해 보였다. [전, 수원선배 후배. 정은하라고 해요.] 가여린 음성을 내뱉는 여자아이의 머리결에 바람이 맴도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여자아이의 머리색은 블루블랙. 분명히 괜찮은 여자다. 여자친구로 데리고 다닌다면 주위 시선을 한눈에 받을 것이다. 재진이 눈에도 정말 괜찮은 여자다. '제길. 더럽게도 예쁘네.' 굳은 표정으로 현관을 따주고는 문 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아침에 감지 않은 자신의 머리가 신경 쓰인다. 꾀재재한 자신의 모습에 비해 단정한 그녀의 모습에 괜히 힘이 빠진다. '자스민향.' "저, 수원선배 친구 분이세요? 음.. 룸메이트?" 은하가 묻는 말에 이마를 가리는 앞머리를 위로 쓸어 넘기며 고개만 까닥까닥 댔다. "우와~ 남자들만 사는 곳인데 무척 깔끔하네요. 하긴.. 수원선배 성격 때문에 상상이 갔지만, 생각보다 더 깔끔해요." 거실로 들어서는 은하는 그들의 주거 공간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재진이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여기, 앉으세요." 소파로 인도하곤 탁자 위에 놓여진 수원이의 논문 자료들을 대충 챙겨서 한 쪽으로 치웠다. 가름한 얼굴에 훌쭉한 몸매를 가진 은하는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소파 위에 앉아 수원이의 논문 자료들을 집에 들었다. "저, 마실 거 드릴까요? 쥬스랑 커피.. 있는데." "전, 괜찮아요." "손님대접 허술하게 했다고 수원이 녀석 화내요." "그럼, 커피 주실래요." 재진일 향해 살포시 웃어주는 그녀의 눈은 웃음이 많아 보였다. 수줍고 여린 아름다움이 은하의 몸 전체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주방으로 향하려다 뒤돌아서는 재진이가 침을 꿀컥 삼키며 묻기 싫은 질문을 입안 가득 준비하고 있었다. 정말 던지기 싫은 질문이다. 아니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질 않았다. 재진인 모르는 척 하고 싶다. "수원이.. 애인입니까?" 재진이의 돌발적인 질문에 은하는 조금 당황하는 표정을 짓다가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인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비참함이 재진이 핏줄을 따라 온몸으로 번졌고 이를 악무는 그가 돌아섰을 때 눈에 뭔가가 들어간냥 충혈 되고 있었다. '쉬펄, 개자식.' 칠흙같은 어둠이 번질 무렵 지원이 방으로 조용히 들어선 성훈이의 눈가는 온통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아직도 안 갔냐?" "미안해. 형." "......."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지원인 곁눈질로 성훈이의 얼굴을 보고 미안했는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물었다. 성훈인 지원의 핼쓱한 옆얼굴을 바라볼 뿐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성훈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지원인 드디어 성훈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성훈을 쏘아보았다. 성훈인 어설픈 미소를 입가에 담고 지원이의 시선을 잡았다. 지원인 재빨리 고개를 창밖으로 되돌렸다. "그렇게 가식된 얼굴로 날 보지마." "다신.. 지용이 이름 꺼내지 않을게. 그러니깐 이것 좀 먹구." "........" "방금 끓인거야. 오늘 하루종일 암것도 입에 대지 않았잖아." "........" "이거 먹구 약 먹자. 약 꼭꼭 챙겨 먹어야 한대. 그리고 내일 당장 큰 병원으로 검사하러." "고지용도 이렇게 해서 널 잡았겠지?" "........" "참 쉬운데. 강성훈 잡는 비법이 이런거라니." "........" "네가 나이팅게일이냐?" "그만 좀 삐딱하자. 왜 그렇게 꼬였어?" "여유있는 체 하지마." "그만 좀 풀어라. 응?" "쳇." "그리고 보니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내가 정성스럽게 끓인 죽인데 맛도 안보고 집어던지다니." "......."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에 더 이상 쏘아붙일 수가 없다. 성훈인 갑자기 모든 매듭이 스르르 풀어져 버리는 걸 느낀다. "어린애 같애. 투정부리는 거 보면." "닥쳐." "화.. 풀거지?" "......." "이거 먹을거지?" "......." 하얀 미소에 지원이도 작게 웃어 버렸다. 지원인 표현이 부족한 남자이다. 말로도 마음을 다 나타내지 못했고, 행동으로도 역시 그랬다. 성훈인 언제나 그의 말에 플러스 알파, 그의 행동에 플러스 베타를 해가며 그를 이해했다. "내가 먹여 줄까?" "그거 내려놔 봐." "응?" "또 쏟기 싫으면 내려 놔." 지원에 말에 순순히 침대맡 탁자에 죽그릇을 내려놓자 그의 팔을 낚아채는 지원이의 팔힘이 침대로 과격하게 눕혀 버렸다. "형엉?" "난, 네가 좋아." "......." "우리 하와이로 도망갈까?" "......." "하하하하핫. 녀석 눈 커진 것 좀 봐. 왜 진짜 갈까봐 겁나??" "......." "평생 나한테 시달릴 생각하니깐 겁나는 거냐?" "그건.." "눈 감어." "항상 명령조야." "감으라면 감어." "핏." 한 여름에 나른해진 몸에 조름이 오듯 스르륵 감기는 두 눈 위로 지원이의 압박이 느껴진다. 성훈인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없이 편해짐. 사람들은 아마 이런 것을 보고 행복이라고 하겠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말이 안되겠지만, 난 형과 지용이랑 함께 살고 싶어. 난, 형도 지용이도 사랑하거든. 나, 자신보다 더. 두 사람이 날 나눠 가졌어. 그래서 내 속에 난, 없나봐.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아기에게 자장자장을 해 주듯이 지원이의 배를 덮고 있는 이불을 살며시 두들렸다. 살짝 눈을 뜬 지원이가 성훈이 임을 확인하고는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지원이 잠에 빠져 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장자장을 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침이 오고 있다는 사실이 더 할 수 없이 두려워진다. '내일은 무슨 일을 날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나 아침은 오고야 말 것이다. 그의 두려움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선배 집에 갔었어요?" "뭐어??!!" "선배 집에 갔었다구요." 들고 있던 맥주 잔을 자칫하면 놓칠 뻔했다. "네가 내 집을 왜 갔어?" 동공이 커다랗게 변한 수원인 다그치듯 은하에게 소리를 지른다. "제가 선배집에 가면 안되는.. 거예요?" "........" "제가 잘못한.. 거예요?" "무슨 얘기했어? 재진이 집에 있던?" "그분 이름이 재진이예요?" "........" "참 친절한 분이셨어요." "그 녀석한테 무슨 소리했어? 그 녀석이 네게 뭐라고 말하던?" "그냥.. 애인이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는데." 하얗게 질려가는 수원이의 얼굴근육이 불안하게 떨려대고 있었다. 500cc 맥주잔을 잡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려대는 게 은하 눈에도 선명하게 보여진다. "선배.. 괜찮으세요?" "그리고 또? 또, 뭘 묻디? 또 뭐라고 말했어?" "선배 좋은 사람이니까. 잘 사궈 보라고.." "헛.." 쓰디 쓴 웃음이 나왔다. 시야가 먹물로 뒤집어 쓴 듯 온통 까맣다. 수원은 숨을 가다듬으려 심호흡을 했다. 머리가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선배!" 갑작스레 일어서는 수원이의 눈이 몹시 흔들리고 있다. "나 먼저 갈게." 은하를 뒤로하고 황급히 호프집을 빠져나가는 수원이의 머릿속이 몹시도 복잡하다. '뭘, 생각하고 있는거지? 잘 사궈보라구? 뭐야? 무슨 뜻이야??!!' 89)****** 나의 눈에 눈물 흘러도. "대성그룹 고회장님 아드님인걸 몰라봤네." "........" "입원 즉시 귀뜸 했더라면 특실로 옮겼을텐데." "........" 사각 안경을 끼고 배를 쭉 내민 병원 원장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보호자가 강성훈 이라는 사람으로 되어 있길래 동명이인으로 알았다네. 솔직히 그 많은 환자들 중에 지용군 이름은 한 둘이 아니라서." 원장의 말에 지용의 얼굴엔 쓸쓸함 같은 것이 어린다. 성훈이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독한 사랑도 분노도 아닌.. 다만 쓸쓸함. "선생님." "응?"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을?" "그가 돌아오면.. 제가 완쾌된 사실을 숨겨 주세요." "숨겨 달라??" "네, 성훈이가 돌아오면 제가 낳았다는 걸 비밀로 해 주세요." "왜, 이 기쁜 사실을 숨기려 드는건가?" "........" 원장의 말에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뿐.. 지용인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 자식 첨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저번에 그 녀석 바람난 거 봤을 때 네게 말했어야 하는건데." "......." "재진아, 이제 어떻게 할거니?" 지금 토니가 보는 재진인 햇빛 보이는 곳에 나오길 두려워하는 우울한 남자로 보인다. "글세." "그냥 그 집에서 나와. 보기 좋게 장수원 차고 나오란 말야." "........" "미련 같은 것도 필요없다. 그딴 녀석." "쉽게 말하지마. 나, 심각했던 거 알잖아." "미친 놈." "감정 정리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그 녀석 한순간 실수 일수도 있고." "실수? 그 녀석은 바이도 아니야. 이반은 더욱 더 아니고." "........" "더 빠져들기 전에 정리해라." "푸흣, 더 빠져들 게 있던가?" "재진이, 너." "나, 그 녀석이 전부다." "........" "이만 가봐야겠어. 그 녀석 들어올 시간이거든." "병신 새끼." "우혁이랑 잘 되 가지?" "이 등신같은 놈아!!" 몸으로 이겨 낼 수 없는 격랑이 몰려오고 있었다. 불안과 불행을 몰아오고 있는 격랑이 틀림없음에도 재진인 그 격랑을 받아들일 각오로 수원이에게 찾아갔다. 재진은 완벽하게 장치된 쇼룸의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는 착각을 갖게 되었다. 비록 이것이 모험이고 위험한 곡예가 된다 해도, 재진인 후회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인생 모두를 마네킹의 옷에 던져 넣듯이, 무책임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자신을 맡겨 버렸다. 재진인 빈배처럼 흔들렸다. 현관을 따자마자 보이는 수원이의 얼굴이 보인다. 불안한 듯 손톱을 깨물고 있는 게 재앙을 부린 후 처벌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모습 같았다. "어딜.. 갔다 온 거야?" "........" 수원이의 기가 꺽인 음성에 웃음이 번져 나오려고 했다. 재진인 목이 마른 듯이 건조한 공기를 마시며 함께 건조되는 것 같았다. 휘발성 인화물질처럼 발화하기 쉬운 상태로 재진인 노출되어 있었다. 재진인 이럴수록 점점 더 침착하고 냉정해지는 성격이었다. "저기. 오늘 집에 찾아 온 그 여자애." "........" "같은 과 후배인데.. 내가 좋다고 쫓아다니는 애거든." "........" "후배라서 잘해주고 그랬는데, 집까지 찾아 올 줄은 몰랐어." "........" "다신 이런 일 없을거야. 만나지 않을게. 마주치지도 않을게." "........" "오해.. 하는 거 아니지?" 도둑은 변명하며, 꿀리는 자는 말이 많다. "피곤하니깐 말시키지마." 수원일 가증스럽다는 듯 쳐다보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리는 재진인 갑작스레 취기가 돌았다. 욕실 안으로 들어선 재진인 다리에 힘이 풀려 욕실 바닥으로 몸을 구겼다. 오랫동안 묵은 피곤함이 그를 감싸고도는 것 같았다. '풋, 오해라? 거짓말도 어설프더니 변명까지도 어설프구나. 넌.' 늦은 밤, 두 사람은 정처없이 거닐었다. 방안구석에서 자신의 눈치를 보던 성훈일 끌고 나오다시피 한 지원이.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수면 위에 찬란한 빛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산들바람, 대지는 꿈처럼 고요해 아무런 근심도.. 분쟁도 없는 것 같았다. 지원이의 입이 굳게 다물어 진지 두 어 시간은 된 듯 하다. 굳은 표정으로 성훈일 간혹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나즈막히 한숨을 쉬곤 했다. 그런 지원일 시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성훈이도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걸었다. 목적지도 없는 걸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저기." "........" 지원일 멈추게 한 건 성훈이의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걸음을 멈추고 성훈이를 바라보는 눈이 아무말도 말라고 하는 것 같다. 어둠속에서 지원이의 까만 눈동자를 밝혀주는 건 은은한 달빛. 달빛은 지원이의 석탄같은 눈동자에 안식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 "너무 많이 나온 것 같아." "........" "형, 몸도 안 좋잖아." "환자, 취급하지마." "형은 편히 쉬어야 한단 말이야." "너, 말이야." "응?" "내가 다 낳으면 가버릴 것 같아." "........" "네 놈 하는 행동이 그래. 일종의 봉사처럼 느껴져." 작은 미풍에도 날라 가버릴 것처럼 연약해진 지원이가 작게 보인다. 자신의 키보다 더. 그런 지원이를 꼭 끌어안는 성훈이의 두 눈이 흐릿해져 간다.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는 게 이토록 싫어질지 몰랐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정말 싫어.'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지용이 곁엔 아무도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아 블라인드로 몇 줄의 빛만 존재하고 있다. '두려워. 두려워 성훈아. 이번에도 날 버린 거라면.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 건지 겁부터 나. 널 기다리고 있는데. 네 눈을 이제 쳐다볼 수 있는데. 널 안고.. 잠들 수 있는데. 넌, 어디에 있는거니? 어디로 사라져 버린거니? 혹시 사고라도 난거니? 무슨 일이 있는거니? 왜 날 찾아오지 않니? 왜??' 싸늘한 한기가 지용이에게 다가와 얼음성으로 다시 가자고 유혹해댄다. 한기의 유혹을 뿌리치려는 지용인 몸을 새우처럼 구기고는 성훈이의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돌아올거야. 날 혼자 내버려두지 않아. 성훈인 돌아올거야. 난 믿어. 성훈인.. 꼭 올거야.'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두 사람을 기다리는 눈이 있었다. 두 사람의 인연의 줄을 끓어 놓으려고 선이 날카로운 가위를 들고 나타난 사람. 창문 밖으로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 승리의 미소를 짓는 은주가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정성스레 움켜쥐고 있었다. "온달 장군이 돌아오셨군." "아가야, 인사하렴. 너의 아빠란다." 은주가 담은 말에 뒤에 서 있던 사내가 놀란 기세로 그녀를 빼 꼼이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실려 있었다. 그 미소에는 자신감이 가득 내포되어 있다. "이은주, 지금 한 말.. 무슨 뜻이야??" “ 지원씨. 당신과 저의 희망이 여기에 있어요. 당신도 이젠 생각이 달라지겠죠. 당신의 분신은 당신 옆의 저 사람이 아니라, 제 뱃속에 있는 이 아기예요. 이제 당신의 끝없는 방황을 마칠 시간이네요. 당신은 이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야 하니까요.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완결 소설은. 아니지만. 얼마 남지 않았죠. 90)****** 고운 빛의 상처. 성훈인 소파에 누워 천장의 유리등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알로 장식된 하나하나의 등은 바람이 불면 딩동딩동 소리를 내며 소리 좋게 흔들리곤 했다. 몇 개의 유리가 모여 만들어진 것일까? 그는 몇 차례나 세어 보았지만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지원과 그의 아내가 방으로 들어간지 많은 시간이 흘려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몇 시쯤 됐을까?'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리듬감 있는 심장의 박동소리에 맞춰 그는 마음으로 지원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형, 지원형.' 소파에 누웠던 몸을 일으키고는 꼭 닫혀진 방을 쳐다보았다. 저 방안에는 지원이와 은주가 있다. 방안으로 들어가기 전 자신을 슬픈 눈으로 쏘아보던 그녀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 눈빛은 한없이 애절하고 공허하던 지용이의 눈빛을 연상시킨다. 시리게 슬프던 지용이의 눈빛. '지용인.. 어떻게 됐을까? 아직도 허공을 헤매고 있을까? 식사는 제 때 하고 있을까? 약은 잘 챙겨먹고 있을까? 날 찾고 있을까? 내가 없어서 울고 있을까? 후--- 내가 이 곳에 온지 얼마나 됐지?' 몸을 일으켜 지원이 들어간 방문 앞에 섰다. 문 안 쪽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변호사하고 얘기해. 위자료도 해결해 줄거야." "김변호사는 만났어요." "그런데?" "서류 뭉치를 들고와선 도장부터 찍으라 하더군요." "........" 여유있게 행동하는 그녀가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미소를 띄었다. "여긴 무슨 일로 찾아왔지?" "당신을, 당신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왔어요." "되돌려? 하..하핫." "........" "네가 날 되돌린다고? 하하하핫." 비웃음. 은주의 말이 배꼽이 빠질정도로 웃겼다. 허무맹랑한 그녀의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가졌어요." "........." 순간 지원이의 비웃음은 멈춰버렸다. "4주에서 5주로 넘어가고 있대요. 당신의 아이예요." "........." "당신의 분신이 제 뱃속에서 자라고 있어요." 은주의 말 한마디 마디가 송곳처럼 지원이의 뇌리를 꿰뚫었다. 하지만 지원인 조소를 머금고 그녀에게 딱딱하게 말한다. "그래서? 네가 아이 갖은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인데?" "지원씨 핏줄이예요." "핏줄?" "모르겠어요? 지원씬 이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닥쳐!! 그 딴 걸로 날 묶을 생각인가 본데, 난 원하지 않았어!!" "지원씨." "아이를 원한 건 너였고, 넌 아이만 원했어!" "......." "그럼 계산 끝난 거 아니야?" "........" "아이를 미끼로 묶을 생각이었다면 넌 사람 잘못 본거야." "........" 은주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깨물며 도움을 청하듯 방문을 주시했다. 그런 은주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는 지원이 느긋이 말을 이었다. "잘못 찾아왔어. 난 네가 애를 배던, 낳던 신경쓰고 싶지 않아." "........" "이제 얘기 끝난 거겠지??" 원목 의자에서 일어서는 지원이가 방문을 향해 걸어가려 하자 은주는 이를 악물며 분노 어린 음성을 내 뱉었다. "밖에 있는 장난감 때문인가요?" "........." "저 마네킹 같은 장난감 때문에 당신의 핏줄을 저버리겠다고 하는건가요?" "말조심하지 그래?" "장난감때문에 당신의 모든 걸 버릴 작정이세요?!" "말조심해!" "저 사람과 언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해요? 훗날 이 아기가 밖에 있는 마네킹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당신은 모라고 말하실 건가요?!!" "제길, 그만 닥쳐!" "저도 아이만 생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뭘 하던 당신의 아기만 갖으면 전 행복하게 살수 있을거라 생각했다구요. 하지만.. 저도 여자예요." "........" "다른 사람들처럼 단란한 가정 꾸리고 살고 싶다구요." "........" "자상한 아빠가 있는 아기.. 키우고 싶어요. 지원씨 생각을 바꾸세요." "난, 그딴 거 필요없어. 다른 남자 찾아봐!" 문고리를 잡고 비트는 그의 몸에 체중이 실려온다. 은주의 마음이 점점 더 혼란해지며 앞이 캄캄해졌으나 그녀는 기껏 눈물만 뚝뚝 흘렸다. 정말이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절박해 질대로 절박해져 있다. "당신과 장난감은 영원할 수 없어요. 언젠가 장난감에게 실증을 느끼실 거잖아요. 당신의 모든 것이 달린 문제예요. 저와 이혼하게 되면 당신은 빈털터리가 된다구요. 당신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이예요!" "필요없어!! 난 그런 게 다 필요없다구!!!" 은주의 몸을 거칠게 밀어 버리고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었던 지원인 미처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흐릿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그와 마주보고 있다. 온 몸을 떨어대며 울고 있다. 가슴이 너무 아픈 사람의 표정으로 울고 있다. "성..훈아." + + + + + "오늘 일찍 들어올게. 재진이 너 약속 없지?" "........" 운동화 끈을 매만지던 수원이가 재진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리 둘. 함께 한 시간이 꽤 됐잖아. 오늘 영화 볼까?" "........" "약속.. 있는거야?" "........" 어젯밤부터 재진인 수원이를 따뜻하게 쳐다보지 않고 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다. "어휴-- 답답해. 입 좀 열어! 임마!!" "늦겠다. 빨리 가라." 건조한 음성에 수원이의 인중이 고집스럽게 변하기 시작한다. "쉬펄, 너 정말 짜증난다." 현관이 부서질 정도로 꽝 닫고는 수원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쉬펄놈. 차라리 화를 내. 아니면 반 쯤 죽게 패던가.' 수원인 혼란스러웠다. 뭐가 뭔지 모르게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그는 몸을 싣질 않았다. 문이 닫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엔 미련이 없다. 한참 멍하니 서 있었던 수원이가 갑자기 현관 앞으로 몸을 돌렸다. "이 씹새끼아!! 네 놈 머릿속에 뭐가 들었어? 뭐가 들었길래, 지랄이야!!" 크게 소리를 질렸다. 아파트 단지가 떠나갈 정도니 한참 메아리가 울렸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현관을 발로 거세게 걷어찼지만 현관은 꼼짝 하지 않았다. "쉬펄, 그래. 나 여자랑 잤다! 넌 여자랑 잔 적 없어??!! 넌, 나 만나기 전에 더했잖아. 드럽게 문란한 생활만 해놓고 내가 여자 만나니깐 열받냐? 난 여자도 못 만나??" 두 눈이 뜨거워진다. 열리지 않는 현관문.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을. "씹새. 너 나랑 끝나고 싶은거지? 그래 끝이다! 끝!!" 몇 번의 발길질을 하고.. 마지막으로 찰 작정으로 온 힘을 오른쪽 발로 모았다. 그리고 걷어차려 하는 순간. "달라도 한참은 다르지." "재진아.." "널 만나고 난 뒤, 난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어." "........." "등신같이 내 눈엔 항상 너만 보였었지." "........." "하지만 넌, 날 만나고 난 뒤 다른 사람을 쳐다 본 거야. 이런데도 내가 너랑 같아?" 낯 설은 눈빛. 오싹거리듯 무너지는 순간이 지나기 전에 차갑도록 조용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분노이거나 격분이 아니었다. 들리는 대로 얼음보다도 차가운 것이었다. 얼음조각의 날카로움이 수원이의 휘청대던 의식의 혼동을 잘라내는 것 같았다. 쾅--------- 재진인 수원이에게 등을 보이고 말았다. "쉬펄, 될 대로 되라고 해!! 너, 후회하지마!!" 막상 큰소리를 치고 학교로 향했다. 도서관에 자릴 잡긴 했지만 책 속의 글씨들은 수원이의 머릿속에 안정적으로 들어오질 않는다. 재진이의 차디찬 눈빛이 수원이의 눈앞에 선하게 연상된다. 처음이었다. 재진이가 화를 내는 건. '다르다? 뭐가 달라? 난 네놈이 딴 놈이랑 키스하는 것도 봤었는데..'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펜을 입가로 가져가 자근자근 씹어본다. '내가 네 놈 없이 못살지 알아? 착각하지마. 이재진. 난 너 없이도 잘살어! 차라리 잘됐어. 너랑 영원히 살 것도 아니고.. 너처럼 무식한 놈하고 내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선배!" 긴 머리카락에서 자스민 향기가 쏟아져 나온다. 향기로운 내음. '그래. 은하가 나와 더 잘 어울릴지도 몰라. 이재진!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어. 너란 놈에겐 미련조차 없으니깐.' "저녁 드셨어요?" "너, 요리 잘하니?" "네?" "요리 잘하면 나 밥 좀 해줄래?" "선배??" + + + + + “ 먼 훗날. 누군가 나에게 첫사랑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대답대신 엷은 미소를 지어 볼 거야. 아마 하루종일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겠지. 그래. 내 사랑은 처음부터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걸 알았어. 사람들은 흔히 첫사랑은 이루기 힘들다고 하잖아. 깊어 가는 사랑은 언젠가 이별을 불러 올 줄 알았어. 그래서 더 그랬나봐. 형을 만나면서 난 늘.. 온몸으로 행복해 하면서도 가슴 깊이 아파했고, 눈물나는 밤이 많았거든. 내 첫사랑은.. 끝내 이별로 남겨지겠지만. 결코 가슴 아프거나 괴로운 것만은 아닐거야. 형이.. 날 사랑한다고 말해 줬으니까. 흐흣, 이젠 고운 빛으로 상처가 남겠지. 형, 사랑해. ” 은주가 서울로 올라간 후 별장은 모진 돌풍으로 휩싸여 있었다.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아." 지난 며칠동안을 몽유병 환자처럼 뭘 하는지 모른 채 혼미한 시간들을 보냈다. 성훈이가 옆에 있는 동안 지원인 자신이 감췄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조심스레 꺼내는 말에 지원인 열이 오르긴 했지만 그의 말을 무시한 채 하던 행동을 진행시켰다. 성훈이의 아랫입술을 맛보던 지원이가 성훈이의 입술 새로 세어 나오는 언어들을 애써 무시하려고만 한다. "나." "......." "지용이가 보고 싶어." "입 열지마." 간절히 부탁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허한 한숨소리만큼이나 공허한 음성이었다. 지원인 은주 때문에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로 인해 고통받았어. 더 이상 고통주기 싫어." "입 다물어." "나 이렇게 형과 함께 있으면.." "그만 떠들라니깐!" ― 나로 인해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건 싫어. 늦게라도.. 형 마음 알았으니깐. 그것으로만 행복할 수 있어. 나, 형이 다른 사람과 행복해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형도 다 낳았으니깐. 내 자리로 돌아갈래." "뭐? 내가 다 낳았으니깐 간다 이거야??!!" 성훈이의 무릎에 누웠던 지원이가 버럭 화를 내며 일어섰다. 동성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동성을 향해 사랑을 구걸했었다. 무릎을 꿇고 사랑을 구걸했다. 잘난 은지원이 말이다. "그래. 형 다 낳았으니깐, 이제 그만 지용이에게 가고 싶어. 나, 지용이 보고 싶어." "뭐하자는 거야? 너, 열 받게 하는 게 취미냐? 우습지도 않아, 그런 농담 재미없어!!" "정말 그 애가 보고싶어. 형과 함께 있어도 그애 얼굴이 보여. 나, 지용이 사랑해." "거짓말!!"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로 들려? 내가 아직도 형을 사랑하는지 알아??!!" "닥쳐!!" "형도 짐작했었잖아. 난 형이 아파서 형 곁에 있었던 것 뿐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어. 형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맘도 없었고.." ― 나 때문에 고통받고 힘든 건 싫어. 형도, 지용이도, 형의 아내도, 형의.. 아기도... "죽여버리기 전에 입다물어!" 거짓이라 해도 지용이의 얘기만 나오면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다. 불에 댄 듯 열부터 차 오르는 게 성훈이를 거칠게 다루게끔 만들었다. "그럼 죽여. 죽이면 되겠네. 차라리 죽으면 속 편하겠다." "......." "그냥 내가, 혀 깨물고 죽어버릴까?" ―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 오늘 눈감으면 내일 눈을 뜰 수 없었으면 좋겠어.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형, 나 약해지면 안되는데. "너." "보내줘. 형은 나 없이 살수 있잖아. 형은 나 없이 견딜 수.." "맘에 없는 말 그만해." 토해내던 말을 멈추고 일어서는 지원이가 거실 소파로 다가가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링을 빼내 들었다. ― 한동안은 힘이 들겠지. 하지만 익숙해 질거야. 내가 없어도.. 형의 빈자리 채워줄 사람. 형 곁에 가까이 있으니까. "제발, 그만 좀 하자. 너 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았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래?" "지용이가 보고 싶어." "씹, 제발 좀 그만해!!" "지용이가 보고 싶다구. 내 머릿속에 온통 지용이만 생각나." "거짓말!" "형하고 평생을 살겠다는 생각 가져본 적 없어. 형에게 정떨어진지 오래니까.." "강성훈??!!" "지용이한테 갈래. 그애가 보고 싶어." ― 좋은 아빠가 될거야. 형은 아주 좋은 아빠가 될거라고 생각해. 겉은 냉정하지만.. 속은 따뜻하니까. "고지용에게 가겠다? 그래 가봐! 가보라구!!" "......." 낮게 깔린 음성으로 그에게 입을 연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나가!" "......." "하지만.. 네가 나가면 그땐, 너와 나.. 정말 끝이야!!" "......." "그래도 갈 거야?" 그는 거실과 현관의 동선을 짧은 시간내에 계산했다. '사회의 통념속에서 쏟아질 비난.. 그 까짓 것 난 이제 감당할 수 있어.' 동성사이의 사랑에 대한 비난은 죄악으로 간주되어 그들 사이의 순수한 감정도 모두 비정상적인 관계로 일축되고 있어도.. 지원인.. 감당할 수 있으리라 다짐한다. "그래도 갈 거냐구??!!" "........" 힘없이 묻는다. 설마하는 심정이 지원이를 가라앉힌다. "갈..거야???" "........" "갈거냐구??!!" "형은, 행복하게 잘 살수 있을거야." "강성훈??!!" 현관으로 몸을 돌리는 그가 얼굴을 살짝 돌린 채 나즈막히 속삭인다. "부탁이 있어. 제발, 아프진 마. 아프지는 말아라." 머뭇거리는 가 싶더니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성훈아!!" 지원이의 손에 꼭 쥐어진 링이 그의 손바닥에 자국을 만든다. 현관을 주시했을 때 성훈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성훈이를 잡아야한다. 하지만 지원이 일어섰을 때 그의 심장이 그를 가로막는다. 성훈이를 보내라며 그의 발을 묶어 놓는다. 통증을 느끼며 이를 악물던 지원이가 몇 걸음 채 걷지도 못하고 카펫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가..가지마. 성훈아!! 돌아와!! 돌아왓!!!" 지원이의 몸이 어이없이 넘어가 버린다. 하늘거리는 깃털처럼....... 너무도 가볍게 가라앉는 지원이의 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먼 훗날, 두 사람이 만났을때 나즈막이 웃으며 말했으면 좋겠어. 그때.. 참 바보였다고. 91)******* 그가 남기고 간 선물. 먼 거리를 걸었다. 쉴새없이 걸어 성훈인 피곤함을 느꼈다. 그러나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뻑뻑해진 눈에 잔 핏발이 서서는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원이와의 추억을 하나, 둘 달리는 도로위로 깔아 놓는다. '할 수 있어. 이제 정말.. 잊는거다.' 힘없는 미소를 짓고 차창에 서린 성애위로 삐뚤거리는 글자를 새겼다. 지원. 그리고 그 옆에.. 작디작은 글자를 새긴다. 안녕... 스스로를 위로하며 도착한 서울. 새벽의 찬바람이 성훈이의 목을 간지럽힌다. 퉁퉁 부은 눈이 흐릿해졌고,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할 수 있어. 난 해 낼 거야.' 차정은 + + + + + "도련님 정신이 드세요?" 눈을 떠보니 모진 돌풍은 사라지고 없었다. 식은땀으로 범벅한 지원이의 옷은 축축하게 젖혀져 있다. "도련님, 서울에 연락 했어요. 곧 사모님이 오실겁니다."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사내의 음성이 멀게만 들린다. 지원인 아무 대꾸도 않고 두 눈을 감아 본다. 갑자기 울음이 터지려고 했다. 눈에서 홍수가 터지려는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급히 그 공간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로 달려가서 차가운 물을 틀어 놓고 손등을 벅벅 문지르면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 한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처럼 튀어나오는 말에 불과했다. 그 속에 커다란 틈을 보이는 저 심연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그 문장이 떠올랐을 뿐이다. 세면대 앞에서 얼굴이 닳아버리도록 문질려대다가 터져 나오는 곡을 이겨내질 못한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성훈이가 흘리고 간 자욱들을 연상시켰다. 통증. 시작되는 통증에 지원인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고 식은땀에 젖혀 버린다. "떠났어. 이제 완전히 끝난건가? 너, 날 떠나버린거야? 떠난거야? 흑. 흐흐.." 욕실바닥에 안치되는 몸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통증은 더할 수 없이 거세지고 지원인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섰다. 일어서는 다리에 경련이 일고 부들대며 떨리기도 했다. 꼭 쥐여져 있던. 걸리적거리는 링하나가 욕실바닥에 맑은 소리와 함께 굴러 나뒹군다. 성훈이가 떠나버린 것처럼 링도 지원이의 손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지원이에게 남은 건 없다. “형은 강하니깐. 나 없이도 잘 해 낼거야..” 어디에선가 성훈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난 강해. 네 말대로 난 강하다." 주저앉았던 지원인 욕실바닥에 나뒹구는 링을 집어들었다. "그래. 네까짓 것 때문에 무너질 은지원이 아니야." 지원인 힘겹게 일어나 좌변기 앞에 섰다. 그리고.. 들고 있던 링을 좌변기 안으로 떨어트린다. 그 다음으로 버튼을 누르고 물을 내려가도록 했다. 한참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변기의 물은 내려갔다. 소용돌이가 멈추고 변기 안에 고인 물이 잔잔해 지자, 지원인 다시 힘없이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린다. 