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날....
음악일기의 첫 이야기는 윤형순 님의 산문집 '음악 귀로 마시는 그 황홀한 술'에 나오는 '어느 피아니스트의 슬픈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군에서 제대한 후 도서관에서 읽은 음악 산문집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그 때의 감동은 메마른 저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 놓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작은 슬픔의 이야기를 저와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40년 만에 무대에서 부활 시킨 전설..
어빈 니레지하치(Ervin Nyiregyhazi),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호로비치나 루빈스타인 이상으로 떠들썩할 수도 있었던 그 이름이 어둠 속에 붇혀 버리고 만 것이다.
4세 때에 피아노를 비우기 시작하여 6세 때에는 스스로 작곡한 피아노곡을 최초로 공개 연주했고, 12세 때에 이미 베를린 필과 데뷔 공연을 가졌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놀라기에는 충분하다. 그 후로 청중 앞에 나타날 때마다 충격을 주었고, 화재를 불러일으켰던 그는 마치 신동의 대명사 같은 존재였다.
암스테르담 심리학 연구소의 소장 게자 레베즈 박사는 그를 모델로 삼아 『음악신동의 심리학』이라는 저서를 펴내 그의 초능력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기억력, 초견과 즉흥능력, 그리고 조바꿈이나 작곡능력에 있어 어린 시절의 니레지하치는 모차르트에 견줄 만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라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했다기보다는 선험적으로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났다."고 레베즈 박사는 이야기한다. 생이지지의 놀라운 신동이었던 셈이다.
이런 능력은 지녔던 그가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호기심 못지 않게 망각의 재능도 동시에 타고났고, 한때 뭇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던 니레지하치는 이제 망각의 깊숙한 늪 속에 잠들어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서른이 될까말까 하는 나이에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니 몇십 년이 지나고 나서 누가 그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부당하게 사라져버렸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어듬의 한구석에서 비극의 베일에 뒤엎인 채로도 그의 빛이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리스트의 재래'로 격찬받아
1903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어빈 니레지하치는 6세 때에 하이든의 소나타, 그리그의 서정적 소품집, 쇼팽의 왈츠, 그리고 자작의 피아노 소품을 연주하여 데뷔했다. 그의 명성은 곧 외국에도 퍼졌고, 1911년 8세때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초빙을 받아 버킹검 궁의 메리 여왕 앞에서 어전 연주회를 가졌다. 바로 그 때부터 그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는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어린 자식의 명성이 높아지자, 세속적인 성향과 탐욕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던, 어머니는 자식을 돈벌이를 위한 절호의 수단으로 생각하려 했고, 어린 니레지하치는 순수한 꿈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나 아들의 편을 들어주던 아버지가 1914년,그의 나이 11세에 세상을 떠나자, 니레지하치와 어머니의 갈등은 더욱 심화될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또하나의 불행은 12세 때에 리스트를 알게 된 일이다. 그때까지 바흐와 베토벤을 주로 연주하고 있었던 그에게 바이올리니스트 페렌츠 베체이는 가끔 리스트도 좀 연주하라고 일렀다. 그때부터 그는 리스트에 아주 깊숙히 빠져버렸고, 바로 그 일이 그의 비극을 재촉하는 악재가 되고 말았다.
1918년 15세 때에 아르투르 니키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가 함께 리스트의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베를린의 신문들은 '리스트 이래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라고 격찬했다. 1919년에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거장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 대신 오슬로에처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노르웨이를 떠뜰썩하게 했고, 그의 선풍적인 인기는 그 다음 해에 카네기홀 데뷔 공연으로 불붙어 갔가. 그의 카네기홀 공연에 대해 신문에서는 리듬과 강약의 처리가 약간 자의적인 데가 있다고 비판하는 기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사는 그에게 '리스트의 재래'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런가 하면 카네기홀 공연에 이어진 보스턴 공연에 대해 올린 다운즈는 "지금까지의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더 아름다운 톤으로 더욱 고귀하고 더욱 시적인 음악을 만들어냈다." 고 평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듯 곳곳에서 선풍적인 열광을 불러일으켰던 그가, 때로는 굶주리고 때로는 지하철에서 밤새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고 말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도대체 현실감각이 없는 피아니스트여서, 그의 계약금이 얼마이며 그것이 누구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버렸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공연에 따른 수입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여전히 상상할 수도 없는 궁색한 처지에서 허덕이게 되자,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 그는 어느 여인의 유혹에 빠져 들었다. 11세나 손위인데다 이미 여러 차례 결혼경력이 있었던 메리 켈렌이라는 그 여인은 팔을 넓게 벌리고 그를 안아주면서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하지나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모든것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그녀가 노린 것은 오직 그가 벌어들이는 돈,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그녀로부터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의 함정을 탈출하면 또 하나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어 결국 그가 피해갈 곳이라고는 아무 곳도 없었다. 