입안에서 허한 웃음이 나온다. "하핫. 하하하하핫. 이것도 내 맘같은가? 내려가지 않아. 빌어먹을 반지. 꼭, 너 같구나. 하하핫." 아픈 눈물. 지원인 욕실 바닥에 몸을 길게 눕힌다. 그리고 씁쓸한 웃음을 연이어 쏟아 냈다. 변기속에 사라지지 않은 커플링은 지원이 가슴 깊은 곳에 성훈이처럼 없애버리기가 힘이 든다. '넌, 날 잊을 채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수 있니? 넌, 그럴 수 있니? 성훈아, 말해봐. 넌 그럴 수 있어?' 지원이에게 남겨놓은.. 성훈이의 가장 슬픈 선물. 이별.. 이었다. + + + + + 성훈인 상쾌한 아침을 같이 걷고, 항상 웃는 낯으로 서로를 추켜 올리는 행복한 삶을 꿈꾸며 살아왔었다. 그런 성훈이에게 어렵지도 않는 소망이, 처음부터 싹이 잘린 채 그대로 유지되어 왔었다. 그를 지독히도 힘들게 했던 첫사랑의 기억. 지우려고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잔인한 영상. 긴 복도를 따라 중간 지점에 멈추면 된다. 걷는 다리는 자꾸만 꼬꾸라질 듯 제 멋대로이다. 성훈이 찾아가는 공간이 가까워질수록 피곤함이 그의 몸을 나른하게 만든다. '지용아, 내가 왔어. 내가 돌아왔어.' 쓴웃음이 나온다. 민들레 씨처럼 솜털에 묻혀 날아갔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 같은 추억들을 도로위로 깔고 그는 지용이를 찾아왔다. 이처럼 슬픈 얘기는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지용아, 내가 왔어. 내가 너무 게으름을 피웠지? 너무 늦게 왔다고 화내는 거 아니지? 근데, 오늘은 화내지마. 나 위로 좀 해줘. 오늘만 위로해 줘. 내일부턴 다.. 잊혀져 있을 테니깐.' 그가 찾던 병실 앞에 서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직 어둠이 병실 안에 남겨져 있었다. 브라인드 틈새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그 햇살을 받으며 휠체어에 외롭게 앉혀진 사람이 보인다. 성훈인 조심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나.. 왔어." 울먹이는 음성이 고요한 병실 안에 울러 퍼진다. 성훈인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휠체어에 앉은 그 앞에 무릎을 게고 힘없이 앉았다. 자신을 기다렸는지 쾡한 눈으로 밤을 지샌 것 같다. "지용아, 나야. 성훈이야. 나 왔어.. 나 보고싶었지?" 성훈인 무릎위로 가지런히 포개진 지용이의 두 손위로 얼굴을 묻는다. 포개진 손등위로 느껴지는 따뜻한 액체가 지용이의 속눈썹을 미미하게 떨게 만든다. 성훈이의 몸은 긴장이 풀린다. 따뜻한 공기가 그를 감싸자 졸음이 쏟아진 것이다. "나, 이대로 조금만.. 잘게. 너무 졸리다. 너무 졸려." 한동안 따뜻한 액체가 지용이의 손등을 젖혔다. 그리고 그 액체가 마를 때쯤 지용이의 두 눈에서도 액체가 쏟아져 버린다. 그 액체는 지용이의 하얀 두 볼을 감싸고 내려와 성훈이의 야윈 볼 위로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편히 쉬어. 후나.. 많이 피곤했구나. 돌아왔으면 되는 거야. 네가 내 곁으로 왔으면 되는거야. 돌아와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브라인드를 뚫고 들어와 성훈이의 등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조금 지나 성훈이의 볼이 겹쳐진 한쪽 손이 나와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그의 얼굴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덮어진다. '사랑해. 성훈아.' 『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는 내 모습에 아직도 나 차마 널 잊지 못해. 지난날 회상 속에 묻혀진 힘든 나의 영혼. 잠시나 깊은 잠에 들었다 생각할게. 눈 감으면 슬퍼할 나를 보며 기억할게. 너의 눈부신 그 모습을.. 』 + + + + + "선배, 무슨 생각하세요?" 가끔 멍해지는 수원이의 눈빛은 쓸쓸해 보였다. 허전해 보이는 미소도 가끔 내 비치곤 했다. "이거 먹구, 영화 보러가요." "........" "선배, 이 영화 보고싶어 했잖아요. 어제 겨우 예매했어요." 음식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다. 은하가 해주는 웃긴 유머도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가 보고 싶다던 영화표를 보여줘도 신이 나질 않는다. '그 자식.. 뭐하고 지낼까?' 은하와 오피스텔로 들어선 수원이가 남방을 벗어 던지고 소파를 벽 삼아 몸을 앉혔다. 은하는 먼저 샤워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갔고 덩그란히 남겨진 수원인 무릎을 껴안으며 텅빈 곳을 어루만진다. 창밖에 서 있는 외등의 불빛이 모자라게 오피스텔로 들이치고 있었다. 수원인 이 정도의 불빛이 안정을 주는 것 같아 좋았다. 누가 보아도 안정된 생활이다. 아침이면 은하의 애교어린 음성이 수원이를 깨웠고, 깨기 싫은 그를 억지스레 욕실로 떠밀어 주곤 했다.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결혼은 이래서 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더해갈수록 수원인 텅빈 누에고치 같았다. 의식적으로 텅빈 가슴을 벗어나고 싶어 관심을 다른 데로 쏠려 보내봤지만 으레 공처럼 되튕겨져 오곤 했다. "뭐하고 사는지 살짝 훔쳐보고만 올까? 아니야, 아니야." 수원인 희미한 조명의 공간에 자기를 숨기고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공상속에 빠졌다. "노트북 가지려 왔다고 갔다 올까? 아니야. 공연히 갔다가 그 자식 또 배배 꼴거야. 안 봐도 뻔해." 공상의 시간은 수원이를 메마르게 만든다. "쉬펄. 내 집인데, 내가 왜 못 들어가?" 작은 웃음이 나온다. 재진이를 볼 충분한 이유가 떠올랐기에.. '재진아, 생각해보니까. 네가 없으면 못살 것 같아.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싸우는 그 재미 못버리겠더라구.. 아니.. 솔직히.. 나, 네놈이 너무.. 보고 싶어.' 수원인 남방을 집어들고 은하의 오피스텔을 빠져 나온다.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거냐?" "........." 재진이의 실망하는 눈초리를 보니 수원이가 오늘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어휴-- 술냄새. 이재진 네 놈 꼴 좀 봐라. 오늘 세수는 했냐?" "왜 왔어?" "왜오긴 네놈 죽었나 살았나 보러 왔지." "훗." 토니가 들어서선 소파 위의 양주병을 제대로 세워놓곤 풀썩 앉았다. "어제도 안 들어 왔냐?" "보시다시피.." "그 자식 아주 뻔뻔스럽네. 이젠 아주 까놓고.." "카페는 어쩌고 온거야?" "혁이한테 맡기고 왔지 뭐." 모든 것은 엉망진창이었다. 정지된 공간에 들어선 것처럼. 깔끔했던 거실에는 빈 술병이 옆으로 누여져 있었다. "이재진. 오늘까지 일주일째야." "........." "빨리 단념하는 게.. 좋지 않을까?" "........." "어젠 아주 노골적으로 카페에 찾아왔더라." "........." "이 정도면.. 끝난 거 맞잖아." "그런 소릴 할거면 가라." "내가 가게 생겼냐? 이 미친놈아!! 그 자식은 그 여자랑 재미보고 잘 지내는데 네 놈은 하루하루 망가져 가잖아!!" "큭.. 큭.. 하하하하핫." 재진인 그저 킬킬대며 웃었다. 토니의 걱정스런 눈빛엔 아랑곳없이 그는 웃어 제꼈다. "재진아, 너만 힘들잖아!" ".........." "끝내! 이 바보야!!" "끝내? 너라면 쉽게 끝낼 수 있어?" "재진아.." "난 못 끝내. 넌 쉽게 끝낼 수 있을련지 모르지만 난 못끝낸다구!!" "네가 이런다고 그녀석이 돌아오는지 알아?" "........" "난.. 그 녀석 같은놈.. 많이 봤다." "........" "기다려도.. 소용이 없어. 소용없었어.. 나만.. 아팠지." "........" "그때.. 너.. 내게 그랬잖아." RRRRRRRR------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재진인 설레는 가슴으로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행여 수원이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네." [저, 수원선배 거기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 수원이가 풍기는 자스민의 주인.' [좀 전까지 여기에 계셨는데, 나와보니 선배가 없잖아요.] "여기, 안 왔는데." [음.. 그럼 어딜 가신거지?] "수원이.. 그 쪽 집에서 생활했어..요?" [네.] ".........." [재진씨 선배에게 연락 오면 은하가 집에서 기다린다구 전해주세요.] 떨려대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재진이의 눈이 반짝거린다. "재진아, 누구..전화야?" "그 여자.." "그 여자라면.. 아 임마, 너 괜찮냐??" "후훗, 조금씩 준비해야 겠는데.. 이제 정말 끝이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랑하므로 사랑 하나만 느끼며 치열하게 사랑하길........ 92)******* missing U. 이 녀석 뭘 하고 지냈을까? 난 아파트 키를 손가락에 끼워놓고 이리저리 돌리며 재진이의 얼굴을 떠올린다. 엉뚱한 행동만 하던 그 녀석을 떠올리자니 웃음이 번진다. 현관 앞에서 진을 치고, 노래 부르던 재진이. 껌을 씹고 들어와선 간접 키스라며 내 입속으로 껌을 밀어넣던 엉뚱한 녀석. 요리 해 주겠다며 요리학원 다니던 헌신적인 나의.. 재진이. 은하와 지낸 일주일 동안 난 재진이 놈을 떠올리고 있었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흔들어 봐도 그 녀석은 날 놓아주질 않았다. 아니, 내가 그 녀석을 놓지 못했다. 그 녀석은 매순간 내게 나타나 날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솔직히.. 그가 날 바보로 만든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바보가 되버렸다. 재진일.. 처음 본 순간부터 난 바보가 되버렸다. 그의 신비한 마력 속으로.. 난, 초대되고 말았다. 녀석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한해와도 같다. 현관을 들어서면 녀석에게 뭐라고 해야할까?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지? 잘못한 건, 나잖아. 내가 바람 난 거니깐. 그래. 이번엔 내가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내가 잘못한 거니깐. 녀석이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건 나니깐. 아, 녀석과 내가 만들어 놓은 보금자리다. 이곳에서 녀석과 난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이곳은 그의 마력의 문이 존재하는 곳이다. 설마 끝났다고 떠나버린 건 아니겠지? 조금은 초조한 마음으로 현관 앞으로 다가선다. 날 기다리고 있을까? 그런데. "토니안, 나 좀 데려가 줄래?" "재진아." "나, 좀 데려가!" "........." "나, 좀!!" "그래. 그래.. 우리 집으로 가자. 재진아, 우리집에 가서.." 현관을 열지 않아도 눈에 선하게 보여진다. 재진이 옆에 딱 달라붙어 쵸콜릿을 까주던 녀석의 형체가 눈에 보여진다. 생글거리는 미소로 재진일 부르던 그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현관이라도 제대로 닫고 짓 걸일 것이지. 얼마나 지났다구, 딴 놈을 꼬셔? 그래도 난 네놈 생각 때문에 힘들었는데. 정작 넌 저 놈이랑 다시 시작할 생각만 했었냐? 그래 끝이다! 끝!! 완전히 끝이야! 나보다 네놈이 더 나빠. 개새끼! 이젠 네 놈한테 미련따윈 없어. 다신 널 생각하는 것도 없어!! 내 비틀대는 걸음은 비상로를 선택한다. 녀석을 그리워하던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녀석의 얼굴을 떠올린 내가 미련스럽다. 나 자신이 너무도 형편없게 느껴진다.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을 굴림하는 재진이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이건 뭐지? 왜 눈이 흐려지는 걸까? 왜 볼이 뜨거워지는 걸까? 이른 아침. 잠에서 갓 깨어난 피부는 차가운 물에 긴장하고 수축되었다. 수원은 살갗이 찢어질 듯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소름 돋는 땀구멍마다 바늘로 찌르는 느낌이 좋아했다. 순간 차갑다는 감각이 있을 뿐, 곧 몸을 움직이면 그 감각은 사라져 버렸다. 욕조에 물이 흔들거린다. 흔들거리는 것은 물뿐만이 아니다. 그의 눈동자도 조금씩 흔들거리고 있다. '제길, 추운 거야? 뭐야? 왜 눈이 아리는 거야??' 똑똑--- "선배, 다 씻었어요? 아침 준비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골라 누구나 후회하게 마련인 결혼을 하게 된다. [우리 수원이 일어나야지~] 아침에 일어나면 향기로운 커피로 깨우던 그의 손길이 떠오른다. '젠장. 하루도 안 지났는데 왜 그 자식 생각이 나냐구!!' "선배, 수건은 거울 뒤 수납장에 있어요." 고이는 눈물이 수원이의 의지와는 다르게 찬 물 속으로 뚝뚝 떨어져 버린다. '왜 내가 널, 생각해야해? 내가 왜??!!' 체력이 줄어든 것인지, 그만큼 세포가 낡은 것인지, 아니면 과로 때문에 지구력이 약해진 탓인지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수원인 무거운 다리를 물 속에서 끌어 올렸다. 미지근한 타일 바닥이 발에 닿는다. 욕조 안에서 재진이와 장난치다가 물을 엄청 먹었을 때가 떠올려진다. 순간 수원이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왜 네가 떠오를까? 자꾸만 네 놈이 생각나. 자꾸만..' + + + + + 통나무집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바람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목이 늘어진 새하얀 폴라티의 성훈이가 생글거리는 눈으로 지용이 앞에 섰다. "요 앞 호수로 산책 나갈거야. 우리 이쁜 고죵, 나의 사랑하는 지용아~" 그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을 했다. 전 같았다면 지용인 하늘을 나는 것처럼 행복했을지도. "지용아, 옷 갈아입는 시간이야." 키득거리며 지용이 곁으로 다가가는 그가 지용이의 숙인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의 눈과 마주치질 않는다. 설사 두 눈동자가 성훈이의 눈동자와 마주한다해도 지용이의 눈동자는 허공으로 도피해 버렸다. 상처투성이 성훈이를 현실로 남겨놓고 말이다. "낙엽냄새가 참 좋아. 봄엔 철쭉꽃이 만발한다고 했었지?" 대답 없는 질문. 성훈인 혼자 바쁜 사람처럼 이것저것 챙기느라 분주하다. "지용아, 파란 색으로 입혀줄까? 아니면 흰색으로 입혀줄까?" 웃옷을 벗은 지용이가 한기를 느끼는지 몸을 으쓱거린다. "그래, 파란 색으로 입혀달라고?" 감기에 걸렸는지 갈라진 음성이 가끔 사래에 걸려 기침을 하곤 한다. "와~ 우리 지용이 참 이쁘네. 뽀뽀해 주고 싶은데 감기 옮을까봐 걱정.." 전에 마스크를 쓰고 지원이를 기다렸었다. 지원이에게 감기가 옮을까봐 고심했던 성훈이였었다. 갑작스레 떠오른 지원이의 얼굴에 열이 난다. 뭘 하던 연결되는 건 모두 지원이와의 흐릿한 추억. 분명히 도로위로 놓고 왔다고 생각했었는데.. "흐흣, 나, 아직 멀었나봐." 힘없이 말하는 성훈이의 고개가 소리없이 지용이의 가슴위로 떨어진다. 두 눈에 극성스레 맺히는 눈물이 성훈이의 입가로 떨어지고 그의 미각은 염분을 경험하고 있다. "지용아, 빨리 나아. 빨리 나서 나 안아주고 키스도 해줘." 속눈썹에 맺혀진 눈물들. 지용이를 꼭 안은 성훈이가 또 다시 속삭인다. "빨리 일어나. 빨리 나서 형을 잊게 해줘. 내 몸에 있는 형의 추억들을 네가 다 없애버려. 혼자 없애려니깐.. 힘만 든다. 흐흣." '내가 지금.. 깨어나 준다면 넌,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줄거니? 내가 지금 깨어난다면 너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너의 눈동자 속에선 나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너의 중심을 나로 만들 수 있겠니? 아니. 아니 그럴 리 없겠지. 또 다시 넌.. 날 혼자 두고 멀리 가버릴 거잖아. 너, 그럴 거잖아. 넌 아마 그럴거야. 오래.. 전부터 넌 그랬으니깐.' + + + + + 정말 끝이 나버린 것일까? 서울로 올라간 그날부터 그를 찾으려 수소문했지만 성훈인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고지용과 함께.. 끝이 날줄은 몰랐다. 정말 이렇게 쉽게 끝나 버릴 줄 몰랐다. 그 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지원은 모른다. 그의 눈은 반쯤 돌아가 있는 상태였고, 그리고 온몸에는 군데군데 게워낸 흔적이 묻혀 있었다. 그래도 그의 손안에는 성훈이의 숨결이 잠시 담겼던 링이 꼭 쥐여져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넘어지며 쓰러지면서도 손안에 쥐어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질질 끌어 별장 안으로 들어갔고, 마루바닥이 닫자마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온몸을 얼게 만드는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별장 안인데도 그는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 진땀을 빼고 있다. "찾지 못하게 잠적했다 이거지? 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는 통곡소리에 가까웠다. 몹시 성이 난 바람이 별장을 날려 버릴 것만 같다. "네 놈이 뭔데? 네 놈이 뭔데 날 이렇게 만들어? 네 녀석이 뭔데!!" 몸이 작게 구부려진다. 반지를 꼭 쥔 손등을 이마에 얹어 손을 바들바들 떨어가며 울먹거린다. 갑자기 밀려드는 서러움이 지원이를 비참하게 만들어 간다. 어쩌면.. 그 자신이 비참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딨어? 어디로 사라져 버린거야? 성훈아, 나 아직 아프단 말이야. 다 낳은 거 아니란 말이야!! 나 아파. 나 많이 아프다구!!" 그는 일주일 새 바짝 말라 버렸다. 겨우 붙어있던 살가죽도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네가 필요해. 너란 존재가 내게 필요해. 모르겠어?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성훈아, 정말 모르겠니??" 흐리게 보이는 너의 얼굴. 지금 내 눈에 네가 보여. 냉한 공기속에서 졸음이 쏟아지는 지원이. '이상해. 넌, 내 앞에 없는데. 내 눈에 네가 보여.. 날 쳐다보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어. 참.. 이쁘다. 너 웃는 거.. 정말 보기 좋아. 근데, 왜 이렇게 졸리지? 왜 이렇게 더울까?' + + + + + 성훈인 여전히 지원이의 작은 세계에 도취되어 자신만의 시간 속을 떠다녔다. 먼 거리를 떨어져 있으면 그 세계를 파괴할 수 있다고 홀로 위안을 삼아가며.. "지용아, 동그랑땡 해줄게." 그는 이 평온한 생활에 빠져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강렬한 눈동자에 얼이 나가곤 했다. 온 가슴과 머리 가득 애달픈 사랑의 감정으로 넘치고 있었다. "지용이도 거들어 줘야해." "........." "모양만 이쁘게 빗어주면 돼." 그는 다시 어떤 우울도, 상심도, 거부한 채 전심전력을 다해 자신의 모든 생명을 현재 눈앞에 보이는 지용이를 향해 아낌없이 받치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아름다운 석양빛은 그의 세계를 떠돌았고 화원 속의 향기로움도 그윽이 그 주변을 떠돌았다. "자, 반죽 다됐다. 지용아, 손 이리 내봐." 지용이의 긴 팔을 걷어 올려주며 작은 미소를 지어주는 성훈이. 그의 고사리 같은 손이 물컹거리는 반죽 한줌을 쥐었다. "자, 이렇게 하는 거야." "........." "따라해 봐." 그의 눈빛은 성훈이를 피하려 든다. 성훈이의 모든 것이 상처 투성인데도. "얌마, 날 봐야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주지." 투정 어린 음성을 담아가며 반죽이 한가득 묻은 손을 지용이의 얼굴에 대었다. 반죽이 차가웠는지 지용이의 눈썹이 움찔거린다. "하하핫, 지용이 얼굴 좀 봐!!" "........." 까르르 웃는 성훈이의 얼굴이 지용이의 두 눈으로 보여진다. 하얀 얼굴이 몹시도 창백하다. 자신을 찾아와 준 날부터 입술이 터 가고 맑았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저렇게 웃고 있는데도 알 수 없는 슬픔이 온 가득 묻어져 있었다. '내가 널 죽여가고 있는 거니? 넌, 내게 오면 생명력을 잃어. 어쩔 수 없이 내게 묶여서.. 조금씩 너의 생명을 내가 받아먹고 사는 것 같아. 아직도 지원이 생각에 몰래 눈물 보이는 널.. 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잡고 있는거니? 내게로 온 순간부터.. 넌, 조금씩 죽어 가는 것 같아. 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아. 그래도 나.. 내 욕심 차리고 싶어. 빈 껍데기라도.. 내 곁에 묶고 싶어. 나, 참.. 이기적이지? 네가 죽던 말던.. 내 곁에 묶어 두려는 나.. 나, 참 나쁜 놈이야. 그렇지, 성훈아?' + + + + + "저 자식 참 뻔뻔하다." "........." 카운터기 옆에 앉아 있던 우혁이가 토니의 어깨를 건들이며 방금 들어온 한 쌍의 남녀를 가리켰다. "저 새끼 대가리 잘못된 거 아니야?" "신경꺼. 장우혁." "재진이 놈, 아직도 그 아파트 안나왔냐?" "나 들어가 있을 테니깐 저 자식 나가면 불러. 에씨, 상대하기도 싫어!" "안승호, 너 좀 이상하다.--+" "뭐가? -_-;" "왜 이재진 일에 네가 더 열을 내냐?" "친구니깐 그러지. --;" "내가 보기엔 친구 이상으로 행동해. 너. -_-;" "어어어어어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씸을. 혁이 너 삐진고야? ^^:" "네가 가서 주문 받어!!" "야, 혁아!! 삐진거야??" "그래, 삐졌다!!" 띠빌띠빌 거리며 무대 뒤쪽으로 들어가는 우혁이를 잡으려다 놓쳐 버렸다. '젠장! 욜라~ 재수 없는 새끼 때문에 오늘 잠 다 잤다. T T' "손님, 주문하시죠." 날카롭게 가늘어진 토니의 시선이 곱질 않다. "은하야, 뭐 마실래? 오늘 우리 취해볼까?" '제길. 생긴 것들끼리 논다더니..-_-;' "토니씨, 잘 지냈어요?" 금발로 염색한 머리로 변해 있었다. 예전에 까맸던 짧은 머리의 순수하게 보였던 그. 하지만 금빛의 머리도 그에게 썩 잘 어울렸다. 얼굴은 좀 더 하얗게 비췄고, 하얀 이를 보일 때마다 알 수 없는 매력이 통통 튀었다. 수원이 토니에게 말을 건네자, 코웃음을 치며 그를 쏘아본다. "네, 아주 잘 지냈어요." "재진인 잘 있죠?" "잘 있겠죠. 뭐." 수원인 송장이 되 버린 것처럼 빈 껍데기만 은하 곁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쌀쌀맞은 토니 곁에 재진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스치듯 얼굴만 보고 간다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이곳을 찾았다. 사실 수원인 재진이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재진인 안보이네요. 여기에 있을 줄 알았는데.." 비앙냥 거리는 음성. 수원이도 만만치 않게 꼬인 음성이다. "아파트 문제 때문에 그래요. 그 녀석 여기 없어요?" "쳇." 수원이가 흘리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여기 있을 것 같은데, 있으면." "너, 정말 모르냐?" 이를 갈며 수원이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토니의 이마에 깊은 홈이 패어 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재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정말 모르는 거냐구!"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함께 사시는 토니씨가 더 잘 알겠죠." '이 놈 말뜻이 모야? 나랑 재진이랑 동거라도 한다 이거야?' "행복하시죠?" 끓어오르는 화가 토니를 못 견디게 만든다. 한 순간이었다. 가냘펴 보이지만 토니의 힘은 제법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원이의 멱살을 붙든 토니가 눈에 힘을 주며 수원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너같은 놈, 못 잊고 망가져 가는 이재진이 한심하다. 그 자식이 왜 너같은 놈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안가!!" "선배 괜찮아요? 이봐요. 무슨 짓 이예요!!" "차라리 잘됐어! 평생 네놈에게 속아 사는 것 보단 지금 끝내는 게 더 나을 테니깐!!" "이봐요!! 그만 때려요!!" "이재진이 어떻게 사냐구? 궁금은 하냐? 그럼 네 놈이 직접가서 봐!! 그 새끼 어떻게 사는지!!" 씩씩거리며 뒤돌아 서는 토니. 은하의 부축으로 겨우겨우 일어선 수원이의 두 눈에 짭쪼롬한 물기가 서린다. "선배, 괜찮아요?" '뭐야? 이재진. 너, 저 자식이랑 같이 사는 거 아니였어? 너, 아파트에 있는 거야? 너 그런 거야?? 그럼 내가 엿들은 건 뭐였어?!' 은하의 손을 털어 내고 일어서는 수원이. 비틀거리는 걸음을 한발자국 앞세우는 그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퍼져 버린다. "선배!!" '날 기다렸던거야! 변심한 게 아니였어!! 날 기다리고 있었던거야!!' 93)******* Rigoletto. 토니가 터트려 준 핏기는 아직 입가에 머금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 앞에 섰을 때 수원이는 첫 만났을 때처럼 온통 설레는 마음 뿐이였다. 가라앉지 못하고 자꾸만 두근대는 심장이 수원이의 허파에 바람을 일으킨다. '떨어져 있는 동안 힘들었어. 하지만 그 시간만큼 네가 나 장수원에게 어떤 존재인지 깨달게 해줬어. 재진아.. 난.' 현관문이 열렸을 때 피곤해 보이는 그가 보였다. 건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재진아!" "........." 눈물이 나도록 반가운 음성으로 그를 부른다. 보고 싶었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수원이의 시선이 재진일 쫓고 있는데, 그는 먼 곳을 쳐다보고 있다. 재진일 쳐다보는 눈이 자신을 향해 고정시켜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데도.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 먼저 입을 연 쪽은 수원이였다. 수원인 고개를 들며 어린애와 같은 솔직한 눈으로 말했다. "그때 내가 한 말. 생각 없이 했던 말인데, 너무 심했었지?" "........." "나, 용서해.. 줄래?" 또 침묵이 흐른다. 재진인 담배연기만 토해낼 뿐 아무말도 내 뱉질 않았다. 그는 말도 없이, 미동도 않고 처연한 표정이 되어 넋을 놓고 있었다. 수원인 웃었지만 그것은 쓴웃음이었다. 말 좀 해봐. 응? "화.. 많이 났었구나." "........." 수원인 이를 꼭 물었다. 재진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느껴진다. 불안해 오는 가슴이 쓰리기 시작한다. 재진이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자 수원이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왔다. "재진아.." "넌 사랑이란 게 영원하다고 믿냐?" "........." 재진이 담배연기를 잠재우고 수원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만져지지 않는 것. 수원이 넌 그런 것 따윈 믿지 않았어. "널 만난 후부터.. 난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었다." "........" "그런데.." '그런데?' "이젠.. 안 믿어." "재..재진아!" "짐은.. 내일 와서 가져갈게." "이..이재진!" 재진이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사람을 저리게 하는 고통이 담겨져 있었다. 수원이에게 또 한번 등을 보인다. 제발, 등 보이지마.. "재진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 "정말 잘못했어. 내가 잠시 미쳤었나봐." "뭘 잘못했는데?" "그건..." "나, 이제.." "......?" "네가 싫어졌다." "재..재진아?"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자. 너랑 나, 시간이 필요해." "내가 잘못했어. 재진아!" "........." 차갑게 들리는 재진이의 음성. 그는 떠날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 같았다. 여린 눈물에 흔들리지 않도록 쳐다보지도 않는다. 현관으로 향하는 재진일 지켜보며 수원인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차마 붙잡을 용기가 나질 않는다.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아니, 그를 붙잡고 애원한다는 건 지금 두 사람 관계를 약화시킬 뿐이었다.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겠지? 우리.. 끝난 건 아니지?" 현관 닫히는 소리가 수원이의 귓속으로 들어올 무렵. 그의 눈은 이미 흔건이 젖혀 있었다. 이런 눈물은 수원이에게 흔한 눈물이 아니다. 수원인 타인이 비추는 곳에서 눈물 따윈 보이지 않는다.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에 대해 생각하면 되는거지? 우리 끝난 건.. 아니지? 그렇지. 재진아? 그렇다고 말해 줘."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수원일 위로하는 건 없다. "우리 끝난 건 아니야. 그렇지?" 그는 아픔을 대처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울음만 참아내는 것. 그는 이것밖에 할 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거야.. 사랑해. 재진아, 사랑해.." 두려워하면서도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기대를 갖고 싶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 널 만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많은 시간도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수많은 너의 변명 지금에서에야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 나는 원망스러워.. 언제부터인지 차가워진 너의 말들에 조금씩 무뎌지는 걸 너는 알고 있었니? 더 이상 무슨 말도 이젠 필요 없겠지. 이미 너는 다른 사랑 준비하고 있을까? 누군가 얘기했어. 영원한 건 없다고. 이해하기 힘들다면 서로 잠시 헤어져 있어도 돼. 하루하루 지쳐 가는 내 모습 보면 점점 너에게만 커져 가는 미움뿐인데.. 싫어졌다고 하는 너의 차가운 그 말 한마디. 가슴속에 진실 아니란 걸 알아. 난 믿어. 사랑이었단 걸. 』 + + + + +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지용이를 확인하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둔 채 창문 앞에 섰다. 해가 얼굴을 내밀려는 시각이었다. 해뜨기 전이라 그런지 보일러는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다. "넌 운명이란 걸 믿니? 사람은 살면서 운명적인 만남을 세 차례 갖게 된대. 태어나면서 부모님과의 만남. 철이 들 무렵..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을 꼭 닮은 예쁜 아이를 만나게 된다는 것. 그런데.. 난 사랑하는 사람이 둘인 걸. 흐흣." 먼 산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태양이 대지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형은.. 어떻게 지낼까? 지금도 아플까? 아프면 안 되는데.. 많이 아프면 안 되는데.. 아니 조금도 아프면 안돼. 형은 아파선 안돼. 형이 아프면 난.. (난 더 아파. 형보다 곱절로..) 형이 어제 꿈속에 나타났었다. 울고 있었어. 그것도 두 볼이 다 젖을 정도로.. 꼭 어린애 마냥 울고 있었어. 강했던 형이.. 너무 슬프게 내 이름을 부르며..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울고 있었어." 창가를 서리는 성애. 성훈이의 한숨으로 층을 이루는 성애. 그의 한숨으로 창가엔 길게 강이 생겨 버린다. 작은 강줄기는 창을 가로지르며 좀 더 커다랗게 변했고, 성훈이의 어지러운 마음처럼 방황하며 내려간다. 일직선이 아닌 삐뚤 빼뚤. "흐흣. 나 정말 웃긴 놈이다. 형 곁에 있을 땐 지용이 네가 생각나고, 네 곁에 있을 땐 형이 생각나니. 정말 배꼽 빠지게 웃기다. 그지?" 잠시 소리 없는 웃음을 흘러 보낸다. 가습기가 고장난 방처럼 몹시 건조한 웃음. "지용아, 널 사랑해. 그리고 지원형도 사랑해. 두 사람 다 내겐 너무도 가슴 벅찬 사람들이야. 내 목숨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소중하고 아까운 사람들이야. 그런데.. 이젠, 어느 쪽이 진짜 사랑인지.. 나도 모르겠어. 나, 참 한심하지? 근데.. 지용아, 형 곁에서 널 생각할 땐 이렇게 아프진 않았는데.. 네 곁에서 형을 생각하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도.. 너무 많이도 아파. 너무 힘들어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눈에 벌레가 들어갔는지.. 자꾸 흐려지기만 하고. 당장이라도 형 모습. 숨어서라도 보고 싶어. 아주 쪼금만.. 보고.. 하핫. 아니야. 아니야.. 나 지금 잘하고 있어. 흔들리면 안돼. 지용이 너 깨어나면.. 네가 깨면.. 난 형을 잊을 수 있을거야. 아마도.. 그럴 수 있을거야." 자신없는 음성. 미소를 머금은 그가 또 다시 긴 한숨을 내 뱉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눈을 뜨지 못한 채 사선으로 눈물을 그리는 그를 의식하질 못한다. 지용이의 귀가 열려 있었다는 것을.. 성훈이는 모른다. + + + + + “ 뿌연 담배연기 속에서 너의 모습을 찾아본다. 낯선 거리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내가 보인다. 내 존재함을 느끼게 해주는 네가 내게서 멀어져 버렸다. 네가 떠나려 하는 곳에 무엇이 존재할까? 그 곳에... 내가 있니? 내가 존재하는 곳이니? 내가 너의 전부였잖아. 그렇지, 성훈아? 성훈아, 우리 그만 아프자. 그만 엇갈리고 너와 나.. 이제 행복하자. 우리 둘.. 행복할 수 있을거야. 행복할 수 있어.” "우리 지원씨! 우리 지원씨 어때요? 괜찮은 거죠? 그렇죠??" "........" 서박사가 보이자 실성한 사람처럼 그에게 달려드는 은주의 몸짓이 애처롭다. "지원씨. 우리 지원씨, 괜찮은 거죠?" "........" "피곤이 누적되서 쓰러진 맞죠? 그렇죠? 박사님??!!" 순간 은주는 서박사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았다. "고통이 심하셨을 텐데, 오로지 정신력 하나로 버텨내신 듯 하군요." "........" "이렇게 쓰러진 적이 몇 번이나 있었죠?" "박사님?" "공복인대도 구토증세가 있다거나 갑자기 언어장애를 일으킨 적은 없었나요?"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검사를 자세히 받아 보고 말씀 드려야 겠지만.." "과로잖아요. 과로로 쓰러진 것.. 뿐이잖아요?" "아무래도 캔서.. 같습니다." "캔서?? 캔.. 캔서라면?" 김집사를 제치고 그녀는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지원인 이불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지원의 유모가 그녀의 등에 얼굴을 묻고 참았던 울음을 게워 올렸다. "흑. 아씨, 우리 도련님 어쩌면 좋죠? 우리 가여운 도련님. 흐흑.." 지원의 팔에 꽂혀진 링겔 주사바늘 위에 붙여진 반창고를 조심스럽게 만지고 있던 은주의 눈커플이 무겁게 움직인다. "유모. 우리 지원씨 어떻게 되는거래?" "흐흐흐흑." "우리 지원씨, 괜찮은 거겠지? 강한 사람이니깐. 괜찮을 거야. 지원씬 강하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지? 유모??" "우선 면밀한 검사를 받도록 하세요." "흐흐흑.." "시간이 없습니다. 암세포가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과로일 뿐이예요! 박사님도 과로라고 하셨잖아요!!" "간단한 검사에서.. 암세포가 발견 됐습니다. 급속도로 퍼지는 상황이라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알수가..." 등뒤에서 서박사의 힘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유모는 은주의 등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고 잠긴 목소리로 은주의 귀를 할키고 지나갔다. "우리 가여운 도련님마저.. 놓쳐 버리면... 전 어떻게 사모님을 뵐지.." 버티고 서있던 다리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면서 은주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니야. 지원씬.. 일어설거야. 쉽게 무너질 사람. 아니야. 지원씬.. 강하니깐 일어설거야. 강하니까!" 은주의 울먹임 뒤로 지원의 숨소리가 거칠게 이어졌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의 모습. "당신은 일어날거야!! 이건 당신하고 어울리지 않아!!!" 거친 숨소리를 막아주는 산소 호흡기. 산소 호흡기 속으로 숨겨지는 지원이의 입술. 그 입술이 가려지기 전, 그의 입술은 한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소중하고 소중한 나머지.. 아끼고 아껴서.. 자신의 남겨진 시간을 함께 해달라며 호소하는 듯.. 너무도 애절하게.. 성훈이.. + + + + + "이제 그만 들어가." "응." "잘.. 지내." "저기, 재진아." "........" "우리 끝난 거 아니지?" "........" 수원이의 질문에 그는 아무말도 않는다. 단지 쓸쓸한 미소만 보여줄 뿐이다. 커다란 트렁크에는 재진이의 짐이 가득 들어 있었다. "재진." "은하씨, 좋은 여자 같더라." "........." "잘해봐." "........." 수원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눈에 어리는 액체가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리고.. 단지 내 주차장으로 조금씩 사라져 가는 그가 아주 작게 보일 때까지 수원인 그대로 서서 그를 배웅했다. '잠시 떨어져 있는거지? 우리 끝난 거 아니야. 그렇지?' 재진이의 형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난 긴 시간동안 목욕을 했다. 문을 따고 들어와선 욕조에 물을 받고 한참동안 욕조바닥에 앉아 생각했다. 재진이.. 나의 재진이. 무덤덤한 나의 밤 외출에 침묵이 흐른다. 소름이 돋아 날만큼 차가운 물 속에 들어앉아서 온몸을 떨며 나는 소리 죽여 울었다. 참으려 해도 눈물은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어디에 그토록 많은 눈물이 숨어 있었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재진이가 뒤돌아 서던 그때.. 나는 말없이 그를 배웅했다. 듬직했던 어깨가 좁게만 느껴졌고 쓸쓸하게 웃던 재진이의 눈은 나의 행복을.. 내가 섞일 다른 세계를 축복해 주고 있었다. 날 소리 없이 놓아주는 재진이의 손이 나의 손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의 눈빛속에 내가 온전하게 자리잡지 못했다는 것을..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잘못이라는 것이 지금 내 눈에 눈물을 만들어 낸다. '어떡하지? 재진아. 나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아무 것도 떠올리지가 않아. 내가 뭘 하며 살았는가도, 뭘 하며 살아야 하는 가도..' 두 개로 나뉘지는 것. 이것이 과연 이별일까? + + + + + "나 지금 출판사 갔다가 올거야." 지용이 옆에 앉아선 눈웃음을 치는 성훈이가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 할텐데." ".........." 미술관 옆 동물원의 한 장면이 나오자 성훈이는 채널을 고정시켰다. "같이 갈래?" ".........." "그래, 나 혼자 얼릉 날라갔다 올게." 습관어린 한숨을 쉬고 일어서는 성훈이가 목도리를 목에 걸치며 현관으로 걸어간다. "2시간 정도면 될 거야. 나 없어졌다고 징징대면 안돼." 자신을 보지 않는 사람의 뒤통수를 대고 씩 웃으며 현관을 빠져나간다. 그런 성훈이의 자췌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일어서는 지용이가 거실로 연결된 테라스를 주시한다. 하얀 티브론에 몸을 실은 성훈이가 보인다. '지원이에게 가는거냐? 그 녀석 보고싶어서 가는거냐? 지금 내 앞에서 뻔뻔스럽게 그 자식한테!!' 고집스럽게 짓이겨지는 입술. 꽉 움켜진 주먹. 자신의 애마가 도로를 타고 있다. '이제..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 이것이 사랑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성훈이 네가 내 시야를 벗어나면 난, 항상 불안해지거든. 널.. 숨막히게 하는 내 감정. 널 잡아두기 위해 아픈 척 하는 내 가식된 몰골. 후훗. 이것이 은지원이 말하던 집착인가? 하지만.. 성훈아. 난 너무 오랫동안 한곳을 봐왔어. 처음엔 사랑이었지. 난, 진심어린 사랑이었다. 그런데.. 넌 너무 잔인했어. 내가 믿던 순수한 사랑을 넌 짓밟았고 내 감정을 퇴색 시켜버렸어. 그래서.. 지금 이 모습으로.. 이 썩어빠진 이기심으로 널 붙들고 있는거야. 네가 날 떠나면 죽어야 한다는 일심으로 말이지. 이것이 너와 날 힘들게 하는 요인일거야. 하지만 난 멈출 수가 없어. 네가 없는 난.. 상상조차 할 수가 없으니깐. 넌 이미 나. 제2의 고지용이니까.' + + + + + "역시 성훈씨라니깐! 마감일 잘 지키는 사람은 성훈씨 뿐이야." "국장님, 오늘따라 칭찬이 과하시네요. 하핫." "아참, 성훈씨. 성훈씨 뵈러온 분이 계셔." "절요??" "어떤 여자분이시던 걸. 참 미인이야." "여자요?? 그그그럴 리가 없는데.. ^^:" "성훈씨 능력 좋던걸. 아, 저분이야." 성훈이의 눈동자가 뒤로 향했을 때, 긴 생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얼굴이 몹시 거칠어진 지원이의 아내가 슬픈 얼굴로 서 있었다. “ 형, 이곳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이 텅 비워 버렸거든.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하도록 내 머리에 약을 써 버렸어.. 그래서 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흐흣. 거짓말도 쉽지가 않구나.. 솔직히.. 나, 형이.. 너무 보고싶어. ” 94)****** Smile again. (†) "부탁합니다." 커피 잔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무슨 말을 꺼낼지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찻잔 속의 커피 향이 조금씩 수그러들때 쯤 성훈이의 손장난은 멈췄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네요." 지원이란 이름에 가슴 깊은 곳에서 뭔지 모를 어떤 감정이 물결치며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지원이의 깊은 눈동자. 차가운 음성. 그리고 어렵게 볼 수 있었던 인상적인.. 아이같은 미소. 보이지 않아도 그 이름 하나는 마치 파도처럼 성훈이의 가슴 안에서 계속 꿈들 거리며 올라오다, 점점 멀리 사라져 갔다. 그의 가슴속에는 그렇게 파도가 사라진 후의 흰 포말만 남아 있었다. "지원씨가 당신을 찾아요." 이를 악물며 힘겹게 꺼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방자한 눈빛은 연신 성훈이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전, 형 볼 이유가 없는데요." "........" "정리했어요. 전.." "당신만 찾아요." "........" "당신을 꼭 만나고 싶데요." 울음을 참고 참으며 뱉어내고 있다. 성훈이를 쳐다보며 애원하고 있었다. 지원이를 한번만 찾아달라고. "만나고 싶지 않아요." "........." 더 이상 이공간에 앉아 있다가는 성훈이도 눈물이 쏟아져 버릴 것만 같다. 우울하다. 몹시 우울해서 소리를 내서 울고 싶다. 그래서 성훈인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일어서서 죄송하네요." "........" "형에게 저 만났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 "그럼." "지금.. 지원씨, 많이 아파요." 울먹이는 음성. 은주가 쥐고 있는 손수건이 눈가로 향하고 있었다. 모진 못질로 붙박이 인형으로 붙어버린 듯 하다. 가슴만 내려앉았을 뿐인데, 하늘을 등진 사람처럼 온 몸에 무게감을 느낀다. "형 곁엔.. 당신이 있잖아요." "........." "전 형을 찾아가 봤자, 도움이 되질 못할거예요." "........." "당신에게도.. 그리고 뱃속의..." "제발 부탁합니다." "........." "그 사람.. 성훈씨 보기 전에는 치료도 안받겠다고 해요." "........." "그 사람 좀 살려주세요. 제발!" "........." "부탁합니다. 그 사람 한번만 찾아 주세요.." "죄송해요." '받아 들릴 수 없어요. 형 얼굴을 보면.. 형 곁에 머무르고 싶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요. 형은 강하니까,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지금 형은 저처럼 아픈 것 뿐이예요. 그런 형을.. 이젠 당신과 형의 아기가 치료해 줘야 해요. 제가 아닌 형의 가정이.. 형을 지켜야 해요.' 성훈이의 마음은 곧 구름으로, 연기로, 바람으로 변해 차창 사이로 날아가 버렸다. 그의 손이 차가워지고 그 대신 가슴은 뜨거워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눈앞의 도로가 뿌옇게 변했다. 눈물이 솟아오른다. 차가운 손으로 자꾸만 닦아내도 눈물이 솟아올랐다. '아프지 말라고 했잖아!!' 끼이이익--- 도로 한 중앙 멈춰진 티브론. 뒤를 따라오는 차가 급정거를 하며 클라션을 눌러댄다. "왜 아픈 거야!! 왜!!" 핸들을 감싸고 하얀 얼굴이 그곳에 묻어져 버린다. 길을 잃어버린 어린애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는 자신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그의 생각속엔 오로지 지원이의 밀납 같았던 얼굴뿐이다. "아프지 말라고.. 아프지 말랬잖아.. 흐흑.."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성훈인 떠오르는 얼굴에 아이같은 미소를 대입해 본다. 아파오는 가슴. 그는 손가락 하나 꼼짝 할 수가 없다. 숨가쁘게 넘쳐드는 눈물만이 그를 에워쌀 뿐 그의 등을 토닥거려주며 그만 울부짖으라고 위로하는 건 없다. 한참 그렇게 정지되어 있자, 귀가 따감도록 두들기던 손들이 그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봐요!!" "이보세요? 괜찮아요??" 차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도 그는.. 한동안 그렇게 멈춰 버렸다. 울어 버렸다..... 『 우연히 너를 다시 보게 된다면 영원히 놓치지 않을거라 다짐해. 하지만 난 묻고 싶어. 나와 함께했던 순간들 아직 니 맘속에 남아 있는지.. 항상 언제나 나의 것이라고 믿어 왔던 너 알아. 이젠 정말 이별인걸. 괜찮아.. 지금 모습처럼 행복하면 돼.. 다시 나의 눈에 눈물 흘러도.. 꿈에도 웃는 모습으로 나를 찾아와.. 제발.. 너를 걱정하지 않게. 아직도 나의 가슴속에 못 다한 사랑. 이젠 모두 추억으로 보낼게.. 』 + + + + + "그만 마시라고 말려!!" 재진이에게 술을 따라주는 우혁이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는 시선은 무시해 버린다. "자, 이재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마셔라~" "야, 장우혁! 너 자꾸 그럴래?" "안토니, 입 닥치고 청소나 해.-_-;" 흐느적거리는 손동작. 담배를 집는 재진이의 손엔 힘이라곤 없었다. "불.. 빌려줘?" 밀려드는 취기가 그를 삼키는 것 같다. "야, 원생. 라이터 가져와!" "우쒸, 내가 왜 원숭이야!!" "어쭈, 너 지금 말대꾸 하는거냐?" "그..그건, 아니쥐만.--+" 우혁이의 눈빛에 살기를 읽고는 토니는 잽싸게 물걸래를 내려놓고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우혁이 앞으로 라이터가 건네지자, 라이터를 켜고 재진이에게 내밀었다. 담배를 집고 있는 손에 미미한 경련이 일고 있다. 한번 깊게 빨아 보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더 마실래? 더 따라 줘?" 우혁이의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재진이가 곧 게워낼 것만 같다. "화장실 데려다 줘?" 아무말없이 끄덕이자 우혁인 한숨 빨고 남은 담배를 잿덜이에 비벼 껐다. 우혁이의 부축으로 환자마냥 끌려가는 재진이의 뒷모습을 보는 토니. '제기랄.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만 가네. 우혁이놈, 재진이 위로 좀 해달라니깐 오히려 부축이기만 하고.. 에라~ 모르겠다. 그 재수없는 새끼. 집에 있으려나? --;' + + + + + 멍하니 창가에 서성거리는 발걸음. 재진이가 떠난 공간엔 수원이 혼자만 덩그란히 남겨져 있었다. 그가 가버린지 몇 일이 지났을까? 재진이가 태우다 만 담배꽁초는 여전히 잿털이를 채우고 있다. 수원이의 손을 뻗는 곳에는 항상 그의 존재가 남겨져 있었다. "네가 떠나는 날, 마음이 무너져 얼마나 울었는지 넌 모를거야.." 공허한 웃음을 흘려내고는 소파위로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어둠은 수원이를 에워싸고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버린다. 혼자이기에 더 싸늘한 공간. "네가 가버린 후, 밥도 먹기 싫고.. 공부도 하기 싫어.. 병신처럼 울기만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널 생각하면서.. 우는 일. 훗, 하핫." RRRRRRRR---- 침묵의 공간에 울러 퍼지는 인공음. 잔뜩 긴장된 눈빛으로 신호음이 끓기기 전에 날렵하게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얼~ 집에 있었네.." 장난스런 토니의 음성에 실망하는 눈동자에 또 하나의 이슬이 고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널 생각하면서.. 우는 일 뿐이야..' “ 눈물 아닌 웃음짓는 널 그리워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넌 모를거야. 나도 내가 이렇게 많이 울 줄은 몰랐거든..... ” + + + + + 이른 새벽 무렵. 창 밖은 아직도 새까만 어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며칠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영혼이 비틀거리고 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에게선 술내음이 강하게 풍겨져 나왔다. 잠시나마 아픈 가슴을 달래 보기 위해 술이라는 것에 의지한 것 같다. "지용아, 미안하다. 오늘 성훈이가 많이 취해 버렸네. 헷헷." 비틀거리는 몸으로 지용이 앞에선 성훈이가 헤죽헤죽 웃으며 딸꾹질을 해댄다. "우리 이쁜~ 지용이. 나 좀 쳐다봐." "........" "나 좀 쳐다봐 줘.." 하얀 얼굴엔 검은 눈동자가 머무르지 않는다. 성훈이의 두 손으로 얼굴을 고정시켜도 눈빛만은 거부하고 있었다. "왜, 날 쳐다보지 않니?" '난 항상 널 보고 있어. 성훈아. 항상 널 바라보고 있어.' "내가... 그렇게 미워??" 성훈인 몸을 숙여 지용이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직감으로 그의 신경에 와 닿는 그 무엇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따뜻한 손에 스며든 아픈 눈물이었다. "힘들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그가 힘들고 힘들게 흐릿한 시선을 모아 입술을 조그맣게 벌리곤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왜 날 쳐다보지 않아??" 그런 성훈이에게 지용인 벌써 희부연 안개에 휩싸인 듯 흐려오는 시선으로.. 아무 말 없이 성훈이를 몰래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너, 계속 이러고 있으면.. 나, 형에게 가 버릴지도 몰라. 형에게 뛰어가고 싶을지도 몰라. 나 아직도.. 형이.." 성훈이의 손은 눈물을 감추기 위한 도구로 변해 버린다. "미안해.. 미안해. 지용아, 나 정말 나쁜 놈이지? 네 앞에서 이런 소리나 하고.. 나 정말 나쁜 놈이지?? 그렇지??" ".........." "내가 생각해도.. 나, 정말 나쁜놈이야.." 저 하얀 손 뒤로 가득 흘러내릴 눈물을 생각하니 지용이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버린다. '나, 아직 너에게.. 손 뻗으면 안 되는데.. 내가 다 나았다는 거 알게되면.. 넌 날아가 버릴텐데.. 나, 아직 널 쳐다보면.. 안 되는데.' 지용이의 손이 성훈이의 손을 덮었다. 하얀 얼굴이 불에 댄 듯 놀라며 그를 올려다본다. 그들은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마주보기만 했다. 그러다 성훈이 자신의 심정을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웃어보려 애쓰며 낮게 말했다. "훗, 많이 취했나 보다. 이제 환상까지.." 쓴웃음을 뱉는 성훈이에게 지용인 고개를 흔들며 눈물을 글썽였다. 지용이의 눈빛은 너무나 간절하고 애달픈 것. "지용아, 나.. 죽었으면 좋겠어." ".........." "그냥.. 이대로 고통없이..." 지용이의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가리면서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머리를 묻었다. "지용아, 죽고 싶어." "........"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을까?" "........" "죽으면 아픈 것도 사라지겠지. 그렇지?" 한참을 바라보던 지용이가 어쩔 수 없는 격렬한 감정에 못 이겨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그들의 입술, 그들의 눈물, 그들의 고통.. 그건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짙게 배어 있는 입맞춤이었다. 95)******* 예감 (豫感) ― <上> 화창한 날씨.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는 유난히 맑았고 공활한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유난히 높게만 보였다. 정오를 알리는 쾌종시계가 잔잔한 종소리를 선사해 준다. "너 이뻐서 여기 부른 거 아니야. 재진이가 불러 달라고 한 것은 더욱 아니고." 청량한 모습. 재진이의 야윈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토니가 인도해 준 방에 들어서자마자 수원인 숨을 멈춘 채 그를 바라만 보았다.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를 그리워하며 흐르던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숨을 깊이 쉬고 재진이가 누워 있는 침대로 향한다. 한걸음 한걸음 다가설 때마다 수원이의 입술이 조금씩 흔들거린다. '눈물은 보이지 말자.. 재진이가 눈을 뜨면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하자. 재진이가 눈을 뜨면...' 재진이 앞에 서자 수원이를 지탱하던 근육들이 힘을 잃어 그에게 안기라고 한다. "재진아.." 수원인 팔을 내밀며 그윽한 음성으로 그를 불렸다. 눈을 떠서 자신을 바라봐 달라며... 수원이의 음성에 감은 눈을 살며시 뜨는 재진이의 눈동자가 수원이의 시선과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흐른다. 입을 꾹 다문 채 수원이를 쳐다보는 재진이의 눈이 잠시 그를 담아 두는가 싶더니 이내 피해 버린다. "얼굴이 반쪽이 됐네.." ― 힘들었던 거야.. 그치? 너도 내가 없으니깐 힘들었던 거지? 그렇지? "........." "재진아, 나야. 수원이.. 나 좀 봐바.." ― 피하지마. 눈물 나려고 하잖아.. 나 좀 봐바.. "........." "보고 싶었어.." "........." "너무.. 너무 많이 보고 싶었어.." "난 너 잊어 버렸어." 더 이상 재진이를 내려다볼 용기가 나질 않는다. 눈물 따윈 보이지 않겠다고 두 주먹을 꼭 쥐어 봤는데도 모두 허사일 뿐. 수원이의 두 눈에 펼쳐지는 건 짙은 안개가 거친 세상. "날 보고 말해." "똑똑하신 분 아니셨던가? 잊었다고 말했잖아." 재진이의 올라간 입꼬리는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심속 깊은 곳의 곡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미소로 숨기려 들지만 수원이는 느낄 수 있었다. 저 감은 두눈에도 무언가가 맺혀 있을거라는 믿음. "날.. 보고 말하라구!" "........." "이재진 날 봐!!" 수원이의 손은 재진이의 얼굴로 급히 내려앉아, 자신의 시선앞으로 끌어당긴다. "잊어 버렸다고, 아니면 잊어버려야 한다고 널 되새기는 거야뭐야??!!" "이거 놔." "날 봐! 날 보고 말해!!" "보고 싶지 않아. 나갓!!" 재진인 수원이의 손을 손톱으로 할퀴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는 재진이의 얼굴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안 재진인 '제길' 이란 단어를 입안으로 자꾸만 끌어들인다. "믿어 주지 않아도 좋아.. 뭔하든 너만 생각나. 생각안할려고 해도 너만 생각나. 너만 내 눈속에서 아른거려.." ".........."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눈물만 나.. 네 얼굴이 보이면 눈물이 떨어져.. 마르질 않아." ".........."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나가라고 했잖아! 그만 중얼거리고 나가!!" "그럼 난.. 난 어떡해?" "그건 네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야. 해답은 네가 찾아야 하는거야. 그것마저 내가 말해줘야해?" ".........." "너랑 마주치기도 싫어. 완전히 널 잊었단 말이야." ".........." "그러니깐.. 돌아가." "날 믿어줘. 한번만 기회를 줘.." ".........." "나, 잘할게. 나 너만 쳐다보면서.." "쉬펄 그만 좀 떠들어!!" 수원이의 손을 털어 버리고 창밖을 내다본다. 창으로 비춰지는 수원이의 실루엣이 덜덜 떨고 있다. 자신의 두 손을 쳐다보며 정지된 상태로 떨고 있다. '난 기회를 주고 있어. 시간을 가지고 너만의 세상을 선택할 기회를 주고 있다구. 넌 날 만나기 전에는 일반이였으니깐.. 네가 일반을 선택해도 내가 널 원망할 자격따윈 없어.. 내 세계로 끌어 들었던 나 자신을 원망할뿐. 이 세계에 중독된 내 자신을 고문할뿐.. 난 널 원망할 수가 없어.. 지금.. 네가 느끼는 통증은 나때문이 아닌 네 자아가 탈선을 했기 때문일거야. 내 세계에 중독된 널 견딜 수 없는 것뿐. 나 때문은 아닐거라구. 날 붙들려고 하지마.. 너의 외로움의 제물로 쓰지 말란 말이야... 더 이상 너의 철학속에서 존재하고 싶지 않아.. 너의 디스켓속에 들어가기 싫어..' 문소리가 났다. 부담스럽지 않게 조심스럽게 사라져 간다. 재진인 잠시 허탈의 늪의 빠져 들었다. 수원과의 첫 만남을 생각했다. 유리알처럼 따뜻하게 빛나던 대학로의 오후와 그의 수줍은 음성이 떠오른다. 그것이 어쩌면 한순간의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이.. 그의 대한 갈증으로 목이 탄다. 보고 싶었다. 끌어안고 소리치고 싶었다. '사랑해.. 사랑해.....' 수원이의 수줍은 시선에 대한 그리움이 분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참아내기가 힘들정도로.. 하지만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재진인 그래야 한다고 결론지어 버렸다. 그의 안면의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쓸쓸한 웃음이.. 서글픈 웃음이 흘러 나왔다. "잊을 수 없어. 잊고 싶지도 않아.. 잃고 싶지 않아..." 팔등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미온수를 느끼며 재진인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수원이가 걸어 나간 곳을 뒤쫓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재진이가 누워 있을 방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 가득히 젖혀 있어서 따갑기까지 했다. "나, 어떻게 해야할까? 뭘해야 하지?" 답변없는 물음을 던지고 한참을 서 있었다. 중심을 잃을 듯한 기세로 서 있는 것이 안스럽기까지 하다. 몇분정도 그렇게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는다. 무거운 침묵만이 수원이의 머릿속에 채워져 있었다. 좁은 복도 끝으로 저녁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원인 그곳을 향해 걷는다. "재진이가 너한테 왜 질려버렸는지 이해가 간다. 이해가 가~ 그것밖에 기다릴 줄 몰라?" 날카로운 토니의 음성이 수원이의 뒷통수를 찔려댄다. ".........." "저 자식이 아파트에서 널 기다렸던 시간이 얼만줄은 아냐?" ".........." "네놈이 갖은 사랑이란게 고작 몇분이냐? 그것밖에 안됐어??!!" ".........." "네놈 생각에 술이나 퍼마시는 저 자식이 불쌍하다. 너 같은 새끼랑 끝난거 축하해 주고 싶다구!!" ".........." 부어대는 소리에 수원이 움찔하며 뒤돌아 섰다. "진짜 끝난건지 확인하려 온거라면 빨리 사라져줘. 소금이나 뿌리게!" "그가 필요해.." ".........." "재진이가 필요해.." 울먹이는 음성에 토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진다. 토닌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재진이의 문을 가르키고 있었다. "기다려.." ".........." "재진이가 문을 열때까지.." ".........." 수원인 재진이 있는 방문을 쳐다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내 가슴과 너의 가슴이 통하는 모든 문이 닫혀진건 아닐거야.. 지금까지.. 널 기다렸던 적이 있었던가? 후훗.. 생각해 보니.. 없구나.. 네가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늘 함께 있을 수 있는 네가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이제서야 깨달아.. 기쁨과 고뇌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너.. 손을 내밀어 만질 수 있었던 너.. 눈을 뜨면 부드럽게 다가오는 너의 장난스럽던 웃음.. 왜 전엔 이 모든 것들이 소중하단 생각을 못했을까? 왜 이제서야 너의 자리를 커다랗게 생각하는 걸까? 왜 이제서야 널 사랑이라고 깨달은 걸까.. 왜 이렇게 늦게....' 수원인 조심스럽게 걸어와 재진이의 방문앞에서 소리없이 무릎을 꿇었다. '문을 열어.. 재진아.. 문을 열면.. 내가 있어. 네가 문을 열 때 외롭지 않게.. 이렇게 널.. 기다리고 있어..' 수원인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았으나 오히려 정신이 맑았다. 그가 열어줄 문을 기다리며 달콤한 생활의 예감속으로 달려든다. '이제부터 만드는 거야.. 너와 나의 철학은....' + + + + + '죽어 간다가는거.. 이런 느낌인가봐..' 지원인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미풍을 맞으며 쓴 웃음을 내뱉았다. 병실안은 지독히 하얀색으로만 치장되어 있다. 넓게만 느껴지는 탓인지 어깨를 움추리게 된다. '네가 날 지켜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내곁에서 쫑알 된다면.. 참 좋을텐데...' 그는 비로써 울음을 떠뜨렸다. 야윈 어깨를 들먹이며 조금씩 조금씩 울음을 내뱉았다. 그의 눈물은 맑은 샘물이었다. 서서히 가슴을 차오르는 차가운 겨울비같았다. '지켜줘. 나 무서워.. 성훈아.. 무서워.' 가을은 없었다. 가을이 머물렸던 자리에는 겨울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는 무작정 거리로 나가 성훈이의 얼굴을 찾고 싶었다. 낙엽이 하나 둘 흩어지는 거리에서 오래오래 드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던 그 얼굴.. 하늘을 닮은 그의 얼굴을 찾고 싶었다. 지원이의 세상속에 유일한 하늘이 된 그를 찾고 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하늘이 아니고 투명한 슬픔일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늘은 끝없이 끝없이 높아지면서 지원이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그의 키는 더 이상 클 수 없다는.. 인간적인 절망을 가르친다. 더 이상 오만해지면 안된다고 충고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일뿐이라고.. '날 혼자 두지마. 너무 깜깜해. 성훈아.. 손을 잡아줘. 무서워.. 무서워..' + + + + + 예정된 희극을 구경하고 난 후 같았다. 웅크리고 앉은 채 꼼짝도 않는 성훈이는 더 이상 입을 열 생각이 없나보다. 저렇게 앉아 있는 시간이 다섯 시간을 넘기고 있는데.. 다리에 쥐가 날 때도 됐는데. "성훈아.." 성훈이를 지켜만 보던 지용이가 용기를 내서 그를 부른다. "........." "내가.. 잘못했어." 잠잠하다. 서늘한 그늘이 가슴을 훑어 내린다. 지용인 한숨을 길게 내쉬며 성훈이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성훈인 자세를 바꾸지도 않고 그대로 앉아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말 좀 해." "........."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는 사람처럼 입술에 자물쇠를 채운 것 같다. 무거운 분위기. 지용인 성훈이의 어깨를 꼭 쥐어 본다. "말 좀 하자구!"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껀데?" "........." 저러다 쓰러질 것 같다.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고집스럽게 닫아져 있다. 자신을 건들이지 말라는 듯.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듯 경계망을 치고 있다. "말 좀 하잔 말야!! 강성훈!!" "........."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을 가하고 그를 흔들어 버린다. 그에게 뭉쳐진 자신의 대한 분노가 털어져 버리라는 식으로.. "답답해!! 말 좀 해!!" "........." "강성훈!!!" 짧게 칼로 끊어 놓은 듯 외친다. 말 좀해.. 응? 순간.. 지용인 꼼짝할 수 없었다. 차디차게 자신을 노려보던 눈동자가 쓸쓸한 눈빛으로.. 너무도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기에.. "훈아?" 지용이의 목소리는 철사의 튕김처럼 당황하고 있었다. 성훈인 조금씩 근육이 풀어지며 손, 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성훈이의 떨리는 손이.. 조금씩 지용이의 얼굴로 뻗어졌다. "그렇게 자신이 없어?" 비웃는 듯한 미소.. 하지만 비웃기 보다는 쓸쓸함이.. 서글픔이 지용이의 시선속에 와 닿는다. 95)******* 예감 (豫感) ― <下> "성훈..." "내 앞에서 넌 그렇게 자신이 없니? 내가 도망갈 것 같았어? 너 내버려두고 가버릴 것 같던?" "........." "내가 널 이렇게 만든거지. 그래, 네가 이렇게 된 건 다 내 책임이야.." "........." "후훗, 내가 또 널 이해해야 하는 거겠지? 그렇지?" "........." "넌 날 잡을 힘도 없니? 이렇게 묶는 게 사랑이야??!!" 울분을 토해내는 성훈이의 손이 지용이의 뺨을 세차게 쳐버린다. 세차게 쳐버린 뺨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마음만 아파온다. "날 속이면서 얼마나 비웃어 댔니? 너, 웃음 참느라 참 힘들었겠다." "........." "나쁜 새끼! 너도 사랑하는 방법이 뭔지 몰라! 방법부터가 틀렸어!!" "........." "네가 하는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 불과해!!" 성훈이의 날카로운 음성에 짧은 순간, 비웃는 얼굴을 봐 버렸다. 조소를 머금고 자신의 사랑을 모독하던 지원이의 얼굴. '집착은 아니란 말이야!' 지용이의 가슴이 비틀어 버리는 발언이었다. 부들거리는 입술과 고집스럽게 생성되는 이마 위의 물결. 지용인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성훈이를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그래! 난 이런 방법 밖에 몰라. 이런 구질구질한 방법 밖에 모른다구!! 하지만.. 너에게 먹혀드는 내 사랑 방법이 이것뿐인데 어떡해??!! 오래 전부터 넌 이렇게 해야만 내게 머물렸잖아?! 내가 성하면 떠나버렸어! ".........." "항상 그런식이지.. 넌 항상 그랬어!! 내가 정상이면 내 곁에 머물질 않았다구!!" "그럼 사랑하지마!! 그런 사랑 받고 싶지도 않아!!" "뭐?" "지겨워. 이런 게 사랑이라면 그만 하고 싶어. 너도 지겹고 구역질 나지 않아?!" "멈출 수 없게 만든 건 너였어! 너한테서 빠져 나오고 싶어도 너무 늦어 버렸다구!!" "그럼 멈춰. 여기서 멈추라구!!" "멈춰? 어떻게 멈춰?" "날 지워버려! 네 머릿속에서 날 지워버린 말야!!" "본심을 드러내는군. 은지원한테 가고 싶어서 안달난거냐??!!" "멈춰! 그만 하잔 말이야!!" "은지원이 그렇게 보고싶냐? 지금도 그 자식 생각뿐이지, 넌!!" 성훈의 눈엔 눈물이 잔득 고여 버린다. 그리고 서글픈 울음소리가 온 집안을 술렁이게 만든다. "힘들어. 제발 그만 해!!" "멈추는 방법.. 말해줄까?" "고지용, 제발 그만 좀 해!" "딱 한가지가 있긴 있어.." '너와 나.. 우리가 함께하면 서로를 파괴할 뿐이야..' "너, 아니면 나..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거야. 내말 알아들어??!!" 큰소리를 치고 성훈이를 잡던 손을 밀쳐 버린다. 항상 두 번째로 밀려났던 그.. 잠에서 깼을 때 외로웠던 그를 맞이한 건 어둠이었다. 지용인 성훈이를 뒤로하고 두 눈을 꼭 감아 버린다. 이런 소리나 짓걸어야 한다는 자체부터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 방법이 틀렸다 이거지? 그러는 넌 내게 기회라도 준적있어?" "........." "내가 어떻게 해야 널 잡을 수 있는건데? 내가 어떻게 하면!!" "........." "흣, 죽어버릴까? 내가 사라져 주면 되는거냐??!!" "제발 그딴 소리 좀 하지마. 지겹단 말야!!"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딴 방법은 떠오르지도 않아. 그저 내가 나 자신을 자해해야만 넌 내게 관심을 보이니깐. 지금까지 넌 그래왔어. 내가 제 정신일땐 넌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구!! 너야말로 잔인하지. 내 앞에서 넌 항상 그 자식 생각뿐이니깐!!" "........" "나도 널 사랑하게 된걸 후회해!! 널 알게된 자체도 원망하고 싶어!! 멈출 수 없는 내가 한심하다구!!" "........" 어제, 지난해에 더 오래된 것에 향수를 느끼며 죽음으로 가는 걸음을 아껴왔던 지용이. 그도 이젠 지쳐간다. "아악---!!" 괴로움의 외침이였다.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느끼며 자신을 자책하는 고문과도 같다.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지르던 지용이. '널 만난 순간부터 난 구겨져 버린거야. 구겨진 곳을 곧게 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날 찾아든 건 너였어. 난 순수하게 사랑했다구. 이렇게 맹목적이진 않았단 말이야! 내가 왜.. 너에게 사랑을 구걸해야 하는데? 내가 너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내가 얼마나 울어야 돼? 내가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하는건데?? 말해봐. 강성훈! 지금까지 모자라니? 여기서 더 망가져야.." "아니.. 그만. 그만해도 나 충분히 알아.." 일정한 체온이 지용이를 감싸준다. "흑.. 흐흑." "너무 화가 났어.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화가 났어.." "흐흐흑.." "너처럼 착한 녀석을 망쳐 놓은 나 때문에.. 