더군다나 리스트에게만 너무 집착하여 레퍼토리를 별로 넓히려고 하지 않았던 그의 고집때문에 대부분의 흥행사들은 그를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점점 더 사기꾼들의 희생물이 되어갔고, 어떤 사기꾼은 서커스로 그를 끌고가기도 했다. 누구든 최근에 작곡된 악보를 가지고 오면 초견으로 즉석에서 그것을 연주하는 묘기를 보여주는 희한한 쇼였다. 물론 니레지하치는 그 일을 해냈지만, 그런 희극적인 곡예에 환멸을 느껴 마침내 그는 음악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죽어가는 아내를 위해 40년만에 무대에 서다
그후 그는 뉴욕의 부두에서 하역 노동자로 일하기도 하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부랑자로 전락하여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면서 참담하게 살아갔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왕년에 무대에서 화려한 각광을 받았던 피아니스트였다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니레지하치가 홀연히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로부터 40여 년후인 1973년 5월 6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뒷거리에는 '리스트의 재래, 세기의 피아니스트 니레지하치 40년 만에 무대에 서다'라는 초라한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아무도 없었다. 설령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그가 그간 부두 노동자로 일하기도 하고 빈민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고 누군들 짐작할 수 있었으랴.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오랜 침묵 끝에 다시 무대에 서서 피아노를 치게 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었다. 극히 불우했던 시절, 그는 엘시 스완이라는 여인으로부터 조그만, 그러면서도 따뜻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다음 그는 일흔 아홉의 엘시 스완이 누구하나 돌봐줄 사람도 없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그녀를 돕기로 했다. 다만 그 괴귀한 여인에게 까닭없이 도움을 주겠다면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봐 좀더 당당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녀가 아내라면 남편이 아내를 돕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구혼을 했고, 그렇게 해서 일흔 살의 그는 여든 살의 병든 엘시를 아내로 맞았다.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 그것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40년 만에 겨우 몇 번의 리허설을 거쳐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나 그 연주회는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하나 뜻밖으 일이 거기서 일어나게 된다. 국제 피아니스트 협회의 미국 서부지역 지부장이었던 테리 맥네일이 우연히 그 연주회의 한구석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물론 니레지하치라는 이름을 전혀 몰랐다. 다만 40년 만에 다시 부대에 선다는 희한한 피아니스트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발길이 이끌렸을 뿐이다. 그런데 맥네일은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그 연주에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두개의 전설>이 막 연주되려고 했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무릎위에 카세트 녹음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 후 테리 맥네일은 알리사 데 라로차, 개릭 올슨, 조지 볼렛 등엑 그 녹음을 들려주어 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뉴욕 타임즈』의 음악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20세기까지 살아남은 진정한 19세기 피아니스트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그 기적적인 연주를 녹음을 통해서나마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라고 흥분했다.
숀버그의 그런 글 때문에 니레지하치는 다시 세상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CBS가 재빨리 그의 연주를 녹음하여 한 장의 음반을 냈다. 그 반응이 좋아 다시 그의 연주를 더 녹음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는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다. 엘시 스완이 눈을 감아버린 다음 그에게는 더 이상 연주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눅음이 무엇 때문에 필요했으랴..
최근에 델텍에서는 1973년 있었던 연주회의 실황녹음을 레코드로 내놓았다. 카세트로 녹음되어 비록 그 음질 상태는 형편없다해도 <두개의 전설>은 니레지하치의 모든 것을 엿보기에 별로 부족한 점이 없다.
그 당당함, 그 열기, 그 흡인력을 우리는 니레지하치가 아닌 어느 연주자를 통해서 다시 못불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그연주를 눈물없이 들을수 있을 것인가? 40여 년 동안 피아노를 전혀 치지 않았던 피아니스트가 부두 노동자의 굳어져버린 손끝으로, 외로움에 지치고 노쇠하여 스스로의 몸을 지탱하기도 어려운 노구로 어떻게 이런 연주를 한단 말인가?
우리 지상에는 간혹 기적이 있다. 그리고 니레지하치의 이 연주야 말로 바로 그 기적의 소산, 그 기적의 구원이다. 니레지하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묻고는 한다.
"그는 아직 살아 있는가?" 그에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는 또다시 세상을 등져버렸으니까."
나는 아무래도 몇 년 전(1987년 4월 8일) 그가 쓸쓸하게 숨지고 말았다고 말하기가 싫은 것이다.