화가 났어.." 하얗게 핏기 없는 얼굴에 앙상한 뼈의 자욱이 보였다. 이미 송장처럼 변해버린 지용이었다. 그에게 성훈이란 존재가 비어버리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사랑해. 지용아.." "........." "사랑한단 말이야.. 바보야!" 조금전과는 다르게 해맑은 미소를 얼굴 가득히 담고 있다. 아픈 눈물을 보이며.. 어설프게... "이제부턴 내 곁에 있어줘. 네가 날 지켜줘.." "성훈아.." ".........." "깨어나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 첫눈에 반한 그런 사랑보다는 하나씩 만들어가는 그런 사랑, 아마 아주 오래 살아간 후에 세상 끝날 함께 할수만 있다면.. 나의 욕심껏 채우지 못했던 너의 모자란 행복을 후회할 것 같은데.. 』 + + + + + 불면의 밤이 계속되었다. 지원인 제대로 먹을 수조차 없었다. 그의 세계는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눈과 코와 귀와 가슴으로 그는.. 푸른 물결을 보고 느꼈다. 그의 주변은 온통 푸른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서 그 자신이 바로 푸른빛인 것 같았으며, 그가 바라보는 커튼으로 가려진 창밖의 풍경마저도 투명하게 맑은 푸른빛이었다. 그 밖의 모든 것으로부터 그는 단절되어 있었다. 창 밖의 소식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간혹 입을 열었을 때 담는 단어란 오로지 한사람의 이름 뿐이었다. 그는 찾고 싶어한다. 그를 찾아 모든 것을 그에게 맞기고 싶어한다. 자신의 죽음 조차도... "도련님,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움푹 패인 눈동자가 힘없이 깜박거릴때 유모의 앞치마를 치켜들어 눈시울을 닦아내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요.. 도련님이 어여 일어나셔서.." 지원이의 눈이 창밖을 향해 있음을 알고는 유모는 급히 몸을 돌려 굳게 쳐진 커튼을 들척였다. "조금 있음 아가씨가 오실거예요.." ".........." "은주 아가씨도 쓰러질까봐 걱정이예요. 푸휴--- 도련님 병간호에 먹을것도 제대로 못먹고, 잠도 제대로 못 주무세요.. 오시면 따뜻한 한마디 해 주세요.." 지원이의 눈이 슬픈빛을 띄자 유모는 그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도련님.. 빨리 완쾌 되셔야 해요.. 하늘에 계신 지수 아가씨나 사모님께서 도련님 이렇게 아프신 거 아시면 많이 속상해 하실거예요.. 그리고 곧 태어날 도련님의.." "처음으로 사랑..했어.." "........" "처음으로 행복이 무언인가를 느낄수 있었거든.." "........" "어머니께 보여 드리고 싶을 정도로.. 내겐 너무도 자랑스러운 사람이야.." "........" "그가 없으면.. 난 살아 있는게 아니야.." "도련님.." "그래서.. 나, 나가봐야해.." "........" "나, 나가서.. 찾아야해." "도련님께서 자꾸 이려시면.. 은주 아가씨는.." "나가야해.. 저곳에 그 녀석이 혼자 있을거야.." "........" "혼자서.. 울고 있을거야.." 고통은 개별적인 것이었다. "아가씨.. 언제 오신.." 초췌한 은주의 눈동자는 태양보다도 따갑게 불타고 있었다. 꼭 터져버린 듯한 화약과도 같았다. '지금까지 난.. 바람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어..' 그녀는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저 앉고 싶은 자신을 비웃어 가며 울고 있는지도.. "그래요! 나가서 죽어 버려요!!" "아가씨!!" "나가서 당신이 찾는 그 사람이나 잘 찾아봐요!!" 지원이의 고통을 결코 함께 할수 없었다. 곁에서 멀거니 바라볼수 있을 뿐이다. 가까이 느끼기 위해서 애쓰지만 무모한 노력이었다. 고통의 깊이를 잴수 있는 자는 이세상에 없으므로.. "그런데 어쩌죠? 당신이 찾는 그사람은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 당신을 한번만 찾아 달라고 매달렸는데도.. 당신을 거부했는데!!" ".........."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 사람만 찾아요??!!" ".........." "단 한번이라도.. 절 찾아 줄수는 없어요?" "아가씨.. 그만 하세요.." "그 사람 앞에서 애원하던 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요??!!" "성훈일.. 성훈일 찾은거야??!!" 곧 나갈 기세로 일어나 앉은 그의 눈은 은주의 서러운 눈물이 아닌 성훈이의 이름에만 관심이 있었다. 은주는 돌아섰다. 돌아선 은주의 뒷모습이 한없이 적막한대도 지원이의 관심사는 오로지 성훈이 뿐이었다. 뒷모습은 결코 꾸밀수 없는 것이라던데도.. 사람에게서 가장 정직한 곳은 뒷모습이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성훈이 어딨어? 그 자식 지금.." "전 뭐죠? 아픈 당신 앞에서도 전 쓸모가 없나요?" 은주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지쳐 버렸다. 가진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더 가지려 애쓴다는 것은 더욱 괴로운 일일 것이다. "난.. 성훈이만.. 필요해..." 오래전부터 지원이의 사고 방식에 낙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오지 않아요." "어딨어?? 내가 직접가면!!" "당신을 정리했다고 했어요.." "내가 아프다는 소리도 했어??!!" "네.. 했어요.. 하지만 그는 당신을 보지 않을거라고 했어요.. 다신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구요!!" "그럴리 없어. 네 년이 뭐라고 한거지??!! 그자식한테 멀리 떠나라고 했지!!" "그래요! 멀리 떠나 버리라고 했어요!!" "제길!!" "당신을.. 내가 갖고 싶다고.. 이제 내 아이의 아빠가 될거라고 멀리 사라져 달라고 애원했어요.. 이제 됐어요??!! 흐흑.. 이제 속이 편해요??!!" 늘 무언가를 가지려고 애쓰던 여자, 지원이의 눈빛을 지원이의 마음을 지원이의 명성을 지키려고 애쓰던 여자.. 이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변함없이 애쓰고 있다. 남편이라는 존재도 곧 태어날 아이의 존재도 결국은 자신의 주변 인물임을 그녀는 왜 모르는 것일까.. 어쩌면 벌써 알아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집착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욕망은 쉽게 쓰러져 버리지 않는 것이므로.. "당신이 믿던 사랑은 이미 끝났어요!" "망할 기집애!!" "이제 단념하세요!!" 은주에게 덤비려는 나약한 손이 허공에서 떠돌다가 이내 떨어져 버린다. "성훈이 데려와!! 그 자식 데려오란 말야!!!" 가을 나무가 미련없이 낙엽을 떨구듯. 지원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미련없이 하나 둘 떨어지고.. 그는 벌거숭이가 된 채 차디찬 병실 바닥으로 추락한 상태이다. 다가오는 잿빛 겨울을 두려워해야 하는 나무 한 그루에 진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남은 사람은.. 이제 저밖에 없어요. 당신의 그 지겨운 사랑놀음 그만 멈춰요.. 이젠 현실속으로 돌아와요.. 지원씨 부탁할게요.. 당신을 먼저 살리세요.." "끝나지.. 않아.. 성훈이와.. 난.. 끝날수가 없어... 우린.. 둘이 아닌 하나..니깐..." 거친 숨소리. 지원이의 병약한 육체는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를 보아야 한다는 신념하나로.. '날 보기 싫다고? 그럼 내가 널 찾아가야 하는 거겠지? 그렇지? 흐흣.. 보고 싶어. 들려? 나 다 됐나봐.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지 모르겠어.. 그전에.. 마지막이라도 좋아.. 널 담고 싶어. 내 숨이 붙어 있을 때.. 널 담고 싶어....' + + + + + "생각외로 끈질긴데?" "그거야 더 두고 봐야 하는 문제겠지.." "오늘이 며칠짼줄은 아냐? 난 다리 저려서 저런짓 못해.-_-;" "모시라고? 신체적 고통에 손들고 발들고~ 이별을 선택한다는 거야?? --++" "난 내 몸 고문하면서 저럴 수 없다는 거야. -_-;;" "그럼 만약에 내가 재진이라면 넌 장수원처럼 저런짓 안한다는 거네?" "당근이지~" "뭐가 그렇게 간단명료하냐?!!" "내가 뭐 아쉬워서 너한테 목매다냐?" "지금 장난할 기분 아냐.. 우혁아, 말을 골라서 써라.." "장난 아닌데.." "너 오늘 죽었어!!" "아야~ 꼬집지마!!" "다시 말해봐! 너한테 난 아무것도 아냐?" "사실.. 내가 뭐 아쉬워서 너한테 매달리냐? 나, 생긴거 잘났지. 머리에 든거 많지. 게다가 열라 터~프하지.. 돈많지, 시간많지.. 동물원 원생이 닮은 너한테 나 장우혁이 뭐가 모자른답시고 매달려? 너 보고 싶으면 동물원 찾아가면 되는 것을.. 만인의 스타인 내가 왜 무릎꿇고 널 기다리겠냐?" "장.. 우.. 혁!!" "새우눈 만들지마. 안이쁜 얼굴 더 아녀보여~ 어휴-- 주름생긴 것 좀 봐." "쉬펄! 나한테 목매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줄!!" "야, 조용히 해봐! 재진이 나오잖아.." "재진이 나오던 말던 상관없어. 너 오늘 재삿날이야!!" "꼬집지마. 내 뽀얀피부에 흡집나!!" "이 밀가루 같이 허연 놈아 어딜 도망가! 거기 안서??!!" '죄지은 사람같다.. 왜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니?' '문이 열리기만을 소원했어.. 주문을 외우듯.. 네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원했어.. 내 손.. 잡아 줄거지?' 올려다보지 않아도 맑은 액체가 고여 버린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기다린거니?' '난 더한 것도 할수 있어.. 네가 날 용서해 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걸...' '왜 울어? 울지마.. 일어나.. 다리 저리겠다. 계속 그렇게 앉아 있었니?'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앉은뱅이가 된다해도 난.. 너만 있으면.. 너만 날 쳐다본다면 되는거야.' 두 사람 사이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오로지 두눈으로 말을 걸뿐. 입을 여는 쪽은 없었다. 떨어져 있는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배를 타고 자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물은 흐를수록 맑아지는 것을.. 사랑은 흐를수록 자유로운 것을.. 가까이 다가설수록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서로를 자유롭게 놓아줄 심정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성숙해진 낯으로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야웠네.. 너무 야웠다. 얼굴이 너무 하얗잖아..' '학교는 어떻게 한거야?' '그런거 신경쓰지마.. 우리 둘만 신경써..' '나 때문에 네가 걸었던 걸 깨뜨리는건 싫은데...' '내 모든걸 네가 주관해줘.. 다른 건 필요없어.' '논문에 목숨 걸어었잖아.' '필요없어. 그런거..' '.........' '네가 있어야.. 난 사는 거니까..' "뭐하는 짓이야? 돌아가라고 했잖아." "........." 그를 내쫓으려 하지만 맘 먹었던 것보다 힘이 든다. "비켜. 나가봐야해." 싸늘한 음성을 담으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시선을 어디다 둘지 고민하다가 수원이 앉는 곳에서 멈춰 버리고 말았다. 눈물이 매달려 있는 그의 속눈썹이 진하고 고왔다. 한꺼번에 온몸으로 사랑스럽게 부딪쳐 오는 그를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할것인지 그는 잠시 망설였다. "보고.. 싶었어." 따뜻한 음성으로 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히 수원이. 꿈속에서가 아닌 정작 자신앞에서 따뜻하게 말해주고 있다. 참고 있었던 눈물이 재진이의 시야에 가득 고여 버린다. '널 놓아주려고 했는데.. 더 잡고 싶었던 걸까?' "어쩔 수 없나봐. 나, 너 아니면 안돼나봐." "..........." "널 떠나보내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 "너한테 중독된걸.. 중독됐는데 어떻게 견뎌?" 두 눈 가득히 떨어지는 눈물이 수원이의 얼굴을 젖이고 있다. 어린아이처럼 맑은 이슬을 담고 있는 그는 분명히 처음 만나던 날의 수원이의 인상이었다. "책임져.. 네가 책임지라구.." ".........." "불쌍한 인간 구제한다는 뜻으로 나 받아 달란말야. 응?" ".........." 일어서려 하지만 며칠동안 구부려진 탓인지 곧게 펴지질 않는다. 그런 수원이를 안스럽게 바라보는 재진이의 눈이 온화하게 웃어 버린다. '울보 다 됐네.. 쌀쌀맞게 구박하던게 생각이 안나잖아..' "너...." "........." "나 없어서 매일 굶었지?" "........." "그러니깐 나랑 같이 요리 좀 배우지.." "재진아?" "집은 안봐도 엉망일거야. 대청소하려면 죽을 맛이겠군.." "........." "노동비는 충분히 줘야해? 내 허리 휜거 보이지?" 재진이의 장난스런 음성이 들려오자 수원인 빙그레 웃으며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일어서려 한다. 하지만 찬 바닥과 떨어지기 싫은지 수원이의 정강이는 곧게 펴지질 않는다. "다리 꽤나 저리겠네.." "..........." "다리 저릴 때 코에 침바르는게 특효약이야.. 내가 발라줄까?" 재진이의 부축으로 일어선 수원이가 울음을 터트려 버린다. "미안해! 미안해!!" "그 말로 넘어가려구?" "재진아, 흐흑.." "집에 돌아가면 싹싹 빌어, 장수원."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공간. 화창한 날씨. 두 사람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따사로운 햇살. '웃기지? 떨어진 시간이 며칠 안된 것 같은데.. 꼭 몇 광년은 떨어져 지낸 것 같았어. 나도, 네가 아니면 안돼나봐.. 너와 난.. 천생연분?' 『 향긋한 모닝커피와 내 아침을 깨워주는 상큼한 입맞춤. 아직 달콤한 꿈에 흠뻑 취해서 '조금만 더...' 그러겠지. 하얀 앞치마 입고 내 아침을 준비하는 너의 모습. 나의 삐뚤어진 넥타이까지도 모두 다 너의 몫일꺼야. 나 오늘도, 너와의 미래를 그려봐.. 행복한 너와 나의 그 모습을 상상하며 하루를 시작해..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는 내 단 하나의 예감으로 사랑해. 지금 너의 모습을.. 세월에 변해갈 니 모습도... 그보다 더욱 사랑하는 건 영원히 날 지켜줄 너의 믿음. 사랑해. 널 알게 한 인연과 두려움없이 너를 선택하게 한 운명까지도. 내 마지막 바램은 다음 세상까지 함께 라는 것...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무리 지어진게 하나도 없다. 한심한 스물 두고개.. 어설프더라도 조금씩 마무리 지어야 겠다.. 96)******* 비 ( 悲 )... † "부엌을 이 꼴로 만들면 어쩌자는 건데?!!" 찢어지는 성훈이의 음성에 정신이 든 지용이가 미안해 죽겠다는 듯 성훈이를 쳐다본다. "그릇은 있는대로 다 꺼내서 썼네. 에휴-- 냄비 태워먹은 것 좀 봐.." "그게 말이야.. 생각보다 어렵더라궁.." 애교섞인 음성으로 성훈이의 화를 식혀 보려 하지만 먹히질 않는다. "죽하나 끓이는데, 전쟁한번 치뤘냐? 이게 다 뭐야?" 가스렌지는 지저분한 이물질로 늘어붙어 손이 얼얼해질때까지 닦아야 다 닦여질 것만 같았다. "아줌마 부를까? 너 몸도 안좋잖아. 아줌마 부를게.." "됐어!!" 고무장갑을 신경질 적으로 끼는 성훈이의 입술이 오리 주둥이처럼 쭉 튀어나와 있었다. "열나잖아. 들어가서 쉬..쉬어. 응?" "미치겠어. 다음부터 시키지 않는건 하지마! 알았어??!!" "......." 머리결이 찰랑거린다. 신경질적으로 냄비를 닦아내며 온힘을 기울이는 성훈이가 귀여워 미칠 지경이다. "성훈아.." "오늘 밥 없어. 굶어!!" "너 말이야." "진지하게 나온다고 겁먹을 나 아니야. 그러니까 목소리 깔지마." "너.." "오늘 반성하는겸 혼자자!!" "성훈이 너.. 꼭 내 마누라 같다." 조심스럽게 내뱉으며 미소를 짓는 지용이가 어느덧 성훈이의 등을 껴안고 있었다. 담배연기처럼 사라져 버릴까봐 두려운 듯 성훈이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이 행복이 깨질까봐 걱정되는 듯. 지용이에게 성훈인 오래 머무르지 않았으니깐. "너 이렇게 나오면 야단치지도 못하잖아. 떨어져.." "두려워. 내가 꿈을 꾸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가끔 내 볼을 꼬집는다." "........" "네가 내 손에 잡히는대도.. 넌 하루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것만 같아." "........" "나, 병적이지? 고칠려고는 하는데.. 자꾸만.." 지용이의 말끝이 흐려지자 성훈이의 얼굴이 지용이의 시야로 들어왔다. "나 요기 있잖아. 나 지금 지용이 코앞에 있잖아." "........" "볼 꼬집어 줄까?" 웃음짓는 성훈인 아까전 으르렁거리던 얼굴과는 다르게 안스러우면서도 서글픈 미소를 지용이에게 보여준다. 그런 성훈이의 볼을 감싸는 지용이의 손이 그의 고개를 들어올려 자신의 입술선이 있는곳으로 인도하려 들었다. "아니~ 내가 이러면 안되지. 얌마 너 반성해야지!!" "쉿! 조용.." "고죵! 고무장갑은 빼고.. 읍." + + + +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정말 백 번 채우려고 하는거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러지 말고 공부나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장수, 장난친거라구!! 그만해!!" [사랑해.. 사랑..(좀 조용히 좀 합시다!!)] 수화기로 들려오는 타인의 음성에 재진인 얼굴이 달아올랐다. "수원아, 너 지금 열람실이야??!!" [에이 띱. 재진아, 좀따 이어서 들려줄게. 잠시만 끓어..] "장수원!! 여보세요!! 모시모시!!" 뚜-- 하는 소리가 들리자, 재진인 힘 빠진다는 듯 소파위로 몸을 기댔다. "윽.. 적응 안된다니깐. 쌀쌀맞던 놈이 180도 바꿔버리니깐 내가 귀신이랑 사는건지 장수원이랑 사는건지 헷갈려.." RRRRRRR--------- "여보세요?" [이어서 들려줄게.. 잘 들어. 아까 96번째 였으니깐. 인심썼다. 96번부터 시작한다. 잘 새야해?] "안 들어도 돼." [사랑해..] "수원아.." [사랑해..] "말 안해도.." [사랑해..] "다 알아.." [재진아.. 정말 사랑해.] '그래. 나도 너 정말.. 사랑해..' + + + + + "지용아~ 어딨는거야?"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봐도 그는 어디에도 없다. 처음엔 장난스런 음성으로 그를 불려 댔지만 그의 이름이 거듭될수록 성훈이의 마음은 조급해 지기 시작한다. '어딨는거야? 나간걸까?' 훤하게 뚫린 테라스창으로 시선을 옮기자 하얀 티브론은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산책 나간걸까?' 성훈인 바쁜 걸음으로 현관을 나서선 호수주위를 샅샅이 뒤져보았다. "고지용!!" 두 손을 입주위로 모아 합성기에 대고 소리를 치듯 지용이를 부른다. 하지만 자신의 메아리만 되돌아올 뿐 지용이의 음성은 따라오지 않았다. '어디 간거야? 고죵?!!' 입술을 깨물며 궁금해 죽겠다는 듯 메마른 땅을 발로 톡톡 차댔다. 달그락-- 성훈이의 귀가 쫑긋해지면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세히 보니 통나무집 지하실에서 오렌지빛 불빛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 탓에 오렌지 빛은 눈에 띄지 않았나 보다. '뭐야? 지하실에 있는거야?' 성훈인 어느새 의문 가득한 눈으로 오렌지 빛을 따라가고 있다. "분명히 여기에 뒀는데.. 어디로 사라진거야?" 이리저리 뒤져보아도 지용이가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에씨~ 어디다 뒀지?" 뒤적거리는 소리는 끓이지 않는다. 잠깐 멈춰서서는 중얼거리기도 한다. "휴-- 성훈이 출판사 가는 날 청소나 해야겠다. 먼지가 산처럼 쌓였네.." 지용인 찾으려던걸 포기하고 뒤돌아 섰는데.. "이게.. 다 뭐야?" 성훈이의 목소리는 동굴처럼 깊이 패여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음성이 아닌 형편없이 낮게 구겨진 음성이었다. 천장까지 붙여진 자신의 사진에 놀랐는지 얼굴이 파랗게 긴장되어 있었다. "여긴.. 어떻게.." "이게 왜 여기 와있어?" 성훈이의 중학교때 교복이었다. 강성훈이라는 명찰이 붙여져 있는. "성훈아.." "이건 내 가방이잖아. 이건 내 교과서들이고.." 성훈이 지용이에게 몸을 돌리려 할 때 박스하나에 담긴 내용물이 그들 앞으로 춤을 추듯 쏟아져 버렸다. 언제 찍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리는 사진들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성훈이의 몸이 부들거리는 게 지용이의 시선으로 들어온다. "참 무서운데.. 스토커가 따로 없네.." "성훈아.." "이건 언제적 사진이더라.. 이것 말고 또 있나?" 성훈인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건조하고 차디차게 느껴진다. 마네킹의 미소처럼 형식적인 미소. 성훈이가 집어든 사진이 조금씩 구겨져 가자 지용인 몸을 구부려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설명할게.. 이곳은." "다 내 사진들이네.." "성훈아.." "저건 유치원때 사진이네. 어디서 구했어? 내 수중에도 없는건데.." ".........." "하핫. 내 상장이네. 2학년 6반 23번.. 강성훈." ".........." "다. 내 이름뿐이고 내 사진들 뿐이야.." "오해하지마. 이 방에 있는건." "취미가 참 유별나구나. 별개 다 있네. 내 어렸을적 장난감까지 다 있어!!" "화 내지마. 여기에 있는건.." ".........." "집착이라고 말하지마. 병적이라고 말하지마.. 난.." "내가.. 왜 화를 내?" ".........." "그런데... 지용아." ".........." "무섭다." ".........." "나, 무서워지기 시작해.." 사랑은 결코 구속이 아니라는 것을 지용이도 알고 있다. 파랗게 질린 성훈이가 안채로 들어와선 묵묵히 저녁을 준비했고 지용이에게 던지는 말은 없었다. 장난스럽던 콧노래도 없었다. 수저를 놓고 전기밥솥에서 밥을 푸고 국을 뜨고.. 지용이가 성훈이를 뚫어져라 쳐다봐도 성훈인 마주치지 않고 외면해 버렸다. 식탁으로 다가와 앉을 때에도 수저를 들고 국을 떠 넘겨도 성훈이는 딴 생각을 할뿐 간이 맞냐며.. 맛있냐고 묻지도 않았다. "국이.. 참 얼큰하다." "........." "넌 안먹니?" "........." 아무말도 않는 성훈이. 그 눈빛이 너무도 멀어서 목구멍으로 음식물이 넘어가질 않는다. "떠날 생각하는 거지?" "........." "하긴. 나같은 놈 무서워서 같이 살겠어?" 입술을 삐죽이며 수저를 던져버리는 지용이.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운 듯 허벅지를 꼭꼭 꼬집어 댄다. "무섭다고 했니? 내가 너 감시하면서 산 것 같아서 무섭니?" "........." "무섭겠지. 나 같아도 무서울거야." "........." "하지만..." "괜찮아. 내 사진이 한 장도 없는데.." "........." "잘됐지. 모.." "무섭다고 했잖아?" "그래. 무서워.." "........." "너한테 벗어 날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서워." "........." "나처럼 하찮은 존재에게 과분한 관심을 부어주는 거 부담스러워." "........." "너에게.. 빠져 버릴 내가.. 조금씩 무서워져 가." "성훈아!!" "무서워. 내가 너한테 매달리게 될까봐. 두려워져." 짧은 침묵이 왔다. 그리고 지용인 가슴 가까이 성훈이의 음성을 새겨 넣었다. '매달려도 돼.. 내게 매달린다면.. 난 하늘을 날 듯 행복할거야. 세상을 다 얻은 듯 지나친 환희에 빠져 살거야. 난..' "미안해. 지용아.. 난 네게 줄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화가 났어. 속상했어. 너의 관심이 날 초라하게 만들었어. 난.. 너에게 상처밖에 준 게 없는데..." "네가 있잖아." "........." "지금 내 눈앞에.. 성훈이 네가.. 있잖아." 지용이의 허벅지를 고문하던 손이 성훈이에게로 뻗어졌다. 잡아 달라는 듯 그에게 뻗은 손을 성훈인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만 있으면 돼. 너만 있으면 난 행복한거야." 성훈이의 손이 조심스럽게 뻗어진다. 지용이의 눈이 성훈이의 손으로 따라온다. 그것은 소리없는 끈이었다. 성훈이를 꼼짝 못하게 묶어버리는.. "너만 내 곁에 있다면 난 행복하게 사는거야." 지용이의 낮은 목소리 역시 또 하나의 끈이다. 성훈이를 소리없이 묶어 버릴 수 있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하얀 손이 차가운 손바닥 안으로 들어간다. '네가 형이 되면 어떡하지? 너도 형처럼.. 될까봐 무서워. 내 안의 형처럼 두려워져 가. 내 안에서 널 허락하게 될까봐.. 나 무서워.' + + + + + "뭐하신 거예요??!! 지원씨 잘 지키라고 했잖아요!!" "죄송합니다. 잠시 한눈 판 사이에.." 허둥지둥 거리는 몸짓이 이성을 잃고 있다. 지원이가 앓고부턴 차분하던 그녀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 "짐작가는곳 있어요?! 지원씨 어디로 향했는지!!" "이비서가 왔다 갔습니다. 얼핏 들어보니 출판사 얘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출..판사요?" "네. 강성훈이라는 이름을 들먹거리시던데.." "차 대기시키라고 하세요!! 어서 서둘러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성훈아.. 누군가가 그러더라. 숨이 끓기기 전에 눈에 담는 사람을 다음 생에서 꼭 만나 사랑할 수 있다고... ― 내가 눈감는 날.. 난 형을 내 눈에 담을래.. 다음 세상에서 우리 사랑만 하자.. ― 사랑만? 그래.. 사랑만 하자. 너와 나.. 사랑만 하자. [O.N.E] 영상소년. 96)******* 비 ( 悲 )... ‡ “ 성훈이에겐 소프트아이스크림 냄새가 난다. 난 그런 성훈이를 사랑해.. 부드럽고 향긋한.. 나의 예쁜 성훈이.. ” "나 드라마보고 있잖아! 왜 끄는 거야??!!" 지용이가 꺼버린 TV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TV곁으로 기어가는 성훈이의 목을 잡아끌었다. "왜 이래? 나 드라마 볼땐 건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 잔뜩 화가 난 음성으로 지용이를 노려본다. 하지만 지용인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성훈이를 더 끌어들인다. "너 내일 굶고 싶은거야? 왜 이래!!" "나랑 갈때가 있어.." "갈데는 무슨 얼어죽을 갈 때? 이 드라마 끝날때까지 꼼짝도 하기.. 야!!" 지용이의 손에 질질 끌리듯 찾아 간 곳은 산아래 위치한 작은 교회였다. "여긴 왜 온거야? 기독교 신자도 아니면서." "조용히 하구 따라와." "칫! 집에만 가봐. 오늘 잠 다 잤어!" 삐걱거리는 교회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성훈이를 잡아끌었다. "교회라고 해도 어두우니깐 무섭네.." ".........." "너나 나나 거리가 뭔곳에 오니깐 이상하다." ".........." 지용인 잠바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준비해온 여러 개의 초에다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밝히고 성훈이의 손에 하나 쥐어 주었다. "지금 모하는거야?" "쉿!" "모할려고 이래?" 지용인 초하나를 들고 십자가 앞에 섰다. 그리고 한참을 십자가를 주시했다. "나 집에 가고 싶어. 여기 싫단.." "눈 감아봐." "모하게? 설마 여기서?" ".........." 가늘 실눈으로 지용이를 째려보자 그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힌트도 주질 않는다. "벌받어, 임마! 여긴 신성한 곳이라구!!" "눈 감어." "여긴 교회라구! 교회!! 뽀뽀하고 싶으면 집에 가서 해. 모, 내가 너랑 뽀뽀하고 싶은 생각따윈 없지만.." "오늘 넌.." "미친놈. 장소는 가려서 해야 할거 아냐?" "나, 고지용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는 날이라구.." "엉?" "강성훈이.. 내.. 사람이 되는 날.." "무슨.. 소리야?" 성훈이의 의문을 풀어줄 무언가가 그의 앞으로 형체를 비출 때 성훈인 입술을 깨물며 울먹여 버린다. 울음이 나온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는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우릴 축복해줄 하객은 없어." ".........." "우린 포옹해줄 세상도 없을테고.." ".........." "하지만 두렵지 않아." ".........." "후회따윈 없을거야." 말을 끝내는 지용이가 성훈이의 왼손을 잡았다. "싫어!" "성훈아.." "이렇게 초라한건 싫다구!! 진작 말했으면 옷이라도 제대로 입고 오잖아!" 투덜거리는 얼굴은 눈물 범벅이다. "다행이네.. 많이 걱정했어. 네가 거절할까봐." "흑.. 애쓰지마. 난 많은걸 원하지 않아." "........." "이렇게 부담스럽게 만들지 좀 마.." "........." "그냥.. 네 곁에서.. 난 네 곁에서 살면 돼.. 너무 많은걸 해주려고 하지 말라구.." 울음을 참으려 드는 얼굴을 들어올린다. 빨갛게 충혈된 두 눈에 흘려 내릴 눈물로 가득하다. "나의 연인이 되어줘. 영원히.. 널 사랑하며 살게.." "..........." "영원히 널 지켜줄게." 성훈이의 약지 손가락으로 들어가는 반지가 촛불에 의해 반짝-- 거렸다. 성훈이의 눈물로 인해 지용이의 가슴은 빛으로 얼룩졌다. 그것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었으나 이미 그들은 알고 있던 것. 하지만 성훈이의 머리속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그려지더니 조금씩 뚜렷하게 나타났다. '형.. 이제 그만 놔줘..' 사랑이란 어쩌면 자신의 확인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타인이 되어 돌아설 때 가슴 깊이 느껴야 하는 슬픔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이제 놓아줄 때도 됐잖아..' "사랑해. 성훈아.." '왜 잔인하게 자꾸 나타나? 응?' "행복하게 해줄게.." "지용아, 아직.. 아직은 아니야.." "응?" "아직.. 나 준비가 덜 됐어."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성훈이의 손가락이 지용이의 반지를 거부해 버린다. 떨고 있는 지용이의 손을 뿌리치고 뛰쳐 나가는 성훈이의 머릿속에 지원이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가 떠올랐다. 자신의 손가락에 링을 끼워 주려던 그의 천진난만하던 미소가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아직.. 형이 내 안에서 숨쉬고 있어. 내 가슴속을 채우고 있는건 형이야. 강하게 부정하려고 들어도.. 형이 존재하고 있어... 잔인해.. 너무 잔인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지용이를 교회에 남겨 놓은채 성훈이는 뛰고 있었다. '지용아, 아직.. 준비가 덜됐어.. 나 아직.. 형을 덜 잊었나봐.. 조금만.. 조금만 참아줄래.. 조금만 시간을 주면.. 그땐.... 너만 쳐다볼수 있는 완전한 연인이 될게.. 부탁이야.. 조금만 참아줄래? 조금만.......' + + + + + 밤 열 한시가 넘어 있었으므로 좌우로 뻗어 나가는 도로는 소통이 잘 되었다. 지원인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 속력을 내었다. 앞에서 달리던 승용차가 맹렬하게 뒤로 붙는 그의 차를 보고는 이차선으로 비켜갔다. 핸들을 잡는 지원의 손에 힘이 주어졌고 자신도 모르게 액설레터를 다시 밟았다. 교차로에 매달린 파란신호등이 깜박하고 꺼지더니 노란불이 들어왔다. 지원인 주저하지 않고 교차로를 건넜다. 조금씩 두근거리던 가슴의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온 가슴이 울렸다. 앞을 쏘아보던 지원인 우측의 깜박이를 켜고는 사차선 도로로 빗금을 긋듯 오른쪽으로 달려 나아갔다. 이차선과 삼차선, 사차선의 차들이 제각기 브레이크를 밟아 그의 길을 양보했다. 사차선을 달리던 트럭한대가 하마터면 지원의 승용차 옆구리를 들이받을 뻔하다가 기겁을 하듯 브레이크를 밝고는 삼차선으로 비켜 지나갔다. "제길!!" 타이어 미끌어지는 소리. 지원의 차는 가로수가 구부려질 정도로 세게 들이박았다.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심장의 고통 때문에 몸은 몹시 늘어진다. 길옆의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차안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앞을 쏘아본 채로 지원인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눈물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이내 차가워졌다. 눈을 깜박여 눈에 고인 눈물을 털어 내었으나 그것은 끊임없이 솟아 올랐다. 입술 끝에도 눈물이 걸려 간지럽다. 혀를 내밀어 물기를 빨아들였다. 찝찔한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침이 그의 기도를 막으려 한다. 거친 기침 소리는 자꾸만 반복되고 잠시 후.. 미온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섰다. '성훈아, 지금 달려가고 있어. 형이 널 찾아갈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여기 사고 났어요!!" "119!! 119 불러요!!" 깜깜해지는 시야.. 분주한 사람들의 움직임 소리. 곧이어 들리는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 '왜 이렇게 졸릴까? 빌어먹을... 성훈아.. 나, 잠꾸러기가 됐나봐. 푸흣...' + + + + + 안개에 쌓여 자욱해진 음습한 늪지 주위를 성훈은 헤매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혓바닥을 널름대는 기괴한 파충류들의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올 뿐, 주위는 쥐죽은듯이 조용하다. 퀴퀴한 냄새, 무엇인가 썩어가고 있는 냄새가 코 끝에 맡아진다. 부글거리는 거품 방울들, 죽어서 시체처럼 나뒹구는 나무토막들. 그런데 그 늪지대에 두 눈이 강렬하게 반짝이는 그가 쓸쓸한 눈빛으로 성훈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햇빛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데, 유난히도 반짝거리는 눈빛.. 그 속에는 시리게 빛나는 푸른 사파이어가 존재한다. 그는 서서히 늪지 중앙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지마! 위험해!!' 늪의 진흙은 마치 살아있는 뱀의 비늘처럼 서늘하게 그의 가느다란 다리를 휘감아 온다. 허리까지 점점 마비되고 굳어지고 있다. 그의 앞에서.. 바로 성훈이의 눈앞에서.. "안돼!! 안돼!! 가지마---!!" "성훈아!!" "안돼!! 가지마.. 흐흑.. 가지마!!" "성훈아 정신차려!! 성훈아! 나야 지용이!!" ― 언제쯤 빠져 나올 수 있을까? 추억도 아닌 악몽으로 되살리려는 형의 기억속에서.. 난 언제쯤? "안돼!! 그러면 안돼!!" "성훈아, 잠에서 깨! 눈을 떠!!" 성훈이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머리속에서 생성되는 땀방울이 지용이의 팔등으로 떨어진다. "흐흑..흐흐.." 흐느껴 우는 성훈이는 악몽에서 덜 깬 듯 몹시 떨며 울먹였다. "성훈아, 괜찮아? 정신이 들어?" "흐흑..흐흐흐.. 어떻게! 어떻게!!" "성훈아..?" "내 앞에서.. 들어갔어. 죽어 버릴려고.. 내 눈앞에서!!" ― 형이 원하는 시간에는 언제든지 내 가슴속에서 형을 되살여야 하는... 형은 언제나 나의 우상이었고.. 나의 일부였으니까.. 그런 형이.. 나더러 형곁으로 돌아오래.. 날 끌어내고 있어. "악몽 꾼거니?" ".........." 따뜻한 제티를 성훈이의 두 손에 꼭 쥐어 주고는 팔을 두르고 그를 안았다. 수차례 성훈이에게 질문을 던져 보지만 그는 아무말도 않고 도리질만 한다. "아직도 뜨겁네. 해열제를 먹었는데도 내려가질 않잖아.." 걱정스럽게 성훈이를 쳐다보는 지용이의 두눈에 근심이 가득하다. "성훈아, 내가 옆에서 꼭 안아줄게.. 더 자라." ".........." "자장가라도 불려줄까?" ".........." "자, 눈감고.." "또 나타날거야." ".........." "또 나타나서.." "누가?" "날 괴롭힐거야." "누군데? 누가 널 괴롭혀??" "흑.. 흐흐.. 죽으면 나도 죽어버릴거야." "후나??" "흐흐..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거야." '죽어? 따라 죽는다구??' 성훈이의 음성은 밤바다의 검푸른 물결이었다. 고통이 되어 지용이의 가슴안으로 세차게 밀려 들어왔다. 지금 성훈이가 누구의 꿈을 꾸고 저러는 것인지를 알수가 있다. 성훈이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는 알고 말았다. 우울한 빛. 고통의 빛. 허상의 빛. 성훈이의 눈속에는 세가지 빛만 가득하다. "성훈아.. 내가 있잖아. 내가 있는데도 죽을거야?" 지용인 치솟아 오르는 투기심을 밀어 내리며 성훈이에게 물었다. 슬픔으로 가득한 그를 다그치기는 무리이기에.. "흐흐.. 흑.. 내가 할수 있는게 뭘까? 무서워.. 지용아, 무서워!!" 지용이의 품으로 들어와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이는 성훈이를 포옹해 줘야 한다. 그를 세차게 밀어내며 지원이 생각 그만하라며 두들겨 팰수도 없는 일이다. 지용인 들썩이는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그가 빠져 나갈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힐 정도로 꼭 끌어안았다. '아직도..라는 거... 내가 두려워 하는게 뭔지.. 아니? 바로 이거야. 아닌척해도.. 다 잊어버리고 내게 충실한척 해도.. 날 사랑한다고 말해도.. 꿈에서라도 찾아오는 그 자식.. 널 놓아주지 않는 그 자식 때문에 두려운거야. 넌 언제든 그 자식이 부르면 찾아 나설 준비가 다 되어 있거든. 넌 아니라고 말해도.. 이미 넌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 내가 널 잡는다고 해도.. 넌 무의식 속에선 그를 부르고 있어. 은지원... 그 망할 놈을! 하지만 억지로 잊으라고 강요는 안해.. 왜냐면.. 넌 날 떠날 기회는 많았어. 하지만 떠나지 않고 내곁에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만족해야 하는 거야. 더 욕심을 부린다면 넌.. 내안에서 죽어갈거야. 그건.. 싫어. 기다릴게. 네가 날 허락할때까지..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지마. 나.. 견디기 힘들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겨울 나무처럼 앙상한 기분.. 검고 멀고 아득한 기분.. 방향을 잃었다. 어디로 갈까? [O.N.E] 영상소년. 97)******* 뫼비우스의 띠. (†) 성훈인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멍청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이쁜 성훈이 일어났구나.." "........" "아침 지었는데, 먹고 평가 좀 해줘." "........" "세수부터 해야겠구나. 내가 씻겨줄까?" "........" 성훈이의 볼을 어루만지고, 뺨에 뽀뽀를 하면서 내심으로 느껴지는 엷은 불안은 떨칠수가 없었다. "따뜻하게 오뎅국 끓였어. 예전에 캠핑 갔을 때 첨 끓여보고 두 번째다. 참 아침에 아줌마가 다녀가셨는데, 냉장고 텅 빈건 귀신같이 아셔 가지곤 꽉~ 채워 놓고 가셨지 모야." "........" ― 왜 어째서 이러는거야? 왜 그렇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거야! 왜 내 노력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냔 말이야!! "청소도 했는데.. 거실 청소하기는 정말 힘들더라." "지용아.." "응?" "키스해줄래?" "........" "악몽에서 덜 깬 것 같아. 지용아, 나 좀 어떻게 해봐. 나 좀 잡아 달라구!!" ― 내가.. 열번의 노력을 하면.. 그제서야 넌 날 쳐다보게돼. 하지만 은지원은 노력없이도 너의 눈빛을 받을 수 있어. 내가 널 열 번 불려야만 넌 날 생각하지만 은지원은 얼굴만 희미하게 비춰도.. 넌.. 은지원 생각뿐이야. 성훈인 국만 몇 수저 떠 넣었을 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맛이 없어?" 왜 입맛이 없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지용인 형식처럼 물어 본다. "아니.." "근데 왜 그렇게 못먹어?" "글세.." "치~ 난 맛없어도 네가 해주는 음식 두 세그릇씩 먹어 줬는데.. 이 오뎅국이 얼마나 의미신장한 국인지 알아? 내가 세 시간동안 끙끙거리면서 만든 거야." "의미신장? 꽤 거창하게도 말하네.." 자랑스럽다는 듯 말하는 지용이의 얼굴이 새색시마냥 점차 붉어지고 있었다. 투정어린 어투의 지용이.. 그의 입술이 쑥 내밀어져 있자 성훈인 소리없이 미소를 짓다가 큰소리로 웃어 버렸다. "하하하하핫..." "어, 웃었네!" "무슨 오뎅국을 세시간동안 끓였어?" "너야 한요리 한다지만.. 난 해본적이 없으니깐.." "하하하하핫.." "정성이 듬뿍듬뿍 들어간 오뎅국이라구. 그러니깐 감사히 다 먹어." "바보 같애.. 나 깨웠으면 되잖아." "코까지 드르렁 거려가며 자고 있는데, 어떻게 깨우냐?" "내가 코를 골아?" "그래. 어젯밤에 지진 일어난줄 알았다." "뭐야??!!" 경쾌하게 웃어 보이려는 성훈이. 하지만 어딘 줄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몸짓. 우습지 않아도 웃기려는 희극의 대목이란 것을 알면 크게 웃어줘야 하는 것처럼 지용이도 경쾌하게 웃어 보이려 했다. 연기에 충실한 두 사람.. 충실한 관객. "오늘 우리 오랜만에 데이트나 할까?" "좋지~" "지용아, 우리 바다 가자! 나 바다가 보고싶어." "동해 가버릴까? 내일 아침엔 일출을 보면서 눈을 뜨는거야!" "그래! 그래!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그래.. 내일 아침엔 일출을 보면서 눈을 뜨자. 많이 웃어야해. 내 앞에서 지금보다 더 환하게 방글거려야해. 웃어야해. 웃어줘야 해.. 내가 불안하지 않게 넌.. 웃어줘야해. 지용인 성훈인 위로하듯 어루만졌다. 자신의 품으로 들어와 억지로 웃어대는 성훈이를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지용아.." "응?" "네가 있어줘서 고마워." "그런 소린 쓰레기통에나 쳐박어. 이 바보야!" + + + + + 재수술에 재수술. 수술실로 들어간지 4시간이 훨씬 지났다. 피투성이가 된 남편이 자신의 동공속으로 들어서자 은주는 쓰러지려는 몸을 추스리면서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자신을 위로하려고 그녀의 손을 꼭 붙들어주는 유모는 눈물만 글썽거리고 있다. "아가씨.. 우리 도련님.. 흐흑.." "울지마. 유모." "불쌍한 우리 도련님 어떡하면 좋아요." "지원씬 죽지 않았어! 울지 말란 말이야!!" 해외로 나간 은장군 내외에게 연락을 했고, 도련님이라고 칭해야 하는 수원이에게도 연락을 취한 상태였다. 하얀 가운을 입고 난감하게 입을 열던 의사의 말에 의하면 가망이 없다고 맘에 준비를 하라는 거였다. 은주옆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하고 꼭 문상을 온 듯 그녀를 안스럽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비서." "네.." "강성훈이라는 사람." "........" "연락할 수 있을까요?" "출판사를 통해 수소문을 해본다면.." "시간이 없어요. 최대한 빨리 연락해 보세요." "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지원이의 마지막 길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의 가슴이 무너져 버린만큼 성훈이의 가슴도 무너지고 찢겨지기를 바란다. 평생을 살며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멍이 되기를 소망한다. 은주에게 끓어오르는 분노가 모두 성훈이에게로 퍼부어지고 있었다. '내가 불행해지는 만큼.. 당신도 불행해져. 평생을 살며 행복이란 건 느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릴거야. 당신이 내게서 지원씨를 뺏어간 만큼 고통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거야. 시작 같은 건 못하도록 당신 삶을 부셔 버릴거라구..' 은주는 통증이 느껴지는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아가야, 걱정마.. 엄만 강해질거란다. 엄만 쉽게 쓰러지지 않아. 네 아빠가 없어도.. 엄만 잘해 낼 수 있어. 처음부터.. 엄만 혼자였으니깐..' + + + + + 그들이 달리는 곳. 벽이 아닌 무한히 펼쳐질 세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끝이 없이 돌고 도는 바닷물에 그들의 눈물을 안겨주고 부서지는 파도속으로 그들의 절망을 보관하기로 한다. 성훈이의 선택이 모순이라는 것을 지용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선택받기를 원했다. 성훈 역시 모순의 어느 한 쪽임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엄만 내 눈빛을 언제나 처량하다고 나무라곤 했었어. 앞에 앉은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못하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내 눈빛이 엄만 꽤나 싫었던 모양이야." ".........." "이유없는 주눅이 들어선 눈치나 보는 내가 엄만 못 마땅하셨지. 눈 좀 바로 뜨라고 혼이 났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거든." ".........." "그날.. 난 할머니 집으로 끌려가고 있었어. 엄마와 아빠가 많이 바빠서 날 돌볼수가 없다고 했었거든." ".........." "자랑스런 아들이 아닌 엄마에겐 치욕스럽던 아들.." ".........." "내가 믿고 자랐던 아빠의 피는 내속에 없었어." ".........." "하와이행을 선택했던건.. 버림받기전에.. 내가 선택하고 싶었거든." ".........." "더 이상 버림받으며.. 눈치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았어." ".........." "끌려 다니기보다는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는데.." ".........." "하와이에서 날 기다린건.." '은지원.' "하핫. 아니다." 성훈이는 어머니를 너무 사랑했었다. 어머니의 과거가 들통 나기 전까지 성훈이는 행복한 아이. 행복밖에 모르던 청랑한 소년이었다. 해맑게 웃는 법밖에 몰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비타민 같던 소년이었다. 누구든지 성훈이를 안고 싶어 할 정도로 작고 예쁘장한 소년이었다. "바람이 참 차다." 눈물이 맺혀 있는 눈동자가 발밑으로 떨어지자, 지용인 자신의 목에 감긴 목도리를 풀어 성훈이의 목에 매어 준다. '형에게 못했던 말을.. 왜 너에겐 이렇게 쉽게 쏟아져 버리는 걸까? 아마도 세상을 적으로 안고 사는 형에겐 내가 빛이 되고 싶었나봐. 세상에서 밝은 빛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비춰주고 싶었나봐.. 아니.. 실은 형에게 난 불쌍한 놈으로 보여지기가 싫었어. 내가 제일 두려워했던 건 형에게 동정받는 나였을거야. 내 아픔보다 형의 아픔을 난.. 안고 싶었어. 그리고 내 아픔은 너에게 떠넘기고 있는거야. 지용아, 나.. 참 못된 놈이다. 그치?' 추위는 조금도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성훈이의 손은 얼어 있었고, 한줄기 길게 그어진 눈물의 강은 모진 바다 바람에 꽁꽁 얼어 버렸다. 이 추위속에서 성훈이를 따뜻하게 해줄 만한 곳은 어디일까? 몇 척의 배를 안고 부드럽게 흔들어주는 바다의 출렁임을 철난간 앞에 서서 지켜보았다. "널 이렇게 바다 앞에 세우고 싶었어." "그래.. 난 바다 앞에 서 있어." "왜 난 네가 밉지 않을까?" "바보니깐. 넌 참 바보야." "후훗. 바보라?" "바보니깐 나같은 놈을 좋아하지." 세상을 다 살아버린 듯한 미소가 지용이의 뼈를 시리게 한다. 차가운 바다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 버리도록 하는 그런 미소. 지용이의 손이 어깨를 타넘어 성훈이의 머리칼을 살며시 헤집고 있었다.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는 지용이의 손끝의 감촉을 그대로 느끼며 성훈인 고개를 내 저었다. 그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를 털어내고 싶다. 그가 안겨주는 불안함을 털어내 버리고 싶다. "지용아, 우리 저기 방파제까지 누가 먼저 도착하나 내기하자?" "내기?" "진 사람이 호텔까지 업고 가기!" "싫어! 내가 질게 뻔한 내기인데.. 난 길어서 바람의 저항을 많이 받는다구." "길어 봤자, 네가 얼마나 길다구..--+" "너보단 크잖아." "시작!!" "야, 강성훈!" + + + + + "까꿍~" 문을 열자마자 얼굴을 들이미는 수원이가 살인적인 미소를 품고 재진이에게 장난을 걸어온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수원이를 바라보는 재진이가 그의 장난을 받아치지 않는다. "에게, 모야? 왜 표정이 그려?" "수원아, 빨리 병원으로 가." "어?" "네 형이 위독하데.." "형..?" "네 이복형 말이야." ".........." 굳어지는 얼굴로 변해선 집안으로 들어서는 수원이. 재진이의 심각한 얼굴을 무시하고 겉옷을 벗고 소파위로 앉았다. 탁자위의 있는 담배케이스를 만지작거리다가 TV 리모콘을 집고 전원버튼을 눌렸다. 잠시 후 들려오는 쇼 프로그램의 진행자 음성이 난잡하게 들려온다. '삼류 코메디같구나. 다 죽어 간다니깐 기분이 묘하네..' "교통사고래. 오늘 연락이 왔었는데.. 네가 들어오면." "난..." "많이 안좋데. 병으로 투병중이였는데, 교통사고까지 겹쳐선.." "난 형같은거 없어." 『 이마의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그는 자신을 띠껍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휭하니 패인 두 눈은 석탄같이 까맸고, 그 석탄속에는 섬광이 머무르고 있었다. "지원아, 네 동생이란다." "쳇." 쌀쌀맞은 표정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눈에 겁을 먹었다. 어머니를 따라 대궐같은 큰집으로 들어왔던 그에게 따뜻한 시선이라곤 없었다. 낯선 눈빛들. 낯선 공기. "수원아, 인사해야지.." "엄마.." 무섭게 쏘아보는 지원이의 눈빛에 잔뜩 겁을 먹은 수원인 엄마의 치마뒤로 숨어 지원이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쉬펄, 별게 다 기어 들어오네." 벌레보듯 혐오스럽게 쳐다본다. 너무나 까맣고 깊어서 빠져 버릴 것 같은 눈동자로.. 독화살같이 공포스러운 눈빛으로. "소리 지르면 죽을 줄 알아!" 눈에 띠면 죽지 않을만큼 맞았다. 처음에 맞을 때만 아프고 몇 대 맞다보면 어느 정도 견뎌 낼 수 있었는데.. "윽!" 지나치게 착한게 지원이의 폭발하게 만들었다. 수호천사나 된냥 자신을 감싸주는 동생의 순수한 마음을 지원인 항상 삐뚤어지게 해석해 버린다. "내 동생이라구? 첩자식 주제에 내 동생이라고 떠벌리고 다녔어??!!" "형.." "쉬펄 학교에 소문 다 났잖아!!" "난 그냥.." "다신 아는 척 하지마. 재수없어!" "엄마! 엄마!!" 방은 몹시 어지러져 있었고, 수원이의 어머니는 공포에 떨며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엄마!!" "수..수원아.." "누가 이랬어?? 우리 엄마한테 누가!!" "지원이.. 지원이 그 아이가.." "응?" "엄마 무서워.. 수원아.." ".........." "흐흑.. 엄마 너무 무섭다." ".........." "수원이가 엄말 지켜줘." 어머니의 왜곡된 사랑. 열애끝의 종자는 수원이. 두려움의 떨고 있는 어머니는 수원이의 키보다 더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작아 보이는 어머니.. 어머니는 가녀리게 어린 수원이에게 기대고 싶어한다. "울지마. 울지마.. 엄마.." 억울하게 맞을때도 두 주먹을 쥐어 본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눈을 부릅뜨고 지원이에게 맞선적도 없었다. 어머니가 당부한 것처럼 이를 악물고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에게 상처를 입혔다. '다신 형이라고 부르지 않아.. 이제 참지 않을거야. 내겐 형이란 없어. 내겐 아버지도 없어.. 난.. 엄마면 돼. 울지마. 내가 엄말 지킬게. 지원이 쫓아낼게. 엄마 눈에 띄지 않게.. 먼 곳으로 쫓아내 버릴게..' 』 ... 내가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온지도 모른다.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까지 망가지지 않았었을지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O.N.E] 영상소년. 97)******* 뫼비우스의 띠. (‡) 호텔로 들어선 성훈이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한없이 적막했다. 성훈이의 세계가 이미 까맣게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지용인 알지 못했다. 성훈이는 소파에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잠이 든 그의 얼굴을 지용은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몹시 지쳐 흔들어도 깨지 않을것만 같다. 건들이지 말라고 애원하는 표정 같았다. "녀석, 피곤했구나.." 성훈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지용이가 쓸쓸한 표정으로 나즈막히 내뱉었다. "깨우지 않을게. 네가 깰때까지 그냥 쳐다만 볼게.." 성훈인 금빛이다. 지용이의 시간속의 아침같은 존재. 성훈이의 웃음소리는 라일락 향기였으며, 눈빛은 바다처럼 깊고 고요했다. 성훈이란 존재는.. 지용이에게 평화. 위안이었으며 사랑이었다. 새벽이 뿌옇게 밝아올 때까지 지용인 성훈이의 맑은 얼굴을 바라 보았다. 성훈이의 조그만하던. 순수했던 세계는 아름다웠다. 샘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이른 아침의 맑고 고운 샘이었다. "지용아.." 이른 아침, 눈을 뜬 성훈이 지용이 눈속에 해맑은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우리 후니 보고 싶어서.." "핏. 이제 거짓말이 입에 붙었구나." "후훗.." "볼살이 빠졌어." 허상의 빛이 성훈이의 눈속 깊은 곳에서 술렁거린다. 지용이를 안스럽게 바라보는 성훈이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얼굴로 향했다. "우리 지용이 살이 많이 빠졌네.." "........" "다이어트도 안했는데.. 살이 많이 빠졌어.." "........" "전에 통통했던 볼살이 사라져 버렸어.." 속이 상해서 울먹이고 만다. 지용이의 볼을 매만지던 성훈이가 지용이의 얼굴을 끌어들인다. 울먹이는 입술로.. 떨려대는 입술속으로 그의 얼굴을 인도한다. 슬픈 입맞춤. "미안해.." 옹알거리듯.. 불정확한 발음으로 그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미안하다고.. 겨울햇살은 그들의 머리위로 떨어지고 인도하던 손 주인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지용이의 손이 급하게 성훈이의 얼굴을 정지시켰다. "섭섭해지잖아. 그런 소린 하지마.." "나 자꾸.. 너에게 미안해." ".........." "나 정말 나쁜놈이야. 흑.." "왜 그런 소릴해?" "모르겠어. 자꾸 미안하기만..." 말끝을 흐리는 성훈이의 입술에 지용이의 검지를 대본다. 사막처럼 바짝 말라 있는 입술을 촉촉하게 젖혀주고 싶다. "지금부터 나만 생각해줘." 자신없다는 듯 끄덕거리는 성훈이. 그런 성훈이의 목부위에 입술을 데였고 조금씩 달아오르는 지용이의 몸이 성훈이의 몸위로 올라탔다. + + + + + 잠들어 버렸다. 이제 눈은 뜰수가 없다. 그는 이제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석탄처럼 까맣던 눈동자.. 강하게 쏘아내던 그만의 빛은 없다. 그의 아이같던 미소도.. 볼수가 없다. 은지원이란 빛은.. 세상에서 영원히 꺼져 버렸다. 그는.. 길고긴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삐-------------- 어두운 얼굴로 나오는 의사의 말에 머리속이 멍했다. 굳건히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술방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생명력을 잊고 멀고 먼 나락에서 비추는 듯 했다. 눈물같은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믿기 싫은 눈으로 수술실이라 적혀 있는 표말을 멍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 외엔 은주가 할수 있는건 없었다. 잠시후 유모의 서러운 통곡이 쏟아져 나왔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은주의 가족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위로의 말만 반복할 뿐이다. "지원씨.."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속이 답답했다. 불을 환히 밝힌 6병동 건물이 망망대해를 떠가는 한척의 여객선 같았다. 완전히 어둠속에 갇힌 느낌이다. "도련님.. 흐흑..도련님!!" 흐릿한 눈길이 점점 뿌해지더니 표말에 적혀 있는 글자 따윈 보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조심스럽게 뒷처리를 하려는 회사 간부들의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은주가 실신할까봐 의사에게 뭐라고 당부하는 소리도 들린다. "사모님.." 이비서가 다가와 은주를 부축하려 들자 그녀는 미미한 힘으로 저항한다. "연락.. 하세요. 강성훈.. 그 사람에게.." "네?" "지금 당장.. 지금 당장 그 사람에게!!" 몸에 있는 기력을 모두 끌어 모아 소리를 지르고 있다. 가슴속이 찢겨지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분열된 의식 속에 아련히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앞이 핑 돌고 깜깜하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마침내 밑동이 잘려 중심을 잃은 나무처럼 픽 쓰러진다. "아가씨!!" "사모님!!" "은주야!!" 맥이 풀린 시선으로 병동 천장에서 발하는 빛을 올려다본다. 천장의 빛이 눈부시다고 생각할때쯤 이제 막 도착한 은장군의 모습이 들어온다. "아가!!" 은주의 손에 꼭 쥐여져 있던 손수건이 슬로 모션으로 나뒹군다. '지금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어요. 꼭 악몽속에서 시달리는것만 같아요. 절 장악했던 지원씨가 저의 감각을 모호하게 만들어요.. 전 기다렸어요..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그런데.. 끝까지 전.. 아무 것도 아니었지요..' "아가!!!!" '많이 참아왔어요. 그 차갑기만 하던 눈만 보며.. 이를 악물며 참아왔어요.. 하지만.. 아주 가 버렸어요. 이젠 볼수도 없게 가 버렸어요.. 전 더 참을 수 있었는데...' "아가씨!! 정신차려요!!" "하열을 하고 있어요!!" "의사 불러요!! 간호사!!" + + + + + 창문을 닫았는데도 거칠게 부는 돌풍이 은밀한 방으로 들어오는 듯 했다. 지용인 셔츠를 등에 느슨하게 걸친 채 성훈에게 다가왔다. 새하얀 실크 셔츠속에 숨겨진 지용이의 허리선이 요염하게 비추어진다. 천천히 다가오는 지용이의 눈빛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거친 입술에 비해 한없이 반짝거리는 입술빛을 어느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고 싶어진다. 성훈이의 뜨거운 손을 끌어다가 지용이의 여린 가슴에 대 놓았다. 오른손 손바닥으로 그의 심장을 느꼈다. 크게 파열할 듯이 뛰고 있었다. 성훈인 손으로 듣는 그의 심장소리에 집중했다. 뜨겁게 끓고 있는 용광로의 철물과 같은 그가 자신을 안아주려고 한다. 성훈인 지용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용이의 손이 자연스럽게 성훈이의 바지 지퍼를 내렸고.. 아픈 기억에 매달리기 싫은 성훈인 지용이의 손길에 집중 시켰다. "성훈아.. 사랑해." 하얀 가슴속으로 파고든 손이 바빠지고 성훈이의 귓볼을 거칠게 탐닉하는 지용이의 혀의 감촉에 성훈인.. 흥분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지용아.." 지금까지 버티어 온 제방이 무너져 버린 듯 막대한 수력이 밀려온다. 육체와 육체로만 달리는 원초의 아담으로 새로 태어났다. 발가벗은 남자로, 천박하고 솔직하고 동물적인 욕망만을 남긴 순수한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아아----" 하얀 등을 물어뜯는 거칠어진 호흡. 쾌감을 전달하는 신음소리가 언어 이전에 있었던 오열같았다. 성훈인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워진다. 가벼워진다. 그리고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무겁게 누리기만 하던 과거속에서 성훈인 자유로워지고 싶다. '이제 떠나. 내속에서 형이.. 이제 그만 떠나라..응?' 그러나. 끝내 성훈인 울음을 터뜨렸다. "그만!!" 성훈이의 몸 위를 장악하던 지용이의 움직임이 멈춰 버린다. 싫어. 멈추기 싫어!! "미안해.. 미안. 하지만 건들이지마. 그냥.." ".........." "그냥 이대로 날 내버려둬.." 성훈이의 등에 지용이의 입술이 와 닿는다. 매끄러웠다. 조금씩 억제된 호흡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언제까지 기다릴까?" ".........." "휴우--- 강성훈, 널 죽이고 싶어.." ".........." "그리고.. 네가.." ".........." "너무 무서워.." 한숨 어린 지용이의 음성이 힘없게 울려 퍼진다. ― 미안해 지용아.. 미안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형 생각이 나.. 형이 마치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성훈인 아직도 껍질을 벗지 못한 채 이 말을 입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리고.. 카페트 위에 엎드린 채 자신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가슴 잠시만 잡고 나.. 울께. 조금은 서럽게 울어도 괜찮겠지..그치? 쌓여진 원망과 그리움에 네 가슴 적셔가도 너.. 이해 할거지.. 그치? 혼자 쭈그리고 울어도 괜찮지만 왠지 오늘은 널 잡고 많이 소리내어 울고 싶어.. 넌 아무말 할수 없겠지.. 그치? 나처럼 아무말 할순 없겠지만.. 네 가슴 많이 아프겠지.. 무얼 바라는 게 아니야.. 다 되돌리자 우기려는 거 아니야.. 아무것도 원하는 거 없지만.. 왠지 널 잡고 나 서럽게 한번만 울고 싶어.. PS. 절 일깨워주셨던 무라카미님과.. 잊지않고 기다려 주신분들께 너무 감사를 드려요. 한분한분께 제가 무엇으로 보담을 드려야 할련지 막막하기만 하네요. 부족하기만 한 제가 정말 살아 있음을 느끼네요.. 놈 읽어주신 모든분들.. 사랑합니다. 그리구 행복하세요.. TO. MELODY21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이기심..." 이 한구절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네요. 님의 글에 도취되어 놈이란 소설을 되집어 보네요. 님의 글..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 [O.N.E] 영상소년. 98)****** 남겨진 사람들. <†> 빛이 사라져 가는 시간, 서서히 어스름이 내리며 세상 전체의 풍경이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것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수는 없었다. 모진 풍파 한가운데서 혈투를 벌이던 끔찍스런 광경이 스노우 모션으로 펼쳐진다. 사랑이었고. 사랑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다 하여도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들의 일상을 이탈해 버렸을지 모른다. 독이 약이 되는 외로움.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 "정말 괜찮겠어?" "응." 미지근하게 데워진 우유를 성훈이의 손에 쥐어 주고 지용인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무언가. 커다란 것을 상실한 사람처럼 허전한 시선으로 멈춰있는 성훈이에게서 극심한 공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타는 동안 뒷좌석 가서 자라." "괜찮아.." 괜찮다는 말도 형식처럼 들려온다. 먼 시선으로 자꾸만 무언가를 부르짖는 것만 같다. "내가 안 괜찮단 말야!!"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성훈이의 쓸쓸한 몸짓에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가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사뭇 막연한 방향으로 펼쳐졌다 아니겠지..하면서도 자꾸만 지원이의 얼굴이 떠올려져 지용인 미칠 지경이다. "나, 정말 괜찮아.. 지용아." 억지스런 미소다. 안심시키기 위해 짜 맞춰진 미소일 뿐이다. 구체성 없이 분위기만으로 다가오는 공포감. 그리고 염두에 둔 특정 대상도 없이 터무니없이 드넓어져 가는 적대감. 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겹다. "지용아, 나 서태지..노래 틀어줘. 듣고 싶어." 아주 천천히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우유에 입을 잠그는 성훈이. 마음의 빙점. 따뜻했던 우유가 얼음물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강성훈.." "응?" "나, 사랑하니?" "어? 음.. 그래." 견딜 수 없는 자괴감과 이유를 알수 없는 불안감이 묘하게 뒤섞이는 시간이다. 껍데기. 어느것에도 욕심이 없는. 그저 허한 음성이었다. 지용이의 내려앉는 가슴을 추스리기엔 속수무책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어색하게 끝낸 성훈이의 말을 이어 나간다. "집에 가면 따뜻한 물에.. 목욕이나 하자." "응.." 지용이의 애마는 조금씩 움직였고, 침묵의 공간을 채우는 건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이였다. + + + + + "사모님 그 몸으로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이틀 사이에 쾡한 눈으로 변해 눈물만 쏟던 은주가 온힘을 모아 누구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차 대기 시켜요." "사모님!" "가볼 곳이 있어요. 우리 지원씨.. 땅속에 묻히기 전에.. 꼭. 봐야하는 사람이 있어요." "사모님. 지금 사모님 몸은.." "그 사람의 눈을 보며 지원씨의 죽음을 알려야 해요." "몸조리를 잘하셔야 해요. 지금 이 상태로 나가셨다가는 위험하다구요." "그 사람 표정이 궁금해요.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사모님.." "내 아이.. 흑.. 불쌍한 내 아이까지 그 사람이 뺏어 갔어요. 유일하게.. 내가 소유할 수 있던.. 지원씨의 흔적인데.." 입술을 부르르 떨려대며 말하는 그녀.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다. 자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어둠을 스스로 받아 들어버린 사람같았다. "하지만 이몸으론 도저히 나가실 수 없으세요." "만나야 해요. 그 얼굴.. 그 뻔뻔스런 얼굴. 다신 웃지 못하도록 만들거예요. 내가 아픈 만큼.. 그 사람도 아파야 해요." 순간 은주는 말을 딱 끊고 진공 상태로 들어가 버린것처럼 잠잠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천연한 얼굴로 창너머로 비춰오는 햇살에 얼굴을 내밀었다. "지원씨.. 내가 정말 사랑한 사람이예요.. 그 사람을 아프게 했어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쥐고는 그 사람을 혼자 버려 뒀어요. 지원씨.. 지금쯤 혼자서 많이 외로워 할거예요. 강한것처럼 보이지만.. 아뇨. 지원씬 막 태어난 아기처럼 연약하기만 해요.. 사람들은 사고만 치는 골치덩어리로 손가락질 하지만.. 더 이상 외로워 견딜 수 없어서 어린냥을 부린거예요. 그 사람의 눈을 보면 알아요. 곧 터질 것 같으면서도 억지로 참아내는 슬픈 눈이죠." ".........."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전 그를 감싸주고 싶었어요. 까만 눈동자 사이로 감춰둔 눈물 때문에 혼자 둘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그 사람을 혼자 보내야만 해요.. 후훗.. 그럴 순 없지요." "아가씨.." "억울해요! 너무 억울해요!! 전 그림자처럼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만 했는데.. 한번도.. 단 한번도 날 불려주질 않았어요! 오로지.. 오로지 강성훈, 강성훈 뿐이였어!!" "아가씨 얼굴이 너무 창백하세요. 침대로...." "후후후훗.. 강성훈. 이 사실을 알고 살수 있을까요? 픗, 죽어야 해요. 죽어서 상처 밖은 사람들에게 사죄해야 해요. 아니 제가 죽게 만들거예요. 그런 암적인 존재는 죽여버려야 해요. 죽어서 다신 웃지도 못하게 만들거예요." "아가씨!" "죽어야 해. 죽여버릴거야! 흐흣.. 흐흐흣.." 오싹한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보이는 은주 때문에 이비서의 간담이 서늘해져 온다. 갑작스레 현기증이 인 은주는 왼손의 엄지와 검지로 두 눈두덩을 꾸욱 누르고 중심을 잃고 있는 신체의 균형을 찾으려 했다. '날 한번만이라도 찾아 줬더라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을텐데.. 내 이름을 한번만이라도 불러 줬더라면... 이렇게 아프진 않았을 거야..' + + + + + 사랑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기 위해 오히려 사랑을 멀리 한 기억이 있다. "화 났니?" "아니.." 동네어귀로 들어설 무렵 성훈인 환한 미소로 그의 환심을 사고 싶어한다. 어두운 얼굴이 맘에 걸렸는지 지용이의 손에 손을 얹는 성훈이. "웃겨 줄까?" "됐어.." "집에 가자마자 맛난 거 해줄까?" "됐어.." 건조하게 내뱉는 지용인 성훈이의 체온에도 차갑게 답할 뿐이다. 갑자기 밀려드는 피로와 허기. 그리고 갈증이 성훈이를 고문하든 듯 하다. "나 이제 잘할게." "........." "지용이 맘 상하지 않게.. 성훈이가 노력할게." 정해진 도로표지판을 따라 움직였던 하루.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 성훈이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고는 지용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떻게 노력할건데?" "아프지 않게.. 속상하지 않게." "너. 날 사랑해라. 그러면 되는거야." 지용이의 시선끝이 예리한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몹시 지쳐버린 그의 시선은 성훈이를 보는 것마저도 힘에 겨운 듯 하다. "사랑하고 있어." '거짓말..' "사랑해. 지용아.." '거짓말..' 곁에서 눈치만 보는 사람. 너무도 잔인하게 지용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지용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걸 찾아야 한다. 이젠 곁에 있는 이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한다. 더 이상 지원이에게 얽매어 지용이를 아프게 하는 행동따윈 하지 말아야 한다. 고지용... 그도 성훈이의 사랑이니깐. "지용아.." "........." "아침에 깰때마다, 나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해." "........." "이제부턴 행복하게 살자. 세상 끝날때까지. 행복하게만 살자." "........." "그 반지 말이야.." '뭘 말하고 싶은거니? 또 거짓을 말해놓고 날 묶으려 하는거냐?' "그.. 반지 끼워죠." "........." "커다란 교회가서.. 반지 끼워죠." "쳇." "나 이제부터 고지용의 사람으로만 살게.. 잘할게." "강성훈.." "우린 행복할거야. 우린." "마음에 없는 소리하지마." "초라하겠지. 그리고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을거야.." ".........." "하지만 잘할거야. 네가 내곁에 있다면.. 난 잘해 낼거야." '믿어야 하는거냐? 거짓이란게 눈에 보이는데도 난 믿어야 하는거냐?' "너만 바라볼께. 그러니깐.." "후나.." "지용이 네가 날 지켜줘. 나도 널 지킬게.." 성훈이의 바람같은 미소가 햇살속에서 뿌옇게 퍼져 올랐고 지용인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지킬게. 성훈이 너, 내가 지킬게. 네가 내 곁에 있다면." "고마워. 지용아." '이번에도.. 널 믿어야 할까? 그런데.. 나.. 이번엔.. 이번만은 이번만큼은.. 꼭 믿고 싶다. 내 사람이 되겠다고.. 나만 바라보겠다고 말하는 네말... 이번엔.. 믿고 싶어.. 이번엔 꼭 믿고 싶어.....' 황혼이 내려 앉을쯤 도로를 타고 들어오는 하얀 티브론에 이비서가 고개를 돌려 은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핏기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이 고집스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사모님.." 수술부위가 아직 아물지 않은 은주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가득하자 으레 걱정이 된 이비서가 은주에게 말을 걸어본다. 어둠은 언제나 감정 여과의 고독한 시간대를 비집고 촘촘하게 밀려들었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은주가 차문을 열고 일어서려 하자 이비서가 신속히 일어나 은주가 열던 차문에 손을 데었다. "바람이 찹니다. 무리하시면.." "제 걱정은 말고 차안에서 기다리세요." "아가씨.." "전 괜찮아요." 야무진 여자다. 자신이 모셨던 지원이보다 더 강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가씨 저기.." 이비서의 시선이 옮겨지는 곳. 그곳에 하얀 티브론이 세워져 있었고 차속에서 내리다 말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성훈이를 볼 수 있었다. 그 눈빛은 당황해 하고 있었고,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강성훈씨.." 이를 악문 음성이 성훈이에게 날카롭게 달려든다. 은주의 눈빛이 저렇게 차갑고 날카로웠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성훈이의 등 너머로 보이는 지용이가 성훈이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쥐고 영문을 토로하는 듯 했다. "지용아, 먼저 들어가 있을래?" "어?" "빨리 들어갈게. 잠깐 얘기만 하고.." "왜? 저 사람 누군데??" 예측할 수 없는 순간. 느닷없이 쓰러져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의식의 저편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지용인 몹시도 초조해 하며 성훈이의 어깨에 힘을 주었다. "누군데? 누군데 그래?" "아는 사람." 성훈이의 눈은 낯선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곧 쓰려져 버린 것 같은 창백한 얼굴의 그녀도 지지 않겠다는 듯 성훈이를 노려보고 있다. 저렇게 차갑지는 않았는데. "먼저 들어가. 곧 들어갈게.." "그래도.." "별일 아니야. 성훈이에게 맞기구 들어가 있어. 응?" 은주에게 향해 있던 시선이 지용이에게 돌렸고 시선아래로 넘칠 듯한 미소를 보이는 게 조금은 안심이 된다. "빨리 들어와야해." "응!" "시간 잴거야.." "알았어." 경쾌하게 답하는 성훈이가 지용이의 엉덩이를 툭툭치며 '이쁜지용이'라고 속삭였다. 성훈이의 속삭임에 싱긋 웃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물 받아 놓을게." "응." 성훈이를 놓아두고 집으로 들어선 지용인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고 테라스 창 앞에 서서 두 사람을 엿보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O.N.E] 영상소년. 98)****** 남겨진 사람들. <‡> 겨울만의 매력적인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회오리치듯 불어온다. 지원이의 그녀와 성훈이의 거리를 인식시켜주는 바람. 그 바람이 실어 있는 건 지원이의 숨결이다. 성훈이의 볼을 시리게 만드는 매서운 바람. 하지만 성훈인 싸늘하다는 느낌보다 따뜻하다는 착각속에 빠져들었다. 섬세하게 그의 볼을 어루 만져주는 지원이의 손길.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먼저 입을 연쪽은 성훈이었다. 두 볼이 붉은 기운으로 가득 차버린 성훈이. 성훈이의 질문에 피식 웃는 그녀. 그녀는 모든 것이 텅 비워버린 사람같다.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린.. 초라한 바비인형. 거칠어진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여유있게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린 듯 했다. "잘 지내신 듯 하군요." 이를 악문 음성이 성훈이에게 들려온다. 성훈인 은주의 말에 끄덕이다가 고개를 발밑으로 내려놓았다. "지원씨가 당신을 보고 싶어해요." ".........."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데요." "........." 은주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가라앉으려는 자신의 가슴을 붙잡으러 노력했다. 태연한척 하지만 그녀의 가슴속 깊이 파고든 슬픔을 감출수가 없다. "당신 이름을 불려요." "형곁엔.. 당신이 있잖아요." "흣. 그래요. 제가 있어요. 하지만.." ".........." "당신만 찾아요." ".........." "지원씨 만나주세요." "전..."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 사람.. 만나주세요." 성훈인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버린 것 같았다. 지원이의 이름만 들어도 잠들었던 곳곳의 상처가 살아남을 느낀다.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 따뜻한 목욕물에 자신을 싣고 싶다. '지용이 곁으로 가야지..' 하지만 얼음조각처럼 꽁꽁 얼어버린 자신의 몸이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이 그립다고 버릇처럼 말해요." "잘못 찾아오셨네요." "그 사람.. 당신을 보기 전엔 눈도 못감아요." "전 가지 않아요." "가야해요." "보셨잖아요. 제곁엔.. 다른 사람이 있어요." "가야해요." 고집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눈이 흔건히 적혀 있다는 걸 성훈인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자신의 그리움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데에만 전념한다. "마지막이예요. 당신은 가야해요." "그만 두세요. 뭐라해도 전 가지 않아요." "후훗.." 은주는 잠시 말을 끓고는, 왼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흐르는 눈물을 세차게 닦아 버렸다. 들리지 않게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재밌군요." 은주는 습기 찬 미소를 띠고 성훈을 향해 서글프게 말했다. "당신. 지원씨 사랑한 거 맞나요?" ".........." "진심으로 사랑했나요?" ".........." "지원씨가 당신만.. 찾는다구요. 아픈 몸으로 당신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구요. 사랑했다면 한번쯤 찾아가야 하는거 아닌가요? 지원씨에 대한 당신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였나요? 그 사람이 당신만 찾는다는데 왜 그 사람 곁에 가질 않나구요?" "돌아가세요. 전 지원형 앞에 나타나기 싫으니깐.." "왜죠? 사랑한 거 아닌가요? 지원씨 왜 안만날려고 하는거예요??" "형은 절 잊고 세상에서 최고의 가장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최고?" "당신의 바램이기도 했잖아요.. 그리고 당신 뱃속에서 자라나는 아이의 미래도 생각해야 하구요." "그렇게 생각이 깊었나요? 제가 당신을 과소평가 한건가요?" "다신.. 절 찾아오지 마세요. 전.. 지원형 안 만나요. 다시는 떠올리지도 않을 겁니다. 이제 당신이 형을..." "편리하시네요. 지원씨가 정상으로 살아야 하니깐 물러선다?" "............" "후하게 인심쓰는 것 같군요. 그 사람이 죽던말던 정상으로 살아야 하니깐 저한테 놓아준다는 식?" "형은 좋은 아빠가 될거예요.. 형, 곁보기완 달리 참 따뜻하거든요." "좋은 아빠? 가증스러워요. 당신의 입속에서 나오는 거 자체가 낯설어요. 우스워요. 참으로.." 슬프고 가라앉는 분위기. 센바람이 불어 들어와 성훈이의 느글거리던 가슴을 진정 시켰다. "죄송해요.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는 것 같네요." 은주의 시선을 마주하고 힘겹게 말하는 성훈이의 눈시울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꽁꽁 얼어 있는 다리에게 명령시킨다. 움직이라고. 집으로 들어가서 따뜻한 물에 피곤을 털어내라고. ..그 물속에 눈물을 털어내라고. 성훈인 움추려 드는 어깨를 펴고 당당히 은주 옆을 스쳐 지나가고 싶었다. "당신은!" 온몸을 떨어대며 성훈이에게 고함을 지르는 그녀. 성훈인 쓰러질것만 같은 그녀 때문에 움직였던 몸을 세우고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분노로 가득 실린 얼굴. 그 얼굴엔 슬픈 아우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은주는 성훈이의 천연한 행동에 질려 피가 흐르기라도 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밉다. 성훈이가 너무 밉다. 지원이의 모든 것을 잡고 있는 이 사람이 너무 밉다. "당신, 지원씨 죽음앞에서 울 자격조차 없어!!" "..........." "당신같은 사람에게 미쳐있던 지원씨가 가여워." "..........." "차라리 천만 다행이야. 당신같은 사람 지원씨가 담고 가질 않아서!!" "네에?" 그 동안 겪어왔던 괴로움이 한순간에 쏟아져 버리는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은주를 힘없이 바라보는 성훈이. "왜? 지원씨 잘못됐을까봐 걱정되는거야?" "형에게.. 무슨 일 있어요?" "후후후훗. 무슨일이라?" "무슨 일 있는건가요? 형, 지원형 많이 아파요? 그런거예요??!!" "후후후후후후훗!!" "형 많이 아파요? 형 어디 갔어요? 미국갔나요? 얼마나 아프길래??" 은주를 다그치듯 물어오는 성훈이의 눈망울이 겁을 먹고 있다. "죽었어." "네?" "죽었다구. 당신 찾아 가다가 죽었단 말이야." "지금.. 농담하시는.. 거예요?" "농담? 농담으로 들려?" "저.. 형 잊었어요. 형 단념하라고 그런 말씀 하시는거라면." "하하핫..하하하핫.." "형이 그렇게 얘기하라고 했나요? 그런건가요? 그런거죠? 저더러 찾아오라고 그런거죠? 형이 시킨 거죠? 그렇게 얘기하면 제가 올거라고 했었죠? 말해봐요. 그렇다고!!" 성훈인 마귀의 집에 홀려서 들렀던 것 같은 섬뜩함으로 은주의 어깨를 집었다. 웃고 있는 그녀의 눈에 슬픔이 출렁거리고 있다. 당장 뚝 부러져 나갈 것 같은 불안을 발끝으로 느끼며 성훈인 어깨를 집은 손에 힘을 준다. "말해봐요!! 형이 시킨거죠? 형이.." "당신이 죽인거야. 당신이 지원씨 죽였어." "죽..었..다..구?" "당신이 저 사람과 웃고 떠들시간에.. 지원씬.. 외롭게 죽어버렸다구!" 웃음을 멈춘 그녀의 왼쪽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쏟아졌다. 독기스럽게 성훈이에게 내뱉는 말. 긴장된 상태로 은주를 바라보는 성훈이의 눈망울이 흔들리며 반짝거렸다. "거짓말." "지원씰 죽인 건 너야." "거짓말.." 고개를 몹시 흔들거리는 성훈이의 육체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다. 그것은 지쳐버린 그의 영혼이었다. 지원이를 사랑하던 성훈이의 애달픈 영혼. "넌 그 사람 죽음에 울 자격도 없어!!" "거짓말이야.." 지금까지 그는 슬픔을 거듭해 왔지만 이번처럼 받아들이기 힘든적은 처음인 것 같다. 아프다. 그냥 울 수 없을만큼 많이 아프다. 거짓말일수도 있는데. 차문 열리는 소리와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멍하니 그 자리에 허수아비처럼 서있는 성훈인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곧 넘어갈 기세로 서 있었다. 미미한 엔진소리를 내는 은주를 실은 BMW가 성훈앞에 서더니 은주의 날카로운 시선이 차창 너머로 비춰졌다. "당신은.. 내 아이마저 뺏어갔어." ".........." "죽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지원씨 무덤에서 우는 게 아니라 죽는 것 뿐이야. 죽어버려.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려. 그리고 다신 환생같은 것도 하지마." 은주는 슬픔을 씹으며 겨우 조소를 보였다. 그 조소속에는 소리없는 울음이 숨겨져 있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들로 그녀가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걸 알수 있다. "형.. 지원형.. 은지원.."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 겁에 질려 있다.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현실을 인식하고 싶질 않다. 진실이란 건 없다. 지금 성훈이에겐 진실이 필요없다. 단지.. 진실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형이 죽었대. 흣. 형이 죽어? 은지원이 죽었다?' 검은 외제차가 얼마 남지 않은 황혼빛에 번뜩거리며 그들의 공간에서 빠져나갔다. 멍하니 서 있던 성훈이의 주저앉는 모습이 지용이의 눈속으로 들어온다. '성훈아!!' 성훈이 곁으로 달려가야 한다는게 강하게 느껴져 온다. 그 곁으로 달려가 성훈이를 꼭 안아줘야 한다는게 느껴진다. 지용인 급히 몸을 움직여 성훈이가 주저 앉은 곳으로 뛰어 내려 갔다. 그리고. "성훈아, 괜찮은거야? 응?" 주저앉은 성훈이의 어깨를 집고 그의 시선을 받으려고 하얀얼굴에 눈을 놓았다. "성훈아?" 낯선 사람의 시선보다도 더 생소한 시선. 지용인 순간 섬뜩했다. "성훈아, 왜 그래? 저 여자 뭐야? 응?" "지용아.." "어, 그래. 괜찮은거지? 그렇지?" "지용아, 나 어떻게.." "응?"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거야?" "훈아.." "형이 죽었대. 지용아, 형이 죽었댄다.. 형이.. 은지원이 죽었대.." 남 얘기하듯. 전혀 모르는 타인의 죽음을 말하는 듯 입을 연다. 슬픈 눈동자가 믿지 않겠다는 듯 지용이를 쳐다보며 전혀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입에 담는 듯 하다. "성훈아, 우선 들어가자. 너 감기걸.." "형이 죽었댄다. 거짓말이겠지? 그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행동하고 있을. 지원이의 발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었다. 먼 발치에서 지원이의 존재를 느끼며 추억속으로 보내려고 마음 먹어었다. 더 이상 지용이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그와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서..성훈아! 정신차려!! 후나!!" 그런데... 그가 성훈이를 끌어낸다. 추억속에서만 존재하기 싫다며... 성훈이를 그의 곁으로 인도하려고 든다. - 성훈아. 이젠 가도 괜찮아. - 형. 지원형? 형 맞는거지? - 이젠.. 나.. 너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어. - 형, 형이 죽었대. 그 여자가 와선 형이 죽었다고 했어. - 후훗. 그래.. - 정말이야? 형 죽은거야? 아니지. 그렇지? 거짓말이지? - ....... - 형.. 너무 멀어. 왜 그렇게 멀리있어? - 너무.. 보고 싶었는데.. - 형 내 손잡아. 응? 성훈이 손잡아. 형이 내 손 잡아야지 안심이 될 것 같어.. - 미안해.. 이젠 잡아 줄수가 없어. - 응? 왜?? 왜??? - 또 다시 널 주저앉게 할 나를 알아. - 무슨 소리야? 형 무슨 소리 하는거야??!! - 저만치 가. 더 이상 내가 너 괴롭히지 못하도록.. 멀리.. 도망가.. - 형 왜 그러는거야? 내가 싫어졌어? 왜 그래? 왜??!! - 나, 잊어버려. 은지원이란 사람.. 세상에 없었다고 생각해.. 너 사는 동안은 내가 없었다고 생각해. ....... 아니다. 조금은.. 조금은 기억해줘.. - 형엉? - 조금은 기억해야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잖아. - 왜 그런 소릴해??!! - 조금은 기억해야.. 내가 덜 화날 것 같아. - 형.. 가지마! -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우리 사랑만 하자. - 형! 가지마!!! - 잊지마. 나, 은지원이랑만 사랑.. 하는 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완전한 만남. 완전한 이별... 성훈인.. 반쪽일 뿐인데.... PS. 젝키 안에서.. 행복하세요. [O.N.E] 영상소년. 번 호 : 14626 / 15844 등록일 : 2000년 02월 11일 05:31 등록자 : 영상소년 조 회 : 1445 건 제 목 : [소설] ──── 놈 ──── 99 (上) 99)****** 길에서 만나다. (上) 『 깊은 슬픔으로 몇 날 며칠을 틀속에 틀어박혀 숨죽여 울던 시간들.. 잊고자 했었기에 그만큼 수반되는 고통이라 인정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없애려 했던 시간들. 기억상실증에 걸리든지 차라리 미친 인간이 되어 세상을 향해 벽을 쌓던지.. 간절히 바랬던 시간들. 시간들.. 시간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절망의 늪에 묻혀져 버린 시간들.........』 "형 연락처! 형 목소리 들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아!! 형 연락처가 어떻게 됐더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는데!!" 성훈인 혼이 나간 사람처럼 허둥되고 있었다. 벌써 네 시간째. 눈을 뜨자마자 지원이란 이름을 반복하고 있다. 듣기 싫어. 듣기 싫단 말이야! 지용인 그런 성훈이를 납덩이처럼 차가운 낯빛으로 응시해야만 했다. "알고 있었는데, 지용인 넌 알고 있지? 형 연락처 알고 있지. 그치??" 몇 달을 두고 빌려온 행복에 대한 결심이 바삭바삭 삭아져 버리는 것 같았다. 구두발에 밟히고 유리조각처럼 부셔졌다. 사랑하는 성훈이가 밟아 버리고 있다. 자신의 부모보다 더 사랑하는 성훈이가.. '정말 믿고 싶었다구!!' "지용아, 전화 좀 해봐. 형 살아 있을거야. 확인만 해줘, 응?" '널.. 믿고 싶은데..' 고개를 뒤로 젖히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지용이.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이번만은.. 꼭 믿고 싶었다. 자신이 꿈꿔 온 행복을 성훈이가 지켜 줄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전화 좀 해봐. 응? 형 목소리만 들으면 돼. 다신 생각 안 할게." ".........." "형 생각 다신 안 할게. 그러니깐 지용이 네가.." "그만 해." "형 목소리 들으면 될거야. 한번만.. 부탁할게. 응??" "그만!" "마지막이야. 형 목소리만 들으면 평생 형 생각 안할거야.. 맹세할게. 지용아, 제발 부탁해.." "그만 하라구." "형 살아 있을거야. 제발.." 철썩----- 지용이의 입술이 하얗게 탔다. 밉다. 성훈이가 측은하게 보여야 하는데, 그가 하는 행동을 포옹해 줘야 하는데. 옛사랑의 죽음으로 충격받은 성훈이를 위로해야 하는데.. 고개가 돌아가 버린 성훈인 더 이상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래. 전화해 주마!!" "........." "은지원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확인해 주면 되는거지??!!" 분노를 누르고 수화기를 집어드는 지용이. 지원이가 남기고 갔던 휴대폰 숫자 아홉 개를 누르고 신호음을 들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지원이의 음성을 대신하는 고음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용인 재발신 버튼을 길게 누른 후 지원이의 저택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낮게 깔린 중년부인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저, 은지원씨.. 댁에 계시면 바꿔 주시겠어요?" 초조한 눈으로 기다리는 성훈이.. 하지만 지용인 아무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휘청거릴 만큼 긴 다리로 멀건히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거야? 왜 하필 이때 간거냐구!!' "뭐.. 뭐래?" '내가 성훈이랑 사는 게 그렇게 배가 아팠던 거야!!??' "지용아, 뭐래? 형 집에 있다고.." '죽으려면.. 멀리가서나 죽지. 조용히 죽어버릴것이지!!!' 눈물을 머금고 있는 성훈이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난감해 진다. 그냥 죽었다고 하면 되는 것을.. "죽....었다면 어떻게 할거니?" "무슨.. 소리야?" "은지원이 죽었다면 너.. 어떻게 할거야?" "설..설마.. 형 살아 있잖아. 왜 그런걸 물어?" 아닌 척 하며 억지스레 미소짓는 성훈이를 꼭 끌어안고 싶다. '무섭다. 성훈아.. 나 왜 이렇게 무섭니?' "지용아. 말해봐. 형 집에 있지? 그렇지?" "........" "말을 해봐. 지용아. 형 그렇게 쉽게 죽을사람 아니야. 그렇지??" "........" "그치. 지용아? 형 집에 있는거지..응?" '말하기 싫다. 입을 막고 싶어. 너 그냥 영원히 모르고 살면 안될까?' "말해봐!! 말을 해!!" '그냥 나랑 영원히...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살면 안될까?' "제발 말해줘. 형 어떻게 된거야? 응?" '모르고 지나쳐.. 그냥 모르는 채 살아가..응?' "말해!!!!" "오늘이.. 장례식이래." 말하기 싫은데, 성훈이의 두 눈에 체면이 걸린것처럼 내 뱉고 만다. 자신의 귓속으로 들어오던 중년부인의 음성처럼.. 똑같이 내뱉고 말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짓걸여지고 말았다. 침묵---- 성훈이는 정지된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긴 속눈썹을 미미하게 흔들거리지도 않는다. 예정된 비극을 다시 시도하게 될 것 같다. 멍청히 서서 자신을 쳐다보는 성훈이가 꺼낼 말이 난감하다. "거짓말.." 성훈인 기진 맥진한 채로 벽에 기대버렸다. 커튼을 젖히고, 희미하게 빛을 잃고 있는 형광등 스위치를 내렸다. 햇빛보다 전등빛 밑에서 더욱 안정을 얻을 수 있었던 지원이.. 그의 얼굴이 파노라마로 스쳐 지나간다. 아득한 울타리 안에 보호된 느낌으로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형이 보고 싶어. 형한테 가고 싶어." 성훈인 깊은 늪에서 목소리만 올려 보내는 유령처럼 말했다. 겨우 입술을 펴고 미소짓는 성훈이의 얼굴이 몹시 가엾게 보인다. 지용인 통증을 가슴으로 느꼈다. "보고 싶어.." 성훈인 정말 슬픈 얼굴로 활짝 웃었다. 고개를 숙여버리는 지용이도 꼭 그렇게 웃었다. 암담하고 억울하다는 미소.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다는 그런 미소. 전염되는 감정이었다. 뭉근하게 그 안에서도 가느다란 철사 같은 통증이 힘줄처럼 길게 끼어 들어왔다. '후훗. 나, 참 운없는 놈인가봐. 네가 온전한 모습으로.. 네가 완전하게 날 바라볼려고 하는데.. 아니 그런것도 필요없어.. 그냥 날 바라만 봐주면 되는데.. 날 바라보려고 했는데.. 이번엔 정말 그러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꼬여 버리는 거지? 성훈아, 말을 해봐. 네가 이러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응???' + + + + + 무게가 느껴지는 하늘에는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천지의 거리를 잊어버린 겨울 하늘이 존재한다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지는 일요일 한낮이었다. "수원아, 괜찮은거야?" 검은 정장으로 차려입은 수원이의 어깨가 빗물에 젖어 있었다. 두 눈가가 물기에 젖어 있지만 수원인 애써 태연하려고 애썼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도.." 재진인 침착한 시선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지원이를 애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한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우산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가서 꽃이나 던져주고 오면 되는거야." "........" "근데.. 재진아, 기분이 참 이상하다." "........" 물기어린 눈이 흐려지면서 맑디맑은 눈물을 한방울 떨어 뜨렸다. "저 자식.. 한국에 있었다면 이렇게 까지 됐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생각하지마." ".........." "수원이 넌.." "내가 내 쫓아 버렸거든.." ".........." "은지원.. 저 녀석.. 내가 한국에서 쫓아 버렸거든.." 수원인 재진이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파르르 떨었다. "쉬펄. 나보다 명줄 길 줄 알았는데..." 재진이의 어깨로 떨어지는 따사로운 미온수. 재진인 수원이의 오른 손등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를 위로하려 들었다. "저 사람 참 나쁜 사람이네.." "........" "우리 수원이 눈에 눈물 나오게 만들고.. 참 나쁜 사람이야.." "........" "울지마. 수원아.. 네가 울면 가슴이 너무 아파.. 우리 수원이 우는 건 못 보겠어.." 얼굴을 찡그린 채 우는 시늉을 내는 재진이 표정에 웃음이 나온다. "조금만. 오늘만 같이 울어주구 낼부턴 배시시 웃을게. 이렇게.." 수원이 답지 않게 잇속까지 보이며 미소를 보인다. "나도 울까? 나의 수원이도 우는데.. 병신같이 웃을수는 없잖아." "크큭.." "요렇게 울면 되는걸까? 아이고~ 아이고~~" "이재진.. 하핫.. 하하하하핫.." 배를 움켜잡고 웃어주는 반응에 몇 번 반복하다 수원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웃어주면서 보내 줘. 내세에서 행복하라고 웃으면서 보내줘.." 재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작게 미소를 보냈다. "난 정말 복터진 놈인가봐.." "응?" "밤일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위로도 그럴싸하게 잘하네.. 흐흣." "뭐어??!!" "이재진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니깐.. 아---힝---야!" + + + + + 사랑이란 것을 몰랐다. 그것을 어떻게 하는건지 몰랐다. 자신이 하고 있었는지.. 조차도 몰랐다. 은지원은.. 그랬다. "차가울텐데.. 형 많이 추워할텐데.." 미처 다가가진 못하고 먼발치에서 그가 땅에 묻히는 것을 훔쳐보고만 있다. 비가 내려 성훈이를 흠뻑 젖게 만들어 버렸다.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 왔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번만. 한번만 보고 싶어. 날 기다렸을텐데.. 날 부르짖고 날 찾았을텐데.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너무 슬프다. 아프다 라는 말은 지금 성훈이에게 위로가 되질 않는다. 두 눈에서 쉴새없이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그나마 추위가 느껴지질 않았다. 얼음 덩어리를 온몸에 대는 것처럼 싸늘한데도.. 한파에 노출되어 있는데도 성훈인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쓸쓸하게 그를 몰래 훔쳐보기만 한다. "울 자격도 없는데.. 나, 울면 안되는거지?"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 큰걸음으로하면 스무 발자국. 그곳에 지원이가 있다. 손을 뻗어서 지원이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지금.. 많이 추워할텐데.. "형, 성훈이가 왔어. 성훈이가 형, 너무 보고 싶어서 와버렸어. 참아야 하는데.. 형이 자꾸 보고 싶어서.. 흑..흐흐흐.." 곡을 참으며 주저 앉아버리는 성훈이. 그런 성훈이의 무릎으로 진흙 물이 스며 들어온다. 밤이슬에 젖은 진흙위로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었다. 지원이의 온기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는데도. 더욱 더 얼굴을 묻었다.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뿐, 인가의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곳이다. 그곳에 앉아 지원이의 얼굴을 떠올리려 들었다. 온통 젖은 그의 몸이 겨울바람에 꽁꽁 얼어만 간다. 진흙위로 열 손가락을 올려놓고 쓰러내듯 어루만진다. 하지만 따뜻하지 않고 차갑게만 느껴진다. "형 졸리다. 형이 팔베개 해줄래?" 눈물이 흘러 왼쪽 뺨에서 콧등을 스쳐 오른 쪽 뺨으로 흘러갔다. 켜켜이 쌓여 있는 어둠. 그 속에서 비를 맞이한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움직여야 하는데.. "형 참 나쁜 사람이야. 이젠 잊을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리네.. 성훈인 아프게만 하고.. 혼자서 편하게 누워 있으면 다야? 너무 나빠. 너무 하잖아.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나, 형 잊고 싶은데.." 조용히 눈을 감아 본다. 성훈이의 감은 눈 위로 펼쳐지는 하얀 방의 추억. 그곳에 지원이가 기다리고 있다. 손을 들어 올려 손짓하고 있다. '웃고 있네. 형이 웃고 있어..' 몸에 남은 열기가 무덤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성훈인 지원이의 하얀 방으로 조금씩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잠시 후.. 까맣게 지워져 버리고 만다. 하얀 방도.. 웃고 있던 지원이도. 그의 몸에 다른 체온이 느껴진다. 따뜻한 물기도 성훈이의 볼 위로 느껴진다. '형 곁에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안될까?' 한숨을 쉬고 한숨을 쉬고.. 한숨을 쉬며 지용인 오랫동안 성훈이를 쳐다보았다. 진흙 범벅이 된 성훈이를 안고 지원이의 무덤을 등뒤로 걸었다. "강성훈. 너, 참 잔인한 놈인거 아니?" 자신을 비웃는 조소를 품고 성훈이의 향기를 맡았다. 성훈이의 향기는 그의 폐속에, 깨알같은 폐낭속에, 실핏줄 끝까지, 혈관을 타고 허연 뇌수의 주름 사이사이마다 스며들었다. 성훈이의 향기.. 그만의 향기. 어쩌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서 나는 평범한 향기일지도 모르는데.. "마지막이야.. 이젠 생각하지마." "........." "마지막이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마지막이다. 알았지? 이제 은지원 생각 안할거지? 그럴거지?" 조수석에 앉힌 성훈이의 감은 눈에 손을 대보다가 고개를 저어버린다. "아니.. 따라 갈려고 발버둥 칠거야. 안 봐도 뻔해.. 넌 그러고도 남아. 그러니깐 넌 잔인한거야.. 나, 고지용이 어떻게 되든 상관안할거야.. 내가 울던 말던.. 내가 아파서 미치던 말던. 넌 상관안할거야.. 나따위엔 관심도 안 갖고.. 넌 은지원 따라가겠다고 할거야. 넌.. 그럴거야." "........." "근데, 성훈아 그러지마." "........." "네가 그러면 난.. 난.." 온 몸이 젖어버린 성훈이에게 걸치고 있던 검은 롱코트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지원이형.." 지긋이 감겨진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나온다. '개새끼..' 코트속에 감춰진 성훈이의 목 위로 지용이의 손을 놓았다. 성훈이의 하얀 목을 감싼 손에 힘을 준다. '나쁜놈! 나쁜새끼! 나쁜새끼!!' 힘의 강도가 조금씩 세지고 성훈인 숨을 헐떡거렸다. "죽어!! 죽어버려!! 차라리 내 손에 죽어!!" 눈물을 내뱉던 눈이 고통에 못 이겨 뜨여졌다. 미지근한 물줄기가 지용이의 눈가에 꼬리를 그으며 흐르기 시작한다. 성훈이의 목을 감쌌던 손이 그의 어깨를 안았다. "후나.. 후나.. 내가 있잖아. 내 앞에 고지용이 있잖아! 내가 널 지키고 있잖아!! 내가 네곁에.. 흑..흐흐흐흐흐흑..." 서글피 울어대는 지용이를 안아줘야 하는데 성훈이의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모든 감각은 커다란 충격에 마비가 된 듯 꼼짝도 하질 않는다. + + + + + 아무일도 생각나지 않으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며칠동안 아무 것도 입에 대질 않았다.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단정지어 버렸다. 이유.. 그가 없으니깐. 눈도 깜박하지 않고 뜬눈으로 밤을 지켰다. 하지만 되돌려지는 건 없다. 처절하게 매달린다 하여도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잠에서 깨어나 듯 조심스레 눈에서 손을 떼고 눈을 떴다. 조용히 기다려 준 지용이를 보더니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의 마음에 매달렸다. '나 어떻게 좀 해줘. 응?' "또 안자고 있었던 거야?" 지용이의 말은 저편에서.. 너무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안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받으며 지용이에게 쓰러지는 듯 외친다. '나 좀 어떻게 해봐!' 눈이 시려서 그만 울어야 하는데.. 자꾸만 쏟아져 나온다. "배고프지? 뭐, 먹을래? 오늘도 안 먹으면 나, 화낸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지용이. 하지만. 그도 지쳐 있었다. 그의 상냥한 미소 뒤로 보이는 슬픈 그림자가 성훈이에게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 "죽 끓일까? 저번처럼 오뎅국이라도 끓여?" "........" "동그랑땡 만들까? 아님 경치 좋은데 가서 외식할까?" "........" 지용인 노력하고 있는데.. 성훈인 울고 있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만 있다. '그만해.. 성훈아.. 그만 좀 하자.' "우리 칼질할까?" "........" "아, 참 성훈인 양식 싫어하지.." "........" "딸기 먹을래? 딸기 사다줄까?" "........" '강성훈. 견딜 수가 없어. 숨막힌다구..' 슬픈 눈으로 눈물만 떨구는 성훈이.. 지용인 한숨을 가늘게 쉬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성훈아, 그만해라. 응?" "........." "오늘이 몇일짼 줄 알아?" "........." "강성훈, 정신차려. 너 이러면 난 어쩌라구??!!" 건들이지 말고 그냥 지켜봐야만 하는건데. 성훈이에게 시간을 줘야 하는건데. 성훈이의 얼굴에 손자국을 남겨 버리는 지용이. 제발 이러지마. "성훈아, 말을 해! 너 자꾸.." 아이처럼 성훈이가 웃는다. 지용이의 입술을 쳐다보면서 싱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세상속에서 지독하게 패배해 버려서 이젠 더 이상 일어 설 수 없다는 통보처럼 여겨졌다. "왜 미친놈처럼 웃는거야??!!" "........." "웃지마! 그렇게 웃지 말라구!!" "........." "성훈아, 날 생각한다면 이러면 안돼!!" "........." "너 잘한다고 했잖아!!" "지용아.." "그래. 말을 해야지. 밥먹을래? 배고프지 않아?" "........." "이젠 나만 쳐다본다고 했잖니. 나한테 잘하겠다고. 이젠 행복하자고 했잖어.." "나 죽으면 안될까?" "후나." "나 죽게 해줘. 죽으면 안될까? 응?" 일주일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동그란 눈이 쾡하게 변하는데도 눈을 감지 않았고. 하얗게 터 버린 입술에선 음식물을 거부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소릴 해? 네가 죽으면 난 어떻게 살라고?" '따라가고 싶어. 나 혼자서 버려진 건.. 싫어..' "죽게 해달라구? 그 소리가 쉽게 나와? 내앞에서 쉽게 나오냐구?? 난 너한테 뭔데? 난 너한테 뭐였어??!!" '나 보내줘. 형도 혼자 쓸쓸할거야. 나처럼 외로울거야..' "네가 죽으면 내가 혼자 잘살 것 같아?" '내 안에.. 형이 가득해서 그래. 가고 싶어.' "내가 살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거야? 그런거야??!!" '외로워.. 외롭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지용이..가 있구나.' 지용이.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믿고, 끝내 그 사이를 성훈이의 삶속에서 밀어 버린 채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속옷처럼 입었는지 벗었는지 잘 느껴지지 않는 관계가 되어 있었다. 때로는 같은 개체로 생각되어서, 같은 것을 같이 느끼고 있다고 인정했었다. 지용이의 경우엔 더욱 그랬다. 그가 옆에서 지원이를 떠올려도 됐고, 그를 떠올린다 해서 그는 떠나질 않았다. 그만을 쳐다보지 않아도 지용인.. 떠나질 않았다. 오히려 그를 따뜻하게 포옹해 주웠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었다. "나더러 어쩌라고!!" '지용이가 있구나. 내곁에.. 날 외롭지 않게 하는 네가.. 있었구나..' 자신이 지용이를 잡고 있는동안 그는 황패해져 버렸다. 망가져 있었고, 소년시절 짖궂던 장난끼도 사라져 버렸다. '힘들구나.. 지용이 얼굴이 하애. 아픈 사람처럼 하얗네..' 그에게 남은 건 지친 육신과 서글프게 흘러내리는 눈물 뿐이었다. "차라리 날 죽여!! 죽고 싶으면 나부터 죽여버려!!!" '내가 지용이에게 형의 모습이었구나. 내가 형에게 아픔을 받은 만큼.. 난 지용이에게 아픔을 주고 있었어..' 지쳐있다.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면서 몇일세 더 말라 있었다. 성훈인 울고 있는 지용이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소중한 것에 손을 대듯 조심스럽게 쓸어 나갔다. '난.. 너에게 정말 잘해줘도 모자랄텐데.. 너만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도 너의 사랑에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는데.. 그런데.. 난. 지용이 아프게만 하는구나. 우리 지용이 울게만 만드는구나.. 우리 지용이 지치게 만드는구나..' 지쳐 있는 지용이의 얼굴을 매만지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너만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반쪽을 가져가 버린 형의 그림자를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는 그런 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O.N.E] 영상소년. 번 호 : 14627 / 15844 등록일 : 2000년 02월 11일 05:33 등록자 : 영상소년 조 회 : 1359 건 제 목 : [소설] ──── 놈 ──── 99 (中) 99)****** 길에서 만나다. (中) 테라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눈을 찡그러 본다. 멍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 보이는 건 탁자위에 소복히 쌓인 잿털이였다. '담배...' 지용이가 태우다 만 담배꽁초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잿털이 옆에 있던 지퍼라이터를 집어들고 불을 붙였다. 입가에 가져가 필터를 물어본다. 담배연기보다는 종이타는 냄새가 난다. 성훈인 길게 빨아 들었다. "콜럭콜럭----콜럭.." 숨쉬기가 힘이 든다. 담배연기가 매웠는지 눈물까지 날 정도였다. 단숨에 붉게 변한 얼굴에 뿌연 담배연기가 덥혀졌다. [담배 좀 줄여. 갈색피부가 더 까매지겠다.] [..........] [연기가 예쁘다.] [담배 냄새 맡기 좋아? 싫어했잖아.] '난 형이 태우는 담배향 조차도 좋았어..' [뭐야? 싫은거야? 좋은거야?] "좋아. 형이 태우는 담배향은.." 작게 미소를 던지며 지원이가 곁에 있는듯 기껄인다. "형이 태우는 담배향은 다르거든..." 그의 차갑던 얼굴을.. 그의 보기 드문 미소를 떠올린다. 곧 손을 뻗는 그의 환상이 보인다. "지원형?" [사랑해. 성훈아..] 자신을 향해 멋적은 미소를 보인후에 하얀얼굴 위로 향하는 갈빛 손. "형!!!" 하지만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버린 것처럼 그도..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허공에 손을 뻗고 안간힘을 내며 잡으려 하지만.. 그는 사라져 버린다. 이제는 온기마저 없는 마네킹처럼 차갑게 식었겠지. 이젠 웃지도 못하겠지.. 늙어가는 모습 역시도.. 훔쳐보듯 볼수도 없겠지... 그는.. 먼곳으로 가버렸으니깐. 하늘로 가버렸으니깐. [담배 연기가 좋아?] 허공을 향했던 손을 접고는 현실로 돌아온듯 짓걸인다. "응.. 형이 태우는 담배향은.. 흐흐흐흑..흐흐흐.." 손에 들려져 있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물어본다. 입술새로 쏟아져 나오는 울먹임 때문에 흡입할 수가 없다. "다신 형의 담배냄새를 맡을 수 없겠지.. 정말.. 정말.. 그런거야?? 흐흐흐.. 형 말해봐. 형이 말해줘.. 형이 말하면 나... 믿을 수 있을텐데.. 믿겨지질 않아. 형이 없다는게.. 난 믿을 수가 없어.." 딸기를 사들고 들어온 지용이가 현관에서 성훈이를 부르려다 죄인마냥 서 있었다. 성훈이의 고통을 알지만.. 지용인 받아들이고 싶질 않다. '영화를 보아도.. 드라마를 보아도.. 소설책을 보아도.. 시간이 흐르면 하얗게 지워진다고 하는데..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데.. 시간만 지나면.. 된다고들 하는데... 그런데..... 성훈아, 힘들다.. 많이 힘들어.' + + + + + 전처럼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본다. 내 얼굴이 예전보다도 더 낯설어 보인다. 어두운 거울 저편에서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다. 나보다도 목이 길고 가늘어 보이고, 눈언저리가 움푹 꺼지고 양 볼이 샐쭉한 것이, 무척이나 창백하고 병약해 보인다. 억지로 근육을 당겨 입가의 미소를 띄어 웃어 보인다. 그러나, 거울속의 사람은 웃지 않는다. 서글픈 표정으로 초점 없는 시선만 던지고 있다. '저 사람은 내가 아니다. 누구일까? 저 사람는??' 해가 숨어버린 낮, 몇 일 동안이나 집안에서 틀어박혀 있다가 지용이가 잠이 든걸 확인하고는 그가 걸치고 다녔던 파카를 입었다. 그리고.. 갑갑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거리를 나갔다. 파카 주머니를 뒤져보니 구짖해진 하얀 마스크 하나가 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마스크를 얼굴에 대본다. 변해버린 얼굴을 감추고 싶었다. 이리저리 갈 데도 없이 쏘다니다가 허름한 사진관 앞의 쇼윈도에 내 걸린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사진기 플래시 불에 놀라 멍한 눈으로 찍은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백일사진부터 입을 맞출 듯 바싹 껴앉은 채 찍은 해맑은 연인의 결혼사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사진들이 크고 작은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 구석에 유독 눈길을 끄는 사진이 한장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얼룩까지 진 낡은 흑백사진. 먼지가 뽀얗게 앉은 조그마한 그 사진에는 공허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소년하나가 실려져 있었다. 내 눈이 흐릿해 진 것인지 아니면 사진이 너무 낡아서 뿌옇게 보이는 것인지.. 난 그 사진을 눈을 크게 뜨고 유심하게 들여다보았다. '은지원.' 내 악몽속에 들어와 날 끌어내려는 사람의 얼굴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매일 밤 꿈속에 찾아와 내 손을 붙들며 애원하는 그의 모습이다. 그의 얼굴이 세상에 남겨져 있다고 착각 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난 쇼윈도에 손을 뻗어 사진속의 얼굴선을 따라 그려보았다. '나도 데려가.. 나 혼자 세상속에 놓지 말고.. 데려가.. 응?' 예상했던 대로 그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내가.. 따라갈까?' 사진속의 그는 작게 웃고 있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날 향해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니다. "강성훈!!!" 내 이름이 이 거리 안에서 울러 퍼진다. 고개를 돌렸을땐 지용이가 초조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나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지용인 물가에 놓인 어린애를 발견한듯 초조한 눈으로 내게 달려 온다. 숨을 헐떡거리며..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내게.. 달려온다. "걱정했잖아!! 여기까지 왜 나온거야??!!" 다그치듯 말하는 지용이의 옷이 참 얇다. 추워 보여.. 지용아. "내가 얼마나 걱정한지 알아?!!" 양 귓볼이 빨갛게 변해 있다. 양볼 역시 추위에 저항하다 얼어버렸다. "네가 내 눈에 안보이면.. 난 불안하단 말야!" 지용이의 눈이 반짝인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잡았을 때 난 오싹할 정도의 냉기를 만진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내 손이 그의 손을 거부해 버렸다. 그의 눈이 슬픈 빛을 띤다. 그 눈으로 내 손을 보고.. 내 얼굴을 보고.. "집에.. 가자." 내게 걸쳐진 파카을 슬쩍 건들이고는 추운지 자신의 몸을 두손으로 감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는 있다. 어두운 그의 얼굴에 내 손을 뻗었다. "춥지?"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엉성하게 처리된 미소를 흘린다. "이정도는 거뜬해~!" 웃고 있는 지용이의 머리위로 투명한 빛이 교차된다. 눈물이 떨어지려고 한다. "성훈아, 빨랑가자.." 파카를 놓고 올걸 그랬구나.. + + + + + 지용이가 걸어가는 데로 따라 걷고 있었다. "성훈아, 우리 정동진가서 일출보고 올까?" 나는 잠시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다를 보면 기분이 좋아질거야. 너에겐 휴식이 필요해. 절!대!안!정!!" 지용인 환하게 웃으며 내게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얇게 입은 지용이의 옷으로 눈이 간다. "모, 요 앞에서 옷 하나 사 입지 뭐..헤헤..^^" 나를 쳐다보던 지용이가 ROOTS라고 적혀진 매장으로 날 끌고 들어갔다. 기차역 매표소. 표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이고 있는 나를 쳐다보던 지용이가 싱긋 웃으며 손을 뻗어 내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반항하지 못하는 어린아기가 되어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래, 오늘만이야.. 오늘 하루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거야.' 승객이 드문 기차을 타고 정동진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동진으로 가는 동안 지용인 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기차는 멈췄고, 지용인 내 손을 붙잡고 기차에서 내렸다. 기차에서 역으로 발을 띰에 동시에 바다 내음이 날아져 오는 듯 싶어 나는 몇번 코를 흠흠거렸다. 코를 흠흠거리는 나를 보며 그가 해맑게 웃었다. "바다냄새 좋지? 잘 왔지??" 나도 이제는 마음이 한결 느긋해져서 지용이가 웃는 대로 맞받아 웃을 여유가 생겼다. 그에게 잡힌 손도 어색하지 않아 나는 소풍나온 꼬마처럼 손발을 맞춰 걸어갔다. 갑자기 변한 나의 태도에 그가 약간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다. 하루쯤의 외출로 여기면 그만이니까. 고요한 바다 저 멀리로 해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수평선 너머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침묵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쁠것이 없었다. 오늘은 외출을 허락 받은 날이었다. 나 자신에게서.. 그리고 형에게서. 지용인 허술하게 팔짱을 낀 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지용이의 콧등과 뺨위로 올라오는 해의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가냘픈 윤곽을 가진 지용이의 얼굴이 나에게로 돌려졌다. "성훈아, 어제 뉴스에서 본건데.." ".........." "지금 생각해도.. 참! 황당한 살인사건이였어." ".........." "근데 갑자기 생각이 나네." 길어지려 하는 침묵을 잘라버리려고 지용인 내게 말을 늘어놓았다. "정말 황당한 사건인데.. 한번 정도는 생각하게 되더라." ".........." 난 그를 무표정한 눈빛으로 잠시 쳐다 보다가 '무슨내용이야' 라는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흠흠~!" 그는 난감한 얘기를 꺼낼 사람처럼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씩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쓸쓸하고 허전함이 베어 있었다. "정말로.. 정말루 사랑하는.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헤어짐을 몰랐던 연인이 있었대.." ".........."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던 여인이 떠나려고 했다는거야.." ".........." "남자는 떠나려 하는 여자를 이리저리 달래보면서 돌려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대." 그는 바다위로 눈을 돌렸다. 꼭 자신을 얘기라는듯 슬픈눈으로.. 슬픈 표정으로 바다위에 자신을 담구었다. "그런데.. 그 노력에 대해선 생각하질 않는거야.." ".........." "울면서 매달리며.. 죽겠다고 협박도 했었다고 하더라. 목숨을 버릴만큼.. 사랑한다고.. 했대.." ".........." "하지만 상대는 너무 완고했어. 떠날 준비를 마친상태였던 거지.." ".........." "그래서.. 혼자 남은 사람은 두려웠던 거야.." ".........." "되돌릴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남자는..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했대.. 되돌릴 방법은.. 없는데도.. 사랑하기 때문에 머리가 깨지도록 생각을 했대.." 지용이가 해주는 얘기가 아프다. 내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아프다. 날 바라보는 지용이의 눈빛도 시리도록 아프다. 낮게 가라앉아 버린 지용이의 음성도 너무.. 아프다.. "떠나려 하는 연인을 묶고 싶어서.. 많은 생각을 했어... 너무너무 많은 생각을 했대.." ".........." 잠시 침묵이 흘렸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해를 바라보는 지용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눈물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눈을 자꾸만 깜박거린다. "그 많은 생각중에...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선택한 것은...." ".........." "직접 죽였다는 거야. 커다란 칼로.. 여러번 찔려서 죽였대. 사랑하는 만큼.. 잔인하게.. 상처받은 만큼.. 아프고.. 괴롭게.. 찔려서 죽였다는 거야.." ".........." "정말 사랑한다면.. 죽일수 있을까?" 지용인 소매끝으로 눈주위를 슥-- 닫곤 하늘 높이 눈을 두었다. 몇분정도 흐른것 같았다. 해는 떠서 중천에 솟아 있었다. 난 가지럽게 불어오는 바다 바람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보다.. 지용이의 의문에 딴 행동으로 넘어가고 싶었는지도. 난 어떤 대답도 들려 줄수가 없기에. "너라면.. 직접 네 손으로 죽일 수 있니?" ".........."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수 있겠어??" 그의 질문에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바라보는 하늘로 시선을 돌리는 것외엔.. 내가 할수 있는 똑 부어지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 ".........." "그럼.. 만약에.." ".........." "만약에... 만약에 나라면.. 직접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을까? 자신의 두 손을 보다가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피하고 싶다. 그의 질문에 눈을 감을뿐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갸우둥 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죽일 수...." 그의 슬픈 눈동자에 붉은 해가 잠겨 있었다. 말을 흐리면서 서글픈 표정을 짓는 그. 난 흐릿해진 두눈으로 지용이를 바라 보았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보였다. 난 지용이의 가슴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의 흐느낌을 껴안은 사람처럼 내 손이 지용이를 감쌌다. "지용아, 춥다.. 들어가자." - 난 사랑을 믿어.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라는 것, 온갖 추하고 어두운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위대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나는 믿고 있어. 우리 겨울 아침에 만났었지. 십삼년 전 겨울에.. 그 겨울은 아름답고 따스했어. 내가 만난 성훈인 작고 야무지고 맑고 순수했었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야.. 내 마음속의 성훈인 아름다워.. -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난 널 사랑 할 자격도 없다구. 이런 몰골로 어떻게 널 사랑할 수 있니? + + + + + - 지용이에게 시디 신.. 너무 셔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신 귤이 먹고 싶다고 졸랐다. "임신했어? 왜 갑자기 신게 땡기는거야?" - 어젯밤.. 오랜만에 지용이에게 내몸을 허락했다. 괜찮아..라는 질문을 던지는 그 앞에서 난 옷을 벗었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하핫. 그리고 보니, 강성훈 색기가 줄줄 흐른다니깐. 내가 너 순수하고 여리게만 본게 바보었지. 아무래도 나, 속아 산것 같어. 난 강성훈이란 인간, 기집애같이 눈물이나 빼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것같은. 그러니깐. 세상 어느 여자보다 청순하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어젯밤에 넌.. 하하하하핫!!" -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대고.. 프렌치 키스를 해주었고.. 그의 가슴을 혀로 핥고, 그의 등을 핥고.. 그의.... 그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사랑한다라고 말도 해주었다. 그의 손을 잡고 욕실로 들어갈때도.. 난 그에 입술에서 내 입술을 떼지 않았다. 욕조 안으로 들어간 그의 몸을 씻겨 줄때 난 그의 귀를 약간은 아프게 깨물었고.. 내가 보낸 신호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그의 얼굴이 돌려졌다. 내 입술을 찾는 그를 향해 작게 웃고는 그의 입술 속으로 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깨무는 그의 코를 살짝 깨물었다. 하하거리며 호통하게 웃는 그가 보였다. 난 손가락을 빼고 그의 입술을 덮치듯 덤볐다. 그리고.. 그와 난 욕조속에서 또 한번의 사랑을 나누었다. "이렇게 얘기해서.. 기분.. 상한거야?" "아니.." - 우리는 커튼 새로 햇빛이 들어오기 전까지 사랑을 나누었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방문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가 문질러댄 곳이 쓰라려서 일어나 앉아있지 못할 정도였다. 꼭 치질 걸린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러야 했다. 하지만 다시 서로의 몸을 더듬었고, 쓰라린 곳에 손을 인도했다. 아프지..라고 그가 미안해하며 물을 때, 난 고개를 젓고 그의 몸에 올라탔다. 땀으로 젖어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듯 엉망으로 망쳐놓고 그의 불어터진 입술을 음식 씹듯 자근자근 씹어 버렸다. 서로 갈증에 시달려 마실것을 찾을 때도.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서도.. 우린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 동안 굶주렸다는 듯이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 있었다. 한쪽이 지쳐 늘어져도.. 다른 한쪽이 열심히 지쳐 있는 몸을 더듬고 키스해서 흥분하도록 만들었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웠다.. 난 진심으로.. 아까웠다... 우리의 키스는 거칠어졌고, 물어뜯긴 작디작은 젖꼭지가 불에 댄듯 따갑고 쓰라렸다. 그래서 그가 내 젖꼭지를 깨물때 난 고통스럽게 신음을 내뱉아야 했다. 그래도 우린.. 멈.출.수.가.없.었.다. "그나저나 슈퍼라곤 달랑 하나 있는데.. 거긴 과일이란 과일은 눈씻구 찾아봐도 없구.. 음.. 짜샤 네가 언제부터 신걸 먹었냐? 신건 죽었다 깨나도 못먹으면서~"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내 이마에 키스해 주던.. 장난끼 가득한 지용이를 만날수가 있었다. 내 곁에서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은 건 처음이었다. 난 그 미소가 너무 싱그러워서.. 행복해 보여서.. 너무.. 예뻐 보여서.. 내 입술은 그의 것이라고 말했다. "아주 신 걸로 부탁해.." "잠깐 설마 우리 후니 임신한 거 아니야?" - 그의 생글거리는 미소가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배에 얼굴을 들이대고 날 올려다보는 그가 너무 사랑스럽다. 난 그에게 작게 미소짓고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요기다 뽀뽀해주면~ 얼렁 갔다올게!!" - 그가 입술을 가르키며 쭉 내밀었다. 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싫음 내가 하지모!!" - 내게 달려든 그의 입술을 느낀다. 한참동안 헐어버린 입천장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내 입술을 살며시 깨물던 그의 입술이 내 입술속에서 빠져나가려 한다. 하지만.. 난 그의 혀를 붙들었다. 그리고.. 그의 목을 감싸고... 햇빛이 떨어지는 그 자리에서 그와... 키스를 즐겼다. "빨리 갔다올게!!" "응.." "성훈아!" "어?" "사랑해.." "응.." "저기.." "왜?" "아니..아니야.^^" - 사랑해.. 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눈치같았다. 하지만.. 난 입을 벙긋거리지도 않았다. 문을 닫고 나가기 전 날 향해 식 웃더니.. 내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난 창가로 가서 그가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머리가 햇살을 품고 연한 갈색 빛을 띤다. 난 그를 향해.. 작은 미소를 품고 욕실로 향했다. 들어서자 마자 오늘 지용이의 턱을 깨끗하게 만들어 준 면도날을 집었다. 그리고 욕조위에 앉아서 오른쪽 검지손가락으로 슥-- 그어보았다. 역시 칼날은 여리하다. 붉은 피가 스며들더니.. 욕실바닥으로 한방울 떨어진다. 기분이.. 이상하다. 그런데........ [강성훈! 그 칼 내려놔!!] [..........] [강성훈!!] [놔! 놓으란 말야!!]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 [내놔!! 내놓으란 말야!!!] [나쁜새끼!!] 철썩---- [날.. 내버려둬..]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죽게 내버려둬..] [너만 죽으면 끝인지 알아!!] [나.. 날 제발 내버려둬..] [죽고 싶으면 나 먼저 죽여! 나 보는 앞에서 죽지 말고 날 먼저 죽이라구!!!] - 미수. 이렇게 어이없이.. 좀 더 멀리 보내놓고 할걸 그랬군. + + + + + [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나쁜놈이라고 욕해도 괜찮아.. 이기적이라고 원망해도.. 난...] "성훈아...??" - 동맥을 끊기 전.. 난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면도날을 손목에 놓고 그을 부위를 찾을 때 소변이 찔금 나올정도로.. 난 공포심을 느꼈다. 면도칼을 집은 검지손가락에 힘이 들어갈때 눈물이 나왔다. 우습게도 지용이가 당장 달려와 날 구해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과연 와 줄까라는.... 이번에 정말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갈등속에서.. 난 굶은 핏줄을 그었다. "여기 사람 없어요??!! 도와주세요!!!! 여기 구급차 좀 보내주세요!! 피가.. 피가 많이 흘러요!!" - 정말.. 웃기는군. 죽으려고 맘먹었는데.. 지용이 네가 와 주니깐.. 왜 안심이 되는걸까? 왜.. 죽는다는게 무서울까? "누가 좀 도와주세요!!!!!!" - 지 목숨하나.. 제대로 끊지 못하는 머저리가 세상에 나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무섭다. 죽는다는거.. 정말.. 내가 죽어버릴까봐.. 두려움을 느낀다. "손님 무슨 일입니까? 아아아악--------!!" - 이런 내가.. 너무... 싫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잼지요? 잼따고 체면을 거세요.. 잼따잼따잼따!!! -_-; 춈, 퀴즈입니다. 성훈양이 꼴까닥했을까 안했을까? 네? 영상양 두겨버리고 잡다고욥? 흐흐흐흐흐흑. 넘해! 나만 미오해~!! T T [O.N.E] 영상소년. 번 호 : 18703 / 18770 등록일 : 2000년 03월 03일 19:56 등록자 : 영상소년 조 회 : 474 건 제 목 : [소설] ──── 놈 ──── 100 (부록) 100)****** 미친놈. (부록) "또 싸운 거야?" 이제 얼굴 보기도 지겹다는 투로 재진일 박대 아닌 박대를 한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 정수리에는 하얀색 머리띠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바텐더 앞에 가서 독한 양주 한 병을 들고 재진이 옆에 앉았다. "벌써 권태기는 아닐테고.. 1주일도 안 되서 또 쫓겨 나왔냐?" "제길, 어제 그 자식이 나더러 무식하다고 했단 말야!!" "맞는 말했는데, 왜 그래? --;" "이래뵈도 나, 대학물은 먹었단 말이다! 떳떳하게 앞문으로 들어 갔었다구!!"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재진인 무척 화가 난 듯했다. 얼음이 반쯤 녹아있는 잔이 덜덜 떨린다. 입술을 야무지게 깨우는 폼을 보니 어젯밤에 수원이와의 사태파악은 절반은 짐작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을 관찰해 본 결과.. 부부싸움은 물베기라는 소리는 옛말일 뿐이다. 과격하게 싸울뿐더러 언젠가부터 잘 삐지는 재진이의 가출은 자주 일어났다. 얼굴에 훈장하나 달아오는 것은 기본이었고.. 코가 깨져 온다거나, 다리를 절뚝거린다거나.. 혹은 붕대로 손을 칭칭 싸매서 토니앞에 나타나곤 했다. "그런데?" "띠빌, 무시하잖아.. 아는것도 없다고.. 옌장알~" "후훗. 무시할만 하네." "뭐어??!!!" "수원인 일류대가서 작년에 조기졸업하고~ 올해 박사과정 밟아서~ 자랑스럽게 학위 받고 꽁짜로 유학가잖냐.." "그거 모?" "그거 모라니? 이 바보새꺄, 너도 머리가 있음 생각을 해봐. 박사님이 되신 분이 대학 중퇴한 네 녀석이 똑똑해 보이겠냐? --" 토니가 따라주는 술을 한번에 마셔 제끼는 재진이가 물불 안 가린다는 표정으로 무섭게 말한다. "에잇, 성질 같아선!" "성질 같아선?" 무시하는 투의 억양탓인지, 끓어 오른 화는 곱절로 불어나 버린다. "너 내 친구 맞냐? 어째 싸우기만 하면 장수편만 드냐고!!" "그야 뻔히 네놈이 잘못했을테니깐 글지." "왜 나만 잘못했는데??!!" "수원이 그 녀석이 속은 골뱅이 속알딱지여도, 네놈처럼 과격. 무식. 단순은 아니란 말야." "뭐어??!!" "너 어제 수원이한테 유학 혼자가라고 지랄했다며?" 어제는 정말 과격하게 싸웠다. 왠지 모르게 수원이만 쳐다보면 자신이 작아져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얼음물에 들어간 고무공처럼 오무라들기만 했다. "모르겠어..." 끓어오르는 화는 일단 기세가 꺽인 것 같다. 풀죽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재진이가 조금은 안쓰럽게 보인다. "감당하기 힘든 상태긴 하지.. 수원이가.." "........." "수원이 집이 그렇게 빵빵할지 누가 알았겠어. 게다가 머리에 든 것도 많아서.." "........." "재진이 네 맘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내 생일이 언제인줄도 몰라. 작년에 그냥 넘어 갔었어. 또 우리 만난지 1주년 기념일도 그냥 넘기고.. 그것뿐인 줄 알아? 첫 만났던 날도 까먹고, 첫 키스했던 날도 까먹고.. 에잇~! 달력에 지저분하도록 낙서하면 모하냐? 그 자식 그쪽으로 잼병인걸.. 그래. 작년 한해동안은 논문 때문에 그랬다 치자." "........." "그런데! 올해로 두 번째 발렌타인데인데.. 또 내가 해주는 음식 맛없어도 감사히 먹어주면 어디 덧냐? 띠빌. 말끝마다 맛없다는 소리 붙이고. 더 무시하는 건 내 패션감각인데.. 나더러 양아치래. 데이트하자고 꼬시면 양아치처럼 입지 말라고 나불데잖아!! 그 소리 듣고 같이 붙어 있고 싶냐? 어딜봐서 내가 양아치냐고!" "하하하하하하하핫!!" "왜 웃는 거야??!!" "니들 공수가 바뀐거야?" "엉?" "쨔샤~ 네가 공아니냐? 수원이 성격으로 봐선 수가 제격인데.." "공은 모고? 수가 몬데?? 0,0" "으으으으잉?" 순진한 눈빛으로 변한 재진이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토니의 황당해진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갑작스레. "푸하하하하하핫!!" 배꼽이 빠져라 한참을 웃는 토니. 카페안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눈물까지 보이며 웃어 제끼던 토니. 하지만 금세 심각한 표정으로 재진일 쳐다본다. "몬데 그래?" "정말 모르는 거야? -_-;" 의심쩍으로 묻는 토니의 눈이 가늘게 찢어져선 재진일 노려본다. 그리고 검지를 내밀고 재진이의 머리를 톡톡 때렸다. "정말 몰라? --+" 순진한 아가의 눈으로 고개만 끄덕끄덕~ 저 빛나는 눈은 호기심 많은 아가의 눈빛! "진짜로 모르는거야?" "으으으응~~~" "정말??" "저~엉말!" "나 같아도 네 같은 녀석이랑 못살아. --;" "안승호!!" 쥐고 있던 잔을 팽겨 쳐버리고 일어서는 재진이가 토니의 멱살을 잡으려고 한다. 한참 토니를 붙들려는 몸싸움이 이루어졌지만, 쉽게 잡일 토니가 아니다. "외모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더니.. 나 참~" "공수? 그게 뭐야?" "집안 뒤집어 놓으면서까지 무식한 네놈이랑 사는 수원이가 불쌍시리다. 내 친구라지만.." "이라지만..?" "배워서 남주냐? 너 이반맞아? 게이들의 기본용어를 모르면 어떡해?" "무안하게 그만 놀리구.. 모야? 빨랑 말해..-_-;" "공은 남성성에 가까운 게이를 말하고.." 끄떡~ "수는 그 반대쪽.." 끄떡끄떡~~ 알아들었다는 듯 말하는 재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토니가 안심된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토니 머리위로 떨어지는 5톤짜리 허머.. "요점이 모야?" 참자참자참자.. 토니의 얼굴 가득히 참을 인자가 세겨져 버린다. "그게 모.. 대단한거야?" 참자참자참자 못참아!! "어휴------- 빙신 닭닭닭!! 너 전생에 조류지? 조류였지?" "조류는 몬데..??" "나가 죽어라~!!!" 벙쩌 있다가 머리를 긁적거리는 재진이가 자신을 질책하듯 머리를 쥐어박는다. "집에 안가?" "좀 더 있다가 들어가야지.. 띠빌. 이젠 찾아 나서지도 않아.." "잘못한 놈이 먼저 들어가서 싹싹 빌어야지.." "내가 몰 잘못했는데!!" "유학 혼자가라고 했다며. 거기다 부연설명이 아주 끝내주더라. 딴놈 만나 배터지게 잘먹고 잘살라고 했다면서..." "그건.." 눈물을 훌쩍거리는 재진이의 모습은 수원이를 만나기 전엔 눈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재진인.. 수원이에게 완전하게 길들여진 상태다. 그가 자신에게 찾아와 부리는 투정마저도 예쁘게 보인다. "그나저나, 요즘 수원이 집에선 아무 말도 없냐? 하긴.. 이사한지 보름도 안 됐을 테니깐 찾아오진 못하겠다." 토니의 눈빛에서 볼 수 있는 것. 그의 과거를 다시 떠벌리는 것 같다. 추운 어느 겨울밤.. 맨발로 쫓겨난 토니를 우혁이가 받아주진 않았다면 그는 겨울 거리에서 싸늘하게 얼어 버렸을 것이다. "수원이 편하게 해줘.." "........" "많이 혼란스러 울 거야. 난 장수녀석이 집에 커밍까지 할줄은 몰랐다." "나도.. 그건 기대 안했는데.." "너랑 결혼해서 유학가겠다고 집에 통보할줄은.." "결..혼?" "몰랐어? 너랑 결혼하겠다고 아버지께.." "수원이가 그래? 집에 그렇게 얘기했다고??!!" "정말 모른거야? 오늘 너한테 청혼한다고 했..었.." 말을 멈추고 재진이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이는 토니.. 토니의 눈동자에서 수원이의 빙긋 웃는 모습이 보였다. 토니의 시선을 쫓아 뒤를 돌아보는 재진이. "나가라고 정말 나가는 사람이 어딨어?" "........." "몬소리를 못해. 삐돌이야 삐돌이. 걸핏하면 삐져가지곤 토니한테 조르르 와선 쌈난 거 광고나 하구.." 얼빵해진 자체로 수원이에게 향하는 그의 눈엔 베시시 웃는 아이같은 소년이 놓여져 있었다. 비록 성인이라고는 하지만 20살이 넘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넘 어린 미소를 보이는 그가 서 있었다. "언제..왔어?" 아까전의 흥분상태는 모조리 다 가셔 버리고 죄지은 사람처럼 덜덜 떨어대는 재진이. 죄인보다는 수줍은 소녀처럼 조신한 자태를 비춘다. "왜? 내 흉봤어?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간거야??" 모르는 첵 하는 수원이.. 하지만 그 앞에선 석고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리는 재진이였다. "저기.. 그게." "뭐해? 여서 잘 거야?" "어, 어엉.. 알써. 지금 가려고.." "치~이. 이거 줄려고 했더니만." 그의 손바닥에 놓여진 금빛 링이 재진이를 더 힘빠지게 한다. 헤로인 조명등에 더욱 더 빛을 자랑하는 링이었다. 수원이의 다른 손이 재진이에게만 디스플레이 되 듯 보여졌다. 약지손가락에 끼워진 링은 손바닥의 것과 같은 것.. "수원아!!" 와락 안겨버리는 재진이. 역시 단순함을 보여주는 그였다. 그리고 엉엉 울어버리는 폼새가 여간 시선을 끄는 게 아니다. 싹싹비는 공처가의 모습이다. -_-; "재재재재재진아, 너너너너너.. 왜 이래?" "난 그런줄도 모르고..흐흐흐흑.." "재진아, 이재진.." "어어어어엉..엉엉엉!!" 몰라몰라 하며 자신의 가슴을 살짝살짝 두들기는 게 자신의 체구보다 큰 녀석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재진 왜 이러는거야??" "흐흐흑.. 그래그래. 나 이제부터 우리 수원이 영원한 딸랑이가 될께..흐흐흑." 황당한 나머지 눈꼴시렵게 쳐다보는 토니의 시선에 수원인 어색하게 웃었다. "니들 모 하는거야? @_@" "미안..헤헤^^" "수언아 딸아아아아아앙~" "영업방해로 경찰에 신고해 버리기 전에 빨랑 나가줘..-_-;" "수원아, 딸랑딸랑~" "어머머.." "빨랑 안나가??!!--+" 실눈으로 째려보는 토니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알써 얼렁 나갈게~!^^;" 자신의 허리를 꼭 붙들고 있는 재진이를 질질 끌 듯 끌고 나가는 수원이가 토니의 눈에서 사라져 가자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작게 미소를 보내준다. "그래그래.. 좋을 때다 좋을 때..-_-; 근데 한 1년만 더 지나봐라. 니들 닭쇼도 그만 막을 내릴거샤. 띠빌. 권태기 빠진 우리 커플 보라고 티내는거야 모야? 에씨 기분더러워~ 강군아, 나가서 소금 뿌려라~~!! --+" "몰 뿌려요??" "귀먹었냐? 나가서 소금 뿌리라니깐!!" "이재진 고만 떨어져!!!" "수언아, 딸랑딸랑. 난 영원한 너의 딸랑이야~ 딸랑~~" "어휴!" "딸랑이 시로? 그럼 너의 어여쁜 쪼매난 종이 될게.. 짤랑짤랑~" "이재진 고만 떨어지란 말야!!!" "수언아, 엉엉~ 너의 사랑을 잠시나마 의심한 내가 죽일놈이야 흐흑..엉엉엉~~" "이.재.진!!!!" "짤랑짤랑~" "어휴!! 사람들이 보잖아!!" "수언아, 따랑해~" "닥쳐!!" 거리로 내몰린 그들은 행복해 보인다. 적어도 10년은 더 행복해 보일 듯 하다. 그들의 미소 속에 담겨진 행복은.. 영원할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아름다운 한 쌍이다. 어울리는.. 그리고 결코 떼어서는 볼 수 없는 커플 같다. 사람들의 시선에 담긴 그들은 짙은 우정도 아닌 사랑이다. 저들은.. 어느 연인보다 더 강도 짙은.. 사랑을 하고 있다. "짤아아아아아아랑~~~~~~" "미친놈.-_-;" 『 Now that you are ok know that before the time we have been.. Cause you filled my empty mine now and you make me feel so good Lonely in this beautiful world feelin no one else to turn Now searching for my boy is said and done.. I waited for this time all my life time.. I feel like it is a dream and now I am not alone and I'll always be with you.. Oh! Love terrible lonesome.. why do you come to me so late oh baby Oh! Love I do love you.. And now please be with me all the time oh baby.. 』 - Couple 영어버젼- + + + + + 이 곳은 안전지대이다. 아무도 날 건들이지 않고 나만이 숨쉬는 나만의 공간. 어느 누구도 내 허락없이 이 안으로 들어 설수 없다. 오랫동안 비워두어서 인지, 내 신발에 묻는 수북한 먼지가 울고 있는 내게 잔잔한 미소를 가져다준다. 15년이라는 시간이 내가 채 느끼기도 전에 흘려 버렸다. 15년의 티끌.... 너무 빨리 흘려 버리는구나.. 조금 아까운데.. 내 생애 그를 만난 소중한 시간. 내 생애 그를 사랑한.. 가슴아픈 시간.. 15년의 시간... 허무해지는구나.. 가슴이 아파..... 다시는 오지 않을 나의 15년의 시간.. 벽에 걸려 있는 사진중 노란색 후드티를 입은 성훈이의 사진을 액자에서 빼내 들었다. 싱그러운 햇살속 바람때문에 까만 앞머리가 미풍에 살짝 춤을 추는 사진이였다. 선명하게 나온 사진속의 그는 행복하게 웃고 있다. 그것도.. 내 품 안에서... 난 사진이 구겨질 정도로 꼭 안았다.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꼭 안아 버렸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맺혔다. 내 눈동자를 흔건히 젖히고 내 볼을 따라 주르륵 떨어졌다. 가슴이 아파왔다. 허전하게 비어버린.. 위속이 비어서 쓰라리는 것처럼 그렇게 아파왔다.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내 품에서 사진을 떼어 내 눈속에 한 동안을 두었다. 여전히 곱게 웃는 그의 얼굴. 햇살에 눈이 부신지 살짝 찡그린 이마위로 손가락을 놓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내가 만지고 있는 건.. 성훈이가 아니라 단지.. 사진일 뿐이다. "하하하핫..하하하..." 난 쓸쓸하지만.. 깊은 심취속에서 밀려오는 서글픔을 억누르기 위해 큰소리로 웃어 제꼈다. "나쁜 새끼.." 입술에 고통이 느껴지도록 꽉 깨물어 본다. 입술을 통해 흘러나올 흐느낌을 막기위한 억척스런 노하우였다. 언제나 성훈이 앞에서 참아 보려던 통곡이었다. '이제.. 참을 필요가 있던가?' 또 다시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파에 커다란 구멍이 난 사람처럼 그렇게 웃어 버렸다. 이렇게 웃는것도 참 오랜만인것 같다. 이렇게 솔직하게 웃어 버리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난 다시 성훈이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맑은 미소옆에 내 얼굴도 들여다 본다. 어두운 그늘따윈 없다. 단지 햇살속에 섞인 사람들처럼 환하게 보인다. 컴퓨터의 기술로 조작한것처럼 보여지는 사진같았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렇게 행복하게 웃었던 때가 없었던것 같다. 내 손안의 장면은 환상같아 보인다. 지칠 줄 모르고 행복만 꿈꾸는 사람들의 허상같았다. 지금까지 혼자서 슬픈 연극에 심취되어 있었다. 언제까지나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수는 없다... 난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지퍼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달각-------- 해맑게 웃는 성훈이의 얼굴이 하얀 연기를 내며 타고 있다. 사진속의 얼굴은..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행복해 보인다. 햇병아리 같았어.. 너...... 참 이뻤지.. 난.. 네가 노란티 입었다고 하루종일.. 왜 무안을 줬을까? 난 눈을 돌려 색이 바랜 페이퍼가 수북히 쌓인 느티나무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잿가루로만 남은 사진 위로 깔판삼아 내려 놓는다. 제일 위에 있는 손바닥만한 카드를 집어 들었다. 겨자색 카드위엔 촌스럽게 '축 성탄' 이라고 젖혀 있었다. 손수 만들었다며 감사히 받으라고 던져줬던 카드의 밑그림은 '축 성탄' 이 다였다. 난 카드를 살며시 펼쳐본다. 색이 바랜 노란 속지가 세월의 연령을 말해준다. 그 안에 깨알같은 글씨로 달랑 '나 선물 줘.'... 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오래전 그 날.. 폭설주의보로 시끄럽던 크리스마스 이브날에도 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었다. 그리고 성훈이를 향해 연탄재가 든 눈뭉치를 던졌었다. 그것이.. 그에게 준 첫번째 선물이었다. 달칵------- 그가 내게 줬던 축하카드들과 쪽지.. 편지들이다. 구슬처럼 굴러가는 듯한 글씨들 사이에는 '지용아!' 라고 세겨져 있다. 오렌지빛 불꽃위에 그와의 즐거웠던 어린시절을 묻는다. 다시는... 오지 못할 행복했던 내 시절. 그리고 너와의 추억들. 이제.. 추억속에서 위로를 받아가며 살수는 없다. 종이타는 냄새를 맡으며 일어서다가 벽장에 숨겨놓은 은색 포장지가 눈에 들어온다. 난 망설이다가 손을 뻣어 그것을 집어 버렸다. 사각으로 된 케이스의 리본을 빼내들고 판도라의 상자처럼 굳게 닫혀진 작은 선물상자를 열었다. 암담한 기분이다. 반짝이는 두개의 링이 사이좋게 나란히 꽂혀 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내들어 내 중지 손가락에 끼어본다. 거치는거 없이 한번에 잘도 들어간다. 하얀손이 껴주었다면 더 좋았으려만. "신랑 고지용은 강성훈군을 죽어서도 사랑하겠는가?" 음성을 낮게 깔고 고등학교때 괴짜 수학선생님 흉내를 내어본다. 싱긋 거리며 웃다가 두눈을 감으며 굳건하게 답했다. "아니요......." 조금은 망설이다가.. 한숨을 길게 쉬며 답했다. 난 죽어서도 그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 정성을 다해 내 뱉은 음성의 길이는 비교적 시간을 오랫동안 끌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링은 멍하니 쳐다만 본다. "virus.." 괴로운 표정으로 반지가 끼워진 손을 입술에 놓았다. 예상했듯이 난 큰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성훈이가 듣던 말던 상관하지 않고.. 서럽게 울어 버렸다. 그리고 울음이 그칠때쯤... 난 다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달칵-------- 타버리진 않겠지.. 네가 거절했던.. 커플링. 'beloved, sung hoon... my viru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던 사랑했던 소설. 읽어주신 모든분께 감사드리고 마지막으로 올려질 END... 빠른 시일내에 올리겠습니다. +see 는 자료실로 갑니다 [O.N.E] 영상소년. ┌───────────────────────────────────┐ │ ▶ 번 호 : 0/23150 ▶ 등록자 : 영상소년 │ │ ▶ 등록일 : 2000년 04월 15일 21:02 │ │ ▶ 제 목 : [소설] ──── 놈 ──── END │ └───────────────────────────────────┘ END)****** 희망은 거짓의 옷을 입고 있다. 지용이와 싸웠던 그 놀이터는 예전 그대로 있을까? 갑작스레 궁금증이 일어났다.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창 밖은 어젯밤과는 다르게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현관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처절하게 들리던 지용이의 울음소리가 그치고 난 뒤 2시간이 훨씬 넘은.. 초저녁의 시간이었다. 난 지용이가 놓고 간 담배 케이스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개피 꺼내 탁자위에 몇 번을 두들기고 입술에 대본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신발 벗는 소리가 들렸다. 지용이의 추리닝바지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낸다. 한참 들리는가 싶더니 잠시 멈춰 버린다. 그가 날 쳐다보고 있는걸까? 난 시선을 그가 있는 곳으로 돌리지 않는다. 뭘 하다가 들어왔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 질문은 생략이 된다. 그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낯설다. 타인처럼... 그래 타인이 되어야 한다. 다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난 입에 물려있는 담배주둥이에 불을 붙인다. 깊게 빨아들이자, 기침소리가 내 입속에서 담배연기를 쫓아낸다. 한참을 콜록거리다가 다시 한번 깊게 빨아 들였다. 아까전보다는 기침이 덜하다. 심하게 기침을 한탓인지 눈 안에 눈물이 잔득 고여 버렸다. 또로록--- 기다란 길을 만들며 내 얼굴이 네 갈래로 갈라져 버린다. 모자이크처럼 보이는 잿덜이 위에 담뱃재를 톡톡 털어냈다. '지용이가 떠나면 난 어떻게 될까?' 라는 자문이 가슴에서 자꾸 상기된다. 생각하면 몸이 오싹할 정도의 공포가 밀려든다. 그리고.. 이렇게 바보처럼 울어 버리게 된다. 눈물만 흐르면 좋으려만.. 왜 가슴까지 울어 버릴까? 필사적으로 참아보려고 하지만.. 그 놈의 흐느낌은 배려라는 걸 모른다. 그가 귀를 닫지 않았다면.. 듣고 있을 것이다. 내 흐느낌을. 내 나약함을..... '잘 모르겠어.. 이게 잘하는 짓인지.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걸까?' + + + + + 긴 그림자가 생겼다. 형광등을 끄고. 창고에서 들고 온 9개의 초에 불을 붙인다. 내 앞의 초는 촛농 따윈 흘리지 않는다. 각기 다른 색상과 다른 모양. 성훈이는 계집애같이 초 켜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순정만화에서 나오는 여주인공을 꿈꾸던 녀석이었다. 녀석 자체가 순정만화 주인공인데도.. '병신 짓이나 좋아하고..' 난 신경질 적으로 촛불을 죽여버린다. 심지의 연기가 매운 내음을 품자, 담배를 물고 있던 성훈이의 형체가 그려졌다. 뭉개져 버린 녀석은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칙칙한 얼굴을 보이지도 않았다. '쉬펄.. 다 끝났다 이거야??!!' 확인해야 한다. 알아야 한다. 한가지는 꼭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을 알고는 있었는지.. 내가 어느 정도 애달펐는지... 날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속에 받아 둔적이 있었는지.. 한가지는 알아야 한다. 난 성난 사자의 얼굴로 거실로 뛰어 나갔다. 씩씩거리는 내 숨소리만 우리 두 사람사이에 배경음악마냥 깔려진다. 그리고 소파 위에 너무도 작게 웅크린 그를 향해..... 그를 향해.... 아니.. 아니 고지용.. 아무말도 하지마. 아무말도....... 반쯤 열린 내 입술이 그의 담배연기로 인해 막혀 버린다. 콜록거리며 심하게 기침을 하는 그... 그의 긴 앞머리로 덮인 눈이 참으로 보고 싶다. 더 숙여진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그의 기침소리에 난 입을 다물고 만다. 난... 그저 그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바라 보기만......... '성훈아.. 성훈아, 날 봐.. 날 보고..말해. 거짓말이라고.. 날 떠나보내기 싫다고... 너 혼자 살기엔 무섭다고..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날 이용해도 좋아.. 내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말해.. 응?' 그는 내게.. 까만 눈동자를 보여주지 않았다. 숙여진 얼굴이 조금만 각도를 가져도 되건만 녀석은 내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는다. 그의 손가락에 걸쳐진 담배연기가 은은하게 퍼져 오른다. 저 모습을 하고 있는 그.. 나의 성훈이. 내 안의 그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끝난거야.. 그치?' 쓰디쓴 웃음이 입술사이에 걸쳐진다. '그래.. 아침이 오면.. 끝나는 거겠지?' 섭섭하다. 허전하다. 아프다.. 아프다.... 정말 끝나는 거다. 끝이다. 이제 성훈이를 볼일은 없는거다. 성훈이 때문에 아플 일은 없다. 없을 것이다. 이젠 없다. 성훈이가 안보여서 가슴조릴 일도 없고, 성훈이 때문에 울지 않아도 된다. 성훈이 때문에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되고. 성훈이 때문에.. 나를 두번째로 밀어놓을 일은 없을 것이다. 성훈이가 없으면 나를 발전시킬수도 있다... 성훈이가 없으면 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여우같은 마누라와 날 닮은 예쁜 아기들 사이에서 행복을 꿈꿀수도 있을 것이다. 평범하게.. 아주 평범하게 살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기회가 다가 온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끈끈한 거미줄에 얽혀져 죽음을 기다리던 잠자리의 극적인 탈출처럼.. 내게... 자유가 주어진지도 모른다. 순탄한 길을 걷으며 편히 휴식을 취할수 있는 기회가 내게 찾아 온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하는 걸...' 난 성훈이를 사랑한다. 바보.. 고지용... 지금 이 순간에도 어설프게 담배에 의지한 그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콜록!! 콜록!!" 어쩌면.. 난 저 녀석과 만나면.. 아니 마주쳐서도 안 되는 인연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성훈이를 내 부모보다 더 사랑한다. 나 자신보다 더.. "콜록!!" 화가 나.. 화가 난다.. 고지용!! 왜 이러는거야? 아까전에 다 정리한다고 의식까지 치뤘잖아!! 의식?? 하핫.. 그게 의식이었어? 그를 떠나기 전의 의식이었어??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많은 애인들의 의식이란 말이야? 그럼 가슴까지 정리했어야지!! 왜 저 녀석보고 넌.. 이 모양인거야? 왜 이러고 있는건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의식을 치루고 난 후인데도.. 난.. 변한 게 없다. 화가 난다. 이런 내 모습이.. 나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스럽다. "강성훈!!" 난 그에게 투자한 시간의 대가를 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를 향한 나를 토해 내 듯 그를 불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넌 내가 없어도 되겠지만. 네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난 죽어.. 그건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야.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고!!' "강성훈!!!!" 악이 바친다. 녀석의 무관심한 태도와 이제 정말 끝을 고하는 녀석에게 난...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만다. 차라리 같이 죽자.. 같은 날에 같은 공간에서.. 같이 죽자... "강성훈!!!!!" 번쩍-- 하며 무언가가 내 눈을 지배한다. 차라리 같이.. 그것은 벽난로 위에 인테리어 장식으로 부착된 사무라이 단검이였다. 어릴적 아버지께 받은 희기한 선물. 일본 만화책에 미쳐 있던 성훈이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칼날이 불빛에 반짝이는 싸늘하고 예리해 보이는 단검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머리를 흔들어 떨쳐 보려고 하지만. 눈를 돌려 성훈일 바라보는.. 나의 얼굴은 Poker face.. 성훈이가 벽개(劈開)상태로 내게.. 날라든다. "이별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차디찬 내 음성뒤로 그의 슬픈 미소를 보았다. 난.. 가슴이 찢긴 것처럼 아프다. '성훈아.. 성훈아..... 날 내치려고 하지마... 밀지마.. 너로부터 날.. 밀어내지마.. 네가 날.. 밀어 내려고 하는 곳은 절벽일 뿐이야.. 가파르고 급경사로만 가득한.. 그런 절벽일 뿐이야.. 차라리.. 날 안아줘.... 차라리... 날 안어.. 응?' + + + + + 이 밤을 지나고 나서 지용이에게 일어날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는 난감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는 성훈이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그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배고파.. 맛있는 거 해줘." 쓰린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성훈이의 눈망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내 버린 듯한 눈동자가 그의 시선에서 황급히 비껴 지나간다. 그리고 냉장고문을 열고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한다. "돼지고기 먹고 싶어. 불고기 할 줄 알지?" 돼지고기라면 질색을 하는 녀석이 돼지고기를 먹겠다 나서는 폼이 여간 불안해 보인다. 하던 일을 멈추고 지용이를 쳐다보는 성훈이가 엷은 미소를 띄며 그에게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안 하던 짓만 한다는데.." "죽을때가 가까워 졌나보지.." 지용이가 흐릿한 음성으로 옹알거리듯 내뱉는다. 딱딱하게 얼려있는 돼지고기를 꺼내려던 성훈이의 손이 멈칫한다. 다시 지용이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초점없는 그의 눈빛을 확인하고 만다. 입가에 맺혀진 싸늘한 조소도 놓혀지질 않는다. "왜, 죽으려고??" 성훈이의 질문에 입술은 좀더 차가움을 품는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럴거라고 딱히 말하는 것 같았다. "바보야, 체였으면 오래오래 살면서 나 저주나 하지 그래?" "누가 체였대?" "너, 나한테 체였잖아?" "누구 맘대로 체여?" "그럼?" "강성훈이 고지용한테 체인거 아니였어?" 그의 시선은 초점이 없다. 장난스런 말투는 크게 틀어놓은 TV속 토크쇼 말장난 같았다. 제딴엔 태연한 척 애를 쓰고 있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게끔 지용이의 모든 행동은 어색해 보인다. "성훈아.." "응?" "우리 첨 만났을때 생각나?" "교실에서.." "아니.. 정확히 교무실이었어. 난.. 생각 나는데.. 하얀색 폴라티에 노란 머리.. 무표정한 얼굴로 선생님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던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이던 쬐금한 꼬맹이.." "........" "그 쬐금한 꼬맹이가 학급비를 걷어온 반장을 노려보더라." "그래..." "그땐 쬐금한게 노려보는 것이 맘에 안들었어. 후훗..." "........" 지용이의 공허한 웃음에 맞춰 성훈이도 미소를 지었다. "성훈아.." "응.." "어릴 때 싸웠던 그 놀이터 말이야.." "응.." "거기.. 아직도 그대로 일까?" 지용이의 물음에 아무말도 않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아마.. 그대로겠지.. 아니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대단한 추억들을 소유한 듯이 시시때때로 지용이와의 일들이 더듬어 진다. 커가면서 다 잊어버리고 살던 시시콜콜했던 일까지.. 모두다.. 전부다..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의 차이점을.. 넌 찾았을까?' + + + + + 저녁식사내내 아무말도 오가질 않았다. 창고에서 꺼내 온 촛불을 밝히고 오디오 볼륨을 낮게 깔아 놓았다. 밥알을 세듯 깨작깨작거리는 성훈이에 비해 지용인 몇끼 굶은 사람처럼 세 공기를 금세 먹어 치웠다. "춤추자.." 설거지를 끝내고 들어선 성훈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물기 어린 손을 자신의 목에다가 올려놓고 그를 꼭 안아 버린다. 흘려 나오는 발라드 선율에 맞춰 작게 작게 움직인다. 성훈이의 허리를 꼭 감싸안은 지용이의 손이 성훈이의 등을 타고 올라와 그의 목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도록 만든다. "성훈아.." "응.." "저기.." "응.." "저.." "어.." "정말 사랑한다면.." "........" "정말 사랑한다면.. 정말 사랑한다면 말이야.." "........"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죽일 수 있을까?" 성훈이의 미동은 멈춰 버린다. 수십개의 드라이 아이스가 머리위로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성훈인 눈을 내리 깔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쑤셔 왔다. "사랑한다면 말이야. 많이도 사랑했다면.. 너무 사랑해서.. 떨어지기 싫다면..." "글..쎄.." 성훈인 되받을 말을 찾지 못하고 냉정함을 가장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나라면.." "오랜만에 이것저것 했더니 피곤하다.. 그만 자야겠어." 말을 막고 싶었다. 그가 할말을 듣지 않고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난. 죽일 수 있어." 자신의 목에 힘을 주는 지용이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느낀다. 오싹거리도록 싸늘한 무언가가 자신을 검어 쥔 듯한 느낌이 든다. 온 몸에 울리는 공포심에 성훈이의 심장이 박동수를 무시하고 뛰어 버린다. 하지만 성훈인 무덤덤하게 지용이의 팔에서 벗어났다. 하루 사이에 지용인 나이가 많이 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앳되게만 보였던 새초롬한 얼굴이 수척해져서는 나이든 남자의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피곤해.. 그만 자고 싶어." "사랑해.. 성훈아." 지용이의 아픔을 송두리째 받아 들이는 순간이었다. 지용이 역시 삶이 주는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보같이.. 사랑해.." "........." "너무 많이 사랑해 버렸어.." "........." "너무 많이.. 너무도 많이..." "........." "미친 짓이지.." 그리고 그가 부인하고 있는 사랑의 흔적을 엿보게 되었다. 공허하게 흔들리고 있는 그의 눈빛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 "........." "다시 한번 생각해줘.. 날 사랑하지 않아도 난.. 괜찮아.." "........." "널 보살펴 주면.. 되는거야. 난 그렇게 살면 되는 거라구.." "........." "난 바보니깐.. 괜찮아.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어..난.." "애쓰지마. 내 생각은 변치 않아.." "........." "우린 끝이야." 건조하게 말을 끝내고 성훈인 힘없이 걸음을 띠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있자.." 성훈의 목 뒤로 느껴지는 지용이의 뜨거운 눈물이 툭하니 떨어졌다. 목을 타고 흐르는 지용이의 눈물 때문에 목언저리가 간질거린다. 지용이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이제 원치 않는다고 도리질 쳤던 위안자의 가슴에 안겨 있는 것이다. 그가 줄 위안이 너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용아, 울지마. 넌 웃을때가.. 더 멋지거든..." 쓴웃음을 내뱉는다. 세상으로 그를 보내줄거라고 다짐하던 성훈이에게 현기증이 일어난다. 제길, 보내기 싫다.. '형, 나 좀 도와주라.. 응?' 자신을 안은 지용이의 손을 풀고 안방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성훈이.. 지용이의 가슴에 안겨 있으면 그 편안함과 따스함에 익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해 버린 탓이다. 주문을 외우듯 성훈인 한걸음 한걸음을 비틀거리며 내 딛는다. '난.. 잘하고 있는거야. 형때문이 아니라.. 지용이를 위해서야.. 난..' 성훈인 침울해진 지용이를 남겨두고 등을 보인다. 지용이의 삶을 넘보아선 안되는 차단된 세계라고 외친다. 깨끗하고 따뜻한.. 자신을 위해서 바꾸어진 커튼과 향기로운 커피향이 준비되어 있는 지용이의 삶을 외면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외치고 있다. 자신을 중심으로 놓고 행복이라고.. 행복할거라고 체면을 걸 그를 알고 있다. "훈아.. 사랑해." 성훈이의 살가죽으로 무언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비명도 나오지 못할만큼 깊숙이 파고들었다. 버티고 서 있던 다리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면서 성훈인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숨을 내쉬어 본다. 빨간 손을 하고 있는 지용이가 성훈이 앞에 앉아 억제된 울음소리를 들려준다. "흑..흐흐흐흐흑.." 성훈이의 얼굴을 들어올린 빨간 손 뒤로 눈물로 범벅이된 지용이가 보인다. 힘겹게 들어 올려진 성훈이의 손이 지용이의 눈물을 닦아준다.. 이상하게도 성훈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다. "짜식.. 네가 애야? 왜 울어?" "흐흐흐흑.. 흐흑.." "울지마.." "흑.. 흐흐.." "울지마.. 바보새꺄.." "흐..흐흐흐.." "지용아..." "후..나.." "고마워.." "흐흐흑..흐흐흐.." "사랑해.." 너무나 작게 들리는 성훈이의 음성에 지용이의 동공이 커다랗게 열린다. "응?? 지금 뭐라고 했어?" "널.. 사랑해." "뭐??" "사랑해..." "........" "사...랑해.." "왜.." "......." "왜 이제서야.. 그런 말을 해?? 왜!!!" "......." "왜 이제서야 그런 소릴 해!!!!!" "......." "강성훈!!!!!" "너도.." "흐.. 왜 이제 그런 말을..." "알고 있었잖아.." "......." "내가... 너도 사랑한 걸....." "왜 지금에서야 이런 말을 하는거야?? 왜 이제서야!!!!" 황홀하게 들리는 아름다운 목소리.. 성훈이에게 듣는.. 기대할수 없었던 사랑고백.. 흐릿한것도 아닌.. 자신의 눈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들려주고 있다. 성난 후회의 바람이 지용이의 가슴벽을 헐게 만든다. "네가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성훈인 거친 숨을 쉬며 미소만 지을뿐 아무런 말이 없다. "웃지마.. 웃지마.. 성훈아.." ".........." "널 찔렸어.. 널 죽이려고.. 난.." 지용이의 얼굴에 머물던 성훈이의 손이 깃털처럼 가볍게 추락한다. 멍한 표정으로 추락한 손을 바라본다. 저 새 하얀 손이 붉은 빛으로 물들여 지고 있다. "성훈아, 안돼!! 눈감지마!! 눈감으면 안돼!! 구급차 부를게.. 조금만 기다려! 넌 죽으면 안돼!!" 전화기 쪽으로 기어가려다 성훈이의 고개를 들어올리며 울부짖는 지용이. "안돼! 강성훈 숨쉬란 말이야!! 내 허락없이 죽지마!!" "..........." "강성훈!!!!" 지긋이 감겨진 두 눈 사이로 투명한 물기가 젖어 있다. 고운 두 눈 사이로 맑은 물기가 조심스럽게 떨구어 진다. 죽지마.. "성훈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성훈아... 흐흑..흐흐흐흐..." 『 그들은 초라한 둥지에 몸을 감추고 있는 새끼 짐승에 불과했다. 그들이 처음 눈을 떠서 본 것은 피흘리고 있는 형제의 상처였고, 그들이 처음 들은 것은 상처로 인해 토해내는 형제의 신음소리였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보이고 들리는 그것들에서 멀리 달아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 안에서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용기를 가질 기회마저 놓쳐 버렸다. 둥지를 박차고 떠나간 자만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였는데 그들은 너무 늦게 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자리에 멈춰서서 이제까지 걸어온 길 중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나를 되집어 보는 일에조차 무심해진 그들의 기대는 벽앞에 서 있는 꼴이 되어 버렸다. 여기가 출구냐고 외치고 싶지만 무심해진 가슴은 열릴 줄 몰랐다.』 “ 성훈이는 그 속에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은빛 속에 파묻혀 있는 나만의 성훈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는 가버리고 없었다..” 주방에 가서 가스선을 자르고 안방으로 들어섰다. 가스세는 소리는 통나무 집밖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보다 더 소란스럽게 들린다. 안방으로 들어선지 세시간이 흐르고 피비린내와 가스의 매캐한 내음으로 두 눈꺼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숨을 쉴때마다 눈앞은 흐릿해 졌고 물체들이 두세개로 겹쳐져 춤을추듯 움직였다. 오렌지빛 조명등 탓에 성훈이의 얼굴위로 음영을 드리웠다. 한가함에 지쳐 차라리 아늑한 고통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스스로에게도 별 의미가 없는 미소를 보이는 지용이. 아니 그는 행복한 사람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울음이 쏟아져 버릴 것 같다. 지용인 성훈이의 얼굴을 마주보지 않기 위해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얼굴만을 이불속에 감추고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지 못할것이란 착각에 빠지는 어린아이들의 숨박꼭질처럼. 하얀 시트로 퍼지는 붉은 강은 아름답다. "널 처음 보았을 때, 너무 이상했었어. 왜 저렇게 단단한 가면을 쓰고 있을까하고. 넌 너무 단단하게 너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거든. 그 단단한 가면을 벗기고 싶어서 너에게 싸움을 걸었는지도 몰라." ".........." "그런데.. 어느 날. 두터운 가면위에서 떨고 있는 널 보고 말았어. 바늘로 찔려도 피 한 방울 안나올 녀석이라고.. 매정한 녀석이라고.. 강한 녀석이라고 믿었던 내 신념을.. 넌 깨버린 거야." ".........." "수업시간에 사라져 버린 널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울먹이던 널 기억해." ".........." "햇빛이 쏟아지는 곳에 앉아 서글프게 울먹이던 그날을.." ".........." "넌 정말이지.. 천사같았어.." ".........." 성훈이의 차가운 손이 지용이의 손에 의해 미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없이 눈감은 성훈이의 옆얼굴을 쳐다보면서 지용인 힘없이 웃는다. "많이 힘들었어.. 성훈이 너.. 많이 아파했다는 것도 알아.. 그러니깐.. 이제.. 좀 쉬어.." ".........." "널 혼자 두지 않을거야. 나 옆에 있잖아.." ".........." "무서워하지마.. 곧.. 갈게.." 두 눈을 꼭 감은 성훈이의 낯빛은 생소하리 만큼 행복해 보인다. 성훈이의 입술위로 작게 입을 맞추고 그의 길고 부드러운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하얀 피부가 푸른빛이 돈다. "다음 생엔 나랑만 사랑하자.." "........." "너와 나만.. 사랑하면서 살자.." "........." "아무도 끼어들수 없는 공간에서.. 단둘이 예쁘게.. 아주 예쁘게만 살자.." "........." "나랑만... 알았지?" 침대옆 탁자에서 담배 한 개피와 지퍼라이터를 든 지용이의 눈동자에 큐빅을 박아 놓은 듯 반짝거렸다. 담배를 입에 물고 옹아리를 하는 듯 성훈이가 자주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린다. "Good-Night Kiss로 잘 자라 말하고 혼자 돌아오는 밤이면 또 내일 다시 사라져 버릴 꿈일것만 같아 뒤돌아 그댈봐요.." 비음이 섞인 그의 음성은 애절하고 슬프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찡하게 울려온다. ".. 담배 한대만.. 피고..." 지용이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축축하게 묻어 있는 것만 같다. 슬픔에 젖어 있는 그의 노래만큼 그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깐.... 지용인 잠들어 있는 척 숨마저 고르게 쉰다. 울고 있는 것일까? 달칵------------- -------- ---- -- - 그러나....... 그의 음성도.. 그의 미소진 얼굴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들이 가졌던 모든 것은.. 판도라의 상자속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은.. 거짓속에서 존재한다.. 뭉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섬광속에서..... ........... 아직... 찾지 못했는데.. " 아침마다 커피 걸려지는 소리에 눈을 뜨고 약간 열어놓은 창틈사이로 아카시아 향이 들어오고.. 옥신각신 다투며 일구어 놓은 뜨락에선 토끼들이 뛰어 놀고... 하얀 셔츠를 입고 부드럽게 웃는 너의 입술이 나의 잠을.. 깨워주고.. 그리고.. 사랑해............................................ " - The End - P.S: 놈의 사랑을 비난할 자는 없다. 그런데 왜 거짓을 입고 있는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상소년의 영상실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O.N.E] 영상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